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6화 : 빛나구나, 관공의 무위

랜덤 이미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6화 : 빛나구나, 관공의 무위


빛나구나, 관공의 무위

오래잖아 마주친 방덕과 관평의 양군은 곧 둥글게 진을 치고 싸 울 태세에 들어갔다. 위군(魏軍) 진영 한곳에 검은 기 하나가 높다랗 게 걸렸는데 거기에는 ‘남안 방덕’이란 네 글자가 흰색으로 크게 씌 어 있었다. 방덕은 푸른 전포 은투구에 큰 칼을 비껴 들고 흰 말 위 에 앉은 채 진 앞으로 나왔다. 그의 등 뒤에는 오백의 군병이 뒤따르 는데 한쪽에는 정말로 보졸 몇이 나무로 만든 관을 어깨에 메고 서 있었다.

“옛 주인을 저버린 도적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 이 칼을 받아라!” 

문득 관평이 그 앞에 나타나 방덕을 보고 외쳤다. 관평은 방덕을 알아보았으나 방덕은 관평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저 장수가 누구냐?”

방덕이 곁에 있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중에 하나가 아는체를 했다.

“저것은 관우의 양아들 관평입니다.”

그 말을 들은 방덕이 별로 탄하는 기색도 없이 되받아 관평을 나무랐다.

“나는 위왕의 뜻을 받들어 네 아비의 목을 가지러 왔다. 너 같은 머리에 쇠똥도 벗어지지 않은 어린아이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니, 어서 아비나 이리 나오라고 해라!”

그러자 관평이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박차 덤벼들었다. 방덕 또 한 칼을 비껴들고 마주 달려 나가니 곧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 어졌다. 방덕도 대단하지만 관평도 어지간했다. 서로 엉겼다 떨어지 기를 서른 번이나 해도 이기고 짐이 뚜렷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 날은 그쯤에서 싸움을 멈추고 각기 돌아가 군사들을 쉬게 했다.

그 싸움의 소식을 전해 들은 관공은 불같이 노했다. 요화를 불러 번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몸소 방덕을 잡으려고 관평에게로 달 려갔다.

관평이 관공을 맞아들이고 승부를 못 가린 걸 얘기하자 관공은 채 다 듣기도 전에 청룡도를 잡고 말에 뛰어올랐다.

“관운장이 여기 있다. 방덕은 어서 나와 죽음을 받으라!”

관공이 그렇게 적진을 향해 소리치자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방 덕이 나와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위왕의 뜻을 받들어 특히 네 목을 가지러 왔다. 네가 믿지 않을까 봐 여기 이렇게 관까지 만들어 왔으니 죽는 게 두렵거든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너 따위 하찮은 것이 무슨 재주로 그리 하겠느냐? 오히려 이 청룡도에 쥐새끼 같은 역적 놈의 피를 묻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관공이 그렇게 소리치며 말을 박차니 방덕도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곧 용과 호랑이가 어우러지듯 불을 뿜는 싸움이 벌어졌다. 치고 찌르고 베고 후리며 말과 말이 엇갈리기를 백여 차례나 했으나 둘 모두 싸울수록 더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싸움에 양쪽 군사들은 모두 넋을 잃고 구경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먼저 방덕이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겁이 난 위군 쪽 에서 징을 쳐 방덕을 불러들였다. 관평도 양아버지가 나이 많은 게 걱 정돼 징을 쳐서 관공을 불러들이니 비로소 두 장수의 싸움이 멎었다. 한 번도 관공과 맞붙어본 적이 없던 방덕도 비로소 관공의 무서 움을 알았다. 자기 진채로 돌아가 여럿 앞에서 감탄의 말을 털어놓 았다.

“사람들이 관우를 영웅이라 하더니, 오늘에야 그 말을 믿겠다.” 

그러는데 마침 우금이 이르렀다.

“듣자니 장군은 관우와 백합이 넘도록 싸웠으나 이렇다 할 만큼 얻은 게 없었다는데 정말 그렇소? 그렇다면 잠시 군사를 물려 피하 는 게 어떻겠소?”

예가 끝난 뒤 우금이 걱정스레 말했다. 방덕이 분연한 어조로 그말을 받았다.

“위왕께서는 장군을 대장으로 삼으셨건만, 어찌 그리 약한 말씀만하십니까? 나는 내일 관우와 죽을 때까지 싸워 결판을 내겠습니다. 맹세코 물러나 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방덕이 이렇게 나오자 우금도 더는 말 못하고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한편 상대에 대해 은근히 놀라기는 관공도 마찬가지였다. 진채로 돌아가자 아들 관평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방덕의 칼 쓰는 법이 자못 날카로웠다. 나의 맞수가 될 만했다.” 관공으로서는 최대의 찬사였다.

