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20화 – 아라크노이드 5 : 거미의 먹이
거미의 먹이
관리실에 올라간 박 신부와 연희는 아래 주차장에서 어떤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관리인을 데리고 레 오가 살고 있는 방의 여벌 열쇠를 가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처 음에 관리인은 순순히 키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검은 사제복 입 은 신부가 심각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야기를 하 고, 또 연희가 거짓말이지만 다급한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자 군말없이 열쇠를 찾아 들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뭐라고 했기에 저 사람이 순순히 문을 열어 주겠다는 거지?”
박신부가 내려가는 길에 살짝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가 미소 를 지으며 대답했다.
“레오라는 사람은 평소 우울증이 있던 사람인데, 집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도 열어 주지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자살한 게 아닐까 하고 겁을 줬죠. 이 아파트는 자살자가 많다는군요.”
박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으나 이내 씁쓸한 얼굴로 바뀌 었다. 연희도 박 신부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나저나 레오라는 사람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죠? 무서워 요. 신부님 기분이 이상하신 것도 걸리고.”
“글쎄”
세 명은 레오의 집 문 앞에 도착했고 박 신부와 연희는 뒤에 서서 관리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 다. 연희는 레오라는 사람이 정말로 죽어 있을까 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제까지 죽은 사람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박 신부는 제발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관리인이 들어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놀란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박신부와 연희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어수선하게 오만 잡동사니들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관리인은 방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 서서 “하느님 맙소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관리인 의 몸에 가려서 두 사람에게는 아직 방 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연희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관리인의 어깨를 살짝 쳤다.
“왜 그러시죠?”
연희가 묻자 관리인이 멍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사람이 자살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연희가 방 안의 광경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윽 하는 소 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관리인을 한쪽으로 밀쳐 내고 방 으로 들어간 박 신부의 입에서도 저절로 “아멘”이 흘러나왔다. 방 안은 지저분했고 온갖 책들과 디스켓, 프린터 용지에 먼지까 지 뒤덮여서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두 대가 켜져 있었는데, 그중 한 대의 모니터에는 시커먼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한 남자가 갈라진 수박 처럼 머리가 완전히 두 조각이 난 채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의 자는 뒤집혀져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디스켓 이며 책들을 흠뻑 적시고 있어서 아무도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 를 내지 못했다. 욕지기가 나는 것을 참으려는 듯한 목소리로 관 리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연희가 박 신부에게 전해 주었다.
“의자에 묶여 있다가 머리를 맞은 것 같다는군요.”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머리를 맞았다 면 몸은 왜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인가. 몸을 꽁꽁 묶고 머리를 친 것이 이치상 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것을 문제 삼을 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를 묶고 있는 줄은…………….
박 신부는 성호를 그으며 눈짓을 하자 관리인은 서둘러서 거 실의 전화로 갔다. 경찰을 부르는 듯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돌린 채였다. 박 신부는 주변을 꼼 꼼히 살피다가 슬쩍 말을 건넸다.
“내려가서 혜영 씨를 불러오는 것이 어떨까?”
연희가 놀란 듯 말했다.
“혜영 씨에게 이걸 보여 주려고요?”
“아니면 경찰이 시체를 치울 때까지 조금 기다릴까? 저 컴퓨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연희가 시체를 보지 않으려 손으로 눈 밑을 가리며 책상 위를 보았다. 책상의 두 대의 컴퓨터 중 한 대는 데스크톱이었고, 그 옆에 있는 한 대는 노트북이었다. 데스크톱의 모니터에는 을씨 년스러운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가 지 있었다. 데스크톱과 노트북, 두 컴퓨터가 두꺼운 케이블로 연 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알아보기 어려운 16진수 숫자들이 계속해서 스크롤되고 있었다.
‘이 사람이 거미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이 아니었을까?’’
