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5화 : 불길은 서천에서 형주로
불길은 서천에서 형주로
스스로 먼저 한중왕이 된 뒤에 다시 그 허락을 구하는 유비의 표 문이 허도에 이르자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소문을 들은 조조 는 성부터 먼저 냈다.
“이 돗자리나 짜던 어린 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내 맹 세코 이놈을 죽이리라!”
길길이 뛰며 그렇게 소리치고 곧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모든 장졸들로 하여금 싸우러 나갈 채비를 차리게 하라! 그들과
더불어 서천으로 가서 유비 그놈과 결판을 내리라!”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서며 그런 조조를 말렸다.
“대왕께서 한때의 분노를 못 이기시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멀리 싸우러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구태여 활을 당기고 화살을 쏘지 않아도 유비로 하여금 서천에 앉은 채 화 를 입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군사가 지치고 그의 힘이 다 했을 때 장수 하나만 보내면 서천은 어렵지 않게 평정될 것입니다.”
조조가 못마땅한 눈길로 그를 보니 다름 아닌 사마의였다. 그의 충성은 썩 미덥지 않아도 재주는 믿는 조조라 얼른 낯빛을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중달(仲)은 무슨 좋은 계책이 있는가?”
“강동의 손권을 움직이면 됩니다. 손권은 그 누이를 유비에게 시 집보냈으나 틈이 벌어지자 몰래 데리고 와버렸고, 유비는 또 빌린다 는 핑계로 형주를 차지한 뒤 아직껏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서 서로 이를 갈고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 이제 말 잘하는 이를 하나 뽑아 손권을 달래보도록 하십시오. 손권이 거기 따라 크게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치면, 유비는 동천, 서천의 군사를 함빡 이끌고 형주 를 구하러 올 것입니다. 그때 대왕께서 군사를 보내 한중과 서천을 치면 유비는 꼬리와 머리가 서로 돌볼 틈이 없이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지고 맙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멋진 계책이었다. 몹시 기뻐하며 곧 글을 닦아 만총(滿寵)에게 주며 강동으로 보냈다. 강을 건넌 만총이 손권에게 만나보기를 청하자 손권은 먼저 모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물었다.
“조조가 만총을 보냈다는데,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겠소?”
“위와 오는 원래 원수진 일이 없으나 제갈량의 말에 넘어가 양가 가 싸움 없이 넘기는 해가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 에 수많은 목숨이 지고, 백성들은 살이의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짐작건대 이제 만총이 온 것은 틀림없이 화평의 뜻을 전하려는 것일 듯싶으니 주공께서는 예의를 갖추어 대접하도록 하십시오.”
유비와 제갈량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닌 장소가 일어나서 그렇 게 권했다. 손권도 누이를 데려온 뒤로는 더욱 유비와 사이가 틀어 져 있던 터라 군소리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곧 모사들을 보내 만 총을 성안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만총이 들어와 예를 표하자 손권은 그를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며 맞았다. 만총이 조조가 써준 글을 올리며 말했다.
“오와 위 두 나라는 원래 원수진 일도 없으면서 유비 때문에 사이 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편을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 못 됩니 다. 이제 위왕께서는 저를 보내시어 장군께서 형주를 치도록 권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위왕께서는 서천으로 군사를 내시어, 유비의 머 리와 꼬리를 한꺼번에 두들기려는 것입니다. 유비를 쳐부순 뒤에는 그 땅을 같이 나눠 가지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세우자고 하십니다.”
손권이 대답 없이 조조가 보낸 글을 뜯어보니 거기 적힌 내용도 같은 소리였다. 손권은 잔치를 열어 만총을 잘 대접하고 객사로 보 내 쉬게 한 뒤 모사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물었다.
고옹이 일어나 말했다.
“이게 비록 우리를 꾀는 소리라 해도 그럴듯한 데가 있습니다. 이 제 한편으로는 만총을 보내 조조와 약조를 맺고 유비의 꼬리와 머리 를 한꺼번에 두들기는 일을 진척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강 건너로 보내 관우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하십시오. 일은 그 뒤에 손을 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근은 고옹과 생각이 달랐다.
“제가 듣기로 운장은 형주로 온 뒤에 유비가 장가를 들여주어 아 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합니다. 그 딸은 아직 어려 혼처를 정하 지 않았으니 제가 가서 주공의 세자와 정혼하자고 청해보겠습니다. 만약 운장이 허락하면 바로 운장과 함께 의논해 힘을 합쳐 조조를 칠 것이요,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때 가서 조조를 도와 형주를 뺏어 버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든 유비 쪽에도 한번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서 제갈근은 그 런 계책을 내놓았다. 유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 으나 손권도 감정대로만 할 수는 없었다. 유비가 없어진 뒤 과연 조 조가 자신과 함께 천하를 나눠 가질지는 유비가 아무 소리 없이 형 주를 내놓는 일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려웠다. 잠깐 생각하다 제갈근 의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손권은 먼저 좋은 답을 주어 만총을 허도로 돌려보낸 뒤, 다시 제 갈근을 사자로 삼아 형주로 보냈다. 형주에 이른 제갈근은 성안으로 들어가 관우를 찾았다.
