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화 – 종말의 서곡 1 : 불안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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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3권 1화 – 종말의 서곡 1 : 불안한 출발


불안한 출발

서울의 밤하늘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해가 져 밤이 되니 당연 한 일이지만, 수많은 전등과 가로등, 간판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에서 점멸하는 빛들이 그토록 많은데도 서울의 밤은 조금씩 침 울하게 어두워져 갔다.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어둠이 아니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빛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서울의 밤거리를 뒤덮 고 있는 느낌을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 들은 언짢은 표정을 버리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매연이 심해 진다느니 광화학 스모그가 발생하는 것 같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을 해 댔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준후는 요즘 얼굴빛이 몹시 어두웠다. 키가 훌쩍 자라기는 했 어도 아직 앳된 기가 남아 있던 하얀 살결이 꺼칠해질 정도로 근심에 잠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같이 지내는 그 누구도 준후에게 염려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준후만이 아니 라 모두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현암이나 승희, 박 신부까지도. 현암이나 승희는 특별히 대놓고 어두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 다. 허나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는 듯, 행동에 생기가 없었 다. 박 신부는 거의 입도 열지 않고 반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 아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가라앉은 것처럼 지내 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는 것이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벌써 열흘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사태는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이반 교수를 통해 급보를 보냈다. 마녀 협회가 검 은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마녀 협회를 거머쥔 다른 바이올렛을 이렇게 불렀다)을 중심으로 뭉쳐 뭔가 무서운 일을 계획하고 있 다고 말이다. 그리고 현암과 승희의 앞에는 블랙 엔젤이 나타나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고, 종말이 결정지 어지는 날까지 사십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무서운 예언을 했다. 그리고 로파무드는 인도에서 칼키파의 행동이 엄청나게 확산 되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백호는 어새신의 암살 대상에 올라가 바깥출입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으며, 점토판 문제로 야기된 교황청 이단 심판소와의 오해도 어떻 게든 풀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성당 기사단이 무슨 일을 꾸밀지 도 짐작하기 힘든 판국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더구나 시간도 없었다. 악마의 말을 굳이 믿지 않더라도 그러한 경고는 「해동감결』의 일부분에서도 비쳐지고 있었다. 『해동감결』에 의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그들 앞에 닥 쳐올 것이었지만 그래도 초조한 기분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결국 현암의 제의로 열흘 전, 그러니까 현암이 블랙 엔젤을 만 난 다음다음 날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는 한자리에 모였 다. 모두가 상의해도 이야기가 풀릴까 말까 할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일들이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끼워 넣을 수가 없었다.

백호에게 그가 블랙 엔젤의 하수인이 되었던 것을 알게 할 수 없었고, 연희에게는 자신이 라미드 우프닉스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없었다. 수아는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어렸으니 이야기 상대 가 될 수 없었고, 아라나 준호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어렸다.

이반 교수도 지금은 다 나았을 테지만 상처를 치료하러 일단 모국인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윌리엄스 신부도 이반 교수와 같이가 있었다. 그리고 바이올렛, 성난큰곰 등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현암이 먼저 박 신부의 방에 들어가 그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 누고 난 다음, 얼굴만 내밀고 승희와 준후를 불렀다. 다 모이자 박신부가 간단히 말을 꺼냈다.

“의견을 나눠 보세나. 현암 군부터.”

“저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현암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현암의 목소리에 긴장된 울림 이 느껴져서 승희와 준후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해동감결의 예언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해동감결』에 언급되었 던 열 사람의 협조자도 다 만났다고 볼 수 있고요.”

현암이 말하자 승희가 눈을 깜짝였다.

“열 명? 난 아홉 명밖에 모르겠는데?”

현암이 약간 부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열명 다야.”

“보자………….. 열 명 중 노인 셋이라면 ・・・・・・・ 윌리엄스 신부님, 이반 교수님, 그리고・・・・・・ 성난큰곰인가?”

승희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하자 현암이 피식 웃었다.

“성난큰곰이 왜 노인이냐? 나랑 동갑인데.”

그 말에 승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정말이야? 아니, 예전부터 왕 아저씨던데.”

“정말이에요, 형?”

준후도 놀란 듯 웃어 보이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준후는 속으 로 거의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안 된다고, 더 이상 나아가면 안 된 다고 말이다. 준후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다만 모든 힘을 다해 참아 낼 뿐, 준후의 마음은 알 리 없는 현암이 웃으며 말했다.

“한 명은 바이올렛이겠지. 틀림없어.”

