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2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12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모터보트가 아더 왕이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고 전해지는 도버 앞바다의 물살을 경쾌한 소리로 가르면서 달렸다. 준후와 승희 가 아까 잠시 보았던 비비안의 영기에 집중하여 필사적으로 방 향을 탐지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일어나는 안개는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고, 안개가 짙어진 만큼 많은 곳에서 산발 적으로 유령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육지만큼 심하지는 않았 지만 바다 위까지도 안개는 자욱이 끼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 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더 왕이 우리를 만나 줄까요?”
연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박 신부는 말없이 현암을 바 라보았다. 비비안이 말한 것을 사실대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아 더 왕은 검을 쓸 줄 아는 무인, 그러니까 기사가 아니라면 만나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왕이 선택을 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 어 볼 때, 현암 외에는 당장 아더 왕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은 현암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여기예요. 이 부근!”
“맞아요. 뭔가 강한 기운이…………….”
육지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준후와 승희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눈을 감고 있다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월터 보울이 긴 호선을 그리며 보트를 세웠다. 보트의 엔진이 멎자 주변에는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만 나직하게 들릴 뿐 아무런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 신부가 베 케트의 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주의 힘을 지닌 자가 이 일을 막아야 할 것이라고 했지. 그리 고 비비안도 베케트를 영적으로 알고 있다고 했고・・・・・・ 그렇다면…….”
박 신부는 몸에서 오라를 일으키며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십자가 위에 성령의 불길이 맺히며 뱃머리를 푸른빛으 로 비추었다. 그러자 회색의 안개 속에서 흰 안개 같은 것이 스 며 나와 뭉치면서 뱃머리 앞에 무정형의 모습을 만들었다. 안개 뭉치는 커다랗게 뭉클거리며 비석과 같은 모양으로 변했고, 거 기에는 어떤 문구가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연희가 문구를 읽어 보았다.
“Hic jacet Arthurus, Rex quondam, Rexque futurus…………. 여기에 아더 잠들다. 왕이었고 또 왕이 될 사람이…………. 이런 뜻이에요.”
안개로 만들어진 묘비를 보고 일행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몹시 숙연한 기분이 들었으며 고대로부터 강한 의지 같은 것이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암이 몸을 일으켰다. 물 밑에서 은은한 빛이 비치면서 허공 에서 나직한 울림이 전달되었다. 연희가 내용을 해석하여 속삭이듯 현암에게 알려 주었다.
“물 밑을 보래요. 왕의 질문에 답하라는군요.”
준후와 월터 보울이 호기심에 물 밑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박신부가 제지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계속 기도를 올리고 있었 고, 승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현암은 뱃전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속을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수면 위로 바닷속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듯한 은은한 빛이 보였고, 그 빛은 손짓 하여 현암을 바닷속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현암은 몸을 내밀어 얼굴을 물속으로 쑥 담갔다.
현암은 마음속으로 탄성을 올렸다. 바닷속을 보고 있는데도 전혀 시야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곳은 산호초가 무리 지어 불 쑥 튀어나온 듯한 곳이었다. 온갖 기이한 빛깔의 산호들이 빽빽 하게 얽힌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산호들은 몸체에서 은은한 빛 을 발하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 경이었다. 다른 부분의 수심은 상당히 깊었지만, 은은한 빛을 발하는 산호초는 마치 섬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저곳이 바로 아발론 섬, 아더 왕의 묘지로구나.’
산호초의 한 곳에는 아주 낡고 오래된 배가 해초에 둘러싸인 채 놓여 있었다. 현암은 이 배가 바로 아더왕의 관일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아더 왕의 기사 베디비어 경이 썼다는 전설은 거짓 이 아니었으나 아더의 진짜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현암은 잠시 동안 당시의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중상을 입은 아더는 자신의 최후를 보이지 않기 위하여 돌아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배에 몸을 싣고 자신을 남자로서, 기사로 서, 왕으로서 사랑한 세 명의 여인의 간호를 받으며 바다 한가운 데로 나간다. 아더가 숨을 거두자 세 명의 여인은 아발론 섬이라 고 이름을 붙인 이 바닷속의 아름다운 산호섬으로 배를 몰고 와 서 가라앉힘으로써 아더를 가장 왕답게 매장한다. 자신들의 몸도 함께………….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아더의 곁을 떠나지 않고 왕 의 안식을 지키는 것이다…………….