“자유)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오시었소?”
관우가 제갈근을 맞으며 의심쩍은 눈길로 물었다. 제갈근이 준비 해간 대로 대답했다.
“특별히 양쪽 집안을 좋은 일로 맺어주려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저희 주인 오후께는 아드님이 한 분 계시는데 매우 총명하십니다. 마침 장군께 따님이 한 분 계시다는 말을 듣고 특히 저를 보내 혼인을 청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번에 양쪽 집안이 맺어져서 힘을 합쳐 조조를 쳐부순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간곡 히 청하오니 군후(君侯)께서는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하지만 관우는 헤아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제갈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성이나 소리쳤다.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 보낼 수 있겠는가! 그대 아 우의 낯을 보지 않았더라면 선 채로 그대의 목을 베었으리라. 여러 소리 말고 물러가라.”
그러고는 좌우를 불러 제갈근을 쫓아냈다. 그 청혼 뒤에 숨은 동 오(東吳)의 간계를 알아차리고 그랬다고 보아줄 수도 있지만, 뒷사 람들 가운데는 그걸 지나친 자부심의 병이었다 말하는 이도 있다. 천하의 셋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손권을 개에 견주고 스 스로는 범에 견주었으니 실로 끝 모를 자부심이라 아니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또한 그게 유비에게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잃게 만들 고 스스로에게는 목숨을 재촉한 계기 중의 하나가 됐으니, 유비에게 는 한사恨)요, 그 자신에게는 병이라 할 만하다.
머리를 싸안고 쫓겨간 제갈근은 손권에게 돌아가 관운장에게서 들은 대로 전했다. 그 소리를 듣고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손권이 머 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소리쳤다.
“그놈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곧 장소를 비롯한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불러모아 형주를 칠 의논에 들어갔다.
손권이 분한 마음을 못 이겨 무턱대고 형주로 군사를 내려 하자 보질이 나서서 깨우쳐주었다.
“조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나라를 없애고 천자 자리를 제가 차 지하려 마음먹었으나 유비가 두려워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으로 사자를 보내 촉을 치라고 권하는 것은 유비의 칼끝을 우리 동오에게로 돌리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형주를 되찾으려 한 지 이미 오래요. 형주를 되찾 자면 유비와 싸우는 수밖에 더 있소?”
손권이 언짢은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보질은 그런 손권에게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지금 조인은 양양과 번성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있는데, 그 땅과 형주 사이에는 장강의 험한 물줄기가 가로놓이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만 밟고도 형주를 치러 갈 수 있는데 어째서 스스로 치지는 않고 주공께 군사를 내라고 조릅니까? 그것만 보아도 조조의 속셈은 뻔 합니다. 주공께서는 먼저 허도에 사람을 보내 조조로 하여금 조인에 게 뭍길로 형주를 치라는 영을 내리게 하십시오. 조인이 형주로 밀 고 들면 관운장은 반드시 군사를 움직여 번성을 빼앗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관우가 움직일 때 주공께서 장수 하나를 뽑아 가만히 형주 를 치게 하면 단번에 뺏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권하는 대로만 하기에는 꺼림칙한 데가 있던 손권도 보질 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사자를 허도로 보내 조조에게 형주로 먼저 군사를 내주기를 청했다.
조조는 동오가 군사를 움직이겠다는 말에 기뻐 사자를 잘 대접해 동오로 돌려보내고, 다시 만총을 번성으로 보냈다. 거기 있는 조인을 도와 형주를 치게 하려 함이었다.
이때 유비는 위연에게 군마를 맡겨 한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여러 벼슬아치와 더불어 성도로 돌아가 있었다. 새로 왕위에 올랐으 니 궁궐도 짓고 관부와 역관을 마련해야 했기에 연일 분주한 나날이 었다. 성도에서 백수까지 사백여 곳에 우정)을 마련해 나라 안 의 연락이 빠르고 손쉽게 만든 것도 그 무렵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군량과 마초를 쌓고 창칼을 만들어 중원을 엿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곳에 풀어놓은 세작 가운데 하나가 달려와 급한 소식을 전했다.
