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5화 – 왈라키아의 밤 5 : 함정
함정
승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감옥과 같은 좁다란 통로에서 몸을 떨면서 흡혈귀들이 어느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열 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근처에서는 쥐나 미물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의 기색과 연희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 졌다. 그 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사람들이 성안에서 움 직이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런 것에까지 주의를 기 울일 여유는 없었다. 지금의 승희로서는 현암이나 연희가 무사하 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자신의 문제가 더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이 한꺼번에 다가오다가 흩어지고 있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지? 좋아. 그렇다면 이대로 여기 앉아 있다가 순순히 잡힐 수는 없지. 암, 내가 누군데 절대 그럴 수는 없어.’
그럼에도 승희는 흡혈귀들과 마주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어떻 게 손을 써야 할지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기랄!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뭔가 한 가지쯤 배워 놓는 건 데. 나는 그냥 연료통인가? 남들 힘이나 대 주고 스스로는 보호 할 수조차 없으니.’
승희는 속으로 오만가지 불평을 털어놓으면서 억지로 용기를 내어 어둠 속을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발목을 삔 상태라 걸음을 옮기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도대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연막탄에서 계속 뿜어 나오는 연 기 때문에 앞을 식별할 수가 없었고, 최루가스도 섞여 있는지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흡 혈귀로 변한 마을 사람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처지라 그 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놓아야 할 터였다. 예측한 대로 박 신 부가 방어의 목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던 오라 막의 한쪽 구석에 둔중한 충격이 왔다. 흡혈귀 하나가 부딪혔다가 나가떨어진 것 같았다. 박 신부는 그쪽을 향해서 십자가를 들이대려 했으나 이 번엔 반대쪽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박 신부의 머리를 아슬아슬 하게 스치고 벽에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박 신부는 반 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흡혈귀들은 달려들었다가 박 신부의 오라에 튕겨 나가자 괴성을 지르면서 돌 같은 것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반 교수는 어디에 있지? 이 연기, 연기만 없어도..
“이반 교수님!”
박 신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저쪽에서 이반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이반 교수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뿜어 나오고 있던 연막탄의 연기가 슬그머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연기가 점점 옅어지면서 십자가와 총을 들고 서 있는 이반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보니 이반 교수가 들고 있는 총의 총구에는 물방울 같은 것이 떨 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쏘는 총이 아니라 물총이었던 것 이다. 아마도 흡혈귀와 대적을 예상했던지 이반 교수는 물총에 성수를 담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성수를 연막탄을 향 해서 쏘아 연기를 꺼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연기가 사그라지자 건물 안은 주변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박 신부도 투지가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만치에서 몇 명의 흡혈귀들이 보였으나 별 문제는 아닐 것으로 보였다. 몸 에서 오라력을 쭉 끌어 올려서 커다란 빛의 구체로 몸을 감싼 다 음, 박 신부는 흡혈귀들이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들 은 찬란한 오라 빛에 완전히 질려 버린 듯, 별다른 저항을 하지않고 기이한 소리를 지르며 벽 쪽으로 주춤거리며 밀려나갔다. 박 신부는 흐릿하게나마 그런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일그러 지고 한쪽이 뒤틀린 얼굴들. 그리고 초점이 없는 눈망울. 비록 지금은 빨갛게 눈이 변해 있고 기다란 이빨이 솟아나긴 했지만 분명 저들은 흡혈귀가 되기 전에도 정상적인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대로 지능을 갖추지 못한 뇌성마비 환자들. 어쩌다가 저런 꼴이 되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박 신부는 더더욱 분노가 들끓었고, 한편으론 흡혈귀로 변한 자들이 가여웠다.
박 신부가 흡혈귀들을 꼼짝 못하게 벽 쪽으로 밀어붙이자 이 반 교수는 성수를 담았던 물총을 집어넣고는 나무 말뚝을 꺼내 들었다. 뾰족하게 깎여 있는 생나무 말뚝으로 흡혈귀의 심장을 찌르면 흡혈귀가 영원히 죽는다는 전설이 언뜻 박 신부의 머릿 속을 스쳐갔다.
“안돼요!”
이반 교수는 금방이라도 나무 말뚝을 그들에게 꽂을 기세였다.
“무슨 말입니까? 이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흡혈귑니다. 후환을 없애려면……….”
한쪽 구석으로 몰린 세 명의 흡혈귀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릴 뿐, 십자가에서 나오는 빛과 박 신부의 몸에서 뿜어져 나 오는 오라에 의해 완전히 전의를 잃고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하 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흡혈귀에게 물렸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으라는 법은 없어요. 나는 예전에 흡혈귀 일족 과 싸워 본 경험이 있죠.”
“그렇지만 지금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좌우간 이들을 죽여서는 안 돼요. 힘을 쓰지 못하게 제압하면 될 겁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허약한 놈들이 우릴 해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다니, 코제트도………….”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박 신부의 뒤로 검은 안개 덩어 리가 훅 하고 밀려들었고 이를 본 이반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앗, 신부님!”
그러나 박 신부는 흡혈귀들만을 쳐다보고 말을 하느라 미처 등 뒤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가 박 신부 의 오라 막과 부딪혀 폭음을 내자 박 신부는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퍽 소리를 내며 벽 속에 파고들 듯이 부딪혔다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박 신부는 엄청난 충격에 온통 긁히고 터져 상처 투성이가 되었지만 반사적으로 손을 움켜쥔 덕에 베케트의 십 자가와 은 십자가만은 간신히 놓치지 않았다.
놀란 이반 교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노파의 모습 대 신 금발 머리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요염한 여자가 서 있었다. “……”
내가 정말 이 멍청한 세 명에게 여기를 맡기고 가 버릴 줄 알았어?
이제는 못 빠져나가.
말이 아닌 마음으로 전달되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 는 움찔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마음 같지 않았다. 뒤에 서 당한 타격이 너무도 컸다.
현암은 어둠 속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쇠뭉치를 간신히 피해 몸을 굴리다가 마침내 막힌 벽에 다다랐다. 계속 몸을 굴리던 방향으로는 벽이 떡하니 가로막았고, 반대쪽으로 몸을 되돌리기에는 날아드는 쇠뭉치의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순간, 현암의 머리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조금 아까 우르르 쏟아졌던 창과 나무 막대기 더미…………. 현암이 다다른 막다른 벽 에도 나무 막대기와 창들이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쇠뭉치 가 현암의 머리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박히자, 현암은 한쪽 발로 벽에 기대어져 있던 창이며 나무 막대 기를 휙 훑었다. 그러자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쏟아져 내린 여러 무기들이 쇠뭉치 끝에 달려 있던 쇠사슬을 깔아 버리는 바람에 상대가 쇠뭉치를 뺄 수 없게 되었다.
