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5화 – 용(龍)과 봉(鳳) 5 : 해명
해명
목숨을 걸고 목표로 삼았던 점토판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가 루가 되어 버리자 모든 사람들의 눈이 등잔만큼이나 커졌다. 사 람들은 놀라움에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윽고 박 신부를 향해 욕 을 하거나 혹은 박 신부를 죽여 버리겠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외쳤다.
“아아…………. 우리 모두는 속고 있었소. 이건 엄청난 흉계였소.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은 수백 개나 있었소!”
그 말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박 신부에게로 일제히 눈을 돌 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박 신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점토판은 말세에 태어나 세상을 도탄에 빠뜨릴 사람에 대 한 기록이오. 그렇지 않소? 그러나 그 사람이 어디서, 누구에게 서 태어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이 점토판이 귀중한 이유 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예언이 적혀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 습니까?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당신들은 거의 전부 이 점토판을 한 번씩 소유했거나 소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토판은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니 일곱 조각을 넘을 수 없소. 그중 나는 세 개를 이 자리에서 파괴했으며, 최소한 한 개의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소.
그렇다면 남은 조각은 많아야 세 개를 넘을 수 없소. 그런데 여기 모인 분들은 최소한 열 군데 이상의 다른 지파에서 오신 분 들 같은데………… 각각 한 개씩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열 개 가 넘는 셈 아니겠소?”
“우리가 가진 것이 가짜라면, 당신이 가진 것도 가짜아니겠소?”
누군가가 반박하자 박 신부가 확신하듯 되받았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방금 나의 동료와 천행으로 통신이 되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어느 장소에서 수백 개의 위조된 점 토판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 말에 따라, 지금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거나 본 바 있는 점토판들을 분명히 가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짜라고 해도, 골동품적인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오. 우리는 거기 적힌 내용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도 점토판을 소유했고, 점토판에 관한 한상당히 인연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점토판을 얻을 수 있었으며, 아주 유능한 번역가가 두 명씩이나 도와주었으니 까요. 더군다나 방금에 이르러서야 동료와 통신이 되었기 때문 에, 바로 조금 전에 이르러서야 내용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그 내용에 대해 알 수 없었습니다. 그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점토판에 상당한 관심 을 가지신 것을 보니, 일곱 개의 점토판을 전부 얻은 분은 없다 고 봐도 좋겠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점토판이 왜 중요한지, 또 그 안에 말세에 탄생할 사람의 비밀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을 어떻게 안 것입니까?”
그 말은 확실히 의외였으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승 희는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신부님은 아침부터 저 간판에 숨었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밖에 나온 적이 없다. 세크메트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 현암 군과 통신을 할 수 있었을 테고 저쪽의 상황을 훤히 알 수 있었을 테 지. 그런데 방금 전에 번역을 했다니, 신부님이 언제 저기에서 나갔다가 다시 오신 것일까? 정말로 그것만은 이해가 가지 않는 구나……………”
그러나 승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신 부는 계속 말했다.
“이건 분명히 음모입니다. 더구나 우리와 같이 있는 어느 중국 인 학자는 부서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점토판 해독 작업을 도 와주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가짜고, 모조품이었겠죠. 하 지만 누군가가 원형을 복원한 점토판을 소유했고, 점토판의 복 사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슨 목적 말이오?”
“점토판을 복사한 자는 모두가 잘못된 정보를 얻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돌고 있는 모든 점토판에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가 나름대로는 이유를 가지고 말세에 태어나 말세를 이끈다는 자………… 저는 징 벌자라고 합니다만, 아무튼 그 사람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 합 니다.
