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대성인의 죽음 (1965년 인도-파키스탄 2차 전쟁 직후) : 3화 – 강습
강습
며칠을 꼬박 여행한 끝에 어쁘랭띠와 바바지, 그리고 키르모비 치 대령과 나막 대위 일행은 별 탈 없이 인도 북부군 사령관과 약 속한 예정지인 카슈미르 북부 고원 어귀에 도착했다. 너무 저속으 로 움직인 탓에 장갑차의 엔진에 오히려 무리가 가서 밤마다 정비 하느라 고생스러웠지만 큰 지장은 없었다. 이미 그곳은 임시로나 마 거의 군사 기지화돼 있었다. 물론 거대한 건물 같은 것을 지을 시간은 없었기에 임시로 설치된 텐트와 중장비로 가득했지만, 적 게 잡아도 수천 명 단위는 동원된 듯했다. 이미 수많은 야포와 자주포 등과 그를 지원하는 보급대와 기타 병력이 그득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도 전혀 미동 없이 다가온 어쁘랭띠 일행에게 북부군 사령관이 직접 나서 최대한의 경의를 다해 맞아들였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어쁘랭띠.”
어쁘랭띠가 고개를 끄덕이자 북부군 사령관은 참모들과 함께 그들을 정중히 중앙에 있던 큰 막사로 안내했다. 이미 그곳에는 여러 가지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고, 많은 인도군 부대가 그곳을 노린다는 것이 기호로 일목요연하게 표현돼 있었다. 북부군 사령 관이 눈짓하자 참모 중 한 사람이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향해 현재 약 백이십 문의 야포와 사십 대의 자주포가 배치됐으며, 완전 무장한 열두 대의 전폭기가 지원 출격을 기다리 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는 완료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키르 모비치 대령이 말을 꺼냈다.
“군사적인 면이니 몇 가지 내가 좀 말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북부군 사령관과 참모들은 KGB 출신인 키르모비치 대령을 그 리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으나 그의 발언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키르모비치 대령이 말했다.
“이런 대규모 화력을 집중하는데, 우리가 노리는 것은 아주 작 은 목표일뿐입니다. 최대한 집약적으로 오차 없이 목표를 노려야 하는데 그 좌표는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브리핑했던 참모가 어쁘랭띠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쁘띠께서 이미 정확한 좌표를 짚어 주셨습니다.”
“그래요? 하긴…”
어쁘랭띠가 말했다.
“이미 그자와는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지요. 그래서 그자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 뿐. 허나 나 혼자서는 무리였지요. 때문에 스승님을 모셔온 것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북부군 사령관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 시 한번 최대한의 경외심을 담아 어쁘랭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 고 말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어쁘랭띠께서 원하시는 대로 삼 십분 동안 이 파멸적이고 위압적인 화력이 그 한 점에 집중될 것 이고, 그 이슬람의 악마 놈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키르모비치 대령이 끼어들었다.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은 보통 쓰는 고폭탄이 아니라 네이 팜’을 사용했으면 합니다. 혹 준비돼 있습니까?”
“그건 무슨 이유로?”
“그 이슬람의 악마도 역시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호흡을 중시하지 않을까요? 나는 잘 모르지만 인도인들의 요가에서는 호 흡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더군. 네이팜을 투하하면 근처의 산소가 모조리 없어지고, 초열지옥으로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충고입니다. 물론 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 고문단 자격도 가지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6 수천도의 고열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폭탄이다.
그러면서 키르모비치 대령은 슬쩍 어쁘랭띠를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가급적 성자분들께는 수고를 덜 끼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퍼붓게 되면 능 력 같은 것은 보여 주고 싶어도 보여 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일종 의 꼼수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쁘랭띠는 조금도 개의 치 않고 옅은 미소만 머금은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북부 군 사령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우리 군에는 모든 것이 준비돼 있소. 당장 투하하는 폭탄 의 절반을 네이팜으로 바꾸라 명령하겠소. 아마 그 일대에는 앞으 로 수십 년 동안 풀도 자라지 않을 것이오. 이 정도의 화력을 집중 시키면 어떤 자라도 버틸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힌두교의 가르침 때문인지 북부군 사령관은 말을 멈추고 실례했다는 듯 다시 어쁘랭띠와 바바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어쁘랭띠는 말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만 저주와 증오심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 말에 북부군 사령관은 조금 머쓱한 표정이 됐다.
