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7화 – 하르마게돈 11 : 칼키파의 주술막

랜덤 이미지

퇴마록 말세편 4권 17화 – 하르마게돈 11 : 칼키파의 주술막


칼키파의 주술막

산 전체가 엄청난 주술에 의해 이상한 막으로 둘러싸이자 치 열해질 것 같던 싸움이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 막은 단순히 사방 을 둘러쌌을 뿐, 아직까지는 그 안의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고, 용병들과 부타들 의 싸움도 잠시 중단되었다.

부타들은 이성이 없으니만큼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용병 측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전선을 이탈 하여 멀찌감치 물러서서 다시 포진하는 듯했다. 부타들을 조종 하던 주술사도 일단은 부타들을 따라가게 만들지 않고 뒤로 물 러났다.

그 덕에 박 신부 일행은 양측의 중간 지점에서 조금 비껴난,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박 신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승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어깨 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머리 위에도 붉은 돔은 여지없이 쳐져 있었다. 기이한 음파 같은 소리는 사라졌으 나 사방은 어두웠고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는 느낌이 바람 한점 일지 않는 공기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때 성난큰곰이 조용히 마음으로 말을 전달해 왔다.

이건 주술이다. 이렇게 대규모 주술을 펴다니………….

이내 이반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군. 하긴, 보아하니 저쪽도 용병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소.”

그 말에 승희가 덜덜 떨면서 이반 교수를 쳐다보자 이반 교수가 말을 이었다.

“용병들이라면 이것을 기상 현상으로만 여길 테지. 허나 철수 한 것을 보면 그쪽에도 능력자들이 끼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거요. 아까 부타에 대해서도 용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고..”

“그런데 누가 이렇게 대규모로 공격을 가한 걸까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윌리엄스 신부가 침통하게 말하자 성난큰곰이 말했다.

기독교도들이다.

윌리엄스 신부가 놀라서 성난큰곰을 바라보았지만 바위처럼 굳건한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도는 아닌지도 모르겠군. 좌우간 성경을 따르는 자들이다.

“어떻게 알았소?”

이반 교수가 물었지만 성난큰곰은 땅을 한 번 가리켰을 뿐, 대 답은 하지 않았다. 이반 교수가 성난큰곰이 가리킨 곳을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새..? 저 새의 눈으로 보았소?”

성난큰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새의 시체 를 향해 뭔가 중얼거리면서 손을 공중에 휘저었다. 친구의 죽음 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인디언의 주문이었다.

“그것 말고 본 것은 없소?”

그러자 성난큰곰이 짧게 말했다.

저쪽에는 대단한 자들이 있다. 그 이상을 볼 수 없었고, 새도 죽었다. 내 잘못이다.

이반 교수는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맛만 다시다 가 윌리엄스 신부에게 말을 걸려 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그때까 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열 심히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우는 중이었다. 이반 교수는 윌리엄 스 신부가 왜 그러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윌리엄스 신부가 부르르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나는 믿을 수 없소. 이것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펼친 주술이라는 말이오?”

그러자 성난큰곰이 말했다.

한두 명의 힘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아마도…………....

성난큰곰이 말을 끊고 얼굴을 굳혔다.

“아마도 뭐요?”

이반 교수가 캐묻자 성난큰곰이 내키지 않는 듯이 말했다.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힘을 썼을 것이다. 적어도 열 명, 아니 스무명 이상……………

“목숨을?”

이반 교수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주술이 뭐기에? 아니, 도대체 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런단 말이오?”

나도 잘 알 수 없다. 다만 뭔가 불안하다. 이 안에 있는 것은 정말 로…………. 아니…… 어쩌면 이건……………

성난큰곰은 이반 교수에게 손짓으로 전화를 해 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반 교수는 아까 한 번 사용했던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 었다. 그러나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일을 짐작했다는 듯이 성난큰곰이 말했다.

여기는 지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거다. 우리는 모두 독 안에 든 쥐다.

“그렇다면……?”

아마도 곧…… 소탕전이 벌어질지도…….

“우리는 카르나의 손님으로 왔는데, 우리까지 건드린단 말이오?”

그러자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내 생각엔 저 용병들과 그 조종자들만 여기 있는 게 아닌 것 같소.”

“무슨 말씀입니까?”

이반 교수가 묻자 윌리엄스 신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 용병들 정도라면 지금의 부타들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칼키파의 주술사들도 무척 많고요. 그런데 이런 대주술 을 굳이 펼쳤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소?”