“조조가 동오와 손을 잡고 형주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깜짝 놀랐다. 얼른 공명을 불러 어찌했으면 좋을까를 물었다. 공명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조조가 반드시 이따위 계책을 꾸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동오 에는 재주 있는 모사들이 매우 많으니 조조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조조로 하여금 조인에게 먼저 군사를 움직이라 는 영을 내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 아니겠소? 운장은 등과 배로 적을 맞게 될 터인즉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유비가 한층 걱정스런 얼굴로 말을 받았으나 공명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사람을 운장에게 보내어 먼저 군사를 일으키게 하십시오. 운장이 번성을 두들겨 빼앗아버리면 적군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절로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그게 어떤 결과로 끝날지 모르지만, 우선은 듣기만이라도 시원했다.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전부사마 비시(費詩)를 뽑아 형주로 보 냈다.
비시가 형주에 이르자 운장은 성을 나와 그를 맞아들였다. 예를 끝낸 뒤 운장이 비시에게 물었다.
“우리 형님 한중왕께서는 나에게 어떤 벼슬을 내리셨소?”
“오호대장의 으뜸으로 세우셨습니다.”
비시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관우가 되물었다. “오호대장이란 무엇이오?”
“장군과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다섯 분을 여러 장수 가운데서도 특히 높이 쳐서 그렇게 이름하셨습니다.”
비시는 아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관우가 대뜸 성난 소리로 외쳤다.
“익덕은 내 아우니 말할 것 없고, 마초는 여러 대에 걸쳐 이름 있 는 집 자손이요, 자룡은 형님을 따른 지 오래되어 나와 나란히 서도 될 것이나, 황충은 어떤 자이건대 감히 나와 같은 줄에 섰단 말인가! 대장부로서는 결코 그따위 늙은 졸개와 같은 줄에 서지는 않을 것 이오!”
그리고 유비가 내린 인수를 받으려 들지 않았다.
비시는 난감했다. 잠시 생각하다 문득 빙그레 웃으며 관우에게 타
일렀다.
“그것은 장군께서 틀리신 말씀입니다. 지난날 소하와 조참은 고조(高祖)와 더불어 대사를 일으켜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한신은 초 (楚)에서 달아난 장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왕이 되어 소하와 조참의 윗자리에 올랐건만 소하와 조참이 그 일을 원망 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한중왕께서는 비록 장군을 오 호대장의 으뜸으로 세우셨으나, 장군은 한중왕과 형제이시니 한 몸 이나 다름없습니다. 곧 한중왕이 장군이요, 장군이 한중왕인 것입니 다. 어찌 다른 사람이 거기 미치겠습니까? 장군께서는 한중왕 전하 의 두터운 은혜를 입으셨으니 마땅히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화와 복을 더불어 나누셔야 합니다. 벼슬 이름이나 그 높고 낮음을 남과 견주는 것은 장군께서 하실 일이 못됩니다. 부디 깊이 헤아려주십 시오.”
그제서야 관우도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비시에게 두 번 절하며 말했다.
“내가 사람됨이 밝지 못해 그대의 가르침이 아니었던들 큰일을 그르칠 뻔했소.”
그리고 두말 없이 한중왕이 내린 인수를 받았다. 비시는 이어 관 우에게 군사를 내어 번성을 뺏으라는 한중왕의 명을 전했다.
관우는 곧 그 명을 받들어 부사인과 미방을 선봉으로 군사 한 갈 래를 성 밖으로 내는 한편 성안에 큰 잔치를 벌여 비시를 대접했다. 관우와 비시가 권커니 작커니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가운데 밤은 깊어 이경 무렵이 되었다. 문득 사람이 달려와 성 밖으로 나가 있는 군사들의 진채에서 불이 난 것을 알렸다. 관우는 급히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올라 성을 나갔다. 알아보니 부사인과 미방이 술을 마시는데 군막 뒤에 불이 붙어 화포 쪽으로 옮은 것이었다.
화포 곁에 있던 유황과 염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온 진채 를 흔드는 가운데 거센 불길은 모든 군량과 마초 및 병장기를 깡그 리 태워버렸다.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불길을 잡으려 애썼으나 사경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불이 꺼졌다. 성안으로 돌아간 관우가 부사인과 미방을 불러들여 꾸짖었다.
“나는 너희 둘을 믿고 선봉으로 삼았는데, 미처 싸움터로 나가기 도 전에 불을 내어, 군량과 마초며 군기(軍器)를 모두 태우고 터진 화포에 군마까지 죽였다. 이토록 일을 그르쳐놓았으니 너희 같은 것 들을 어디다 쓰겠느냐!”
그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둘을 끌어내 목 베라 소리쳤다. 비시가 그런 관우를 말렸다.
