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1화 : 나이 일흔에 오히려 기공(功)을 세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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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1화 : 나이 일흔에 오히려 기공(功)을 세웠네


나이 일흔에 오히려 기공(功)을 세웠네

촉의 대군이 막 출발하려는데 문득 장하(帳下)에 한 사람 늙은 장 수가 뛰쳐나와 소리쳤다.

“내가 비록 늙었다 하나 아직 염파, 전국시대 조나라의 맹장. 나 이 일흔에 열 근 고기를 먹고 천 근 활을 당겼다 함)의 힘과 마윈(馬援, 한무 제 때의 명장)의 뛰어남이 있소이다. 그 두 옛 사람은 모두 늙음에 지 지 않고 큰일을 해냈는데, 어찌하여 나는 이번 싸움에 써주지 않소이 까?”

그 소리에 놀란 여럿이 그를 보니 바로 조운이었다. 공명이 좋은 말로 그를 달랬다.

“내가 남쪽을 정벌하고 돌아오니 마맹기(馬)가 병들어 죽어 있었소. 그 애석함이 마치 한 팔을 잃은 듯했소이다. 이제 장군께서는 이미 나이 많이 드신 데다 만에 하나 잘못되시기라도 하신다면 그 일을 어찌하겠소? 일세(世)를 떨쳐 울린 영명(名)에 흠이 갈 뿐 아니라 우리 촉(蜀)의 날카로운 기세마저 덜게 될까 두렵소이다.”

그러자 조운은 더욱 목청을 돋우었다.

“나는 선제를 따라나선 이래 싸움터에서 물러난 적이 없고 적군 을 맞아서는 언제나 앞장을 섰소이다. 대장부가 싸움터에서 죽는다 면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는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전부 선봉이 되지 못하면 실로 일생의 한이 될 것이다.”

공명이 두 번 세 번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나를 선봉으로 써주지 않으면 이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고 죽어버리겠소!”

조운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공명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마침내 허 락하면서도 조건을 달았다.

“장군께서 기어이 선봉을 서시겠다면 반드시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한 사람이 나섰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노(老)장군을 모시고 앞서 가 적을 깨뜨려 보겠습니다.”

공명이 보니 그 장수는 등지芝)였다. 공명은 그제서야 조금 마 음이 놓인 듯 군사 오천과 부장 열 명을 딸려 그 둘을 먼저 보냈다. 이윽고 공명이 이끄는 본대가 성도를 떠나니 후주는 백관을 이끌 고 북문 밖 십 리까지 나와 공명을 배웅했다. 후주를 하직하고 떠나 는 공명의 대군은 그 기치가 들판을 덮고 창칼은 수풀 같았다. 먼저 한중을 바라보고 물밀듯이 나갔다.

촉의 대군이 밀려옴을 탐지한 위의 첩자가 얼른 그 소식을 낙양에 알렸다. 그날 위주 조예가 백관들을 모아놓고 조회를 하는데 근 신이 다가가 아뢰었다.

“변방의 관리가 알려오기를 제갈량이 삼십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 고 한중까지 나와있다고 합니다. 그 선봉 조운과 등지는 벌써 우리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예는 깜짝 놀랐다.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누가 장수가 되어 촉병을 물리쳐주시겠소?”

그러자 한 사람이 뛰쳐나와 소리쳤다.

“신의 아비가 한중에서 죽어 그 한에 이를 갈면서도 아직 원수 갚 음을 못했습니다. 신이 원래 거느린 맹장들과 관서의 병마를 이끌고 나가 이미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병을 쳐부수겠습니다. 이는 위로 는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함이 되고, 아래로는 아비의 원수를 갚는 일 이 되니, 신이 만 번 죽는다 한들 한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여럿이 그 사람을 보니, 그는 바로 하후연의 아들 하후무夏侯楙) 였다. 하후무는 자가 자휴(休)로 성질이 매우 급하고 또 아주 인색 했다. 어려서부터 하후돈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아비 하후연이 황 충에게 죽자 조조는 그를 가엾게 여겨 딸 청하공주(淸河公主)를 시 집보내고 부마(馬)로 삼았다. 그 바람에 조정에서 우러름을 받고 병권까지 쥐게 되었으나 아직 실제로 싸움터에 나서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 기상에 감동된 조예는 하후무를 대도독으로 삼고 그에게 관서의 모든 군마를 주며 먼저 나가 적을 무찌르게 했다. 그걸 보고 있던 사도 왕랑이 나와 아뢰었다.

“아니 됩니다. 하후부마는 아직 싸워본 경험이 없는데 이처럼 큰 소임을 맡기시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더구나 제갈량은 아는 게 많고 꾀가 깊으며 육도삼략에도 매우 밝습니다. 함부로 가볍게 맞서 서는 아니 됩니다.”

하후무가 그런 왕랑의 말을 되받았다.