잠시 동안 그 쇠뭉치가 썩은 나무 더미 속에서 버둥거리며 돌 아가는 동안, 현암은 자세를 바로잡고 왼쪽 팔목에서 월향을 꺼 내고는 검기를 주입했다. 비로소 사방이 희미하게 밝아지면서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현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이 미터는 훨씬 더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거인 거인이 쇠사슬 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웬만큼 담력이 센 현암으로서도 그 덩치 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찔한 정도였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거인의 머리 위에는 또 하나의 작은 머리가 있었다. 거인의 눈엔 검은자위가 없이 흰자위만 번뜩거리고 있었고, 거인의 머리 위 에 솟은 또 하나의 작은 머리에는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커다란 눈이 껌뻑거리며 현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게 도대체 뭐지?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인가?’
현암은 깜빡거리는 커다란 눈을 자세히 살펴보려 했으나, 머 리 위에 달린 작은 머리가 소곤거리며 속삭이자 거대한 몸뚱어 리는 나무 막대기 사이에 배배 꼬여서 기동성을 잃은 쇠줄을 집 어 던지고는,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쇠줄을 그대로 현암 쪽으 로 뿌렸다. 쇠줄이 바람을 가르는 금속성을 내며 세차게 현암에 게 날아들었다. 현암은 기공력을 돌리면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 는 쇠줄을 오른손으로 막았다. 쇠줄을 받자 상당한 타격이 온몸 에 은은하게 전해져 왔다. 기공력으로 팔을 완전히 굳히고 있는 데도 이 정도의 타격이라면 쇠줄을 휘두르고 있는 거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현암이 비틀하면서 쇠줄을 받아 내자 날아온 쇠줄은 현암의 팔에 반쯤 칭칭 감겨 버렸고 거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현암을 왈 칵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현암이 아무리 공력으로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다리까지 공력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는 한 『천근추 (錐)』와 같은 고서에 나오는 술법들은 쓰기가 어려웠고, 그 렇다고 준후의 낙지생근술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서는 체중이 가벼운 쪽이 당연히 끌려가게 돼 있는 것이다. 현암 은 이를 악물고 버텨 봤지만 그것도 잠시, 허공을 날아 거인 쪽 으로 끌려갔고, 왼손으로 쇠줄을 당긴 거인은 엄청난 힘을 실어 무지막지하게 큰 오른 주먹으로 날아오는 현암을 맞받아쳤다. 현 암은 오른팔로 거인의 주먹을 가리려 했으나 오른팔에는 쇠줄이 감겨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암은 할 수 없이 왼팔로 거인의 주먹을 막아냈다. 하지만 실수였다. 쾅하는 소 리가 들리며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고, 현암은 뒤로 한참이나 나 가떨어졌다. 왼쪽 팔목에서는 우두둑 하는 뼈 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자신의 뒤쪽에 있는 초상화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까 느꼈던, 즉 초상화가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은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그러 면 지금 들린 이 소리는 어느 곳에서 난 것일까? 아무래도 연희 는 초상화의 타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그 초상화는 여느 초상화들처럼 밋밋한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희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초상화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의 주인공 드라큘라 공은 특 별히 미남이거나 풍채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과 강렬한 집념을 그림 속에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림에서 소리가 났을리가. 신경과민인가?’
연희는 그림에서 눈을 돌려 뒤로 돌아서고는 현암과 승희를 소리쳐 부르려 했다. 하지만 순간 재차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이곳은 깜깜했다. 아까도 현암이 태극패로 빛을 발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그림 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연희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한참 그 상태 로 서 있는데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오래 있지 않는 것이 좋소. 조심하시오.”
“누구얏!”
연희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는 몸 을 한 바퀴 휙 돌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연희는 주먹을 꾹 쥐었던 오른손 손아귀가 간질간질하는 것 을 느꼈다. 연희는 긴장한 채로 오른손을 펴서 힐끗 보았다. 손에서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이건………….”
준후가 전에 심어 주었던 부적의 글자. 그것이 아직도 연희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래. 이게 있으면 일단 내 몸은 지킬 수 있지.’
연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불빛이 어디에 있기에 자 신이 그림을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다른 곳은 여전히 캄캄했 다. 그렇다면…………. 연희는 초상화 쪽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 다. 분명 어둠 속인데도 초상화는 또렷하게 보였다. 어디선가 빛 이 나와서 밝혀 주는 것 같지는 않는데도 아무래도 그림 자체에 서 희미한 빛이 솟아 나와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반 교수가 비틀거리고 있는 박 신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 웠다. 코제트는 여유 넘치는 미소를 흘리면서 천천히 흡혈귀들 앞으로 다가섰고, 이반 교수는 박 신부를 부축한 채 코제트의 반 대쪽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연막탄이 꺼져서 연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쪽 구석에는 멍청하게 인형처럼 서 있 는 흡혈귀들이 보였고, 그 앞쪽에서 금발 머리의 코제트가 걸음 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박 신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코제트의 한 쪽 손에는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뭉게뭉게 엉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빛을 내는 램프가 하나 들려 있었다.
박 신부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있는 힘을 다해 코제트에게 소리를 쳤다.
“이 요녀 같으니! 도대체 이번엔 무슨 목적으로 나타난거냐?”
윌리엄스 신부님을 납치한 것도 네 짓이냐!”
호호호. 잘 아는군. 하긴 그걸 아니까 여기까지 찾아왔을 테지만 말이야.
“윌리엄스 신부님은 어디 있느냐?”
호호호. 묻는다고 쉽게 가르쳐 줄 것 같아? 그럴 거면 뭐하러 그 얼 뜨기를 납치해서 너희를 이곳까지 끌어들였겠어?
코제트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더니 마음속으로 말을 보내지 않 고 영어로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얼뜨기를 데려오기만 하면 너희는 당연히 찾아올 것이라 고 짐작하고 있었지. 저 바보 같은 교수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 에게 연락을 취할 테니까. 너희는 당연히 트란실바니아의 우리 근거지인 이성으로 올 것이고. 호호호.”
코제트는 모든 일이 다 되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여유만만 한 웃음을 띤 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너희 바보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흐트러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냐. 그러나 이번만은 꼼짝 못할걸? 너희는 뿔뿔이 흩 어져 있어. 꼬마 놈은 벌써 우리 손에 들어와 있고, 현암인가 하 는 멍청하고 힘만 믿는 놈도 아마 혼자 성안으로 들어가서 지금쯤은…………… 후후훗! 그리고 너도! 내 손으로 네가 바라 마지않는 하늘나라로 보내 주지. 후후후. 마지막 기도를 올릴 시간 정도는 줄게.”
“내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으냐!”
박 신부는 이를 갈면서 허리를 곧게 펴려고 했으나 충격이 가 시지 않는지 아직도 몸을 비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코제트는 그것을 보고 불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더니 조소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 신부가 겨우 한 방 맞고 힘을 못 쓰네? 유명무실이잖아? 호호. 기도는 다 올렸어? 시작해도 되겠어?”
“이런 괘씸한!”
