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8화 : 서량의 풍운아 다시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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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8화 : 서량의 풍운아 다시 일어나다


서량의 풍운아 다시 일어나다

문득 성 위에서 한 장수가 칼을 빼 유괴를 찍은 뒤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유비의 장졸들은 그가 열어준 성문으로 물밀듯 쳐들어갔 다. 유순도 더는 낙성을 지킬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서문을 열고 달 아나 제 아비가 있는 성도로 가버렸다.

유비는 방을 붙여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한편 유괴를 죽인 장수를 찾았다. 그 장수는 바로 탁응과 함께 새로이 성도에서 온 장 익이었다. 유비는 장익에게 무거운 상을 주고 아울러 다른 장수들에 게 골고루 상을 내렸다.

대강 수습이 끝나자 공명이 다시 유비에게 말했다.

“낙성은 이미 떨어졌고 성도 또한 눈앞에 있으나 두려운 것은 그 밖의 여러 고을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미리 다독여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익과 오의는 조운과 더불어 외수, 정강, 건위 등에 딸린 주군을 어루만지게 하고 엄안과 탁응은 장비 와 더불어 파서, 덕양 등이 딸린 주군에 보내 그 군민을 달래게 하십 시오. 그런 다음 군사를 성도로 돌려 일제히 나간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유비는 장비와 조운에게 영을 내려 항복한 촉장들과 더불어 성도를 뺀 나머지 여러 주군을 평정하러 보냈다. 그들이 떠나자 공 명이 다시 남은 항장들을 불러 물었다.

“우리 앞에는 어떤 관애가 있는가?”

“면죽이 많은 군사가 지키는 곳입니다. 그 면죽만 뺏는다면 성도 를 얻는 일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것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항장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곧 여 럿과 더불어 면죽으로 군사를 낼 일을 의논했다. 문득 법정이 나서 서 유비에게 말했다.

“이미 낙성이 깨뜨려졌으니 바야흐로 촉 땅의 형세는 몹시 위태 롭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의로 이곳 백성들이 주공을 따 르게 하고자 하신다면 잠시 군사를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가 한 통 글을 써서 유장에게 올리고 이해로 달랜다면 유장은 절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효직(直)의 말씀이 매우 옳은 듯하오.”

공명이 그렇게 찬성하고 나왔다. 유비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법정이 유장에게 쓴 편지를 지름길로 성도에 전하도록 했다.

한편 낙성에서 간신히 몸을 빼낸 유순은 성도로 돌아가 그 아비 유장을 만났다. 낙성이 떨어진 일과 여러 장수가 죽거나 항복한 일을 낱낱이 전하니 유장은 몹시 놀라 벼슬아치들을 모아놓고 앞일을 의논했다. 종사 정탁이 한 계책을 말했다.

“지금 유비가 비록 우리 성을 치고 땅을 뺏기는 했지만 그 군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 땅의 선비와 백성들은 아직 그를 따르지 않고, 들에 있는 곡식에 의지할 뿐 그 군대에는 치중이 없습 니다. 파서와 재동의 백성들을 모두 부수 서쪽으로 옮기고, 그 창고 는 물론 들판에 있는 곡식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여 가만히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 다. 싸움을 걸어도 받지 않으면 가진 곡식과 물자가 없는 적은 백 일 을 넘기지 못하고 절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때 틈을 보아 들이치면 유비를 사로잡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유비가 들었으면 가슴이 철렁했을 계책이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유장은 듣지 않았다.

“그렇지 않소. 내 듣기로 적을 막아 백성들을 평안케 한다는 말은 있어도 거꾸로 백성들을 내몰아 적에 대비한다는 말은 없었소. 공의 말은 따를 만한 계책이 못 되는 듯싶소이다.”

그렇게 퇴짜를 놓으니 의논은 절로 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서서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이 나서서 저 말을 하여 한참 시끄러운데 문득 법정이 글을 보내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유장은 그 글을 가져온 사람을 불러들이게 하고 글을 받아 피봉을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대략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지난날 주공 뽑으심을 받아 형주와 화친을 맺으러 갔던 법정입 니다. 뜻밖에도 주공의 좌우에 사람이 없어 일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래도 지난 은의를 저버릴 수 없어 한 말씀 올립 니다. 지금 형주[劉備]는 아직도 익주[劉]에 대한 옛정을 그대로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족친 간의 우의도 잊지 않으시고 계십니다. 만약 주공께서 선연히 마음을 돌리시어 형주에 귀순하신다면, 헤아 리건대 그리 박한 대접을 받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가볍게 듣 지 마시고 세 번 살피시어 이 일을 결단하십시오.’


그 같은 법정의 글을 읽은 유장은 몹시 노했다. 그 자리에서 편지 를 찢어발기며 욕을 퍼부었다.

“법정은 주인을 팔아 영달을 사려는 자다. 은혜를 잊고 의를 저버 린 역적 놈이 무슨 돼먹잖은 소리냐!”

그러고는 편지를 가져온 사자를 성 밖으로 내쫓은 뒤 아내의 동 생 되는 비관(費觀)에게 군사를 주어 먼저 면죽으로 보냈다. 성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면죽이 다른 어떤 곳보다 중요하다는 것쯤은 유장 도 알고 있었다.

