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7화 – 때는 임박하도다 7 :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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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2권 17화 – 때는 임박하도다 7 :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

백호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현암은 한참 동안 숨을 돌린 후에 사방을 살펴보며 월항검을 찾았다. 월향검은 힘을 거의 잃 고 한쪽 구석에서 떨어져서 힘겹게 몸을 파닥거리고 있었다. 부 동심결의 영향을 받아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부동심결은 원래 불문 최상승의 심법이니 만큼, 비록 현암과 같은 편이기는 했지만 영혼 상태인 월향에게 좋은 영향을 줄리 없었다. 물론 월향도 그동안 현암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현 암의 기에 적응이 되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현암이 몸을 굽혀 월향검을 왼쪽 손목에 설치한 칼집에 꽂는 데, 돌연 그의 눈에 어떤 물건이 들어왔다. 작은 가죽 가방이었다.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입구가 조금 열려 내용물이 밖으로 반쯤 나와 있었는데, 작은 석판 같은 것이 보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

블랙 엔젤이 이것을 현암에게 주었지만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도로 찾아갔다. 그랬다가 수사가 현암의 반탄력에 튕겨 나갈 때 떨어진 모양인데, 수사는 그것을 모른 채 그대로 빠져나간 것이 었다.

그 석판을 보자 현암은 다시 난감해졌다.

‘이것을 내가 빼앗은 것이라 생각하면 어쩌지? 안 그래도 오해 를 풀기가 쉽지 않을 텐데.’

문득 또 하나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기절시켜 놓 고 온 두 명의 술사였다. 그들의 몸에 공력을 가해 기절시켜 놓 았으므로 금방 깨어나지는 않겠지만,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상 태라 지금쯤이면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찾아올 가능성도 있었 다. 도중에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만나기라도 하면 수사는 상처 가 몹시 심하니 상대가 되지 못할 터였다.

비록 오해를 사고 있는 처지지만 현암은 수사가 염려스러웠다. 더 염려가 되는 것은 승희였다.

‘얘는 도대체 어딜가 있는 거야?’

몸이 욱신거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현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 씨, 지금 나가봐야겠습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듯 압둘을 보며 말했다. 백호는 블랙 엔젤이 들어왔다가 나간 탓인지 좀 멍 한 상태여서 현암에게 질문조차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은 누가…………….”

물론 백호는 현암이 이렇듯 처참한 방법으로 사람을 살해할리 없다고 믿었다.

“혹시 ・・・・・・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백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처참한 짓을 했지요?”

현암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금방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 크게 잘못된 추리를 한판 했던 참이라 마구 말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백 호가 악마에 씌어서 그랬다고 말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별수 없이 현암은 얼버무리며 둘러댔다.

“뭔가가 나타났습니다. 아주 대단한 존재였어요. 그 덕분에 나도 이 꼴이 된 거랍니다. 아무튼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 에……………. 그리고 어떻든 뒷수습을 부탁드립니다.”

백호는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백호가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토록 처참한 시체가 다른 곳도 아닌 자기 집에 남은 터이니 뭐라고 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몹시 당황해하는 백호를 보고 현암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 만 일단 그보다는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승희를 찾는 일이 더 급 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백호를 남겨 두고 현암은 절룩거리 면서 아파트 문밖으로 나섰다.


승희는 남에게 들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현암을 부 르면서 아파트 주위를 헤매고 있었다. 아까 백호의 아파트로 들 어서는 순간 승희는 쓰러진 백호와 그 옆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 다. 그를 보자 염동력을 있는 대로 다 써 보았으나 그것은 압둘 의 허상인지라 능력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승희는 자기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자 현 암을 찾는 것이 최상책이라 여기게 되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정확하게 집중해 투시할 수는 없었지만, 현암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왔다.

재빨리 초능력을 발휘해 거실에 있는 물건들을 엎어 버리고 그 틈을 타 총알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승희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으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려갔다. 그렇게 현암이 올라가는 순간과 승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이 절묘하게 엇갈려 승희는 현암을 만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승희는 투시력으로 현암을 찾으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블랙 엔젤의 영향력이 백호의 아파트를 에 워싸고 있어서 투시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던 승희는 점점 불안해졌다. 분명 자신이 신호를 보냈는데도 현암이 달려오지 않는 걸 보면 현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고, 그런 생각을 하니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현암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 아파트 단지만 시공이 정지 된 것 같았다. 승희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때 승희는 예상치 못 했던 두 사람과 마주치자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까 현암과 싸웠던 두 명의 술사였다. 현암이 그들의 혈도를 짚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다시 아우 구스티노 수사와 현암을 잡으려고 여기저기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들은 승희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승희는 가뜩이나 불안한 상 황에서 갑자기 두 사람과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이런 망할! 선수를 치자!’

승희는 염동력을 발휘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승희가 염동력을 가하자 그들은 일순 깜짝 놀라는 것 같 은 표정을 짓더니 서슴없이 승희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이 점점 음침하게 변하는 것 같고, 또 염동력이 소용없는 것 같 자승희는 놀라서 몸을 뒤로 돌려 다짜고짜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만나는 놈들마다 하나도 힘이 안 먹히니!’

승희의 염동력이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승희가 혈도를 염동력으로 누르는 기술은 현암의 혈도 지식을 그대로 배운 것 이니만큼 그와 똑같은 부위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승희의 염동력은 공교롭게도 현암이 공력으로 짚어 놓았던 혈 도 부위를 눌러서 부자연스러웠던 그들의 몸을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 준 것이었다. 그것은 스위치를 한 번 누르면 켜지고 다시 누르면 꺼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두 명의 술사는, 만난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의 몸에 술수를 가하고, 또 다짜고짜 도망가는 것을 보고는 현암과 한편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몸도 풀겸 승희를 추격했다.

만약 승희가 다시 한번 그들의 혈도 부위를 눌렀다면 그들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효과가 없자 승희는 그들이 키건 같은 능력자들인 것으로 오해했다.

승희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면서 대신 염동력을 발휘해 모래 며, 나뭇가지며, 쓰레기 같은 것들을 마구 그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런 승희의 행동은 그들의 추격을 늦추기는커녕 그들을 더더욱 화나게 만들 뿐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어느 빈 페트병 같은 것을 여자에게 쏟아부었을 때였다. 그 속에는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썩은 물을 뒤집어쓴 여자는 당연히 화가 치솟았고, 그때부터 그들은 거의 목숨을 걸 듯 승희를 뒤쫓았다. 급기야 마녀 쪽이 먼저 승희에게 주술을 썼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섀도우 비스트를 부리던 그 주술사 가 아직 힘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아 소환술을 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섀도우 비스트 몇 마리가 나와서 승희 앞을 가로 막았다면 그것들은 승희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승희가 염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상대라 속절없이 당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승희는 투시력을 발동해 그들의 살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에 마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려 피해 가면서 도망쳤 다. 옷이 더러워지고 구두 굽도 하나 부러지자 승희는 구두를 벗어 팽개치고 맨발로 뛰었다. 그러면서 승희는 이를 뽀드득 갈 았다.

‘현암 군만 나타나 봐라. 너흰 죽었어!’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익은 길, 백호의 아파트 쪽으로 달 려갔다. 그러다가 아파트 앞쪽의 꽤 널찍한 공터로 들어서는 순 간, 부상을 입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마주쳤다.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승희로서는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부상을 입은 것이 그 두 사람과의 싸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에 일단은 반가웠다.

“아, 수사님! 나 좀 도와줘요!”

수사는 간신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나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다.

반가운 마음에 승희는 하지 말아야 될 말까지 해 버렸다.

“현암 군은? 아까 그 젊은이는 어딨죠? 저와 한편이에요! 저 좀 도와 달라구요!”

승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어떻게든 힘을 합친다기보다 일 단 상황을 모면할 생각에 그의 뒤로 숨으려 했다. 그때는 승희의 뒤를 쫓던 두 술사가 시야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승희의 말을 들은 수사는 곧 표정이 일그러졌다. 승희는 다시 수사에게 말을 하려다가 그의 손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깜 짝 놀랐다.


현암은 아파트 문밖으로 나서면서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아파트는 주민이 적지 않을 텐데, 어째서 한 명도 바 깥에 나오거나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걸까?

‘블랙 엔젤이라면 이런 이상한 짓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악마는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혹시 무슨 술수를 더 쓰는 것은 아닐까?’

블랙 엔젤이 부동심결의 영향 때문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아우구스티노 수사와의 골을 더 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블랙 엔젤이 죽거나 큰 타격을 입었다 고는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블랙 엔젤이 백호를 해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승희를 찾는 데만 전념하기로 했 다. 그러나 밖에 나가 보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현암은 기왕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월향검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사가 매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승희를 한 대 치려고 하자 승 희는 몹시 놀라 옆으로 데구루루 몸을 움직였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중상을 입어 동작이 많이 둔해진 탓에 아슬아슬하게나마 피할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저만치 나동그라졌을 것 이다. 옷은 물론이고 꼬락서니가 더 엉망이 되자 승희는 화가 치 밀어 팩 소리쳤다.