그 말에 이반 교수와 성난큰곰은 뭔가 느낀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 저들 말고도 다른 공격자들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밖에 볼 수 없잖습니까? 우리가 보고 느꼈던 수십, 수 백 명의 주술사도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큰 세력이 여기를 덮쳤 다고밖에는…………….”

그 말에 이반 교수는 몹시 불안한 듯, 손에 든 벨지움콘바인을 접어서 장전을 확인한 다음 철컥 닫았다. 그러자 성난큰곰도 눈 을 감고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내가 알아보겠다.

그러면서 성난큰곰은 즉시 무아지경 상태로 들어가 기이한 울 음소리 같은 것을 냈다. 주변의 자연과 동화되어 미약하나마 사 방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주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윌리엄스 신부는 박 신부를 살폈다. 박 신부는 아무런 상처도 주술의 영향도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기이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반 교수는 아까의 충 격 때문인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이까지 딱딱 마주치는 승희 에게 주머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건넸다.

“독하니까 한 모금만…………….”

그런데도 승희는 위스키 한 병을 단숨에 싹 들이켰다. 이어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한결 진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훨씬 낫군요!”

이반 교수는 텅 빈 위스키 병을 받아 들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반 교수가 웃는 표정을 짓는 일은 매우 드물었는데, 지금처럼 웃자 이반 교수의 얼굴도 그렇게까지 흉악해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성난큰곰이 마음으로 말을 전해 왔다.

여기는 칼키파와 용병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모두가 긴장하자 성난큰곰이 더욱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많다. 어떻게 이렇게……………. 너무나 많다…………..

“많다니? 여기 몰려든 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요?”

성난큰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 수가 없다. 지난번 한국에 모인 자들의 세 배, 아니 다섯 배도 넘는다. 그리고…………….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 승희까지도 아연해졌다. 지난번 한국에서 칠십 명에 달하는 주술사들이 모였을 때도 엄청났다. 그런데 그 다섯 배가 넘는다면 적게 잡아도 삼백오십 명에 달하지 않는가?

성난큰곰이 쐐기를 박듯이 덧붙였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지난번과는 상황이 다르다………….


‘검은 편지 결사 시오니즘?’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무색이 더 많은 말을 하기도 전에, 랍비 안나스가 돌아왔다. 무색은 그가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처 무슨 일을 꾸미기도 전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랍비 안나스는 무색이 자신도 모르게 놀란 빛을 얼굴에 드러 내자 웃으며 말했다.

“비록 말을 하지 못하게 했더라도 여러분을 같이 있게 하는 것 은 실수라고, 랍비 가야바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니 지금부 터는 좀 떨어져 계시겠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병들의 총부리가 겨누어졌고 결국 세 명의 용화교 승려와 백호까지도 따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 러고 나자 랍비 안나스가 미소를 띠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능한 말은? 영어?”

“조금 압니다.”

현암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랍비 안나스는 웃으면서 현암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용병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 고 그들이 사라지는 순간 입을 열었다.

“좀 얼떨떨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 더 얼떨떨한 것은 우리예 요.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아서요. 그래서 혹시 당신이 우 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죠.”

“무슨 소리요?”

“당신, 인도에 왜 오셨나요? 당신과 아하스 페르츠의 출현이 거의 같은 때인데…………. 아무래도 당신, 아하스 페르츠를 아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현암은 내심 깜짝 놀랐다. 이 조그마한 유대인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일까? 현암은 물론 자제심이 강해서 표정으로 드 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자는 무척 많은 것을 아는 것 같구나. 거짓말을 해 봤자 시 간 낭비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모든 사실을 말할 수도 없다.’ 

“당신, 아하스 페르츠를 만났죠? 그렇죠? 저 용화교의 승려들 은 항상 그를 뒤쫓았던 자들이니까요.”

랍비 안나스는 현암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납득이 가다는 것을 나도 알고요. 싸움이 벌어졌던 건 분명해요. 그는 다망가진 비행기를 타고 인도에 왔거든요. 당신들과의 싸움 때문 같은데………….”

“본론만 이야기하시오. 나는 영어에 능통하지 못합니다. 돌려 말하면 잘 알 수 없소.”

현암이 딱딱하게 말하자 랍비 안나스가 빙글거리며 되받았다. 

“좋아요. 본론만 이야기하죠. 당신들,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죠?”