비관은 떠나기에 앞서 함께 데려갈 인재 한 사람을 유장에게 천 거했다. 남양 사람으로 이름은 이엄(李嚴)이요, 자는 정방(正方)이라 했다. 유장이 그 천거를 받아들이니 비관은 그날로 이엄과 더불어 군사 삼만을 골라 면죽을 향해 떠났다.

이때 익주 태수는 동화(和)라는 사람이었다. 남군 지강이 고향 으로 자는 유재(幼宰)라 썼는데 자못 식견이 높았다. 그 동화가 유장에게 글을 올려 한중의 군사를 빌려 쓰자고 했다. 그걸 읽은 유장이 동화를 불러들여 물었다.

“장로와 나는 대를 이은 원수지간이다. 그런데 어찌 구해주려 하겠느냐?”

“그가 비록 우리와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라고는 하나 유비가 군 사를 이끌고 낙성까지 와 있으니 사태는 매우 위급합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우리가 망하면 그쪽도 성하지 못할 것이니 이해를 따져 달래보도록 하십시오. 모르긴 해도 장로는 틀림없이 우 리 말을 따를 것입니다.”

동화가 그렇게 대답했다. 유장도 거기까지 듣고 나자 드디어 마음 이 정해졌다. 곧 글 한 통을 닦아 한중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 같은 유장의 글이 뜻밖의 인물을 끌어들였으니 그가 곧 마초였다.

전에 조조에게 크게 패한 마초는 쫓기던 끝에 오랑캐인 강족의 땅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숨어지낸 지 두 해 남짓, 마침내 강병(兵) 과 동맹을 맺게 된 그는 그들과 함께 농서의 고을들을 휩쓸기 시작 했다. 조조로 하여금 스스로 수염을 자르고 달아나게 만든 적까지 있는 마초에 날래고 거친 강병이 따르니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배겨 나는 성이 없었다. 그러나 꼭 한군데 끝내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곳 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기성이었다.

그때 기성을 지키고 있는 조조 쪽의 장수는 위강韋康)이었다. 간 신히 마초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오래 버틸 자신이 없는 위강은 여러 번 하후연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 나 하후연은 조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도 구원병이 오지 않자 위강도 마침내는 마 음이 흔들렸다. 여럿을 불러놓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마초에게 항복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여러분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자 곁에 있던 참군 양부(楊阜)가 울며 말했다.

“마초는 임금을 거스르는 역적의 무리인데 어떻게 그에게 항복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위강은 양부가 조조에게 천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위강을 더 크게 보아 양부보다 윗자리에 앉혀놓았던 것인데, 위강은 그 값을 못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고 어쩌겠는가?”

그렇게 되물으며 양부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더니 끝내는 성문 을 활짝 열고 마초에게 항복해버렸다.

위강은 마초가 자기를 후하게 대해줄 줄 알았으나 생각과는 딴판 이었다. 성안에 들어온 마초는 오히려 크게 성난 얼굴로 위강을 꾸 짖었다.

“너는 일이 급해진 이제서야 항복을 하는구나. 틀림없이 진심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는 무사들에게 영을 내려 위강을 비롯하여 항복한 기성의 벼슬아치 마흔 명 남짓을 모두 목 베게 했다. 그때 양부는 다행히도 항복하러 간 벼슬아치들 틈에 끼어 있지 않아 죽음을 면했다. 그런 데 누군가 그걸 알고 마초에게 고자질했다.

“양부는 위강이 항복하려는 것을 말린 자입니다. 마땅히 목을 베야 합니다.”

마초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된다. 그 사람은 의리를 지켰으니 목을 벨 수 없다!”

그러고는 양부를 다시 참군으로 썼다. 양부는 군소리 없이 마초의 벼슬을 받더니 다시 양관과 조구(趙衢) 두 사람을 천거했다. 마초는 기꺼이 그 천거를 받아들여 두 사람을 모두 군관으로 삼았 다. 그러자 양부가 또 다른 청을 했다.

“제 아내가 임도 땅에서 죽었습니다. 바라건대 제게 두 달만 주시 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장사 지내고 오겠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상할 수도 있었으나 마초는 이번에도 기 꺼이 허락했다. 양부의 굳건한 인품에 마초가 그만큼 반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에 마초의 손아귀를 벗어나 임조로 가던 양부는 도중에 역성을 지나게 되었다. 역성에는 양부의 고종형제인 무이장군(撫彛將軍) 강 서)가 있었다. 강서의 어머니는 양부의 고모로 그때 나이 여든 두 살이었다. 처음부터 먹은 마음이 있어 강서의 집을 들른 양부는 먼저 늙은 고모를 찾아보고 울며 말했다.

“저는 성을 맡아 지켰으나 끝내 지켜내지 못했고, 주장(將)이 죽 었으나 함께 죽지도 못했습니다. 실로 부끄러워 고모님께 낮을 들 수가 없습니다. 마초는 임금을 거역하고 함부로 태수를 죽인 자라 기성의 사람 치고 그에게 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형님께서는 역성에 이렇게 자리 잡고 계시면서도 역적을 칠 마음이 전혀 없으시니 이 어찌 신하 된 이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쏟는데 바로 피눈물이었다. 그 말을 들은 강서의 어머니는 곧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위사군이 마초에게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너의 죄다. 알

고나 있느냐?”