“뭐예요!”

그때 두 명의 술사가 나타났다. 그러자 상황은 아주 미묘해졌 다. 두 명의 술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노려보고 주춤하면서 도 승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보기에는 수사와 승희가 한편인 것 같아 보였으며, 수사가 보기에는 술사들과 승희가 한편인 것 같아 보였다. 수사와 승희가 한편이 되면 자신들의 몸이 풀리지 않은 이상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고 두 술사는 생각했다.

수사는 더욱 난감한 처지였다. 중상을 입은데다가 삼대 일이 되면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팔이 부 러졌지만 헐렁한 옷자락을 이용해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중상을 입었다는 걸 적이 알게 되면 자신은 끝장 나는 셈이니까.

다행히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승희도, 주술사들도 수사가 부상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그들은 경거망동하지 못 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하는 한편, 가급적 힘을 모아 일격에 상대를 처리할 순간만 노렸다. 승희는 투시력을 써 볼 것도 없이 재빨리 상황을 눈치챘지만 역시 방법이 없었다. 먼저 승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슬쩍 바 라보았다.

‘날 보자마자 한 대를 날렸겠다? 이 영감은 분명 좋은 인종이 아냐.’

승희는 두 명의 술사를 보았다. 그들은 애당초 적이었다.

‘이게 뭐야. 내가 움직이면 양쪽 다 날 먼저 치려고 할 거 아냐? 근데 이게 무슨 꼴이야? 정말 우습지도 않네.’

긴장되기는 했지만 조금 틈이 생긴 승희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만. 그런데 현암 군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백호 씨도 위험 한데! 아냐, 아냐. 일단 현암 군이 급해. 가만있자. 이 늙은이하 고도 같이 있지 않고 저놈들하고도 같이 있지 않다면……. 현암 군이 설마……………’

불안한 기분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자 승희는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설마 무적의 현암 군이 ・・・・・・・ 아냐. 그렇다면 혹 시 이 늙은이가 수작을 부린 것 아냐?’

승희는 현암이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는 것으로 볼 때 이 늙 은이가 현암에게 수작을 부려서 현암이 좋지 못한 상황에 처했 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있는 힘을 다 해 늙은이를 박살 내고 그다음은 될 대로 되라고 놓아두자는 기 분도 들었다. 하지만 승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냐! 이런 껄렁한 것들한테 당할 현암 군이 아냐. 내 정신 좀 봐. 일단 찾아봐야 할 것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희는 투시력을 발동해 급히 현암의 위치를 찾았다. 원래 현암은 강력한 내공을 가지고 있기에 승희 의 투시력에도 속마음은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현암의 존재 유무 정도는 탐지가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것이었다. 승희는 화가 났다.

‘이따위 재주는 도대체 뭐에 쓰냐? 갓뎀! 차라리 없으면 없나보다 하고 살텐데……………!’

지금 상황은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승희는 우선 세상의 무 엇보다도 현암의 안위가 중요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투시가 무엇인가의 방해를 받고 있다는 낌새를 받았다. 다름 아닌 블랙 엔젤의 짓이었지만 승희는 거기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누 군가 투시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만 느꼈을 뿐. 그때 승희는 여태 껏 몇 번을 사용해 효과를 본 수법을 기억해 냈다. 

‘그래, 월향검을 대신 투시해 보면 알 수 있겠다!’


현암은 주변에 사람이나 지나가는 차조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월향검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승희와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허공으로 솟구친 월향은 잠시 허공을 선회하다가 현암에게 되 돌아왔다. 그리고 현암의 왼쪽 손목에 설치된 칼집으로 들어온 후 방향을 가르쳐 주듯 한쪽으로 현암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다! 여기야, 여기!”

승희는 무심결에 커다랗게 소리쳤다. 때마침 하늘로 솟구쳐 방향을 찾던 월향검의 느낌이 들어오자 반가운 나머지 소리친 것이었다. 긴장해 있던 수사와 두 주술사는 승희의 목소리에 퍼 뜩 놀라면서 몸을 움찔했다.

바로 그다음 순간, 마녀와 주술사는 준비되어 있던 주술을 쏘아냈고,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왼손에 오라를 크게 펼쳤다. 주술 사의 두 갈래 주술 중 한 가닥이 승희를 향해 날아왔다. 승희는 깜짝 놀라 움츠리는 바람에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갈래가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날아오자 그는 한 갈래의 주술을 오라로 간신히 튕겨 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 노수사는 승희를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오른팔의 부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승희를 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주술사들은 승희가 누구와도 같은 편이 아니란 것을 확 인했다. 그들의 눈은 일제히 승희를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현암은 언뜻 승희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 었다. 그래서 현암은 월향이 이끄는 쪽을 향해 가급적 빠른 걸음 으로 걷다가 조금 공력이 회복되자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쯤 달려가다 보니 널찍한 공터가 보였다. 그때 공터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왜 이러는거야?!”

앙칼진 여자의 음성, 승희의 목소리였다. 현암은 일단 승희가 무사한 것이 반갑기도 하고, 또 승희가 무슨 일을 당했나 의아하 기도 해 월향검을 빼 든 다음 몸을 날려 공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공원 같은 공터로 들어가는 순간 현암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앞서 만났던 두 명의 술사와 아우구스티노 수사와 승희가 모두 모여 있었다.

현암이 들어서는 순간의 상황은 몹시 미묘했다. 아우구스티 노수사는 팔이 부러지고,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승희는 아 까 압둘과 겨루었는지, 아니면 지금 다친 것인지 여기저기 옷이 찢어지고 상처가 나 있었다. 현암과 맞서 싸웠던 두 명의 술사도 현암에게 당했던 것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양측은 승희와 새로 등장한 현암까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 다. 그러나 일단 현암이 등장하자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발견하자 품 안에 든 메소포타미 아의 예언석을 돌려줄까 생각했으나 섀도우 비스트의 술사와 마 녀 협회의 마녀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이자들이 수사 를 노리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석판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석판을 수사에게 넘겨주는 것은 화약고에 불을 댕기는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암의 등장으로 정세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섀도우 비스트를 부리던 술사와 마녀 협회의 마녀는 아까 자신들을 갖고 놀다시 피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현암이 나타나자 움찔하는 눈치였 고, 아우구스티노 수사도 크게 놀라는 빛을 보였다. 현암이 나타나자 기뻐한 사람을 승희뿐이었다.

승희는 현암을 보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현암 쪽으로 달려왔다.

“현암군, 많이 다쳤어? 무사한 것 같은데. 괜찮지? 괜찮지. 그지?”

현암은 승희가 달라붙으려 하자 손을 들어 제지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마녀 협회 의 여자는 승희가 현암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달려가는 틈에 거 의 힘이 회복된 듯 서둘러 몸을 추스렸다. 그것을 본 현암이 승 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심하지 마!”

승희는 현암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저 이제 살았다 고 생각할 뿐 힘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현암이 승희에 게만 보이도록 잠깐 눈짓을 하자 승희는 비로소 현암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급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일렁거리며 감돌았다. 주술사가 드디 어 섀도우 비스트를 불러낸 것이 분명했다. 몹시 힘이 드는 듯, 주술사는 조금 휘청하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암은 그자에게 일격을 날릴까 하다가 섀도우 비스트가 덤벼 들까봐 일단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예상과는 달리 섀도우 비 스트는 현암이나 승희,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향해 덤벼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변을 빙빙 돌고만 있었다.

“뭐지?”

그들 주변의 땅이 둥그렇게 파이며 도랑같이 길게 자국이 나 는 것을 보고 승희는 현암을 돌아보며 물었다. 현암도 도대체 무 슨 일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지금은 공력을 제대로 소통시킬 수 없는 판이라 월향 검을 들고 긴장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공력이 예전만 했어도 셋 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주 미약한 공력 밖에 끌어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현암은 그들의 주변에 둥그렇게 원이 쳐지는 것을 보고 왠지 불안해졌다.

그래서 주변을 맴도는 섀도우 비스트를 처치해 보려고 월향 검을 던지려 했다. 이를 눈치챈 듯 주술사가 안간힘을 쓰며 손을 모으고 무어라고 주문을 외우자 현암 쪽으로 무엇인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섀도우 비스트임이 분명했다.

