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6화 – 초치검의 비밀 6 : 지박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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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6화 – 초치검의 비밀 6 : 지박령 전쟁


지박령 전쟁

박 신부와 준후는 영들이 몰려오고 있는, 자신들이 들어왔던 구회만다라진의 입구 쪽을 지나 바깥쪽으로 달음질쳤다. 박 신 부의 뒤로는 오의파의 두 사람이 뒤따라 달려왔고, 준후의 뒤에 는 두 마리의 리매가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박 신부가 달리면서 말했다.

“준후야, 뒤의 저것들은 뭐지?”

“제가 불러낸 리매들이에요! 우리 편이니 염려하지 마세요!” 

일행은 어느덧 구회만다라진을 처음 맞닥뜨렸던 장소까지 달 려갔다. 아직 영들의 기운은 그곳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다. 마치 군대가 서서히 진격하듯,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진열을 갖 추고 서서히 다가왔다. 뒤쪽에서 달려오던 오의파의 두 사람이 박신부를 소리쳐 불렀다.

“신부님, 신부님!”

“왜 그러십니까?”

오의파의 맏이인 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신부님, 놈들을 막으려면 보통 영력으로는 안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저희도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준후가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었어요. 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무라이의 영에게 빙의가 되었었죠? 까지 들고 말이에요.”

오의파의 둘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쑥스러운 한편 긴장감이 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 그들의 고분에 갔었습니다. 도지 님과 함께요.”

“예? 그러면 도지 님은 어디 계시죠?”

“혼자 굿을 벌이고 계실 겁니다. 아직도 무사하시다면요.”

“아멘! 별 탈 없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녀석들은 보통의 지박령이 아닙니다. 몸을 갖추고 일어났습니다.”

박신부와 준후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뒤에서 리매 두 마리가 으아아아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몸? 몸을 갖추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들은 군대입니다. 그것도 이상한 주술로 보호되고 있 는 군대였습니다. 놈들 중 두 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오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고분을 조사하러 갔을 때에 영적인 방어를 펼쳐 몸에 부적을 몇 개나 달고 갔다는 것이 다. 도지 무당은 그곳에 도착하자 영들의 힘을 줄이느라고 혼자 서 굿을 벌여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고, 두 사람의 오의파는 고분들 사이에서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초치검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의 뒤에서 물리력에 의한 강타를 당하고 몸에 지넌 부적을 뜯긴 후 기억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조금은 기억이 납니다. 일본어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죠. 저 는 원래 대학에서 일본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약간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척후를 나가서 대술사(術) 묘운(雲)이 깨어났는지 보라 했지요.”

“대술사? 묘운?”

“저희 오의파는 원래 거지와 각설이에서 비롯된 유파입니다.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과 잡귀를 물리치는 것에 강하 죠.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그것들은 지박령이긴 하지만 보통 잡귀가 아니에요!”

“아까 몸을 갖춘 군대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물리력을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묘운이 깨어났나 보라는 그 이후에 제가 어렴풋이 들은 말이 있는데, 묘운이 일어나야 자신들이 다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박 신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묘운이 일어나야 자신들도 일어난다고? 그렇다면 묘운이라는 자가 지박령을 통제 하고 있다는 말인가? 묘운이라는 자가 부리는 주술이 어떤 것이 기에 그들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준후가 부적들을 무더기로 꺼내며 소리쳤다.

“신부님, 이 만다라진을 다시 응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새로 진을 칠 여유가 없으니까요.”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준후는 리매들을 시켜 아까 현암이 꺾어 놓은 나무의 자리에 부서진 나무를 다시 세우게 했 다. 리매들은 준후의 말에 고분고분 잘 따랐고 힘도 엄청났다. 준후와리매들이 작업을 하는 동안 박 신부는 오의파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는 초치검의 이야기가 제일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여기에 묻혀 있게 되었는지 말이죠. 초치검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일본에 서 전해져 내려왔다는 초치검이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러면 고다이고 천황이 북조에게 내어 준 삼종신기가 모두?”

“세 개 모두 가짜는 아닐 겁니다.”

“어떻게요?”

그 사람의 눈빛은 진지했다.

“고다이고 천황 이전에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 때, 그러니까 1180 년대가 되겠죠. 그때 다이라 씨의 마지막 후계자 니이노아 마가 싸움에 져서 여덟 살짜리 아이이던 안토쿠 천황을 안고 물 에 뛰어 들어 자결했을 때, 삼종의 신기는 전부 가라앉았습니다. 그 후 거울과 목걸이는 건졌으나 초치검만은 끝끝내 찾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초치검이란 것은…………….”

“여기 나타난 초치검이 가짜인지, 아니면 그때 이후 물에서 건 진 진짜 초치검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있는 거죠.”

이야기가 얼마나 복잡한지 박 신부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박 신부와 퇴마사 일행은 안 기자의 전화를 받고 서울을 떠나기 이전에 강한 영기를 투시했고, 그 기운은 초치검이 여기 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초치검이 아예 가짜일 가 능성이 있다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오의파 사람이 말을 이었다.

“다이라 씨는 미나모토 씨와의 대결에서 분명 패했습니다. 간 몬해협의 동쪽인 단노우라에서 오백 척의 군선으로 미나모토 씨 요시쓰네의 칠백 척 대군과 결전을 치렀던 일이 사서에 분명히 나와 있고…………..”

갑자기 준후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안전지대에서 적들에 대항해야 해요!”

세 사람은 준후가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셋이 뛰어들자 준후 는 허공에 부적들을 던졌고, 자욱한 안개가 그들의 앞을 가렸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어요! 녀석들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준후의 손짓에 따라 두 리매가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땅바닥을 긁어 이상한 도형을 그리더니 각 각 남쪽과 북쪽을 향해 좌정했다. 박 신부도 성수 뿌리개와 부적 을 꺼내들었으나 박 신부의 머릿속에는 초치검의 이야기가 맴돌 고 있었다.

