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4화 : 유비, 한중왕이 되다
유비, 한중왕이 되다
다행히도 앞장서서 달려온 장수는 조조의 둘째 아들 창이었다. 조 창은 자가 자문(文)으로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고, 힘이 남달라 주먹으로 사나운 짐승을 때려잡을 만했다. 일찍이 조조 가 그런 그에게 타이른 적이 있었다.
“너는 책은 읽지 않고 활쏘기와 말타기만 좋아하니, 그것은 필부 의 용맹을 기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야 어떻게 귀한 사람 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조창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대장부는 마땅히 위청(衛靑, 한무제 때의 이름난 장수)이나 곽거병 (霍去病, 역시 한대의 명장)을 배워 사막에 나가 공을 세우고 수십만 대 군을 몰아 천하를 종횡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책버러지나 되라 하십니까?”
또 한번은 조조가 여러 아들들을 불러 모아놓고 각기 뜻하는 바를 물어보았다. 차례가 되자 조창은 선뜻 대답했다.
“장수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수가 되어서는 어찌하겠는가?”
“몸을 굳게 감싸고 날카로운 창을 들어 어려움을 만나도 머뭇거 리지 않고 사졸들의 앞장을 서겠습니다. 상은 반드시 내리고 벌 또 한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조조도 껄껄 웃으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지난해인 건안 이십삼년 대군과 오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 는 창을 불러 군사 오만을 주며 말했다.
“너와 나는 집안에서는 아비와 아들 사이지만 일을 받듦에는 군 신 사이가 된다. 법에는 사사로운 정이 없으니 너는 각별히 명심하 여라.”
이에 창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대북으로 갔다. 몸소 사졸들 의 앞장을 서서 상건으로 짓쳐드니 오래잖아 북쪽 지방이 모두 평온 해졌다. 그리하여 한창 그곳 인심을 수습하고 있는데, 조조가 싸움 에져 양평관으로 물러났다는 소문이 들려 이제 도우러 달려온 길이 었다.
조조는 아들 창이 온 걸 보고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수염 누른 아이[黄鬚兒]가 왔으니 유비는 반드시 우리에게 깨뜨려지리라!”
그러고는 다시 기운을 차려 군사를 이끌고 야곡 계구로 나왔다.
그 소식은 곧 유비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가 둘째 아들 창을 맞고 힘을 얻어 다시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가서 조창과 싸워보겠느냐?”
“제가 가보겠습니다.”
유봉이 얼른 나섰다. 수양아들도 아들이라, 조창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낀 탓이었다. 맹달이 나서며 소리쳤다.
“이번에는 제가 한번 가보지요.”
한꺼번에 두 사람이 나서자 유비가 문득 말했다.
“좋다. 너희 두 사람이 함께 가거라. 누가 공을 세우는지 보겠다.”
그러고는 둘 모두에게 각기 오천의 병마를 떼어주었다.
유봉이 앞장을 서고 맹달이 뒤를 맡아 본채를 나온 촉군은 오래 잖아 조창이 이끄는 위병과 만났다.
유봉이 용맹을 뽐내며 달려갔으나 무예에서는 조창에 미치지 못 했다. 채 세 합을 채우지 못하고 조창에게 쫓겨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 있다가 유봉이 쫓기는 걸 본 맹달이 급히 말을 박차 조창을 덮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조조군의 뒤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마 초와 오란의 군사들이 갑자기 나타나 조조군의 뒤를 후려친 까닭이 었다.
거기다가 맹달은 맹달대로 군사를 휘몰아 덮쳐오니 앞뒤로 적을 맞은 조조군은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특히 뒤를 후려대고 있는 마초 와 오란의 군사는 오래 싸움 없이 쉬어 기세가 드높기 그지없었다. 조조군은 마침내 그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쫓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창은 그냥 쫓겨가지만은 않았다. 뒤돌아서서 물러나다 오란을 만나자 한 창에 그를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거기서 기 세를 회복한 군사들도 돌아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싸움은 무턱대고 쫓기는 양상이 아니라 제법 어우러지는 혼전이 돼버렸다. 그래도 조조는 앞뒤로 적을 맞은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곧 사람을 보내 조창을 불러들이고 야곡 계구에 영채를 얽었다. 양쪽 군사가 서로 맞서 노려보는 형국으로 여러 날이 지나갔다. 조조는 답답했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마초가 두려웠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자니 촉 병들이 비웃을까 걱정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숨만 쉬고 있 던 어느 날이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상 위에 닭국이 올랐다. 무심코 닭국을 먹던 조조의 수저에 문득 닭갈비 [鷄肪] 조각이 건 져졌다. 그걸 보자 조조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이 일었다. 닭갈비는 살이 없어 먹기에 성가시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었다. 한중이 꼭 그와 같았다. 기름지고 드넓은 중원이나 물자가 풍 부한 강남에 비해 대단할 것 없는 땅 조각이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내주기에는 아까웠다. 그걸 위해 이토록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자 신의 처지가 자못 고약스러웠다.
