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8화 – 하르마게돈 12 : 아하스 페르츠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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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4권 18화 – 하르마게돈 12 : 아하스 페르츠의 재등장


아하스 페르츠의 재등장

눈으로 보기에는 지척일 것 같던 산에 도달하기까지 몇 시간 이나 걸려, 준후 일행이 산비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어 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로파무드가 급히 일행 을 모아 놓고 말했다.

“아까 보인 것은 태곳적에 쓰였던 아주 대단한 주술이에요. 아 스트라와 주술과 또 여러 가지를 응용한 겁니다.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도대체 뭔지 당신은 아나요?”

바이올렛이 묻자 로파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그건 과거에 침략자들로부터 성이나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술이죠. 그 주술을 쓰면 그 주변을 밀폐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벽을 둘러싼 것처럼요.”

“완전히 밀폐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문제가 크게요? 세 가지만 차단됩 니다. 빛과소리 그리고 생명을 지닌 것이 드나들 수 없게 되죠.” 

“그걸 뚫는 방법은요?”

“그걸 만든 자만이 알아요. 그건 아스트라를 응용한 것인데, 어떤 아스트라를 썼는지 알지 못하면 뚫는 방법도 알 수 없어요.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밖에 없죠.”

“아스트라가 몇 가지나 있는데요?”

바이올렛의 말에 로파무드는 얼굴빛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요. 내가 아는 것은 백분의 일도 안 될 거고요……………”

그 말에 모두들 낙담한 빛을 발하는 순간 로파무드가 애써 기 운을 내려는 듯 밝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대주술에 사용될 만큼 강력한 아스트라는 그리 많지 않아요. 한 오십 종 정도…….”

“대단히 적군요.”

바이올렛이 허무한 표정으로 말하자 로파무드가 이내 되받았다.

“그래도 시도해 보지 않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연희가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을 보면, 분명 안에서는 큰 난리가 났을 거예요. 서둘러 시도해 보도록 하죠. 그리고…………… 혹시…….”

“뭐죠?”

연희는 로파무드의 반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준후를 불렀다. 준후는 초조한 듯 길 뒤쪽을 살펴보고 있다가 연희가 부르는 소 리에 대답했다.

“왜 그러죠?”

연희는 로파무드의 주술과 준후의 주술이 혹시라도 일치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준후를 부른 것이었다. 연희가 도움이 될 수 없겠냐고 물었지만 준후는 고개를 저었다.

“이 주술은 불교보다도 오래된 힌두교의 아스트라라면서요? 제가 아는 것은 힌두교가 불법에 귀의되어 밀법의 형태가 된 이 후의 것들이에요.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한 가닥이라고 할 수 있 겠지만, 너무 많이 달라져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연희는 조금 섭섭했지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준 후를 보니, 준후는 아까부터 이상하게 뒤쪽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연희는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고 로파무드에 게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뭐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도와야죠.”

“일단은 그 막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잘 살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바이올렛이 끼어들었다.

“길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길이 막히면 거기가 막이 쳐진 곳이 아닐까요? 여긴 외진 곳이라 길이 여러 갈래인 것 같지도 않으니…….”

“그렇군요!”

로파무드는 바이올렛의 말에 동의하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 다. 연희는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지만 로파무드는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지요? 빛과 소리와 생명체가 통과 못한다고요. 차 를 타고 가면 차는 막으로 들어가는데, 그 안에 탄 사람은 들어 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좀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차를 버릴 수도 없었다. 연희는 직접 핸들을 잡고 아주 천천히 로파무드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준후가 휘적휘적 앞으로 나서며서 말했다. 물 론 준후는 로파무드와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희에게 대 신 말했지만,

“그것도 일종의 결계 같으니까 알아보는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앞장서죠.”

연희가 그 말을 로파무드에게 전하는 사이 준후는 로파무드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차에 타게 하더니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로파무드와 준후가 내리자 나머지 사람들은 모 두 트럭의 앞자리에 비좁게 포개어 탈 수 있었다.

연희는 슬슬 차를 몰면서 준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겉으 로는 침착한 것 같았지만 준후는 아무래도 마음이 급한 듯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마음이 급하지 않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왜 저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그제야 연희는 차 안에서 준호와 아라를 불러 소곤소곤 준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준호와 아라는 연희를 믿었기에 아무것 도 숨기지 않고 그간에 있었던 기이한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바이올렛과 황달지 교수가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한국어를 거 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연희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준호와 아라 는 의아해했지만 연희는 아이들에게 별말 하지 않고 바이올렛에 게 말했다.