안 기자의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준후가 영사를 행 했다. 그 결과 초치검이라는 일본 천황의 신물이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안 기자의 말을 듣고 판단하건대 우리나라 각지에 숨 어 지냈던 주술사들이 검을 얻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어떤 투시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 다. 그리고 이곳에 펼쳐진 구회만다라진은 일본의 수법이었다. 진은 세월이 지나면서 힘을 잃다가 일본 승려들의 손에 의해 다 시 위력을 찾게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백 구의 시체가 발 견된 고분은 진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런! 거기에 뭔가 있겠구나! 경황이 없다 보니 무턱대고 영 기만 쫓아 진 안으로 뛰어들었어!’

오백 구의 시체가 있는 고분이 아닌 다른 곳에 진이 쳐져 있었다면, 진 속에는 뭔가 중요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 다. 그것이 무엇일까?

‘초치검!’

오의파 사람이 빙의되었을 때 들었다는 말에 따르면, 묘운이 깨어났는지 척후를 보내 알아보라고 했다고 한다. 묘운이 깨어 나야 자신들도 깨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묘운이라는 자가 있 는 곳은 진의 안쪽? 그리고 초치검이 있는 곳도?

‘낭패다! 어쩌면 안쪽이 더 위험할지도!’

초치검은? 오의파 사람의 말은 사실 같았다. 다이라 씨와 미나 모토 씨의 싸움으로 삼종신기가 가라앉았고 끝내 초치검을 건지 지 못했다면 과연 여기 있는 초치검은 정말 초치검일까? 어떤 자 는 그 검을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먹장을 친 듯 불확실하게 투시될 정도로 강한 주술이 둘러싸고 있는 판에 유독 초치검의 모습만 투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 미하는 것일까?

‘속임수? 아아, 이럴 수가! 초치검이 여기 있다는 것이 속임수 였다는 말인가? 승희의 투사에 의하면 단군 유물의 봉인을 풀려 고 가지고 온 것이 초치검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인 가? 도대체가..??’

박신부가 열심히 추리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노호성이 들렸다.

“어이! 왜놈들은 물러가라! 나랏님의 땅이다!”

철기옹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준후가 쳐 놓은 안개 장벽의 너머로 기괴한 외침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놈들, 놈들이 와요! 그런데 리매들은 어째서?”

그러고 보니 척후 삼아 준후가 보냈던 리매들이 돌아오지 않 았다. 오의파 두 사람이 긴장한 얼굴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주변에 싸늘한 냉기가 돌고 무엇인가 뒤에서 스스스 소리를 내 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철기옹을 불렀다. 철기옹은 줄 이 끊어진 활과 이상하게 생긴 화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뭔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는 것이 있냐고? 알지. 나는 많이 알어!”

“저는 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초치검은 진짜입니까?”

철기옹은 긴장된 얼굴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움직이려 하다가 다물었다.

“말할 수 없어!”

“단군의 유물은 정말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신부, 그 일을 어떻게 알았나?”

“사태가 급박합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일본 승려뿐이 아 닙니다. 오백이 넘는 지박령 무리가 육체를 갖추어 일어나고 있 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철기옹이 이를 악물었다.

“육체를 갖췄다고? 그건 스기노방 놈의 주술이여! 시체를 깨어나게 하는 주술이지. 놈은 이미 그 주술을 폈어!”

박 신부는 경악에 찬 눈으로 철기옹을 쳐다보았다. 시체를 깨어나게 하다니! 그렇다면 오백의 지박령은 단순한 영기가 아니 라 백골이 된 몸으로 일어났다는 말인가?

그때 준후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쳤다.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리매, 물러나! 어서 물러서!”

안개 속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쇳소리와 함께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도 여전히 들렸다. 갑자기 안개를 뚫고 한 마리의 리매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걸레 꼴이 되어 서 뛰어나왔다. 귀신도 물질도 아닌 리매가 거의 반쯤 난도질을 당한 것이다. 준후가 비명을 지르자, 오의파의 두 사람이 기합을 넣었다. 아까부터 들리던 스스스 하는 소리가 커져 가고 있었다. 박신부가 돌아보니 사방에서 수백을 헤아리는 뱀들이 몰려서 앞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윽! 이건 또 뭐야!”

철기옹이 소리쳤다.

“오의파의 뱀을 부리는 술수여! 아아, 하지만 그걸로 될까?” 

뱀들은 빠른 속도로 기어서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 시 저편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박 신부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준후야, 안개를 거둬라! 도리어 불리할 뿐이야!”

다친 리매는 준후의 앞에서 신음하더니 서서히 사라져 갔다.

준후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박 신부를 돌아보다가 멍하니 주문을 외웠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으앗!”

“헉!”

“이럴 수가!”

걷히는 안개 너머로 서서히 저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모두들 기겁을 했다. 군대! 그것은 완전히 군대였다. 수백을 헤 아리는 백골 군대는 질서 정연한 사각형의 방진을 이루며 녹슨 병장기를 들고 이쪽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창병들 이 달려드는 뱀을 몰아냈다. 백골이 된 몸에 누더기와 녹슨 갑옷 조각과 투구를 얹은, 죽은 자의 군단이었다. 해골 말을 탄 장수 가 군대 중앙에서 뼈뿐인 손을 치켜들자 대열이 정지했다.

박 신부와 오의파, 준후와 철기까지도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을 덜덜 떨었다. 준후가 더듬거렸다.

“지, 지옥이야. 어찌 이런 일이…….”

