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5화 유혹의 검은 장미 5 : 사투
사투
“사크라데바남 인드라의 이름으로 악은..”
준후의 손에서 번갯불이 일어나다가 곧 사그라졌다.
‘이크, 신부님한테까지 번개를 칠 수는 없지! 어쩐다?’
준후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박 신부의 얼굴을 누르고 있는 흡 혈귀의 팔 대신 우선 눈앞에 보이는 흡혈귀에게 번갯불을 쏴 붙였다.
“에잇, 더러운 것! 너부터 죽어라!”
파파팟 소리를 내며 번개가 뻗어 나가 흡혈귀의 가슴에 명중했다. 흡혈귀의 몸뚱어리가 사방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튕겨져 나갔다.
“크아악!”
흡혈귀는 까맣게 타들어 가는 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쳇, 도망치려고? 천만에, 아예 바비큐로 만들어 주지!” 준후는 제이, 제삼의 번개를 계속하여 날렸다. 연속타를 맞은 흡혈귀는 시꺼멓게 타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움직였다.
게다가 박 신부의 얼굴을 움켜쥔 흡혈귀의 팔은 아직 멀쩡했 다. 준후는 박 신부에게 달려가서 흡혈귀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시퍼렇게 변색된 살점이 뭉그러지며 요상한 액체가 악취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 팔뚝을 잡아떼려고 했으나 놈의 힘은 무척 강했다.
백귀들은 현암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현암은 열심히 운기를 하여 힘을 모으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백귀들의 허영 게 뒤집힌 눈들이 코앞에까지 다가왔다.
‘에잇, 최후의 수단이다!’
현암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검을 기합과 함께 왼 팔뚝에 찔러 넣었다. 선혈이 튀었다. 귀검 월향에게 피를 먹이는 것이었 다. 그것은 금단의 술수로서, 자칫 월향검마저 통제력을 잃으면 그야말로 현암의 목숨을 끝장나고 마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하
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귀검 월향이여, 나의 염을 받아들여 조금만 애써 다오.’
월향의 색이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더니 현암 의 팔에서 저절로 솟구쳐 올라 보통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백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 했다. 월향은 핏빛으로 빛나는 한 줄기 빛살로 바뀌었다. 그러고 는 허공을 맴돌며 현암의 머리 위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월향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아래로 폭사되어 갔다. 그 소리는 현암 이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월향의 울음이었다.
‘월향이,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한갓 귀물이었던 월향은 현암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흉포한 백귀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월향검이 죽기를 각오했다. 그에 깃든 영이 죽음을…………… 현암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넘쳤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월향이 만들어 준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공을 혈도로 돌렸다.
한 모퉁이에서는 검은 장미의 봉오리가 홍녀의 목덜미에 달라 붙어 있었다.
“야압!”
흡혈귀의 왼팔이 폭발하듯이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정신을 가다듬은 박 신부가 손에 든 십자가를 흡혈귀에 팔뚝에 꽂아 넣 은 것이다. 준후는 잡아끌려던 흡혈귀의 팔목이 어이없이 터져 버리자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에잇, 이놈의 요물! 사탄의 앞잡이!”
박 신부가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일어서며 얼굴에 붙은 살점 부스러기들을 털어 냈다.
“아, 신부님! 무사했군요.”
준후의 기쁜 음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훨훨 타오르는 불덩어 리 같은 것이 준후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앗, 준후야!”
준후에게 번개를 얻어맞고 몸이 반쯤 타 버린 흡혈귀였다. 흡 혈귀는 몸뚱이에서 훨훨 타는 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준후를 잡아 허공에서 몇 바퀴 돌리더니 무서운 힘으로 던졌다.
“으아아!”
준후의 몸이 가랑잎처럼 날아가 홀의 입구에 처박혔다.
“으, 이 지독한 놈! 용서할 수 없다!”
박신부의 몸에서 장엄한 오라가 뻗어 나와 불에 타서 반은 기 력을 상실한 흡혈귀의 몸을 둘러쌌다. 흡혈귀는 견딜 수 없는 고 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쓰러져 갔다.
“어둠의 피조물이여! 영원한 지옥으로!”
박 신부가 성수를 붓자 흡혈귀의 몸뚱이가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캐애애액!”
흡혈귀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후, 박 신부의 성난 눈이 노려보는 가운데 흡혈귀의 몸은 축축한 재로 변해 버렸다.
‘가엾은 이여, 그대의 일은 심판의 날에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박 신부는 육신의 원주인(原人)을 향해 잠시 묵념을 올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준후야! 현암 군!”
준후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내동댕이쳐져 날아가는 동안 홀 안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으아, 월향이 최후의 기력을 쓰고 있다. 거기에 봉인된 영은 젊은 누나 같던데, 현암 형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준후는 벽에 와당탕 부딪히며 잡동사 니들 속에 파묻혀 버렸다.
‘으으 머리야.’
준후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안간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러고 는 품에 든 부적 뭉치를 꺼내고 홀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월향은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현암에게 덮쳐들던 귀신이 두 토막 되어 뒹굴었다. 그러나 귀신들은 너무도 많았다. 이제 그들은 한데 뭉쳐, 알 수 없는 몸짓과 괴성을 지르며 하나의 진을 구축했다. 백귀진이었다. 똘똘 뭉친 백귀의 힘은 무서운 소용돌이로 결 계를 그려서 이젠 아무도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월향은 모든 힘을 짜내어 놀랍도록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 으나 그 수에는 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해혈에 온 힘을 집중한 듯 현암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심마가 깃들면 곧장 주화입마(駐入魔)로 이어져 폐인이 되고 만다. 하물며 현암은 두 번이나 주화입마에 빠져서 저승 문 턱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다.