“미스 바이올렛, 뒤에서 누가 우리를 추적하진 않는지 좀 살펴 봐 줄 수 있겠어요?”

“우리를요? 누가 우릴 추적하겠어요?”

“그래도요.”

연희는 마음이 무거웠다. 준후가 한국에서부터 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후가 한빈 거사를 해쳤다고는 연희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이후 준후의 행동은 기이했다. 누명을 벗으려 하 기보다는 반대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심도록 행동한 것 같았다. 도방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한빈 거사 정도의 인물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면 그런 것을 따질 것 같지 않았다. 도방의 인물들은 퇴마사들보 다는 조금 약해도 절대 예사로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듣자 하니 그 수도 굉장히 많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준후가 인 도로 왔다고 해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안 그래도 힘든 일인데, 적을 더 늘리는 행동을 했어.’

연희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준후가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준후가 돌아와 차창을 통해 말했다.

“저 앞인 것 같아요. 진짜 대단한 결계가 쳐져 있네요. 저 결계 를 깨뜨리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어요.”

준후는 확실히 초조해 보였다. 연희가 준후에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로파무드가 인상을 쓰면서 연희에게 다가와 말했다.

“뭔가 이상해요. 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예? 누가…………?”

연희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로파무드가 다시 말했다.

“우리 주변이 아니라 이 결계 주변에 말이에요. 이 결계는 분 명 대단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계를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떨리는 기운이 느껴져요.”

“그러면 우리 말고도 이 안으로 뛰어들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그것도 결계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할 정도의 사람들이니 ……………!”

“대단한 사람들이겠군요.”

연희는 걱정스레 대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로파무드와 연희의 인도어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는 준후는 초조한 안색으로 연 희를 재촉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대요?”

그러자 연희가 준후에게 말했다.

“아직 안 물어봤단다. 잠깐만.”

그러고는 로파무드에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묻자 로파무드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한 번 시도해서 실패하면 힘이 빠지고 다시 준비해야 하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 르겠네요.”

연희가 그 말을 들려주자 준후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시간이 없는데…………….”

그 말을 듣고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에게 물었다.

“왜?”

“아…… 아니. 그냥 걱정이 되어서요.”

준후는 그 말만 하고는 슬쩍 빠져나가 버렸는데, 연희는 아무 래도 준후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연희는 로파무드를 도와야 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 이 꽤 많아 바이올렛이나 준호, 아라는 물론, 뭐가 뭔지도 모르 고 있는 황달지 교수의 힘까지 빌려야 했는데 그 지시를 전부 연 희가 통역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로파무드는 자꾸 한숨을 쉬었다.

“어떤 아스트라로 된 건지 알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일이 쉬울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을 연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 이었다. 그때 무심코 수아를 보다가 연희는 과거 카르나를 만났 을 때를 떠올렸다. 카르나가 박 신부를 공격하려 했는데, 그때 그가 쓴 힘이 아스트라와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때 쓴 주술이 …………… 뭐라더라……………? 아! 맞아. 나가파 사! 나가의 힘을 빌린거라고 했다.’

카르나는 칼키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코 낮지 않은 것 같 으니, 아무래도 이 주술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 연희는 급히 로파무드를 다시 불렀다. 로파드에게 그 말을 해 주자, 로파무드는 무척 좋아하면서 아마도 그것 같다는 말을 했다.

“만약 잘만 된다면 한 번 만에 주술 막에 작은 구멍을 뚫어 통 과할 수 있을 거예요.”

로파무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다른 사람들 역시 반가운 기색을 띠었고, 특히 준후의 얼굴빛이 많이 풀렸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한마디 말이 차의 짐칸에서 들려왔다.

“한 번에 된다면 좋겠군그래. 실패한다면 다 죽여 버릴 테다.” 

느릿느릿하고 힘없는, 그러면서도 위압감이 실린 기이한 남자 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 은 비어 있던 차의 짐칸에 어느 순간 슬쩍 탄 것이 분명했다.

준호와 아라, 바이올렛은 그렇다 치더라도 준후나 로파무드까 지도 몰랐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더욱 더 놀랐다.

‘준후나 로파무드도 사람이니 실수도 있고 경계가 풀렸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수아는 정령들이 보호하는 아이인데 정령들마 저도 몰랐단 말인가?’

연희는 놀라고 무서웠지만 수아가 아직 차 안에 있다는 걸 떠 올렸다. 문득 차창 너머로 보니 수아가 의자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몹시 불편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잠든 것이 아니 라 기절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뭔가 까닭 모를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 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연희였지만 이렇게 무서워 보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냐?”