철기옹이 소리를 질렀다.

“왜놈들! 죽어서까지 이 땅을 침노하려는 못된 놈들!”

해골 장수의 신호에 따라 대열이 정비되자 방패를 든 앞줄의 해골병사들 뒤에서 썩어 빠진 활을 든 궁수들이 우르르 나와 제 2열에 섰다. 오의파의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어이! 활! 놈들이 활을!”

“아니, 수백 년이나 썩은 활이 당겨진단 말인가!”

해골 궁수들은 시위를 메겨 썩은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박 신부는 순간적으로 기도력을 발휘하여 오라 막을 펼쳤다. 오라 막은 순식간에 일행의 주위를 감쌌다.

“조심해요!”

화살은 환영 같은 게 아니었다. 오십여 발의 화살이 박 신부의 오라 막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힘들게 화 살을 막아 내던 박 신부는 화살이 한 발 한 발 오라에 꽂힐 때마 다 몸을 흠칫거리며 조금씩 뒤로 밀려 갔다. 오십여 발의 화살을 막는 동안 박 신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땅에 자국을 남기며 삼미터 이상 뒤로 밀려 나갔다.

“신부님!”

준후가 소리를 치는데 마지막 화살까지 받아 낸 박 신부가 몸 을 떨더니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 냈다.

“모, 모두 도망・・・・・・ ! 화, 화살에 영력과 물리력이 둘 다………….” 

준후가 씩씩거리면서 해골 부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골 궁수들은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있었다. 준후는 앙칼진 소리를 지르며 양손을 미친 듯 휘둘렀다.

“아아앗!”

준후의 왼손에서는 인드라의 뇌전이, 오른손에서는 부동명왕의 멸겁화가 물줄기처럼 뻗어 나갔다. 앞쪽의 궁수 하나가 뇌전 을 맞고 항아리가 깨지는 것처럼 폭파되었고, 두 명의 궁수는 몸 이 불덩어리가 되어 땅에 뒹굴며 고약한 냄새를 뿜어냈다. 다시 준후가 불의 번개를 내쏘는데 뒤쪽에 있는 해골 장수가 손을 쳐 들었다. 이번에는 널찍한 방패를 든 해골 병사들이 와르르 몰려 나와 앞을 막았다. 준후가 내쏜 불길은 방패에 맞고 해골 병사들 을 뒤로 몇 걸음 밀려나게 했을 뿐 그것으로 끝이었다. 준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방패를 든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자 사이사이로 궁수들이 시위 를 메긴 활을 쏘아댔다. 오의파와 준후, 박 신부와 철기까지 도 벌떼처럼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비명을 올렸다.


땅에서 솟아오른 백골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먼지가 가득 낀 초치검을 안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놈들의 얼굴 은 만신창이로 썩어 해골에 흙먼지만 잔뜩 끼어 있는 상태였으 나, 휑하니 뚫린 눈구멍에서는 알 수 없는 적의가 이글이글 불타 올랐다.

현암은 모험을 할 때라고 판단했다. 주기 선생 상준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아직 불분명했지만, 지금 십여 구에 이르는 썩은 백 골들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마당에 사람들끼리 싸울 수는 없었다. 지금 현암과 상준, 근호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이 괴물들과 맞붙어 싸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 다. 지연보살은 치유 능력만을 가진 사람이었고 승희도 변변한 힘은 쓰지 못했다. 승현은 어렸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독에 중 독되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현암은 침착하게 상준을 쳐다보았다. 상준의 눈가도 떨리고 있었다. 현암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기 선생! 우리끼리 일은 뒤로 미루자. 저것들 보이지?”

“너, 너는…………….””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잖는가? 물론 너와 나를 포함해서.”

“흠・・・・・・ 뒷통수가 근지러운데…………….

“남자로서의 약속이다. 어떠냐?”

상준은 잠시 눈을 빛내다가 의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좋다. 나도 살고 봐야지. 초치검의 보상금이 아무리…..” 상준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암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상준을 다그칠 때가 아니었 다. 다만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이기는 싫어. 하지만 배반자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현암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자 상준은 화난 듯이 소리를 쳤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그런 소리는 그만! 어떻게 싸울지나 생각해 봐!”

현암은 스기노방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있는 근호를 불렀다. 그리고 승희에게 말했다.

“우리가 잠시는 버티겠지만,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는 네게 달 려 있어. 너의 힘을 모아서 지연보살님에게 실어 드려라. 일단 사람들을 낫게 해야 해! 최선을 다해서! 알았지?”

“현암 씨, 해골바가지들을 그냥 박살 내면 되잖아!”

현암이 입술을 물었다.

“그럴 수 있을지………. 보통 녀석들이 아닌 것 같거든. 그러니 나한테 힘쓰지 말고 회복에만 최선을 다해! 알았지?”

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연보살에게로 달려갔다. 현암은 근호에게 눈짓을 했다. 근호는 겁을 먹었지만 용기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개의 단봉을 꺼냈다. 상준도 찢어진 기 하나를 던져 버리고 남아 있던 용신의 기를 고쳐 잡았다. 아직 그의 등에는 한 개의 기가 남아 있었다.

백골들은 서서히 둥근 형태를 취해 갔다. 썩은 장검을 든 두 구의 해골이 칼을 땅에 내려치자 녹이 와스스 부서지며 본연의 색을 드러냈다. 긴 낫처럼 생긴 구겸창(鉤鎌槍)*을 든 두 구의 해골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현암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곧 덤벼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긴 창에 낫과 같은 날이 달려서 주로 사람이나 말 다리를 후려서 베는 데 사용 되는 무기.


“선수다! 공격!”