“엥? 그 할머니가? 난 그 할머니 싫은데.’

준후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자 승희도 맞장구를 쳤다.

“흠・・・・・・ . 나도 사실 그럴 거란 짐작은 했지만 그 할머닌 싫어. 정말, 정말 싫어.”

“하지만 틀림없어. 바이올렛은 분명 중요해. 마녀 협회는 아 무래도 심상치 않은 곳이니 말야. 점토판도 노리고 있고, 지난번 준후와의 일도 있고. 마녀 협회와 관련이 있던 사람은 바이올렛 뿐이니 바이올렛도 열 사람 중 한 명이 분명해.”

“할 수 없지, 뭐. 사천 년 전 대(大) 할머니의 예언인데, 거역 할 수야 없지. 그러면 젊은이 셋은? 연희 언닌 당연히 들어갈 테 구. 백호 씨도?”

“그렇겠지.”

“하지만…….”

준후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블랙 엔젤이 백호 씨 몸을 빌리니 백호 씨는 적이 되는 것 아 닌가요? 그건 물론 싫은 일이지만.”

“일단 백호 씨가 완전히 조종당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백 호 씨가 없다면 우리가 꼼짝이나 할 수 있었겠니? 그 한 가지만 가지고도 백호 씨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협조자인 셈이잖아.” 

“그럼 나머지 한 명 젊은 사람이…………… 성난큰곰?”

“그래. 성난큰곰은 승희 너랑 같이 성당 기사단을 대적하기도 했으니 관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겠지.”

승희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피아노 치듯 톡톡 두들겼다.

“그러면 이제 아이들 넷인데……………. 난 이게 좀 감이 안 잡힌단 말야. 수아는 일단 확실할거고.”

준후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수아란 아이를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 뭐예요.”

“그리고 아라도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둘은 누구겠어? 준호?”

“준호는 좀 그렇지 않나요? 사실 아라도…………….”

준후는 말을 하다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 라와 준호를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은 숙명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더 어린 수아는 태연히 인정해 놓고 아라나 준호만 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준호, 아라 둘 다 맞을 것 같아. 우리가 보기엔 아직 좀 약할 지 몰라도 사실 그 정도 능력이나 재능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야. 준호가 준후에게 배운 지 몇 년도 안 되는데 벌써 오 행술을 어느 정도 쓰게 되었고, 아라는 제대로 누구에게 배운 적 도 없는데 조요경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 이건 놀랄 만한 일이 라고 봐. 둘 다 나중에는 대단해질 거야.”

“그런데 또 한 명이 누군지 나는 도저히 감도 안 잡혀. 혹시 옛 날 블랙서클에서 키운 신동 같은 애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승희의 말에 현암이 웃으며 말했다.

“그 한 사람을 모르겠니? 너하고 아주 가까운 사람인데?”

“뭐? 누군데?”

“로파무드가 있잖아.”

“뭐?”

현암의 말에 승희와 준후 모두가 놀랐다. 로파무드는 승희와 동갑인 아가씨인데, 어떻게 로파무드를 아이로 계산한단 말인 가 현암이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로파무드는 승희와 동갑이니 어린아이라고 할 수는 없 겠지. 그러나 나이를 먹은 건 그녀의 몸일 뿐이야. 그녀는 솔직 히 몇 년 전까지 영혼이 없는 상태였잖아. 그러다가 마스터의 영 이 정화되어 다시 태어나게 된 셈이고 말야. 그녀의 영혼은 아이 상태나 마찬가지라구. 전에 로파무드의 부친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로파무드는 아주 어린아이처럼 다시 말을 배우고 세상사를 배우고 했다던데?

『해동감의 예언은 영적인 힘을 빌려서 한 것일 테니 몸보 다는 영혼의 상태를 분명히 읽었다는 편이 더 말이 되잖아. 그러 니 그녀를 아이로 기록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은데,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어?” 승희가 정색을 하자 현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언가가 아냐. 물론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 만・・・・・・ 맞다고 생각해.”

“내일이라도 수아 때처럼 신기한 아이 한 명이 휙 나타나면 어 떻게 할래? 책임질래?”

“원참. 시비 걸지 마. 그런 일이 그렇게 자주 있겠니?” 

이야기가 옆으로 새려고 하자 박 신부가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현암 군과 같단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자꾸나.”

박신부가 말하자 승희나 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 었다. 박신부가 현암에게 눈짓을 하자 현암이 말했다.