조조가 그런저런 생각으로 잠시 수저를 멈추고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침 하후돈이 들어와 물었다.
“전하, 오늘밤에 쓸 군호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계륵이라고 하게, 계륵.”
조조가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방금 거기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한 뒤라 절로 그리되고 말았다.
하후돈도 별 생각 없이 조조에게서 들은 대로 그날 밤의 군호를 여러 장졸들에게 전했다. 그런데 계륵이란 암구호를 들은 행군주부 양수가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
“너희들은 각기 짐을 싸두도록 하라. 아마 우리는 곧 돌아갈 것이다.”
양수는 데리고 있던 군사들을 불러 가만히 귀띔을 했다. 하지만 이롭지 못한 싸움 끝이라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진중이고 보 니 양수의 그 같은 말은 외고 돌아다닌 것보다 더 빨리 군사들 사이 에 퍼졌다.
오래잖아 그 말을 전해 듣게 된 하후돈은 크게 놀랐다. 얼른 양수 를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공은 어째서 군사들에게 짐을 싸라 이르셨소?”
“오늘 밤에 쓸 군호를 듣고 위왕께서 며칠 안으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실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원래 계륵이란 먹자니 맛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싸움이 곧 그와 같습니다. 앞 으로 나아가봤자 이길 가망이 별로 없고, 물러서자니 비웃음을 살까 두렵습니다. 여기 있어도 별 이로울 게 없으니 차라리 일찍 돌아가 는 게 낫지요. 아마도 내일쯤에는 반드시 위왕 전하께서 군사를 돌 리실 것 같아 먼저 짐을 꾸려두게 한 것입니다. 떠날 무렵에서 갑작 스레 짐을 꾸리느라 허둥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후돈도 양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공이야말로 실로 위왕 전하의 가슴속을 들여다본 듯하구려!”
그렇게 감탄하고 그마저 군사들의 짐을 꾸리게 하니 다른 장수들 도 모두 따라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한편 조조는 그날 밤 마음이 어수선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 작은 쇠도끼 하나만 들고 홀로 가만히 진채 안을 돌아 보았다.
조조가 하후돈의 진채를 이르렀을 때였다. 군사들이 모두 돌아갈 짐을 꾸리느라 부산하게 돌아가는 걸 본 조조는 크게 노했다. 급히 하후돈을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들여 꾸짖듯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내 명도 없는데 군사들로 하여금 돌아갈 채비를 하게 하였느냐?”
“주부 양수가 대왕께서 돌아가실 뜻이 계심을 알고 저에게 그리 일러주었습니다.”
하후돈이 멀쩡한 얼굴로 그같이 대답했다. 조조는 더욱 노해 양수 를 불러들이게 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하후돈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였느냐?”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양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하후돈 에게 해준 말을 조조에게도 되뇌었다. 듣기를 마친 조조가 시퍼런 얼굴로 이를 갈며 양수를 꾸짖었다.
“네 어찌 감히 요망한 말을 지어내어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려느냐?”
그러고는 곧 칼과 도끼를 든 군사들을 불러 매섭게 영을 내렸다.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고, 그 목을 진문 밖에 높이 걸어라.”
이에 당대의 재사 양수는 그 지나친 헤아림으로 오히려 스스로의 목숨을 해치고 말았다.
얼핏 보아서는 조조의 순간적인 분노가 양수를 죽인 것 같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양수는 전부터 그 재주만 믿고 함부로 나서다 가 여러 번 조조가 싫어하는 걸 건드렸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조조가 어떤 곳에 화원을 꾸미게 해놓고, 그게 다 되자 보러 왔다. 그러나 잘 됐다 못 됐다 한마디 없이 다만 붓을 들어 문에 ‘활()’ 자 한 자를 써놓고 가버렸다. 사람들은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지 만 양수는 담박 알아보았다.