“물론 전 장병에게 최대한의 욕설과 증오심, 저주를 퍼부으며 사격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포격에 참여하지 않는 장병들도 전력으로 그러라고 했고, 우리조차 그러기는 할 것입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좀 머쓱한 일이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어쁘랭 는 단호하게 말했다.
“요기로서 여러분에게 남을 저주하라 주문하는 것은 안 될 일이 나.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화력보다 그것 이 더 중요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쟁을 치른 직후입니다. 전 장병의 마음도 들끓고 있으니 염려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북부군 사령관이 엄숙하게 선언하자 어쁘랭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는 곧 출발하겠습니다. 약속대로 아마 이곳에서 십 킬로미 터쯤 떨어진 곳이니 지금 출발해야 폭격이 끝난 직후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키르모비치 대령이 말했다.
“혹시나 우리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겠지요?”
북부군 사령관은 다소 불쾌한 듯 키르모비치 대령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군은 모두 정예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소. 우리 군을 뭘로 보는 거요?”
“그래도 혹시나 해 드리는 말입니다. 사령관님도 내 입장이 돼보면 이해가 가실 텐데.”
그때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스승님께 그런 불운이 내릴 리가 없지요. 하물며 요기는 어떤 것도 겁내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릴 해칠 수 없을 겁니다.”
이윽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셋을 그냥 보내도 되는 걸까 싶어 북부군 사령관은 안절부절못했으나 어쁘랭띠가 말없이 저 뒤에 있던 나막 대위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 뜻을 알아듣고 뒤 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나막 대위를 불렀다.
“나막 대위.”
“예.”
“여태까지처럼 잘 수행해 드리게.”
“넷!”
군인답게 깍듯이 경례한 나막 대위는 자신이 인솔해서 호위해 왔던 부하들을 그대로 데리고 다시 요기들을 수행했다. 발포 준비 를 하느라 군대는 몹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야포의 포신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고 자주포들은 위치를 잡느라 그르렁거리며 움직였 다. 그러나 이 기묘한 수행자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막 대 위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이슬람의 악마가 있다는 카슈미르의 고 원지대로 향했다.
잠시 후 하늘을 째는 듯한 소음과 함께, 인도 공군의 전폭기들 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폭기들이 폭 탄을 투하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도합 백육십 문에 달하는 인도군의 야포와 자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미 한참 거리를 두고 길을 가던 중이었지만, 화기들이 내뿜는 굉음에 땅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고원 지대의 한 야산에서는 멀리서도 쉽게 식별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발이 일어났다. 거의 산이 무너져 내릴 정도 의 포격이었고, 거기서의 굉음과 울림소리가 아직 한참 떨어져 있 는 그들에게도 생생히 전달됐다. 더구나 네이팜의 투하로 인해 거 대한 불길이 야산 전체를 뒤덮고, 불길에 불길이 거듭 일어나는 광경까지 보이면서 급기야 산조차 아예 보이지 않게 됐다. 물론 연속되는 고폭약의 포격도 끊이지 않았고, 몇 분도 안 돼 산 전체 가 허물어져 없어질 것 같았다.
“허. 저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키르모비치 대령이 가소롭다는 듯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하자 어쁘랭띠가 간단히 정정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초월한 그것도 몇 번이나 초월한 자 이지요.”