그러고는 다시 양부를 돌아보며 따지듯 물었다.

“너는 이미 마초에게 항복하여 그 녹을 먹은 바 있다. 그런데 어 찌하여 이제 다시 그를 치려 하느냐?”

“제가 역적을 따르고 있는 것은 그렇게라도 목숨을 지켜 죽은 위 사군의 한을 풀어주려 함입니다.”

양부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강서도 덩달아 자신이 그때껏 움 직이지 않은 까닭을 머뭇머뭇 밝혔다.

“마초는 영용(勇)하기 짝이 없는 자입니다. 섣불리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양부가 처음부터 강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형님,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초는 용맹은 있어도 꾀가 없어 도모 하기 쉽습니다. 거기다가 저는 이미 양관, 조구와 함께 남몰래 약조 를 맺어두었으니 만일 형님께서 군사를 일으키시기만 하면 그 둘은 반드시 안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강서의 어머니가 다시 아들을 몰아세웠다.

“너는 얼른 일을 꾀해보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릴 테냐? 또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충의를 위해 죽는다면 그 죽음은 옳은 자리를 찾은 셈이다. 부디 내 걱정일랑 하지 마라. 그 때문에 네가 이 아이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죽어 네 걱정거리를 없애주마.”

늙은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강서도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 다. 곧 평소부터 가깝게 지내던 통병교위 윤봉(尹奉)과 조앙(趙昻)을 불러 마초를 칠 의논을 했다.

그중에서 조앙은 아들 조월(趙月)이 마초의 비장(裨將)으로 있었 다. 강서의 부름을 받아 가서 함께 마초를 치기로 하기는 했으나 정 작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적잖이 어지러워 아내 왕씨(王氏)를 보 고 말했다.

“나는 오늘 강서, 양부, 윤봉 세 사람과 마초를 쳐서 위강의 원수 를 갚아줄 의논을 했소. 그런데 우리 아들 월(月)이가 마초를 따라다 니고 있어 실로 걱정이외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마초는 틀림없이 그 아이부터 먼저 죽일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조앙의 아내 왕씨는 여느 아낙과 달랐다. 함께 걱정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리 높여 남편을 깨웠다.

“군부(君)의 크나큰 욕을 씻어주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아까울 게 없습니다. 하물며 자식 하나 잃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아 들을 생각해 이번 일에 끼지 않으신다면, 제가 먼저 죽어 세상의 비 웃음을 면하겠습니다.”

이에 조앙도 아들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초를 치는 일에 나 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이었다. 네 사람은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강서와 양부는 역성에 자리 잡고 조앙과 윤봉은 기산(山)에 진을 쳤다. 조앙의 아내 왕씨도 가만있지 않았다. 남편이 있는 기산을 찾아가서 가졌던 패물과 비단을 판 돈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운을 돋워주었다.

한편 마초는 강서와 양부가 윤봉, 조앙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다 는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곧 조앙의 아들 조월을 끌어내 목을 벤 뒤 방덕과 마대에게 모든 군마를 끌어내게 해 여성으로 달려갔다. 강서와 양부도 기죽지 않고 군사들과 더불어 성을 나왔다. 양쪽 군대가 둥그렇게 진을 쳐 맞선 가운데 강서와 양부가 흰 갑옷을 입 고 나와 마초를 꾸짖었다.

“임금을 거역하고 의를 저버린 역적 놈아. 어서 목을 내놓아라!” 

하지만 싸움이 의기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부와 강서의 외 침에 크게 노한 마초가 대꾸고 뭐고 없이 바로 군사를 몰아 짓쳐드 니 누가 그 기세를 꺾어낼 수 있겠는가. 강서와 양부의 군사는 이내 깨강정 으깨지듯 부숴져 달아나기 바빴다.

마초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군사를 휘몰아 강서와 양부를 뒤쫓았 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덮쳐 왔다. 강서와 양부의 위급을 구하러 온 윤봉과 조앙이었다.

마초는 얼른 군사를 돌려 윤봉과 조앙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이 번에는 달아나던 강서와 양부가 되돌아서 덤볐다. 앞뒤에서 협공을 받아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볼 겨를이 없어진 마초의 군사들은 차차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다시 옆구리를 비스듬히 찔러오듯 한 떼의 군사가 마초군을 덮쳐왔다. 그때서야 겨우 조조의 허락을 받아낸 하후연이 대군을 이끌고 마초를 쳐부수러 온 길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마초라고 하지만 그렇게 세 갈래의 군마에 에워싸이고 나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곧 형편없이 뭉그러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쫓긴 끝에 마초가 기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이었다.

“성문을 열어라!”

지친 마초가 억지로 목청을 짜내 소리쳤다. 그러나 성문은 열리지 않고 난데없이 성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이 무슨 짓들이냐? 똑똑히 보아라. 나, 마초가 왔다.”

성안의 군사들이 무얼 잘못 본 줄 알고 마초가 더욱 소리 높여 외 쳤다. 그러자 화살비가 그치더니 성벽 위에 양관과 조구가 나타나 마초를 꾸짖었다.