박 신부가 소리를 치면서 순간적으로 손에 들고 있었던 십자 가에 기도력을 집중했다. 박 신부는 왼손에 베케트의 십자가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도력이 배가(加)되었고, 그 로 인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십자가에 푸른 성령의 불길이 단번 에 맺혀졌다. 박 신부는 틈을 주지 않고 코제트를 향해서 십자가 를 던졌다. 십자가는 날아가면서 큰 십자 모양의 불길을 내뿜어 갔다. 과거에 브리트라와 상대할 적에 썼던 술수. 그러나 믿어지 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십자가가 코제트의 앞쪽으로 날아드는 순간, 비웃음을 흘리며 서 있던 코제트의 모습이 마치 영화 필름 이 꺼지듯 휙 하고 없어지더니 저쪽 옆에 다시 나타났다. 성령의 불길을 가득 담은 십자가는 애꿎게 뒤에 서 있던 한 흡혈귀에게 부딪히면서 큰 굉음과 함께 번쩍거리며 빛을 냈다. 박 신부의 십 자가를 정통으로 맞은 흡혈귀는 온몸에 푸른 불이 이글이글 타 들어 몸이 녹아내리며 썩은 나무둥치처럼 쓰러져 갔고, 코제트 는 저쪽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띤 채 고개 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어머, 어머, 신부라는 자가 거칠기는. 그렇지만 소용없어. 텔 레포트, 잊었어? 나에게 그런 게 통할 것 같아?”
“이, 이런…….”
박 신부를 부축하고 있던 이반 교수가 코제트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냈다. 박 신부가 이반 교수의 그런 행동을 막으려 했으나, 이 반 교수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코제트를 조준했다. 그러나 이반 교수가 방아쇠를 채 당기기도 전에 코제트의 몸은 다시 휙 하고 없어지더니 바로 옆에 나타나서 이반 교수의 따귀를 찰싹 갈기 고는 반대편으로 옮겨 갔다. 이반 교수는 하도 놀라 권총을 떨어 뜨렸고 코제트는 깔깔거리면 웃어 댔다.
“멍청하기는! 그렇게 서둘러 죽고 싶은 거야? 그런 거야? 그 만………… 편히 쉬게 해 줄까?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말이야.”
이죽거리며 놀리듯이 코제트가 말하자 박 신부가 치밀어 오르 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려 애썼다. 지금 이 상태로 코제트와 대적하기는 쉽지 않은 일. 여기는 공간도 너무 좁 고 옆에 있는 이반 교수는 영능력이 없으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장해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코제트뿐이 아니라 아 직 두 명이나 남은 흡혈귀들마저 금방이라도 난폭하게 덮칠 듯 한 기세였다. 다소 시간이 흐르자 처음에 느낀 충격보다 큰 상처 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몸은 아직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교수님, 일단 피합시다!”
박 신부는 나지막하고 빠른 목소리로 이반 교수에게 말하며 있는 힘을 다해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반 교수가 뒤따라와서 문을 밀었으나 문은 어느 틈에 걸어 잠갔는지 굳게 닫혀 있었다. 뒤에서 코제트의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화가 머리끝 까지 치밀어 오른 박 신부는 몸에서 남아 있는 기운을 있는 대로 뽑아서 문으로 밀어붙였다.
“주의 분노!”
박신부가 소리를 치며 기도력을 집중하자 문은 쾅 하고 부서 지는 소리를 내며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러나 덩치 큰 박 신부나 키큰 이반 교수가 빠져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는 문에 걸려 있는 빗장을 부수려고 기도력을 쓴 것인데 얼마나 굳게 잠 겨 있었던지 빗장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주위에 구멍이 뚫렸다. 코제트가 아차 싶었는지 뒤에서 소리를 질러 댔다. 박 신부에게 아직도 문을 부술 정도의 물리력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도망가려고? 그렇게는 안 돼!”
코제트의 목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 한 덩어리가 날아왔다. 이 반 교수가 박 신부를 밀어내고 자신은 뒤로 주춤거리며 검은 구 름을 피했다. 검은 구름은 문에 부딪혀서 문을 조금 흔들리게 만 들었으나 별 충격은 주지 않고 스러져 갔다. 코제트가 쏘아대는 검은 구름은 그다지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것에 스치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몸 구석구석 뼈마디가 저리고 동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박 신부도 특별한 상처를 입지 않았는데도 몸이 저려 오고 동작이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힘도 마음먹은 대로 잘 모아지지 않았다. 검은 구름에는 물리력이 아 니라 사악한 저주의 주술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이반 교수가 밀쳐 내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고 한 쪽으로 넘어졌으나 그 와중에도 몸에서 기도력을 뿜어내서 오라 구체 몇 개를 코제트가 있는 쪽으로 내쏘았다. 그러나 박 신부가 애써서 내쏜 오라의 구체들은 코제트가 뿜어낸 검은 구름과 뒤 엉켜 도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박 신부는 힘이 부치는 것을 느꼈 고, 또 이런 추세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힘을 급하게 쓰면 쓸수록 몸은 더더욱 저려 왔다. 이반 교수도 십자가를 움켜 쥐고 기합 소리를 지르며 코제트 쪽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코제트가 쏜 검은 구름 한 방을 맞고는 한쪽 벽에 쿵 하고 부딪힌후 맥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코제트는 이반 교수가 정신을 잃자 박신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각오하는 게 어때? 마지막 같은데?”
코제트가 또 한차례 주술을 쓰려고 하는 순간, 문에 뚫려 있던 좁은 구멍 사이로 누가 낑낑거리며 기어 들어왔다. 박 신부는 깜 짝 놀라서 그게 누구인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박 신부가 안으 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코제트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아니, 넌! 오지 마! 오지마!”
준후가 삼 년간의 명을 깎으면서까지 심어 주었던 부적의 글자가 연희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자 연희는 용기를 내어 초상화 앞으로 다가섰다. 분명 자신에게 말을 건 건 이 초상화였 다. 특별히 연희에게 투시력이나 영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 만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초상화에 수상쩍은 면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항상 연희의 목에 걸 려 있는 작은 구리 십자가에 푸른 염체가 맺히더니, 연희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염체가 희미하게 빛을 발 하자 어렴풋이나마 주변의 사물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 희는 초상화 쪽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초상화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누구지요? 왜 나에게 말을 거는 거죠?”
연희가 말을 하자 초상화에서 희미한 빛이 비쳐 나오더니 드 라큘라 공의 초상이 희미하게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 가 앞쪽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연희는 놀라서 부적의 힘 이 맺혀 있는 오른 손바닥을 초상화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 영은 고통스러운 듯 흐릿한 형상을 일그러뜨리면서 옆쪽으로 비껴나갔다.
“어딜 도망가! 거기섯!”
연희는 소리를 치며 어둠 속에서 반투명하게 보이는 영의 그 림자를 쫓아갔다. 쫓아가는 연희의 마음속으로 영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그건 도대체 뭐기에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거지? 아가씨, 어서 손을 치워요.