그리고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희생도 마다하 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을 엉뚱한 곳으로 보낼 수 있다면 그자의 일은 훨씬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그자가 징벌자를 없애려 하든, 이용하려 하든 말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다. 박 신 부의 말은 하나도 그른 것이 없었다. 다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은 그 내용이 너무나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 다른 파 사람 들이 있을 때에는 절대 입에 그 내용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별안간 윌리엄스 신부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여자 가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리더니 박 신부 앞에 내려섰다. 저지하 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을뿐더러 그 여자는 자신의 몸 뒤에 바람 을 일으켜 그 힘으로 단숨에 날아간 것이기 때문에 이반 교수나 윌리엄스 신부 등은 바람에 휘말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아까의 잘 보이지 않는 오라를 암암리에 끌어올리 면서도 태연자약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도 이 일에 관련이 있나요?”
“말할 수 없다면요?”
“당신은 모든 주술사들을 동시에 파멸시키려 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를 이용하려 했소. 그렇지요?”
그 말에 여자는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당신들이 여기 모인 떨거지들 중에선 가장 강하니까.”
“남의 손을 빌려서 서로 싸워 죽을 만한 미끼를 던져 주고, 나중에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건가요?”
그러자 여자는 박 신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성직자와 싸우지 않아요. 그 다짐을 깨게 하지 말아 줘요. 안 그래도 떨거지들밖에 오지 않아 실망하던 참인데……………..”
“그럼 누가 왔어야 만족했겠소? 아하스 페르츠요, 아니면 고 반다? 마녀 협회의 검은 바이올렛?”
박신부가 날카롭게 쏘아 대자 여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리고 다른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세 명은 현재 세상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 검은 바이 올렛은 박 신부가 한 번 겨뤄 본 적이 있었으나 강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세 사람의 이름은 다른 능력자들을 놀라게 하 기에 충분했다.
“그 셋이 왔다면 나는 기뻤을 거예요. 그중에 한 명이라도…………….”
여자가 말끝을 흐리자 박 신부가 얼른 되받았다.
“나는 바이올렛과 겨뤄 본 적이 있었소.”
그러자 여자가 깔깔 웃었다.
“당신이? 말도 안 돼! 당신이 겨룬 것은 바이올렛이 아니라 그녀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자기 분수를 알라고요!”
허나 박 신부는 자랑하려고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박신 부에게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박 신부는 여 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과 싸울 생각이오?”
“불행히도.”
“이길 수 있으리라 보오?”
“한 명 한 명씩 싸운다면 물론 이길 수 없겠죠. 하지만 나는 브라흐마스트라 같은 잡수를 쓰지 않더라도 일시에 이들을 모두 없앨 자신이 있어요.”
득의만면한 여자를 노려보며 박 신부가 힐난했다.
“폭발물을 이용해서 말이오?”
“아니, 그걸……!”
“그게 폭발할 것 같소?”
비로소 여자의 얼굴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 순간 여자의 빈틈을 노리고 누군가가 여자에게 기습을 가하 려 했다. 그러나 그자는 여자에게 미처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 고 돌연 몸에 불이 붙더니 미친 듯이 발광하다 즉사해 버렸다. 놀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그 시체는 새카맣게 타서 완 전히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렇다면 당신은……………”
능력자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여자는 그 즉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입 닥쳐! 이교도!”
그 순간, 그 사람의 몸에도 삽시간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러 나 그 사람은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를 했는지 한빙주술(呪術)같은 것으로 몸을 보호하려 했다. 그 때문에 그의 몸은 불이 타올랐어도 금방 타들어 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여자가 한 줄기의 냉기를 그 자리에 휘몰아치게 했 다. 그 남자는 방금 몸을 차게 하는 주술을 썼던 터라 몸에 붙은 열기가 냉기로 바뀌자 어찌할 겨를도 없이 온몸이 꽁꽁 얼어붙 었다가와지직 하고 갈라져 버렸다.
여자는 맹렬하게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해 다시 부근에 늘어 선 사람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려고 했다.