“문(門) 안에 활(活)자가 더해졌으니 이는 넓을 활闊)자가 되오. 승상께서는 화원으로 드는 문이 너무 넓어 마음에 드시지 않은 듯 하오.”
양수의 그 같은 풀이를 들은 사람들은 담을 뜯어 문을 좁힌 다음 다시 조조를 청해 보였다. 조조는 그제서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가 내 뜻을 알아냈는가?”
“양수가 일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같이 대답했다. 조조는 겉으로는 그런 양수의 재주를 칭찬했으나 속으로는 불쾌하게 여겼다. 자신이 일부러 감춰둔 뜻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던 게 조조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멀리 새북(塞北)에서 타락죽( 소나 양의 젖을 가공하여 만든 음식)한 합이 올라왔다. 조조는 슬며 시 장난기가 일어 그 합 위에다 일합소 쓴 뒤 책상머리에 라놓아두었다. 양수가 들어와 그걸 보더니 두말 없이 숟가락을 가져오
게 해 여럿과 더불어 나누어 먹어버렸다.
“그대는 어찌 이 타락죽을 먹어버렸는가?”
조조가 양수를 보고 짐짓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양수가 빙긋 웃으며 까닭을 밝혔다.
“합 위에 한 사람이 한 입씩 먹는 타락죽이라 뚜렷이 씌어 있으 니, 어찌 그 같은 승상의 뜻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일합소(合)에서 ‘합(合)’ 자를 풀면 인일구(人一口)가 되어 앞 에일(-)과 더불어 일인일구(一人口), 곧 한 사람이 한 입씩 먹으 라는 뜻이 됨을 알아본 것이었다. 이번에도 조조는 겉으로는 기분 좋게 웃어젖혔으나 속으로는 양수를 싫어해 마지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조조는 다른 사람이 몰래 자신을 해치는 게 두려 워 항상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했다.
“나는 꿈을 꾸다 사람을 죽이는 수가 있으니, 내가 잠이 들거든 그대들은 절대로 가까이 오지 말라.”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낮잠을 자다가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가 까이서 모시던 사람 하나가 그걸 보고 얼른 달려와 조조를 부축해 올리려 했다. 그러자 조조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칼을 뽑 아 그 목을 쳐버리고 다시 침상 위로 올라가 잠을 잤다. 한 반나절쯤 지났을까, 드디어 잠에서 깨난 조조가 놀란 체하며 물었다.
“누가 나의 근시를 죽였느냐?”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던 사람들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슬피 울며 죽은 이를 후하게 장사 지내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조조가 정말로 잠결에 사람을 죽이는 버릇 이 있는 줄 알고 조조가 잠만 들면 그 근처에 얼씬도 않았다. 하지만 양수만은 조조가 그 일로 노리는 바를 알아보았다. 조조의 칼에 죽은 이의 장례식에 찾아가 시신을 손가락질하며 탄식했다.
“가엾구나. 승상이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가 꿈꾸고 있었던 것이네!”
조조의 잔혹한 속임수를 바로 깨놓지는 못하고 그렇게 빙 둘러말한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번 멋지게 세상 사람들을 속여 제한 몸의 안전을 확보했는가 싶었는데, 양수가 그런 자신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니 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갈고 있던 이를 더욱 힘주어 앙다물었다.
하지만 양수의 재주가 조조를 거스른 일은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 다. 양수는 또 조조의 큰아들 조비와 셋째 아들 조식의 세자 자리 다 툼에 끼어들어 조조를 자주 노엽게 했다.
그 첫 번째는 오질(吳質)의 일 때였다.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은 양수의 재주에 반해 그와 만나 얘기를 시작하면 밤이 새도 모를 정 도였다. 그때는 조조도 조식을 더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세우려고까 지 했다. 그 낌새를 안 조비는 애가 탔다.
