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7화 – 아라크노이드 2 : 거미의 성장
거미의 성장
“에잉! 이게 뭐야?”
요즘 한참 잘나가는 모뎀인지 뭔지로 까르르륵 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울리던 준후가 소리를 쳤다. 프랑스에 도착해 우연히 만 나게 된 정혜영이라는 한국 유학생 집에 놀러 왔다가, 준후가 방 에 있는 컴퓨터를 보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집주인인 혜영은 연희와 함께 대접할 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승희가 주의를 주었지만 준후는 지루했던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또 접속을 해 본 모 양이었다. 물론 준후는 프랑스 쪽 네트워크의 전화번호를 몰랐 다. 무심코 아무 전화번호를 때려 넣거나 원래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번호들을 심심풀이로 한 번씩 넣어 본 것에 불과했다. 접속 은 되었지만 별 재미가 없어서 끊기를 반복하던 차에 시스템이 이상해진 것이다.
현암과 박 신부는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코제트의 행방에 대 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승희는 패션 잡지를 뒤적이다가 준후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전에 동민이라 는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준 이래, 오락은 싫어해도 통신에 대해 서는 관심이 많아진 승희는 무슨 일인가 궁금증이 일었다.
“승희 누나, 이거 봐! 징그러워…………….”
준후가 가리키는 모니터의 화면상에 시커먼 거미 몇 마리가 거미줄 위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 었지만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림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 냈다. 승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흉악하구나! 이게 무슨 게임이니?”
“아녜요. 내가 한 게 아니라구요. 난 그냥 통신 프로그램 비슷 한게 있어서 신기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게 나오더 니 먹통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내가 망가뜨린 게 아닌데, 어떻 게 하지? 잉잉 이게 뭐야.”
준후는 당황했는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꺼 버렸고 순간 승희의 마음속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라기보다는 그 의미만이 또렷하게 마음속에 울려 퍼졌지만.
파괴를 위한…………….
“응? 이게 뭐지?”
승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준후는 어리둥절한 듯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는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 러보았다.
“준후야, 현암 군. 방금 소리 내지 않았어? ‘파괴를 위한…………이라고?”
“아녜요, 누나.”
“조용히 좀 해!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야!”
현암은 눈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마음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였는데………. 그렇다면 영의 목소리? 잡령 따위가 뚫고 들어왔다면 다들 눈치 를 챘을 터였다. 그런데 보아하니 준후도 전혀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린 것일까? 분명 승희에 게만들렸다. 마치 승희만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에구! 이거 또 나오네!”
컴퓨터를 껐다가 켠 준후가 다시 우는 소리를 냈다. 리부팅해 서 모뎀을 작동시키기만 하면 거미 그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준후가 투덜거리며 컴퓨터를 끄려는데 승희의 마음속에 목소리가 울려왔다.
파괴를 위한…………….
승희가 고함을 질렀다.
“준후야! 한 번 더! 한 번 더 켰다가 꺼봐!”
“왜요?”
“그걸 끌 때마다 소리가 들려. 영적인 소리가!”
“뭐라고요? 어어…………”
“어서!”
준후가 겁먹은 눈초리로 컴퓨터를 켰다가 전원을 껐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되잖아요? 이번엔 나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모뎀을 작동시켜! 거미 그림이 나오게 하고 끄란 말야!”
현암과 박 신부도 둘의 떠드는 소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컴퓨터 쪽으로 다가왔다. 승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 의 눈 중 하나를 준후에게 주었고, 준후는 영문도 모른 채 세크 메트의 눈을 받아들고 떨리는 손길로 컴퓨터를 켰다. 통신 프로 그램을 작동시키자 거미 그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전원 스위치를…………….
파괴를 위한…………….
준후가 후다닥 컴퓨터에서 물러섰다. 세크메트의 눈을 통하여 승희의 마음속에 울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희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감돌았다.
“너, 너도 들었니? 그, 그 목소리 분명히 들리지?!”
준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컴퓨터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승희가 다시 해보라고 고갯짓을 했으나 준후는 이제 컴퓨터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모 양이었다. 승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컴퓨터를 껐다가 켰다. 그 리고 마음의 힘을 모아서 순간적으로 영사를 행할 생각이었다. 거미 그림이 나오고 다시 전원을…..
파괴를 위한………….
순간적으로 어떤 사람의 눈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승희는 여러 번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해 보았지만 여전히 영사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은 눈 하나뿐이었다. 깊고 번득거리는듯한, 그리고 붉게 충혈되어 있는 눈……….
“누나, 무서워! 투시를 해도 왜 눈밖에 안 보이는 거지?”
승희도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에 영력이 깃들다니. 그것도 상대를 알 수 없는……………. 보이는 것은 눈 하나뿐이었다.
“눈이 보여! 누군가의 눈이…………. 이게 뭐지?”
주의 깊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제길, 이젠 별것에까지 잡귀가 설치는군!”
넷은 컴퓨터를 가운데에 놓고 논의를 했다. 우연히 발견된 이 이상한 현상 역시 영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한 것 들은 절대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승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분명히 영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형태 는 아녜요. 이 컴퓨터 자체에 혼령이 맺혔거나 한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건 당연한 일이야.”
현암이 대답했고 박 신부도 말했다.
“나는 구세대라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만 혼령이 컴퓨 터에 맺혀서 이상하게 동작하도록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준후가 반박했다.
“아녜요. 컴퓨터도 기옌데, 전기로 힘을 가하면 이상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녜요?”
현암이 웃었다.
