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2화 – 현장

랜덤 이미지

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2화 – 현장


현장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털털거리는 차를 타고 더글러스 는 현장에 도착했다. 역시 보고에 나왔던 대로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폐공장 주변이다. 원래 프랑코가 파티를 벌였던 장소와는 이 마일(약 3.2km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다. 더구나 워낙이 외진 곳 이라 아예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조차 없다. 부하들과 함께 파티를 벌이던 놈이 화장실 창문을 부숴 가면서까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이 마일을 무슨 생각을 하며 뛰었는지, 현장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니 사고는 더더욱 실타래처럼 엉켰다. 일단은 사건 현장 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핑계고 이러다 가 예의 ‘능력’이 나와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더글러스가 출입을 막기 위해 경찰들이 아무렇게나 붙여 댄노 란색 테이프를 역시 아무렇게나 들추자 테이프들이 멋대로 툭툭 끊어졌다. 조금 멈칫한 더글러스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물론 사건 현장은 거의 말끔히 정리된 다음이었다. 시체도 당연히 옮겨 졌고, 자리에는 사람의 모양을 그린 흰색의 스프레이 자국만이 올 씨년스럽게 그려져 있을 뿐 핏자국도 없다. 주변도 이미 감식반이 한차례 쓸어 조금이라도 단서가 될 부분은 다 집어 간 듯 말끔했 다. 가운을 입은 감식반의 모습조차 보이질 않았다.

다만 지역 경찰로 보이는, 그것도 초짜 신참으로 보이는 경찰 한 명만이 사건 현장에 어슬렁거릴 뿐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그런지 그조차 전혀 긴장감이 없다. 더글러스가 다가와 아이디카 드를 보이자 경찰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너무 늦게 오셨네요. 이미 다 치워졌는데요”

“아니, 늦지 않았어.”

더글러스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일단 프랑코의 시체가 있던 장 소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프랑코가 쓰러졌던 땅바닥 에 손을 댔다. 그것을 보고 그 경찰은 실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식반에서 싹 쓸고 갔다니까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있대도.”

더글러스는 아무렇게나 대답하며 땅바닥에서 계속 손을 떼지 않았다. 어서 자신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발휘되기만을 바랄 뿐 이었다.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삼십 분, 아니 한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옆에서 지켜보던 초짜 경찰도 슬그머니 저만치에 주저 앉았고 이윽고는 교대하러 온 듯한 다른 경찰과 아예 수군거렸다. 몇 번 의아한 눈길이 자신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져 더글러스는 조금 부끄러웠다. 허나 원래 인내심과 끈기를 자신의 최고의 장점 으로 내세우는 더글러스답게 그는 두 시간 가깝도록 그 자세로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리가 저려 올 정도로 기다렸지만 역 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 되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사흘이고 나흘이고 꼼짝 않은 채 앉아 있고 싶지 만 주변 경찰들의 눈초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뒷담화보다 도 만에 하나 자신의 능력이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 수도 없이 생

길 것이다.

‘더 있기도 그러니…….다른 곳으로 가봐야겠군.’

더글러스는 허탈해하며 터덜터덜 자신의 고물차로 다가갔다. 뒤에서 경찰들이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며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수군대고 있을 것이다.

‘맘대로 떠들지. 상관없어.’

더글러스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차 가 어떻게 주저앉았는지 엔진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는지 시동 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갈갈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동 모터를 회전시키다가 결국 차에서 내려 차 옆 문짝을 발로 냅다 찼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긁혀서 흉해진 차의 문짝이 발길질에 움푹 패여 들어갔지만 더글러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뒤에서 경찰들 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쫓아왔다. 더글러스는 이를 악물었다.