그것을 본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 바이올렛 등은 어제 그 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확실히 이 여자는 퇴마사 일행의 능력을 보고, 그들을 끌어들이면 자기 손을 더럽 히지 않고 많은 자들과 싸움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아 전력을 다 하지 않은 것이지, 결코 힘이 모자랐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박 신부가 오라를 뻗쳐 그녀의 몸을 에워싸려 하자 그 여 자는 대경실색하면서 훌쩍 몸을 날렸다.
“당신을……………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어!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이지 않는다니 고맙군. 성직자는 해치지 않는다고 했소?”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눈을 빼거나 혀를 뽑을 수는 있죠.”
그 말에 박 신부는 씁쓸하게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나는 성직자가 아니오. 파문당한 몸이니, 보통 사람보다 더 천국에서 먼 몸이겠지요. 그러니 맞서려면 나에게 맞서시오.”
여자가 크게 웃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당신은 어제 내 머리칼을 보았지? 내 머리 를 본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성직자라서 죽일 수가 없었어. 이 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겠군.”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신부가 맞받았다.
“나는 알고 있소. 당신은 검은 머리라는 것을………….”
그 말을 듣자 여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여태까지 어떤 일을 당해도 여유만만한 표정을 잃지 않던 여자의 표정은 이제 실로 놀랄 만큼 험악해져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운이었다. 그녀가 뿜어낸 기운에는 바람의 기운과 냉기와 불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상반된 원소의 기운을 섞어 사용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 이었다. 그 위력은 어제 수아를 지키는 정령들과 싸울 때보다 두 배는 더 강렬한 것 같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오라 막을 부풀려서 물러서지 않고 그 기운 에 맞섰다. 박 신부의 안색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침 중했다. 오라 막의 색은 훨씬 연했지만, 그 기세는 엄청나 여자 가 뿜어낸 지독한 원소력을 버텨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수많 은 능력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근처로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짜 성직자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정말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보이나요?”
순간 여자의 기세가 무섭게 올라가자 박 신부는 잠시 몸을 휘 청거렸지만 그래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방 어만 하는 박신부가 여자를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무섭 게 달려와 박 신부의 등 쪽을 막아섰다. 너무도 빠른 동작이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승희가 외쳤다.
“준후야!”
준후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몰랐지만 실로 적 절한 순간에 준후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승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준후가 온 것이 반가워 앞으로 뛰 어나가려 했으나 성난큰곰이 얼른 승희를 막았다.
위험하다. 우리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다………………
여자가 더더욱 기세를 올리자 미친 듯한 불길과 눈보라와 얼 음과 바람이 휘몰아쳐 여자와 박 신부의 주변은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준후가 가세한 이상, 그 지독한 여 자도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원래가 오라를 장기로 하느니만큼 방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공격할 만한 수단이 부족했다. 그래서 여자 는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어 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준후가 끼어들자 판도는 즉각 바뀌었다.
준후는 힐기보법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여 자의 주변을 돌면서 오행에 십이지신술까지 섞어서 여자에게 퍼부어댔고, 여자는 절반 이상의 힘을 방어하는 데 사용해야만 했다.
박신부는 오라 막을 늘려 여자의 전신을 감싸려고 했다. 거기 에 둘러싸였다가는 거의 무력화된다는 것을 아는 여자는 곧바로 몸을 날려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준후가 십이지신술 의 최강 기술인 인(寅)과 진번(辰幡)을 양손으로 여자에게 쏘아댔다.
여자는 막 몸을 피하려는 찰나 공격을 받자 놀랍게도 허공에 서 몸을 빙그르르 돌려 준후의 공격을 피했다. 준후는 전광석화 처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힐기보법으로 여자에게 접근해 수 형도의 수법으로 여자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여자라면 누구든 얼굴을 중요하게 여기는 법이라 여자도 깜짝 놀라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다음 순간, 준후 는 어느새 꺼냈는지 벽조선을 펼쳐 들어 여자의 목에 갖다 댔다. 여자는 흠칫하며 즉시 원소의 기운을 거두었고, 다음 순간 여자의 몸이 땅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사실 준후가 여자를 네 번 공격한 것은 여자가 허공에 몸을 날 렸다가 다시 떨어지기 직전,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자는 그 상황에서도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이 준후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준후는 섬뜩할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준후는 영어를 거의 못해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여자가 알 아들을 리가 없었다. 여자는 준후가 자신을 죽이기 전 놀리려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일대일로 싸운다면 나는 누구도 겁내지 않아. 둘이서 여자하 나를 공격하고서는…………… 창피하지도 않나?”