“잔소리 마! 네놈이 현암 씨와 승희를 어디론가 끌고 간 범인 이지? 당장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아까와는 달리 연희는 묘하게 신이 나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꼼짝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 사태가 이 지경 이 되고 보니 평상시라면 상상도 못했을 용기가 솟아오르고 아 무것도 무서울 게 없었다. 연희가 용기 있게 영에게 소리를 치자 영은 허공에서 깔깔거리더니 연희의 마음속으로 메시지를 전해 왔다.
나는 아가씨를 생각해서 해 준 말이었는데 도리어 나를 협박하다니. 아가씨는 참 당돌한 데가 있군.
“도와주려 했다고? 나를 놀라게 한 게 도와준 거란 말이냐! 현암 씨와 승희는 어디 있지?”
나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데. 조금 전에 아가씨와 같이 왔던 사람들 말인가?
“그래.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 아니야?”
흠!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정말 모르오. 나에게 사정을 좀 일러 준다면 도움이 돼 줄 수도 있겠지만…………….
영은 말하면서 슬그머니 허공을 날아서 연희 쪽으로 다가오려고 했다. 연희는 속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오른손을 영이 있는 쪽으로 들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
오른손에서 준후가 심어 주었던 부적의 글자가 빛을 발하자 영은 마치 눈이 부신 것처럼 뒤쪽으로 스르르 물러섰다.
난폭한 아가씨로군. 옛날에 내 안사람은 그렇지 않았는데.
“안사람?”
연희는 도대체 지금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하하. 하긴 오래전 일이지.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어.
영이 전해 오는 메시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침통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연희는 모습 조차도 불분명한 이 희끄무레한 영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리고 당신이 현암 씨와 승희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그랬다는 거죠?”
한 가지씩 물어봐요. 아가씨.
“좋아요. 당신의 이름은 뭐죠?”
내가 누구겠소. 바로 이 그림의 주인공이지.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드라큘라 공?”
승희는 이를 악물고 절뚝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깜 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각이 사라진 것 같아 두려웠 다. 혼자 떨어져 있는데다 그녀를 세 명의 흡혈귀가 쫓고 있었 다. 자신은 그들에게 대항할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승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다가오는 공포감에 맞섰다. 저항하기 위해서 속으로 악을 써대며 투시를 행했다.
‘내가 잡힐 것 같아? 절대 잡히지 않아. 백 년을 쫓아다녀 봐 라. 난 너희가 어디에서 오는지 뻔히 알 수 있어, 알 수 있다구. 난 안 잡혀, 절대 안 잡혀..’
승희는 이를 악문 채 눈을 감고 투시에만 열중했다. 자기를 추 적하는 세 흡혈귀들을 피해서 계속 길을 더듬어 가는 중이었다. 위기에 몰리니 온 신경이 집중되는지, 눈을 아예 감아 앞이 보 이지는 않는데도 앞쪽에 벽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투시력으 로 구별할 수가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이편이 더 나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있는 곳의 전반적인 구조도 윤곽 이 잡혔다. 복잡한 구조여서 더듬어서는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 이다. 아마 자신이 이 정도로 투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면 절대 도망 다닐 수 없으리라.
세 흡혈귀들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구석구석으로 승희를 몰아붙이려고 했으나, 승희는 마치 위에서 평면도를 내 려다보는 것처럼 구조를 파악하면서 용케 구석에 몰리지 않고 기를 쓰고 도망다녔다.
‘나는 절대 안 잡혀, 절대 안 잡혀. 너희가 아무리 수를 부려 봐라. 나에겐 안 통해. 나는 애염명왕을 몸에 지닌 아바타라야 너희 같은 잡것들이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승희는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것밖에는 달리 뾰족한 수 가 없었다. 오랫동안 강하게 투시력을 발하고 있자니 승희의 머 릿속도 점차 헝클어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알 수 없는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잠시도 쉴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승희는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듯 사방으로 넘나들며 도망 치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가 아무리 투시력을 발한다 해도 미로 안쪽의 전반적인 구조만을 읽어 낼 수 있을 뿐, 안에 널려 있는 자질구레한 나무 조각이며 돌부리, 벽돌 조각 같은 것까지 투시 해 낼 수는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돌부리에 걸리고 미끄러져서 넘어졌는지 모른다. 무릎이 수없이 까지고, 삔 발목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더욱 심하게 뒤틀렸는지 이젠 통증이 심 해서 걸음을 옮기기조차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승희는 투시에 집중하면서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난 잡히지 않아, 절대 잡히지 않아. 망할 놈들 같으니라구. 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심하게 피로가 몰려들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승희는 잠시 벽에 기대서 헐떡거리 는 숨을 가다듬으며 흡혈귀들이 얼마나 멀리 가 있나. 머릿속으 로 읽어 보았다. 세 명의 흡혈귀는 승희가 날렵하게 자신들을 피 해 돌아다닐 것을 예측하지 못한 듯 한 명은 승희가 떨어져 내린 곳 부근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었고, 두 명은 갈피를 잃고 사방을 구석구석 뒤지고 있었다. 승희에게 도달하려면 꽤 먼 길을 돌아 와야만 했다.
‘됐다. 잠시 쉬어도 되겠군.’
승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삔 발목을 주무르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음, 이건 또 뭐지?’
승희는 어떤 섬뜩한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 흡혈귀의 느낌은 아닌데……. 그다지 낯설지 않은 기운. 그러나 수가……………..’
승희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짚고 도대체 무엇이 이런 이상한 느낌을 주는지 투시를 해 보았다. 사람이나 흡혈귀보다 훨씬 조그마한 물체였다. 그러나 흡혈귀들과 마찬가지로 음습하고 음울 한 느낌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난폭했다. 무엇보다도 수가 엄청 나게 많았다.
“이런! 쥐, 쥐 떼구나. 이런 세상에! 흡혈귀들이 쥐 떼를 불러냈어!”
현암은 뒤로 나가떨어지며 자기도 모르게 큭 하는 신음 소리 를 냈다. 거인의 힘을 얕잡아 본 것이 실수였다. 왼팔에 엄청난 통증이 와서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현암은 월향을 떨 리는 오른손으로 칼집에 넣고, 왼팔을 만져 보았다. 왼팔의 통증 이 심해서 벽에 부딪힌 것은 아예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왼 팔이 심하게 저리고 팔목에서 팔꿈치 사이 중간 부분이 금세 부어 올랐다.
‘뼈가 부러졌구나. 어떻게 저놈은 그렇게까지 강하게………’
현암은 이를 꾹 악물고서 오른손으로 왼팔을 힘껏 붙잡고 뼈 를 맞추었다. 뚜두둑 하는 소리가 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 이 몰려들었다. 현암은 뼈를 완전히 맞추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 다. 으드득 하며 이가 부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현암이 팔 의 뼈를 맞추고 있는 사이, 거인은 쿵쿵거리며 현암 쪽으로 다가 왔다. 그러나 현암은 도저히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거인 이 차르륵 하며 쇠사슬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 인의 머리 위에 달린 또 하나의 작은 머리가 속삭이는 기분 나쁜 목소리.