“사도는 혹시 제갈량과 한 끈으로 엮이어 안에서 호응하려고 그 러시는 것이나 아니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육도 삼략을 익혔고 병법도 알 만큼은 아오. 당신은 내 나이가 젊다고 업 신여기지만 만약 이번에 가서 제갈량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내 맹세 코 다시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소!”

반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비였다. 하후무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왕랑도 감히 더 입을 열지 못했다.

하후무는 위주 앞을 물러나 밤을 낮 삼아 장안으로 달려갔다. 그 리고 관서의 군마 이십만을 모아 제갈공명을 맞으러 나섰다.

이때 공명의 군대는 면현(沔縣)에 이르러 마초의 묘소를 지나게 되었다. 공명은 마초의 아우 마대에게 상복을 입히고 몸소 묘 앞에 나가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끝내고 진채로 돌아가 다시 군사를 낼 의논을 하는데 홀 연초마(馬)가 달려와 알렸다.

“위주 조예는 부마 하후무에게 관서 여러 곳의 병마를 주어 보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와 맞서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위연이 한 계책을 올렸다.

“하후무는 고생 모르고 자란 철부지라 겁 많고 약하며 아무것도 못하는 위인입니다. 제게 정병 오천만 주신다면 포중으로 나가 진령 (秦嶺)동쪽을 돌고 자오곡(午谷)으로 빠져 북으로 나가보겠습니 다. 열흘을 넘기지 않고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내가 밀 고 든다는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성을 버리고 저각(閣) 횡문(橫門) 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제가 그를 동쪽으로 쫓을 테니 승상께서는 그 틈을 타 대군을 몰고 야곡(斜谷)으로 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리되 면 함양 서쪽의 모든 땅은 한꺼번에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모든 걸 두루 살펴 갖춘 계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는 중원에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얕보지만 만약 누가 산골짜기 같은 데 복병을 두었다가 길을 끊고 들이치면 어찌할 작정인가? 그리되 면 그대가 이끌고 간 오천이 다칠 뿐만 아니라 우리 대군 전체의 예 기를 꺾는 일이 된다. 결코 써서는 안 될 계책이다.”

“승상께서 큰길을 따라 대군을 몰고 나가시면 적은 어김없이 관 중의 모든 군사를 모아 큰길에서 막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싸움 이 길게 질질 끌 것이니 언제 중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위연이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그렇게 말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먼저 농우를 뺏은 다음 넓고 평평한 길로 병법에 따라 군사를 몰아나간다면 걱정할 게 무어 있겠는가?”

그러고는 끝내 위연의 계책을 써주지 않았다. 위연은 못마땅했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속으로 애타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위연의 그 같은 계책에 대해 후세의 전략가들은 의견이 엇갈린다.

공명의 말이 옳다 하는 쪽도 있지만 더 많은 것은 위연을 편드는 쪽이다. 곧 위에 대해 삼대 일에도 채 못 미치는 국력의 촉으로서는 기승(奇勝)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위연 쪽이 옳다고 보고 있다. 공 명의 작전은 세밀하고 완벽하게 짜인 것이기는 하지만, 진군이 느려 국력이 몇 배나 앞서는 위에게 언제나 넉넉한 준비 시간을 내주게 되는 게 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건 병권은 공명의 손에 있었다. 위연의 계 책을 물리친 공명은 곧 조운에게 영을 내려 앞으로 나가게 했다.

그 무렵 장안의 하후무는 관서의 군마들을 모아들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쁜 소식이 하나 왔다. 서량대장군 한덕(德) 이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일이었다. 한덕은 큰 도끼[開山大斧]를 잘 쓰고 힘이 세어 홀로 만 명을 당해낼 만한 용맹이 있는 데다 날랜 서 강의 군사 팔만까지 이끌고 있었다. 하후무는 몹시 기뻐하며 한덕에 게 큰상을 내리고, 선봉으로 삼았다.

한덕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예에 정통하고 말타 기와 활쏘기가 뛰어났다. 맏이는 한영(韓), 둘째는 한요(韓), 셋 째는 한경(韓瓊), 넷째는 한기(韓琪)였다.

한덕은 그 네 아들과 강병 팔만을 데리고 나아가다 봉명산에서 촉군과 맞닥뜨렸다. 양군이 둥글게 진을 치고 맞선 가운데 한덕이 먼저 말을 타고 나왔다. 그 양쪽에는 범 같은 네 아들이 둘씩 갈라서 있었다.

“나라를 거스르는 역적 놈들아, 네놈들이 어찌 감히 내 땅을 침범하느냐?”