걱정 끝에 조비는 평소에 믿는 오질이란 사람을 불러 그 일을 의 논하려 했다. 오질은 조가(朝歌)란 곳의 장(長)을 지낸 사람으로 또 한 재주와 잔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를 왕자부(王府)로 불 러들인 게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진 조비는 궁색한 꾀를 하나 냈다. 큰 바구니에 오질을 감추고 그게 비단이라고 속여 부중으로 들인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안 양수는 곧 조조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조가장(朝歌) 오질이 바구니에 숨어 몰래 첫째 왕자님의 부중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곧 사람을 조비의 부중으로 보내 살펴보게 했다.
자기가 한 일이 조조의 귀에 들어간 줄 안 조비는 놀라 오질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 그대가 숨어서 이곳을 드나든다는 걸 아신 모양이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걸 가지고 무얼 걱정하십니까? 내일 큰 광주리에 비단을 가득 채워 다시 들여오게 하십시오. 그러면 오늘 제가 타고 온 광주리 속 에도 비단이 들어 있던 걸로 될 것입니다.”
오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일러주었다. 조비는 다음 날 오질이 시키는 대로 했다. 조조가 보낸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다가 큰 광주리가 오자 눈에 불을 켜고 들춰보았다. 그러나 양수의 말과 는 달리 광주리 안에는 정말로 비단이 가득 들어 있었다.
조조가 보냈던 사람은 돌아가 자기가 본 대로 말했다. 그렇다면 전날의 광주리도 비단일 것이라 여긴 조조는 양수가 조식을 위해 조 비를 헐뜯으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했다. 세자 자리를 놓고 형제 가 다투도록 부추기는 자라 해서 양수를 한층 밉게 보았다.
다음은 조조가 조비와 조식의 능력을 비교해보고 싶어 꾸며놓은 일에 양수가 주제 넘게 끼어든 일이었다. 어느 날 조조는 조비를 불러 말했다.
“오늘은 성문 밖을 나갔다 오너라.”
그리고 한편으로는 몰래 성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사람을 보내 엄명을 내렸다.
“오늘은 어느 누구도 성문 밖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조비는 별 생각 없이 성문에 이르러 밖 으로 나가려 했다. 문리가 받은 명이 있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못 나가십니다. 위왕 전하께서 누구도 성문 밖으로 내보내서는 아니 된다 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조비는 끝내 성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조조에 게로 돌아갔다. 그 소문을 듣고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있 을 줄 짐작한 조식이 양수를 불러 어찌하면 될까를 물었다.
“왕자께서 왕명(王命)을 받들고 나가려는데 기어이 막으려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셔도 됩니다.”
양수가 잠깐 생각하다 그렇게 대답했다. 이윽고 조조에게서 조비 와 같은 영을 받은 조식은 두말 없이 그대로 따랐다. 성문에 이르러 문리가 가로막자, “나는 왕명을 받들어 나가는 길이다. 누가 감히 가 로막는단 말이냐!” 하는 꾸짖음과 함께 한칼에 문리를 베어버리고 성문을 나갔다. 조조가 그 일로 조식이 조비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란 있을 수가 없어 뒷날 누군가가 조조에게 일러바쳤다.
“그것은 모두 양수가 일러준 대로 한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조조는 몹시 노했다. 자기를 속인 것 못지않게 왕자들의 다툼에 끼어들어 잔재주를 피우는 게 미웠다.
양수가 조식을 도와 조조를 거스른 것은 그밖에도 더 있었다. 양 수는 언제나 조식에게 열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마련해주어 조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비하게 했다.
조조는 자신이 군사를 부리는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을 때 마다 조식이 물 흐르듯 대답을 하자 기특해하던 것도 잠시 차차 그 를 의심하게 되었다. 학문에 밝고 시문(詩文)에 능한 조식이라 그런 물음에는 마땅히 막힐 법한데도 너무나 거침없이 대답하기 때문이 었다.
거기다가 조비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몰래 조식 가까 이서 일하는 사람을 매수해 양수가 가르쳐준 답을 훔쳐낸 뒤 그걸 적어 조조에게 갖다 바쳤다.
“양수 이 하찮은 놈이 나를 속이려 들다니!”
읽기를 마친 조조가 펄펄 뛰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양수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있다가 이번에 군심(軍心)을 어지럽혔다는 꼬투리 를 잡자 그대로 죽여버린 것이었다. 그때 양수의 나이 서른네 살이 었다.