“좌우간 이제 정말 때가 임박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해 동감결의 예언에 보면 열 개의 길이 가로막히고 아홉 명이 아홉 길을 튼다고 했지요? 그리고 나머지 한 길은 넷과 한 사람이 막아야한다고 했고.”

마지막 말은 현암이 준후를 보고 말한 것이었다. 준후는 놀란 표정으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준후는 「해동감결』의 내용 을 자신에게 묻자 뒷부분의 예언이 생각나 마음이 뜨끔해져 말을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현암은 같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박 신부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솔직히 아홉 명이 어떻게 해서 길을 트는지는 전혀 모 르겠어요. 솔직히 가로막힌다는 열 개의 길은 무슨 난관 같은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풀리는지도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고 말입 니다.”

승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준호나 아라는 그래도 혹시 모르지만 수아 같은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어? 더구나 바이올렛이 우리의 난관을 뚫어 준다고? 만 들지 말라고 하지, 원.”

현암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박 신부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 었다.

“어쨌거나 그 열 개의 길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만………… 아마 그것은 나중에 겪어야 할 난관 같은 것이라 추측됩니다.”

“승희와 준후에게 구체적으로 일러 주게나. 나하고는 다 논의 하지 않았는가.”

박신부가 말하자 현암은 좀 머쓱한 듯 승희와 준후를 보고 말했다.

“신부님과 나는 그 열 개의 길이 난관이라면 그것은 어떤 집단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단다. 신부님께서는 묵 시록에 언급된 말세의 양상 중 하나로 열 개의 뿔을 가진 짐승을 이야기하셨는데, 그 열 개의 뿔이란 열 개의 나라 혹은 열 개의 집 단을 의미한다고 해. 물론 우리는 지금 양상이 정말 묵시록에 언 급된 말세일 것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비슷한 비유 같다는 거지. 아직 다는 모르겠지만 대략 많은 숫자의 집단이 우리를 거쳐 가게 되었어. 그것만 해도 벌써 열 개의 길이 열리는 것, 아니 열 개의 난관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봐야겠지.” 

“열 개의 집단이 뭔데? 그렇게 많아?”

승희가 말하자 현암이 입맛을 한 번 다시고 말했다.

“일단 성당 기사단, 마녀 협회, 검은 편지 결사, 어새신, 검은 지하드, 이 다섯 곳은 확실해. 우리나 백호 씨, 바이올렛이나 이 반 교수님 같은 분들을 노린 바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 신부님이 수아를 데려오실 때 만났던 칼키파라는 인도 종교 집단도 틀림 없이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해. 로파무드의 편지도 있고 말야. 그렇게 여섯 군데는 분명히 드러났어.”

현암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이름만 언급되기는 했으나 로지 크루시언, 즉 장미 십자회하고 프리메이슨, 시온주 의자들이 있지. 그것들이 성당 기사단과 별개인지, 아니면 통하 는 조직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야. 지난번에 얻은 정보에 의하면, 성당 기사단이 프리메이슨의 하부 조직이라고도 하던 데. 뭐, 새로운 조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선 그 네 곳도 무시 할 수는 없으니 염두에 둬야 할 거야. 그리고 블랙 엔젤이 직접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했으니. 악마들의 세력이야말로 가장 무시 할 수 없는 존재겠지.”

“그렇게 열 군데인가요?”

준후가 묻자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은데 말야. 아무래도 방금 언급한 조직들 중 최소한 한두 개는 겹치는 조직인 것 같아. 사실 한 군데가 더 있거든.”

“그게 어딘데요?”

승희는 짐작가는 바가 있었지만 준후는 캐물었다.

“마지막 한 군데는……………. 흠. 좀 마음에 걸리는 곳이야.”

“어디냐구요?”

준후가 다시 묻자 현암이 박 신부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교황청이야.”

그 말에 준후도 놀라서 박 신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박 신부가 비록 사제직을 그만두었다지만 신앙의 본산으로 삼아 온 곳이 교황청인데, 그곳과 맞서게 되다니.

승희는 지난번 현암과 함께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만난 바 있 어서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숨을 내쉬며 박 신부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박 신부의 기분이 어떠할지 살피느라 승희와 준후가 눈을 빛내자 현암이 무마하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물론 교황청 전체는 아니고, 아마도 이단 심판소라는 곳이겠 지만…………. 아무래도 오해가 좀 심각하거든.”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걸세. 뭐, 지난번 현암 군이 겪은 일 때문이 아니라도 우 리가 하는 일은 그쪽의 일과 완전히 반대가 아닌가. 말세가 오게 한다는 징벌자, 적그리스도를 우리는 도리어 보호하려고 하니까 말야.”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죽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들 말렴. 나는 괜찮단다. 어차피 파문당한 몸 이 뭐 걸릴 게 있겠니? 소신대로 할 뿐이지.”