“이놈, 마초야! 너는 천명을 거슬러 나라의 성지를 빼앗고, 그 관원 을 죽인 역적이다. 이제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니 똑똑히 보아라!” 그러고는 먼저 마초의 아내 양씨를 끌어내 마초가 보는 데서 목을 벤 뒤 그 목을 성벽 아래로 던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울며불 며 끌려나온 마초의 어린 아들이 차례로 목이 떨어지고, 마초의 가 까운 피붙이 이십여 명도 모두 목만 마초의 발아래 떨어졌다.

사람이 너무 참혹한 지경에 빠지면 고함도 욕설도 뱉을 기력이 없는 법이다. 마초는 그 끔찍한 광경에 숨어 막히고 가슴이 터질 듯 해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쫓던 하후연의 대군이 다시 등 뒤를 덮쳤다. 참으로 모진 게 사람의 목숨이었다. 마초는 하후연의 군세가 큰 걸 보고 싸울 엄두도 못 낸 채 방덕, 마대와 더불어 한 줄기 길을 열어 달아났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살아 아내와 자식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내몰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겨우 하후연의 추격을 뿌리치고 나니 이번에는 강서와 양부의 군 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마초는 이를 악물고 그들과 부딪쳐 뚫고 나갔다. 그런 마초의 눈에서는 그대로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강서와 양부의 추격은 벗어났으나 아직도 끝은 아니었 다. 윤봉과 조앙의 군사가 또 마초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날 길이 없는 마초는 이번에도 악귀 같은 형상으로 뚫고 나가는 길을 택했다. 다행히 마초 자신은 뚫고 나갈 수 있었으나 장졸들이 모두 그 같 지는 못했다. 윤봉과 조앙의 추격을 벗어나고 헤어보니 마초를 따르 고 있는 것은 겨우 오륙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쫓기는 사이 낮이 가고 새로 날이 어두웠다. 마초는 밤새 도록 달리다가 날 샐 무렵 역성에 이르렀다.

여성은 강서와 양부가 근거 삼은 땅이라 대부분의 군사는 그 둘 을 따라 성을 나가고 없었다. 마초는 그 틈을 타기로 하고 성문 앞으 로 가서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우리가 돌아왔다.”

별로 많지 않은 군사가 대담하게 성문을 두드리자 성문을 지키던 장수는 틀림없이 자기편이 돌아온 줄 알았다. 별 까다로운 확인 없 이 성문을 활짝 열어 마초 일행을 맞아들이고 말았다.

뜻밖으로 손쉽게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 마초는 성문 안쪽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무자비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했다. 성문을 지키던 강서의 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죄 없는 백성들마저 눈에 띄는 대 로 모조리 죽여버렸다.

마초와 그 수하들이 무서운 피바람을 일으키며 역성을 쓸다 강서 의 집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이 뒤집힌 마초는 강서의 늙은 어머니 부터 끌어내게 했다. 그녀는 끌려나와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 이 오히려 마초를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더욱 성이 난 마초는 스스로 칼을 뽑아 강서의 어머니를 베어 죽 이고 이어 윤봉과 조앙의 전가족도 늙은이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몰살시켰다. 조앙의 아내 왕씨만이 그때 남편의 군중에 있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았다. 마초의 자취를 더듬어 역성까지 따라온 하후연이 대군을 풀어 역성을 에워쌌다. 마초는 자기들의 힘만으로 는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성을 버리기로 했다. 한군데 포위가 느슨한 곳을 매섭게 뚫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한 이십 리쯤이나 달렸을까, 문득 한 떼의 군마가 마초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다름 아닌 양부였다. 양부를 본 마초는 분 노와 원한으로 두 눈이 시뻘게졌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눈앞 에서 죽인 것은 양관과 조구였지만, 이번 일의 발단은 모두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양부를 산 채로 갈아마셔도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 다. 마초는 자기편의 군세가 형편없는 것도 잊고, 부드득 이를 갈며 말 배를 찼다.

마초가 창을 꼬나들고 양부를 무섭게 덮쳐오자, 양부의 일곱 형제 가 모두 양부를 도우러 달려 나갔다. 이어 양부의 후군도 머릿수만 믿고 밀려왔으나 그들은 방덕과 마대가 맡았다. 방덕과 마대는 겨우 오십여 기만 거느리고 양부의 후군이 주인 마초를 덮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덕분에 마초는 양부와 그 일곱 형제들을 상대로 한 싸움에 있는 힘을 다 쏟을 수 있었다. 비록 하나와 여덟이 어울린 싸움이었으나 양부와 그 일곱 형제는 마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신들린 듯한 마 초의 창질에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양부도 다섯 군데 나 창에 찔린 채 위급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마초가 마지막 한 창으로 양부를 꿰어놓으려고 창을 꼬나 잡았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함성이 일며 하후연이 다시 대군을 이끌 고 뒤쫓아왔다. 마초는 분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양부를 버려두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마초를 따르는 것은 방덕 과 마대를 비롯한 예닐곱 기뿐이었다.

마초를 멀리 쫓아버린 하후연은 이어 마초 때문에 어지러워진농 서 여러 고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 다음 강서 와 양관, 조앙 등에게 땅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다친 양부는 수레에 실어 허도로 돌아갔다.

조조는 양부의 공을 크게 추키며 그를 관내에 봉했다. 양부가 조용히 사양했다.

“이 양부는 난리를 막은 공도 없고 절개를 지켜 죽지도 못했습니 다. 마땅히 법에 따라 처단돼야 하거늘, 어떻게 벼슬까지 받을 수 있 겠습니까?”