“아직 군사를 내기도 전에 먼저 장수를 둘씩이나 목 벤다는 것은 이롭지 못합니다. 잠시 벌주는 일을 미루도록 하십시오.”
그래도 관우는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비시가 말리니 마지못해 듣기는 해도 둘을 용서하는 기색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내가 비 사마의 낯을 보지 않았더라면 너희 둘은 반드시 목이 떨 어졌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에게 장(杖) 마흔 대를 때리게 했다. 그리고 선봉의 인수를 거두어들인 뒤 미방은 남군을, 부사인은 공안을 지키 게 남기면서도 으름장을 잊지 않았다.
“내가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는 날까지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이번의 죄를 합쳐 물을 것이니 그리 알라!”
이에 두 사람은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물러났다. 관우의 이번 싸움길에 나타난 첫 번째 좋지 못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조짐 따위를 믿지 않는 관우는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 없 이 군사를 냈다. 요화를 뽑아 다시 선봉을 세우고, 수양아들 관평을 부장으로 삼은 뒤, 마량과 이적을 참군으로 삼아 번성으로 밀고 들 작정이었다. 비시는 서천으로 돌아갔다. 이때 호화의 아들 호반을 데리고 갔는데, 이는 관우가 지난날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는 호반 을 사랑하여 그를 유비에게 천거하려고 비시에게 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관우가 군사를 움직이기에 앞서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조 짐이 나타났다. ‘수)’자 큰 깃발 앞에 제사를 드린 뒤 군막 안에 서 잠깐 졸고 있을 때였다. 문득 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관우의 왼쪽 발을 꽉 물었다. 크기가 황소만 하고 온몸이 먹물을 뒤집어쓴 듯 검 은 돼지였다. 관우는 놀라 칼을 빼어 한칼에 그 돼지를 베어버렸다. 죽어 자빠지는 소리가 마치 비단을 찢는 듯했다. 관우가 그 소리 에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꿈에서 깬 뒤에도 왼발이 욱신거려 관우도 마음으로 몹시 이상한 느낌이 들 었다.
때마침 관평이 장막으로 들기에 관우가 그 꿈 얘기를 하고 길흉을 물었다.
“돼지 또한 용의 상이 있는 짐승입니다. 발에 붙었다면 이는 아버님께서 높이 오르실 것임을 뜻함이니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관평이 좋게만 해몽을 해 관우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관우는 아무 래도 미심쩍어 여러 관원들을 모아놓고 다시 그 꿈을 물었다. 어떤 이는 좋은 꿈이라 하고 어떤 이는 나쁜 꿈이라 하여 뜻이 한가지로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그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를 듣던 관우가 문 득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만들 하라. 대장부 나이 예순에 가까우니 이 자리에서 죽은들 한될 게 무엇이겠느냐!”
그런데 미처 관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이 들어와 촉으로부 터 한중왕 유비가 보낸 사신이 왔음을 알렸다. 관우를 전장군 가절 월(假節) 도독 형양구군사(荊襄九郡事)로 삼는다는 왕지(王旨)를 가지고 온 사신이었다. 운장이 엎드려 그 명을 받들자 여러 관원들 이 경하하며 말했다.
“공연한 걱정을 한 듯싶습니다. 이게 꿈에 돼지를 본 데서 온 상 서로운 일이 아닐는지요.”
그 말에 관우도 그 꿈이 나쁜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렸다. 관 우는 다시 기세를 되찾아 양양으로 가는 대로로 군사를 몰아 나아 갔다.
성안에 있다가 갑자기 관공이 대병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들은 조인은 크게 놀랐다. 감히 나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성안에서 굳게 지키기만 했다.
부장 적원이 나서서 조인을 충동질했다.
“지금 위왕께서는 장군께 동오와 힘을 합쳐 형주를 치라는 영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쳐들어왔으니 이는 관우가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들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장군 께서는 어찌하여 싸움을 피하기만 하십니까?”
조인도 원래가 무장이라 싸움을 그리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거 기다가 적원이 부추기고 나서자 절로 손발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조인이 은근히 싸울 마음이 생겨 움직이려 드는 걸 만총이 말렸다.
“제가 알기로 관운장은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모도 뛰어난 사람이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굳게 지키는 것이 상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사납고 날래기로 이름깨나 얻은 장수인 하후존이 나서 적 원을 편들었다.
“그것은 한낱 글이나 읽는 선비의 소립니다. 물이 쏟아지고 흙이 밀려오듯 적군이 덮쳐와야 나가 맞서겠다는 뜻입니까? 지금 우리 군사는 편안히 앉아서 기다리고 적군은 수고스럽게 먼 길을 달려왔 습니다. 나가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조인도 결국은 무장들의 편을 들었다. 하후 존의 시원스런 말을 따르기로 하고 만총에게 번성을 지키게 한 뒤, 스스로 군마를 이끌고 관공을 맞으러 성을 나갔다.