박신부가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세 사람은 조금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약간 침묵이 흐른 후 현암이 말했다.

“좌우간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된 셈이지. 그런데 신부님과 내가 아직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부분이 있거든.”

“그게 뭔데?”

 승희가 묻자 현암은 머리를 긁적였다.

“다름 아니라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가지고 왔던 점토판 말 야・・・・・・ .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야.”

아마도 현암은 해독을 하고 싶어 하고, 박 신부가 반대하는가보다고 짐작한 승희는 현암 편을 들 심산으로 냉큼 말했다.

“일곱 개 전부 찾아서 해독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승희와 준후가 말하자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

“왜?”

“악마가 한 말을 어찌 믿겠어? 아무리 우리 편을 드네 어쩌네 해도 블랙 엔젤은 악마야. 악마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건 원 치 않거든. 더군다나 …………… 그중 세 개의 점토판은 교황청에 있다 잖아.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해? 가서 빼앗아 와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자 박 신부가 말을 건넸다.

“현암 군, 자네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는 하네만, 그 점토판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예언이 적혀 있을 가능성이 있네. 사 실 「해동감결에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은 없 지 않은가? 블랙 엔젤이 점토판을 얻으라고 말하기는 했지. 허나 악마가 그렇게 말했다고 필요한데도 그러지 않을 필요는 없다 생각하네. 우리가 그것을 얻어 그 내용을 본다고 악마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야. 그러니 일단 얻으려 시도는 해 봐야 한다고 보네만.”

승희가 보아하니 현암은 다른 이유들보다 박 신부의 신앙과 배척될까 봐 일부러 더 얻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고, 박신 부는 오히려 현암이 그런 주장을 하니 더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승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승희 본 인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겼으니까.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내가 그걸 얻으려고 사람을 몇이나 죽 이고 악마를 불러냈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세 개의 점토판 까지 얻으려 했다간…………… 오해를 풀 길이 없을 것 같아요.” 

박신부가 담담하게 되받았다.

“어차피 우리는 오해를 사게 되어 있네. 징벌자, 적그리스도를 보호할 뜻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일세. 지금 우리가 오해를 무서워할 계제는 아니라고 여기네만.”

“그러면 교황청에 쳐들어가 그걸 빼앗아 오나요? 그러고 싶지는 않은걸요.”

그러자 박 신부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이야 할 수 있겠는가? 가서 솔직하게 말하고 협조를 구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러기엔 오해가 너무 클 것 같은데요? 공연히 싸움이라도 나게 된다면………..?

“자네나 승희는 오해를 사고 있으니 갈 수야 없지. 그러니 내가가 봄세.”

“예? 신부님 혼자서요?”

“교황청 같은 곳에서 설마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야 하겠는가?”

“어떻게는 안 한다 해도 점토판을 주지 않으면요?”

“그렇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뭘.”

박신부가 실없이 ‘헛’ 하고 웃자 현암도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렇게 하죠. 교황청 이단 심판소인가요? 만약 거기서 점토판을 못 주겠다고 하면 그냥 없던 걸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냥 돌려줘 버리고요.”

그때 느닷없이 준후가 외쳤다.

“안 돼요! 그걸 왜 돌려주나요?”

현암과 박 신부는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준후를 돌아보았다. 승희가 듣기에도 준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컸고 너무 다급하게 들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거니?”

“……..”

“아, 아니 그냥요. 그러니까…………… 그걸 돌려줬다가…만에 하나 그들이 그 내용을 해독하게 되면 그것도 문제잖아요.” 

“뭐가 문제지?”

“그러니까…………… 그들이 뭔가를 알아내어 우리보다 선수를 치 면 어떡해요. 우리는 모르고 다른 사람들만 먼저 내용을 알게 되 면 그것도 문제라구요!”

현암은 준후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눈빛은 이상하게 빛났다. 준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태도가 이 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점토판에 씌어 있는 게 우리가 찾는 거라고 너는 생각한단 말이구나?”

“그・・・・・・ 그렇지 않나요?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것이 고…………. 또 이단 심판소나 성당 기사단에서 그만큼 결사적으로 찾는 물건이라면 ・・・・・・ 그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해동감결』에는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에 대해서는 분명 아무런 단서도 나와 있지 않다고 말했었잖아? 그런데 넌 꼭 뭔가 더 알고 있는 듯한 눈치구나?” 