관평이 그런 관우를 걱정해 슬몃 권했다.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 님께서 그자의 목을 베어봤자 그저 서강의 한 조무래기를 죽인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를 죽이려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 게 되면 이는 서천에 계신 큰아버님의 당부를 저버리시는 게 됩니 다. 부디 지나치게 방덕을 탄하지 마십시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그자를 죽이지 않고 어떻게 이 욕됨을 씻겠느냐? 나는 이미 먹은 마음이 있으니 더는 여러 소리 하지 말라!” 관공은 그렇게 관평의 입을 막았다. 솜씨는 기특하지만 감히 자신 에게 덤빈 죄는 용서할 수 없다는 투였다.

다음 날이 되었다. 관공은 날이 밝기 바쁘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 가 방덕에게 싸움을 걸었다. 방덕도 지지 않고 마주쳐 나와 다시 양 편 군사들이 둥그렇게 맞선 가운데 둘의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 다. 어제와는 달리 말 한마디 주고받는 법 없이 바로 뒤엉키는 싸움 이었다.

싸움이 한 쉰 합에 이르렀을 때였다. 방덕이 갑자기 안 되겠다는 듯 말머리를 돌리며 칼을 끌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좀 수상쩍은 데가 있기는 하였지만 관공은 망설임 없이 그런 방덕을 뒤쫓았다. 관평도 방덕이 계교를 쓰는 게 아닌가 싶어 관공을 뒤따랐다.

“방덕 이 어리석은 것아, 너는 칼을 끌고 달아나며 나를 꾀려는 수작]이지만, 내가 그걸 두려워할 줄 아느냐?”

관공이 큰 소리로 그렇게 방덕을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관평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약간 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 다. 앞서 달아나던 방덕이 문득 말안장에서 활을 꺼내더니 시위에다 살을 얹었다. 그걸 본 관평이 관공에게도 알릴 겸 큰 소리로 외쳤다. 

“방덕은 더러운 활질을 멈추라!”

그제서야 관공도 방덕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를 알아차렸다. 놀란 눈으로 방덕 쪽을 보는데 벌써 시위 소리가 나며 화살이 날아왔다. 관공은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너무나 가까운 거리라 끝내 화살은 관 공의 왼팔을 꿰뚫고 말았다.

관평이 얼른 말을 달려 다친 양아버지를 부축했다. 방덕은 그 좋 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말 머리를 돌려 관공을 덮치려 했다. 그런 데 갑자기 자기편 진채에서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눈앞에 다친 관공을 두고 돌아서기가 안타까웠지만 방덕은 혹시 자기편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급히 진채로 돌아갔다.

징을 울려 방덕을 불러들인 것은 다름 아닌 우금이었다. 방덕이 활을 쏘아 관운장을 맞히는 걸 보자 걱정 반 심술 반으로 은근히 훼 방을 놓은 셈이었다. 방덕이 정말로 관공을 죽이고 큰 공을 세우게되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징을 울려 저를 부르셨습니까?”

돌아온 방덕은 진채에 아무 일도 없는 걸 보고 따지듯 우금에게 물었다. 우금이 떳떳해하지 못하는 말투로 둘러댔다.

“위왕께서 경계하시기를 관우는 무예와 지모를 아울러 갖춘 자이 니 가볍게 맞서지 말라 하셨소. 이제 비록 그가 화살에 맞기는 했으 나 혹시라도 거기에 어떤 속임수가 있을까 두려워 징을 치게 한 것 이외다.”

“만약 장군께서 군사를 거두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저자의 목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심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으셨습니까?”

방덕이 그렇게 우금을 원망했다. 그래도 우금은 능청만 떨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급히 먹는 밥에 체하는 법이오. 천천히 해 나갑시다.”

어찌 보면 나이 든 사람의 당연한 충고 같기도 했다. 우금의 참마 음을 알 길이 없는 방덕은 더 따지고 들 수도 없어 한숨만 쉬며 입 을 다물었다.

한편 진채로 돌아온 관공은 칼로 살을 쪼개 화살촉을 뽑았다. 다 행히도 화살은 깊이 박히지 않아 상처에 고약을 붙이는 것으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분함을 누를 길이 없어 여럿 을 돌아보며 이를 갈듯 말했다.

“내 맹세코 이 화살로 받은 욕을 반드시 되돌려주리라!”

관공이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나설 것 같은 기세로 나오자 여러 장수들이 말렸다.

“장군께서는 며칠만 쉬십시오. 그런 뒤에 방덕과 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덕이 그렇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이번에 는 제가 먼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움을 걸었다.