준후 또한 당연히 여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박 신부가 그 말을 듣고 대신 말했다.
“우리는 분명 당신에게 점토판을 주었소. 그러니 당신은 아이들을 풀어 줘야만 하오.”
박신부의 말에 여자는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나는 아이들을 죽이지는 않아요…… 지금쯤…… 아이들은 이미 풀려났을 겁니다.”
“뭐라고?”
박신부가 놀라자 여자가 담담히 덧붙였다.
“나는 아이들을 언 끈으로 묶어 이 근방에 두었어요. 지금쯤이면 얼었던 것이 녹아 이리로 올 겁니다…………..”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준후가 기이하게도 냉랭한 표정으로 박 신부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죠?”
“아이들은 이미 풀어 주었다는구나. 그러니 준후야, 이 여자를 놓아주렴.”
그러나 가차 없이 준후는 여자를 향해 무섭게 벽조선을 휘둘 렀다. 그 순간 박 신부는 너무도 놀라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승희가 깜짝 놀라면서 염력을 발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 정도의 힘은 준후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 을 것이지만, 준후는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힘이 승희의 것임을 느끼고는 한숨을 푹 쉬며 손에서 힘을 뺐다. 덕분에 벽조선은 여 자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대신 어깨에 깊숙한 상처를 내면서 피 를 뿌렸다. 여자는 그만 극심한 고통에 기절하고 말았다.
대경실색한 박 신부는 급히 호통을 치면서 준후의 손에서 벽 조선을 빼앗으려 했지만, 준후는 의외로 박 신부의 손이 닿는데 도 저항하면서 박 신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준후야……. 준후, 너・・・・・・ 도대체…….”
준후는 차가운 눈빛을 박 신부에게 보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이 여자를 그냥 두면 안 돼요. 신부님.”
“너 ・・・・・・ 정말 사람을 해칠 수 있단 말이냐?”
“이 여자는 적이에요. 이제 우리는 적을 동정하고 교화시킬 시 간이 없어요. 이런 강적은 지금 없애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면서 준후는 다시 벽조선을 휘둘러 여자의 목을 대번에 잘라 버리려고 했다. 박 신부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놀랐다. 사 람에게 주술을 사용하지 않았던 준후가 어떻게 눈을 뻔히 뜨고 사람의 목을 잘라 낼 정도로 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박 신부는 오라 막을 펼쳐서 준후의 팔을 밀어냈 다. 그러자 준후는 펄쩍 뛰어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나와 싸우실 건가요, 신부님?”
“준후야………. 너………… 너는 대체……….”
“나를 공격하셨으니 나를 죽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나도 신부님을 죽일 수 있겠죠?”
박 신부에게 팽팽하게 대드는 준후를 보면서 승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빽 질렀다.
“장준후! 너 이 자식!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야!”
승희는 뛰어들어 준후의 뺨이라도 한 방 갈길 기세였지만 다 른 사람들의 만류로 간신히 진정했다.
느닷없이 준후는 냉랭한 표정을 버리고, 벽조선을 툭 떨어뜨리더니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신부님…………. 난・・・・・・ 난 뭐죠? 왜…………… 왜…………… 내가 이러는거죠?”
“준후야! 왜 그러니?”
“신부님…………. 언제까지………… 언제까지 남을 위해 이래야………… 하는 거죠? 신부님 자신이 죽어도………… 내가 맞아 죽어도…………… 신부님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으실 거죠・・・・・・? 그렇죠…..?”