연희는 일단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아래층으 로 향했다. 혜영을 부르기 위해서보다는 이 끔찍한 곳에서 멀어 지고 싶다는 생각이 연희의 마음속에 더 강했는지도 몰랐다. 박 신부는 방 안을 좀 더 꼼꼼히 살펴보다가 마루로 나가 소파에 몸 을 묻고 있는 관리인에게 가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기도를 했 다. 관리인도 가톨릭 신자였는지 박 신부가 기도를 하자 같이 성 호를 그으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희는 쓰러져 있는 준후를 몸으로 가린 채 음험한 미소를 짓 는 남자의 얼굴을 째려보고 있었다. 남자가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고 난폭한 행동을 했다면 차라리 덜 무서웠겠지만,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이상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히죽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빨리 와. 도와줘!”
도망치고 싶었지만 승희는 준후까지 끌고 몸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현암을 소리쳐 부르면서 승희는 생각 했다.
‘준후의 부적이 듣지 않은 것을 보면 악령이 씐 것은 아니지 만,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정신병자 아냐?’
남자의 마음을 읽어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 투시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준후 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승희는 남자에게서 경계의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뒤로 돌려서 준후의 몸을 짚어 보았다. 준후는 아 직 몸을 일으키진 못하고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신음 소리 를 내며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승희의 손에 준후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잡혔다. 승희는 밧 줄을 풀어 보려 했다. 그러나 감촉만으로 묶인 매듭을 풀기는 쉽 지 않았다. 준후를 옆으로 놓고 자기도 몸을 반쯤 틀면 풀 수 있 을 것 같았다. 허나 옆에는 남자가 있다. 안달이 난 승희는 남자 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의 시선이 돌아가는 순간, 급히 몸을 틀 었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승희를 보고는 급히 달려들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현암이 소리를 쳤다. 승희가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남자가 덮쳐 오는 모습이 보였다. 승희는 무서워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남자 가 덮쳐 오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나자빠져서 땅에서 구르는 것 이었다. 승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혜영의 손 에서 깨어진 빈 병이 떨어졌다.
“고마워.”
승희가 말하자 혜영은 대답 대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급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움직였지만 자기가 한 짓에 몹시 놀 란 것이다.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안간힘을 쓰던 현암은 그제야 간신히 땅에서 팔을 빼냈다. 그리고 말없이 승희 쪽으로 다가가 준후를 안아 들어 목에서 밧줄을 풀어 냈다. 승희는 긴장 이 풀려 우는지 고개를 무릎에 묻었고, 현암이 준후를 다독거렸 다. 준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별 탈은 없는 듯했고 목만퉁퉁 부어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승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고 는 울고 있는 혜영에게 다가가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현암이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승희가 대답했다.
“몰라. 차 안에 있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도끼를 던지며 덤벼들었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정신병자인가 봐.”
현암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준후를 내려놓고 남자가 가지고 있던 밧줄을 가지고 와 꽁꽁 묶었다. 승희는 안심이 되는 듯 혜영 을 다독거리면서 남자의 마음을 투시를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소리치며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연희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승희는 현암과 연희에게 자기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문제의 남자는 그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묶인 상태에서 몸을 움 찔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이상한 미소는 여 전히 그대로였다. 다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승희가 이를 갈면서 벌떡 일어났다.
“야, 인마, 그만 중얼거려! 듣기 싫어 죽겠어!”
승희가 남자를 발로 차려는 것을 현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 으면서 살짝 밀어냈다. 남자가 노래를 읊조리자 혜영이 몸을 떨 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승희는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다 가 혜영을 다독거리면서 저쪽에 있는 차 안으로 데리고 갔다. 현암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옆에서 남자의 노래를 같이 듣고 있던 연희가 그 내용을 현암에게 말해 주었다.
“뭔가 이상해요. 이 사람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데요?”
“이 남자가 하는 노래는 거미 이야기예요.”
“거미요?”
“네에, 거미요. 동요 같군요.”
연희는 남자가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를 통해 주었다.