현암은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왕 아더의 무덤, 그리고 안식.
갑자기 현암의 귀에 물결을 탄 울림이 전해져 왔다. 목소리로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현암은 질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는 기사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이현암. 동방의 나라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더가 분명했다. 목소리로 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울림 의 주인공이 침착하며 고귀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현암은 느 낄 수 있었다. 현암도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취하려 애썼다.
검은 어느 때 써야 하는가?
“벨 때 써야 합니다.”
힘을 기르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약한 자를 위함입니다.”
명예와 영광과 생명 중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입니다.”
현암이 세 가지 질문에 지체 없이 답변하자 웃음소리인 듯한 물결이 느껴졌다.
자네는 기사는 아니군. 하지만 좋네. 무엇 때문에 왔는가?
“지금 왕의 거짓 명령이 내려져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있습 니다. 왕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고 그동안 땅속에서 기다려 온 자들입니다. 왕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것이지만…………… 그들은 나쁜 자들에게 속고 있습니다. 멀린의 힘을 이어받은 사악한 자들이……”
한숨 같은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그렇군. 멀린은 항상 문제였어. 마지막에 비비안이 멀린의 힘을 봉인했는데도………………
그러고 보니 비비안 또한 대마법사였고, 비비안이 멀린의 힘 을 봉인한 것은 점점 아더와 틈이 벌어지는 멀린의 행동을 미연 에 방지하기 위한 것 같았다.
멀린은 그들에게 나에 대한 맹세를 죽어서도 지키도록 강요했지. 그들은 나의 뜻을 몰랐던 걸세.
“뜻이라니요?”
그대는 왕의 할 일이 무엇이라 여기는가?
현암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씁쓸히 웃는 듯한 기분이 전달되어 왔다.
나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고, 어떠한 외적도 나의 왕국에서 승리 하지 못했네. 내가 죽음에 직면한 것은 외적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 었지. 왕은, 왕은 말일세. 군림하면 되는 것이라네. 명예와 위엄을 갖 고・・・・・・ 나는 그들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네. 그들에게 희망으로 남기를 바란 것이네. 그래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이곳으로 오기를 바랐지.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언젠가 내가 다시 올 거라는 희망으로만 말일세…………..
현암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만이 벅차게 맴돌 뿐이었다. 아더 왕의 목소리가 물결을 타고 울렸다.
이 섬은 좁지.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러나 왕이 있기에는 충분한 곳이라네. 아름답지 않은가?
현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물결을 타고 다가왔다. 현암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더도 그 기색을 알아차린 듯, 말을 전해 왔다.
용기 있는 자여. 기사가 아닌데도 기사를 자칭했지만 내 용서하지. 내가 그대에게 기사의 작위를 주겠네. 그리고 바깥에서 가련하게 떠도 는 내 부하들에 대해서는………………
산호초 아래에서 거품이 일면서 무언가가 서서히 떠올랐다.
이것을 가지고 가게. 내 칼이었다네. 이 칼의 빛을 높은 곳에 올라가 비추고 크게 소리를 질러 내 명령이라 전하게. 모두가 알아들을 것일 세. 가엾은 부하들에게 이제 안식에 들라 하게나. 그대, 크게 고함을 지를 수 있는가?
“전 영국이 흔들리도록 지를 수 있습니다.”
아더 왕의 웃음소리가 물결을 이루어 흔들렸고 아더 왕의 칼 은 거품과 함께 현암의 코앞까지 떠올랐다. 현암은 손을 뻗어 칼 을 받아 들었다. 이제는 숨이 차서 얼굴을 더 물속에 담그고 있기가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더 왕이 당부하는 소리가 울렸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네. 그 칼의 힘은 쓰여서는 안 되는 것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배를 출발시켰던 도버의 바닷가에 가서 칼을 물에 던지게. 그래 주겠지? 현암 경(卿)?