‘피해야 되는데…….’
그러나 피할 틈이 없었다. 거인은 철추를 움켜쥐고 허공에다 휘휘 돌리고 있었다.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와 철추가 돌아가는 소리.
‘피해야 되는데…..’
저 철추가 날아들면 만사가 끝이다. 아무리 기공력을 돌린다 해도 육중한 쇠뭉치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 다. 그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꺄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철그렁 하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며 스스 로 튀어 나가는 월향의 모습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고, 조금 있다 쿵 하고 쇠뭉치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월향이 위기를 알아차리고 제 스스로 뛰어나가 거인이 들고 있던 쇠뭉치의 사슬을 끊어 버린 것이다.
‘잘했다’
현암은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추슬러 일어나려고 애 를 썼다. 그사이에 월향은 비명 소리와 함께 허공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거인에게 정통으로 덮쳐들었다.
“엇, 안 돼! 사람을 해치면………….”
그러나 현암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월향은 무서운 속도로 거인 에게 덮쳐들고 있었고, 현암은 거인의 머리가 단숨에 날아가 버 리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월향도 현암이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상황은 현암이 생각했던 것과 정 반대였다. 놀랍게도 거인은 월향이 날아드는 것을 피하지 않고 한 손을 뻗어서 월향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월향은 거인의 손에 잡히자 심하게 요동을 치는지 더욱더 강렬한 빛을 뿜으며 긴 귀 곡성을 울렸다. 그러자 월향이 뿜어낸 빛이 희미하게 배어 나와 어둠 속에서 거인의 손 언저리만 보이게 되었다. 거인의 손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거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월향을 있는 힘을 다해 꼭 쥐었다.
그사이 현암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람을 상대로 저토록 월향이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예전에 좀비들과 싸울 때 에도 월향이 사람의 몸속을 헤집고 난 후, 큰 충격을 받아서 제대로 힘을 되찾지 못했던 것을 현암은 떠올렸다. 월향을 더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현암은 왼팔이 쑤시는 것도 뒤로 한 채, 기합을 넣으면서 오른손에 공력을 모아 거인에게로 덤벼들 었다. 그러나 거인은 왼손에 월향을 꽉 쥔 채로 달려드는 현암에 게 오른손 주먹을 휘둘러 댔다.
현암은 재빨리 몸을 숙여 거인의 주먹을 피하면서 태극기공 중 ‘추)’자결을 운용하여 거인의 아랫배 부분에 한 방을 날 렸다. 웬만한 사람이면 십여 미터는 나가떨어질 정도의 힘이었 다. 그러나 육중한 벽을 친 것처럼 오히려 현암의 몸이 뒤로 밀 리며 오른팔에 뻐근한 충격이 왔다. 더구나 손끝에 전해져 오는 촉감은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쇳덩이로 된 벽을 친 느낌이었다.
‘아차! 저 거인은 힘만 좋은 게 아니라 쇠 갑옷까지 입고 있구 나.”
현암의 기공력이 실린 일타를 맞고서도 거인은 끄덕도 하지 않 았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월향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저 거인 을 제압할 수 있을까 생각을 모았다. 거인이 태극기공 중 ‘추’자 결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힘이 좋고 그만큼 두꺼운 쇠 갑옷을 입고 있다면, 태극기공 중 ‘단)’자 결이나 가장 강한 ‘폭(爆)’ 자 결을 쓰더라도 별다른 충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암이 생각해 낸 것은 ‘투자 결이었다. 거인의 갑옷을 뚫고 몸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현암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일으켜서 기합을 넣으며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투’ 자결을 운용하여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 거인의 오른팔꿈치가 현암의 아랫배에 적중했고 현암은 뒤로 밀려서 맥없이 나자빠졌 다. 거인의 팔이 너무도 굵고 큰데다가 자신은 왼팔의 통증 때문 에 동작이 그리 빠르지 못해서 여지없이 상대의 일격을 얻어맞 은 것이다. 다행히 아까보다는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좌우 간 여태까지 싸우면서 이토록 허망하게 두들겨 맞아 보기는 현 암으로선 난생 처음이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지?’
현암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거인의 팔을 피해 아래쪽으로 향했다.
거인의 왼손에 잡힌 월향은 계속해서 요동을 치다 이젠 몸에 서 무슨 열기 같은 것을 뿜어내는지 번쩍거리는 빛을 더욱더 강 하게 발하고 있었다. 거인의 왼손에서는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 랐다. 분명히 엄청난 고통일 텐데도 거인은 손이 타거나 말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왼손을 꽉 쥔 채 월향을 꼼짝 못하게 잡 고 있는 것이었다.
‘지독한 놈이다!’
현암이 몸을 굴려 거인의 앞에까지 다다랐다. 거인의 왼쪽 발 이 현암을 차려는 듯 뒤로 젖혀지는 모습을 보고, 현암은 발로 땅을 짚으면서 그 반동력으로 물구나무를 서듯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투’ 자결을 운용하여 거인의 가슴팍에 일타 를 날렸다. 이번엔 정타였다. 기공력은 분명히 철 갑옷을 뚫고 몸 안으로 들어간 듯싶었다. 거인의 몸이 미세하게나마 뒤로 밀 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순간 거인의 육중한 오른팔이 현 암의 오른팔에 부딪혔다. 기공력을 돌리고 있어서 상처를 입지 는 않았지만 밀어내는 힘이 워낙 강해서 현암은 또다시 종잇장 처럼 날아가 한쪽 벽에 쾅 하고 부딪혔다. 하필이면 부딪힐 때 아까 부러졌던 왼팔이 눌리는 바람에 현암은 비명을 지르기 일 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현암은 고통을 참으며 재빨리 몸의 균형 을 잡았다. 그러곤 거인이 뒤로 나가떨어지지 않나 살펴보았다. 실망스럽게도 거인은 선 자세 그대로였다. 잠시 뒤로 주춤하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고 현암 쪽으로 다가왔다.
‘원, 세상에 저건 완전히 괴물이다. 괴물!’
거인의 머리 위쪽에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작은 머리에서 높은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을 느꼈고 거인은 쿵쿵거리며 다가와서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 현암을 밟아서 으깨 버릴 듯한 기세였다.