현암은 재빨리 월향검을 던졌다. 가급적 월향검을 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월향 검에 공력을 담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월향검은 귀곡성을 내면서 허공중에 은빛의 둥근 호선을 그렸고, 월향검이 스쳐 지 나간 곳에는 펑펑 하면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그때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현암의 몸에 빈틈이 생긴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오히려 놀란 것은 섀도우 비스트의 주술사와 마녀 협회의 마녀인 것 같았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덤벼들자 승희는 화를 내며 아우 구스티노 수사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 영감탱이가!”

승희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몸에 염동력을 집중시키자 아우 구스티노 수사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볼품없이 데구루루 굴렀다.

그다음 순간 땅에 무엇인가를 긋고 있던 섀도우 비스트가 이 번에는 현암과 승희가 서 있는 곳에 아까 그려 놓은 원을 가로지 르면서 선을 그었다. 그것을 본 현암의 안색이 변했다. 비록 현 암이 서양의 흑마술에 대해서 박 신부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했 지만 지금 땅에 그려지고 있는 것은 흑마술 중에서도 유명한 솔 로몬의 봉인*이 틀림없었다.

‘이게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준후가 사용하는 진법과 비슷한 걸까? 좌우간 이걸 완성하게 놔두면 곤란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현암은 월향검을 받아 들어 그 도형을 망치려 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섀도우 비스트의 주술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면서 아예 육탄 공격으로 현암에 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그가 옷자락을 활짝 펼쳤다. 그 순간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옷자락에서 뾰족 한 가시 같은 것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현암의 앞을 덮쳐 왔다. 그것을 보고 승희는 깜짝 놀라면서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붙잡 고 있던 염동력을 그쪽으로 돌렸다. 몇 개의 가시가 땅에 떨어 졌지만 나머지 가시들은 속절없이 현암과 승희에게 꽂힐 판이 었다.

그때 월향검이 크게 귀곡성을 내면서 현암의 손에서 빠져나가 더니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가시들을 하나하나 쳐냈 다. 그 틈을 타 현암에게 달려들던 주술사가 현암의 몸을 들이받 았다. 주술사의 행동을 보고 승희는 코웃음을 쳤다.

“미친………… 어?”

승희는 현암의 내공이 굉장히 강한 만큼 주술사가 들이받는 정도는 간단히 튕겨 버릴 줄 알았는데, 현암은 주술사와 함께 땅 에 넘어져 데구루루 구르고 말았다. 여러 해 동안 같이 다닌 경 험으로 볼 때 현암이 극도로 탈진한 상태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승희는 깜짝 놀라 다시 주술사의 몸에 염동력을 집중시키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승희의 등 뒤에서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부러 지지 않은 왼팔로 승희의 어깨를 힘껏 밀었다. 그들 둘은 암암리에 가장 강한 현암 쪽을 먼저 처치하기로 한 것 같았다.


* 일명 다윗의 별이라고도 불리는 두 개의 삼각형을 포갠 육각의 별 모습을 한 도형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의 수용소 등에서 유대인의 표시로 옷에 새긴 도형이기도 하다.


그 탓에 승희도 염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땅에 쓰러져 버 렸고, 다음 순간 섀도우 비스트를 사용해 그려진 펜타그램 (Pentagram, 五星)*의 마법원이 완성되었다. 도형이 완성되 자마자 마녀가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고, 사방은 그 들과 원 안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계로 변했 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더 이상 대처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 었다.

주변이 컴컴해지며 음산한 기운이 가득 차자 아우구스티노수 사는 몹시 놀라면서 원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승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자신을 한 대 때려서 방해한 것에 화가 나 서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향해 염동력을 쏟아부었다.

승희는 일곱 개의 힘 중 세 개씩의 힘을 조종해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두 다리 관절을 각각 꺾었고, 한 개의 힘으로는 부러진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팔을 찔렀다. 수사를 넘어뜨리는 정도로도 수사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방해한 것에 대한 분 풀이로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고통을 좀 더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땅에넘어지면서도 몸을 굴렸다. 어떻게든 원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듯했다. 수사의 몸이 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원 주변에 가득 들어찬 검은 기운은 마치 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사의 몸을 도 로 밀어내 버렸다. 그러자 수사는 긴장하면서 재빨리 품을 뒤져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꺼냈다.

한편, 현암은 주술사가 달라붙으면서 그에게 엉기는 바람에 휘청했지만 정신만은 바짝 차리고 있었다. 지금 현암은 공력을 약 이성)밖에 끌어 올릴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주술사 의 맥없는 몸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현암에게 밀린 주술사는 비틀거리면서도 재빨리 균형을 잡은 뒤 계속 주문을 외우는 마녀 쪽으로 가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그 앞에 버티고 섰다. 그러자 허공에서 월향검이 한 번 크게 울 더니 주술사를 향해 쏟아져 나가려 했다. 월향검도 화가 난 모양 이었다. 그렇더라도 월향검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 현암은 손을 뻗어 월향을 불러들였다.

한편,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원 바깥으로 나가려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마녀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안돼! 그런 짓을 해서는!”

승희는 비록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편은 아니었지만 돌아가는 정세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마녀 쪽이 발등에 떨어진 불씨 같았 다. 그러나 마녀의 마음을 투시로 읽어도 그녀는 무아지경 비슷한 상태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재빨리 승희는 투시력을 돌려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마음을 읽 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도 원래 굉장히 굳건하고 영적인 에너 지가 충만해 승희의 투시가 잘 먹힐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 만 지금 그는 상처가 심했고, 몹시 당황해 마음이 흐트러진 상태 였기 때문에 승희는 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뭐라고! 그럼 지금 저 여자가 악마를 불러내고 있다는거야?’

승희는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그래도 악마와 직접 맞닥뜨리 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쪽 방면에 능 한 박 신부나 하다못해 준후라도 있으면 그다지 걱정할 게 없지 만, 지금은 그쪽 방면에 거의 힘이 없는 현암과 자신만 있지 않 은가! 현암이 팔팔한 상태여도 불안한데 하물며 그는 지금…………… 승희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현암 쪽을 돌아보자 현암이 서둘러 승희에게 손짓했다.

“승희야! 이쪽으로 와라!”

승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혼자 내버려 두고 펄쩍 뛰어 현 암의 옆으로 다가섰다. 현암은 일단 월향검을 든 채 심호흡하면 서 공력을 최대한 추슬러 보려는 것 같았다. 승희는 옛날에 했던 대로 현암에게 힘을 몰아 주려고 하다가 ‘쭛!’ 하며 혀를 찼다. 

‘가만있자. 나는 염동력이 생기면서 힘을 증폭시키는 능력이 거의 없어져 버렸지. 차라리 옛날이 좋았는데! 좌우간 이거 어떡하나? 현암 군도 안 좋은 상황인 것 같은데.’

승희가 속을 태우든 말든 마녀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주문 을 외우며 팔을 활짝 폈다. 그러자 검은 장막 같은 것이 삽시간 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의 장벽으로 바뀌었다. 마치 지옥 불 같이 무서운 불기둥이었다. 곧 장벽의 한편이 갈라지면서 검은 기운이 그곳에 엉켜 점점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만들어 내기 시 작했다.

승희는 겁이 나 현암의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현암은 계속 심 호흡을 해 내공을 고르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번쩍이는 눈으로 그 형체를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마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주술사는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이제 됐다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편이 성공적으로 술수를 부렸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사도 십자가를 쥔 채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

승희는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성직자이니만큼 뭔가 악마에 대 처하는 술수가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가 들었다. 또 아까 아우구스 티노 수사의 마음을 투시로 읽던 중이기도 해 내친김에 아우구 스티노 수사의 마음을 좀 더 읽어 보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마음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고, 그의 머릿속은 승희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혼합된 듯한 기도 문의 내용뿐이었다.


* 펜타그램은 서양의 마술사가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는 별 모양의 도구 또는 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각각의 뿔은 4대 정령(地, 水火)과 이를 지배하는 광(光, Astral)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치 영화 장면 속에 TV가 켜져 있는 장면이 나오듯 이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귀에 들리는 마녀의 목소리가 승희의 투시에 걸려들었다. 승희는 마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 우구스티노 수사는 마녀가 지껄여 대는 소리를 알아듣는 듯했다. 그러니까 마녀의 말이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통해 해석되어 승희 에게 들려온 것이었다. 마녀는 다음과 같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가장 강한 악마여 임하소서! 어 둠의 종인 나의 마음과 피와 영혼을 바치나니, 와서 나의 기원을 들어주소서!”

‘저런 미친 여자! 마음과 피와 영혼을 다 바치면서 악마를 불 러 뭘 하겠다는 거야?’

