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4화 – 왈라키아의 밤 4 : 저주받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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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3권 4화 – 왈라키아의 밤 4 : 저주받은 마을


저주받은 마을

날이 어두워서인지 마을 공회당쯤으로 보이는 제법 큰 건물도 불이 꺼진 채였고, 사람의 모습이라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머뭇거리다가 건물 앞에 서서 문이 혹시 열려 있지 않나 몇 번 잡아당겨 보았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하죠? 소리쳐서 사람을 불러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박신부가 말하자 이반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박 신부 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크게 소리를 쳤다. 아마도 누가 없느 냐는 뜻 같았다. 그러나 안에서도, 하다못해 다른 집이나 길쪽 에서조차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박 신부는 초조한 나머지 다른 곳으로 가 보자며 옷자락을 잡 아당겼으나 이반 교수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더니 다시 큰 소 리를 질렀다. 몇 번 그러고 나자 공회당 한쪽의 창문이 열리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가 곧 창문을 닫았다.

“분명히 안에 누가 있기는 합니다. 아마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겠죠?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저 사람에게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공회당을 지키는 사 람이라면 적어도 대화는 통할 테니까요.”

이반 교수는 빠르게 박 신부에게 설명을 하더니 큰 소리로 그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공회당의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한 노파 가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노파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영어로 인사를 했다.

박 신부는 대답 대신 노파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노파는 짙은 회색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머리에는 깊숙하게 두건을 눌 러 쓴 탓에, 얼굴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허리가 구부정하게 많이 휜 것이 나이가 무척 들어 보였다. 그러나 몸은 상당히 정정했고 목소리도 노인치고는 카랑카랑한 편이었다. 조 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말 이 통하겠다고 여긴 박 신부는 반가운 마음으로 물었다.

“영어 할 줄 아십니까?”

“예. 물론 할 줄 알지요.”

노파는 기이하게 억눌린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노파의 목 소리는 어딘가 조소를 띠고 있어 박 신부는 등골이 섬뜩함을 느 꼈다. 그러나 딴생각을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반 교수도 박 신부를 쳐다보며 눈을 찡긋하더니 노파에게 물었다.

“이 마을은 어떤 마을입니까? 도대체 지나다니는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네요.”

“이 마을요? 히히히힛.”

노파는 높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미 밤도 깊어서 사방은 캄캄해졌고 짙은 안개가 드라큘라 성 쪽에서부터 흘러 내 려오고 있는 터라 웃음소리는 더욱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마을은 저주받은 마을이랍니다. 이곳 사람들을 보았다면 아시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히히히.”

“저주받은 마을이라뇨?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 마을에는 정상적인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답니다. 드라큘라 공의 저주 때문이지요.”

이반 교수는 흥미를 느꼈는지 노파에게 갖가지 질문을 했으 나 지금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박 신부는 이반 교수 의 말을 가로막고는 노파에게 질문을 했다.

“그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희를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저희는 같이 온 일행을 찾고 있습니다. 조그맣고 하얀 옷을 입고 있고요. 저 같은 동양인이랍니다.”

“동양인 꼬마라…. 히히히. 나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경찰서라든가 도움을 받을 만한 공공 기관 같은 것이 없습니까? 그 아이가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니거나 할 아이는 아닌데요.”

“히히히 여기는 그런 곳은 없지요. 각자 나름대로 알아서 살 아가는 곳이랍니다.”

박신부는 노파가 비아냥거리는 듯 웃기만 하자 짜증이 났다.

“집이 수십 채가 넘는데 경찰서라거나 하다못해 공회당이나 읍장 같은 사람들도 없단 말입니까? 이 마을의 대표자가 누구입 니까? 도대체.”

“대표자요? 히히히히. 만나 봐야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이반 교수도 박 신부를 거들기 위해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 마을에 읍장 같은 사람은 있을 것 아닙니까?”

“만나 봐야 별로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러니 아실 필요가 없 지요. 히히히.”

“도대체 읍장이 누구기에 그러십니까?”