준후는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이 어디로 옮겨지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지금 눈을 뜨면 자신을 운반하고 있는 자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마취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후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세크메트의 눈이 무사한지를 확인해 보려 했으나, 세크메트의 눈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손이 자유롭지가 않 았다. 놈들은 준후의 술수를 알고 있는 듯 손가락까지 꽉 묶어 놓은 것 같았다. 도가 오행의 기운 중 금(金)의 기운을 사용하여 손을 수형도로 만들면 밧줄을 끊어 버릴 수는 있었으나, 지금 그 렇게 하면 이들에게 발각될 뿐만 아니라, 다시 마취당할 것 같았 다. 또 몸을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인다 하더라도 이 좁은 곳에서 여러 명과 대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준후는 이들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나 끝까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퀴퀴한 통로로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정신이 든 지도 십 여분 이상 된 것 같은데 아직도 통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 면 꽤나 긴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준후는 노인이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들 은 준후의 몸을 땅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땅에 내려질 때의 감촉을 보니 자신을 무슨 통나무 같은 것에 꽁꽁 묶어 움직일 수 없도록 하고 두 사람이 등에 떠메고 온 듯했다.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후는 왼쪽 눈을 슬며시 떠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준후가 옮겨진 곳은 지하 감옥 비슷한 곳이었다. 시뻘겋게 녹 이 슨, 굉장히 오래된 듯한 철창이 여러 개 있었다. 머리가 희끗 희끗하고 괴상하게 생긴 노인이 그중 하나를 열더니 두 사람에 게 준후를 안으로 옮겨 놓으라는 듯 고갯짓을 하며 뭐라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준후는 오른쪽 눈을 살며시 떠 자 신을 옮겨 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상인 같지가 않았 다. 어딘가 눈에 초점이 없고 입도 헤벌어진 얼굴, 게다가 한 명 은 한쪽 손이 없었고, 한 명은 머리카락이 거의 빠져나가고 잔털 같은 머리카락만 드문드문 남아 있는 흉측한 모습이었다. 비틀 린 그들의 모습에 준후는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준후가 묶여 있는 통나무를 그대로 들어서 철창 안으 로 쓱 밀어 넣었다.
‘아이고, 이런! 지금 갇히면 곤란한데.’
준후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더 늦기 전에 손에 금의 기운을 모 아서 손을 묶고 있던 밧줄 몇 가닥을 끊어 냈다. 그러나 준후가 더 이상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철창문은 쾅 하고 닫혀 버렸다. 자물쇠를 잠그는 듯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다. 기왕에 갇힌 것. 그렇다면 저들이 가고 난 다음에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이제는 몸도 마음도 웬만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이렇게 간단히 가둬 둘 수 있을 것 같으냐?’
준후는 손에 수형도의 기운을 돌려서 밧줄 몇 가닥을 끊어 냈 다. 저벅저벅하는 발소리가 작아지더니 횃불의 열기도 멀어져 갔다. 그들이 분명 준후를 가두어 놓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흠! 묶어 놓고 마취를 했다고 해서 내가 꼼짝 못할 것 같으 냐? 어리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을 마저 다 끊어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자신의 소매 속에 들어 있던 세크 메트의 눈이 무사한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그자들이 몸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은 듯. 소매 속에 세크메트의 눈과 챙겨 온 부적이 몇 장 들어 있어서 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토굴 감옥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는 귀를 곤두세워 자신을 데려왔던 자들이 멀리 갔는가를 다시 한번 살 펴보았다. 준후는 소매를 더듬어서 낯익은 감촉의 부적 하나를 끄집어냈다. 야명부였다. 준후가 야명부를 공중에 띄우자 부적 은 저절로 불이 붙으며 지하 감옥 안을 제법 밝게 비춰 주었다. 준후는 감옥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한쪽 구석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허, 여기에 나 혼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준후는 저만치에 쓰러져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죽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다가 준후가 가까이 다가오자 벌떡 몸을 일으켰 다. 놀란 준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킨 사람의 얼굴을 보고 준후의 얼굴은 반가움 으로 절로 미소가 번져 갔다.
“윌리엄스 신부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박 신부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 었다. 지금 이반 교수와 자신은 둘 다 코제트의 함정에 빠져서 기력이 소진된 상황이기 때문에, 코제트가 한 번만 더 손을 놀리 면 그야말로 끝장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뛰어 들어 온 뇌성마비 여자아이를 보고 코제트가 왜 그렇게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지 박 신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뚫린 구멍으로 들어 온 여자아이는 안의 흉흉한 상황을 보고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 는 듯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코제트를 향해 다가섰 다. 그러자 코제트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보고 있는 양 계속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오지마! 오지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넌 어떻게 또다시……………”
저리 가! 저리 가라구!”
코제트는 부르짖다 못해 애처롭게 들릴 정도로 커다란 비명 을 지르며 여자아이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코제트가 뒤로 주 춤거리며 물러나자 상황을 보고 있던 남은 흡혈귀들도 뒤쪽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코제트를 쳐다보며 계속 다가갔다. 코제트는 여자아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괴성을 질러 댔다.
“가까이 오지 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었어!”
코제트는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한쪽 팔을 들어서 허공에 땅바닥과 평행하게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러자 검은 안개 장막 이 일어나 코제트와 흡혈귀 두 명을 에워싸더니 어디론가 거짓 말처럼 사라져 버렸고, 검은 구름도 금세 자취 없이 흩어지고 말 았다. 여자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앞을 쳐다보 다가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박 신부를 향해서 다가왔다. 박신부는 어이가 없었다.
‘코제트는 이 여자아이를 왜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일까?”
여자아이는 박 신부를 보고 다시 헤헤 웃었다. 그러더니 박신 부의 손을 자꾸 쳐다보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아까 창문에서 아 이를 처음 보았을 때의 생각이 나서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꼬마는 그것을 보고 눈을 찌푸려서 웃는다기보다는 그러려 고 애쓰는 것 같은─묘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뜻밖에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아이가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 구석에서는 이반 교수가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박 신부님 괜찮으세요? 그런데 저………… 코제트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또 공간 이동술을 쓴 것일까요?”
“그런데 다른 흡혈귀들까지 데리고 갔잖습니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코제트의 공격에 이반 교수 역시 통증이 심할 텐데도, 무표정 하고 냉랭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 런 이반 교수를 바라보는 박 신부의 마음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이반 교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속임수일 겁니다. 저는 공간 이동술이라는 것이 진짜로 존재 한다고 믿기 어려워요.”
“아, 그러나 그건 분명 사실입니다. 코제트는 이미 그 술수로 여러 번이나 우리의 손을 빠져나갔답니다.”
“만에 하나 코제트가 공간 이동술을 쓸 줄 안다고 칩시다. 그 러나 옆에 있는 흡혈귀들까지 데려갈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생 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눈앞에서 분명히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만약 코제트에게 다른 사람까지도 마음대로 공간 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우리와 이런 식으로 상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우리를 하나씩 공간 이동술로 자기 가 원하는 곳에 데리고 가서 죽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술수가 있다고 한다면 저 같아도 진작 썼겠습니다. 이렇게 힘들 게 유인하고 장치를 만들지도 않고요. 방금 사라진 데는 다른 비 밀이 있을 겁니다. 이 건물 안에도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을지 도 모르죠.”
“글쎄요. 그럴까요?”