승희는 화가 나서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악마에 대처하는 방법 이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계속 투시를 행했다. 그러나 아 우구스티노 수사는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

승희는 점점 불안해졌다. 물론 나타날 악마가 어떤 놈인지 알 아볼 수 있는 재주는 승희에게 없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수 사는 뭔가 감을 잡은 듯, 평정하던 마음이 조바심과 갈등으로 자 꾸만 두근거렸고, 그 두근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이거야 원. 나타날 놈이 적어도 보통 놈은 아닐 것 같네. 현암 군이 이겨 낼 수 있을까?’

승희는 아무래도 불안해 현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석같 이 믿고 있는 현암은 가볍게 온몸을 떨면서 호흡만 고르는 중이 었다. 더구나 어느 사이에 터졌는지 현암은 조금씩 코피까지 흘 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이런! 죽었구나, 죽었어!’

현암의 상태가 몹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승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현암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최소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될 것이 아닌가!

‘가만, 일단 저 마년지 뭔지가 문제구나. 저것부터 어떻게 해 야될 텐데.’

승희는 염동력을 발동해 마녀 쪽으로 힘을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염동력을 발휘해 목표에 힘 을 가하면 그 힘이 성공적으로 가해졌는지 어떤지 미약하게나마 승희에게 느낌이 오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 낌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이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녀는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고 기쁜 듯이 하늘을 우러러보 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만 중얼거렸다. 그때 섀도우 비스트를 부리던 남자 주술사가 마녀 쪽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마침 그의 말이 영어라 승희가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 의미는 대강 이러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건가? 저 녀석들은 지금 많이 다 쳤어. 그냥도 이길 수 있다니까.”

마녀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주술사는 화가 나는 듯이 읊조렸다.

“아무리 너와 행동을 같이하라는 명령을 받긴 했어도 이건 정 말・・・・・・ . 제길,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주여? 이게 무슨 소리야? 흠. 아무래도 어울리는 한 쌍 같지 는 않은데그래?’

승희는 저들이 그다지 공고한 결속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명은 급한 상황에서 ‘주여!’를 외치고, 다른 한 명 은 소환술로 악마를 불러내는 판인데 어찌 공고한 결속이 맺어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승희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할 만한 겨를도 없었다. 승희는 자신의 가장 강 력한 무기라고 믿고 있던 염동력마저 먹히지 않자 당황해 현암 에게 말했다.

“현암군, 어떡하지?”

“저 여자에겐 주술도, 초능력도 통하지 않을 거야. 이 원 안에 서는.”

“현암군 힘도?”

“공력은 주술이 아니니까. 한번 해 볼 수밖에.”

“확실한 거야?”

현암은 숨을 고르느라 대답하지 않고 승희의 말에 다만 고개 만 한 번 끄덕이며 월향검을 쥔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녀는 아주 기쁜 듯이 계속 주문을 외웠고, 불길의 장벽 너머에서 일렁거리던 검은 기운은 완연히 사람과 같은 형체로 변했다. 그 형체는 사람보다 두 배 정도나 큰 키에 다 타는 듯한 붉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등 뒤로는 여러 개의 검 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는데, 날개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날 개는 대충 보아도 대여섯 쌍은 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암은 조금씩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왜 그래?”

승희가 반문하는 순간 그 검은 존재가 음산한 울림으로 말을 했다.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울림 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그곳에 있는 다섯 사람 모두에게 들려 왔다.

“감히 나를 불러낸 것이 누구냐? 누가 어둠의 힘이 필요한가?” 

마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둠의 힘이여, 힘 중의 힘이여! 나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마녀가 하는 말은 어느 나라 말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으나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그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승희는 아우구스 티노 수사의 마음속을 계속 투시함으로써 중계방송을 듣듯 마녀 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원을 들어 달라? 도대체 무슨 소원이냐? 들어나 보자.” 

무시무시한 분위기와 걸맞지 않게 악마의 말투는 좀 실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마의 말이 떨어지자 마녀는 지체 없이 눈을 빛내면서 앞에 있는 세 사람을 가리켰다.

“저들 모두를 없애 주시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승희는 마녀가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가 리키자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싶자 무 서웠다. 죽는다는 생각에 속에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소용없 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승희는 마녀를 향해 냅다 한마디 욕 을 해 주었다.

“나쁜 여자 같으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승희는 내친김에 급히 현암의 등을 밀면서 속삭였다. 

“얼른 저 여자를 없애 버려. 지금 이 판에 이것저것 따질 거 없 잖아? 아, 사람은 못 죽이나? 그럼 손이라도 하나 쳐 버리던지. 어쨌든 입을 막으라구!”

그러나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현암의 얼굴에서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현암은 아무리 강한 적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나타내는 법이 없었으나 이런 멍한 표정을 짓는 걸 승희는 처음 보았다.

‘뭐야 이거 혹시 현암군, 죽어 가거나 정신이 나간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승희는 불안해졌다.

그들의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림으로 말했다.

“그래? 세 사람의 목숨이라. 그러면 대가는 뭐지?”

마녀가 지체 없이 외쳤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세 사람의 죽음의 대가는 아주 크다. 인간의 영혼 밖에는 나를 만족시킬 수 없어. 그러면 누구의 영혼을 내놓을 거지?”

마녀는 서슴없이 자기 앞에 있던 주술사를 가리켰다.

“여기 있소.”

주술사가 깜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머리카락이 타들어 갈 정도로 불같이 화를 내며 외쳤다.

“뭐라고? 나를 제물로 바친다고? 목숨을 걸고 널 구해 준 게 누군데!”

그러나 마녀는 싸늘하게 되받았다.

“그래 봤자 너는 성당 기사단의 일원일 뿐.”

“이런 제길!”

주술사는 욕지기를 외치면서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섀도우 비스트를 불러내려는 듯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나 아 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 모습에 마녀가 깔깔깔 그를 비웃었다. “바보 같으니. 이 원 안에서는 어떤 주술도, 초능력도 통하지 않아. 이건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주술사는 자신의 주술이 통하지 않자 분노의 고함을 지르면서 맨손으로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마녀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 러나 악마가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주술사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악마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제법 위엄 도 있고 점잖았는데, 점차로 장난기 깃든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무슨 수작들이야.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이봐, 날 불 러낸 여자. 이 작자를 나에게 제물로 바치겠다고?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네가 해치워 달라는 것은 누구? 저기 있는 세 사람?”

“그렇습니다!”

“흠…… 안 되겠는데?”

마녀는 갑자기 오물이라도 밟은 것처럼 황당한 표정을 지었 다. 악마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저런 거지 같은 제물 갖고는…………… 한 명밖에 해치워 줄 수 없겠는걸.”

마녀의 얼굴이 꿈틀하면서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이러한 종류의 소환술을 많이 해 보았지만 이런 의외의 답변을 듣는 것은 처음인 듯했다. 승희까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어둠의 계약에 따르면 이런 것은…….”

마녀가 당혹해하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며 화를 냈다.

“계약? 흥! 계약은 내가 만드는 거야! 알았어? 좌우간 이런 쓰 레기 가지고는 저기 있는 늙은이 하나밖에 해치워 줄 수 없어. 저기 있는 두 사람을 위해서는 따로 대가를 지불해야 돼.” 

“따로 대가를 지불하라니, 그 무슨・・・・・・・ 도대체 무엇을?” 

악마는 잠시 손가락을 장난하듯 까닥까닥하며 마녀에게 말 했다.

“이것 봐. 이것 봐! 내가 아까 얘기했지? 하나의 죽음에 하나 의 영혼이라고. 일단 네가 죽어 주기만 하면 저 둘 중에 한 사람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지. 어때?”

마녀는 너무도 기가 막혀 뭐라고 응수조차 하지 못했다. 위기 의 상황을 맞아 도움을 받기 위해 불러낸 존재인데, 자기가 죽어 버리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마녀의 안색을 보고 악마는 낄낄거리면서 날개를 퍼덕거 리다 말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현암도 분위기가 아무 래도 장난스럽고 어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싫어? 좋아, 그럼 내가 기회를 또 주지. 한 십 년 후에 말야. 그런데 말야, 너는 계약이니 뭐니 어쩌고저쩌고 함부로 나 불대는데, 도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거야? 들어나 보자.”

악마가 거의 노골적으로 자신을 가지고 놀려고 하자 마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나는 마녀 협회의 ……………”

“뭐라고? 마녀 협회? 좀 더 큰 소리로 말해 봐.”

그러자 마녀도 정말로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참 다못한 듯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나는 어둠의 계약을 충실히 따랐 는데, 이런 전례는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어요!”

“수백 년 동안은 이 짓이 재미있었나 보지 뭐. 지금은 싫증나.”

“말, 말도 안 돼! 당신, 나에게서 뭘 알아내려는 거죠?” 

악마는 날개를 퍼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뭘 좀 알아내려고 한다. 근데 네가 감히 말을 안 하겠다고?”