뒷사람들은 시를 지어 양수의 재주를 기리며 그 죽음을 아까워하 고 혹은 조조의 비정함과 잔혹을 욕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조조가 일생을 통해 싫어했던 것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양수가 그걸 어겼던 탓이라고 애써 조조를 변명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조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살펴보면 양수가 죽음을 당해야 할 죄가 있음은 거의 논의의 여지가 없다. 첫째로 그를 지자(智者)로 아까워하나 엄격히 말해서 그는 지자가 못 된다. 지자는 안 다고 다 말하지 않는다. 둘째로 왕자들의 다툼에 끼어든 것도 그리 잘한 일은 못 된다. 더구나 사사로운 정으로 적장자(嫡長)를 제쳐 놓고 셋째 왕자를 편들어 조조의 이목을 흐린 죄는 어떤 이유로든 변명되기 어렵다.
생각해보라. 뒷날 왕위에 오른 조비는 왕자 때의 원한을 잊지 못 해 친동생인 조식마저 죽이려 했다. 그때 그 조식 곁에 붙어 온갖 잔 꾀로 자신을 괴롭혔던 양수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어쩌 면 조조가 일찍 양수를 죽여준 것은 양수 자신을 위해서도 다행인지 모르겠다.
보통 양수의 죽음은 공융의 죽음과 나란히 놓여지나 조금만 더 세심히 살피면 거의 연관이 없다. 재주는 공융만 했는지 모르지만, 인물의 격에 있어서는 훨씬 못 미쳐 보인다. 그는 조조의 주관적인 금기를 범해서가 아니라, 군국의 객관적인 치도(治道)를 어겨 처형 되었다는 편이 옳다. 따라서 양수가 죽은 것도 정사는 조조가 허도 로 돌아온 그해 가을로 적고 있다. 전장에서의 군법이 아니라 조정 의 기율에 따라 사형을 받았다는 뜻이다.
어쨌든 양수를 죽인 조조는 양수의 경박한 재주에 놀아난 하후돈 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거짓으로나마 성난 소리를 내어 그 또한 목 을 베라는 영을 내렸다.
“하후돈은 역전의 맹장이요, 대왕께는 창업의 원훈이 됩니다. 그 만한 일로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곁에 있던 뭇 장수들이 나서서 그렇게 조조를 말렸다. 그러자 처음부터 하후돈을 죽일 마음이 없던 조조는 못 이긴 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목숨을 붙여주되 호되게 꾸짖어 내쫓았다. 그리고 그 기세 를 몰아 모든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은 나아가 결판을 내리라. 모두들 결사의 채비를 갖추라!”
다음 날 조조는 서둘러 군사를 몰아 야곡 계구로 나아갔다. 조조 를 맞은 촉의 장수는 위연이었다. 조조는 위연을 타일러 항복을 권 했으나 위연은 오히려 조조를 모질게 욕했다. 성난 조조가 방덕을 보고 소리쳤다.
“그대는 어서 나가 저 주둥이 험한 놈의 목을 가져오라!”
그 말에 방덕이 달려 나가자 위연도 지지 않고 맞서 곧 둘 사이에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둘의 싸움이 한창 볼만하게 어우 러져갈 무렵 갑자기 조조군의 진채 안에서 불길이 일며 조조에게 놀 라운 전갈이 왔다.
“마초가 나타나 중군 뒤의 영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조조는 잠시 아뜩했으나 곧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매섭게 소리쳤다.
“놀라지 말라. 물러나는 자는 누구든 목을 베리라!”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장수들이 힘을 다해 앞으로 밀고 나갔 다. 그러자 위연은 짐짓 그 기세에 눌린 채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버 렸다.
위연을 쫓아버리고 한숨을 돌린 조조는 다시 군사를 돌려 마초와 어울렸다. 침착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으나 싸움은 그의 뜻 같지가 못했다. 조조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싸움의 형세를 살펴보고 있을 때 문득 언덕 아래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역적 조조는 거기서 무얼 하는가? 위연이 여기 있다. 어서 목을 내놓아라!”
위연이 이렇게 외치며 시위에 살을 먹여 조조에게로 쏘아 붙였다. 화살은 보기 좋게 조조의 얼굴 어름을 맞혀, 조조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걸 본 위연이 활을 버리고 칼을 뽑아들더니 말 허리를 박차며 조조가 있는 언덕으로 뛰어올라왔다. 위연이 칼을 높이 치켜 조조를 베려 할 때 누군가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 나왔다.
“위연아, 내 주인을 다치지 말라!”