현암이 소리를 치며 월향을 날리자 주기 선생도 깃발을 휘둘 러 불길을 뿜어냈다. 근호는 단봉을 기묘한 수법으로 던졌다. 월 향검이 귀곡성을 울리면서 날아가고, 공중에서 회전하며 날아가 는 두 개의 단봉 뒤로는 주기 선생의 불길이 따랐다.

승희는 지나가는 길에 땅에 뒹굴고 있던 승현을 안고 지연보 살에게로 달음질쳤다. 그곳에서는 홍녀가 자영의 다그침에 못 이겨 약을 고르고 있었다. 홍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몰라요!”

“아니, 해약을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운 상이 쓴 게 무슨 약인지는 저도 몰라요! 저는 약을 잘 모른다고요. 정말이에요! 이 약들 중 몇몇은 알지만!”

자영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지?”

지연보살이 홍녀에게 물었다.

“그러면 홍녀 님이 아시는 약은? 해약이 아닌 것만 골라 보세요.”

홍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몇 가지 약들을 쓸어 냈다. 그러자 색깔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약이 남았다. 약들은 각각 여섯개씩이 있었다. 다가온 안 기자와 손 기자도 망연한 눈으로 약들을 바라보았다. 지연보살이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요. 홍녀 님, 홍녀 님은 일본 사람이지요?”

홍녀는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같은 사람이지요?”

이번에는 홍녀가 망연히 지연보살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 도 지연보살의 땀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고통을 느 끼는 것 같았으나 표정은 온화했다.

“그러면 귀신보다는 사람을 도우세요. 저리로…………….”

홍녀의 눈이 지연보살의 눈과 마주쳤다. 우직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눈만은 바다같이 깊었다. 홍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자루만 남은 구마열화검을 손에 쥐고 몸을 일으 켰다.

자영은 지연보살을 쳐다보았다. 지연보살은 다섯 가지의 약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손 기자가 눈을 돌리니, 지연보살의 손에 도운의 슈리켄이 들려 있었다. 손 기자는 직감적으로 사태를 짐작했다.

“보살님! 지금 직접 실험하려는 겁니까? 그러다 죽어요!”

지연보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재빨리 슈리켄으로 상처를 내려는 순간, 손 기자가 와락 지연보살의 손목을 잡았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제가 하겠습니다!”

지연보살은 고개를 저었다. 손 기자가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약은 다섯 가지예요! 네 번 실험하면 진짜 약이 뭔지 알 수 있다고요! 그다음에 제게 해약을 한 알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지연보살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 다섯 가지 중에 독약이 있으면 어쩔 셈이죠?”

“그, 그것은…….”

“그러니 제가 해야 해요. 저는 해독을 시킬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해독을 시킬 수 있다면 저를 해독시켜 주시면 되 지 않습니까?”

“아아!”

자영과 안 기자, 승희와 승현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지연보살은 달래듯, 그러나 빠른 속도로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남을 해독하기보다 제 몸을 해독하기가 훨씬 쉬워요. 그러니…”

“아녜요!”

승희가 외쳤다.

“자기가 자기를 치료하기가 쉽겠어요? 중은 제 머리 못깎잖 아요! 지연보살님은 아까 한 번의 해독에도 많은 힘을 쓰셨어요! 그래서 해독할 자신이 없으신 거죠? 그렇기 때문에 희생할 생각을…… “

일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실이었다. 사실 승희의 말대 로 지연보살은 해독에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것이 었다. 손 기자는 지연보살이 들고 있던 슈리켄을 빼앗더니 재빨 리 자신의 손을 찔렀다. 급작스러운 일이라 아무도 말리지 못했 다. 손 기자는 씨익 웃으며 알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 기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손 기자는 알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독 기운이 퍼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응. 미쳤어. 그러니 미친놈이 먼저 가야지. 하하하!”

손 기자가 알약을 삼켰다. 모두는 긴장된 얼굴로 손 기자를 쳐다보았다. 짤막한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손 기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콧구멍에서 두 줄기의 피가 왈칵 뿜어 나왔다.

“으악! 손 기자!”

손 기자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바보! 이 멍청아!”


귀곡성을 울리며 날아간 월향검을 한 해골이 구겸창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나 월향검은 제비처럼 진로를 바꾸어 옆으로 돌면서 해골의 목을 따 버렸다. 근호의 단봉도 하나는 칼에 차단당했 으나 떨어지지 않고 빙빙 돌면서 다시 근호의 손으로 돌아왔고, 다른 하나는 한 놈의 앙상한 팔뚝을 후려쳐 팔을 부수어 버렸다. 이어 주기 선생의 불길이 휘몰아쳐 백골 한 구를 삼켰다.

근호가 소리쳤다.

“하하하! 어떠냐, 이놈들!”

근호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단봉을 거머쥐고 앞으로 몇 걸 음을 나아갔다. 현암이 불안함을 느끼고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반자이 (만세)!”

몸이 불길로 뒤덮인 백골이 총알처럼 앞으로 달려 나와 근호 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근호는 놀라서 물러서려 했으나 뼈만 남은 팔이근호의 허리를 감자 근호의 몸에도 삽시간에 불이 옮겨 붙었다.

“저런!”

현암이 당황하여 월향검을 재차 날렸다. 날아간 월향검은 근 호를 안은 백골의 머리를 날려 버렸으나 그래도 놈은 근호를 놓지 않았다.

“으아악!”

근호는 소리를 지르면서 백골을 안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불 에 타고 있던 백골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그대로 바스라져 없어 졌으나 근호의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심하게 화상을 입은 듯했다. 현암이 넋이 나간 채 참혹한 모습을 보고 있는데 상준이 소 리를 지르며 불길을 내쏘았다.

“정신 차려!”