이반 교수는 몸을 비척거리면서 코제트와 흡혈귀들이 서 있었 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반 교수는 한참 뒤적거리 며 쓰레기 더미를 찾아보더니 박 신부에게 소리쳤다.
“이거 보세요. 여기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코제트는 단순한 술수로 우리의 눈을 속인 후 이 비밀 통로를 통해서 도망간 것이 분명해요. 어서 추적해야 됩니다.”
박 신부는 몸을 일으켰다. 아까 코제트에게 일격을 당한 곳이 아직도 쑤셨지만 몸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옆 에 있는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박 신부가 몇 걸음을 옮기자 아 이는 헤헤 하고 웃으면서 뒤를 따라왔다.
“이 아이는 어떻게 하죠?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반 교수가 아이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저 아이가 없다면 우리는 추적커녕 도망을 쳐야 했을지도 몰라요. 우리 둘로서도 코제트를 실력 으로 상대하기는 무리였어요. 그런데 코제트는 저 아이에게 꼼 짝못하지 않았습니까?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코제트가 힘을 쓰 지 못할 겁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코제트만 빼놓는다고 치면 흡혈귀나 다른 것들은 박 신부님 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방금도 세 명의 흡혈귀가 덤볐지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흡혈귀들에게는 저도 어 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자, 어서 갑시다. 어서 빨리 코제트를 잡고 윌리엄스 신부님과 준후를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박 신부는 현암 일행과 먼저 합류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으 나 조금 전 코제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코제트는 분명히 준후 를 잡아갔다고 했고, 현암도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을 것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코제트가 꾸민 일일 것이 고, 지금 퇴마사들 일행은 각각 코제트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가 분명했다. 모두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지만, 한 명씩 흩어져 있으면 각각은 나름대로 약점을 가 지고 있는 터여서 정말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현암과 승희, 연희의 일도 걱정이지만, 지금은 눈앞의 코 제트를 추적해야 한다고 박 신부는 판단했다. 박 신부는 하는 수 없이 이반 교수의 뒤를 따라서 코제트가 숨어든 비밀 통로로 들어섰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헤헤거리는 표정으로 박 신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렇소, 내가 바로 드라큘라 공이요. 왈라키아의 군주, 브라드 4세가 바로 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흡혈귀가 아니냐고 연희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내려다가 황 급히 자제했으나, 드라큘라의 영은 이미 연희의 생각을 알고 있 는 것 같았다. 미소를 띠는 듯 잔잔하게 물결을 치는 형상을 만 들었다.
물론 내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잔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을 여 러 번 취한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단합을 위 하여 정책적으로 한 것에 불과하오. 더군다나 보야르들, 그들에 대한 나 의 증오심이 너무도 깊어서 절대 관대할 수가 없었소. 배신과 모략, 감 금・・・・・・ 그리고 친족 살해. 나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을 모두 다 겪었고, 그 일들은 모조리 나와 나의 집안에 충성을 맹세했 던 귀족인 보야르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소. 나는 인간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고 인간들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소.
드라큘라의 영은 희미한 바람 소리를 냈다. 영의 한숨일까? 연희는 아직도 공포감이 채 가시지는 않았으나 어느새 드라큘라 공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흥미가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나의 아버지인 브라드 2세와 형인 미르챠는 보야르들에 의해 암살당 하고 처형당했소. 산 채로 무덤 속에 생매장된 형의 모습을 본 순간, 나 는 악마가 되기로 결심을 했소, 적어도 보야르들에게는 말이오. 그리하 여 나는 냉혈한이나 악마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그 들을 벌했소. 아, 그러나 이 모두 덧없는 일일 뿐……. 우리 가문의 영 광스러운 이름은 오히려 후세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악령이나 마귀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면서요? 허허허.
드라큘라의 영에게 직접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연희는 잠 시 말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연희는 드라큘라의 영이 왜 아직 도 여기에 남아서 성안을 배회하고 있는 것인지 강한 의문이 들 었다.
“그런데 당신은 죽은 자이면서도 왜 죽은 자의 길을 따르지 않 고성에 남아서 계속 돌아다니는 겁니까?”
연희가 묻자 드라큘라 공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 같은 바람을 사방에 일으켰다.
나의 복수심을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심으로 이끌어 낸 데 대해선 지 금도 후회하지는 않소. 그러나 그런 일들도 모두 죄악으로 치부되는 것 이고 그러한 죄악의 크기는 나의 고통으로 갚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 일들에 대한 벌이랄까? 후후후. 나는 아직까지도 그들과 싸우고 있소. 내 손으로 죽였던 귀족들과 보야르들, 그리고 야만스러운 투르크인들. 이들 영과 나는 아직까지도 외롭게 서로 쫓고 쫓기며 이 성안에서 헤매 고 있는 것이라오. 그것이 나의 남은 운명이오. 이 운명이 언제나 끝날…….
드라큘라의 영은 어두운 그림자로 변하는 듯하다가 연희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소. 요즘은 보야르의 악령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소. 대신 뭔가 사악한 힘이 그들을 휩쓸어 모아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아가씨도 손에서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니 범상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나는 단지 평범한…………….”
보통 사람이 나와 같은 영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 만 눈치 빠른 드라큘라 공은 연희와 일행이 무슨 일을 하러 이곳 에 온 것인지 짐작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당신들은 최근 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힘에 대적하기 위해서 온 것 같군. 당신들은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오. 나는 이 성의 구석구석 을 잘 알고 있고 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약간씩이나마 느낄 수 있소. 지 금 성안 여러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하나하나가 나로서도 놀랄 정도로 강하고 희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또는 영적인 힘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내 한 가지 묻겠소. 당신들은 정의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을 크게 떠서 일렁거리는 드라큘라 공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오! 그 눈, 눈가
드라큘라의 영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 눈, 내 아내도 당신과 같은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내 행동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가 있었고… 그러나………….
드라큘라 공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다가 휘 하고 바람을 몰 면서 공기 중에 녹아들어 어디론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나를 부르면 한 번은 도와드리겠 소. 나는 특별한 힘은 없지만 적어도 이 성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오. 방으로 들어가시오. 들어가서 벽난로 안으로 들어 가 보면 비밀 통로가 하나 있소. 서재 뒤쪽 통로는 내가 만들지 않았는 데, 누가 지하에 있는 미로와 서재를 연결하는 통로를 최근에 만들어 놓 은 것 같소. 벽난로를 조사해 보시오. 그러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 이오. 당신이 잃어버린 일행 중의 한 명이 아마도 그 안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오.
“비밀 통로라구요?”
어서 가 보시오.
드라큘라 공의 마지막 메시지는 희미한 메아리처럼 연희의 귓 전에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드라큘라 공의 영이 사라지자 연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위는 원래의 칠흑 같은 어둠으로 되돌아갔고 벽에 걸린 초상화 역시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방에서 현암 씨나 승희가 사라진 것은 바로 비밀 통로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란 말인가.’