그 소리를 들은 관공은 당장 나가 싸우려 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간곡히 말려 그대로 진채에 남았다. 그러자 방덕은 군사들을 풀어 욕설과 야유로 관공을 충동질하려 했다. 관평이 길목을 막아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장수들을 단속해 그들이 내지르 는 소리를 관공에게 전하지 못하게 했다.

열흘이 넘도록 싸움을 걸어보아도 관공이 꿈쩍 않자 방덕은 생각 을 바꾸었다. 우금을 찾아가 새로운 의논을 꺼냈다.

“보아하니 관우는 화살 맞은 자리가 도져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칠군을 한꺼번에 들어 관우의 진채를 휩쓸어버리시지요. 그리하면 번성을 에움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금은 방덕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게 걱정이었다. 관공 과 가볍게 맞서지 말라는 위왕 조조의 당부를 핑계로 군사를 움직이 려 들지 않았다. 애가 탄 방덕이 몇 번이고 거듭 권했으나 아무 소용 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금이 겨우 군사를 움직인 것은 일곱 갈래 군마를 번 성 북쪽으로 돌린 일이었다. 거기 있는 산 아래에 진채를 내린 우금 은 스스로 큰 길을 지키고 앉은 뒤 방덕에게 일렀다.

“장군은 계곡 뒤쪽에 머무시오. 함부로 군사를 내어서는 아니 되오.”

오히려 자기편 군사로 방덕의 길을 막아버린 셈이었다. 억울하지 만 우금은 우두머리 장수요, 자신은 그 아래 선 선봉에 지나지 않으 니 방덕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한편 관평은 관공의 상처가 덧나지 않고 아물어 붙자 기쁨을 감 추지 못했다. 다시 방덕과의 싸움을 시작해도 되겠다 싶을 즈음 풀 어놓은 군사들이 돌아와 알렸다.

“우금이 일곱 갈래 대군을 모두 움직여 번성 북쪽 십 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관평은 그 말을 듣자 우금의 속셈을 알 길이 없어 곧 관공에게 알 렸다.

상처만 돌보고 있던 관공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우금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살펴볼 겸 말에 올라 보러 갔다.

관공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았 다. 먼저 번성이 보이는데, 성벽의 기치가 가지런하지 못하고 군사 들이 이리저리 몰리는 게 아직 구원군이 이른지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관공은 다시 우금이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성 북쪽 십 리쯤 되는 골짜기에 군마가 자리 잡고 있 는 게 보이고 그 곁으로는 물살 빠른 양강이 흐르고 있었다.

“번성 북쪽 십 리쯤 되는 곳에 있는 저 골짜기의 이름이 무엇인가?” 

관공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길잡이 군사를 보고 물었다. 그 군사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증구천(川)이라 합니다.”

그러자 관공이 몹시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우금은 반드시 나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장군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곁에 있던 군사들이 어리둥절해 관공에게 물었다. 무엇을 믿는지 관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증구(口)는 그물눈이니 우금이 그물에 떨어지고서야 어찌 오래 견디겠느냐?”

우금의 성[]과 물고기 []의 음이 같은 것을 끌어 붙인 농담이 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아무래도 관공의 그 같은 큰소리를 믿을 수 가 없었다.

때는 마침 팔월 가을이었다. 그 무렵에 있게 마련인 가을비가 며 칠을 이어 내린 뒤 관공은 군사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배와 뗏목을 마련하고 다른 여러 가지 물질에 쓰이는 것들도 손봐두도록 하라.”

“지금 우리는 뭍에서 적과 맞서고 있는데 물에서 쓰이는 것을 왜 마련하라 하십니까?”

관평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관공은 그제서야 까닭을 밝혔다.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우금은 넓은 들판에 진채를 벌이지 않고 좁은 증구천 골짜기에다 군사를 몰아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연일 가을비가 내리고 있지 않느냐? 반드시 양강의 물이 불어 넘칠 것인 바, 나는 이미 여러 곳의 물길을 막을 둑을 쌓아놓게 했다. 물이 불 어나기를 기다려 우리는 높은 곳과 배에 오른 뒤 둑을 터뜨리면 번 성과 증구천의 적병들은 모두 물고기나 자라 같은 신세가 되고 말것이다.”

그 말을 들은 관평은 자신도 모르게 땅에 엎드리며 관공의 깊이 모를 지모에 감복했다.

한편 증구천에 자리 잡고 있던 위병들 가운데도 연일 큰비가 내 리자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장 성하(何)는 걱 정이 되다 못해 우금을 찾아보고 말했다.