관공은 조인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자 관평과 요화를 불러 계 교를 주고 기다렸다.
이윽고 조인의 군사들이 이르자 양쪽 군대는 마주 보고 둥글게 진을 쳤다. 관공 쪽에서 먼저 요화가 나와 싸움을 돋우자 조인 쪽에 서는 적원이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가 싶더니 얼마 안 돼 요화가 거짓으로 져주며 쫓기기 시작했다. 힘이 솟은 적원이 군사를 휘몰아 관공의 형주군사를 들이치니 형주군은 이십 리나 쫓긴 뒤에야 겨우 수습됐다.
다음 날이 되었다. 첫 싸움에 이겨 힘을 얻은 조인은 적원과 하후 존을 한꺼번에 내보내 형주군을 휩쓸었다. 거기에 당해내지 못한 형 주군은 다시 쫓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원과 하후존이 한 이십 리 쯤이나 형주군을 뒤쫓았을까, 홀연 등 뒤에서 한소리 포향이 터지더 니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조인은 그제서야 관공의 꾐에 빠진 걸 알았다. 적원과 하후존에게 전령을 보내 급히 앞서 나간 군대를 되돌리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 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정신없이 쫓기는 줄만 알았던 요화와 관평이 등 뒤에서 쏟아졌다. 적을 뒤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조 인의 군사들은 단번에 크게 어지러워졌다.
관공의 계교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줄 안 조인은 급했다. 보이는 대로 한 갈래 군사를 모아 양양을 향해 달렸다. 갑자기 그곳이 걱정 이 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성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한 떼의 군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수놓은 깃발 아래 말 위에서 청룡도를 비껴 들고 서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관공이었다.
관공을 보자 그러잖아도 쫓기던 조인은 간이 오그라들고 오금이 저렸다. 감히 맞싸워 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양양으로 난 언덕길로 달아나기 바빴다. 관공은 그런 조인을 애써 쫓지 않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잖아 다시 하후존이 이끄는 군사가 관공이 지키고 있는 길목에 이르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나 할까, 하후존은 관공을 보고도 겁내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덤볐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림없는 싸움이었다. 하후존은 단 한 번 창칼을 맞대고 관공의 청 룡도에 쪼개져 죽었다.
조인의 또 다른 장수 적원도 끝내 무사하지는 못했다. 하후존이 죽는 걸 보고 급히 달아났으나 관평이 뒤쫓아가 역시 한칼에 그 목 을 쳐버렸다. 관공이 그 기세를 타고 군사를 휘몰아 덮치니 쫓기던 조인의 군사는 태반이 양강에 빠져 죽었다.
마침내 양양을 단념한 조인은 남은 군사와 더불어 번성으로 물러 나 지키기만 했다. 관공은 한 싸움으로 양양을 뺏은 뒤 군사들을 상 주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수군사마 왕보(甫)가 그런 관공에게 걱 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장군께서는 북소리 한 번으로 양양을 떨어뜨리고 조조의 장졸들 을 떨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동 오가 걱정스럽습니다. 동오의 장수 여몽은 육구에다 군사를 모아놓 고 언제나 형주를 삼킬 틈만 노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조와 싸우는 틈에 재빨리 군사를 내어 형주를 들이치면 그때는 어쩌시겠 습니까?”
관공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 잘됐다는 투로 대답했다. “나도 실은 그게 걱정이 되네. 자네가 그 일을 맡아 내 걱정을 좀 덜어주게. 지금부터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며 이십 리 또는 삼 십 리마다 높은 곳을 따라 봉화대를 세우도록 하게. 각 봉화대마다 군사 쉰 명을 주어 지키게 하되 오병이 강을 건너면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이곳에 알리도록 하는 걸세. 그때는 내가 몸소 달려가 오병을 쳐부수어버리겠네.”
좋은 방책이기는 했으나 왕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 이었다. 이번에는 남군과 공안을 걱정했다.
“미방과 부사인이 두 곳 험한 길목을 지키고 있으나 힘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반드시 따로 한 사람을 보내 형주를 도맡아 보 살피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은 내가 이미 치중 반준濬)을 보냈네. 걱정 안 해도 될걸세.”