마녀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마녀의 한쪽 팔이 번쩍 들리면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어서 팔에서 우둑둑 소리가 들 리고 그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으나 악마는 계속 장난 하듯 날개를 퍼덕거릴 뿐이었다.

마녀는 무척 고통스러운 듯 마구 악을 썼다. 팔을 잡아 허공에 매다는 방식은 과거 수많은 마녀 혐의자를 처형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마녀에게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에다 잠재의식적인 고통까지 덧붙이는 악형이었다. 

“솔로몬의 봉인 안에 있는데, 어떻게 나에게…………… 어떻게 나에게…………!”

마녀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하자 악마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 원은 네가 그린 게 아니잖아? 저 친구가 그린 것 아냐? 한 사람이 모두 그려야 완벽한 법인데 그리기는 딴 놈이, 그리고 주 문은 딴 년이 외우니 제대로 되겠어? 안 그래? 더군다나 저 친구 의 힘으로 원을 그려 놓고 저 친구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해? 장 난하냐? 그러면 저 친구가 너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겠어? 그렇 게 만들어진 원이 보호가 되겠어, 안 되겠어? 대답해 봐, 이 멍청 한 계집애야. 내 말 알아듣냐?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계 약이 어쩌고 어쩐다고? 너 도대체 누구한테 그렇게 엉터리로 배 웠냐? 내가 찾아가서 한번 혼 좀 내줘야겠는데?”

악마는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과 같은 말투를 쓰고 있었으나 실제 행동은 과격했다. 허공에 매달린 마녀의 몸은 몇 번이나 당 겨지고 뒤흔들리고 꼬였다.

승희는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계속 이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몇 번의 우둑우둑 하는 소리가 들린 후 마녀의 몸은 땅으로 털썩 떨어졌다.

악마는 한 번 씩 웃고는 마녀의 몸을 또다시 낚아채려는 몸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자, 그럼 계속해 볼까?”

공포에 떨면서 기도만 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노 수사까지 기도를 멈추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현암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만!”

주술사나 승희는 물론 성직자인 아우구스티노 수사까지 그 상 황에서는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런데 현암이 크게 소리치자 모든 사람들이 현암 쪽을 돌아보았다.

현암이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해치지 마!”

“놀랍군! 대단히 놀라워!”

악마는 깔깔거리며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현암을 보고 말했다.

“넌 또 뭐야?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자꾸 장난치지 마라, 블랙 엔젤!”

현암의 대꾸에 승희는 깜짝 놀랐다. 블랙 엔젤이라면 이때까 지 몇 번이나 자신들과 대립했던 악마가 아닌가? 그런데 현암은 어쩌자고 그런 악마에게 말을 거는 것인가! 싸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현암군!”

승희가 나서려 하자 현암은 슬쩍 등 뒤로 왼손을 돌렸다. 둘은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터라 서로 정해 놓은 신호가 있었는데, 지 금 이 신호는 투시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승희가 현암의 손을 잡았다. 현암이 마음을 열자 현암이 지금 까지 겪었던 일이 승희의 투시력으로 인해 모두 승희의 머릿속 으로 밀려 들어왔다.

비로소 블랙 엔젤이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로 깔깔깔 웃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검은 형체와 붉은 눈만 보여 어렴풋하 던 형체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눈부시도록 요염한 얼굴을 지닌, 그러나 몸과 날개의 형체는 검은 안개처럼 어둡고 흐릿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블랙 엔젤이 현암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 미워라, 도와주고 있는데, 꼭 그렇게 티를 내야 해?” 

승희는 놀라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치를 떨며 소리쳤다. 현 암에게 알랑거리는 블랙 엔젤의 얼굴이 너무도 요염해서 더 약 이 올랐다.

“뭐야? 도와? 빨리 꺼져!”

블랙 엔젤은 승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현암에게 말했다. 

“이건 마음 놓고 장난조차 칠 수 없으니. 얘네들은 너희의 적 수가 아니지만 지금 너희 상태가 별로지? 그러니 내가 나서 줘야지 어떡하겠어? 호호호.”

블랙 엔젤의 간드러진 웃음이 채 가시기 전에 현암이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되받았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승희도 소리쳤다.

“수작 부리지 말고 사라지라구! 그게 우릴 돕는 길이야!”

두 사람의 완강한 거부에 블랙 엔젤이 투덜거렸다.

“원 참, 어둠의 계약을 어길 각오까지 하면서 도와주는데 그것도 싫어?”

“어차피 계약이란 건 네 맘대로라면서?”

“아, 어차피 장난이지. 하지만 장난이라도 판을 통째로 깼는 데, 그런 내 성의는 생각해야잖아. 그럼 저기 저 늙은이라도 없 애 주지. 어때?”

그러면서 블랙 엔젤은 아우구스티노 수사 쪽을 바라보았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을 뿐만 아니라 입까지 반쯤 벌리고 있었다.

블랙 엔젤은 일부러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까지 들리도록 이 야기한 것이다. 현암은 수사의 표정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 악마가 지금 나를 모함하는구나…………! 빌어먹을!’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아우 구스티노 수사도 세븐 가디언의 일원이니만큼 사악한 어둠과 흑마술의 술수를 여러 번 보아 왔다. 그런데 계약에 의해 흑마술로 불러내진 악마가 자신을 불러낸 존재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현암의 편을 들다니!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현암의 말에 쩔쩔매 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이 남자야말로 이러한 대악마를 부하로…………… 부하로 부리는 자…………! 대악마, 아니 지옥의 왕자? 아니, 아니! 지옥의 왕! 암흑의 제왕’

아우구스티노는 적합한 표현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 고서야 흑마술을 쓴 마녀의 말까지 무시하는 악마가 어찌 저렇 게 말을 잘 듣는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아까 있었던 석판 건으로 인해 현암을 대단한 악당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한 술 더 떠서 현암 을 악마의 하수인, 아니 악마의 지배자에 가까운, 그야말로 암흑 의 제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하게 된 것이다.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 갔으나 지금 현암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다. 공력이 영 회복될 기미가 없 었다. 그러니 블랙 엔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구구하게 변명 을 늘어놓으며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마녀와 주술사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지 않은가?

‘좋다! 마음대로 해 봐! 기왕 오해가 빚어진 것, 이제 와서 어쩌겠나. 다만 지금은 어떻게든 수사와 나머지 두 사람을 살려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자기가 블랙 엔젤과 직접 대적을 한다면 상대가 되리 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블랙 엔젤이 자기 멋대 로 현암의 편을 든다고 하지만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고, 블랙 엔젤이 마음을 바꾸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설령 블랙 엔젤이 그냥 사라져도 현재 자신의 상태로 볼 때 마 녀와 주술사를 당해 낼 것 같지는 않았다. 한 가지 희망은 조금 전에 벌어졌던 일 때문에 주술사와 마녀가 서로 싸우게 되는 것 정도랄까?

블랙 엔젤이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바라보고 그쪽으로 손을 뻗 친채 한 걸음씩 다가갔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현암 이 소리를 쳤으나 블랙 엔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현암은 몸을 한 번 휘청했다가 그 탄 력을 이용해 앞으로 달려 나가 앞을 막아섰다.

“안 돼!”

블랙 엔젤이 현암에게 애교스럽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 돼?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 알았어. 그럼 이자를 없애 달라고?”

다음 순간 원의 저쪽에 서 있던 주술사의 몸이 퍽 하면서 허공으로 폭발하듯 부서져 흩어져 버렸다. 어떻게 손을 쓰고 자시고 할 틈조차 없었다.

피가 튀고, 팔다리와 육신의 단편들이 끔찍스럽게 사방으로 흩어지다가 불길에 휩싸여 타 버렸다. 그야말로 재한점 남지 않았다. 현암에 맞서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버텨 냈던 성당 기사 단의 이름 모를 주술사는 블랙 엔젤의 단 한 번의 손짓에 박살 나고 말았다.

웬만한 것에는 꿈쩍하지 않던 현암도 어깨를 움찔했으며, 승 희는 간신히 비명을 참았지만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암이 너무 놀라 뭐라고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블랙 엔젤이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때? 잘했지? 잘했지? 안 그래?”

블랙 엔젤이 이번에는 신음성을 내며 쓰러져 있는 마녀를 향 해 손을 뻗치려 했다. 그것을 보고 현암은 다시 놀라 그쪽으로 뛰어가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지금 또 자리를 비우면 블랙 엔젤 이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해칠지도 모른다 싶어 현암은 월향검만 집어 던졌다.

월향검도 솔로몬의 봉인 안에 있어서 그리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월향검은 현암의 뜻을 알아차린 듯 제법 날카로운 귀곡성을 내며 마녀의 앞쪽으로 날아가 블랙 엔젤 쪽으로 칼끝을 향하고 날아들었다. 위협하듯 월향검이 자신의 앞을 겨누자 블랙 엔젤은 잠시 월향검을 쳐다보고 씩 웃었다.