“대군이 개천가의 골짜기에 머물고 있는데 지세가 매우 낮습니다. 또 토산이 있다고 하나 급할 때 의지하기에는 너무 멉니다. 거기다 가 이번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많아 며칠을 내리고도 그칠 줄 모르 니 군사들의 어려움이 여간 아닙니다. 그러나 더욱 걱정되는 것은 요사이 들리는 풍문입니다. 형주의 군사들은 모두 진채를 높은 곳으 로 옮기고 한수 입구에는 배와 뗏목을 잔뜩 마련해두었다 하는데, 거기 딴 뜻이 있는 게 아닐지요? 만약 적군이 불어난 강물을 이용하 면 우리 장졸들은 크게 위태로워집니다. 부디 그 점을 헤아리시어 일찍부터 계획을 세워두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패신에게라도 홀린 것인지 우금은 화부터 먼저 냈 다. 한번 성하의 말을 되씹어보지도 않고 소리쳐 꾸짖을 뿐이었다. 

“이 하찮은 놈이 감히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드느냐? 다시 그런 소리를 하면 목을 베어 다스리겠다!”

그 바람에 성하는 옳은 소리를 하고도 야단만 맞고 쫓겨나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이번에는 방덕을 찾아보고 똑같은 소리를 했다.

방덕은 우금과 달랐다. 금세 성하의 말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그대가 바로 보았다. 만약 우장군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다면 내일 내 군사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

하지만 그 내일이 문제였다. 그날 밤이 되자 바람이 크게 일며 비 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방덕은 그래도 아직이야 어떠랴 싶어 장 막 안에 앉아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수만 마리의 말이 다투어 내닫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뒤집히는 듯 흔들렸다.

놀라 장막을 뛰쳐나온 방덕이 말 위에 올라보니 사방팔방에서 큰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일곱 갈래 군사들은 이리저리 쫓기면서 물에 떠내려가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 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 평지도 깊이가 한 길이 훨씬 넘었다.

우금과 방덕을 비롯한 장수들은 급한 대로 근처의 작은 산이나 높은 둑에 올라 물을 피했다. 날이 밝자 관공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배에 올라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우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우금은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붉은 물바다뿐 길은 어 디에도 없었다.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겨우 오륙십 명. 달아나려야 달아날 수도 없었고, 싸울 수도 없었다.

“관장군 살려주시오. 항복하겠소!”

마침 우금이 관우를 보고 그렇게 소리쳤다. 숱한 싸움터를 누비며 일생을 쌓아온 장수로서의 명성이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관공은 선선히 우금의 항복을 받아주었다. 우금을 비롯한 위군들 의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기고 무기를 거두어들인 뒤 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방덕을 찾아나섰다.

그때 방덕은 동형, 동초와 성하 및 보졸 오백을 데리고 갑옷도 제 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방죽 위에 몰려 있었다. 역시 사방이 물이라 달아날 길도 없고, 군사도 적어 맞서기에도 모자랐으나 방덕은 자기 를 잡으러 오는 관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워 떠는 군 사들의 기운을 북돋워가며 앞으로 달려 나와 맞섰다.

관공은 배로 사방을 둘러싸게 한 뒤 일제히 활을 쏘게 했다. 그 화 살에 방죽 위에 있던 위군의 태반이 쓰러졌다.

형세가 매우 위태로운 걸 본 동형과 동초가 방덕에게 말했다.

“군사는 태반이 죽거나 상했고, 사방에는 길이 없습니다. 항복하는 게 낫겠습니다.”

방덕이 성난 목소리로 그런 그들을 꾸짖었다.

“나는 위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몸이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머 리를 숙여 절의를 굽히란 말이냐!”

그리고 동형과 동초를 그 자리에서 목 벤 뒤 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두 번 다시 항복이란 소리를 입에 담는 자가 있으면 이 두 놈처 럼 될 것이다!”

방덕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남은 장졸들은 어쩌는 수 없이 힘을 다해 싸웠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싸웠으나 방덕은 오히려 싸울수록 힘이 더 솟는 듯했다.

관공이 그런 방덕을 사로잡으려고 더욱 급히 군사들을 재촉하니 사방에서 쏟아지는 돌과 화살이 마치 오뉴월 장마비와 같았다.

“모두 바짝 다가서서 적과 맞붙어라!”

방덕이 그렇게 영을 내려 군사들을 내 뒤 성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용맹스런 장수는 죽음이 두려워 구차스레 면해보려 아니하고, 씩 씩한 선비는 절의를 더럽혀가며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했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대도 죽기로 싸우라!”

성하가 그 말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밀고 나왔다. 그러나 관공이 활로 성하를 쏘아 물에 떨어뜨리자 방덕의 그 같은 독려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남은 졸개들은 모두 항복하고 오직 방덕만이 성난 범처럼 이리저리 내달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형주군 여남은 명을 태운 작은 배 한 척 이 어쩌다가 방덕이 서 있는 방죽 부근에 이르렀다.