현암의 말에 준후는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응수했다.

“나도 더 아는 건 없어요. 다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죠. 성당 기사단은 『우사경』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미리 손을 쓰려고 했 었잖아요.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찾는 그 점토판 역시 대단한 예언이 씌어 있을 거라구요. 그렇게 볼 수 있지 않나요?”

준후도 상당히 급하게 말을 했다. 물론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준후의 태도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현암은 뭔가 한마디를 더 하려 했는데, 박 신부가 먼저 말했다.

“그래, 준후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준후도 이제 다 컸구나.” 

“좌우간 그 점토판은 꼭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의견은 그렇다구요.”

준후는 예전에 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현암은 좀 의아해서 기 어코 한마디 더 물었다.

“의견이 그런 것은 알겠지만…………… 그런 의견을 내는 이유가 뭐지?”

“그냥 내 의견이 그렇다는 거예요!”

“왜 그런 의견이 나왔냐는 거지? 혹시라도 너, 뭔가 아는 게 있다거나……………..”

“그냥 의견이라니까요! 난 더 아는 거 없어요! 내 의견이 마음 에 안 드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요? 그런 마음이라면 회의는 뭐하러 해요! 난 안 할래요!”

준후는 예전에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태도로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승희가 고함을 빽 질렀다. 

“야! 장준후! 너 뭐 하는 거야!”

“누나는 왜 그래요?”

“너 머리 좀 컸다고 반항하는 거니, 엉?”

당사자인 현암과 박 신부는 오히려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는 데, 승희가 앙칼진 목소리로 화를 내자 준후는 벌컥 얼굴이 붉어 지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러자 승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야! 장준후! 거기 못서?”

현암이 승희를 말리려 했다.

“승희야, 넌 또 왜 그래? 도대체.”

그러나 현암이 승희를 말릴 틈도 없이 승희마저 준후를 뒤쫓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암은 좀 멍해진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화가 난 것은 아니 었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신부님, 준후가 왜 저러죠?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박 신부도 조금 놀란 듯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준후가 일어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현암에게 말을 건 넸다.

“글쎄 ・・・・・・・”

“사실 전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였거든요. 그런데 저렇게 말을 돌리려 하고 화를 내다니. 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잖아요? 반 항기라도 된 건가?”

현암이 볼멘소리를 하자 박 신부가 조용히 듣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더 심하지 않았나? 지금 준후보다 더 나이가 든 후에도 말야.”

“예에? 아니, 제가 언제 ……………. 으음……. 그랬나요?”

현암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박 신부가 차분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준후를 믿네. 물론 자네도 그렇겠지?”

“예? 아, 물론이죠!”

“그렇다면 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 두세 나. 준후도 이제는 아이가 아닐세.”

“전 그래서 더 걱정이 되는 겁니다. 저 녀석이 혼자서만 뭔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왜 그럴 필요가 있나요? 힘든 일은 같 이 상의해야 하는 건데.”

박 신부는 슬쩍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그 이단 심판소인가는 내가 가 봐야 할 것 같군그 래. 자네나 승희나 준후는 안 될 것 같으니.”

현암은 왠지 걱정이 되었다. 박 신부의 체구는 여전히 건장했 지만 절룩거리는 다리와 날로 늘어만 가는 흰 머리카락이 왠지 가슴을 움켜쥐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 현암의 눈빛을 의식했는 지박 신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염려 말게. 몇 사람하고 같이 갈 테니 말일세. 마침 나 같은 늙은이들이 유럽 쪽에 가 있으니.”

“제가 안 따라가도 될까요? 아무래도 요즘 분위기가 안 좋지 않습니까?”

“괜찮네. 『해동감결에 나온 대로 늙은이들끼리 모여서 가지, 뭘. 그럼 될 걸세. 어차피 나눌 이야기들도 있고 뭔가 알아봐야 할 것도 있으니 말일세. 뭐, 길게 끌 이유가 없으니 지금 출발하 는 게 좋겠네.”

“예? 아니, 지금 당장 출발하신다고요?”

박 신부는 조금 허탈한 듯 웃어 보였다.

“원래 오늘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네. 말을 꺼내지 않은 것 뿐이지, 흠, 준후는 괜찮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게나. 그것보 다.”

“예?”

“요즘 자네, 서울의 밤공기가 이상하다는 소문 들어 봤나?”

“글쎄요.’