뭔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준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외치 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데, 차의 뒤 칸에서 누군가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땅에 내려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바이올렛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땅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아니 ・・・・・・ 당신은………..”

바이올렛은 중얼거리다가 공포에 질려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 았다. 재빨리 로파무드가 바이올렛을 부축했고, 준후가 연희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아라와 준호도 준후 뒤에 바싹 달라붙 었다.

그 남자는 차창으로 손을 쏙 집어넣더니 수아의 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자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고 눈 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권태로움이 보였다. 그 표정을 보 자 연희는 뭔가 생각이 났다. 결코 생각해 내고 싶지 않았지만……

연희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 당…… 당신은・・・・・・ 설마…………….”

그러자 남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내 이름은 아하스 페르츠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져 버렸 는데, 다행히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싸움 때문에 아직 불꽃이 꺼 지지 않아 사물을 어렴풋이 식별할 정도는 되었다.

몇 시간이 훨씬 지난 것 같았고 쌍방의 충돌은 더 이상 일어나 지 않았다. 아마도 신중하게 대처하기 위해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 등은 엄청난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엄청난 살상이 벌어질 것 같다는 것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용병들 말고도 많은 자들이 같이 온 것 같았지만, 모두가 칼키파의 주술 막에 갇혀 있는 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공격자들의 수가 많고 세력이 커도 결과적으로는 칼키 파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칼키파는 부타를 사용할 수 있지요. 그러면 싸움이 진행되어 죽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칼키파가 강해지는 셈이 됩니다. 보통 사람이 죽어 부타가 되어도 그렇게 무서운데, 주술사들이 죽어 서 부타가 된다면 당해 낼 자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더욱 승산 이 크다고 보아야겠죠.”

이것은 윌리엄스 신부의 의견이었다. 이반 교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격자들도 섣불리 싸움을 하지 않고 일단은 피하려는 게 분명하오. 결정적인 한 수를 노리든지 아니면 힘을 보존하 려는 의도겠지.”

“그렇다면 왜 칼키파가 공격하지 않을까요? 모두 가둬 두었으 니 역습을 가할 만도 한데.”

“지금 당장 공격하기에 힘이 달리는 지도 모르오. 저쪽도 상당 한 준비를 갖추고 있을 테니까요. 뭐, 칼키파로서는 서두를 것이 없소. 칼키파가 비록 전멸당한다 해도, 이 주술 막을 풀지만 않 으면 이기는 거죠. 열흘이고 이십 일이고 가둬 두게 된다면, 모 두 굶어 죽고 말 테니까요.”

그때 승희가 나섰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죠? 어떻게 빠져나가죠? 아니, 이 싸움을 어떻게 좀 막아 볼 수는 없을까요?”

“글쎄요.”

윌리엄스 신부도 한숨을 쉬었다. 이반 교수는 냉소를 지었다.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일 같소. 솔직히 박 신부님이 정신을 잃으신 게 나는 다행 같소. 뭐, 부상을 입으신 것은 아니니까 말 이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중립이라고 할 수 있소. 하지만 박 신부님이 제 정신이셨다면, 이런 참상이 벌어지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보지 않 으셨을 거요. 어떻게든 주술 막을 뚫으려고 하실 텐데, 그렇게 되면 칼키파의 공격을 받을 것 아니겠소? 그러니 차라리 못보시 는 게 낫지 않나요? 허허.”

이반 교수가 억지로 웃는 소리를 내는데, 갑자기 성난큰곰이 조용하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누가 온다.

이반 교수가 경계하면서 총을 겨누려 하자 성난큰곰이 다시 말했다.

싸우려고 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실 우리는 아까부터 감시받고 있었다.

“우리를? 누가?”

이반 교수가 묻자 성난큰곰이 말했다.

아마도 카르나겠지.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군지 식별할 수 없어서 일행은 긴장했지만 그는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렇게 하고 온 것 인지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터번과 천 조각이나 다를 바 없는 얇은 옷 만 걸친 인도인이었다. 일행에게 다가오자마자 그가 매우 서툰 영어로 말했다.

“카르나님께서 보시잡니다.”

“카르나가……………?”

윌리엄스 신부는 힐끗 박 신부를 내려다보았지만 박 신부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반 교수에 게로 눈길을 돌리자 이반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칼키파와 행동을 같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그들은 공격받고 있으니….”

그 말을 듣고 인도인이 히죽 웃으며 되받았다.