현암이 월향검을 잡으며 몸을 돌리자 외팔이 해골이 상준의 일격에 불덩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암이 다른 데 신경 쓰는 틈을 노려 달려들던 녀석이었다.

근호의 단봉에 맞아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여섯 놈의 백골들 은 끼어들려 하지 않고 한데 모여 기이한 자세들을 취했다. 중앙 에 있는 백골이 초치검을 검집째 높이 쳐들었다.

월향이 다시 한 놈의 백골을 꿰뚫자 주기 선생의 불길이 놈을 태워버렸다. 현암과 상준이 기세를 살려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는데 음산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게!”

상준은 놀라 고함을 쳤다. 여섯 명의 백골이 모여 있는 곳에 시커먼 안개가 모이고 있었다. 현암도 방어 자세를 취하며 주춤 거리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현암 상 조심해요! 그건!”

홍녀였다. 현암이 태극패를 꺼내려는 순간, 백골들에 모였던 안개가 거대한 짐승의 모양을 이루더니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포효하며 현암과 상준을 덮쳤다.

쓰러지는 손 기자를 자영이 부축해 안았고 안 기자는 눈을 붉혔다. 지연보살이 입술을 깨물면서 슈리켄을 손에 찌르려 하자 승희가 슈리켄을 빼앗아 버렸다. 승현이 소리쳤다.

“잠깐 잠깐!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잠깐만!”

지연보살과 승희가 승현을 쳐다보았다. 승현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알약을 가리켰다.

“몸에 좋은 건 입에 쓰죠?”

무슨 말인지 몰라 일동은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승현 사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반대로 독이라면? 독을 먹이려는데 맛이 쓰면 안 되지 않을까요?”

승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 독약은 쓴맛이 아닐 거야! 쓰면 희생자가 안 삼킬 테니 까! 분명 이상한 맛이 느껴지지 않게 했을 거야. 반대로 입에 쓰 다면 해약일・・・・・・ 보살님! 한번 해 볼게요!”

승희는 재빨리 약들을 집어 혀에 대 보았다. 두 가지는 단맛이 났다. 승희는 약이 혀에 닿기가 무섭게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이 두 가지는 단맛이에요! 의심스러우니 제쳐 놓고……. 다른 한 가지의 약은 의아한 맛이었고 한 가지의 맛은 속이 뒤 틀릴 것 같은 쓴맛이었다. 승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무릎을 쳤다.

“와, 저거다!”

“잠깐, 확실하지는 않잖아!”

“아녜요! 꼭 필요한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쓸 리 있겠어요?”

승현은 종알거리면서 승희가 쓰다고 했던 약 한 알을 쓰러져 있는 다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앗!”

“앗!”

새카맣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고 거의 체념했던 박 신부와 준후, 오의파와 철기옹의 앞을 희뿌연 것이 가로막았다. 날아오 던 화살들은 희뿌연 것에 맞아 반 이상 양옆으로 흩어지고 반 정 도는 희뿌연 것에 박혔다.

“리매야!”

그것은 준후가 불러낸 또 다른 리매였다. 리매는 하늘을 향해 어헝 하고 고함을 치며 몸을 돌렸다. 리매는 한쪽 팔이 잘려 나 가고 몸도 많이 상해서 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개의 화살을 몸에 맞고도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준후가 소리를 쳤다.

“피해요! 리매가 달아나라고…………… 어, 어서요!”

오의파의 두 사람이 박 신부를 부축해서 세웠다. 박 신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두 사람을 밀어냈다. 철기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엄청나게 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와하하!”

사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엄청난 소리였다. 앞에 도열 해 있던 해골 궁수들의 몸이 마구 떨렸고, 웃음이 내뻗는 기운에 압도당했는지 방패로 도열한 진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먼 곳 에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망제들아, 천고에 맺혔느냐 만고에 맺혔느냐. 천고 에 맺혔으면 천고에 풀 것이고 만고에 맺혔으면 만고에 풀 것인데…..”

철기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할망구다! 이제 대적할 만할 거야!”

철기옹은 땅에 떨어져 있던 덩굴을 하나 주워 올렸다. 준후는 일단 리매에게 염을 발했다. 그리고 허공에 손가락으 로 이상한 도형을 그리니 리매가 힘을 얻은 듯 어깨를 쫙 폈다. 리매의 몸에 박혔던 화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서 땅에 떨어지자 먼지가 되어서 바스라졌다. 준후가 손뼉을 쳤다.

“와, 된다. 돼! 살아나는구나! 리매야 다 물리쳐!”

리매가 포효하면서 앞으로 내달릴 차비를 했다. 아까 없어진 것이 암놈이고 이놈이 수놈인 듯, 덩치도 컸고 힘도 더 세어 보 였다. 준후는 뒤에서 리매를 지원하여 번개를 몇 방 내쏘려는데 박신부가 소리를 쳤다.

“준후야, 잠깐!”

“왜요?”

“네가 쏘는 번개는 방패에 막혀서 별 효과가 없어. 차라리 리매의 무등을 타고 나가 봐라! 나는 여기 오의 친구들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준후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리매를 손짓해 불러서 무등을 탔 다. 철기옹이 광소를 터뜨리고 도지가 망자를 향해 내보내는 가 락도 점점 다가오자, 해골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준후가 덩치 가 엄청난 리매의 무등을 타자 말을 탄 것보다 더 높이 위로 솟 았고, 방패 너머에 웅크려서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똑 똑히 보였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뭘 하려는 건지 주변에서 끝이 뾰족한 풀잎들을 모으고 있었다. 철기옹은 광소를 터뜨리면서 끊어진 활시위를 덩굴로 이었다. 오의파의 한 사람이 풀잎을 한 움큼 들고 허공에 던지자, 다른 한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게 없는 법! 우리 땅을 범하는 너희 왜놈들, 산천초목에 깃든 이 땅의 정기가 어떤 것인지 한번 보아라!”