한덕이 기세 좋게 촉군 쪽을 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 소리에 조운은 크게 성이 났다. 창을 꼬나들고 말을 박차 홀로 한덕에게 덤볐다. 한덕의 맏아들 한영이 말을 달려 나와 조운을 막 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세 합을 채우지 못하고 조운의 한 창에 찔 려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둘째 아들 한요가 그걸 보고 참지 못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 다. 조운은 옛날의 범 같은 위엄을 떨쳐 보이며 한층 힘을 내 한요를 맞았다. 그렇게 되니 한요도 조운의 적수로는 약했다.

한덕의 셋째 아들 한경이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둘째 형마저 끔 찍한 꼴을 당하기 전에 돕겠다고 방천화극을 끼고 말을 박차 나왔 다. 한경까지 가세해 한꺼번에 둘과 싸우게 되었지만 조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창 쓰는 법이 가지런하기만 했다.

넷째 아들 한기는 안달이 났다. 맏형이 죽고 둘째와 셋째 형이 한 꺼번에 덤비고 있어도 오히려 몰리는 것같이 뵈는 탓이었다. 한기 또한 말을 박차고 두 자루 일월도를 휘두르며 덮치니 조운은 세장 수에게 둘러싸인 꼴이 되고 말았다.

얼마 안 돼 한기가 조운의 창을 맞고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한 덕의 진에서 편장(偏將) 하나가 달려 나가 얼른 한기를 떠메고 들어 갔다. 그때 조운이 갑자기 창을 끌며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셋째 아들 한경이 그걸 보고 창을 말 안장에 꽂은 뒤 얼른 활을 꺼냈다.

한경이 연이어 화살을 세대나 날렸으나 조운은 번번이 창대로 그걸쳐 떨어뜨려버렸다.

발끈한 한경은 활을 던지고 다시 창을 꼬나잡으며 조운을 뒤쫓았 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운이 화살을 꺼내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살 은 어김없이 한경의 얼굴에 박혀 한경은 한마디 구성진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형과 아우가 차례로 끔찍한 꼴을 당하는 걸 보자 한요는 눈이 뒤 집혔다. 칼을 휘두르며 조운을 찍어 넘기려고 미친 듯 덤볐다. 조운 은 문득 들고 있던 창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보검을 뽑아들었다. 조운의 손에서 퍼뜩 칼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벌써 한요는 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칼을 맞고 비실대는 그를 조운이 냉큼 사 로잡아 자기 진채로 끌고 가버렸다.

한요를 끌어다 놓고 온 조운이 다시 창을 꼬나잡고 한덕에게로 달려들었다. 한덕은 네 아들이 모두 조운의 손에 죽거나 다치고 사 로잡혀 가는 꼴을 보자 분하기에 앞서 간담이 내려앉는 듯했다. 감 히 조운과 맞싸울 생각을 못하고 진채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서강병들도 평소부터 조운의 무서운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거 기다가 이제 다시 전과 다름없이 날래고 씩씩한 걸 보자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되니 한덕의 진채는 조운이 이르는 곳 마다 무너져내리고 쫓기었다.

조운은 말 한 마리 창 한 자루로 적진을 좌우로 휩쓸고 다니는데 마치 사람 없는 들판을 내닫듯 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를 노래했다.

옛적 상산 조자룡을 생각하노라. 憶昔常山趙子龍

나이 일흔에 오히려 기공을 세웠네. 年登七十建奇功

홀로 네 장수를 베고 적진 휩쓰니 獨誅四將來衝陣

꼭 당양에서 어린 주인 구하던 모습이네. 猶似當陽救主雄

등지는 조운이 크게 이기는 걸 보고 촉병을 몰아 적을 덮쳤다. 서 강병은 마침내 더 견뎌내지 못하고 뭉그러져 달아났다. 한덕은 조운 에게 사로잡히는 게 두려워 갑옷을 벗어던지고 걸어서 달아났다. 조운과 등지는 한바탕 적을 쫓고 죽인 뒤에 진채로 돌아갔다. 등 지가 조운에게 찬사의 말을 올렸다.

“장군께서는 칠순에 가까우시나 영용(英勇)하심은 지난날과 조금 도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적진 앞에서 적장 넷을 한꺼번에 베신 일 은 세상에서 흔치 않을 것입니다.”

“승상께서 내 나이가 많다고 쓰지 않으려 하시기에 오늘 일부러 그렇게 드러내 보인 것뿐이네.”

조운도 흡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사람을 뽑아 사로잡 은 한요와 함께 싸움에 이긴 내용을 적은 글을 제갈공명에게 바치게 했다.

한편 네 아들을 모두 잃고 쫓겨간 한덕은 하후무에게 가 울면서 그 일을 전했다. 하후무는 그 소리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조운과 맞서려 나왔다.

“하후무가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탐마가 달려와 그같이 알리자 조운은 곧 창을 들고 말에 오른 뒤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봉명산으로 갔다. 산 앞에 진세를 벌이고 있 으려니 하후무의 대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후무가 황금투구를 쓰고 큰 칼]을 멘 채 흰 말 위에 앉아 문기 아래로 나왔다.