“카르나님께서는 더 늦기 전에 약속을 지키고자 하십니다. 전 안내인입니다.”

그러자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르 나가 아까 한 말을 지키려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역시 타보트 때문에 상당히 마음이 움직였는지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이대로 우리만 고립되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윌리엄스 신부가 잠시 가늠해 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몰려든 사람들도 타보트를 노리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타보트는 일단 우리가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준다고 할 때 받아 야지, 그렇지 않으면…………….”

“타보트로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오. 지금 당장은 저 용병들을 뚫어야 할 텐데……………”

이반 교수도 뭔가 열심히 궁리하는 듯했다. 그는 성난큰곰과 승 희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성난큰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 묵히 있었으며 승희도 뭐라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이반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합시다. 칼키파와 같이 있지 않는다고 공격을 안당할 것 같지도 않고…………….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타보트나 얻도 록 합시다.”

그 말에 윌리엄스 신부가 인도인 안내자에게 물었다. 

“가는 길은 괜찮을까요?”

인도인 안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듯 씩 웃으며 몸을 낮춰 달렸고, 성난큰곰이 박 신부를 어깨에 들쳐 메고 그 뒤 를 따랐다. 그다음으로는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가 따라갔고, 이 반 교수는 벨지움콘바인 총을 들고 뒤를 경계하면서 움직였다. 사방은 이제 완전히 막이 쳐졌는지 밤이 된 것처럼 캄캄했고, 용병들 측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인 안내자는 거의 무너져 버린 건물의 뒤쪽을 교묘하게 돌아 무너진 사원으로 보이는 커다란 폐허에 들어섰다. 폐허 주 변에는 이미 수십 명의 인도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등 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 강렬한 기를 내뿜는 사람들이었다.

여자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다. 팔다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능력을 지니고 있는 요기나 구루 같았다. 그들은 지시를 받은 듯 앞을 막지 않고 사방만 경계하고 있었다.

안내인이 폐허 한가운데에 있는 석상 하나로 다가가 그것을 조심스레 만지자 한쪽 구석의 바닥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안 내인은 그 구멍으로 들어가면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박 신부는 아직 몸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성난큰곰의 힘이 워 낙 센 탓에 그를 메고 내려갈 수 있었다.

폐허가 된 겉모습과 달리 지하실 내부는 매우 넓었고 잘 손질 되어 있었다.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요행히 화를 면한 참배객들과 난민들인 듯했다. 그곳에서 다시 꼬불꼬 불한 길을 어느 정도 지나자 커다란 나무문이 나왔는데, 안내인 은 그 문을 손짓해 보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일행이 상당히 육중한 그 문을 밀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커 다란방이 나왔고, 카르나가 그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명의 시동을 거느린 고반다가 격식을 차리지 않은 자세로 조는 듯이 앉아 있었다.

어둠침침한 방은 촛불조차 밝히지 않았다. 오로지 고반다의 몸에서 나오는 빛만이 주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위험한 일에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왜 불렀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타보트를 드리려고 말이지요. 조금 일찍 드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카르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표정에는 피곤과 우려 가 함께 어려 있었다.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가 서로를 마주보다가 이반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약속을 잘 지키시는구려.”

카르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건 고반다 님의 명이셨으니까 반드시 지켜야만 하죠.”

그러자 이반 교수가 카르나에게 물었다.

“타보트를 만진 자는 죽는다던데?”

“그런 전설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좀 볼 수는 없겠소?”

“좋습니다.”

카르나가 손뼉을 치자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무척 커다란 오 각형의 궤짝을 메고 들어왔다. 그 궤짝은 기이한 문양이 가득한 흑단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는데, 크기가 상당했다.

“이것이 타보트요?”

“정확하게는 타보트를 넣은 상자입니다. 원래의 타보트 상자 는 이미 낡아서 부서진 지 오래죠. 그래서 타보트의 힘에 의해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주술적인 봉인을 한 상자입니다.”

“정말 이것을 주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성당 기사단에 들어가 이것을 얻어 온 것으로 아오. 여러 명의 희생도 있었고. 그런데 이 것을 그냥 우리에게 내주겠다는 거요?”

그 말에 카르나가 다시 웃어 보였다.

“당신들이기에 드릴 수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아하스 페르츠를 맡으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구려.” 

이반 교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으나 카르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꼭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곁에 있던 승희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안에 타보트가 정말 들어 있다고 누가 장담하죠?”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그럼 확인해 보시오.”