“준후야, 그래. 너는 뇌전을 쓸 수 있지? 그러면 뇌전으로 컴퓨터를 오작동시킬 수 있니? 해 볼래?”
“에이, 그러면 부서지고 말죠. 회로들이 얼마나 예민한데…… “
“그건 영에게도 마찬가지일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아예 볼 수조차 없을 미세한 전기 신호를 물리력으로 다루는 건 영력 으로도 안 돼. 네가 봤다는 거미 그림, 그건 신종 바이러스에 감 염된 걸 거야.”
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바이러스에 감염된 프로그램 을 돌리다가 전원을 끄면 어째서 영의 소리가 들리는거죠? 제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
“바이러스에 뭔가가 있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바이러스는 원래 증식성이 있죠. 거기에 어떤 자의 영이 맺히고………..” 현암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영의 소리는 원래 바이러스의 일부가 섞인 걸까? 그러니까 원래의 바이러스 코드에 영이 붙었고 바이러스가 복제되어 나갈 때마다 영력이 거기에 깃들어서………….”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질이 아닌 정보에 영이 깃 들 수 있다니, 그리고 증식이 된다면……”
준후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컴퓨터를 잘 알고 있는 자의 영일 거예요. 원래 영 이 나뉘어 분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죠. 비슈누 신이 아바 타라를 만드는 것이나, 시바 신이 자신의 분신을 창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일 거예요.”
승희가 잽싸게 준후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 깃든 영은 그런 분신이 아니야. 영이면서도 일부분…………. 하나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한………….”
“아이구. 머리가 아파지는구먼. 아멘!”
박 신부는 머리를 싸쥐었고, 현암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군. 그러니까 그 흉 측한 그림이 나타나게 하는 바이러스의 모체가 되는 프로그램에 영이 하나 붙었고, 그러다 보니 바이러스가 증식됨에 따라 점차 로 영의 분체가 나뉘어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이로군. 소설이 문단에서 문장으로, 다시 낱말로 분해되는 것처럼 말이야. 좋아, 신기한 일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보자구. 그런데 준후의 컴퓨터에서 나왔다는 메시지가 뭐였다고 했지?”
“파괴를 위한…’이라는 뜻이었어.”
“파괴를 위한다? 보통의 일이 아닌데. 원한령이 깃들어 있는 것이 분명해. 그리고 놈이 프로그램으로 숨어들었다면 목적이 있을 거야. 아니라면 굳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숨어들 이유도 없 고, 계속 쪼개져서 분화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준후와 승희, 박 신부도 섬뜩한 것을 느꼈다. 원한령이 목적을 가지고 통신망에 잠입하여 떠돌아다닌다니, 그것도 바이러스성 코드를 타고 한없이 분화된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박신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아. 속히 근원을 밝혀서 놈을 잡아내야해!”
“하지만 신부님, 우리 일정도 복잡한데………….”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니?”
“그건 그래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 보자. 남의 컴퓨터를 이렇게 망가뜨려서 어떻게 한다?”
승희가 눈을 깜박거리며 특유의 화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혜영 언니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프로그래머니까 언니 정도라면 쉽게 고칠 수 있겠죠. 뭐.”
“아무리 그래도 사과는 해야죠. 혜영 누나는 연희 누나와 같이 나갔죠?”
준후가 풀이 죽어서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암이 웃으며 말했다.
“기운을 내 혜영 씨에게야 뭐 큰일이겠어. 프로그래머라면 바이러스 정도는 쉽게 해결하겠지.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볼까? 한 번만 다시 보자.”
현암이 말하자 준후가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컴퓨터에 전원 을 넣자마자 을씨년스러운 거미 그림만 화면에 떠오를 뿐, 아무 런 작동도 되지 않았다.
“에이, 벌써 바이러스가 다 퍼진 모양이에요!”
승희가 깨끗한 도스 디스크를 들고 왔다. 다시 부팅을 하고……………
하드 디스크로 들어간 승희가 헉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준후야! 이거 네가 다 쓴 내용이니?”
승희가 루트 디렉토리에서 dir/w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Volume in drive C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ARAK3488.DAT AUTOEXEC.BAT COMMAND.COM
CONFIG SYS TREEINFO NCD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저게 뭐야! 아라크 3488? 그리고 딴 디렉토리는 다 어디 갔어? 아깐 모뎀 디렉토리도 있고 많던데.”
승희가 떨리는 손으로 dir을 눌렀다.
Volume in drive C 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ARAK3488 DAT 244723712
12-21-936 33p
AUTOEXEC BAT 0 12-02-93 3 33p
COMMAND.COM 0 08-12-93540p
CONFIG SYS 0 01-01-806: 43p
TREEINFO NCD 0 11-10-93 3 25p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으악! 이럴 수가! 시스템 파일까지 잡아먹었네!”
승희가 한 번 더 dir을 하자 이번에는 예의 거미 무늬만이 나타났다.
전원을 끄자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
플로피 디스크로 리부팅을 한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chkdsk를 해 보자.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ERRORS FOUND, F parameter not specified
Corrections will not be written to disk
0 lost allocation units found in 0 chains
0 bytes disk space would be free
244801024 bytes total disk space 77824 bytes in 2 hidden files
0 bytes in 0 directories
244801536 bytes in 5 user files
0 bytes available on disk
4096 bytes in each allocation unit
59766 total allocation units on disk
0 available allocation units on disk
655360 total bytes memory
589344 bytes free
“이건…………. 이렇게 지독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영의 두려움보다도 지독한 바이러스의 성질에 일동은 전율했 다. 그리고 승희는 추가된 구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 었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