“내가 한번 조자룡의 솜씨를 보리라.”

하후무는 조운이 창을 꼬나든 채 이리저리 내닫고 있는 걸 보자 스스로 나가 싸우려 했다. 한덕이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나의 네 아들을 죽인 원수인데 그 한을 풀지 않고 어찌하겠습니 까? 우선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새삼 이가 갈린다는 듯 그렇게 말해놓고 산이라도 쪼갤 듯한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한덕이 눈이 뒤집혀 덤벼들자 조운 역시 크게 성이 났다. 창을 꼬 나잡고 달려와 채 세 합이 차기도 전에 한덕을 찔러 말 아래로 떨어 뜨렸다. 결국은 다섯 부자가 모두 조운의 손 아래 결딴난 셈이었다. 조운은 한덕을 죽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말 머리를 돌려 하 후무에게 덤볐다. 눈앞에서 한덕이 죽는 꼴을 본 하후무는 겁이 덜 컥 났다. 황황히 되돌아서 자기 진채 속으로 숨어버렸다.

등지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촉병을 몰아 위군의 진채를 덮쳤다.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든 위군은 감히 맞설 엄두도 못 내고 뭉그러졌 다. 한바탕 호되게 얻어맞고 십 리나 물러나 진채를 내렸다. 그날 밤 하후무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물었다.

“나는 전부터 조운의 이름을 들어왔으나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 다. 오늘 보니 비록 나이는 들어도 아직 영웅의 기상은 남아 있었다. 우리 편에는 아무래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듯하다. 이 일을 어찌 하면 좋겠는가?”

정욱의 아들인 참군 정무가 나와 말했다.

“제가 헤아리기로, 조운은 용맹만 있고 꾀가 없으니 너무 걱정하 실 건 없을 듯합니다. 내일 도독께서 다시 나가 싸우시되 꾀를 써서 그를 잡는 게 좋겠습니다. 먼저 좌우에 군사를 숨겨둔 뒤에 도독께 서 나가 싸우시다가 거짓으로 패해 조운을 유인하면 조운은 틀림없 이 복병이 있는 곳까지 따라올 것입니다. 그때 도독께서는 높은 곳 에 오르시어 사방의 군마를 지휘하시면 조운을 겹겹이 에워싸 사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후무가 들어보니 그 계책이 제법 그럴듯했다. 이에 거기 따라 먼저 동희에게 삼만 군사를 주어 왼쪽에 매복하게 하고 다시 설칙에 게 삼만을 주어 오른쪽에 매복하게 한 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었다. 하후무는 힘차게 북을 울리고 기치를 가지런히 하 여 군사를 몰고 나아갔다. 조운과 등지가 그런 하후무를 나와 맞았 다. 등지가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말 위에서 가만히 조운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 형편없이 져서 쫓겨간 위병들이 오늘 다시 왔으니 저 희 딴에는 무슨 계책을 세워두었을 것입니다. 노장군께서는 미리 알 아 막도록 하십시오.”

“입에서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이 해본들 얼마이겠는가? 내 오늘은 반드시 하후무를 사로잡으리라!”

조운은 등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다만 그렇게 내뱉고는 말을 박찼다.

위장 반수가 나와 그런 조운을 맞았다. 그러나 반수는 원래 가 조운의 적수가 못 되었다. 겨우 세 합을 견디지 못하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운이 그를 뒤쫓자 위병 진채에서 장수 여덟이 한 꺼번에 달려 나와 조운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싸움에는 별 뜻이 없는 듯 거기 섞여 있던 하후무 가 먼저 달아나자 나머지도 모두 그 뒤를 쫓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 운은 기세가 올랐다. 등지가 일러준 말도 잊고 그들을 신이 나 뒤쫓 았다. 등지도 하는 수 없이 군사들을 몰아 그런 조운의 뒤를 따랐다. 조운이 앞뒤 안 보고 적진 깊숙이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 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등지가 급히 군 사를 물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왼쪽에서는 동희가, 오 른쪽에서는 설칙이 각기 삼만군을 이끌고 쏟아져 나왔다.

등지는 그들을 뚫고 나가보려 했으나 워낙 이끌고 있는 군사가 적었다.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하후무를 얕보고 방심했던 조운도 그 값을 톡톡히 물고 있었다. 적병 한가운데 갇혀 좌로 치고 우로 받아보았지만 적병의 에워쌈은 두터워지기만 했다.