조조는 그런 양부를 더욱 갸륵히 여겼다. 기어이 관내후로 봉하여 자기 곁에 두었다.

한편 겨우 하후연의 추격을 벗어난 마초는 갈 길이 막막했다. 데리고 온 강병들을 모두 잃어 강족의 땅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 렇다고 달리 의지할 만한 친분이 있는 곳도 없었다.

마초는 방덕, 마대와 의논 끝에 우선 한중의 장로에게 의지해보기 로 했다. 자기를 필요로 하면서도 다루기에 만만한 인물로는 장로밖 에 없다고 보아 내린 결정이었다.

생각대로 장로는 마초가 찾아가자 몹시 반겼다. 마초 같은 인물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서쪽으로는 전부터 탐내온 익주를 삼킬 수 있고, 동쪽으로는 은근히 겁나던 조조에게도 맞설 수 있다 고 믿은 까닭이었다.

“내 딸을 마초에게 주어 그를 사위로 삼는 게 어떻겠는가?” 

어떻게든 마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생각으로 장로가 여럿을 모 아놓고 물었다. 대장 양백(楊柏)이 그런 장로를 말렸다.

“마초의 아낙과 자식들이 이번에 참변을 당한 것은 모두 마초가 너무 모질게 남을 해친 탓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주공께서는 따님을 마초에게 보내려 하십니까?”

그 말을 듣자 장로도 가슴이 섬뜩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초의 전 아내가 그랬다면 새 아내가 될 자기 딸 또한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 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에 장로는 마초를 사위로 삼을 마음을 버리고 그저 귀한 손님으로만 대접했다.

그런데 어떤 입빠른 사람이 있어 그날 거기서 있었던 일을 마초 에게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마초는 몹시 성이 났다. 잘하면 장로의 사위가 되어 한중 땅을 가로챌 수도 있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양백이 가로막아버린 까닭이었다. 마초는 이를 갈며 언제든 때만 오면 양백을 죽여버리리라 별렀다.

양백이라고 눈과 귀가 없을 리 없다. 들리는 소문과 자기를 보는 마초의 험악한 눈초리로 그 같은 마초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형 양송 (楊松)과 의논하여 그 역시 때만 오면 마초를 없애버리려 했다.

유장이 사람을 보내 장로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바로 그럴 즈음 이었다. 유장에게 해묵은 감정이 있는 장로는 한마디로 그 청을 거 절하고 사신을 내쫓았다. 그러나 유장은 단념하지 않고 이번에는 황 권(黃權)을 보내 다시 구원을 청했다.

황권은 짐작이 있는 사람이었다. 장로를 만나기 전에 장로의 신임 을 받고 있는 양송을 먼저 찾아보고 말했다.

“동천[漢中]과 서천[益州]은 실로 입술과 이 같은 사이라 하겠습니 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우리 서천이 부서지면 동천 또한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 군사를 내어 우리를 구원해주 면 우리는 그 보답으로 스무 고을을 떼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송은 기꺼이 황권을 장로와 만나게 해주었다. 서 천을 도와 얻을 이득도 이득이려니와, 잘 되면 미덥잖은 우리에 가 두어놓은 호랑이 같은 마초도 멀리 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장로 또한 황권의 말을 듣자 어미 죽인 원수도 잊고 기쁜 낯빛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황권의 말이 이치에도 맞을뿐더러 새로이 땅을 스무 고을이나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두말 않고 황권의 말을 따르려 하는데 파서 사람 염포()가 나서서 말렸다.

“유장과 주공은 대를 이은 원수지간입니다. 지금 일이 급해 구원을 청하며 거짓으로 땅을 떼어주겠다는 것이니,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때였다. 문득 계하에서 한 사람이 내닫듯 나서며 소리쳤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바라건대 군사 오백만 주십시오. 가서 유

비를 사로잡고 유장이 약속한 땅을 떼어 받아 돌아오겠습니다.” 

모두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마초였다. 장로도 마 초라면 넉넉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기꺼이 그의 청을 허락했다. 먼저 황권을 샛길로 돌려보내고 이어 마초에게 군사 이만을 내주며 서천으로 달려가 유장을 구해주게 했다.

그때 마초의 장수 방덕은 병이 나서 함께 갈 수 없었다. 장로는 방 덕 대신 양백을 감군(監軍)으로 삼아 마초와 함께 떠나게 했다. 장로 로서는 잘한다고 한 짓이었지만 실은 개와 고양이를 한 배에 태운 격이었다.

마초가 아우 마대와 의논하여 떠날 즈음, 유비의 군마는 낙성에 머물러 있었다. 법정의 글을 가지고 서천으로 갔던 사자가 돌아와 유비에게 알렸다.

“유장은 편지를 발기발기 찢고 저를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탁度)이란 사람은 유장에게 우리와 싸울 계책까지 올렸 는데, 그게 자못 그럴듯했습니다.”

“어떤 계책인가?”

“들판이나 골짜기에 있는 곡식은 물론 곳간과 광에 있는 곡식까 지도 모조리 태워버린 다음, 파서의 백성들을 모두 부수 서쪽으로 옮겨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마다 둘러 있는 개울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아 싸우지 않고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는 백 일도 안 돼 절로 물러갈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와 제갈공명은 다 같이 크게 놀랐다.