연희는 방으로 들어가서 푸른 염체에서 발하는 빛에 의지해 벽난로로 간신히 걸음을 놀렸다. 벽난로 안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고 거미줄이 흩어진 채 사람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 뒤쪽으로 꽤 넓은 공간이 있어서 사람 두 명 정도는 한꺼번에 들 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가 이리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군. 그런데 누굴까? 현암 씨 일까. 승희일까?’
두려움이 앞서긴 했지만 이대로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다. 연 희가 손에 힘을 주자 손에서 금색 글자가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준후가 준 힘을 의지 삼아 연희는 조심스럽게 몸을 굽혀 벽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승희는 자신의 투시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고 다시 한번 정 신을 모아 보았다. 틀림없었다. 스멀스멀한 기운들. 기분 나쁘고 악의를 가진 조그마한 생명체들은 여기저기 구석에서 하나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 나와 점점 커다란 무리를 만들고 있 었다. 아직은 그렇게 가깝지 않았지만, 승희는 바스락거리며 이 빨을 갈아 대는 쥐 떼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환청을 느꼈다.
‘아! 싫어. 쥐는 정말・・・・・・ . 그것만은 제발…………’
승희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만 싶 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은 곧 죽 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도망, 도망쳐야 돼!’
승희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발을 억지로 끌고 미로 속을 헤 매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면서 언뜻 투시를 해 보니 쥐 떼는 이제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중앙에 흡 혈귀가 한 놈 있었다.
흡혈귀가 쥐를 부리고 있구나. 이런………. 이 사악한 놈!’ 승희에게 쥐 떼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아마도 흡혈귀나 쥐 들은 승희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여기 저기 승희가 있을 만한 곳으로 몰려가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면 쥐 떼라고 해서 피하지 못할 이유 는 없다. 그러나 쥐 떼의 움직임은 보통 사람이 뛰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저렇게 빨리 밀려오는 쥐 떼라면 지금의 승희의 발걸음으로는 멀리 도망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한다. 이건 정말 아……..’
승희는 깊은 나락에 빠져드는 심정이었다. 날카롭게 번뜩이 는 작은 이빨과 험상궂은 눈빛, 지저분한 털과 징그러운 꼬리. 쥐 떼! 금방이라도 승희에게 덤벼들어서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 같은 환상과 공포가 승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감 각이 점점 더 예민해지면서 일부러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는데도 승희의 머릿속은 마치 레이더처럼 쥐들과 흡혈귀들의 움직임에 만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쥐들은 통로를 빽빽하게 메우며 우르르 지나가 고 있었고, 그 앞길에 있던 두 명의 흡혈귀는 쥐 떼를 피하려는 듯이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쥐를 부리는 것이라면 쥐 떼 와 같이 움직이더라도 그다지 상관이 없을 텐데, 흡혈귀들은 자 신을 쫓아올 때보다 더욱더 빠르게, 마치 쥐 떼를 피해서 움직이 기라도 하는 양승희가 있음 직한 위치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몸 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가만! 저건 도대체 뭘 의미할까? 그래! 혹시…………’
실마리가 잡혔다. 세 흡혈귀 중 하나는 쥐를 부리는 술수를 알 고 있는 게 분명했고, 나머지 둘은 쥐를 부리는 술수를 모르기 때문에 쥐를 겁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앞의 놈은 격이 높은 흡혈귀지만 나머지 둘은 그다지 센 놈이 아닌 듯싶었다. 그러 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쥐 떼의 이빨을 똑같이 무서워하고 있 다고 볼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이 안의 지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 에 쥐 떼에게 자신을 추적하는 임무를 넘기고 빠져나가려고 하 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래! 호랑이를 피해서 늑대 굴로 갈 수도 있 는거지!”
그 두 명의 흡혈귀 중 하나를 추적해서 찾아낸다면, 일단 쥐 떼의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들은 지금 쥐 떼를 피해서 안전한 장소로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 그러면 저 중 한 명에게 가자. 그놈에게 죽는다 하더라 도 쥐 떼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승희는 자기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쥐 떼로부터 멀 리 떨어져 있는 한 놈의 자취를 투시해 내어 그쪽으로 걸음을 옮 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쥐 떼가 무서워서 흡혈귀 쪽으로 가고 있 는 것이지, 그 흡혈귀도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은 잊지 않았다.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내야 해.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 면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술수도 분명히 있을 거야. 생각해 내야 돼!’
한참을 절뚝거리며 승희는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휘잉 하며 센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 소리 비슷하기도 한 것이 뒤에서 울려왔다.
‘쥐!’
파도처럼 울리는 소리라면 틀림없이 수천 마리가 넘는다. 그런 쥐 떼에게 따라잡힌다면………….
‘서둘러, 현승희! 어서!’
승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절뚝거려 다리가 비틀 리는데도 미친 듯 걸음을 옮겼다. 발목의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 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자신의 발목은 목숨이 위험한데도 계속 고통을 호소하듯 꺾여 넘어뜨리고 도주를 방해하고 있었다.
‘아, 이런…… 이대로는 안돼! 흡혈귀와 마주치면 나는…………… 아냐!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돼! 쥐. 흡혈귀 다 싫어! 무슨수를 내야 해.’
묘책을 짜내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승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거!’
과거 강화도에서 해골 병사들과 싸울 때 있었던 일. 아주 사소했던 일이라 특별히 생각해 보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 지만, 절체절명인 지금 이 순간에 그때 일이 퍼뜩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쥐 떼에서 연상이 되어 자칭 주기 선생이라던 상준이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여러 주술사들과 함께 해골 병사들과 싸우는 도중에 상준이 쥐의 기운을 불러냈다. 자신은 그런 상준의 기운을 배가시키기 위해서 힘을 불어 넣어 주었지만 오 히려 상준은 그 때문에 고통을 느꼈는지 해골 병사들에게 사로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사건이 기억났다.
‘그렇다! 그걸 이용한다면……….’
승희는 걸음을 옮기면서 눈을 크게 부릅뜨고 몇 번 깜박이더 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박 신부나 현암, 준후에게 힘을 보내 줄 수가 있는 것은 그들과의 기(氣) 또는 영의 파장이 맞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파장이 맞지 않 는 사람에게 힘을 전달한다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고통을 가할 수도 있었다. 상준이 그랬다. 승희가 보내 주는 힘에 오히려 반 쯤 기절 상태가 되어 버렸다.
승희는 앞뒤를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상황이 급박해 지기 전에 흡혈귀한테 힘을 보내 주자. 마구마구 보내서 폭발하 게끔 만들어 주자. 흡혈귀와 자신이 영의 파장이 맞을 리 없으니까.
승희는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 마리의 쥐가 나타난다 고 해도 흡혈귀보다 무서울 것 같은데 수천 마리의 쥐들이 뒤를 쫓고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승희는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피하고 있는 흡혈귀가 있는 쪽으로 절뚝거리는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