“바로 나랍니다. 이 마을에서 다른 곳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마을의 대표를 찾는다 면 내가 마을의 대표라고 할 수 있지요. 히히히.”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이 마을은 어 떻게 되어 먹은 마을이기에 멀쩡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이런 늙 은 노파가 마을의 대표 역할을 하는, 그것도 외부와 말이 통하는 단 한 사람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준후를 어떻게 찾아야 될지 막 막하던 차에 기가 막힌 말을 듣자 박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성호 를 그으면서 “아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파가 주춤하면 서 뒤로 물러섰다. 박 신부가 성호를 긋고 나자 노파는 몸을 떨 더니 박 신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박 신부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술을 쓴 것도 아니 고 습관적으로 성호를 그은 것뿐인데 왜 몸을 떠는 걸까? 수상쩍었다. 저 노파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노파는 박 신부를 째려보고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눈을 빛내면서 말을 꺼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면 빨리 찾아야겠군요. 그렇죠?”

“예, 물론입니다.”

노파가 수상스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준후를 찾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박 신부는 황급히 대답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으로요? 안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까?”

“방송 시설을 갖춘 곳이 있으니까 방송으로 아이를 찾아보죠. 그러면 도움이 되겠죠? 히히히.”

노파는 말을 마치고는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박 신부가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이반 교수가 뒤에서 작 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상합니다. 조심하세요.”

박신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노파의 뒤를 따라 건물 안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암군! 연희 언니! 어디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승희는 큰 소 리로 두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이 되돌아올 뿐 이었다. 현암을 찾아 방으로 들어갔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책꽃이에 몸을 기댔는데 그것이 빙글 돌아가 버릴 줄은 상상조차 하 지 못했다. 승희는 미끄럼틀 같은 것을 타고 한참이나 아래로 미 끄러져 내려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떨어져 내 린 이곳은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칠흑 같 은 암흑이라 더욱더 마음이 불안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끄 러져서 바닥에 닿는 순간 발목을 삐어 몸을 일으키기조차 힘들 었다. 승희는 불안한 심정으로 손을 뻗어서 사방의 벽을 만져 보 았다. 사방의 돌 벽은 이끼가 잔뜩 끼어서 차갑고 눅눅했다. 기 분이 나빴다. 승희는 벽을 더듬어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으나 특 별히 표가 날 만한 것이 없어서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자신 이 미끄러져 내려온 곳으로 도로 올라갈 수 없을까 하고 찾아보 았지만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구멍 같은 것은 만져지 지 않았다. 하지만 한쪽 방향은 틔어 있는 것 같았다. 승희는 절 뚝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차례 바닥의 미끄러 운 이끼를 밟고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벽을 짚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런 제기랄! 어쩌다가.

현암이 방 안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도 자기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승희의 머릿속에 현암이 먼저 이리로 미끄러져 앞쪽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승희는 현암이 있 만한 방향을 향하여 소리쳐 불렀으나,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아이고! 큰일이네. 이걸 어쩌지.’

하필이면 승희는 세크메트의 눈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준 후를 통해서 도움을 받아 볼까 생각을 했지만, 꼭 필요한 이때 세크메트의 눈을 연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 이렇게 되면 우리 셋은 전부 각자 흩어진 것 아닌가? 내 가 들어가기 전에 현암 군은 없어져 버렸고 연희 씨는 뒤에 남았으니..’

승희는 어떻게 해야 될까 한참을 고심했다. 먼저 떨어졌을지 모르는 현암을 찾아서 앞쪽으로 가야 될까. 아니면 연희가 함정 에 빠져서 같은 곳으로 떨어져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도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볼까. 잠시 망설이던 승희는 현암을 따라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건물 안에 있으니만큼 현암과 자신보다는 덜 위험할 것이고, 또 만약의 경우에는 세크메트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 연락이라도 될 것이 아닌가.

‘투시를 해 볼까?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그걸 알면 길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몰라.’

승희는 걸음을 멈추고는 관자놀이에 양 손가락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잠시 후 뭔가가 전해져 오는 순간,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이상한 기운들이 자신의 주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현암과 연희의 기운도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이 분 명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느껴진 게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 지된다는 게 영 기분 나빴다. 승희는 놀란 나머지 눈을 번쩍 떴 으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승희는 황급히 눈을 감고 자기 가 혹시나 잘못 투시한 것이 아닐까 해서 다시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투시를 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느낌은 멀지 않 은 곳에 있었다. 그 수는 셋. 차갑고 음울하며 눅진눅진한 느낌. 그리고 악의로 가득 찬 느낌. 승희는 이를 꾹 악물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흡혈귀들이 틀림없어!’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단단히 경계심을 품고 노파의 뒤를 따 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서 별다른 수상한 기운은 느 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파는 건물 안, 그러니까 널 따란 강당의 다른 문 앞에 서서 촛불인지 램프인지를 들고 손짓 을 하는 것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뒤쪽으로 나가라는 의도인 것 같았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눈빛을 교환하고 노파의 뒤를 따랐다. 노파는 박 신부와 이반 교 수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자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박 신부 와 이반 교수가 건물을 통과해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그곳은 어 두침침한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확성기로 사람들에게 아 이를 못 보았느냐고 광고를 해 준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반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박 신부도 궁금하던 터라 재빨리 대꾸를 했다.