관공이 이번에는 좀 마음이 놓인다는 듯 그렇게 밝혔다. 그러나 왕보의 얼굴빛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반준은 시기심이 많고 이익을 지나치게 탐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중요한 일에 그 사람을 써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군중의 양곡 일을 도맡아보고 있는 조루(趙累)로 바꾸십시오. 조루는 사람이 충성되고 청렴하니, 그 사람을 쓴다면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도 반준의 사람됨을 알고 있으나 이미 정해버린 일일세. 다시 꼭 고쳐야 할 까닭은 없을 듯하니 그대로 보내겠네. 또 조루는 조루 대로 지금 맡고 있는 일 또한 중대하니 그대로 군량을 관리하도록 하는 게 좋을걸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나하고 봉화대를 쌓는 거 나 살펴보러 가세.”
그 그릇된 인선이 나중에 어떤 화를 부를지 알 길 없는 관공은 그 렇게 반준의 일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왕보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 지 않아 은근히 섭섭한 느낌까지 품은 채 관공 앞을 물러났다.
관공은 동오에 대비한 조치를 끝내기 바쁘게 관평을 불러 말했다.
“되도록 많은 배를 모아라. 군사들과 더불어 강을 건너 번성까지 마저 뺏으리라!”
한편 조인은 하후존과 적원두 장수를 잃고 얼마 남지 않은 장졸 들과 더불어 번성으로 쫓겨갔다.
“공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갔다가 군사와 장수만 잃고 양양까지 빼 앗겼소. 이제 참으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소.”
그러자 만총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나 적을 헤아려 움직이시어 욕을 사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관우는 범 같은 장 수에 지모까지 넉넉합니다. 가볍게 맞서는 것보다는 굳게 지키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때 다시 군사 하나가 뛰어들어와 알렸다.
“관우가 강을 건너 번성을 치러 오고 있습니다.”
조인은 그 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만이 그런 조인에게 다시 한 번 더 일깨워주듯 말했다.
“다만 굳게 지키기만 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관우라 해도 든든한 성벽에 의지해 지키고만 있는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인 곁에서 듣고만 있던 부장 여상(呂常)이 문득 분연한 목소리 로 만총에게 대들듯 말했다.
“도대체 관우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움츠러들기만 하십니까? 제게 군사 몇천만 주십시오. 오는 적군을 양강 안에서 막아보겠습니다.”
“아니 되오.”
만총이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여상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들 문관들은 언제나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하니 도대체 적 은 언제 물리친단 말이오?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치라는 병법 의 가르침도 듣지 못하셨소? 지금이 바로 관우의 군사들이 반쯤 강 을 건넜을 때인데, 어찌하여 가서 치면 안 된단 말이오? 적병이 성 아래에 이르고 다시 참호가에까지 밀려들면 그때야말로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조인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만총이 말리는데도 여상에게 군사 이천을 떼어주며 번성을 나가 관공과 싸우게 했다. 우쭐해진 여상은 군사들을 몰아 강어귀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수 놓은 깃발이 펄럭이고 그 아래 관공이 청룡도를 비껴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여상이 칼을 빼들고 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모두 나아가라! 나아가 적을 무찔러라!”
그렇지만 볼만한 것은 여상의 용기일 뿐 졸개들은 달랐다. 졸개들 은 관공의 늠름한 모습만 보고도 겁을 집어먹고 아무도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여상이 소리 높여 꾸짖어도 꿈쩍 않는 것이었다.
그걸 본 관공이 먼저 군사를 냈다. 슬쩍 손을 저어 군사를 휘몰아 덮치니 여상의 군사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그대로 뭉그러져 달 아났다.
다시 조조편의 대패였다. 나갔던 마보군은 절반이 꺾인 채 번성 으로 되쫓겨 들어왔다. 여상에게 은근히 기대했던 조인은 급히 군사 를 내어 그들을 성안으로 거둬들이고 그날 밤으로 사람을 뽑아 장안의 조조에게로 보냈다.
‘관운장이 대병을 일으켜 양양을 빼앗고 지금은 번성을 에워쌌습니다. 일이 매우 위급하니, 바라건대 어서 좋은 장수를 보내 구원해 주십시오.’
대략 그런 내용이 적힌 글과 함께였다. 그렇게 조조가 서천에다 지르려던 불은 엉뚱하게 형주로 번졌다.
조인의 글을 받아 읽은 조조는 놀람 반 분노 반으로 줄지어 서 있는 신하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대가 가서 번성을 포위하여 구하라!”
“알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대답하며 나오는 사람을 보니 다름 아닌 우금이었다. 젊어 서부터 조조를 따라 수많은 싸움터를 누비며 공을 세운 장수라 조조 가 믿고 고른 것이었다.
“하오나 쓸 만한 선봉을 하나 붙여주십시오. 그와 함께 군사를 이 끌고 갔으면 합니다.”
우금이 다시 그렇게 청하자, 조조가 이번에는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선봉이 되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힘을 아끼지 않고 관아무개를 사로잡아 대왕께 바치오리다!”