“주시하고 있나. 자네와 준후가 있으니 안심이네만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이야.”

“폭풍 전야라뇨?”

“터질 일들은 너무 많은데 지나치게 조용해. 기분이 묘하네.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밀어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박 신부는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 되어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때문에 현암은 준후 이야기를 더 할 수가 없었다. 현암은 준후보다 박 신부의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준후야!”

밖으로 나온 승희는 조금 전의 화난 듯한 어조와 다른 목소리 로 준후를 찾았다. 승희는 준후가 멀리 가버린 게 아닐까 걱정 스러웠다. 퇴마사들의 아지트는 오래된 폐선을 개조해 쓰는 것 이라 승희가 밖으로 나가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방파제 건너편의 기둥 밑에 사람 그림 자가 보였다.

“다행이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구나.’

승희는 준후에게로 다가갔다. 준후는 고개를 숙여 낡은 나무 기둥에 이마를 대고 말없이 서 있었다. 승희가 가까이 다가가자 준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준후야…….”

승희는 준후의 어깨를 건드리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준후의 앞 으로 다가간 다음, 준후에게 등을 돌리고 방파제에 털썩 앉아 바 다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뭐.”

승희는 실없이 중얼거렸으나 준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울음을 그치려는 것 같았다. 승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은데……………. 아, 아까 내가 소리 지른 건 일부러 그런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말아 줘. 잘못하 면 현암군이나 신부님이 화내실 거 같아서 내가 일부러 더 화낸 거야. 알지? 그리고.”

승희가 두서없이 계속 중얼거리자준후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 더니 승희를 보고 말했다.

“승희 누나…………. 혹시……… 내 마음속 본 거 아니에요?” “어? 아…………… 아냐. 안 했는데……. 난 원래 너나 현암 군마 음은 안 들여다봐. 솔직히 너희들은 정신력이 너무 세어 보기도 어렵거니와 볼 생각도 없다구!”

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준후는 다소 차가운 눈빛으로 승희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인가요?”

승희는 준후의 그런 눈빛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승희는 뒤로 주춤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정말이라니까! 너・・・・・・ 너, 혹시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건……” 그러자 준후는 괴로운 듯 몸을 휙 돌리고는 승희에게 외치듯이 말했다.

“어디 좀 다녀올게요. 한 며칠 걸릴 거예요.”

준후는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승희는 놀라서 준후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가려 했지만 준후는 힐기보법을 썼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준후가 도대체 왜 저러지?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해.”

돌아가면서 승희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의 마 음속은 아직도 섬뜩한 그대로였다. 사실 승희는 준후의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을 언뜻 하기는 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고 대 화에 열중하다가 현암이 준후가 뭔가 더 아는 게 있는 것이 아니 냐고 말할 때 무심코 준후의 마음을 볼 뻔했다.

물론 얼른 이러면 안 된다 싶어 투시를 중지했다. 그래서 준후 의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준후가 어떤 심정인가 정도는 넌지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공포심이었어. 그리고 슬픔…………… 준후 같은 아이가 무 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그리고 왜 슬픈걸까…………?

승희는 자신과 가까운 주변 인물들의 마음을 결코 읽지 않으 려 했다. 남의 마음속을 읽는 것은 그 사람과 멀어지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고 승희는 믿고 있었다. 물론 같이 지내면서 잠시 그 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준후나 현암, 박 신부 등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은 승 희에게도 몹시 버거운 일이었다. 일단 그들이 남에게 밝히기 싫 어하는 문제일 경우에는 아무리 애써도 읽을 수 없다고 보는 편 이 옳았다.

승희는 염력 수련을 통해 정신력이 과거보다 강해진 상태였지 만 상대의 정신력과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는 정신력을 갖기 전 에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약간의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의 마음도 읽기 어려웠다. 그러니 나름대로 최고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박 신부나 현암, 준 후의 마음을 완전히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단 한 가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은 있다. 무심한 상태나 마음을 열어 놓은 방심 상태, 아니면 뭔가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 아 마음의 빗장이 열린 것 같은 상태일 때가 그 틈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심한 상태에서도 작은 감정의 색깔 정도 나 느낄 수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조금 전 승희는 준후의 마음에서 그런 감정의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 이다.

‘준후가 돌아오면 조용히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준후는 수련을 떠난다는 전화 한 통만 남기고 어디론가 틀어박혀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박신부가 교황청에 다녀온다면서 떠난 다음 날 밤, 퇴마사들의 아지트로 팩스가 연이어 날아들어 현암과 승희도 급히 어디론가 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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