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23화 – 아스타로트의 약속 1 – 본거지
본거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로렌스 경 감이 지휘하는 경찰들과 미 기동타격대(S.W.A.T.) 요원들은 뉴 욕 한쪽 맨해튼 변두리의 어느 나지막하고 허름한 건물 주변을 빽빽이 포위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사상자나 목격자가 나오지 않도록 십오 층짜리 건물의 지상에 세를 들거나 임대한 민간인 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한다는 명목 이었다. 건물의 주변은 물샐틈없이 경비되었고, 전투용 헬기들 도 그들의 도주에 대비하고 있었다.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곳. 그러니까 하수도 등 지하 통로도 모두 차단되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대규모 출동이었다. 그러나 경찰들과 요원들은 상부 의 결정에 의아해하고 있었고, 특히 총지휘를 맡고 있는 로렌스 경감은 더더욱 불만과 의혹이 많았다.
‘포위만 해 놓고 선발대가 연락을 할 때까지 대기하라.’
물론 명령이니만치 그대로 따라야만 했지만, 막상 건물 안으 로 들어가고 있는 ‘선발대’라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웃기는 사람 들이었다. 민간인들, 그것도 각 나라들에서 왔다는 신부와 아이 노인과 여자를 포함한 일단의 중이떠중이들이었다.
블랙서클의 본거지.
퇴마사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하나하나 거점이 파괴되고 음모 가봉쇄된 지금, 블랙서클의 잔당은 이곳에 모여 있었다.
블랙서클의 근거지가 이런 고층 건물들 사이에 있을 줄은 아 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번듯하지 않고 조금 후미진 그 늘에 숨어 있듯 세워진 작고 낡은 육층짜리 빌딩이라는 것만이 그럴듯했다.
그러나 본거지를 찾아낸 것도 거의 천운에 가까웠다. 마지막 승정이었던 히루바바는 스스로의 허물을 깨달은 이후에 현암에 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더구나 그가 말한 것은 정말 놀랄 만 한 비밀이었다.
-지옥문은 하나가 아니다. 모두 이백여 개나 된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건 무슨 건물이나 장치가 아니다. 주술력으로 열리는 공간의 틈새 같은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여는 것인가?
-마스터, 마스터만이 안다. 마스터의 힘으로 여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마스터의 힘은 아무도 당하지 못한다. 나는 물론, 나를 이긴 당신도 그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는 신과 같다. 그러니 이길 수 없겠지만 당신이 원하니 나는 당신과의 약속대로 말해 주는 것뿐이다. 지옥문을 닫는 방법은 없다. 마스터를 이기면, 지옥문은 열지 못하게 된다.
히루바바는 거기까지만 알려 주고 숨을 거두었다. 결국은 마 스터를 잡지 않으면 지옥문을 여는 일은 막을 수 없다. 허나 히 루바바조차도 마스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가 보낸 편지로 짐작건대 미국에 은신하고 있을 거라 추측했을 뿐이었다. 퇴마사들은 그 편지 한 장을 달랑 손에 쥐고 미국으로 건너와야 했다. 백호 등 각종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불행하 게도 그들은 이 편지가 어디에서 발송된 것인지 밝혀내지 못했 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큰 공을 세웠다. 젠킨스 사건 때 만났 던 더글러스 탐정이었다. 사이코메트리의 능력이 제멋대로 튀어 나오는 이 거칠고 끈덕진 사람은 퇴마사들이 미국에 온 것을 어 떻게 알았는지 그들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기이한 능 력이 발동된 그가 우연히 편지에 손을 짚었고, 감식 전문가들도 알아내지 못한, 이 편지의 출처를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
“어, 맨해튼에서 온 편지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헉 소리가 나게 놀랐다. 되레 더글러스가 뻘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이거 이상해. 무시무시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게 무슨 소리죠?”
승희가 묻자 더글러스는 지저분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더듬 거렸다. 현암에게 여러 번 내동댕이쳐지고, 윈디고의 허상 앞에 도 눈 하나 깜짝 않던, 패기와 끈기로 이루어진 것 같은 사람이 더듬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신들도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힘이 있지. 그런데 이거 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힘이 느껴져.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당신들을 합해도, 아니 그 열 배가 되어도 못 당할 것 같아. 내 내가 잘못 본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마스터에 대한 더글러스의 말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이라 할 수 있 는 블랙서클의 마스터 및 총수와 대결하기 위해서 곧장 뉴욕으 로 향했던 것이다.
미국 경찰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로렌스 경감이 다가와서 박신부에게 말을 건넸다.
자,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원들을 안으로 투입시킬까요?”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섣불리 건드리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저희가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죠.”