“타보트를 만지면, 아니 보기만 해도 누구든 죽는다고 했어요. 죽지 않는 자인 아하스 페르츠조차 그것을 겁내고 있다 하고요. 그렇다면 아무도 이 상자를 열고 진짜 타보트가 들어 있는지 확 인할 수 없을 것 아니겠어요? 그걸 노리고 비워 두었거나 이상한 것을 넣어 둔 것은 아닌가요?”

승희의 말에 비위가 어지간한 카르나도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나는 순전히 당신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거요.”

승희는 훗 하고 코웃음을 치며 되받았다.

“정말 호의일까요?”

“당신, 계속 그렇게 말한다면.

그래도 승희는 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들은 물론 능력이 대단해요. 나도 당신들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알 수가 없죠. 하지만 이 지하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가 당신 같은 능력자는 아니잖아요?”

카르나는 무슨 말인지 금방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 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는 승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 다. 승희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투시력을 써서 지나가는 사람 들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그 내막을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조금씩은 아는 게 있더군요. 지금 당 신들은 숱한 적을 상대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는 것도 맞지 않나요?”

카르나의 인상이 조금씩 구겨졌다. 그러나 그는 곧 한숨을 쉬 며 얼굴을 다시 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우리에게 무슨 속셈이 있다는 거요?” 

“지금 타보트를 넘겨줌으로써 우리에게 추격을 뒤집어씌우자 는 속셈이 아니고 뭐겠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겨우 한두 군데서 당신들을 노리고 들어온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중 한두 곳은 기 독교도들이니 그들의 눈길이 타보트에 쏠려 우리를 뒤쫓게 되면 당신들은 큰 짐 하나를 덜게 되는 셈 아닌가요?”

이반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은 성난큰곰의 힘으로 칼키파가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심하시구려. 생각해 보시오. 고반다 님이 타보트를 당 신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건 우리가 공격을 받는지 여부조 차 모를 때의 일이잖소?”

“당신들의 고반다 님은 신통력이 대단하시니 미리 그런 사실 을 느끼셨을 수도 있죠. 최소한 그분이 그런 마음이 없었다 해도 당신이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않고 넘어갈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 말에 카르나가 발끈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좋소! 좋아! 아주 대단하시군. 그럼 관두시오. 우리도 애써 얻은 귀중한 물건을 드리는 것인데, 이런 소리를 들어가면서까 지 드릴 필요는 없겠군. 그러면 가져가지 마시오. 그렇게 훤하다 면 안 가져가면 될 것 아니오?”

그러자 승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화내실 것은 없잖아요? 좋아요. 뭐, 호의를 무시 하진 않기로 하죠. 우리가 가져가 주기로 하죠. 다른 분들의 의 견은 어떤가요?”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뭔가 수가 있을 것이니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카르나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이 물건이 그렇게도 가치가 없는 것이었나요? 가져가 준다니?”

“실언했군요. 좋아요. 그럼 이걸 가져가고, 적어도 한 곳 이상 의 이목을 끌어 주기로 하죠. 그럼 됐나요? 피차간에 입에 발린 말은 하지 말기로 해요. 까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내 성 격에도 맞네요.”

그 말에 카르나가 곱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이걸 드리지 않는다면 어쩌겠소? 당신들은 지금 우리 파의 성지 한가운데에 와 있소.”

“어머?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고도 우리와 싸울 여력이 있 나 보군요. 지금 신부님은 주무시지만, 뭐 깨울 필요까지도 없을 거예요. 나는 나이도 어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약해 빠 진 여자지만, 그래도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목숨 값은 해야겠 죠”

카르나가 비웃듯 되물었다.

“당신의 투시력은 대단하지만, 싸울 줄도 안단 말이오?”

승희는 좀 켕기는 바가 있었지만 기가 꺾이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 성당 기사단의 키건이 누구에게 눈이 멀고, 갑옷을 빼앗겼는지 아시나요? 저게 바로 그 갑옷이에요.”

카르나의 안색이 변했다. 사실 키건이라면 최고의 능력자는 아 니었지만, 나이트 템플러로서 이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자였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어떤 여자에게 눈이 멀어 무능력자가 되고 갑옷인 나이트 아머를 빼앗긴 일을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계집애도 투시력 말고 다른 재주가 있단 말인가? 그럼 예기치 못한 변수가 하나 더 느는구나. 비록 최강이라는 박 신부가 의식을 잃고 있지만 아무도 그를 건드린 적이 없다. 계략 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 있는 성공회 신부나 인디언은 모두 상당한 자들이라 상대하기 쉽지 않고, 저 흡혈귀 사냥꾼 높은 특 별한 능력은 없지만 굉장한 무기들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고 반다 님이 여기 계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 요는 없지.’