“Mère araignée Sans appetit
식욕도 없는 엄마 거미가
Sémpressa de manger son mari 제 남편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Ce aui restaint du mari
남편은 껍질만 남아
Regarda Sa femme sans voir
제 부인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Le Ventre de mère araignée agit
엄마 거미의 배가 움찔하더니
Et donna naissance à plusieurs petits
새끼 여러 마리를 낳았다.
Les petits dévorèrent alors leur mère
그때 새끼들이 제 엄마를 잡아먹고,
Voyant ceci, les restes de leur père 이것을 보던 아빠 거미 껍질은
En rires éclatèrent
껄껄껄 웃어댔다.
Le mangeur de toutes manières
먹는 자는 어쨌거나
Se fera mangé à son heure
다음 차례엔 먹히는 것.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인걸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인걸.’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쫓고 있는 원한령이 깃들어 있는 바이러스도 거미 아니었던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고개를 돌려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 는 잘린 손도끼를 보더니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왜 그러죠?”
“참! 깜박 잊고 이야기를 안 했는데 레오라는 사람, 그 BBS 운 영자는 자기 방에서 죽어 있었어요.”
“뭐라구? 죽어 있다구요?”
“예. 머리가 두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그런데 이 남자가 도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도대체 무슨 일이?”
현암은 남자의 품을 뒤져서 지갑을 꺼냈다. 신분증과 운전 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연희에게 보여 주니 남자의 이름이 쟝 쉥 미셸이고 대학원 전산과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해 주었다.
“최근에 등록을 한 것으로 보니 정신병자 같지는 않은데요. 이상하군요. 더군다나 거미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도끼를 들고 있 었던 것 보면 위에 죽어 있는 남자와도 무관한 것 같지가 않아 요. 이 미셸이라는 사람이 레오를 죽인 것 같아요.”
현암은 입을 다물고 눈을 번뜩거리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미 그림이 나오는 바이러스, 거미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는 도끼를 든 남자, 그리고 도끼에 맞은 채 머리가 두 토막 나서 죽 어 있다는 거미 바이러스의 BBS 운영자.’
연희가 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그 방엔 케이블로 연결된 컴퓨터 두 대가 있었어요. 그중 하 나에 거미 그림이 떠 있더군요. 그런데 다른 컴퓨터에는 거미 말 고 다른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어요. 분명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거미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아요.”
“이번 사건은 다 얽혀 있는 것 같군요.”
현암과 연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경찰차가 나타났다.
현암은 연희에게 경찰에 사정 이야기를 잘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난리가 났는데도 누구 하 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니 괘씸했다. 허나 주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은 연관성이 있었고, 단서를 찾으려면 레오라는 남자 가죽어 있다는 방을 자세히 보아야 했다.
레오의 방을 찾아간 현암은 곧 박 신부를 만났다. 피차간에 겪 은 일들을 간단히 이야기한 다음에 현암은 레오의 방을 구경하 길 원했다. 박 신부는 말없이 열린 방문을 가리켰다. 마루에 앉 아 있는 관리인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현암이 방으로 들어가자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체와 함께 모니터에 떠 올라 있는 거미 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현암은 눈살을 찌푸리 면서 거미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아직도 숫자들이 스크롤되고 있는 다른 컴퓨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컴퓨터는 신기하게도 옆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다는데 바 이러스가 들어가지 않았다면서요?”
“음, 그런 것 같네.”
현암은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것을 보고 박신부가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현암이 반문했다.
“뭐가요?”
“저 사람 말일세. 저 사람이 어떻게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당연하죠. 누가 들어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저자를 꽁꽁 묶고 그다음에 도끼로 머리를 내리쳤겠죠. 그래서 저런 자세가 되었구요.”
“아닐세. 그런 것 같지는 않네. 잘 보게. 저 자세가 이상하지 않은가?”
“글쎄요. 별로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자세히 봐. 저 사람은 의자 뒤쪽으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의 자 앞으로 엎어져 있어. 저 사람을 꽁꽁 묶고 도끼로 쳤다면 구 태여 의자에 앉혀 뒤로 돌려 놓고 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거야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이상한 것은 또 있어. 자세히 보게. 저 남자를 묶은 줄에 피가 튀어 있나?”