그 말을 할 때쯤 그들에게도 후끈한 열기가 다가왔다. 꽤 멀리 서 일어난 폭발이었지만 네이팜의 연속된 폭격의 열기가 그곳까 지 번져 온 것이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화끈할 정도의 열 기가 느껴지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기이한 눈길로 어쁘랭띠만 바라보았다. 어쁘랭띠는 담담했다. 오히려 주 변을 호위하는 나막 대위와 그 부하들이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가급적 앞을 막으려 나막 대위가 장갑차 두 대를 앞세우려 했으나,
어쁘랭띠가 고개를 저었다.
“앞을 가리지 마세요. 직접 느끼고 싶으니.”
“파편이 날아올 수도 있습니다. 정말 괜…….”
나막 대위는 더 말하려 했으나 어쁘랭띠는 말없이 눈을 돌려 정 면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막 대위는 선두의 장갑차를 옆으로 돌 릴 수밖에 없었고 어쁘랭띠는 선두로 나섰다. 항상 담담하고 감정 없어 보이던 어쁘랭띠의 눈에도 묘한 흥분과 긴장이 어렸다. 더구 나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한순간 비쳐 보였다.
‘성자님께서 왜 저러시지? 악마 놈일지라도 연민을 느끼신다는 건가?’
나막 대위는 혼자 상상해 보았으나 어쁘랭띠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어쁘랭띠 일행이 계속 목표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에도 인도군 의 폭격과 포격은 끊이지 않았다. 공군기들도 한 번에 모든 탄을 투하하지 않고 잘 짜인 파괴 계획에 따라 주기적으로 상공을 선 회하며 폭격을 가했다. 네이팜의 불길이 지옥의 화염처럼 모든 것 을 태워 버릴 듯 피어오르기도 했고, 그에 화답하듯 연달아 발사 되는 백여 문이나 되는 화포의 포탄이 곳곳을 작렬하며 마치 벌 판에 만개한 꽃처럼 음울한 파괴의 형상을 순간적으로 비쳐 보이 기도 했다.
북부군 사령관의 장담대로 폭격과 포격은 정확했고, 포탄은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 정확히 목표에만 집중됐다. 나막 대위는 물 론 성자들을 깊이 신봉하는 편에 속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집중적인 포격 속에서 사람, 아니 악마라고 해도 무사히 버텨 낸 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물론 이곳에 집결했던 장병 전부가 진실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고위층의 일부를 제외하면 이들의 존재와 이번 작전의 목적을 몰 랐다. 나막 대위는 힌두교의 열성 신자라는 사상적 배경과 출신 성분 덕에 특수 임무를 맡아 진실 바로 옆에서 움직이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나막 대위로서도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물론 마음속으로라도 성자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불경이다. 억누르려 애썼지만, 의구심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사람을 생각만으로 죽일 수 있는 악마 같은 자라면, 이번 공격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더구나 이런 화력을 견뎌 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견뎌 낸다면 굳이 화력을 집중해 봐야 소용없지 않은가. 그리고 어쁘랭띠께서는 어떻게 그 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며, 왜 그가 피하거나 이동하지 못한 다고 단언했을까?’
어쁘랭띠가 그 악마와 이전에 만나 한 번 대결했다 상정해 보 아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악마에게 승리했으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어쁘랭띠가 큰 부상을 입지도 않았으니 서로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편이 맞다. 하지만 어쁘랭띠의 말대로라면 그자는 어쁘랭띠에 의해 그 자리에 붙잡힌 것 같은데, 이런 포격도 피하 지 못할 만큼 단단히 잡아 두었다면 이미 처단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도 같았고… 갖가지 생각이 들었으나 나막 대위는 애써 솟아 오르는 의문을 지우려 애썼다. 성자의 뜻은 범인으로서는 짐 작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묻는 것조차가 실례다. 브라만의 뜻은 무조건 따르는 것이 크샤트리아의 의무이다.