오의파의 사람이 품에서 부채를 꺼내 촤악 하고 부치자 풀잎 들이 허공에 날아오르더니 화살처럼 해골 병사들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눈을 크게 떴다.

‘오, 풀잎을 화살처럼 사용하다니!’

해골병사들의 일각으로 풀잎 화살들이 쏟아지자 혼란이 일어 났다. 화살만큼 강한 위력을 내지는 못했으나, 해골 병사들의 몸 에 군데군데 박혀 들어가 고통을 주었다. 방패를 든 병사들과 궁 수들 중 몇몇이 몸에 풀잎이 박힌 채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땅에 뒹굴자 대열의 한 귀퉁이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준후가 말을 탄 장수라도 된 듯 외쳤다.

“나가자!”

리매가 길게 울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고, 그 기세에 땅이 쿵쿵 울렸다. 무등을 탄 준후가 신이 나서 사방에 제석천의 뇌전과 멸 겁화의 불길을 뿌려 대자,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리 떨어지는 불 꽃과 번개를 맞은 해골 병사들은 불길에 휩싸이거나 그대로 가 루가 되어 버렸다. 박 신부가 오의파 사람들에게 외쳤다.

“풀잎의 위력이 약하오! 내 성수를 뿌려 봅시다!”

박신부가 허공에 솟구쳐 올라가는 풀잎들에 성수를 뿌리자 풀잎들은 이슬처럼 성수를 머금었다. 그 풀잎들이 해골 병사들 에게 내리꽂히자, 아까처럼 그냥 타격만 주는 게 아니라 몸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좋다! 잘한다!”

철기도 소리를 치면서 덩굴로 시위를 급조한 활이나마 튕기 기 시작했다. 어설퍼 보여도 영력만 통하면 되니 위력은 강했다.

그 일격에 해골 대열의 일각에 세워 놓았던 방패 하나가 산산이 조각나 버리고 그 사이로 제이, 제삼의 기운이 날아들어 두 놈의 해골병사들이 박살 났다. 준후를 태운 리매도 소나기 같은 풀잎 화살과 철기옹의 지원 사격을 받으면서 어느덧 무너져 가는 대 열의 한편에 도달했다. 몇몇 해골 병사들은 리매의 흉포한 기세 에 질려 도망가려다가 준후의 불을 맞아 부서졌다. 리매의 몸에 몇 개의 화살이 꽂혔으나, 리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앞에 서 있던 해골병사의 팔뚝을 잡아 번쩍 들더니 통째로 허공에 휘두 르면서 돌진했다. 몇 구의 해골 병사가 그놈과 부딪혀 와지끈 부 서졌다. 어느덧 리매의 손에 잡혔던 병사는 팔목 하나만 남기고 가루가 되어 버렸다. 흉포하게 날뛰는 리매의 주변에는 너저분 한 뼈다귀들만 널렸을 뿐, 나머지 해골 병사들은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어딜 도망가느냐!”

준후가 소리치면서 계속해서 불을 내쏘는데, 어디선가 긴 창 한자루가 날아와 리매의 아랫배에 박혔다. 날뛰던 리매의 몸이 휘청했다.

“어어엇!”

리매가 쓰러지자 준후도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랫 배에 정통으로 창을 맞은 리매는 고함을 지르면서 서서히 사라 져 갔다. 박 신부와 오의파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안개 사이로 말발굽이 다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음침하고 거대한, 말 탄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의파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빌어먹을 건 또 뭐야?”

해골 말을 탄 해골 장수였다. 십여 기의 해골 기병을 거느린 해골 장수가 등에서 엄청나게 긴 장검을 빼 들고 달려왔다. 놈이 돌격할 채비를 하려는 순간 철기옹이 뒤에서 소리를 쳤다. 

“두목이여! 조심혀!”


홍녀가 던진 구마열화검이 시커먼 짐승 모양의 형체를 뚫고 지나가자 그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암은 기회를 놓치지 않 고 월향을 날렸다. 월향은 귀곡성을 내면서 날아들어 양미간을 꿰뚫어 버렸다.

“크아악!”

짐승의 형체는 몸을 떨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현암이 홍녀 를 보고 고맙다는 눈인사를 했다. 상준은 신기한 눈초리로 현암 의 손에 돌아온 월향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암은 왼 손목에 검 집을 묶어서 언제든지 오른손으로 검을 쉽게 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왼 손목만 내밀면 바로 월향이 검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홍녀가 현암을 향해 외쳤다.

“조심하세요! 저건 밀교의……………”

초치검을 든 자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나머지 다섯 해골들은 뒤에 도열하여 음산한 독경 소리를 냈다.

상준은 잠시 몸을 흠칫하고는 화상을 입은 현현파의 근호에게 힐기보법으로 달려갔다. 근호는 몸을 잘 움직이지 못했지만 다 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상준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도와줄게, 응? 어차피 너 정도는 내 상대도 아니니…….” 근호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여기 잠시 부탁해!”

상준은 현암에게 소리치고는 근호를 부축하여 힐기보법으로 승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현암은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선 자와 그 손에 들려 있는 초치검만 살폈다. 현암이 월향검을 빼 들고 기공력을 주입하자 파란 검기가 월향에 맺히기 시작했다. 초치검을 든 자가 검을 자 신의 앞에 세우자, 주변에 돌연 광풍이 불면서 나뭇잎과 잡동사 니들이 마구 휘날렸다. 그러더니 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둘이 되었다. 그리고 셋, 넷으로 늘어났다. 홍녀가 구마열화검을 주워 들고 소리쳤다.