현암은 차마 악마와 거래하는 조건으로 도망쳐 나왔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다보면 백호가 연루될 것이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자 랍비 안나스가 말했다.

“저 용화교의 승려들에게는 그런 재간이 없어요. 그러니 필경 당신이 뭔가 했다는 건데……………. 당신, 혹시 텔레포트나 그와 비 슷한 능력이 있나요?”

현암은 부정하려 했지만, 막상 부정하려다 보니 적절한 핑곗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을 아는 것을 보 면 그들이 비행기 안에서 순식간에 무인도로 옮겨진 것도 알 것 같았다. 그것이 텔레포트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현암이 대 답을 하지 못하자 랍비 안나스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당신을 어쩌려는 건 아니니 염려 말아요. 다만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것뿐이에요. 우리는 지금 위기에 빠져 있거든요.”

“위기?”

“그래요, 위기. 칼키파의 함정에 빠진 것 같아요.”

“무슨 함정이오? 그들을 공격한 건 당신들이 아니오?”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어요. 조금 전 이상한 것을 보지 못했나 요? 지금은 대낮인데, 이 일대는 왜 이리 어두울까요?”

“모르겠소.”

“칼키파가 대주술을 폈어요. 빛도, 소리도 통하지 않는 막을 덮어씌웠다고나 할까요? 이 일대는 완전히 외부와 고립되어 버 렸어요. 몇몇 사람들이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놀라운 일이죠. 뭐, 단순히 어떤 자의 능력으로 이리된 것 같 지는 않아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건 한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술이죠. 필경 대단히 오랫동안 준비를 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모 양이에요. 타보트 때문에 모두 마음이 급해서 말이지요.”

말을 듣고 보니 이들도 타보트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 래서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걸 왜 찾죠?”

랍비 안나스는 현암의 눈을 뻔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지만, 범상치 않은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글쎄요. 당신도 그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요? 비슷한 목적이 겠지요. 아마?”

“어떻게 비슷하다는 겁니까?”

“아하스 페르츠와 관련이 없다고는 못하겠군요. 우리 랍비들 을 거짓을 말하지 않는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계명(십계명) 에 위배되는 것이니 말이에요.”

랍비 안나스의 말에 현암은 기분이 좀 나빠 비아냥거리며 되받았다.

“십계명에는 네 이웃이 가진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 던가요?”

“십계명을 어긴 것은 우리가 아니라 칼키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관중이던 물건을 훔쳤어요.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을 어긴 것이죠.”

“하지만 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지 않소?”

현암이 억지를 부렸지만 랍비 안나스는 화도 내지 않고 웃으 며 말했다.

“타보트는 모세께서 직접 명하여 짠 거예요. 타보트는 모세께 서 직접 기도로 얻으신 것이고, 우리는 모세의 직계 후예들인데 우리가 왜 관계가 없겠어요?”

현암은 기가 막혀 이내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든 유대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나 는 당신들이 이스라엘, 아니 모든 유대인들을 대표한다고는 믿 을 수 없소. 검은 편지를 보내 사람을 암살하는 당신들이 어떻게 모든 유대인의 대표 자격을 지닌단 말이오?”

현암의 말이 신랄해서 랍비 안나스도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모든 유대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현암이 딱 잘라 말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암살하는 데 찬동한다고는 믿을 수 없소.”

허나 그는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은 뭔가 잘못 알고 있어요. 나는 젊었을 때 비르케나우에 있었지요.”

“비르케나우?””

“모르나요? 그럼 아우슈비츠는 아나요?”

“아………… 압니다.”

“비르케나우는 아우슈비츠에서 삼 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던 수용소죠. 규모가 다섯 배는 넘었어요. 아우슈비츠는 일을 할 만 한자들이 있던 곳이고, 비르케나우는 거의 처리될 지경에 처한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죠. 그곳의 출구는……………굴뚝밖에 없었답 니다.”

랍비 안나스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허나 우리를 미워한 건 독일인들이 처음은 아니었지요. 모르는 사람 들은 독일인들만을 생각하지만, 이십 세기 초만 해도 유대인은 어느 나라에서나 이차 대전 때의 독일인이 한 것과 같은 취급을 당했어요. 수용소만 없었을 뿐이죠. 나는 그때 랍비가 아니었어 요. 그땐 너무 어렸죠. 그러나 나는 같은 인간들끼리 왜 이리 서 로 죽고 죽여야 하는지 몹시 혼란스러웠고, 몹시 슬펐답니다. 이 해가 가시겠지요?”