그때 조운이 이끌고 있던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었다. 몰리던 끝 에 어떤 산 아래 이르니 산 위에서 하후무가 손으로 삼군을 지휘하 고 있는 게 보였다. 조운이 동쪽으로 가면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으로 가면 서쪽을 가리켰다. 조운이 아무리 애써도 에움을 뚫지 못하는 것은 실로 그런 하후무의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이에 조운은 우선 하후무부터 잡을 양으로 산꼭대기로 치달았다. 그러나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통나무와 바위가 굴러떨어져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조운은 진시부터 유시酉, 오후 여섯 시 무렵)까지 힘을 다해 싸웠 으나 끝내 위병들 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달이 밝으면 다시 싸울 작정으로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조운이 갑옷을 풀고 앉으려 하는데 마침 달이 밝아왔다. 문득 사 방에서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 솟으며 북소리가 크게 울리는 가운데 돌과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위병들이 물밀듯 쏟아지며 소리쳤다. 

“조운은 어서 항복하라!”

조운은 얼른 말 위에 뛰어올랐다. 사방에서 병마는 점점 가깝게 죄어왔다. 그 바람에 조운이 이끄는 인마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지간한 조운도 드디어는 막막했던지 하늘을 우러러 소리쳤다.

“나는 늙었으나 늙음에 지지 않고 여기 이 싸움터에서 죽는다!”

탄식이라기보다는 뜻한 걸 이룬 사람의 자랑스런 외침 같았다. 그때 문득 동북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더니 위병들이 이리저리 흩 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떼의 군마가 위병들을 흩어버리며 달려 오는데 앞선 장수를 보니 반갑게도 장포였다. 장팔사모를 들고 말 안장에는 사람의 목 하나를 단 채 나타난 장포가 조운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혹시라도 노장군께 실수가 있을까 걱정하시어 제게 오천 병마를 내주며 호응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들으니 노장군께서 적에게 갇혀 고단하시다기에 두터운 에움을 뚫고 이렇 게 달려온 것입니다. 도중에 위장(魏) 설칙을 만나 그를 죽이고 목 을 얻어 왔습니다.”

한창 고단한 중이라 조운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곧 장포와 힘을 합쳐 북서쪽으로 길을 뚫고 나갔다. 위병들은 그런 그들을 막기는커 녕 창칼을 내던지고 달아나기 바빴다.

거기다가 다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조운과 장포를 거들었다. 앞선 장수는 청룡언월도를 들었는데 그 한쪽 손에는 사람의 머리 하 나가 쥐어져 있었다. 조운이 보니 그 장수는 다름아닌 관흥이었다. 

“승상의 명을 받들어 특히 오천 군사를 이끌고 접응하러 왔습니 다. 승상께서는 노장군에게 혹시 실수라도 있을까 몹시 걱정하셨습 니다. 이 목은 위장 동희의 것입니다. 오다가 만났기로 한칼에 베어 그 목을 얻었습니다. 승상께서도 곧 이곳에 이르실 것입니다.”

관흥이 동희의 목을 흔들어 보이며 그렇게 조운에게 말했다. 조운 이 장포와 관흥에게 말했다.

“두 장군은 이미 큰 공을 세워놓고도 어찌하여 뒤쫓아가 하후무 를 사로잡고 일을 끝내버리지 않는가?”

그 말을 들은 장포가 퍼뜩 깨달은 듯 군사를 이끌고 위병을 뒤쫓았다.

“저도 가봐야겠습니다.”

관흥도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군사를 몰아 장포를 뒤따랐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운이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결연히 말했다.

“저 둘은 내게는 아들이나 조카뻘이다. 저들이 서로 공을 다투며 달려가는데 나는 나라의 상장(上將)이요, 조정의 구신(臣)으로서 어찌 저들만 못해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이 늙은 목숨을 바쳐 선제 의 은혜를 갚으리라!”

그러고는 또한 군사를 몰아 하후무를 잡으러 갔다.

그날 밤 그 세 갈래 군마가 한꺼번에 위병을 들이치니 위병은 한 바탕 크게 당했다. 거기다가 등지가 이끈 군사들까지 나타나 호응해 들판은 위병의 시체로 뒤덮이고 흐르는 피는 내를 이루었다.

하후무는 무모한 데다 나이 어리고 그때껏 싸움을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자기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모두들 그대로 버려 두고 가까이 거느리고 있는 장수 백여 명과 함께 남안군으로 달아나 버렸다. 남은 군사들은 우두머리 장수들이 보이지 않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관흥과 장포는 하후무가 남안으로 달아났다는 말을 듣자 밤을 마 다 않고 그를 뒤쫓았다. 성안으로 들어간 하후무는 굳게 성문을 닫 게 하고 군사를 긁어모아 어떻게 지켜볼 채비를 갖추었다.

곧 장포와 관흥이 뒤쫓아와 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뒤이어 조운 이 이끈 군사가 오고 등지 또한 뒤질세라 뒤따라왔다. 네 갈래 군마 는 남안성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후무 도 죽기로 지키니 열흘이 지나도 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승상께서 후군은 면현에 두고 좌군은 양평(陽平)에, 우군은 석성(石城)에 두신 채 몸소 중군을 이끌고 이리 오셨습니다.”