그러다 거의 예정된 시각이 돼 포연이 잠잠해질 때쯤, 그들 일 행은 목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포격과 폭격은 정확히 멎었으나, 그들이 목표로 한 지점은 엄청난 화약 연기와 폭발의 충격으로 피어오른 먼지구름 때문에 온통 시야가 가려져 거의 한 치 앞조차 식별할 수 없었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긴장을 풀지 않은 어조로 나막 대위가 말했다. 나막 대위의 부 하들도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자 어느새 메고 있던 개인 화기들을 집어 든 채 안전장치에 손가락을 대어 언제든지 전투할 채비를 갖 추고 있었다. 어쁘랭띠는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느껴져. 아직 그는 저기 있어. 역시……”
“그가 거기 있다는 겁니까?”
어쁘랭띠는 자신을 쳐다보는 나막 대위의 눈길을 피해 그 뒤에 말없이 서 있던 바바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때 바바지가 조용히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입으로 나지막한 휘파람을 불었다.
“어쁘랭띠…………?”
나막 대위는 바바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주 변을 둘러보는데, 그와 동시에 갑자기 뒤편에 자신들이 끌고 왔던 장갑차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찌그러지더니 강철로 된 차체가 마구 부스러져 나갔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 쳐나오려 했으나 그들의 몸도 순식간에 으깨어져서 허공에 피 안 개만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 장갑차는 이내 내부 연료에 불이 붙 었는지 요란한 소리와 불길을 뿜으며 폭발해 버렸다. 불과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인 데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받아 본 적도 없었다. 나막 대위는 크게 놀랐으나 어쁘랭띠는 재빨리 말했다.
“악마의 반격이 시작됐네. 스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니 무서워할 것은 없네만, 긴장을 늦추지 말게.”
“아니… 대체 어떻게.. 포격도 아니고…
“그자는 아직 살아 있어. 어차피 예측은 했지만…………….”
나막 대위는 몹시 당황했다. 차 한 대는 터져 버렸으나 다른 차 들과 자신, 그리고 도보로 따라오던 병사들은 무사했다. 바바지가 가늘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 그 알 수 없는 공격에서 그들을 보호 하는 것일까? 어쁘랭띠의 잔잔하고 겸손한 어조조차도 어느새 일 상적인 하대로 바뀌어져 있었지만 나막 대위는 눈치채지 못했다. “상황을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군인답게 나막 대위가 묻자 어쁘랭띠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막 대위는 곧 무전병을 불렀다. 그러자 어쁘랭띠가 말했다. “차를 버리고 스승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게 위험하네.”
나막 대위가 무전의 연결 스위치를 누르며 고함쳐 명령하자 장 갑차 등에 탔던 대위의 부하들이 모두 급히 뛰쳐나왔다. 그 와중 에도 주변에서는 계속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차들이 부스러지다 가 폭발해 갔다. 몇몇 차에서 늦게 내린 병사들은 차량과 같이 부 스러져 죽었고, 스무 명 남짓한 병력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모 두 아연한 표정이었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아 니 상상한 적도 없었다. 바로 옆에서 어떤 징후도 느끼지 못했는 데 차량과 사람이 아예 부스러져 없어지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공격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바바지 는 계속 나지막한 휘파람을 불며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어쁘 랭띠는 곧 손짓으로 나막 대위의 부하들에게 장비를 모두 버리고 그곳으로 모이라는 시늉을 했다. 정말로 바바지를 중심으로 반경 이십 미터 정도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막 대위의 부하들은 모두 그곳에 모였고, 대위의 손짓을 본 무전병도 달려와 급히 외쳤다.
“뭐라고 보고할까요? 이슬람 악마들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그렇게만 전하게.”
나막 대위가 짧게 말하고는 어쁘랭띠에게 눈을 돌렸다.
“이게 뭡니까? 적은 어디에 있지요?”
“적은 악마라고 하지 않았나.”
어쁘랭띠가 조용히 말하며 입을 다물라는 눈짓을 했다. 비록 인 도군의 정예병들이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자기들의 장 비가 파괴되고 주변의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가는지 알 수 없어서 모두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나막대위가 다소 질린 목소리로 묻자 어쁘랭띠는 짧게 대답했다.
“나다 요가일세.”
“요가의 주술입니까?”