“어머머, 귀엽기도 하네! 물러서라고? 흠. 그런데 참 딱하네. 네가 지금 맞서 보겠다는 거야? 저기 저 남자 말은 당연히 들어 야겠지만 내가 너까지 봐줄 줄 알아?”

다음 순간 블랙 엔젤은 날개를 번개같이 펼쳤고, 월향검은 블 랙 엔젤의 날개에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인 데다 월향검에는 공력도 없고 월향검 자체가 많이 약화되어 있 었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현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만둬!”

“그만둬!”

승희도 현암과 동시에 고함을 쳤다. 현암은 월향에게 무슨 일 이 생기는 것을 절대 참을 수 없었고, 그런 사실을 승희 또한 너 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블랙 엔젤이 다시 현암 을 보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아, 너무 끔찍하게 생각하니까 질투 나는데? 하지만 네가 싫다면 내가 어쩌겠어?”

블랙 엔젤이 날개를 다시 한번 펼치자 월향검은 현암의 앞으로 날아와 쨍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자 승희가 달려와 월향검을 잡아 현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쨌든 나는 모든 힘을 다해 너를 도울 거라니까! 그리고 네 말을 잘 들어줄 거야. 이제 믿겠지? 그런데 몇 번이나 하는 말이 지만 네 뒤에 있는 늙은이 말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좋지 않을 텐데?”

블랙 엔젤이 빈정거리자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닥쳐! 이건……..”

블랙 엔젤은 깔깔깔 웃으면서 현암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후회하지 마. 후회 안 할 거지?”

현암은 수치심과 분노에 불타서 날카롭게 외쳤다.

“죽어도 후회 안 해!”

블랙 엔젤은 현암과 이야기하던 때와 딴판으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무서운 음성으로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향해 말했다. 

“이봐, 늙은이. 재수좋은 줄 알고 썩 꺼져!”

다음 순간 솔로몬의 봉인 주위에 둘러쳐 있던 불의 장막 한구 석이 잠시 걷히고 무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은 현암과 승 희, 그리고 쓰러져 있는 마녀 등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몸은 세찬 바람에 밀려 삽시간에 불의 장막 저편으로 밀려 나가 사라져 버렸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밀려 나가자마자 열렸던 불의 장막은 눈깜짝할 사이에 다시 닫혔다. 그때까지 돌아가는 상황만 지켜보던 승희는 불의 장막이 열리자 현암을 그리로 밀어 빠져나가게 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승희는 할 수 없다 싶어 블랙 엔젤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너 같은 악마가?”

승희를 흉내 내는 듯 블랙 엔젤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을 꾸미긴. 조금 더 해 줄 일이 있어서 그렇지.”

“잔소리 말고 썩 꺼져! 너 같은 것 도움은 필요 없단 말야!” 

그러나 블랙 엔젤은 화를 내는 기색조차 없이 현암과 승희를 아예 무시하고, 쓰러져 있는 마녀 쪽으로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 었다. 그때 현암이 소리쳤다.

“또 내 눈앞에서 사람을 해친다면 정말로 사생결단을 내겠다!” 

“누구 맘대로 사생결단을 내? 네가 내 손가락 하나라도 당해 낼 수 있을 거 같아?”

블랙 엔젤이 이죽거리자 현암은 지체 없이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

블랙 엔젤은 의아한 듯이 현암을 바라보다가 현암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정말 지독하군그래. 알았어, 알았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염려 말라고.”

그러더니 블랙 엔젤은 압둘에게 했던 것처럼 쓰러져 있는 마녀에게 은근히 힘을 가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현암은 처참하게 죽은 압둘과 주술사가 떠올라 불끈하며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승희가 현암의 옷깃을 잡았다.

“가만있어 봐. 죽이지는 않는다잖아.”

승희도 투시력으로 현암의 마음을 읽은 터라 아까 있었던 일 을 모두 알고 있었다. 승희의 입장은 현암과 달랐다. 현암은 악 한 존재들과 어떤 타협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허나 평소 승희의 생각은 일에 있어서 악마든 뭐든 간에 도움 을 받을 수 있다면 최대한 받아야 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사실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는 생각뿐이었지만,

현암도 승희가 옷깃을 잡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일단 블랙 엔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압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녀의 입에서도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압둘이 성당 기사단의 일원이라 블랙 엔젤에게 심하게 저 항했던 것과 달리 마녀는 애당초 흑마술 쪽을 익힌 여자였기 때 문에 블랙 엔젤의 수법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무엇을 원하시나요?”

마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자 블랙 엔젤이 다그쳤다.

“너희는 보아하니 석판인가 뭔가를 빼앗기 위해서 저 늙은이를 따라왔던 것 같은데, 그 석판이 대체 뭐기에 이 먼 곳까지 온거지? 한번 말해 봐. 큰 소리로 말이야.”

“그것은 그것은 고대 예언…………….”

“대체 무슨 예언이지? 예언이라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잖아. 또 무슨 예언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뒤지는 거야?”

“거기에…………… 거기에는 때가 임박했을 때 내릴 계시에 대한 예언이………… 예언이……………”

“계시? 무슨 계시 말이지?”

“인간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 라미드 우프닉 스, 그들에게만 내리는 계시에 대한 언급. 그것이 있어야…………… 그것이 있으면……”

“도대체 뭐에 대한 계시가 내린다는 거지? 한번 말해 봐.”

“인간에게 주어진 기회…………. 또 한 번의 기회. 종말의 때에 내 릴 시험. 그 태어날 사람…………….”

“소위 기독교도들이 적그리스도라 일컫는 그분에 대한 예언 말인가?”

“그・・・・・・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바로 그것이라고…………….” “좋아. 그 석판은 일곱 개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여 기 한 개가 있고, 그럼 나머지 여섯 개는 어디 있지? 너희들은 아 마그것까지도 파악하고 있겠지?”

“그것까지는…………… 그것까지는 나도 잘……………. 하지만…………… 이미 여러 개의 석판이 발견되어 흩어져 있다고…………….”

“누가 갖고 있다는 거야? 어서 말해 봐.”

“그것까지는 나도 잘…………… 나도 잘 알지는 못하………….”

거기까지 말하고 그만 마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는지 쓰러 지고 말았다. 현암은 마녀가 힘을 잃고 쓰러지자 눈을 부릅뜨면 서 뭔가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블랙 엔젤이 날개를 팔락거 리며 말했다.

“기절한 거야. 염려 마, 절대 죽은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안심 해봐, 이렇게 숨을 쉬고 있잖아.”

현암은 신중하게 마녀의 기색을 살폈다.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하고 현암이 약간 안심하자 블랙 엔젤이 말했다.

“어때?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나? 이제 조금 알겠지?”

“뭐?”

“너희들은 아마 그 석판을 계속 찾아야 할 거야. 벌써 한 개는 너희 손에 있잖아. 그리고 거기에는 너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 는 말세의 때에 오시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잖아. 안 그래?”

현암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가 바라는 것은 뭐지?”

블랙 엔젤이 얼버무리듯 대꾸했다.

“너희를 돕는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현암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우릴 돕는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희도 분명히 뭔가 바라는 게 있지? 대답해 봐.”

블랙 엔젤이 조금 인상을 쓰면서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이것 봐! 내가 너희를 도와주는 거지, 내가 네 부하가 된 건 아냐. 착각하지 말라구! 너무 건방지게 굴면 이것저것 생각 안 하고 다 박살 내 버리는 경우도 있어.”

그러나 현암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너희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려고 이럴리는 없어. 나는 절대 너를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하면서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석판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높이 들어 보이며 블랙 엔젤에게 말했다.

“너희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야. 이 안에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가 있건 어쨌건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나 는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그러면서 현암은 석판을 쥔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그동안 호 흡을 해 공력을 고른 때문인지 현암의 손에서 석판은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가루가 될 것 같이 보였다.

블랙 엔젤이 펄쩍 뛰면서 외쳤다.

“너, 그 물건을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그것을 부수겠다는 건가?”

현암은 블랙 엔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너는 분명히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렇지 않은가? 너는 인 간이 아니야.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시간을 초월한 존재나 마찬 가지야. 너는 아마 이 석판이 직접 쓰였을 때도 세상에 존재했을 테고, 묵시록이 기록되었을 때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서가 쓰였을 때도 역시 세상 한구석에 있었을 거야. 너 정도의 존재가 그런 내용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

하지만 너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 애쓰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이유가 뭐 지?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라면 우리를 이용하지 말고 네 맘대로 움직여 보란 말이야! 그렇게 강한 힘이 있으면서 왜 너희는 움직 이지 않는 거지? 직접 손을 쓰면 간단할 텐데.”