“만약 그 말대로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위태롭게 되어버린다. 큰일이로구나.”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걱정하는데 문득 법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계획이 비록 모지나, 유장은 그걸 쓸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오래 유장을 섬긴 적이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라 조금 마음이 놓 이기는 해도 유비는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 나지 않아 다시 소식이 들어왔다.

“유장은 백성을 마소 몰듯 내몰 수 없다 하여 정탁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공명도 그 소식에 힘을 얻었는지 유비에게 싸움을 서두르도록 권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군사를 내어 면죽을 빼앗도록 하십시오. 그곳만 우리 손에 들어오면 성도 또한 쉽게 뺏을 수 있습니다.”

이에 유비는 황충과 위연에게 군사를 나눠주며 먼저 면죽으로 나가게 했다.

면죽을 지키던 유장의 장수 비관(費觀)은 유비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자 이엄을 뽑아 그들을 맞게 했다. 이엄은 군사 삼천을 이끌고 성을 나가 황충과 위연을 마주보고 진을 쳤다.

유비 쪽에서 황충이 먼저 말을 몰고 나와 싸움을 돋우었다. 이엄 도 지지 않고 달려 나가 황충과 어울렸다. 두 사람이 어우른 지 마흔 합이 넘었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진중에서 그 싸 움을 보고 있던 공명이 돌연 북을 울리게 하여 황충을 불러들였다. 

“이제 막 이엄을 사로잡으려 하는데 군사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저를  러들이셨습니까?”

불려온 황충이 아쉽다는 얼굴로 공명에게 불퉁거렸다. 공명이 달 래듯 말했다.

“내가 이엄의 무예를 보니 힘으로는 사로잡기 어려울 것 같소. 장 군은 내일 다시 싸우되, 거짓으로 져서 이엄을 산골짜기로 꾀어들이 시오. 그때 이엄이 미처 예기치 못한 군사를 내어 들이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이오.”

황충은 힘으로는 이엄을 이길 수 없으리라는 공명의 말에 은근히 화가 났으나 군사의 영이라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이었다. 전날 황충이 먼저 물러난 데 우쭐해진 이엄이다 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움을 걸었다. 황충 역시 다시 나가 싸웠으 나 전날 같지는 못했다. 열 합도 되기 전에 거짓으로 쫓겨 달아나자 이엄은 신이 나서 뒤쫓았다.

평지를 벗어난 황충은 곧 산골짜기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앞뒤 없 이 뒤쫓던 이엄은 골짜기로 접어들어서야 퍼뜩 짚이는 게 있었다. 

“적의 잔꾀다! 뒤쫓지 말고 물러나라!”

이엄이 그렇게 소리치며 급히 군사를 돌렸을 때였다. 어디서 나왔는지 위연이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앞을 막았다. 등 뒤에선 달아나던 황충이 되돌아서서 짓쳐오고 있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게 된 이엄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공명이 소리쳤다.

“공은 이미 함정에 빠지셨소. 항복하지 않는다면 양쪽에 숨겨둔 강한 쇠뇌가 공에게 봉추의 원수 갚음을 하게 될 것이오.”

그 소리를 듣자 이엄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힘없이 말에서 내려 갑옷을 풀고 항복하니 그가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도 모두 그를 따랐다.

공명은 항복한 이엄을 데리고 유비에게로 갔다. 그러나 이엄을 대 한 유비의 태도는 결코 항복한 적장에 대한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을 만난 듯하니 이엄은 절로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 을 수 없었다.

“이제 장군은 우리 사람이 되셨으니 묻겠소. 어떻게 하면 쉽게 면 죽을 뺏을 수 있겠소?”

새로운 주종으로서의 예가 끝난 뒤 유비가 넌지시 물었다. 이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비관이 비록 유장과 친척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매우 가까운 벗 입니다. 제가 가서 그를 한번 달래보겠습니다.”

그러자 유비는 선뜻 허락했다.

“좋소이다. 그럼 성으로 돌아가서 비관에게 항복하도록 권해보시오.”

전에 냉포를 놓아주었다가 속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하는 빛이 없는 표정이었다. 공명도 이엄을 믿을 만하다 여겼던지 곁에서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이에 면죽성으로 돌아간 이엄은 비관을 만나보고 간곡히 말했다. 

“유현덕은 어질고 덕이 높은 사람이오. 나를 보아 믿고 항복하시 오. 공연히 버티다가는 반드시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오.”

이엄이 그렇게 권하자 비관도 턱없이 싸움만을 우기지는 않았다. 조용히 이엄의 말을 받아들여 성문을 열고 유비에게 항복해버렸다. 이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면죽성을 차지한 유비는 다시 성도 를 칠 의논을 했다. 어느 길로 어떻게 군사를 나누어 성도를 칠 것인 가로 한참 의견이 분분할 때였다. 홀연 유성마가 달려와 알렸다. 