“고대부터 내려온 요가의 전승 중 가장 상위 수법 중 하나지. 음 파의 힘을 마음대로 조정해 어떤 것이든 부숴 버릴 수 있네. 장갑 차건 뭐건 그것이 얼마나 단단한가는 문제가 되지 않아. 물론 인 간이나 생명체도 마찬가지고.”
“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성자시여, 저희를 보호해 주시 옵소서.”
나막 대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급히 힌두교식 절을 올 렸다. 물론 알 수 없는 휘파람 소리를 내어 그들을 보호한다고 하 는 바바지를 향해서였다. 그런데 어쁘랭띠가 그 순간 차갑게 웃었 다. 나막 대위는 그 모습을 힐끗 곁눈으로 보았다. 이때까지의 자 비심이 넘치는 표정이 아니라 너무도 차가운 미소로 변해 있었는 데, 성자의 온화하고 달관한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섬뜩한 인상이었다. 놀란 나막 대위가 눈을 크게 뜨자 어쁘랭띠가 말했다.
“그리고 그 나다 요가의 대가가 바로 여기 계시는 이분이시지.”
그렇게 말하면서 어쁘랭띠는 바바지를 가리켜 보였다. 바바지 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조용히 휘파람 소리만 내고 있었는 데, 그 뒤에 서 있던 키르모비치 대령이 홍 하면서 몹시 놀랍다는 듯. 허나 나막 대위처럼 긴장하지는 않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나다 요가의 능력을 보고 놀랍지만 결코 나막 대위처럼 속았 다거나 뭔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저분은 바바지님이라고…………….”
어쁘랭띠는 아주 차갑게,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네.”
“네? 아…… 아니. 어쁘랭띠께서 이미………….”
어쁘랭띠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단지, 스승님이라 불렀을 뿐이네.”
“하, 하지만 어쁘랭띠의 스승님은 바바지님…………….”
“내가 그분의 제자임은 영광된 일이네. 허나 스승이 꼭 한 사람 이란 법은 없지 않겠나?”
나막 대위는 눈을 부릅떴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너무 도 기가 막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어쁘랭띠가 조롱하듯 말했다.
“내 또 다른 스승, 여기 계신 이분의 성함은 고반다. 마하’ 고반다시지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성자시다. 그리고 나다 요가를 완벽하게 터득해 세상의 어떤 것도 말살시켜 버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진 분이시고.”
나막 대위는 이제 일이 잘못돼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뭔가 달랐다.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나다 요가이며, 고반다가 그 요가의 대가라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전병! 그리고 모두 무기를!”
나막 대위가 이야기하려는 순간 고반다가 휘파람 소리를 약간 높였다.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고 휘파람 소리의 음색이 날카로 워진 것뿐인데, 나막 대위의 말에 따르려던 무전병과 대위의 부하 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서 몸을 덜덜 떨 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무전병과 부하들의 몸은 여기저기가 끔찍하게 터 져 나가며 가루가 돼 바닥에 쓰러지지도 못한 채 분해되듯 흩어져 날아가 버렸다.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광경에 나막 대위는 입 만 딱 벌린 채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는데, 어쁘랭띠는 그런 그를 보고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는 우리를 호위하러 오지 말았어야 했네. 자네들이 우리를 호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카르마의 응보를 받는 법이라네.”
7 인도어로 ‘큰, 위대한’이라는 뜻의 접두어이다.
나막 대위는 이제 목숨을 포기했다. 눈앞에 있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성스러운 힌두교의 성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파리 처럼 형체도 남기지 않게 하고 죽게 한 악마였다. 그러나 아무리 체념했어도 솟구치는 의문은 감출 수 없었다.
“악마! 당신이 바로 악마였어!”
“좋을 대로 부르시게나.”
“그렇다면, 당신은 누굴 상대하려는 거지? 누굴 노리고……”
그러자 어쁘랭띠는 마치 나막 대위의 경악과 공포를 천천히 음 미하듯이 사악하지만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누구겠나? 당연히 바바지지. 위대하고 위대하신 힌두교의 대 성자. 나의 거룩한 스승님이시기도 한 그분. 바로 바바지님이지.”