누가 씩씩하게 소리치며 나오는데, 여럿이 보니 바로 마초 아래있다가 항복해 온 장수 방덕이었다. 방덕의 용맹과 지모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 조조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 관아무개는 위세가 우리 전토를 떨쳐 울리고 있는 사람이오. 이제까지는 맞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나 우리 영명(名)을 만나면 그도 힘깨나 들 것이오.”
그러고는 우금을 정남장군으로 높이고 방덕은 정서도선봉征西都 先鋒)으로 삼았다. 그들이 데리고 갈 군사도 일곱 갈래의 대군으로, 갈래마다 북군의 굳세고 날랜 군사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동형(董衡)과 동초(董超)라는 장교가 있어 그날 모 든 장교 우두머리들을 데리고 우금을 찾아보러 왔다가 말했다.
“이제 장군께서는 일곱 갈래의 큰 군사를 거느리고 번성의 어려 움을 풀어주려 가시는 바, 틀림없이 이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방덕 을 선봉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일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우금이 놀라 동형에게 물었다. 동형이 머뭇머뭇 까닭을 밝혔다.
“방덕은 원래 마초 밑에서 부장 노릇을 하던 이로, 마지못해 위에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옛 주인 마초가 촉에 있으면서 오 호대장의 하나에 들어 있으니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형 방유도 역시 촉에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낮지 않은 벼슬아치가 되어 있다 합니다. 지금 그런 방덕을 선봉으로 삼 는 것은 기름을 뿌려 불을 끄려는 것이나 다름없건만 장군께서는 어 찌하여 이 일을 위왕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을 뽑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우금도 적잖이 의심이 들었다. 그 밤으로 곧 조 조를 찾아보고 낮에 동형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다. 조조 또한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일이 꺼림칙했다. 곧 방덕을 불러들여 선봉의 인수를 거두어들였다.
“제가 바야흐로 대왕을 위해 힘을 써보려는데 대왕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저를 쓰려 하지 않으십니까?”
밤중에 불려와 선봉의 자리를 되내놓게 된 방덕이 놀라 물었다. 조조가 어색한 얼굴로 그 물음을 받았다.
“내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나, 지금 그대의 옛 주인 마 초가 서천에 있고 또 그대의 친형 방유도 서천에 있으면서 모두 유 비를 돕고 있다. 설령 내가 그대를 믿는다 해도 여러 사람의 입을 다 막을 수가 없구나. 그대는 너무 섭섭히 여기지 말고 다른 때를 기다 리라.”
그 말을 들은 방덕은 관을 벗어 내던지고 머리를 땅에 짓찧어 얼 굴 가득 피를 흘리며 소리쳤다.
“제가 한중에서 항복한 이래 번번이 두터운 대왕의 은혜를 입었 습니다. 설령 간과 뇌를 땅바닥에 쏟는다 해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 이 없건만 대왕께서는 어찌 저를 의심하십니까? 제가 지난날 고향 에 있을 때 형과 함께 살았는데 형수가 매우 어질지 못해 술 취한 제가 죽여버린 일이 있습니다. 그 뒤로 형은 제게 대한 원한이 뼛속 까지 스며 다시는 저를 보지 않겠다 맹세했다 하니, 그로써 우리 형 제의 의는 끊어진 것입니다. 옛 주인 마초와도 또한 같습니다. 마초 는 비록 용맹은 있어도 꾀가 없어, 싸움에 지고 땅을 잃은 뒤, 외로 운 몸으로 서천으로 갔습니다. 이제 그와 나는 각기 딴 주인을 섬기 게 되었으니 옛날의 맺음은 이미 끊어진 것입니다. 이 방덕이 그토록 두터운 대왕의 은혜를 입고도 어찌 감히 터럭만큼이라도 딴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부디 굽어살펴주십시오.”
그런 방덕의 말에는 마디마디 진정이 배어 있었다. 사람의 그 같 은 진정을 몰라줄 조조가 아니었다. 얼른 계하로 내려가 방덕을 부 축해 일으키며 달래었다.
“나는 평소부터 공의 충의를 알고 있었소. 조금 전에 한 말은 공 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니, 공은 이번 에 가서 꼭 큰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공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도 공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방덕은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혀 조조에게 절하고 물러갔다. 집으로 돌아간 방덕은 곧 목수를 불러 좋은 관 하나를 짜게 했다. 그리고 그 관을 사랑방에 놓아둔 채 여러 벗들을 불러모았다. 그 관을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장군은 싸움터로 나가시면서 무슨 까닭으로 저토록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만드셨소?”
그러자 방덕이 잔을 들어올리며 맹세하듯 말했다.