“한중의 장로가 마초와 양백, 마대에게 군대를 주어 가맹관萌 關)을 치게 했습니다. 지금 맹달과 곽준이 힘을 다해 지키고는 있으 나 사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구원을 늦추게 되면 가맹관은 깨어지고 말 것이니 서둘러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몹시 놀랐다. 전에 서로 힘을 합쳐 싸운 적까 지 있는 마초가 갑자기 자신에게 칼끝을 들이대었다는 것도 그랬지 만, 그보다는 마초의 빼어난 무예와 용맹을 상대해 싸워야 한다는 게 더욱 걱정되었다. 공명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이나 쓴 입맛만 다시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마초라면 조자룡과 장익덕 두 사람을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라야 마초와 맞설 수 있습니다.”

“자룡은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여기 있는 것은 익덕뿐이니 급한 대로 그부터 먼저 보내야겠소.”

유비가 찌푸린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장비 혼자서는 마초를 당해낼 것 같지 않아서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공명 이 그걸 알아차리고 나직이 유비에게 당부했다.

“익덕이 걱정되더라도 주공께서는 아무 말씀 마십시오. 제가 익덕 을 충동질해서 마초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비가 우르르 뛰어들며 소리쳤다.

“형님, 나는 가겠소. 어서 가서 마초 놈과 싸울 테요!”

어디선가 마초가 가맹관으로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 다. 그러나 공명은 짐짓 장비의 말을 듣지 못한 체 유비를 보며 걱정 했다.

“지금 마초가 우리 관을 들부수고 있으나 이곳에는 그를 당해낼 만한 장수가 없습니다. 형주에 있는 관운장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 렇다고 형주를 내주고 이리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그 말에 장비가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공명에게 대들었다. “군사께서는 어째서 나를 그토록 작게 보시오? 나는 일찍이 조조 의 백만 대군도 홀로 물리친 적이 있소이다. 까짓 마초 따위 하찮은 것이야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소?”

“장군이 장판교를 끊었을 때는 조조가 우리 편의 허실을 잘 알지 못해 물러갔을 뿐이오. 만일 그때의 우리 형편을 조조가 알았더라면 장군이 어찌 무사할 수 있었겠소?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더욱 화가 난 장비가 범처럼 으르렁거렸다.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씀이오? 그 하찮은 오랑캐 아들놈이 무 에 그리 대단하다는 거요?”

“마초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알아주는 바요. 지난날 위교의 싸움에 서 조조는 제 수염을 베고 전포를 벗어던져 가며 달아났으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만났소이다. 결코 대수롭지 않게 볼 인물이 아니 니 설령 관운장이 간다 해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오.” 

공명이 눈도 깜박 않고 그렇게 마초를 추켜세워 장비의 부아를 한층 돋우었다. 마침내 참지 못한 장비가 소리쳤다.

“나를 어서 보내주기나 하시오! 내가 가서 마초를 이기지 못한다

면 설령 내 목이 떨어지는 군령이라도 달게 받겠소!”

바로 공명이 기다린 말이었다. 그제서야 공명은 장비의 출전을 허락했다.

“장군이 이왕에 군령장까지 쓰겠다니 그럼 우선 선봉이 되어 가보시오.”

그런 다음 다시 유비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도 가맹관으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면죽은 제 가 남아 지키다가 조자룡이 돌아오면 다시 의논해 뒤를 댈 것입니다.” 

“저도 보내주십시오. 가서 마초가 어떤 물건인지 한번 봐야겠습 니다.”

그때껏 장비의 서슬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던 위연이 다시 끼어 들었다. 공명은 그것도 허락했다. 그리하여 위연은 오백 기를 이끌 고 길잡이 겸 망보기로 먼저 떠나고, 장비는 그다음을 이으며, 유비 는 후대가 되어 가맹관으로 떠나게 했다.

그렇게 되자 싸움이라면 자기밖에 없는 줄 아는 장비도 어지간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도 몸소 나서고 위연이 보태졌는데도 다시 조자룡이 돌아오 면 더할 듯하니 마초가 새삼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한달음에 우르르 달려가 개 때려잡듯 마초를 잡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맹관 아래 가장 먼저 이른 위연은 관 안에 있는 맹달과 연락이 닿기도 전에 장로의 장수 양백부터 만났다.

공을 서두르는 위연이 장비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양백을 덮치 자, 양백 또한 지지 않고 맞서 곧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양백은 위연의 적수가 못 됐다. 말과 말이 열 번을 뒤엉켰을까 그새 견디지 못한 양백이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연은 장비에게 으뜸가는 공을 뺏기지 않으려고 제 군사 적은 것은 걱정도 않고 양백을 뒤쫓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양백은 보이지 않고 낯선 장수 하나가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앞길을 가로 막았다. 마초의 아우 마대였다.

마초의 얼굴을 모르는 위연은 마대가 바로 마초인 줄 알았다. 큰 공을 세울 더 없이 좋은 기회라 여기고 칼춤을 추며 덤볐다. 마대가 맞서 이번에는 위연과 마대 간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둘이 어울린 지열 합쯤 되었을 때였다. 마대 또한 양백과 마찬가 지로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대를 마초로만 알고 있는 위연은 신이 났다. 쫓기는 게 거짓인 줄도 모르고 말을 몰아 뒤쫓는데, 문득 마대가 몸을 돌리더니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살은 마음 놓고 쫓던 위연의 왼팔에 날아와 박혔다. 그제서야 속은 줄 안 위연이 다친 왼팔을 싸쥐고 되돌아 달아났다.