위연이 주춤하며 그쪽을 보니 조조의 사람이 된 방덕이 범 같은 기세로 덮쳐오고 있었다. 방덕이 워낙 죽을 둥 살 둥 모르며 덤비자 위연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싸우다가 슬몃 물러나니 방 덕은 그럭저럭 조조를 구해 돌아갈 수 있었다.
마초도 그때는 이미 군사를 물린 뒤였다. 조조는 화살을 맞아 앞 니가 두 대나 부러지고 적잖은 상처를 입은 채 진채로 떠메어져서 돌아왔다. 급히 의자를 불러 상처를 돌보게 하면서 비로소 양수가 한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조조는 늦은 대로 양수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 지내준 뒤 군사를 물려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방덕으로 하여금 뒤를 막게 하고 자신은 담요를 깐 수레에 누워 호분군(虎賁軍)의 호위를 받으 며 돌아갔다.
물러나는 조조의 군사들이 야곡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산 위 양쪽에서 불길이 일며 숨어 있던 촉병들이 쏟아져 나와 덤벼들었다.
조조가 한중을 버리고 달아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린 공명이 숨겨둔 군사들이었다.
허겁지겁 달아나던 조조가 겨우 한고비를 넘었다 싶을 때 다시 위연이 나타났다. 위연이 화살 한 대를 쏘아 붙이자 한번 혼이 난조 조는 맞서볼 엄두도 못 내고 돌아서서 달아나기 바빴다. 삼군의 사 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를 달아났을까. 이번에는 마초의 복병이 나타나 조조 의 군사들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조조의 군사들은 저마다 오금이 저려 걸음조차 떼어놓지 못했다. 조조는 그런 군사들을 호령으로 재 촉해 밤새껏 달린 뒤 경조(兆)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조를 멀리 쫓아버린 유비는 유봉과 맹달, 왕평 같은 장수들을 보내 상용의 여러 고을들을 빼앗게 했다. 신탐(申耽)을 비롯한 그곳 의 태수들은 조조가 이미 한중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말을 듣자 모두 순순히 항복해 왔다.
유비는 새로 거둬들인 고을 백성들을 안심시킨 뒤 삼군에게 골고 루 상을 내리니 사람마다 기뻐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그때껏 유비를 따라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은 장수들의 기쁨은 더욱 각별한 데가 있었다. 무릎 댈 땅 한 뼘 없이 떠돌다가 이제는 형주, 서촉에 한중까지 얻고 보니 그대로 천하를 다 차지한 느낌이었다. 거기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게 된 것이 유비를 천자로 떠받 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걸 바로 말하기에는 하도 엄청나 먼저 제갈공명을 찾아보고 그 뜻을 밝혔다.
“나도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소이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공명은 그렇게 말해놓고 법정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함께 유비를 찾아가 권했다.
“지금 조조는 나라의 모든 권세를 오로지하고 있어 백성들은 주 인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미 인의로 천하를 널 리 알려지셨고, 또 다스리시는 땅도 형주에다 서천, 동천을 더하시 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제위에 오르시어 바른 명분과 옳은 주장으로 나라의 역적을 쳐 없애 야 합니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으니 빨리 날을 뽑아 제위에 오르도 록 하십시오.”
그러자 유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군사의 말씀은 옳지 않소이다. 이 유비가 비록 한실의 종친이기 는 하나 위로 천자가 계시니 한낱 신자(臣)에 지나지 않소이다. 군 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한에 반역하는 게 될 것이오.”
“아닙니다. 지금은 천하는 무너져 나뉘고 영웅들이 잇달아 일어 각기 그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의 재주 있고 덕 있 는 선비들은 각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 윗사람을 섬기며, 용의 꼬 리를 붙들고 봉의 깃을 잡듯 그 주인을 따라 공명을 이룩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의를 고집하시다가 여러 사람의 기대를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제갈공명이 다시 한번 간곡히 권했다. 그래도 유비는 여전히 무겁 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되오. 나는 차마 멋대로 그 같은 존위(尊位)에 오를 수가 없 소. 달리 장구한 계책을 다시 의논해봅시다.”