현암의 다그침에 블랙 엔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 했다.

“이것 봐. 너희가 하는 일은 내 목적과도 일치해. 나는 옛날에 너희를 만났을 때도 그런 말을 했어.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원하 지 않아. 인간의 멸망을 원치 않는다는 거야.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 빌어먹을 종교나 신의 가르침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건 간에 우리는 인간의 편이야.

인간 한두 명에게는 고통을 줄 수 있고 해를 끼칠 수도 있지 만 인간 전체를 송두리째 멸망시키는 그런 신과 절대 다른 존재 란 말이야! 우린 인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인간이 필요해. 인 간세상이 망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그 때문에 너희 를 돕는 거야. 그리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원래 거짓말 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때 승희가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악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거짓말을 한담? 그거야말 로 내가 여태껏 들은 말 중 가장 웃기는 거짓말이네!” 

이번에는 현암이 입을 열었다.

“좋다. 설령 네 말이 맞다고 해도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너 희의 힘은 확실히 엄청나다. 그런데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 가 뭐지?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닌가? 왜 너희가 직접 하지 않지?”

블랙 엔젤이 대답하지 않자 현암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너희의 힘으로 처리하면 간단한 일을 직접하지 못하는 이유. 알 것 같아.”

“또 그 잘난 추리력인가?”

블랙 엔젤이 날카롭게 빈정거렸지만 현암은 계속 말했다.

“분명히 너희도 무언가에 얽매여 있어. 그렇지 않아? 너희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불쌍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이들의 입으로 직접 사실을 말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이 석판을 부수는 것에 대해서도 너는 놀라고 긴장하고 있지?

왜 그럴까? 너는 이 석판의 내용을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야. 정 원한다면 직접 나에게 말해 주면 간단할 텐데? 그러나 너희는 우 리가 구태여 이 석판을 직접 손에 넣고, 또 해석하기를 원하고 있 지. 그리고 석판의 예언을 그대로 따라가길 원하고 있고.” 

거기까지 말하다가 현암은 갑자기 벼락같이 외쳤다.

“너희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야! 너희는 운명에 대해 아 무런 힘도 없어. 인간만이 우리들만이 그걸 할 수 있는 거야. 그 리고 나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는 그 어떤 것도 절대 하지 않겠 어!”

현암이 단호하게 말을 맺자 블랙 엔젤은 잠시 조용하다가 천 천히 말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선악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우주를 지배하는 선악의 가치관은 너희 인간들의 선악과 같지 않아. 너는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편만든다고 생각하나?” 

“웃기는 소리하지 마! 너는 악마면서 신에 대해서 어떻게 함 부로 얘기할 수 있지?”

승희가 외쳤지만 블랙 엔젤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신이 초월적이고 무소불능적인 존재라 면 신에게 우주의 모든 것은 똑같을 거야. 그런 초월신이 아니라 면 그건 신이 아닐 거야. 그렇지 않아?”

“궤변!”

그러나 블랙 엔젤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던 데? 인간이란 존재가 중요하다면 여기 있는 벌레 한 마리도 신에 게는 소중한 존재고, 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나 공기 중의 분자 하나도 신에게는 인간과 같은 존재야. 그런 입장에서 신이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동정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인간 이 자연을 파괴하고 생물을 멸종시키고 자신들만 생각하며 살아 온 게 벌써 얼마나 됐지? 물론 생존에 필요해서 다른 생물을 죽이 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아. 그것도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조화를 깨뜨리고 있어! 그 때문에 너희는 신의 분노를 샀고, 신은 너희를 시험에 빠뜨리는 거야. 너희가 정말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서 말야.

말세 말세는 항상 있어 왔어. 여태까지 인간들은 근근이 어떻 게든 버텨왔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의 힘도 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신에게는 모든 게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인간이 가 장 중요하거든.”

“인간이 너희 밥이라서?”

승희가 빈정거리자 블랙 엔젤은 화가 나는 듯 소리쳤다.

“악마가 도대체 어떤 존재지? 너희의 그 잘난 가치관으로 보 면,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 타락에 빠뜨리고, 인간을 유혹하고, 해 치고, 피를 흘리게 하고, 고통을 주는 그런 존재야! 그러나 정말 악마가 그런 존재라고 보나? 정말로 얕디얕은 생각일 뿐! 큰 악 을 행하는 자들이 작은 일에 그런 표를 내는 경우가 그리 많던 가? 뭔가 큰 악을 바라는 자라면 그런 시시하고 유치한 악을 범할 까? 하지 않을 거야! 너희가 생각하는 악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 고, 너희 인간들 중에서 몇몇 대악인의 예를 봐도 그렇지 않아? 물론 과거에는 그런 일도 약간 있었지. 그때는 인간의 정신도 박약했고 인간이 인간을 통치하는 데도 그러한 수단을 썼잖아? 그래서 한때는 우리도 그러한 수단을 썼던 적이 있어. 그건 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성경에 나오는 신이 직접 천사를 시켜 죽인 사 람의 수가 얼마지? 불타 버린 소돔과 고모라, 모세가 출애굽 하 던 시기에 죽은 이집트인의 장자(子),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 중 유대인의 기도로 천사들이 짓밟은 수많은 민족의 군대…………… 하지만 때가 다르잖아. 지금은 벌써 새 밀레니엄이야. 설마 너 희 인간만 진화하고 발전하는 존재고, 우리 악마나 이러한 존재 는 전부 원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바보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것 은 아니겠지?”

블랙 엔젤이 지껄이는 말을 현암은 똑똑히 들으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 지만 승희는 달랐다. 승희는 블랙 엔젤의 말을 듣고 즉각 날카로 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옥으로나 꺼져!”

이에 블랙 엔젤은 상당히 열띤 듯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지옥? 지옥이 우리 집인 줄 알아? 도대체 너는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지옥을 누가 만들었지? 지옥을 왜 만들었지? 지옥의 처벌이란 것을 누가 내리는 거지? 우리 악마 는 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이야. 그런데 신의 뜻을 받들어 우리가 지옥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 거야? 왜 우리가 신의 말을 듣지? 그 렇게 신의 말을 잘 들을 거면 왜 우리가 신의 길과 다른 길을 걸으 려 한다고 생각하지? 너희의 선입관은 그야말로 모순투성이야.” 

블랙 엔젤은 말을 끊었다가 다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로 다 시 말했다.

“지옥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영혼들.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들이 악마인 줄 알아? 그들이야말로 신의 의지에 충실한 천사 들일 뿐이야. 우리의 집은 너희들의 생각처럼 지옥이 아니라 전 혀 다른 곳이야.”

“어디지?”

“여러 곳이지만 내 경우는 아바돈(기독교에서 말하는 무저갱).”

“무저갱 말고 다른 세계도 있나?”

블랙 엔젤이 맞받았다.

“기독교의 경전에는 아바돈이나 게헨나가 나오지만. 음……………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은 아마 너희의 상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일 거야. 너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세계. 너희는 어 둠의 세계라고 하지만………… 좌우간 그곳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 요가 없어. 다만 너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를 거야. 아마 지금의 인간들이라면 이상향이라고 생각할 만한 아주 깨끗하고 솔직한 세계라고나 해 둘까?”

승희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못 믿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하지만 사실이야.”

그때 현암이 말했다.

“너희의 세계에는 창조가 없는 건가?”

짧은 말이었지만 블랙 엔젤은 그 말에 몹시 흥분하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인간들아! 우리가 왜 너희 같은 시시한 존재들에 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지 알기나 해? 너희가 그만큼 중요하 고 강력한 존재라고 착각하나? 우리는 너희가 불쌍할 뿐이야. 허 울만 좋고 실제로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신에게 얽매여 꼼짝 못하고 사고까지 경직되어 버린 너희가 가련할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너희를 초청하는 거야. 우리의 자유로운 세계 의 문을 열고 말이야. 생각해 봐. 생각이 잘 안 돌아가더라도 비 록 그 굳어 터진 머리라도 한번 굴려 보라고. 너희를 사랑한다고 떠벌리고 무조건 자신을 따르라고 하다가 싫증 나면 멸망시켜 버리려고 드는, 너희의 그 알량한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너희에 게 진정으로 보다 넓고 초월적인 세상의 문을 열어 주려고 하는 우리 중에서 과연 어느 편이 너희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 의 모습에 가깝지?”

그 말을 듣고 승희는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암은 조용히 말했다.

“너희가 아무 목적도 없으리라고는 나는 절대 믿을 수가 없 다! 그렇게 볼 수는 없어. 너희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어. 그리고 너는 지금 우리를 돕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정말 너희의 순수 한 의지 때문인가? 너는 이미 몇 번씩이나 너희가 생각하는 방향 과 우리가 하는 일의 방향이 같기 때문에 우리를 돕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때? 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어 디한 번 대답해 봐!”