“그러게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이반 교수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 신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노파의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수상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저 노파 말고는 도움을 청할 만한 다른 사람이 없었다. 노파의 정체가 수상하다면 더욱더 뒤 를 따라가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노파, 아니면 그 일당이 준후를 납치했다면?

‘유인이라 해도 별수 없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 어가야지.’

만약에 대비해서 몸에 기도력을 희미하게 모으면서 박 신부는 눈짓으로 이반 교수에게 따라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반 교수도 메고 있던 작은 가방 속에 손을 넣어서 뭔가를 부스럭대면서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십 분이나 걸었을까. 얼굴에 걸리 는 거미줄과 푸푸득 날아다니는 풀벌레들, 그리고 박쥐를 비 롯한 날것들을 헤치면서 숲을 지나자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낮은 돌기둥들이 가득 서 있었다.

“아니, 여긴 묘지가 아닙니까?”

앞서 가고 있던 노파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자욱한 안개 속 에서 퍼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순간 등골 이 써늘해졌다.

“어서 따라와요. 확성기는 저쪽에 있는 교회의 탑 안에 있소. 그 꼭대기에서 소리를 쳐야 마을에 다 들린다 이겁니다. 히히히.” 

노파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한바탕 떠들고는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반 교수와 박 신부는 점점 의혹이 짙어져 갔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계속 노파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갑자기 이반 교수가 박 신부의 소매를 살 짝 잡아당겼다. 박 신부는 이반 교수가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 라보았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규칙적인 것 같기도 하 고, 또 달리 보면 매우 힘없는 걸음걸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흥얼 거리면서 안내하는 불빛도 없이 줄을 지어 가는 것이었다.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무척 의아했지만 노파를 잃어버릴세라 곧 그 대열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서 간 노파의 뒤를 따라 열심히 발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쪽으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 나가 살금살금 따라오고 있는 것을,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현암은 어둠 속에서 태극패에 힘을 집중하여 사방을 훑어보 았다. 분명 자신은 흐늘거리는 불빛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는 벽난로 속으로 어렴풋한 불빛이 사라져 가 는 것을 보고 무턱대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벽난로의 안쪽에는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뚫려 있었고, 불빛은 그리로 흘 러 들어가고 있었다. 현암은 앞에 도망가고 있는 물체가 틀림없 이 사람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영이나 그 비슷한 존재였다면 촛 불을 들고 다닐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던 현암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곳은 중세의 고문실이었다. 안쪽에 커다란 침이 박혀 서 뚜껑을 닫으면 사람의 눈과 심장과 그 외 여러 급소들을 찌르 게끔 만들어진 아이언 메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모양의 관. 그리고 먼지와 거미줄이 시커멓게 낀 화로와 부젓가락들. 작두 와 비슷한 칼들, 그리고 철창. 어떤 용도에 쓰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틀림없이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 전문적 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고문 도구들.

어두웠을 땐 몰랐는데 주변에 그런 흉기들이 잔뜩 널려 있는 것을 보자,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지옥에 빠져든 기분이 들었 다. 그나저나 불빛의 주인공은 어디로 간 걸까? 현암은 중얼거 리다가 태극패에 약간의 공력을 더 가해서 사방을 자세히 훑어 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창과 도끼 달린 칼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현암은 재빨리 몸을 피했고, 무기들은 너무 오래 된 것이라 그런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요란스럽게 부서지며 사 방에 먼지와 파편을 날렸다. 자신이 잘못 건드린 것인지, 아니면 누가 민 것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현암은 태극패를 왼 손에 옮겨 쥐고 월향검을 빼 들었다. 태극패에 가해지던 기공력 이 사라지자 사방이 어두워졌고, 현암은 조용히 선 채 주변에 뭔 가 나타나지 않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철컹거 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람 발소리 비슷했는데 쇠붙이가 요란하게 철컹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삐거 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현암은 월향검을 잡고 있던 오른손에 기 공력을 잔뜩 가했다. 그러자 파르스름한 검기가 뿜어져 나오면 서 사방이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밝아졌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커다란 철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철갑옷은 심하게 녹이 슬었는지 무척이나 힘들게 다가오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녹 부스러기를 떨구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는 뭐냐!”