그러자 유비의 뜻이 굳음을 안 공명은 한 계단을 낮추어 권했다. “주공께서 한평생을 의로 바탕을 삼아오신 터라 제위로 급히 나 아가실 수 없다면 왕위는 어떻겠습니까? 이미 형주와 양양에다 동 천, 서천을 다스리고 계시니 한중왕(漢中王)은 쓰실 수가 있을 것입 니다.”
그래도 유비는 얼른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비록 나를 왕으로 떠받들려 하나 천자의 조칙이 없으 면 결국은 참칭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은 잠시 권도(權道, 임시 방편의 억지 또는 속임수)를 따르셔야 합니다. 떳떳한 도리만 고집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공명이 거듭 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보다 못한 장비가 답답하다
는 듯 소리쳤다.
“유씨 성이 아닌 자들도 왕위에 오르려고 야단들인데 형님이 아 니 될 게 무엇 있소? 형님은 바로 한실의 종친이 아니오? 까짓 한중 왕이 아니라 천자의 자리에 올라도 되겠소!”
“닥쳐라! 네가 무얼 안다고 여러 소리냐?”
유비가 역정을 내어 그런 장비를 꾸짖었다. 그의 깊이 모를 속에 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아직 왕위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진심인 듯했다.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다가 허망하게 무너졌고, 조조도 왕위로 나가려다 순욱, 순유 같은 오래된 재사들 을 잃은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일까.
그래도 제갈량은 단념하지 않았다. 한층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유비에게 졸랐다.
“주공께서 우선 편의에 따라 한중왕에 오르신 뒤 조정에 표문을 올려도 늦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반드시 허락하지 않으시리라는 법 도 없지 않습니까?”
뒷날 어떤 평자(評者)는 유비 및 그가 이끄는 집단을 가리켜, 현실 감각이 결여된 전통주의자이며 이미 백성들의 수탈 체제로만 전락 한 한을 계승하여 그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반동적인 집단으로 몰고 있다.
그는 또 유비와 제갈량을 한말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탈취하려는 야심가들이며, 조조 같은 새롭게 일어나는 혁명적 영웅을 시샘한 시 대 착오적 인물이라고까지 깎아내렸으나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지나 친 것 같다. 턱없이 유비만을 내세우는 비역사적 정통론에 대한 반 발이겠지만, 그것은 한쪽이 기우는 걸 바로잡으려고 다른 한쪽을 너 무 덜어내 이번에는 거꾸로 균형을 잃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권력을 향한 의지의 표명을 본다면 언제나 조조 쪽이 더 적극적이었고, 그 실현에 있어도 늘 유비보다 한발 앞섰다. 어떤 이 는 생전에 제위에 오르지 않은 것으로 그의 제위에 대한 야심을 묻 어주려 하나 그가 아들 조비를 위해 구축해둔 체제를 보면 반드시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유비의 사양도 반드시 고까운 위선으로 해석할 것까지는 없다. 유비는 제갈량을 비롯한 여 러 사람의 권유를 두 번 세 번 거듭 사양하다가 나중에야 겨우 허락 했다.
유비가 한중왕으로 나아가는 의식을 치른 것은 건안 이십사년 칠월의 일이었다.
면양에는 둘레 아홉 리의 단이 쌓아지고 오방을 정해 기치와 의 장이 벌여 세워졌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이 순서에 따라 늘어선 가 운데 허정과 법정이 유비를 단 위로 청해 올렸다. 유비는 거기서 왕 관과 옥새를 받고 남쪽을 향해 앉아 문무 벼슬아치들로부터 하례를 받았다.
이어 유비는 후사를 정함과 아울러 그때껏 자기를 거들어준 이들 의 벼슬을 올렸다. 아들 유선을 세워 세자로 삼고 허정은 그 스승인 태부(太傅)로 높였다. 법정은 상서령이 되었으며, 제갈량은 군사로서 이제는 나라의 모든 군무를 도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다섯은 장수 중에도 특히 오호대장 (五虎大將)으로 세워 남달리 높였으며, 위연은 한중 태수로 삼아 그 공을 추켜주었다. 그밖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각기 공에 따라 벼슬을 내리니, 그때껏 한 군사 집단에 지나지 않던 유비의 세력은 드디어 한 왕국의 체제를 갖추고 새로워졌다.
나라 안 일을 대강 마무리한 유비는 허도의 천자에게도 표문을 올렸다.