“나는 위왕의 두터운 은혜를 죽음으로 갚으려 하오. 이번에 번성 으로 가면 나는 관아무개와 결판을 낼 것이니, 내가 저를 죽이지 못 하면 저가 나를 죽일 것이오. 또 나도 저를 죽이지 못하고 저도 나를 죽이지 못하게 되면 마땅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 바, 어찌 됐건 이 관은 필요하오. 다시 말해, 나는 이 관으로 내가 빈손으로는 살아 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뜻을 여러분에게 보이고 있소이다.”
방덕의 그 같은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탄을 금치 못했다.
방덕은 또 그 아내 이씨와 그 아들 방회(龐會)를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이제 가면 관아무개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만 약 내가 관우에게 죽음을 당하거든 너희는 내 시체를 찾아다 이 관 에 넣고 장사 지내라. 다행히 내가 관우를 죽이면 그때는 그 목을 베 어 여기다 넣어서 위왕께 바치리라.”
그런 방덕의 말을 전해 들은 그의 부장들은 한결같이 찾아와 말했다.
“장군께서 이렇도록 충성과 용맹을 다하시려는데 저희들이 어찌 힘을 다해 장군을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방덕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거느린 장수 들까지도 분발시킨 뒤에 떠났다.
어떤 사람이 그 일을 조조에게 전했다. 조조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여럿을 둘러보며 말했다.
“방덕의 충성과 용맹이 그와 같다면 내가 근심할 게 무엇 있겠는가.”
그러나 가후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조조에게 한마디 귀띔해 주었다.
“방덕이 혈기만 믿고 관우와 죽기로 싸운다면 그 뒤가 매우 걱정 스럽습니다. 그의 혈기를 좀 억눌러두는 게 좋겠습니다.”
조조도 금세 그 말을 알아들었다. 곧 방덕에게 사람을 보내 경계 하는 말을 전하게 했다.
‘관우는 지모와 용맹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자니 가볍게 맞서지 말라. 빼앗을 수 있으면 빼앗되, 그렇지 못하거든 삼가며 지키기만 하라.’
그 같은 조조의 말을 전해 들은 방덕은 은근히 부아가 났다.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관우만 이토록 대단하게 여기시고 나는 낮 춰 보시는가? 내 이번에 가면 마땅히 그를 꺾어 그의 삼십 년에 걸 친 헛이름을 깨부숴버리리라!”
“아닐세. 대왕의 말씀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대로 하도록 하세.”
우금이 그렇게 방덕의 지나친 자만을 타일렀다. 그러나 방덕은 그 런 소리를 들을수록 더 오기가 났다. 군사들을 이끌고 앞장서 번성 으로 달려가 북과 징을 크게 울리며 관우에게 덤볐다.
이때 관공은 자신의 군막에 단정히 앉아 번성을 우려뺄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탐마(馬)가 달려와 알렸다.
“조조가 우금을 장수로 삼아 일곱 갈래의 대군을 보냈다고 합니 다. 전부의 선봉은 방덕으로 큰 관을 앞세우고 매우 듣기 험한 욕을 퍼붓는데, 거기에는 장군과 죽을 때까지 싸우리란 맹세까지 들어 있 습니다. 이제 그 군사는 성 밖 삼십 리쯤 이르렀습니다.”
관공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을 붉히고 아름다운 수염을 떨며 성난 소리를 냈다.
“천하의 영웅들도 내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는 데, 방덕 그 더벅머리 아이가 어찌 감히 나를 얕본단 말이냐? 관평 을 시켜 번성을 치게 하는 한편, 내 몸소 가서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목 베고 이 분한 마음을 풀리라!”
그러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관평이 그런 관공을 말렸다.
“아버님께서는 태산같이 높으신 분이신데 어찌 보잘것없는 돌멩 이 같은 방덕과 그 높고 낮음을 가리려 하십니까? 제가 아버님을 대 신해 가서 방덕과 싸울테니 아버님께서는 여기 그냥 계십시오.”
관공의 성미를 잘 알아 한 말이었다. 자기를 태산에 견주고 방덕 을 보잘것없는 돌멩이로 낮추는 관평의 말에 약간 마음이 풀린 관공 은 양아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네가 한번 가보아라. 나도 곧 뒤따라가 너를 도와주마.”
그렇게 허락하고 관평에게 군사 약간을 떼어주었다.
관공의 군막을 나온 관평은 곧 칼을 빼들고 말에 올라 군사들과 더불어 방덕을 맞으러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그토 록 자기편의 힘을 빼놓는 어려운 싸움이 될 줄은 젊은 관평은 짐작 조차 못했다. 형주로 옮아붙은 불은 이제 붙어도 된통 붙게 된 셈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