네 장수가 한창 남안성을 짓두들기고 있는데 문득 그런 전갈이 왔다. 조운과 장포, 관흥, 등지 네 사람은 모두 공명을 찾아 절한 뒤 에 열흘이나 들이쳐도 성이 떨어지지 않음을 알렸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작은 수레에 올라 몸소 남안성을 돌아보았 다. 말없이 한바퀴 성을 돌아본 공명이 군막으로 돌아가 앉자 여러 장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그 성을 우려뺄 계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공명이 그런 장수들을 보며 말했다.

“이 성은 성벽을 둘러싼 물이 깊고 성벽이 높아 치기가 쉽지 않 다. 내가 하려는 일은 이 성을 뺏는 데 있지 않다. 그대들이 길게 이 성을 치고 있는 사이에 다른 곳의 위병들이 길을 나누어 나와 한중 을 뺏으면 우리 군대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그러자 등지가 아까운 듯 말했다.

“하후무는 위의 부마라 그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장수 백 명의 목을 얻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금 이 성안에 갇혀 한참 고단한데 어 찌 그를 버려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

공명은 그렇게 등지의 입을 막은 뒤 여럿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서 서쪽은 천수군에 이어져 있고 북쪽은 안정군이 있다. 그

두 곳 태수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없는가?”

그러자 형세를 살피는 일을 맡고 있는 장수 하나가 대답했다.

“천수군의 태수는 마준(馬)이고 안정군의 태수는 최량(崔諒)입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무엇 때문인지 몹시 기쁜 낯빛을 지었다.

공명은 먼저 위연을 불러 가만히 계책을 주어 보냈다. 다음은 장포와 관흥 차례였다. 공명은 그들에게도 남몰래 계책을 일러주어 어 디론가 보냈다. 그리고 다시 믿을 만한 군사 두 명을 불러 그들에게 은밀한 계책을 주었다.

모든 장수들이 명을 받은 대로 군사를 이끌고 떠나자 공명은 장 작과 마른 풀을 성 아래 쌓게 하고 성을 불태울 것이라고 입으로 얼 러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위병들은 모두 크게 웃고 조금도 두 려워하지 않았다.

그 무렵 안정성 안에 있는 태수 최량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하후 무가 공명에게 쫓기어 남안성 안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탓이었 다. 언제 촉군이 그곳 안정에도 들이닥칠지 몰라 군사를 있는 대로 모두 끌어모으니 사천 남짓 되었다. 최량은 그들로라도 성을 지켜보 려고 단단히 채비를 시키고 있는데 홀연 한 사람이 남쪽에서 달려와 말했다.

“태수께 긴히 말씀드릴 기밀이 있습니다.”

남쪽이면 하후무가 있는 남안 쪽이라 최량은 얼른 그를 맞아들이고 물었다.

“너는 누구며 내게 알릴 기밀은 무엇이냐?”

“저는 하후(夏侯)도독의 심복 장수인 배서올시다. 하후도독께서 제게 영을 내리시기를 특히 천수와 안정 두 군에 가서 구원을 요청 하라 하셨습니다. 남안성이 위급하여 매일 성벽 위에 불을 놓고 구 원을 청해보았으나 천수, 안정 두 군에서 구원병이 오지 않자 다시 저를 뽑아 보내신 것입니다. 두터운 적병의 에움을 뚫고 이렇게 달려와 급히 말씀드리는 것이니 되도록이면 오늘 밤 안으로 군사를 일으켜 성 밖에서 호응해주십시오. 도독께서도 구원병이 온 걸 보면 성문을 열고 뛰어나와 호응할 것입니다.”

배서라는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최량은 얼른 그를 믿을 수가 없 었다. 한참 그를 살피다가 물었다.

“도독께서 문서는 주어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자 배서는 몸속 깊이 간직했던 편지를 꺼냈다. 먼 길을 허둥 대며 달려오느라 솟은 땀이 스며 얼른 알아보기 어려운 글이었다. 거기다가 배서는 최량이 꼼꼼히 살펴볼 틈도 없이 그 편지를 거두며 말했다.

“저는 또 이 글을 가지고 천수로 가봐야겠습니다. 일이 몹시 급합니다.”

그리고 데려온 졸개에게 말을 가져오라 일러 뛰어오른 뒤 급히 성을 나가 천수군을 향했다.

그로부터 이틀쯤 되었을 때였다. 최량이 아직도 한구석 미심쩍은 데가 있어 군사를 내지 않고 있는데 다시 말 탄 군사 하나가 달려와 말했다.

“천수 태수께서는 이미 군사를 일으키시어 남안을 구하러 가셨습 니다. 안정군도 어서 구원병을 내주십시오.”