블랙 엔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블랙 엔젤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때는 임박했어. 잘 생각해 봐. 종말의 기회는 이때까지 너희가 아는 것처럼 한 번뿐이 아니었어. 종말이 올 수 있었던 때는 수도 없이 많았어.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느 쪽에는 너희 인간 전체가 종말을 맞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질 실마리가 싹터 왔 는지도 몰라. 다만 또 그것이 누군가 무엇인가의 힘에 의해 억 눌려 왔을 뿐. 그리고 이번은 그중에 하나, 조금 많이 두드러지 는 위기를 맞았을 뿐이고.”

그 말을 듣자 현암은 고개를 갸웃하며 블랙 엔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 또한 지금이 정말로 종말의 때는 아니라고 믿 는단 소리군!”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너희는 신에 반대하는 존재이니 만큼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는 않겠지? 그런데 그 초월적인 신이 정말로 예정한 일이라면 우 리 인간들도 막을 수 없고, 너희도 막을 수 없을 거야. 그게 아니 면 초월자가 아니겠지. 또한 신이 아니거나 종말이 신의 예정이 아닌 거겠지.

그런데 종말의 방향을 돌리려고 네가 애쓰는 것을 보니 이번 위기는 확실히 신의 의지로 결정된 종말은 아냐. 우리의 의지로 그것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막을 거야. 그러니 네 도 움 같은 건 필요 없어! 네가 그 와중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 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위장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너는 선 의를 행하는 존재가 아냐! 그런 뻔한 올가미에 걸려들지는 않아.”

블랙 엔젤은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 반문했다.

“너희들에게 종말이란 무엇이지? 너희는 무엇을 종말이라고 생각하지?”

현암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블랙 엔젤이 다시 말했다. 

“너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거야. 아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식으로 종말이란 것이 다가올 거야. 조짐은 충분히 나타 나 있고, 때가 닥친 후에 그것이었구나 해 봐야 그때는 이미 늦 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

현암이 블랙 엔젤의 말을 막았다.

“네가 말하던 종말이 어떤 건지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고, 알 수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 가지만 묻자. 징벌자에 대해 이해하나?”

“물론!”

“그는 너희의 우두머리가 될 자인가?”

“그건 아냐.”

“징벌자는 정말로 종말을 가져다주는 자인가?”

“네가 쓰는 용어로 구원자가 같이 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

“구원자는 확실히 나게 되어 있나?”

“그건・・・・・・ 그건……!”

현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블랙 엔젤을 노려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너는 우리들의 생각을 베껴 지껄이고 있을 뿐이야.”

블랙 엔젤이 침묵했다. 현암은 천천히 그 악마에게 말했다. 

“도대체 너희의 꿍꿍이는 뭐지? 너희는 무슨 바람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돕겠다는 거지? 징벌자의 죽음을 막아 보겠다는 건가?”

블랙 엔젤은 더 이상 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말을 끊듯 큰 소 리로 웃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너희가 내 말을 안 듣고 너희 뜻대로 하는 것처럼 나도 언제든 내 뜻대로 할 거야. 알았지? 그리고………… 네 가 한 말이 하도 모욕적이라 한 가지만 더 가르쳐 주겠어. 사십 일이야, 사십 일 남았어!”

승희가 놀라며 물었다.

“뭐 뭐라고? 뭐가 사십 일 남았다는 거지?”

“때가 임박했어. 사십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야. 운명이 바 뀔 수 있는 것은 그 기간뿐, 그때가 지나 버리면 다시는 바로잡 을 수 없어. 모두 끝장이야. 잘 기억해 둬.”

그리고 블랙 엔젤은 섬뜩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나는 언제나 너희 옆에 있어. 그리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승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블랙 엔젤에게 뭔가를 더 외치려 했 으나 현암은 묵묵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솔로몬 의 봉인 주위에 둘러쳐 있던 불의 장막이 약간 희미해지는 듯 하 더니 사라져 버렸고, 컴컴한 밤거리가 다시 나타났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현암을 승희가 불렀다.

“현암 군.”

현암은 승희에게 고개를 돌리고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백호 씨에게 가 보자.”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야?”

“가면서 차차 얘기해 줄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현암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십 일이라고? 고작 사십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준후의 예언과 여태껏 그들이 알아왔던 한빈 거사 및 다른 사 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블랙 엔젤이 말한 결정이 이루어지 는 순간이란 것은 그 징벌자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 탄생의 날짜 가 고작 사십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나 현암은 그 날짜의 강박보다 다른 것에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블랙 엔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그들은 왜 우리를 돕겠다고 하는 것일까? 종말을 원치 않는다는 그들의 말은 일견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징벌자의 탄생은 곧 종 말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예언이나 보통 사람이 믿는 바에 의하면, 징벌자는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며 그의 탄생은 종말이라는 화약 에 불을 붙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일단 탄생하고 나면 어 떻게 하든 간에 종말은 이루어지고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 시기가 징벌자가 약간 성장한 후일지, 아니면 장성한 후일 지. 어쩌면 노년이 된 이후일지도 모르지만 종말의 때에 이르는 시계는 그때부터 작동되어 아무도 멈출 수 없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징벌자를 막아 없애는 방향으 로 종말의 때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혜 선사의 예지와 퇴마사들의 의견에 따르면, 그 징 벌자를 인간의 생각에 따라 없애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들 스스로가 나서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징벌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징벌 자가 없어지면 징벌자를 제압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구 원자가 징벌자가 된다는 것이 도혜 선사와 한빈 거사의 의견이 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결정에 현암은 전혀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블랙 엔젤의 등장이 현암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악 마들이 인간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들의 뜻을 돕는다는 것은 그 렇다고 치자. 하지만 징벌자는 적그리스도이고, 그렇다면 악마들과 같은 편이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징벌자가 세상을

종말에 빠뜨리려는 자라고 하면 그들도 자신들의 뜻과 대치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현암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내막 까지는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다만 하나의 기회를 이용 하는 것뿐이다. 적그리스도의 보호를 위한 것이 가장 그럴듯한 이유 같았지만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현암은 과거 박 신부와의 대화에서, 악마들은 창의력이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오랜 기간 존재해 왔기 때문에 지식은 엄청나지만 지혜와 창의력은 없는 존재가 아닐 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악마의 힘 중 절반은 상대의 힘과 상대 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났다. 아 까 현암의 마비 상태도 현암에게 일말의 두려움이 있기에 빚어 진 것 같았다.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현암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마와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악 마가 같은 편인 척하게 되다니. 이 때문에 빚어질 오해는 얼마나 많을까?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예도 그렇고, 앞으로 오해 살 일을 생각하니 암담할 정도였다. 더구나 블랙 엔젤이 언제든지 백호 를 통해 나타나 힘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고 백호를 어떻게 하거나 블랙 엔젤을 제지할 수 있는 수단이 현암에게는 없었다. 박 신부와 상의한다면 혹 무슨 수가 생길까?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자신감 없이 블랙 엔젤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냈 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좌우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현암군, 말좀 해봐.”

승희의 목소리에 현암은 퍼뜩 사고를 멈추었다. 현암은 쓰러져 있는 마녀를 어깨에 둘러멘 다음 승희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승희야, 우리 같이 생각해 보자. 머리가 좀 아파서……..” “좋아!”

두 사람은 백호의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블랙 엔젤이 사라지자 아파트는 다시 인기척이 들리는, 사람 사는 곳처럼 변 해 있었다.


현암과 승희가 사라지고 난 다음 약간 떨어진 어느 덤불 속에 서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쓰러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상당한 수준의 기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었지만 악마가 만들어 낸 불의 장막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현암이 비록 자신에게서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을 빼앗아 가 고, 또 악마와 대화하는 것을 들었더라도 수사는 정말로 그가 악 마들과 한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봉인 안에서 본 악마의 이야기를 들은 수사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블랙 엔젤과 현암이 마지막 순간에 한판 대결이라도 했더라면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현암을 어떻게든 구제해 보려고 노력했을 지도 모른다. 현암과 같은 강력한 능력자는 세븐 가디언의 입장 에서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실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 젊은이와 악마는 같은 편 임이 분명했다. 아니, 그들은 악마를 마음대로 부리는, 그야말로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어둠의 세계 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그런 자들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상의 고통과 또 다른 무서운 적을 만났다는 느낌에 수사는 몸을 떨었다. 이 일을 어서 빨리 알려야 했다. 여태껏 세븐 가디 언들은 아주 급한 경우 사람을 다치게 하는 정도의 일은 했지만 사람을 해치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

이제 그 금기를 깨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한숨을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정이 그른 것이 아니 기를 빌며, 하늘을 보고 가볍게 성호를 한 번 그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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