현암은 속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미처 현암도 보 지 못했던 것이었다. 머리를 쳐서 두 토막이 나고 피가 사방으로 튀어 바닥에 가득 고일 정도면 레오를 묶었던 줄에도 피가 튀었 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오를 묶은 줄에는 피가 묻은 자 국은 있었지만 피가 튄 흔적은 없었다. 박 신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이상하단 말이야. 저걸 봐서는 저 사람을 도끼로 쳐서 죽인 후 묶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왜 쳐서 죽인 사람을 줄로 묶 었을까? 그것도 반쯤 미라를 만들어 놓고 말이야. 시체가 움직이 거나 도망칠 것도 아닌데…………….”
현암의 머리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죽인 다음에 줄로 묶는 경우가 있지요.”
“어떤 경우인가?”
“거미가 그렇게 합니다. 저 아래 도끼를 휘둘렀던 남자 있잖습니까? 연희 씨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자신이 거미라고 생각하 고 있다는 겁니다. 거미에 대한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고요.”
“거미에 대한 노래?”
박 신부의 눈이 거미 그림이 떠 있는 책상 위의 모니터로 향했다. 현암이 나직이 박 신부에게 말했다.
“저 컴퓨터, 아무래도 이상해요. 혜영 씨의 컴퓨터도 그랬지만 거미 바이러스에 접촉만 해도 금세 컴퓨터는 거미 바이러스에게 점령되어 버렸잖아요? 그러나 옆에 있는 컴퓨터는 안 그렇네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 신부는 방바닥을 다시 한번 살폈다. 레오라는 남자가 도끼 의 일격을 맞아 죽은 뒤로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방바닥에 흩 어져 있는 피는 이제 서서히 굳어 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박 신부도 예전에 검시관인 장 박사를 따라 다니면서 여러 유형 의 시체를 보아 왔기 때문에 이 정도로 피가 응고되려면 적어도 두세 시간은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저 컴퓨 터는 그 옆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거미 바이러스는 들어가지 않았다.
“혹시 이 사람이 거미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 옆의 컴퓨터에는 거미 바이러스를 막는 프로그램이 들 어 있을지도 몰라.”
“맞아요. 저 컴퓨터가 중요하겠는데요. 슬쩍 가져가서 혜영 씨 에게 보여 주면 안 될까요?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다루 기가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컴퓨터를 그냥 집어 가자는 말인가?”
“글쎄요.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경찰은 분명 이를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처리해 버릴 것이 분명해요. 그러나 저 바이러스에 원 한령이 깃들어 있는 이상, 프로그램과 컴퓨터들이 경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이 일은 틀림없이 바이러스가 중심이 된 것이고, 그렇다면 원한령과도 관계가 있 지요. 경찰은 이런 영적인 일을 해결하지 못해요.”
“글쎄.”
박신부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현암이 막무가내로 자그 마한 노트북과 옆에 있는 컴퓨터와의 연결선을 모조리 빼 버린 후 노트북과 코드를 챙겼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도둑질을 하자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야. 저 관리인도 컴퓨터가 두 대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리인이 기억할지 못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컴퓨터는 꼭 필요했다. 현암은 잠시 생 각하다가 좋은 묘안이라도 떠올랐는지 재빨리 노트북을 옆에 끼 고 박 신부가 말리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이삼 분 후 돌아 왔다. 그의 손에는 다른 노트북 컴퓨터가 들려 있었다.
“이건 혜영 씨가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입니다. 이걸 옆에다 놔 두면 관리인도 컴퓨터가 두 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더라도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혜영 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마루에 있는 관리인은 저를 못 봤습니다.”
현암은 노트북 컴퓨터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박 신부는 현암을 말리지도 못하고 잠시 서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 들고 혜 영의 노트북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건 원. 완전히 범죄자가 다 되어 가는구만.”
경찰들이 연희와의 이야기를 마친 듯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박 신부는 찝찝한 얼굴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