현암은 안나스가 약간 가엾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날카로운 질 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왜 검은 편지 결사를 이끄는 거죠?”

“당신도 그때와 같은 굴뚝의 검은 연기를 보게 된다면 나를 쉽 게 이해할지도 몰라요. 나는 그때 많은 고민을 했죠. 그러다가 마침내 해답을 얻었어요. 당신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왜 죄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현암은 느닷없는 질문에 눈을 조금 치떴을 뿐 대답하지 않았 다. 안나스가 궤변을 늘어놓을 것 같아서였다.

“사람은 소를 죽이고, 닭을 죽이고, 물고기와 새와 들짐승을 죽이지요. 그러나 그건 자신이 살기 위해서지요. 자신이 먹고살 기 위해서는 뭔가를 죽여야 해요.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부분 큰 죄가 되지요. 같은 것들끼리니까 말이에요. 그렇 지 않나요?”

현암의 대답이 없자 안나스가 말했다.

“나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결 심했어요.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시온을 만들자고 말이에요. 진 정한 시온을 사람들만의 시온을……”

그러면서 안나스는 갑자기 무섭게 눈을 빛냈다. 현암이 보기 에 그 눈빛은 결코 정상인의 것 같지 않았다. 현암은 이유도 없 이 혐오감이 치밀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의 시체로 쌓는 시온 말이오?”

그러자 안나스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태껏 사람을 한 명도 죽여 본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 요. 내 손으로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도, 단 한 사람도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어요.”

그 말만은 현암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까 들은 말에 의하면, 이들이 칼키파를 습격한 것이 분명하고 총과 화기를 잔뜩 갖춘 용병들까지 동원했다. 그리고 총성도 수없이 들려왔고 칼키파가 견디다 못해 뭔지 모를 주술까지 덮어씌울 정도로 난전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소!”

“정말입니다. 나는 계명을 어기며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나는 단 한 사람도 해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단 한 사람도 해치지 않 을 거랍니다. 어떤 형제의 피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칼키파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안나스는 놀란 듯,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현암을 바라

보았다.

“아니지요. 적어도 백여 명은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

현암은 안나스가 너무도 태연하게 백여 명이라고 말하자 섬뜩 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치려 하는데, 바로 그때 안나 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은 잘못 이해했군요! 그들을 어찌 사람이 라 할 수 있나요?”

“뭐라고?””

“당신들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어요. 그저 비슷하게 생기고, 비슷하게 움직일 뿐, 당신들은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들만이 사 람이지, 당신들이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요? 하하…………….”

안나스의 웃음은 조금도 거짓으로 꾸민 데가 없어서 더더욱 몸서리쳐졌다. 현암은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독하다! 아니, 완전히 미친놈이로구나! 이자는 철저하게 근 본적으로 선민사상에 젖어서, 유대인 말고는 아예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되었구나!’

안나스는 계속 지껄여댔다.

“사람이라면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겉모습이 비슷하고 말을 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람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다는 거죠? 원숭이도 털을 깎으면 모습이 비슷하고, 개와도 의 사소통이 되지 않나요?”

“당신은 미쳤군!”

현암은 소름이 끼쳐 말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간신히 외쳤다. 그러나 안나스는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하긴, 금방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나도 좀 오래 걸렸어요. 과거 성경 을 보면서 많이 고민한 적이 있지요. 성경은 절대 틀린 데가 없 어요. 그런데 성경에서 신은 너무도 잔혹하셨어요. 모세, 여호수 아부터 이후의 영웅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피를 묻혔어 요. 그것을 신께서는 막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칭찬해 주셨어요. 나는 그것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악행도 이해할 수 없 었어요. 땔감이 되어 비르케나우의 굴뚝으로 솟아 올라가는 형 제들을 보면서, 나는 울기도 했고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 지요. 그런데 그 연기를 보다가 나는 깨달았어요. 당신들은 모두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어요. 모든 것은 하나도 틀린 점이 없어요. 하나도 그릇되지 않 았던 거죠. 당신들도, 우리도 전혀 틀리지 않아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거요? 그건 궤 “변이요!”

“같은 모습에, 같은 지능에, 같은 유전자를 지녀서 같은 사람 이라는 건가요? 아니죠. 사람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이에요. 그 영혼이 다른 자들은 아무리 겉모습이 같고, 말을 하고, 유전 자가 같다고 해도 같은 종이라고 볼 수 없어요.”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소!”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지요.”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광이와 말싸움을 하다니,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시오니즘이란 것을 내세워 다른 모든 사 람을 없앨 작정이오?”