카르나는 속으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승희는 카르나의 안색을 보고 그의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때를 놓치 지 않고 승희가 다그치듯 말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 같군요. 굳이 여기서 싸움질을 벌이고 싶지는 않겠죠?”

그러자 카르나는 탄식하듯 칼키파의 기도문을 읊으며 말했다.

“좋소. 좋아. 내가 졌소. 당신들은 타보트를 가지고 나가시오. 그러나 최소한 한 군데의 이목을 끌어 주면 고맙겠소. 이 약속은 지켜 주기 바라오.”

“지금 이걸 들고 나가면 주목을 끌지 않으려야 끌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 염려 마세요. 그런데 내가 물어볼 것이 좀 있어요.” 

“무엇이오?”

“별건 아니지만, 그걸 알지 못하고 우리도 이걸 감히 가지고 갈 수 없군요. 뭐, 힘든 질문은 아니에요. 세 번만 대답해 주세요.” 

“일단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쳐들어온 건가요? 그리고 이유는 뭐죠?”

“말해야 하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다면 우리도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요?”

카르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좋소, 좋아. 말씀드리지.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네 곳의 기이한 단체들이 우리를 습격했소. 당신들이 본 용병을 이끄는 자들이 하나 있고………………”

“그들이 누구죠?”

“아는지 모르겠군. 그들은 검은 편지 결사라고 하는 조직이오.” 

승희는 백호가 습격을 당했던 일에 대해 들었고 지난번 아녜 스 수녀와의 첫 대면 때도 그들 하수인들의 습격을 받은 터라 그 말을 듣고는 아하고 탄성을 냈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요. 좋은 자들 같지는 않더군요.”

“그들은 지독한 유대인들이오. 세상을 뒤집으려고 하는 자들이지.”

“용병들을 그렇게 조직화시켜서 오는 것만 봐도 알겠어요.” 

그 말에 카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들은 보통 용병들이나 암살자들을 쓰지만, 그것만이 아니오. 적어도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아주 강력한 능 력자들이오. 세 명의 랍비가 그들을 이끈다고 들었는데, 그들과 마주쳐 살아남은 자는 지금껏 없었소. 이 점은 알아 두어야 할 거요.”

그 말은 승희뿐 아니라 윌리엄스 신부나 이반 교수로서도 처 음 듣는 이야기였다.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리고 또 어디가 있죠?”

“당신들도 구면인 성당 기사단이 있소. 아마도 그 친구들은 이 타보트를 되찾으러 온 걸 테지. 뭐, 이 판국이 되었으니 숨기 지는 않겠소. 아마도 이걸 가지고 나가면 그들이 따라붙을 거요. 하지만 가장 어리고 약한 아가씨가 그쪽의 유명한 기사인 키건 을 묵사발로 만들 정도이니, 걱정할 건 없겠지? 그리고 우리는 짐을 덜 수 있을 테고 말이오.”

그 말을 들었을 때,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는 각각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눈을 크게 떴다. 카르나도 그런 기색을 느낀 듯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르나는 속으로 나이 먹은 영감들이 줏대 없이 젊은 여자한 테 끌려 다닌다고 욕을 했다. 카르나는 타보트를 훔치러 간 칼키 파의 고수들이 전멸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멸했기 때 문에 연락도 없는 것이지만, 원래 그들은 성당 기사단의 추적을 피해 상당한 시간을 두고 빠져나올 계획이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타보트를 훔쳐 내고 동굴을 모조리 무너뜨리기까지 했는 데 성당 기사단에서 어떻게 이리도 빨리 알고 쳐들어온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당연히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의 동료인 현암이 그것을 거의 떠맡아 해결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 었다.

승희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카르나에게 물었다. 또 다른 자들이 있나요?”

“성당 기사단과 같은 신을 섬기는 자들이 또 있지. 항상 으르 렁거리다가 놀랍게도 무슨 협상을 한 것인지 그들도 모조리 몰려왔소.”

그러자 승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 이단 심판소?”

“그렇소. 그들과는 여러 번 마주쳤을 테니 잘 아시겠지. 그들 도 타보트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뭐, 당신들은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잖소? 세븐 가디언 중 최강이라는 아녜스 수녀도 당신 들 손에 걸리자 간단하게 목이 날아갈 뻔 했는데……..”

승희는 대답하지 않고 카르나에게 다시 물었다.

“또・・・・・・ 있나요?”

카르나는 승희의 눈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더 있는 것 같소. 그러나 이 이상은 나도 알지 못하는 바요.”