“당신들만으로 말입니까? 무기나 장비는 있습니까?”
앞에서 현암이 조용히 웃었고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런 게 필요 없습니다. 좌우간 이번 일만큼은 반드시 우리를 믿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로렌스 경감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경계망을 쳐야 할 만큼 대단한 놈들이라 면 필경 흉악한 놈들일 텐데, 아무런 장비나 무기도 없이 맨손으 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이건 무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 제입니다.”
박신부가 대답했다. 일행 중에는 퇴마사 이외에도 밝은 빛을 피하는 듯 힐끔거리는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도 함께 있었 다. 영국 심령학회의 월터 보울 씨도 다른 심령학회 사람들과 함 께 달려왔지만, 실제로 싸움에 임하기보다는 경찰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블랙서클의 마스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사전에 일말의 정 보도 들은 바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마스터를 잡지 못하면 큰 낭패였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사람의 협조가 필요했 다. 퇴마사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승희는 투덜댔으나, 박 신부는 가능한 한 도움을 받아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하는 것 이 좋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 그리고 월터 보울 씨를 불러들였다. 한국에 있는 각 주술사들, 그러니까 예전에 초치검 사건을 통해서 알았던 사람들도 수배해 보았지 만, 너무 급하게 연락을 한 탓인지 한 사람도 연락되지 않았다. 주기 선생 상준이나 검사 현정 등은 평소 백호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일본 밀교 측과는 홍 녀가 죽은 이후로 연락이 끊긴 상태여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 다.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블랙서 클의 마스터나 총수가 눈치를 채고 달아나 버릴까 봐,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아프리카에서 이곳 미국으로 집결한 것이다. “항상 뒤를 쫓다가 이렇게 근거지를 토벌하게 되니 뭔가 뿌듯 하네요.”
이런 판국에도 짙은 화장으로 눈에 확 띄는 승희가 피식 웃으 며 중얼거렸고 다른 사람들은 긴장해서인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서 백호가 모습을 나타냈다. 백호가 미국 정부 측 과 벌인 교섭은 대성공이었다. 백호는 특전대 출신에 검사로 활 동하고 있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외교적인 수완을 필요 로 하는 일까지도 훌륭하게 해내었다. 이미 영국에서 보여 주었던 퇴마사들의 능력, 그리고 프랑스에서 네트워크 바이러스와 그 악령을 몰아낸 일. 그 이후에 아프리카에서 히루바바를 물리 쳤던 일 등등, 퇴마사들이 그동안 해 왔던 상세한 경위서와 각국 원수들의 초청장을 들고 동분서주한 끝에 미국 경찰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 경찰이 백호에게 협조해 주 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들의 주술적인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블랙서클의 행적으로 볼 때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의 주모자로 블랙서클이 수사선상에 떠올 랐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예전에 블랙서클에서 도망친 호웅간 이 저지른 고위급 인사들의 좀비화 내지는 살해 사건이었다. 그 래서 백호는 미국 부통령과 주지사의 동의를 얻어 부근에 포위 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박 신부를 비롯한 퇴마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백호는 적어도 그들이 달아 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치는 것만은 꼭 필요한 일이며, 마스터 나 총수와 대결하는 것은 퇴마사들 몫이지만, 그 이외의 자잘한 블랙서클의 하수인들, 그리고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소동을 방 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치만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함께해 온 백호는 일행과 같이 가고 싶어 했 으나, 영능력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실무 당사자인 로렌스 경감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얼간이들을 믿으라고 한 주지사가 미쳤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는 몹시 위험한 자들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도 못하게 위험하죠.”
“그런데 민간인이고 무장도 안 한 당신들이 들어가겠다는 거요? 미국 경찰은 당신들보다 약하지 않소.”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빌미를 주게 됩니다.”
박신부가 당황해서 말실수를 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외치 자 로렌스 경감의 입가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빌미요?”
“저들은 이제 우리가 포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은 빠져나가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부터 나서야..”
박 신부는 악의로 말한 것이 아니었지만 로렌스 경감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바보인줄 아시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더 들을 것도 없군. 내가 책임지겠소.”
로렌스 경감은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박 신부와 백호 는 당황하여 경감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부하들이 박 신부를 막았다. 박 신부는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로렌스 경감은 무전기를 꺼내 오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1조와 2조!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목표는 안에 있는 인원 전 부! 신속하게 제압하고, 필요한 경우 무기 사용을 허가한다. 나 머지 인원은 주변을 통제하여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자는 누구도 놓치지 마라!”