그걸 본 방덕이 갑자기 몸을 솟구치더니 큰 새처럼 그 작은 배 위 에 내려앉았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놀라 덤볐으나 방덕이 눈 깜 짝할 새 여남은 명을 베자 나머지는 그대로 물에 뛰어내려 달아나기 바빴다.

배를 뺏은 방덕은 한손으로 칼을 휘둘러 덤벼드는 형주병을 막고 다른 한손으로는 짧은 노를 저어 번성으로 달아나려 했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설쳐대니 어쩌면 빠져나갈 수가 있을 것 같 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류에서 한 장수가 큰 뗏목을 타고 내려오더니 거침없이 방덕의 배를 들이받았다. 워낙 작은 탓에 배는 그대로 뒤 집히고 방덕은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장수도 몸을 날려 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오래잖아 힘이 빠진 방덕을 사로잡아 나왔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 장수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주창이었다. 주창은 원래도 물질에 익숙했던 사람인 데다 다시 형주에 몇 년 있 는 동안에 더욱 솜씨를 익혀, 물속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가 힘까지 남다르고 보니 땅 위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는 방덕 이라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금이 이끌고 온 일곱 갈래의 대군은 모조리 물에 빠 져 죽거나 사로잡히고, 더러 남은 사람도 달아날 길이 없어 모두 항 복하고 말았다. 조조에게로 늙은 군사 한 사람도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처럼 크게 이긴 관공을 노래했다.

한밤중 북소리 하늘을 울리더니 夜半征鼙響震天

양양 번성 평지는 깊은 못 되었네 襄樊平地作深淵 

관공의 귀신 같은 헤아림 누가 따르리 關公神算誰能及 

드높은 그 이름 만고에 전하네 華夏威名萬古傳

양강의 물을 끌어 조조가 보낸 대군을 쓸어버린 관공은 곧 높은 언덕에 장막을 치고 앉아 사로잡힌 적장들을 보았다. 먼저 끌려온 것은 우금이었다. 우금은 정남장군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땅에 엎드 려 절하며 빌었다.

“관공, 지난날의 정리로 보아서도 한번만 살려주시오.”

관공이 그런 우금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럴 것을 어찌 감히 나와 맞서려고 했는가?”

“위에서 명을 내려 이 몸을 뽑아 보내니 아니 올 수 없었소이다. 바라건대 군후께서는 이 우금을 가엾게 여겨주시오. 한번만 살려주 신다면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에 보답하겠소.”

우금이 거듭 애걸했다.

관공이 아름다운 수염을 쓸며 그런 우금을 내려보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죽이는 것은 개나 돼지를 잡음과 무엇이 다르랴. 쓸데없이 칼과 도끼만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고는 곁에 선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우금을 묶어 형주로 보내라. 그를 옥에 가두고 내가 돌아가 달리 구처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라.”

우금이 끌려나가자 관공은 다시 방덕을 데려오게 했다. 방덕은 끌 려나와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관공을 노려보며 무릎조차 꿇으려 하 지 않았다. 관공은 그런 방덕에게 오히려 마음이 끌려 목소리를 부 드럽게 하고 물었다.

“너의 형은 지금 한중에 있고, 네 옛 주인 마초도 촉에서 대장이 되어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일찍 항복하지 않았느냐?” 

방덕을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비록 칼날 아래 죽더라도 너 따위에게 어찌 항복하겠느냐?” 

그리고 관공이 더 달래볼 틈도 없이 꾸짖고 욕하기를 마지않았다. 이미 죽기로 굳게 작정한 사람 같았다. 어떻게 방덕을 달래보려던 관공도 마침내 노기가 치밀었다.

“네가 죽기를 바라니 어쩔 수 없구나. 너는 죽어서도 더러운 역적의 귀신이 되리라!”

그렇게 방덕을 꾸짖고는 좌우를 불러내 소리쳤다.

“여봐라, 저자를 끌어내 목 베어라!”

이에 다시 밖으로 끌려나간 방덕은 길게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뒷사람은 그런 방덕을 조조의 충신으로 치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 또한 부질없는 자부심의 병이나 아니었던지 모르 겠다. 처음 싸움터에 나올 때부터 그는 이상하리만큼 관운장과의 경 쟁의식에 들떠 있었다. 스스로를 관운장과 같은 높이로 끌어올려놓 고 시작한 그 싸움에서 한껏 부풀어난 자존심은 여지없이 지고 난 다음에도 끝내 스스로를 낮추려 들지 않았다.