박신부는 얼결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준 후의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준후 나름대로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박 신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준후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준 후는 잠시 박 신부의 품에 안기는 듯하더니, 이내 뒤로 한 발 물 러서서 박 신부를 피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세요!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누구를 죽이건 말건 간섭하지 말라고요!”
준후는 소리치며 대뜸 벽조선을 주워 들더니 총알같이 달려 사라져 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으니 아무도 그 를 막아서거나 잡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가 쓰러지고 준후가 사라지자, 그때까지 기세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던 능력자들이 다시 술렁였다.
“점토판은 포기하더라도 저 여자를 가만둘 수는 없다!”
아까 여자에게 당한 몇몇 사람들의 동료들이 여자에게 덤벼들 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 등이 그들을 만류하려 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박 신부 등을 공격 할 기세였다.
더구나 박 신부는 준후가 보인 행동에 너무도 허탈감을 느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승희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누가 옆으로 달려와 박 신부의 얼굴을 친다 해도 손 하나 까딱하기 싫 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몇몇 능력자들은 박 신부가 점토판의 내용을 모두 해독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그를 생포해 가려고 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박 신부와 여자, 그리고 준후였 는데 한 사람은 가 버렸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정신이 나간 듯하니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없으리라는 심정들이었다.
박 신부와 승희는 충격을 받아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모를 정 도로 낙담해 있었으므로 많은 능력자들이 일시에 덤벼든다면 성 난큰곰 등으로서도 당해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끝내 커다란 혼 전이 한판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별안간 사방에서 기괴한 울음소 리들이 들려오며 무엇인가가 와르르 사람들 사이로 몰려든 것이 었다. 놀랍게도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는 동물들이었다. 아까 사자 두 마리가 도망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건 그 정 도가 아니었다.
하늘을 뒤덮으며 새까맣게 새 떼가 날아들었고, 사자며 늑대며 원숭이까지 마구 달려들고 있었다. 철책을 무너뜨린 코끼리 는 크게 포효하면서 달렸다.
다른 한 곳의 철책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뚫리면서 검은 코뿔 소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돌진했다. 능력자들이 아니라 현암, 한빈 거사가 이 자리 에 있었더라도 달려오는 코뿔소를 보고 피하지 못할 정도로 대 단한 기세였다. 게다가 그 구멍으로 의젓한 풍채를 보이며 시베 리아 호랑이가 나타났고 다른 구멍으로는 멧돼지들이 씩씩거리 며 달려 나왔다.
삽시간에 쏟아져 나온 동물들로 놀이동산 전체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능력자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 리 도망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기이한 것이, 맹수들은 다른 능력자들만 공격했을 뿐, 퇴마사 일행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몇몇 능력자들이 맹수들에게 총을 쏘거나 주술 같 은 것으로 공격하려고도 했지만, 그런 기미만 보이면 코끼리나 호랑이 같은 대형 맹수들이 모여들어 그들을 도망치게 만들었 다. 결국 그 많던 능력자들은 어떤 초능력자나 주술사에 의해서 가 아니라 수많은 동물들에 의해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 자리에 모인 어떤 집단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박 신부 등을 이길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다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잘만 선동하면 박 신부 일행을 물리칠 수 있고, 그다음에 승부를 가려 볼까 하는 흑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흩어지자 그런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 져 버렸고, 결국은 싹 흩어지게 되었다. 아마도 박 신부와 준후, 현암이 같이 있었다고 해도 이 많은 자들을 상대로 피를 보지 않 고는 수습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이는 풀려나자마자 달려온 아라의 공로였다. 아라는 그동안 별로 힘을 쓰지 못했던 조경의 술수를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 었다. 아울러 조요경의 힘은 잘만 사용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 씬 크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아라 혼자 칠십 여 명에 달하는 쟁쟁한 능력자들을 물러가게 한 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