물론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현암은 큰 소리로 고함부터 쳤 다. 그러자 다가오고 있던 철 갑옷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더 니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현암은 의외의 사태에 당황하 여 주춤했다. 그 순간 뒤에서 육중한 것이 날아들어 현암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현암은 의외의 기습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 다. 그러나 빗맞기는 했어도 등에 가해진 힘은 어마어마했고, 현 암은 그 충격에 몇 바퀴를 굴러 한쪽 구석에 나자빠졌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그쪽을 바라보니 캄캄한 암흑 속에 분명히 누군 가 있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 렸다.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주 날카롭 고 비틀린 듯한 소리였다.

“넌 누구냐!”

다시 현암이 소리쳤다. 그러나 현암의 질문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상대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현암은 뭔가가 자신에게 달려드 는 느낌을 받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바로 옆으로 커다란 쇠뭉치가 날아와 돌 벽을 움푹 깎아 내고는 원위치로 돌 아가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힘이었다. 만약 고개를 틀지 않았다 면 현암의 머리는 한 방에 부서졌을 것이다.

현암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현암은 재차 가해 온 상대의 쇠뭉치를 피하기 위해 몸을 한 바퀴 굴렀다. 그러나 쇠뭉치는 계속 몸을 굴리는 현암의 바로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작렬하며 무지막지한 굉음을 울려 댔다. 이런 칠 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공격을 할 수 있는 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기분 나쁜 것은 저편 에서 들려오는 속삭이는 소리였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 했는데 대체 무슨 수작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상대는 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것인지, 이리저리 피 하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들이 현암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연희는 사태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현암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자 신과 같이 들어온 승희는 어떻게 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 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런 힘도 없는 자 기만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연희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연희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 오는 방 안을 겁먹은 눈빛으로 조 심스레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그리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예전에 침실로 사용했던 곳인지 벽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가운데에는 낡은 침대가 한쪽 벽에는 책꽂이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도 대체 어디로 간걸까? 승희는 혹시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닐까? 그 런 생각이 불현듯 들어 재빨리 문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승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나가서 기다려야 되나?’

연희는 불안한 마음에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 혼자서 이곳에서 오래 버틸 수야 없지. 밖에 나가서 기다려 보자.’

승희를 몇 번 소리쳐 부르다가 연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 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가 자신을 빤 히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 연희는 몸이 떨려 옴짝달싹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초조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마에 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동안 그러 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를 악물고 와락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까 그 초상화만이 걸려 있을 뿐. 연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승희와 현암을 소리쳐 불 렀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연희가 아래로 내 려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음산한 남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뭐 하고 있는 거요?”

너무나 놀란 연희는 까무러칠 뻔했으나 가까스로 휘청거리는 몸을 추스르고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가 말을 건단 말인가?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 같은데……… 혹시 초상화가…’

연희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벽에 걸려 있는 흐릿하게 보이는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묘지를 지나서 낡은 교회로 향하고 있던 박 신부와 이반 교수 의 눈에 앞서 가고 있던 노파의 흐릿한 불빛이 점차 가까워졌다. 안개가 자욱해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아른 거리는 것으로 보아 노파가 말했던 교회가 가까워진 모양이었 다. 노파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깔깔거리더니 교회 안으로 들어 섰다.

“빨리 와요, 빨리. 히히히.”

박 신부와 이반 교수는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박 신부가 이 반 교수의 뒤를 따라 교회 안으로 발을 내디디려는데 갑자기 어 엇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이반 교수의 몸이 왈칵 교회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박 신부는 순간적으로 기도력을 모아 오라력을 발산하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베케트의 십자가를 손에 움켜쥐 었다. 십자가에서 우웅 하는 소리와 기도성이 전달되면서 주변 이 환하게 오라로 빛났다.

교회인 줄만 알았던 건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장히 낡은 건 물일 뿐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매우 낡은 건 물이었는데 안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반 교수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박 신부는 급한 김에 기도력을 발해서 오라의 구체를 우르르 내쏘았다. 오라의 구체를 맞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박 신부 의 눈에 이반 교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이반 교수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도 불구하고 냉정을 잃지 않고 목을 한 번 쓰다듬더니 어깨 한쪽에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그런 이반 교수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들이 들어왔던 문 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혀 버렸다. 박 신부가 얼른 되돌아서서 있 는 힘을 다해 밀었는데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물 안의 사람들은 비틀거리는 몸을 수습하고는 흉흉한 기세로 이반 교수 와 박 신부 쪽으로 다가들려 하고 있었다.