촉에 항복해도 용서받을 만한 큰 핑계가 둘씩이나 있었건만 오히 려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은, 아무래도 이제 겨우 이태 남짓한 조조의 후대에 대한 보답으로는 지나쳤던 듯싶다.

한편 관공은 성난 김에 방덕을 죽이기는 했으나 생각할수록 그의 어리석은 오기가 가엾었다.

그 시체를 거두어 후히 장사 지내주게 하고 나서야 다시 남은 싸 움을 마무리 지으려고 나섰다. 이긴 기세가 수그러들기 전에 번성까 지 마저 우려내기 위해 장졸들과 더불어 싸움배에 올랐다.

한편 그 무렵 번성도 점점 불어나는 물로 법석을 떨고 있었다. 벌건 홍수가 붇고 물살이 거세지며 성벽이 기울어지고 내려앉기 시작한 탓이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흙을 져 나르고 벽돌을 가져와 꺼진 곳을 메우고 무너진 데를 막았다.

장수들은 장수들대로 가슴이 덜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로 불은 물이 아니라 적군이 끌어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우르르 조인에게 달려갔다.

“오늘의 이 위태로움은 힘으로 구해낼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적 군이 이곳에 이르기 전에 밤을 틈타 배를 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 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은 비록 잃더라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 같은 장수들의 말에 조인도 마음이 흔들렸다. 곧 배를 내고 달 아날 채비를 하려는데 만총이 나와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산골짜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길게 흘러봐야 얼마 동안이겠습니까? 며칠 안 돼 빠질 것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관공 또한 그렇습니다. 그 자신은 아직 성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나, 이미 그가 보낸 별장(別將)은 겹하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함 부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것은 우리 군사가 뒤에서 덤빌까 봐 걱정 이 된 까닭입니다. 구원군을 믿고 이곳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만 약 이번에 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면 황하 남쪽의 땅은 이제 다시는 나라의 것이 안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굳게 이 성을 지 키시어 보전하도록 하십시오.”

가만히 들으니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다. 다른 장수들을 따라 허둥 대던 조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모아 만총에게 고마운 뜻 을 나타냈다.

“백녕()의 가르침이 아니었던들 큰일을 그르칠 뻔했소. 그대로 따르리다.”

그러고는 스스로 말에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 여럿을 모아놓고 엄숙하게 소리쳤다.

“나는 위왕의 명을 받들어 이 성을 지키고 있다. 이후 다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목을 베리라!”

조인의 그 같은 외침에 다른 장수들도 모두 입을 모아 다짐했다. “저희들도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키겠습니다!”

그러자 조인은 크게 힘을 얻어 성벽 위에 활과 쇠뇌 수백 벌을 걸 어놓고 군사를 풀어 밤낮으로 지키게 하는데 조금도 게으름을 피거 나 마음이 풀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또 성안 사람들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흙을 져 날라 무너진 성벽을 채우니 성은 곧 전처럼 든든해졌다. 과연 보름도 안 돼 성을 위협하던 물의 기세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편 관공은 위의 장수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목 벰으로써 위 세가 천지를 뒤흔들 듯했다. 그 소문을 전해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 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득 둘째 아들 관훙이 아버지를 보러 왔다. 관공이 관흥 에게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긴 것이 모두 아비의 공이라 믿어서는 아니 된 다. 모든 벼슬아치와 장수들이 저마다 힘을 다해 이룬 공인 바, 마땅 히 거기 따르는 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각자의 공을 적은 글 을 줄 터이니 너는 성도로 가서 큰아버님이신 한중왕을 뵙고 전하 거라.”

이에 관흥은 관공에게 절하고 물러난 뒤 지름길로 성도를 향해 달려갔다.

아들을 보낸 관공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똑바로 겹하로 나가게 하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이끌고 번성을 에워쌌다.

북문 쪽으로 나아간 관공이 말 위에서 채찍을 들어 성벽 위를 가 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 쥐 같은 무리가 어찌 얼른 항복하지 않고 무얼 기다리느냐?” 

이때 조인은 마침 가까운 성루에 있었다. 관공이 가슴을 가리는 갑옷만 걸치고 있는 걸 보고 미리 세워두었던 오백의 궁노수에게 가 만히 영을 내렸다.

“모두 한꺼번에 관우를 쏘아라!”

그러자 갑자기 수많은 활과 쇠뇌가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관공이 놀라 말 머리를 돌리려는데 어느새 화살 한 대가 날 아와 오른팔에 꽂혔다. 관공이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조인은 관공이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힘을 얻어 군사를 몰고 성을 나왔다. 관평이 그런 조인을 두들겨 쫓고 얼른 관 공을 구해 진채로 돌아갔다.