명성이 자자한 미국의 SW.A.T. 팀이 신속하게 산개하며 물샐 틈없는 포위 대형을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이미 헬기를 통해 옥 상에 올라가 있던 특수 요원들이 일제히 로프를 타고 뛰어내렸 다. 그들은 완벽하게 대형을 갖추고 일제히 내려와 작전대로 육 층의 창문을 부수며 동시에 뛰어들었다. 완벽한 대원들의 모습 을 본 로렌스 경감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바보 같은 동양인 훈련된 힘을 잘 보았나? 우리를 보고 뭐라고? 상부는 대체 그런 미친 늙은이에게 왜………….’
로렌스 경감의 흡족함은 채 삼 초도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어 져 나갔다. 건물 육층에서 몇 번의 총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창 문 밖으로 무언가가 휙 던져졌다. 방금 돌진해 들어갔던 요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떨어지면 서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실족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에 튕기거나 던져져서 건물 창문에서 수십 미터를 날아 떨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건……………”
곧이어 안에 들어갔던 요원들이 공처럼 밖으로 내던져졌다. 총소리가 울리는데도 요원들은 끊임없이 던져졌다. 사람을 가지 고 공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건물 바로 밑에는 만약을 대비하여 추락사 방지용 매트리스가 빈틈없이 깔려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매트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땅에 처박혔다. 육 층 높이였고 방탄복과 보호 장비를 착용했으니 어쩌면 목숨을 건질지도 몰랐으 나 중상은 면할 수 없었다.
“육층에 무슨 괴물이 있는 거야? 이봐! 조장! 응답해!”
로렌스 경감의 기대와는 달리 두 명의 조장들마저도 최후로 비명을 지르며 동시에 육층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육층의 깨어 진 창문 너머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지무지한 거인 이었다. 육층의 큰 창문을 꽉 채울 정도의 덩치였다. 그가 요원 들을 집어 던진 것이 틀림없었다. 보호 장비도 없이 맨 가슴살을 그대로 드러낸 남자가 어떻게 요원들의 총격을 피해 그런 짓을 했는지 경감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렌스 경감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 저건 괴물이야! 집중사격! 저 괴물을………….”
로렌스 경감이 발포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그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크게 곰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건물 주변의 발밑 땅이 살아 있는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경험 많고 훈 련된 요원들이라도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땅거죽이 파 도처럼 들썩이며 엄폐물 대용으로 세워 놓았던 차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도 땅거의 파도에 휩 쓸리면 어김없이 공중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떨어져 내렸다. 수 백 명의 잘 무장된 경찰 병력이 한 사람의 고함 한 번에 순식간 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경황에 조준 사격을 할 수 있는 사 람은 없었다. 로렌스 경감조차도 허공에 떠올랐다가 머리부터 땅으로 처박혀 버렸다. 그러더니 몸은 또 솟구쳐 올랐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던 로렌스 경감의 팔을 누 가 꽉 잡더니 끌어당겼다. 박 신부였다.
“여긴 괜찮을 겁니다.”
아까 자신이 어중이떠중이라고 부르던 인물들이 둥글게 모여 있고, 그 앞에서 어린 동양인 꼬마가 양 손가락을 묘하게 굽히고 편 채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로렌스 경감의 눈에 들어왔다. 건물 주위는 여전히 미친 바다처럼 요동치고 있었지만 아이 주 변의 일정 반경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로렌스 경감은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건・・・・・・ 대체…………”
“그냥 눈속임입니다.”
박신부가 말하자 뒤에 있던 흡혈귀 같아 보이는 무서운 인상의 백인 남자가 중얼거렸다.
“눈속임은 아니잖소. 저자의 능력이…….”
그러나 박 신부는 경감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눈속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설명하기 힘듭니다.”
“아아, 이게 무슨…….”
“당신의 부하들은 충분히 우수합니다만, 이런 일에는 도울 수 없습니다. 이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물러서세요.”
로렌스 경감은 망설이다가 고집을 부렸다.
“이제는 더더욱 안 되겠소. 날 오만한 고집쟁이라 해도 좋지 만, 이런 위험한 일은 우리 몫이오. 당신들은 민간인이니,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당신들을 보호할…….”
“아아, 그러실 건 없대두요.”
박신부가 탄식했지만 로렌스 경감은 단호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꺼내들어 원 밖으로 뛰어 나가며 외쳤다.
“로렌스다. 비상사태다. 이미 허가된 군의 협조를 요청한다. 승인 코드는 FBJG1274R. 시가지이니 정밀 유도를 요청한다.”
“경감님! 안됩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박 신부가 만류하려 했으나 경감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즉시 내가 말하는 좌표로 미사일을 발사하여……….”