그렇게 되자 최량도 걱정이 되었다. 아랫관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의논했다. 많은 관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만약 가서 구해주지 않아 남안이 떨어지고 하후부마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모두 천수, 안정 두 군의 죄일 것입니다. 가서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최량도 드디어 마음을 굳히고 인마를 일으켜 남안을 구하러 성을 나갔다. 안정성을 지키는 것은 문관과 군사 약간뿐이었다.

최량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보니 정말로 남안 쪽에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솟는 게 보였다. 최량은 급하게 군사를 재촉해 밤길을 달 렸다.

남안이 한 오십 리쯤 남은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앞뒤에서 크 게 함성이 일었다. 살피러 갔던 군사가 급히 돌아와 최량에게 알렸다. 

“앞에는 관흥이 이끄는 군사가 길을 끊고 뒤에는 장포가 이끄는 군사가 밀고듭니다.”

그 말을 들은 안정의 군사들은 싸울 생각도 않고 사방으로 내빼 기부터 먼저했다.

최량은 몹시 놀랐다. 뒤따르는 백여 기와 더불어 죽기로 싸워 길 을 앗고 안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최량이 막 성벽 근처에 이르렀 을 때였다. 갑자기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어 촉장 위연이 성벽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성은 이미 내가 차지했다. 최량은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위연이 안정성을 뺏은 것은 바로 제갈공명에게서 받은 계책대로 한 덕분이었다. 위연은 최량이 안정성을 나간 뒤 부하들을 안정의 군사로 분장시켜 성문 앞에서 소리치게 했다.

“성문을 열어라! 급한 일이 있어 돌아온 군사다.”

그리고 깜빡 속아 넘어간 성안 군사들이 문을 열자 그대로 들이 닥쳐 성을 뺏어버린 것이었다.

그 뜻밖의 사태에 최량은 당황해 어찌할 줄 몰랐다. 급하게 말 머리를 돌려 천수군으로 달아났다.

최량이 길을 반쯤 갔을 때였다. 앞길에 한 떼의 군마가 벌여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특이한 것은 군마 앞의 큰 깃발 아래 있는 작은 수레였다. 거기 한 사람이 윤건에 학창의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든 채 앉아 있었다.

그게 공명임을 알아본 최량은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관 흥과장포가 길을 나누어 따라오며 소리쳤다.

“어디로 도망가려느냐? 어서 항복하라.”

최량이 보니 사방은 이미 병으로 뒤덮여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공명과 더불 어 촉군의 대채로 갔다.

공명은 항복한 최랑을 마치 귀한 손님 대하듯 하며 넌지시 물었다. 

“남안 태수와 그대는 교분이 두터운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 사람은 양부(楊阜) 집안의 양릉(楊陵)인데, 저와는 이웃 고을 에서 살아 교분이 매우 두텁습니다.”

공명의 후한 대접에 은근히 감격해 있던 최량이 숨김 없이 말했 다. 그러자 공명이 별로 강요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나는 그대를 남안산성으로 들여보내 태수 양릉을 달랬으면 싶소. 그렇게만 된다면 하후무를 사로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오. 어떻 소? 번거롭지만 한번 나서주시겠소?”

“한번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 저를 보내시려면 잠시 군마 를 물려주십시오. 그래야 남안성으로 들어가 달래기 좋습니다.”

최량이 그렇게 선뜻 응낙했다. 이번에도 공명의 후대에 감격해서 그러는 것 같았으나 태수쯤 되는 이치고는 좀 가벼웠다. 그러나 공 명은 그대로 최량의 말을 믿고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군마를 모두 이십 리 물려서 진채를 내리도록 하라.”

전령을 띄워 각군에게 그렇게 명한 뒤 최량을 보냈다.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남안으로 달려간 최량은 성문 앞에서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안정 태수 최량이다. 너희 태수를 만나 할 얘기가 있다.”

그리고 군사들이 성문을 열어주자 한달음에 달려들어가 태수 양릉을 만났다.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소?”

서로 예가 끝난 뒤 양릉이 그렇게 물었다. 최량은 그동안에 자기 가 겪은 일을 모조리 얘기했다. 항복을 권하기보다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 같았다.

듣기를 다한 양릉이 가만히 말했다.

“우리는 폐하[魏主]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데 어찌 차마 촉에 항복할 수야 있겠소? 차라리 제갈량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해봅시다 [將計就計]. 잘만 하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최량을 데리고 하후무에게로 갔다. 두 사람이 모든 걸 일러바치자 하후무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계책을 썼으면 좋겠소?”

촉군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고 그 성안에 쫓겨와 있는 처지다 보니 생각도 잘 아니 나는 모양이었다. 양릉이 마련해둔 꾀를 내놓았다.

“제가 항복하고 성문을 열어주는 체해 촉병을 끌어들인 뒤 성안 에서 갑작스레 들이쳐 그들을 죽여버리면 될 것입니다.”

하후무도 최량도 그런 양릉의 꾀가 그럴듯해 보였다. 그대로 따르 기로 하고 최량이 먼저 성을 나갔다.