관평은 곧 의자를 불러 관공의 팔에 꽂힌 화살촉을 뺐으나 화살 촉에 발라져 있던 독은 이미 뼛속까지 스민 뒤였다. 상처를 치료해 도 관공은 오른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걱정이 된 관평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의논했다.

“아버님께서 저렇게 오른팔을 다치셨으니 어떻게 나가 싸우실 수 있겠소? 잠시 형주로 돌아가 몸을 돌보게 하시는 게 좋겠소.”

다른 장수들이라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모두 관평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관공의 장막으로 찾아갔다.

“그대들은 무슨 일로 왔는가?”

여러 장수들이 한꺼번에 자신의 장막으로 찾아오자 관공이 물었 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저희들이 온 것은 군후께서 오른팔을 상하신 일 때문입니다. 노 기를 누르시지 못하고 적을 맞아 싸우시다가 다친 곳이 더 나빠질까 두렵습니다. 저희들 생각으로는 잠시 형주로 군사를 돌리시어 상처 를 다스리는 게 옳을 듯싶습니다.”

그러자 관공이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내가 번성을 뺏는 날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번성을 뺏은 뒤에는 군사를 휘몰아 허도를 들이쳐 역적 조조를 없애고 한실(漢室)을 평 안케 할 작정이다. 어찌 이따위 작은 상처로 그같이 큰일을 그르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떼를 지어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작정이라도 했느냐?”

관공이 그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관평을 비롯한 여러 장수 들은 말 한마디 더해보지 못하고 관공 앞을 물러났다. 하지만 그대 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장수들은 관공이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상처라도 어떻게 빨리 낫게 해볼 생각으로 널리 사람을 풀어 용한 의원을 찾게 했다. 그러 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사람이 강동에서 조각배를 타고 내려와 진 채로 찾아들었다.

별로 높지 않은 군교 하나가 그 사람을 데리고 관평에게로 갔다.

관평이 보니 머리에는 방건(巾)을 쓰고 몸에는 헐렁한 옷을 걸치 고 있는데 팔에 맨 푸른 보따리가 좀 유별났다.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곳을 찾아왔소?”

관평이 그렇게 묻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저는 패국 초군 사람으로 이름을 화타라 하며 자는 원화(化)로 씁니다. 듣자 하니 관장군께서는 천하의 영웅으로 이제 독화살을 맞 아 괴로움을 겪고 계시다기에 그걸 고쳐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화타라면 관평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난날 동오의 주태를 치료해준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화타가 그렇게 대답하자 관평은 그의 손을 잡아끌 듯하며 관우에게로 데려갔다.

관공은 장막 안에서 마량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팔이 몹시 아팠 으나 겉으로 드러냈다가는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보아 그렇게 아픔을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관공은 용한 의원이 왔다는 말을 듣자 바둑판을 한쪽으로 밀어놓 고 그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예가 끝나고 자리를 잡고 앉 아 차를 대접하자 화타가 서둘러 청했다.

“먼저 화살 맞은 팔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관공은 옷을 걷고 오른팔을 내보였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던 화타가 걱정스레 말했다.

“장군이 맞으신 화살촉에는 오독(烏)이 발라져 있어 바로 뼛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일찍 치료하지 않으시면 이 팔은 영영 쓰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지간한 관공도 그 말 에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으로 고칠 수 있겠소?”

“고치는 방도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군후께서 두려워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화타는 의원으로서 소박하게 말한 것이지만, 상대가 관공이고 보 면 말을 제대로 골라 쓴 셈이었다. 관공이 돌연 호탕하게 웃으며 화 타의 말을 받았다.

“나는 죽음조차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소. 그런데 내가 두려워할 게 무엇이란 말이오?”

두려워할지 모른다는 말에 별난 관공의 자부심이 상해도 단단히 상한 듯했다. 그러나 화타는 그런 관공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으로서 할 말만 했다.

“먼저 조용한 곳을 골라 든든한 기둥을 세우고 거기다가 쇠로 된 고리를 박아두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 쇠고리에 군후의 다친 팔을 끼우고 온몸을 동아줄로 꽁꽁 묶은 뒤 앞을 볼 수 없게 머리에 도 무엇을 덮어쓰셔야 합니다.”

“무얼 하시려고 그토록 요란스럽게 채비하는 것이오?”

“날카로운 칼로 군후의 살갗을 쪼개고 뼈를 드러내 거기에 스민 독을 긁어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약을 바르고 쪼갠 살갗을 실로 꿰매놓아야만 아무 일 없이 낫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두렵지 아니하십니까?”

듣기만 해도 끔찍한 수술이었으나 관공은 눈썹 하나 까딱 안했다.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별것도 아니구려. 그런 쉬운 일에 기둥이며 고리가 왜 쓰인단 말이오?”