“시오니즘이 왜 문제가 되나요? 그 시오니즘은 원래 가짜였어 요. 당신들이 만들어 낸 가짜였죠. 그런데 오히려, 나에게는 깨 달음을 주었어요. 그 말대로 하는 것이 맞는 거였단 말이죠. 정 말 신의 섭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계는 우리 사람들 이 살라고 신께서 내리신 것이에요. 당신들도 짐승을 몰아내고, 땅을 경작하고, 길을 만들고 집을 지어 지금의 모양이 되었잖아요. 우리도 그러자는 것뿐이에요.

늑대는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 몰아내지 않았던가요? 마찬가 지죠. 우리 말을 듣는 것들은 가축으로 길들이고, 우리에게 위협 이 되는 것들은 사냥해야죠. 그뿐이에요. 다만 당신들은 진짜 사 람만큼 영리하며 수도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검은 편지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뿐이죠.”

현암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현암은 평생 사람을 해치지 않 을 작정이었지만, 지금 이자만큼은 단박에 때려죽이고 싶은 마 음이 들었다. 공력이 있었다면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당신・・・・・・ 당신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안나스의 반응은 너무도 의외였다.

“그건 당연한 당신들의 권리죠. 그런다고 화나거나 복수심이 생기지는 않아요.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모든 개에 대해 복수심 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짐승도 벼랑에 몰리면 저항하는 법인 데, 그 저항을 가지고 화를 낼 생각은 없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 요? 다만 당신들은 무슨 수를 써도 우리를 이기지 못해요. 알겠어요?”

현암은 도대체 이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화 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현암은 너무나 화가 나서 그 특유 의 버릇대로 도리어 음성이 낮아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당신들이 부리는 용병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저런, 용병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주 마음 편해합니 다. 길이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안나스는 천천히 현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 당신, 우리에게 협조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길들이지 않은 짐승은 위험하지요.”

죽일테면죽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현암은 침착해지려고 애 썼다. 이자는 미친 작자다. 이렇게 미친 작자를 상대하려면 일단 은 침착해야 한다고 계속 자신을 타이르고는 간신히 말했다. 

“뭘 협조하라는 거지?”

“이 주술을 깨뜨리는 방법. 최소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 말이에요. 타보트를 훔칠 때 인도인들은 텔레포트 같은 방법을 쓴 것 같은데, 당신은 그런 방법을 아나요?”

“그건 어떻게 알았소?”

현암은 속으로 조금 의아했다.

‘인도인들이 텔레포트 같은 방법으로 타보트를 훔쳐 간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자가 어떻게 알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말할 기회가 없었다. 세 노승이나 백호 씨도 말하지 않 은 것이 분명하고, 마하딥은 아직도 혼수상태다. 그때 그 자리 에 있었던 인부들을 통해서? 아니다. 평범한 인부들이 텔레포 트 같은 것을 알 리 없다. 그렇다면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중…….’

현암은 거기까지 짚어 가다가 안나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누구와 손을 잡았소?”

안나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머리가 좋군요.”

현암은 안나스가 긍정하자 더욱더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당신들이 성당 기사단과 손을 잡았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나스는 분명 철저한 유대 교의 광신자다. 이름조차 예수를 죽인 두 제사장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이단 종파라는 말을 듣기는 하 지만, 가톨릭에 근본을 둔 성당 기사단과 손을 잡을 수 있단 말 인가?

아예 근본이 다른 불교나 도교, 기타의 종교라면 차라리 괜찮 겠지만 유대교와 가톨릭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다. 나아가 회사 나 폭력조직이나 국가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들처럼 신앙에 모태를 둔 광신에 가까운 집단들은 결코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다고 믿어 왔는데………………

현암의 놀라는 안색을 보고 안나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무런 사감이 없어요. 당신이라면, 짐승들이 무엇을 믿 고 떠받든다고, 그 때문에 화를 내겠어요? 오히려 나는 그들이 이런 제의를 해 온 것이 신기할 뿐이에요.”

“제의를 해 오다니?”

“성당 기사단과 우리가 이번 일에서 합작을 하도록 중재한 곳이 있답니다. 당신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곳이라고 입에 오 르내리는 곳이지요.”

안나스의 말을 듣고 현암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자신도 모르 게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