“분명・・・・・・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현암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물 밖으로 뺐다. 젖은 머리칼로부터 물을 흩뿌리며 현암은 힘껏 호흡을 했다. 가슴이 시원해졌다.
현암이 오른손에 든 칼을 높이 쳐들었다. 칼자루에 새겨진 화 려한 장식과 칼날에 세밀하게 새겨져 있는 이름을 보고 연희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엑스칼리버! 왕의 칼!”
“뭐・・・・・・ 뭣! 엑스칼리버?”
월터 보울이 후다닥 몸을 뒤로 돌리는 바람에 보트가 기우뚱 댔고 윌리엄스 신부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큼 놀라고 흥분하 여 번쩍이는 칼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준후가 박수를 쳤다.
“와! 현암 형, 아더왕을 만났군요!”
박 신부도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승희와 연 희도 연신 탄성을 지르면서 천 년 이상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녹이나 흠집 하나 없이 아름답게 번쩍이는 엑스칼리버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윌리엄스 신부와 월터 보울도 흥분되어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현암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서 갑시다. 왕의 명령을 전하러…..”
박신부와 현암, 준후, 승희 그리고 연희는 아더 왕의 영이 건 넨 신검 엑스칼리버를 들고 육지에 올라 부근에 있는 산등성이 로 올라갔다. 내려다보이는 곳은 전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일 행은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지만 벅차오름을 가눌 수가 없었 다. 왕의 신검인 엑스칼리버의 빛과 함성. 현암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더 왕의 명령을 전달할 때, 영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하지 않을까?”
준후가 고개를 저었다.
“영들은 아마 빛의 권위와 명령이 담고 있는 의미만으로도 충 분히 알아들을 거예요. 아더 왕의 말을 믿어 보세요. 좋은 분 같 았어요.”
승희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과연 이 엑스칼리버의 빛과 함성으로 모든 유령들이 사라질까?”
현암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믿어 보자. 그 외의 방법은 없지 않니? 아더 왕의 영을 나는 믿 는다. 기품이 있는, 뭔가 통할 것 같은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어.”
박신부가 서두르자는 손짓을 했다.
“자, 어서 연희 양은 귀를 막도록 해요. 생각보다 현암 군의 목소리가 클지 모르니까.”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으로 귀를 막자 승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준후도 방 위에 따라 보법을 행하고 수인을 맺으면서, 승희에게 받은 힘 을 자신의 힘과 합쳐 박 신부에게 모아 주었다. 박 신부는 현암 의 등 뒤에 손을 짚고 거기에 자신의 힘을 합쳐서 현암에게로 기 운을 불어 넣었다. 힘이 넘치는지 현암의 몸이 은은하게 떨렸다. 현암이 손에 든 엑스칼리버에 공력을 모으자 번쩍하면서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것이 엑스칼리버의 빛이로구나!”
현암이 칼을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며 빛을 사방 으로 비추었다. 그러고는 충만한 힘으로 사자후를 이용해 길게 소리를 질렀다.
“아더 왕의 명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안식으로 돌아가라! 어서 돌아가라! 돌아가라!”
퇴마사들의 모든 힘이 현암이 뽑아내는 사자후의 고함 소리 에 담겨서 사방 구석구석으로 메아리쳤다. 단 한 번 내지른 소리 였지만 엄청난 울림으로 부근의 산들까지도 우르릉 떠는 듯했 다.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준후와 승희까지도 탈진해서 숨을 헐 떡거렸다. 옆에서 단단히 귀를 막고 있던 연희가 칼의 빛에 눈이 부셨는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몸이 다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 정도면 사방에 들렸을까요? 전국으로 퍼졌을지..”
준후가 말했다.
“그냥 소리가 아니고 영력에 의한 것이니 틀림없이 들렸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승희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유령 기사들의 행동을 투시 해 보는 것 같았다. 박 신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됐니, 승희야? 유령 기사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 는 것 같아? 아더 왕의 명령이 전해졌나?”
승희가 말없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아더 왕의 말대로 됐다는 뜻이다.
어느덧 사방을 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들판이며 마을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준후가 말했다.
“안개가 걷히니 참 아름답군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준후의 말에 박 신부가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