이반 교수가 컥 하면서 기침을 하더니 쉰 목소리로 박 신부에게 외쳤다.

“저들은 흡혈귀들입니다.”

“예? 흡혈귀라고요?”

깜짝 놀란 박 신부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위쪽에서 깔깔거리 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의 노파의 목소리와 비슷하긴 했 지만 그보다도 훨씬 젊은 음성이었다.

“박신부, 오랜만이군. 나를 못 알아봤단 말인가? 섭섭하게……….”

박신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럼 그 노파는 나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박 신부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사람의 형체는 눈에 띄지 않고,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냐!”

박 신부가 고함을 지르자 다시 한번 앙칼진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나를 벌써 잊었나? 몇 번이나 싸우고도. 호호호.”

“아니! 너는…………… 코제트!”

박 신부는 분함에 입술을 깨물고 보이지도 않는 코제트에게 외쳤다. 주변에서는 흡혈귀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 었다. 박 신부는 몸에서 오라를 뿜어냈다. 흡혈귀들은 박 신부의 오라를 보자 달려들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박 신부가 소리쳤다.

“이 정도로 나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하하. 물론 당신의 능력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정상인이 아니라 해도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지. 그런데 어떤가? 박 신부, 당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해칠 수가 있을까? 내기해도 좋아. 그러지 못한다는 데 걸지. 호호호.”

이반 교수가 코제트의 말을 알아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런 고약한!”

“그럼 알아서들 잘해 봐라. 그리고 이건 내 마지막 선물이다.”

코제트의 말이 끝나더니 위쪽에서 조그만 덩어리가 날아왔다.

작은 덩어리는 땅에 떨어지면서 확 하고 터져 버렸고, 동시에 희 뿌연 연기와 함께 독한 냄새를 뿜어냈다.

“연막탄. 이런 제기랄!”

연막탄의 연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 다. 연기는 독한 냄새까지 나서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게 다가 눈까지 따끔거려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이반 교수의 모습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이반 교수님! 벽에 붙으세요!”


박 신부는 뒷걸음을 쳐서 벽에 붙어 선 채 오라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먹먹한 회색 구름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 속 에서 준후는 정신을 차렸다. 사방은 온통 캄캄했고 저만치 앞에 아른아른한 불빛이 보였다. 자신의 몸은 여전히 흔들린 채로 어 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파도를 탄 것 같기도 하고 구 름을 탄 것 같기도 한 울렁거리는 흔들림. 앞장선 사람이 횃불을 들고 가는 것 같았다. 준후의 주변은 매우 어두웠다. 준후는 고 개를 돌릴 기력조차 없어서 간신히 천장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천장은 낮고 울퉁불퉁했다.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였고, 오래 묵은 듯한 곰팡이의 이끼 냄새가 준후의 코를 괴롭혔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일가? 나를 어디로 옮기고 있지?’

준후는 자꾸 감기는 눈을 뜨려고 무진 애를 썼다. 뭔가 생각하 고 있으면 정신을 차릴 수도 있을 텐데.

‘얕은 천장, 어둡고 퀴퀴한 냄새..’

가만히 단서를 모아 보니 이곳은 지하의 통로나 토굴 같은 곳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후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몸에서 기력이 다 빠져나간 것은 물론이고 뭔가로 몸을 꽁꽁 묶어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거야. 도대체…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가다듬다 보니 다시 머리가 맑 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꼼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수 를 부릴 재간이 없었다. 준후는 자신이 무엇에 의해서 옮겨지고 있는 것인지, 그러니까 들것이나 수레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누 군가에 업혀서 옮겨지는 것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몸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간신히 머릿 속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과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 두 가지뿐.

준후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누가 본 모양이었다. 준후의 눈에 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소리를 질렀던 노인인 듯한 카 랑카랑한 목소리가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 상한 냄새가 나는 헝겊 쪼가리가 준후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준후는 순간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

‘이 냄새 때문에 내가 지금 이 모양이 된 거야.’

준후는 입을 딱 다물고 숨을 쉬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이나 그 러고 있자 냄새 나는 헝겊은 코에서 떨어졌고, 준후는 일부러 눈 을 감은 채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였는지 머 릿속이 점점 맑아졌고 시간이 지나면 몸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때 불현듯 자신의 소맷자락 속에 있는 세크메트의 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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