‘비는 한낱 벼슬아치로서 상장의 소임을 맡아 삼군을 이끌고 밖으 로 나왔으나, 아직 역적을 없애고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지 못했 으며 왕실을 든든히 하지도 못했습니다. 폐하의 거룩한 가르치심이 갈수록 힘이 없어짐과 천하가 아직 평안치 못함을 보고만 있으려니 걱정으로 머릿속이 쪼개지는 듯합니다.
지난날 동탁이 들어와 나라를 어지럽힌 뒤로 여러 흉측한 무리들 이 떼 지어 일어나 온 천지의 껍질을 벗겨놓듯 모질게 활개쳤습니 다. 그러하되 폐하의 성덕과 위엄에 힘입고 신하와 백성들이 뜻을 함께함으로써 더러는 충의로써 치고, 더러는 하늘이 벌을 내려 다행 히도 흉측한 무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직 조조가 남아 나라의 권세를 힘으로 차지하고 끔찍하고 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 뿐입니다.
신은 일찍이 거기장군 동승과 짜고 조조를 쳐 없애려 했으나, 일 을 꾸밈이 치밀하지 못해 오히려 동승이 죽는 꼴만 보게 되었습니 다. 그때 겨우 빠져나온 신은 근거지를 잃고 떠돌게 되매 마음에 가 득한 것은 충의뿐, 조조가 온갖 극악한 짓을 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 습니다.
조조가 황후를 시해하고 황자(皇)마저 짐새의 독으로 해침을 보 고 여럿이 힘을 모아 치고자 했으나 모두가 겁 많고 힘없어 그 또한 이 세월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언제나 두려운 것은 이러다 헛되이 죽어 끝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 게 되는 것이라, 자나깨나 탄식으로 긴 밤을 앓듯이 지냅니다.
이제 신이 거느리는 무리들은 『우서(虞書)』의 본보기를 따라 한 가지 외람된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천자가 구족(九族)에게 두텁게 대하고, 그들도 천자를 보살피고 도와, 제위와 왕위를 서로 주고받 는 것은 옛부터 있어온 법도입니다. 주나라를 살피건대 주실(周室) 은 종친 외에 희씨(姬氏)도 왕으로 세웠으나 끝내 힘을 다해 주실을 도운 것은 종친을 세운 진(晋)과 정(鄭)이었으며 우리 대한(漢)의고조(高祖)께서도 여씨(呂氏)를 세워 왕으로 삼은 적이 있으나, 마침 내는 그들을 베어내시고서야 나라가 평안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조조는 바르고 곧은 이를 미워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만 가득 모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흉측한 마음을 감추고는 있어도 실은 나라를 도적질할 마음이 이미 드러난 지 오랩니다. 그러하되 종친들 은 힘이 없고 이렇다 할 벼슬도 차지하고 있지 못해 제실을 도울 길 이 없기에 이제 옛날의 법식에 따라 신을 대사마 한중왕(漢中王)으 로 받들려 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데다 한 지방 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나 힘을 다해도 되는 일은 없고 허물 만 쌓아갈 뿐입니다. 그런 신에게 어찌 대사마 한중왕이 가당하겠습 니까? 오직 스스로의 죄를 무겁게 할 뿐이라 여겨 마다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을 따르는 무리가 의를 내세워 말하기를 신이 나서지 않 으면 역적을 없애고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사람이 없어 장차 제실마저 쓰러지고 말 것이라 하여 조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힘없으되, 그 또한 지나 들을 말은 아니라 몇 날을 두려움과 걱정으로 머리가 쪼개질듯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성 조(聖)를 평안히 모실 수 있다면 타는 불, 끓는 물속이라도 뛰어든 다는 마음으로 거느리고 있는 무리의 편법에 따라 먼저 옥새와 왕관 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폐하를 우러러 작호(號)를 빌려 하니 비록 두터운 은총을 받고 벼슬 또한 낮지 않았던 이 몸이나 걱정되고 두렵기가 마치 위태로운 낭떠러지에 선 듯합니다. 오직 힘과 정성을 다하여 군사를 기르고 여러 의로운 이들을 모은 뒤에 하늘의 뜻에 따르고 정해진 때에 맞추어 흉악한 역적을 칠 것을 맹세드리며 엎드려 표문을 올립 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유비가 올린 표문은 대강 그러했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어 허 락이 안 내릴 줄 뻔히 알면서도 최소한의 합법성을 갖추고 싶었던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