이번에는 마대가 기세를 타고 위연을 뒤쫓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 고 하면서 가맹관 아래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한 장수가 우레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관 위에서 말을 몰아 달려왔다. 장비가 와 있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얼른 달려 나온 길이었다.

장비는 위연이 화살을 맞아 쫓겨 들어오는 것을 보자 뒤쫓는 것 은 틀림없이 마초일 것이라 생각했다. 얼른 위연을 구해 관 안으로 들여보낸 뒤 마대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너는 어떤 놈이냐? 싸우기 전에 이름부터 알고나 보자.” 

“나는 서량의 마대다. 너는 누구냐?”

마대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상대가 마초가 아니란 말에 장비는 은 근히 실망했다.

“그렇다면 너는 마초가 아니로구나! 어서 돌아가거라. 너는 나의 적수가 못 되니 가서 마초에게 싸우러 나오라고 일러라. 연나라 사 람 장익덕이 여기서 기다린다면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애 타이르듯 했다. 장비가 너무 자기를 우습게 보자 마대는 벌컥 성이 났다.

“네 어찌 감히 나를 그리 작게 보느냐!”

그 한소리와 함께 창을 끼고 말을 박차 장비에게 덤벼들었다. 걸 어오는 싸움이라 장비도 창을 들어 맞섰으나 처음부터 오래갈 싸움 은 못 되었다. 채 열 합도 안 돼 힘이 부친 마대가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비가 그런 마대를 뒤쫓으려 할 때 문득 어떤 사람이 관 위에서 말을 달려 내려오면서 소리쳤다.

“아우는 뒤쫓지 마라!”

장비가 돌아보니 유비가 팔을 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서야 가맹관에 이른 유비는 장비가 너무 가볍게 싸움에 말려드는 것 같아 서둘러 말렸다.

장비도 공명에게 써준 군령장이 마음에 부담이 되는 데다 유비까 지 달려 나와 말리자 더는 마대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고집 부리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려 유비와 함께 관으로 돌아갔다. 그런 장비가 대 견한지 유비가 달래듯 말했다.

“네 성미가 조급한 게 걱정이 되어 내가 일부러 예까지 왔다. 어 쨌든 너는 오늘 마대를 이겼으니 잠시 쉬었다가 내일 다시 마초와 싸워보도록 해라.”

하지만 다음 날 싸움을 먼저 걸어온 것은 오히려 마초였다. 날 새 기 무섭게 관 아래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마초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유비가 관 위에서 내려보는 가운데 마초가 문기 그늘 아래서 창을 끼고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머리띠는 사자 형상을 한 투구요, 허리 에는 짐승을 그린 띠에, 은으로 된 갑옷을 걸치고 흰 전포를 입었는 데, 그 차림이 속되지 않을뿐더러 그 인물도 남달리 뛰어나 보였다. 유비가 그런 마초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단 같은 마초[錦馬超]라더니, 정말로 세상 에 이름이 헛되이 나는 법은 없구나!”

유비가 마초를 높이 보자 장비는 심사가 뒤틀려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얼른 창을 꼬나들며 관을 나가 마초와 싸우려 했다. 유비가 그런 장비를 말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먼저 마초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한 뒤에 나가 싸우는 게 좋겠다.”

하지만 마초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홀로 관 아래로 말을 몰고 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장비의 부아를 돋우었다.

“장빈가 뭔가 하는 촌놈이 왔다더니 어디 있느냐? 어서 나오너라. 한창에 멱을 따놓겠다.”

아우 마대에게 들은 말이 있어 하는 소리였다. 장비가 펄펄 뛰며 관을 박차고 나서려 아우성이었지만 유비는 얼른 허락하지 않았다. 너댓 번이나 마초를 씹어 삼킬 듯 이를 갈며 나서는 장비를 꾸짖어 관 위에 붙들어 두었다.

그런 사이 한나절이 지났다. 아무리 심한 소리를 충돌질해도 관 안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마초의 군사들은 차차 지루한 기색을 드 러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유비가 비로소 장비에게 말했다.

“이제 됐다. 너는 오백 기만 골라 관을 나가보도록 해라. 마초하고 싸우되, 뜻 같지 못하거든 언제고 돌아오너라.”

그 말을 들은 장비가 대꾸고 뭐고 없이 우르르 관문을 뛰쳐나갔 다. 마초는 장비가 홀로 달려 나오는 것을 보자 창을 들어 뒤를 보고 휘저으며 소리쳤다.

“모두 화살 닿을 거리 밖으로 물러나라. 나 혼자 장비를 사로잡겠다.”

그때 장비가 씨근거리며 마초 앞에 이르렀다. 그도 역시 뒤쫓아오는 자기편 군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마초만 잡고 늘어졌다.

“너는 연나라 장익덕을 알아보겠느냐?”

장비가 창을 꼬나 잡으며 그렇게 소리치자 마초가 비웃음 반 놀림 반으로 받았다.

“나는 여러 대를 걸친 공후의 집안에서 난 사람이다. 어찌 너 같 은 촌놈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그러자 참지 못한 장비가 말을 박차 덤벼들고, 마초도 지지 않고 내달아 맞섰다. 곧 두 말이 엇갈리며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다. 창 과 창이 어울려 찌르고 후비고 쑤시고 후리는데, 둘의 솜씨가 얼마 나 절묘한지 보는 이가 모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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