그러나 로렌스 경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돌연 건물 전체가 아 스름한 광채에 뒤덮였기 때문이다. 그 빛에 휘말린 모든 것이 정 지했다. 미쳐 날뛰던 땅거죽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허공에 떠올 랐던 사람들과 장비, 차량까지 중력에 의해 땅에 처박혔다. 수 백 명의 경찰들은 마치 순간적으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 도 하지 못했다. 몸이 굳어졌다기보다는 그들의 시간이 정지되 어 버린 것 같았다. 다만 준후의 주술 막 안에 있던 사람들만 이 상한 빛에 휩쓸리지 않았는데 그것도 잠시. 너무도 강대한 힘에 타격을 받은 준후가 컥 소리를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으아. 이게 뭐야.”
박신부가 재빨리 오라 막을 폈다. 그러나 박 신부도 순간 엄청 난 압력을 짊어지고 몸을 휘청거렸다. 허나 덕분에 퇴마사와 일 행은 이상한 광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스름한 빛은 다음 순간 온데간데없이 꺼져 버렸다. 승희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저게 뭔지……”
빛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박 신부가 헉 소리를 내며 풀썩 무릎 을 꿇었다. 현암이 깜짝 놀라 부축하려 하자, 박 신부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 이젠 괜찮아. 조금 더 계속되었다면 위험했겠지만.”
현암은 준후와 박 신부가 빛을 잠깐 막은 것만으로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곧바로 아주 늙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접적인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술수 같았는데 놀랍게도 그들 모두에게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오신 손님들이시여,
차분한 목소리였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준후가 커억 하며 토하기 시작했다. 현암조차도 어깨를 덜덜 떨었고 승희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냥 의사를 전달했을 뿐인데도 몸 안의 주술력들이 격동을 일으키며 내부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 다. 박 신부 한 사람만이 간신히 내색 않고 버텼지만 그도 내장 을 온통 쥐어짜는 느낌을 받았다. 목소리는 계속 말했다.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평온한 말투였지만 대단하다기보다는 희롱하고 비웃는 소리 처럼 들렸다. 건물 안에서 모습도 보이지 않고 쏘아 내는 주술이 이 정도라니. 현암이 이를 갈며 순식간에 공력을 끌어 올려 크게 소리쳤다.
“네가 마스터냐?”
현암의 음성에는 사자후의 무서운 기운이 실려 있어서 기류에 휩싸인 주변 사물들이 와르르 허공으로 솟구쳤고 정면의 유리창 도 박살 났다. 현암의 외침 소리가 사방에 울려 수없는 메아리를 만들면서 사방을 저르릉 울게 만들었고 솟구쳤던 물건들이 다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목소리는 태연히 말했다.
뭐라고 했소이까? 잘 안 들리는데………….
현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자는 지금 자신이 보인 힘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 박 신부가 차분하게 물었다.
“당신이 블랙서클의 마스터요?”
아하 그렇소이다. 미거하나마 불초한 이 몸이 그런 직책을 맡고 있소이다.
“마스터…………!”
현암이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월향을 뽑아 뛰어들 준비를 갖 추었으나 준후가 잡았다.
“형, 조, 조심…… 흥분하지 말아요. 저자는 너무・・・・・・ 너무……..”
목소리가 말했다.
그런데 들어오지 않으실 겁니까?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하로 내려오 시면 만날 수 있을 테니, 적잖이 기대가 되는군요. 어서 오십시오. 나의 친애하는 적들이시여.
목소리가 사라져 버리고, 동시에 닫혀 있던 건물의 정문이 누 가 조종이라도 한 것처럼 저절로 활짝 열렸다. 다른 경찰들은 모 두 몸이 굳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겠지만 퇴마사들과 동료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현암조차도 아연해져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도대체 이런 게 가능한 겁니까? 이건 너무.”
뒤에 있던 윌리엄스 신부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며 기도문 을 외웠다. 뿐만 아니라 준후, 승희는 물론 박 신부마저도 절망 적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건물 안에서, 간접적으로 잠깐 힘을 보 인 것인데 이 정도라니. 그러나 박 신부는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순 없잖나.”
현암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렇죠. 갑시다.”
박 신부는 뒤를 보며 말했다.
“모두 같이 갈 건 없습니다.”
그 말에 백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 은 현장을 수습하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퇴마사들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백호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저에게는 느껴지지 않아 적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이기실 겁니다. 전 믿습니다.”
그러자 승희가 슬쩍 웃으며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길게요.”
그러나 백호가 보기에 승희의 표정은 죽으러 가는 사람 같았 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 간 후, 백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로렌스 경감이 굳은 손으로 쥐고 있는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로렌스 경감이 하려다 못한 미사일 타격을 지시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