나막 대위는 절규했다.
“바, 바바지님을 해치기 위해서 우리가 협조한 셈이 됐다고? 당 신・・・・・・ 당신 대체 어떻게…………! 스승님을…………!”
“아, 그게 짜증 났거든. 알다시피 내 스승, 바바지께서는 너무도 대단하시지.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 어.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네. 도와준 수많은 장병과 군부에게 감 사를 표하지는 못하지만 자네에게 대표로 감사하겠네.”
어쁘랭띠는 다소 과장된 희극 배우 같은 몸짓으로 나막 대위에 게 한 번 팔을 짓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 보인 다음 조롱하듯 말했다.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성자를 해치게 된 소감이 어떤가?”
“이・・・・・・ 이런!”
나막 대위는 이를 갈면서 허리에 찬 권총을 빼 들려고 했으나 고반다가 눈을 감으며 작게 휘파람 소리를 내는 순간 나막 대위 의 손에 막 잡히려던 권총이 부스스 연기처럼 가루가 돼 흩어져 버렸다.
이제 나막 대위는 죽음을 각오했는지 더 이상 공포에 질린 눈빛 을 띠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고 고반다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그럼 어제 마을을 떠날 때 휘파람을 분 것도!”
“아, 목격자가 있으면 곤란하거든. 물론 그 거지 떼들도 깨끗이 청소가 됐어야만 했지.”
어쁘랭띠는 즐기듯 대답하다가 문득 불쾌한지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왼손 오른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내 기분이 어땠겠나? 이 손으로 그 불가촉천민’의 몸을 몇 번 이나 만져야만 했으니. 저주받아 마땅하지.”
나막 대위는 이제 뭐라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절망과 죽 음의 공포 같은 것은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았다. 절망적이었지만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어쁘랭띠를 바라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8 카스트 제도의 네 계급 중 최하위인 수드라 중 불가촉천민이라는 극하에 위치하 는 계급이 있다.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도 저주받는 존재라는 뜻으로 여겨지며, 이들 에게는 카스트 상위 계급들과 어떤 종류의 신체 접촉 조차도 엄금돼 있다.
“너, 너는・・・・・・ 그래도 힌두교의 수행자인데 어찌 이런… 어쁘랭띠는 또다시 즐기듯 말했다.
“힌두교라고? 하, 어제 역사에 대해서도 나와 토의하지 않았던 가? 나는 힌두교도가 아니야. 힌두교도 행세를 하고 있지만 엄밀 하게 말하면 믿음을 바꾸었지. 고대 브라만교로 말이야. 너희 힌 두교도가 천 년 동안 너희를 억압해 오던 이슬람교도를 미워하듯 우리 브라만교도 우리의 가르침을 송두리째 바꾼 힌두교를 증오 해. 이 정도면 이해가 되겠나?”
“너야말로 정말…………… 아아!”
“잘 가게.”
어쁘랭띠가 말하면서 가볍게 목례하는 순간 나막 대위의 몸은 산산이 폭발하듯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끔찍한 죽음이 었지만 고반다의 나다 요가와는 양상이 달랐다. 어쁘랭띠가 발휘 한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었다.
그것을 본 키르모비치 대령은 뒤에서 “음!” 하면서 탄식과 놀라 움이 깃든 신음성 같은 것을 냈다. 허나 곧바로 날카로운 눈매가 된 키르모비치 대령이 어쁘랭띠에게 말했다.
“죽이는 상대를 꼭 그렇게 항상 어르고 놀립니까, 어쁘랭띠?”
그러자 어쁘랭띠는 천천히 키르모비치 대령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저 벌레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거든.”
“음, 나도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사악함은 진저 리가 나는군요.”