“저, 저건 밀교의 수법 중에서도 가장 고단계라고 하는 방법…………. 저자는 보통 고수가 아닌・・・・・・ 아아, 대선사님!”

현암은 홍녀의 얼굴을 보았다. 홍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아아, 저 저건…… 묘운, 묘운 대선사!”

“묘운 대선사라니? 저 해골의 이름이오?”

홍녀는 말할 수 없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악을 썼다.

“아아, 현암상! 어서, 어서 물러서세요! 어서요!”

“물러서다니! 그럴 수 없소!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현암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제 여덟 개의 분신으로 갈라 진 놈이 현암의 팔방을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현암은 파사신검 중의 한 검초를 써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면서 공격에 대응 할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홍녀에게 외쳤다.

“홍녀 님! 난 됐으니 홍녀 님부터 어서 피하…………..”

순간, 현암은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왼손을 대니 옆구리에서 선혈이 묻어났다. 현암은 간신히 몸을 수습하여 중 심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는 현암의 눈에 얼굴이 그야말로 새하 얗게 질려서 피에 젖은 구마열화검을 들고 있는 홍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현암은 고통보다도 놀라움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니, 홍녀 님…… 왜?”

“혀, 현암 상…… 나, 나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홍녀의 뒤로, 현암의 사면팔방으로 묘운의 분신들이 몸을 날려 공격해 들어왔다.


“와! 성공이다!”

다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승현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 다. 승희와 지연보살, 그리고 자영은 기뻐서 박수를 치면서 재빨 리지국, 증장과 손 기자에게도 해독약을 복용시켰다. 승현은 남 은 두 알 중에 한 알을 가지고 쓰러져 있는 병수에게 달려가면서 지연보살에게 외쳤다.

“보살님, 광목 스님을 구해 주세요! 저 노승에게 맞아…………….” 

“알았어!”

자영은 나머지 한 알의 해독약을 들고 도운의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승희가 말했다.

“복용시키세요.”

“이 악당에게요? 저쪽에도 중독당한 우리 편이 있어요. 그들 에게 주어야 하잖아요.”

“저쪽 사람들은 스기노방의 독에 중독된 거예요. 악인이라도 죽게 놔둘 순…………..”

“누구에게든 목숨은 소중하잖아요.”

승희는 말없이 자영을 쳐다보았다. 자영은 머뭇거리다가 한 숨을 쉬고는 마지막 한 알의 해독약을 도운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때 현암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가 돌아보니 백골의 분신들이 팔방에서 비틀거리는 현암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앗! 현암 씨가 다쳤나? 저런!’

승희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았다. 승희가 현암에게 힘을 보내자 부상을 당해 주춤거리던 현암은 순간적으로 자세 를 가다듬고 오른손에 힘을 가하여 월향검을 휘돌려 던졌다. 월 향은 귀곡성을 울리며 무서운 속도로 파르르 회전하면서 현암의 몸 주위에 바싹 붙어 한 바퀴를 돌며 해골의 공격을 차단했다. 챙챙챙!

묘운의 분신들의 공격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월향검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러나 현암의 배후로 덮치던 한 분신에게까지는 월향의 힘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순간, 퍽! 하고 불기 둥이 솟으면서 그 분신의 공격이 차단당했다. 홍녀였다.

현암은 월향검을 거머쥐고 홍녀를 돌아보았다. 홍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번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현암 상, 나, 나는…………….”

현암은 홍녀의 사정을 이해했다. 홍녀는 저 분신이 묘운 대선 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홍녀 입장에서 묘운은 까마득한 사조( 祖)일 터이고, 묘운의 영이 홍녀에게 현암을 없애라는 메시지 를 보내자 엉겁결에 현암에게 상처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 그런 행동을 후회하는 듯 보였다. 현암은 애써 웃어 보였다.

“됐어요. 괜찮으니 물러서요.”

괜찮기는커녕 현암은 통증이 심해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현암은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 다. 홍녀의 눈이 피를 분수같이 뿜는 현암의 옆구리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흐려지고 있음을 현암은 알 수 있었다.

공격을 차단당한 묘운의 분신들은 현암과 홍녀의 주위를 다시 둘러싸고 섰다. 포악한 기세가 더 흉흉해졌고 여덟 분신의 입에 서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호통 소리에 대항하여 외쳤다. 현암은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다.

‘묘운 대선사의 분신들………… 저것들은 분명 허상이다. 그렇다면…….’

홍녀가 비명을 올리면서 구마열화검을 떨어뜨렸다. 묘운이 술 수를 부려 금제를 발동시키는 것 같았다. 홍녀를 무력화시킨 후 자신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 홍녀는 묘운과 같은 밀교의 수 법을 익힌 인물이고 묘운이 대선사이니만큼 홍녀에게 술수를 부 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현암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부상을 당한 몸으로 저렇게 많은 수의 분신들과 직접 상대하기는 무리였고, 홍녀마저도 위험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속전속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동심결!”

현암은 월향검을 하늘로 떨쳐 내고는 양손을 마주 쥐고 단전에 힘을 넣었다.


철기옹이 달려 나가면서 해골 장수가 던진 창을 주웠고 박신 부는 쓰러진 준후를 안아 들었다. 해골 장수가 무서운 기세로 들 이닥쳤다. 뒤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이 풀잎 화살을 날렸으나 장 수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철기옹이 몸에 신을 내 렸는지 창을 공중에서 크게 휘둘렀다. 박 신부는 준후를 안은 채 오라력을 발동하여 철기옹의 앞을 방어했다.

“야아앗!”