“양릉이 항복하고 성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때 대군을 들여보내 하후무를 잡도록 하십시오. 원래는 양릉이 스스로 하후무를 잡아 바 치려 했으나, 자기 밑에 있는 군사가 많지 않아 함부로 손을 쓰지 못 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자 공명이 조금도 의심 않는 눈치로 말했다.

“그렇다면 일이 아주 쉽게 되었군. 그대는 먼저 우리에게 항복한 그대의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시오. 그 안에는 우 리 촉의 장수들도 안정의 군사로 꾸미고 섞여서 들어갈 것이오. 그 래서 먼저 하후무가 있는 근처에 숨어 있게 한 뒤 양릉과 약속하여 한밤중에 성문을 열게 하시오. 그때 우리가 밖에서 호응해 밀고 들 어가면 일은 끝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최량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만약 촉장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면 공명의 의심을 살 것이 다. 좋다. 데리고 가자.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 그들을 먼저 베어버리 면 될 게 아닌가. 그런 다음 횃불을 드는 걸 신호로 공명을 성안으로 꾀어들이자. 그리되면 공명도 죽일 수 있을 게다.’

그러고는 공명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공명은 그런 최량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나는 가장 아끼고 믿는 관흥과 장포를 그대와 함께 먼저 보내겠 소. 그대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안정의 잔병들을 긁어모아 왔다 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하후무를 안심시키시오. 그런 다음 불을 질러 신호하면 내가 친히 성안으로 들어가 하후무를 사로잡을 것 이오.”

그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관흥과 장포는 공명에게서 남몰래 계책을 받은 뒤 갑옷을 여미고 말에 올랐다. 손에는 각기 아버지 대 부터 물려 써오던 병기가 쥐어져 있었다.

안정의 군사들 틈에 섞인 관흥과 장포가 최량을 따라 남안성에 이르자 앞서 가던 최량이 성안을 향해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안정 태수 최량이다.”

그 소리에 남안 태수 양릉이 성벽 위로 나왔다. 양릉은 성벽 위에 널빤지를 세워 가슴가리개[欄]로 쓰게 쳐둔 나무 울타리에 기대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최량이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게 이상한 듯 물 었다.

“그 군사는 어디서 오는 군사요?”

“안정에서 약간의 구원병을 긁어모아 왔소이다.”

최량은 그렇게 대답하는 한편 성 위로 화살 한 대를 쏘아보냈다. 그 화살에는 최량의 밀서가 묶여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이번에 제갈량이 먼저 두 장수를 보냈소. 성안에 숨어 있다가 밖 에서 저희 편이 밀고 들어오면 안에서 호응하게 하려는 수작이오. 조금도 놀라지 말고 조용히 들여보내주시오. 행여라도 우리의 계책이 적에게 눈치채이게 될까 두렵소. 이 두 장수는 성안으로 들어가거든 그때 없애도 될 것이오.’


양릉은 그 글을 읽어보고 안으로 들어가 하후무에게 알렸다. 하후 무가 신이 나 말했다.

“이미 공명은 우리 계책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적을 가볍게 보아 서는 아니 되오. 도부수 백여 명을 먼저 숨어 있게 하시오. 그리고 그 두 적장이 최량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오거든 얼른 성문을 닫아 걸고 죽여버리시오. 불을 올려 신호하는 것은 그다음이라야 할 것이 오. 제갈량이 속아 성안으로 들어오면 숨어 있던 군사들을 한꺼번에 풀어 그를 사로잡도록 하시오.”

양릉은 그런 하후무의 말을 따랐다. 성안의 채비를 모두 갖춘 뒤 에야 성벽 위로 올라가 말했다.

“안정의 군사라면 들여보내주겠소.”

그러고는 성문을 열게 했다.

관흥은 최량을 따라 앞서 가고 장포는 뒤에 처진 형국으로 성문 앞에 이르니 그사이 성벽을 내려온 양릉이 성문 곁에서 최량과 관흥 을 맞았다. 아직은 군사들의 꼬리가 다 들어오기 전이라 성문을 닫지 못하고 시치미를 떼며 서 있는데 문득 관흥이 칼을 번쩍 쳐들었다. 관흥이 말 아래로 찍어내린 것은 다름 아닌 양릉의 목이었다. 양 릉은 제 꾀만 밝은 줄 알고 마음 놓고 있다가 손 한번 제대로 써보 지 못하고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 꼴을 본 최량은 깜짝 놀랐다. 관흥을 피한다고 되돌아서 달렸으나 어차피 붙어 있을 목숨은 못 되었다. 적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뒤따라오던 장포가 소리쳤다.

“역적 높은 닫지를 말라! 너희놈들의 그 하찮은 속임수로야 어찌 우리 승상을 속일 수 있겠느냐?”

그리고 손을 들어 한 창을 내지르니 최량은 괴로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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