박신부는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준후와 미친 듯 날뛰 는 월향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뛰어들려다가 알 수 없는 힘에 튕겨져 발을 멈추었다.
“저 안은 지금 백귀진으로 결계가 만들어져 있어요! 외부인은 들어갈 수가 없다구요!”
박신부는 당황했다. 그렇다면 주술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자신은 주술을 몰랐다.
“저게, 월향이 왜 혼자 허공을 날고 있지?”
일체의 주술과 발을 끊은 박 신부에게는 백귀의 흉포한 모습이 보일 턱이 없었다.
“큰일이에요. 큰일! 저 백귀들을 한꺼번에 퇴치하려면 부동명왕의 멸겁화 써야 하는데……”
“그럼 빨리 쓰지 않고 뭐 하니?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 빨리 현암을 구하도록 해라!”
“그럴 수 없어요! 그랬다간 월향까지 태우게 된단 말예요!”
무녀 홍녀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져 갔다. 그러나 얼굴에는 희 미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붙은 검은 장미가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준후는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어쩌죠? 신부님! 전 결정을 못 내리겠어요! 말씀 좀 해줘요!”
박 신부는 마치 자신의 아기를 지키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허 공을 가르고 다니는 칼을 지켜보았다.
월향………….
박 신부의 눈이 이번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혼신의 힘을 끌 어 모으고 있는 현암에게로 멈췄다.
현암 군…………….
잠깐이었으나 무척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선택을 해야 했다.
“아니야, 난 못해, 못한다!”
박 신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준후는 의외였다. 박 신부가 현암을 구하라고 자기를 다그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준후는 번민하고 있는 박 신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박 신부 같은 사람이 한낱 귀신 때문에 저렇게 고민하다니…………….
월향검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서서히 땅에 내려앉았 다. 백귀들도 돌연한 사태에 어리둥절한지 우뚝 멈추어 섰다. 월 향의 검신이 땅에 가볍게 꽂히면서 자루가 살며시 바르르 떨었 다. 그 모습은 말 없는 웃음처럼 보였다. 월향은 웃고 있었다. 준 후와 박 신부의 대화를 듣고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것이었다. 준 후와 박 신부는 둘 다 월향검의 의도를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준후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신부님, 어떡해요! 어쩌면 좋아요?”
“이런 빌어먹을…”
박신부가 입술을 깨물며 체통도 잊고 소리쳤다.
“저 백귀란 것들, 빌어먹을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둠? 어둠?
한순간 준후의 머리에 서광이 비쳤다.
“맞다! 백귀야행 百鬼夜行! 백귀들은 밤에만 돌아다니는 것 들! 빛에 빛에 약하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준후는 부적을 찾을 새도 없이 아미타 불의 십이광(光)*중의 마지막인 초일월광(超日月光)의 주를 외웠다.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12가지 빛의 공덕, 무량광(無量光), 무변광(無 邊), 무애광(光), 무대광(無光), 염왕광(光), 청정(淸淨光), 환희광 (光), 지혜(智), 부단광(不), 난사광(光), 무칭관(無光), 초 일월광(日月光)의 열두 가지.
섬광과도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달빛보다 시리고 작열하는 태양빛보다도 따가운, 폭발하는 듯한 백열광이 홀 구석 구석을 훑었다.
“크아악!”
“캐애액!”
백귀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몇 놈들은 빛에 빨려들 듯 그 자리에서 소멸되어 갔다.
백귀들이 사라져 가는 아우성 소리에, 시전자인 홍녀는 아까 준후가 겪었던 고통을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일렁이는 듯한 검은 장미가 눈앞에서 꿈틀대며 자신 의 목을 물고 있었다.
“아아악!”
홍녀는 놀라움에 몸을 일으키며 장미 줄기를 뜯어내려 애썼으 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손이 가시에 긁혀 점점이 피가 번 져 나왔다. 그 핏방울도 곧 검은 장미의 줄기로 빨려들어 갔다.
“아악!”
재차 비명을 지르는 홍녀의 귓전에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 기분이 좋지 않아? 조용히, 얌전히 드러누워………….
“안 돼! 지지 않아!”
홍녀는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러나 비릿하게 풍겨 오는 향기에 어느덧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홍녀는 차라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싶었다.
“성공이다! 결계가 무너졌어!”
박신부가 환호성을 지르며 홀로 뛰어들었다. 준후는 그 뒤를 따라 홀로 뛰어들면서 월향을 잠시 투시했다. 힘이 많이 빠지고 초일월광의 강력한 빛에 놀란 듯했지만 무사한 것 같았다. ‘휴, 다행이다! 월향검아, 네가 죽었으면 현암 형이 무척 슬퍼 했을 거야.’
그러고 보니 힘을 너무 쓴 통에 자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준 후는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것을 느끼면서 태평한 미소를 머금 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역시 이런 큰 주문은 나한텐 아직 무리야.’
박신부가 현암의 안위를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홍녀의 비 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번 더…………. 시선을 돌린 박 신부의 눈에 다시 정신을 잃어 가는 홍녀의 창백한 얼굴 너머로 천천히 허공에 맺히고 있는 피같이 붉은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
박신부는 외쳤다.
“흡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