“알았어요. 그쯤 해두죠. 그럼 두 번째 질문이에요.”

“참 젊은 아가씨가 따지는 것도 많으시구려. 그런데 신중한 것 도 좋지만 너무 뜸들이지 말고 빨리빨리 질문해 주시기 바라오.” 

카르나는 조급해하는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승희는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궁리해서 하는 듯, 말과 말 사이에 생각을 상당히 오래하는 것 같았다.

“과찬의 말씀.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를 나가게 해 준다고 했는 데, 정말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것이오.”

“여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들은 뭔가 수작을 부렸잖아 요. 이 일대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죠? 이 일대는 당신들 측에서 부린 주술로 완전히 봉쇄된 게 아니던가요?”

순간 카르나는 안색이 조금 변하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승희 가 다그치듯 말했다.

“우리가 미끼가 되는 것까지는 좋지만,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은 참기 어렵군요. 우리가 나가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부딪히다가 양쪽이 다 쓰러진다면 당신들은 손 안대고 코 푸는 게 될 테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군요.”

얼굴 두꺼운 카르나도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찾지 못해 전전 긍긍했다. 그는 방금 승희에게 정곡을 찔린 것이다.

승희는 카르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떻게 여기서 나갈 수 있죠? 당신들의 주술 막을 깨뜨리는 방법을 알려 줘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카르나가 반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주술 막은 우리의 마지막 수단이오. 깨뜨릴 수 없소. 다만 거두어들일 수 있을 뿐이오. 하지만 지금 이것을 거두어들인다 면 우리는 전멸하고 말 거요.”

“무슨 소리죠? 이것이 없다고 해도 이 안의 능력자들만 해도 부지기수인데.”

“능력자들이 있지만 폭격만큼 무섭지는 않소.”

“폭격?”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카르나가 승희를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이 일을 주도한 것이 검은 편지 결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들은 용병들과 테러리스트들을 거느리고 있소. 그리고 그들의 힘과 능력이라면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거요. 아, 솔직히 말씀드리지. 미사일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오.”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이오. 제기랄! 소련이 망하면서 무기가 너무 많 이 흩어졌소. 무기상들도 돈만 받으면 어떤 무기든 다 팔고 말이 오. 나는 그들이 전투기와 잠수함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 소. 화학 무기나 어쩌면 핵무기도 가지고 있을 거요. 우리는 총 한자루 없지만 저 용병들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소. 그렇지만 머 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는 건 바라지 않는단 말이오.”

“어째서………… 어째서 검은 편지 결사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는 거죠?”

“검은 편지 결사는 세상을 뒤엎자는 조직이오. 그 근간에는 시 오니즘이 있고 말이오.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망하게 하려는 조직이 그런 무장도 갖추지 않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성 당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하다못해 이단 심판소도 마음만 먹 으면 몇 대의 전투기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을 거요. 주술을 쓰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울지도 모르지.”

승희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그러자 카르나는 얼굴빛을 조금 부드럽게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겠소. 그렇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당신들도 마찬 가지일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들의 주술 막의 본질은 무엇이죠?”

“이것은 주술로만 된 것이 아니오. 중국에서 말하는 진법에다 주술력, 치밀한 장치 등이 모두 조합된 결과요. 우리는 몇 달 전 부터 이것을 준비하고, 설치해 왔소. 이것은 아스트라를 이용한 것인데, 내가 사용하는 나가파사의 힘을 극도로 끌어 올린 것이 오.”

카르나가 뭐라고 좀 더 설명했지만, 인도 고유의 주술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승희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르나는 그런 승희의 얼굴을 보며 눈을 빛내더니 말했다.

“이 진은 모든 소리와 빛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차단하오. 그것만 하더라도 일단 우리는 살 수 있는 셈이지.”

“그럼 폭격을 막을 수는 없나요?”

“폭탄이 떨어지고,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주술 은 없소. 그건 주술이 아니라 마술일 거요. 다만 이렇게 빛과 소 리와 전파가 차단되면 그들도 함부로 아무 데나 대고 폭탄을 갈 길 수는 없을 테니 우리는 살아남는 셈이지.”

“그런 효과뿐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물론이오. 안에 갇힌 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살아 있는 것이라면 벽에 부딪힌 것처럼 되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물건은 밖으로 내보낼 수 있지만 생명이 붙은 것은 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갇힌 셈이군요. 나가려면 목숨을 떼어 놓으 라는 건가요?”

“물론 우리들은 나갈 수 있소. 하도 겹겹이 포위당해서 그게 쉬울지는 의문이오만.”