“그건 상관없지 않나? KGB에서 필요한 것은 내 힘이니까. 아니. KGB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야욕을 위해 나를 필요로 했던 것 아 니었던가? 그렇다면 내가 사악하면 사악할수록 당신에게는 더 좋 겠지.”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그나저나 정말 놀랍군요. 고반다의 능력・・・・・・・・・・ 나다 요가라고 했지요? 그건 정말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고……. 당신이 마지막에 나막 대위를 해치운 것, 그 건 대체 뭐라고 하는 겁니까?”
“설명해줘도 모를 거요. 키르모비치.”
어쁘랭띠가 짧게 말하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다소 그에게 질린 듯했으나 억지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바바지라는 그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지금 당신들이 보여 준 것만 해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인데.”
“가보면 알 거요.”
이렇게 해 어쁘랭띠는 이제 정체를 드러낸 고반다와 키르모비 치 대령과 함께 먼지 더미를 헤치며 목표했던 곳, 힌두교의 위대 한성자 바바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 저럴 수가…………..”
고반다와 어쁘랭의 뒤를 따르던 키르모비치 대령의 입이 딱 벌어졌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먼지구름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 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래 황량했지만 그래도 초목이 우거졌던 장소였을 것이고, 바바지의 거처답게 조그마한 아시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남아난 것이 없고, 땅거죽조차 통째로 뒤집혔다. 멀리서 보기에 꽤 높아 보였던 언덕도 완전히 허물어져, 길고 긴 태고의 세월 속에서도 보이지 않던 육중한 바위로 된 속살이 그대 로 드러나 보였다. 그나마 남은 혼돈스러운 잔해들도 네이팜의 화 력으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풍 경이었다.
그런 지옥도 한가운데에는 신비한 빛 무리를 내는 구체 하나가 떠 있었다. 그냥 땅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약간 허공에 뜬 채 뭐 라 말할 수 없는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한 사람 이 가부좌를 틀고 요가의 자세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어쁘랭띠가 얘기했던 힌두교의 대성자 바바지임이 분명했다. 그 렇게 수많은 포격과 폭격을 가해서 주변의 모든 것이 가루가 돼 버렸음에도 이 성자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타격은커녕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앉아 있던 땅 거죽이 폭격과 포격으로 깎여 나가서 낮아졌는데도, 그는 평온하 게 원래 자리에서 허공에 떠 있었다.
여태껏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고반다는 그의 모습을 대하자 마자 눈을 부릅떴고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수염들이 모두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 꼿꼿이 갈기처럼 일어섰다. 어쁘띠 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리고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그의 앞 으로 걸어갔고 고반다가 그 뒤를 따랐다.
키르모비치 대령은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들을 대하자 기 가질리고 오그라들었다. 간신히 몇 발짝 더 다가갔으나 결국은 기가 질려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뒤처져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바 위 파편 뒤에 몸을 숨겼다. 그나마 몇 발짝 더 전진했기에 빛의 구 체 속에 앉아 있는 바바지의 모습이 흐릿하나마 조금 더 가깝게 보였지만 자세한 생김새까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고반다도 키르 모비치 대령의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아주 깊게 들 이마셨다.
바바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쁘랭띠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바바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더니 고개를 숙이며 힌두교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하고 말했다.
“존경하는 스승님. 제 인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어쁘랭띠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티 없이 맑아 그가 방금까지 온 갖 음모를 동원해 바바지를 공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았 다. 그런데 어쁘랭띠가 인사하자 바바지를 둘러싸고 있던 빛의 광 채가 조금 줄어들며 구체 안이 투명하게 비춰 보였다.
바위 뒤에 숨어 눈만 내놓고 있는 키르모비치 대령의 눈에 비로소 바바지의 생김새가 확연히 들어왔다. 그러나 키르모비치 대령 은 눈을 크게 떴다. 평범하지만 순백의 소박한 사리 차림을 한 바 바지는 나이가 아주 젊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수염도 없었고, 기다랗게 머리를 길 렀으며 목선과 어깨, 그리고 얼굴 생김이 몹시 가늘고 고왔다. 키르 모비치 대령은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내뱉었다.
“혹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