철기옹이 창을 휘두르자 해골의 장수는 장검으로 창을 받아넘 겼다. 이 합, 삼합・・・・・・ 철기옹과 해골 장수가 맞붙어 싸우는 동 안 박 신부는 오라력을 발하여 철기옹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박 신부의 품에 안겨 있던 준후가 말했다.

“신부님, 저자, 이름을 밝히고 있어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아들 마사토키라고…………. 누군지 아세요?”

“글쎄다. 음………… 가만, 저 장수는 일본말로 말하는 것이 아니냐?”

“뜻으로만 전달되어서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면 저 장수에게 싸움을 중지해 달라고 전달할 수 있니?

잠시 휴전을 하자고 말이야.”

준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뒤 에서 말을 돌려 재차 공격하려던 해골 장수가 주춤하면서 말을 멈추었다. 철기옹도 준후와 해골 장수 마사토키가 주고받는 이 야기를 알아들었는지 창을 곧추세웠다. 준후가 중얼거렸다.

“앞에서 비키면 죽이지는 않겠대요. 자기들은 급히 묘운 대선사와 만나야 한다는데요?”

“묘운 대선사? 비켜 달라고?”

“해야 할 일이 있대요. 수백 년을 기다려 왔대요.”

박 신부는 긴장했다. 드디어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가 된 것인가?

“그들은 왜 이곳으로 왔지? 어째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준후가 다시 정신을 집중하다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떨려 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준후의 눈에는 어떤 광경이 투 시되었다. 박 신부도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준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해골 장수는 울분을 터뜨렸다. 이미 칠백 년이나 지난 날의 일・・・・・・ . 해골 장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과거가 준후를 통해서 박 신부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다.

오백 명의 병사들은 그대로 도열하여 서 있었다. 많은 어려움을 겪 고, 고려의 수군과 싸우다 벌써 몇 번이나 잡힐 뻔했는지 모른다. 그러 나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허나 지난 전투 때 큰 타격을 입고 남은 것은 오백 군사와 묘운 대선사와 그를 수행하는 십여 명뿐. 묘운 대선사는 먼저 그 물건의 자취를 탐색하기 시작하여 어느 곳에 묻 혀 있는지 대강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대군이 닥쳐오고 있다. 수천 명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식량도 없고 화살도 거의 다 떨어졌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지만, 오랜 항해로 쌓인 피로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물건? 어떤 물건이란 말인가? 초치검?’

묘운 대선사는 물건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진을 편 다음, 우리는 죽 는 순간까지 진을 지키라 명령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설사 우리가 죽 더라도 반드시 다시 빛을 보게 해 준다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 진 안에는 묘운이라는 자가 또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마지막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남조의 영광을 위해서! 싸워 •봐야 어차피 전멸한다면, 물건을 손에 넣었다 해도 어떻게 전달할 것인 가? 누가 살아남아도 어떻게 다시 바다를 건널 것인가? 고려인은 자신 의 땅에 그 물건이 묻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에게 이 물건의 소 재를 공연히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싸우면 몇몇은 사로잡힐지 도 모르고, 그러면 비밀은 누설된다. 그럴 수 없다. 후일을 기약한다. 묘운 대선사의 법력을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오백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 차례대로 도 열하여 벼랑 밑에 앉아 칼을 꺼내어 할복하고 있었다. 장검을 거 머쥐고 배에 칼을 찔러 넣고 쓰러지는 자도 있었고, 독한 자는 배를 찌르고 다시 칼을 위로 그어 올리는 자도 있었다. 그 누구 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뒤에서 목을 쳐 주지 않았다. 고통을 깊 게 하여 원령을 남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신음을 하며 쓰러 진 자는 뒤에 차곡차곡 눕혀 놓은 뒤 다음 열이 들어가서 배를 가른다. 몇몇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장수들은 그런 자를 그대로 창에 꿰어 시체 더미에 밀어 넣는다.

‘세, 세상에! 그러면 여기 묻힌 오백 명이 모두 할복자살을 했 단 말인가? 물건을 지키려고?

장수들은 최후로 자신들의 말을 죽여 시체 더미에 눕힌다. 그 리고 자신들은 그대로 시체 더미에 들어가 눕는다. 그리고 줄을 당기자 미리 장치를 설치해 놓은 벼랑이 허물어지면서 흙더미가 모두의 위를 덮는다. 아무도 그들이 어디서 왔었는지, 어디로 꺼 져 버렸는지 눈치채지 못하리라.

고려인에게 물건의 소재를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 물건은 남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위해…………. 먼 훗날이 오더라도 나 구스노키 마사토키 의 손으로…………….

‘도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박신부는 눈을 떴다. 준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오 의파의 두 사람은 멍하니 서 있었다. 철기옹…………. 그랬다. 철기 옹은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골 장 수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가 내뱉는 소리가 마음속에 울려 모두에게 전달되어 왔다.

이제 길을 비켜라! 길을 비키면 해치지 않는다. 나 구스노키 마사토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오의파의 상렬이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를 질렀다.

“구, 구스노키 마사토키! 그러면 마사시게의 아들! 1348년에 북조의 군대에 밀려서 남조의 사령관인 형 마사쓰라와 함께 불 타는 행궁 안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형을 따라 나도 자해하려 했으나 형이 만류했다.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대신 나에게는 마지막 임무를 남겼다. 그 일을 완수할 때까지, 물 건들을 되찾아 남조의 영광을 이룩할 때까지 나는 결코 죽을 수 없다. 나는 형 앞에서 맹세를 했다. 맹세를………….

수백 년에 걸친 해골 장수 마사토키의 집념, 그리고 물건…………. 그건 초치검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박 신부는 천 천히 준후를 내려놓고 철기옹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기옹은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박 신부의 얼굴도 비장했다. 비로소 이 일의 전모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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