“어떻게 하면 이걸 뚫고 나갈 수 있죠?”

“우리가 직접 문장을 몸에 그려 줘야만 나갈 수 있소. 나가파 사는 뱀의 힘이니, 그와 극성인 가루다(Garuda)*의 인을 침으로 써 출입이 가능하오.”

카르나는 쓰러져 있는 박 신부를 보면서 물었다.

“그는 지금 어떻소?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데?”

“걱정할 것 없어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지만 다친 곳은 없으니까요.”

그 말에 카르나가 빙긋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 힌두교와 불교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새. 대붕(鵬), 가루라, 어떨 때 는 가릉빈가 등과도 동일시되는 거대한 신조(神鳥)다. 힌두교의 전설에서는 뱀 (나가)을 퇴치하는 신통력을 지닌 인면조(人面鳥)로 묘사되며, 비슈누 신을 태 우고 날아다닌다는 새다. 이후 가루다는 불교에서 팔부중(八部)의 한 위치를 차지한다. 팔부중의 가루다는 용을 잡아먹고 살며, 하늘 끝까지 닿을 만한 날개 와 거대한 힘을 지닌 새로 묘사되어 있다.


“박 신부가 제정신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쉽게 당신들을 내보 내려 하지는 않았을 거요.”

카르나가 손뼉을 치자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뭔가 담긴 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다섯 사람의 옷자락 귀퉁이에 조그맣게 뭔 가를 그려 넣고는 눈을 감더니 그 옷자락을 잡고 중얼중얼 주문 을 외웠다.

그 일이 끝나자 승희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세 번째 질문인데, 이 타보트는 진짜인가요?” 

카르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직도 가짜라고 여기시오? 적들이 가짜를 따라갈 정도로 멍청하다고 여기시오?”

승희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았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진짜요. 맹세하기를 원한다면 고반다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그러자 승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뒤 윌리엄스 신부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이것이 진짜라고 어떻게 장담하시오?”

“가짜라면, 성당 기사단이 이토록 난리를 피웠겠소?”

“단지 그 사실만 가지고 진짜라고 볼 수는 없잖소?”

“왜 자꾸 억지를 부리는지………….”

카르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때마침 저만치 앉아 있던 고반 다가 뭔가를 급히 칠판에 쓱쓱 쓰더니 옆에 있는 시동에게 보여 주었다. 시동이 쪼르르 달려와 다짜고짜 카르나의 귀를 잡고 뭐 라고 말했다. 건방진 태도였지만 카르나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 고 순순히 귀를 시동의 입에 갖다 대었다.

시동이 뭐라고 말하는지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었지만 카르 나는 대번에 얼굴빛이 변했다. 그리고 승희도 얼굴빛이 조금 변 하더니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저런! 고반다가 알아챘어요.”

그러자 성난큰곰의 등에 떠메어져 있던 박 신부가 천천히 고 개를 들더니 훌쩍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섰다. 사실 박 신부는 아까 안내인이 도착할 무렵 정신을 차렸지만 카르나를 방심하게 만들려고 여전히 정신을 잃은 척했던 것이다.

박 신부는 예전부터 그와 친한 사람들과 마음속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비록 성난큰곰처럼 자유자재로 이야기 할 수는 없었지만 박 신부의 능력은 성난큰곰의 텔레파시 같은 것과 달라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전음술이나 텔레파시 같은 능 력은 물론 그 내용을 엿들을 수는 없지만 능력자라면 그런 행위 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의 마음의 대화는 남이 눈치채기 훨씬 어려웠 다. 그래서 카르나 같은 능력자도 박 신부가 승희를 시켜 이야기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반다가 그런 사실을 알아내고 말았으니 승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역시 속셈이 있어서…..”

“일부러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오. 다만 사람을 해쳐서는 안되오.”

박신부는 담담히 말했다. 그때 갑자기 고반다가 쾅 하는 소리 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두 명의 시동이 기겁하면서 고반다를 보 살폈고, 카르나는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윌리엄스 신부, 이반 교수 등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승희도 박 신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말 을 하기는 했지만, 실상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대뜸 박 신부가 급히 말했다.

“모두 나갑시다. 옷자락을 잘 간수하시오.”

“예?”

승희는 박 신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이내 박 신부의 말이 아까 그려 놓은 도형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 았다.

“못 가오!”

카르나가 소리를 지르면서 왈칵 양손을 떨쳤다. 순간 양손의 소매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것이 일어나 날카롭게 네 사람 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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