그래 놓고는 곧 좌우에 영을 내려 크게 술상을 차리게 했다.

술과 안주가 나오자 관공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화타에게 잔을 권하고 자신도 마셨다. 몇 순배 술이 돈 뒤에 관공이 드디어 화타를 돌아보며 빙긋 웃고 말했다.

“자, 이제 치료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소?”

그러고는 다시 바둑판을 내오게 하더니 마량과 바둑을 두기 시작 했다. 다친 팔은 치료하기 좋게 걷어붙여 화타에게 맡긴 채였다. 화타는 가져온 보따리에서 끝이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꺼내 들

더니 곁에 있는 군사에게 말했다.

“가서 큰 대접 하나를 가져오시오. 피를 받아야겠소.”

그 군사가 대접을 가져와 관공의 팔 아래 받쳐들자 화타가 다시 관공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손을 대겠습니다. 군후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관공이 태연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어찌 세상의 저속된 것들처럼 아픈 걸 두려워하겠소? 그대에게 맡길 테니 좋을 대로 치료해보시오.”

이에 화타는 칼로 살갗을 쪼개고 팔을 갈라 뼈가 드러나게 했다. 화살촉에 바른 독이 스며 뼈는 이미 시퍼랬다. 화타는 칼날로 뼈를 긁어냈다. 조용한 방 안에 뼈를 긁어내는 소름끼치는 소리만 가득했 다. 장막 안팎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낯빛이 핼쑥해져 두 손 으로 눈을 가렸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것은 살이 갈리고 뼈가 긁히는 당사자인 관 공이었다. 관공은 한 팔은 화타에게 맡겨둔 채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으며 바둑을 두는데 조금도 아픔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부심에 걸맞는 극기였다. 아니면 자부심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랄까. 살을 가르고 뼈를 깎는 아픔을 관공은 눈 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이겨냈다.

오래잖아 군사가 받쳐든 대접은 관공의 팔에서 흐른 피로 가득 차고, 화타는 뼈에 스몄던 독을 말끔히 긁어냈다. 거기에 약을 바른 화타는 살을 원래대로 여미고 실로 꿰맸다.

치료가 끝난 걸 본 관공이 껄껄 웃으며 팔을 휘저어보더니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 팔이 이토록 마음대로 폈다 굽혔다 할 수 있을 뿐더러 아프지 조차 않구나! 여기 계신 선생님이야말로 정녕 신의라 할 만하다!” 

화타가 감탄해 마지않는 눈길로 관공을 우러르며 그 말을 받았다. 

“제가 일생 동안 사람을 치료했으나 이번 같은 일은 처음입니다. 군후께서야말로 진정 천신(天神)같은 분이십니다.”

그러자 관공은 다시 크게 잔치를 열어 자기 팔을 낫게 해준 화타 를 대접했다. 몇 순배 술잔이 돈 뒤에 관공이 다시 한번 고마워하는 뜻을 나타냈다.

“실로 잃었던 팔을 되찾은 듯하오. 선생께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화타가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름을 깨우쳐주듯 말했다. 

“군후께서 화살에 맞은 자리는 치료되었으나 당분간 그 팔을 함 부로 쓰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결코 노기를 내어 다친 곳이 덧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백 일이 지난 뒤에야 전처럼 쓰실 수 있 을 것입니다.”

“선생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리다.”

관공은 그렇게 말하고 황금 백 냥을 화타가 애쓴 값으로 내놓았 다. 화타가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저는 군후의 의기 높으심을 듣고 이렇게 찾아와 작은 힘을 썼을 뿐입니다.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그러고는 굳이 마다한 뒤 상처에 붙일 약 한 첩을 더 내어놓고 가 버렸다. 그 환자에 그 의원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흥을 깨는 일이 될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들춰 보고 싶은 것은 정사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화전(華倖傳)」에 도 「관우전(關羽傳)」에도 이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관우전」에 빠 진 것은 별로 역사적 가치가 없어서라면 이해가 되지만, 대단찮은 치료 얘기까지도 상세히 적힌 「화타전」에까지 빠진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삼국지』 「위지」의 여러 전(傳) 중에서 무제(조조), 문제(조비)의 기 (記)와 원소, 원술 등 몇 사람의 전을 빼면 가장 긴 게 「화타전」이고, 화타는 거의 의자라기보다는 방술사(術)에 가까울 만큼 신비하 게 기록되어 있다. 『연의』의 저자가 민간의 속설이나 이제는 전해지 지 않는 어떤 기록에서 그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혹 그 신비한 화타를 빌려 관공을 높이려고 꾸며 넣은 얘기 는 아닌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