‘해결만 하면 돼. 해결만

더글러스는 하는 수 없이 차를 버리고 걸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프랑코의 기분을 그대로 느껴 볼까 싶어 천천히 달렸다. 그 렇게 프랑코가 원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는 갱단 지하실 건물을 가 볼 생각이었다. 물론 아무리 경찰이고 형사라 해도 갱들이 우 글거리는 아지트에 직접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은 새로 배치받았기에 갱들과는 안면조차 없다. 하지만 그 건물은 갱 들의 파티 등 유흥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았고, 어차피 갱들이 직접 신고한 데다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굳이 꺼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마일은 도보로 걷기엔, 특히 더글러스처럼 몸 관리를 부실 하게 한 사람에겐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중간중간 가볍게 달렸 는데도 이십오 분 가까이 걸렸다. 죽은 프랑코는 배가 불룩 튀어 나온 땅땅한 중년 남자다. 더글러스보다도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검시 보고서에도 땀을 심하게 흘린 흔적이 있다고 했다. 어쩌면 미친 듯 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그리로 갔을까? 길의 사이에는 사람 많은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왜? 더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느덧 목적한 건물 부근에 도달하니 시간은 거의 저녁 무렵이 됐다. 덩치 큰 녀석들 몇이 건물 앞을 지키던 참인지 주변을 어슬 렁거리다 더글러스에게 다가왔다.

“여긴 사유지니 나가.”

시비 거는 것처럼 거친 악센트로 말하는데 더글러스는 말 대신 형사 아이디카드만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닳고 닳은 녀석들 답게 약간 자세를 추스르며 비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거의 본능적 인적으로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미 경찰에서 한바탕 다 쓸고 갔소 뭘 또 볼 게 있다고.”

“볼 게 있어.”

더글러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녀석들은 더글러스를 꺼렸는지, 감시라도 하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줄줄 따 라왔다. 더글러스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건물 안을 유심히 살 폈다. 놈들은 보스의 죽음을 경찰에 의존해서라도 해결하고 싶었 는지, 처음 분위기와는 달리 방해는 전혀 하지 않았다.

건물 자체는 얼마 전까지 사용하다가 버려진 폐공장이었는데 바깥을 보니 공용 전기와 수도도 다 끊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갱 들은 아예 주변에 이동식 발전기와 장비를 갖다 놓았다. 건물과 주변의 사물은 매우 낡은 데 반해 갱들이 가져다 놓은 발전기와 몇몇 가구들만 번들거리는 신품이라 눈에 띄었다. 그 어지러운 부 조화만으로도 갱 냄새가 났다. 녹슨 문을 열고 음산한 기운이 풍기는 계단을 내려가 보니 지하실이었다. 역시나 딱 갱들의 수준만 큼 적절히 어지럽혀져 있고 덕지덕지 장식돼 있었다. 싸구려 반 라 모델들의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 있고 스프레이 페인트로 나름 대로 장식이라고 해 놓은 역겨운 그림들, 그리고 여기저기 파티를 벌였던 잔해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알 록달록한 전구며 원색의 리본, 테이프 다발들이 지저분하게 흩어 져 있었다.

중앙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맥주 캔과 위스키 병 이 굴러다녔지만 테이블 위만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아마 마약 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경찰을 부르면서 거기만 서둘러 치운 것이 리라.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뻔했다. 이런 것에는 사이코메 트리 능력도 필요 없다. 더글러스는 그런 쪽에는 관심도 없었다. 

“화장실이 어디지?”

더글러스는 지하실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뒤에 따라오는 덩치들

에게 물었다.

“저쪽이오.”

더글러스의 뒤를 따라오던 거한 중 하나가 퉁명스레 한쪽 방향 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낡은 문짝이 하나 보였는데, 일반적 인 가정에서 쓰는 나무 문짝이 아니고 공장 지하실다운 철문이었 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수사를 하려면 가급적 평 범함 속에서도 특별한 의외성을 발견해야 하며, 그것을 염두에 두 고 잊지 않는 치밀함이 필수다.

더글러스는 철문을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끽 하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꽤나 거슬리게 들려왔다. 문을 열고 보니 새로 칠한 시멘트와 도료 냄새가 아련하게 풍겨 왔다. 구조로 봐도 공장 지하실에 화장실이 따로 있을 턱이 없었다. 필 경 작은 창고 용도로 만든 공간을 갱들 스스로가 개조한 것이리라. 우선 냄새가 증명해 주고 거기에 설치된 변기나 다소 엉성하게 솜 씨 없이 깔린 타일들도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하긴 항상 알코올과 약을 해 대는 놈팡이들이니 화장실이 훨씬 더 필요할 것 이다. 변기에서 태어난 똥 같은 놈들에게는 여기가 고향일지도.

화장실 내부는 그리 지저분하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내부를 둘 러보았으나 특별한 것은 없었다. 경찰 감식반도 여기를 그냥 지 나쳤을 리는 없다. 물론 반드시 살펴야 할 곳은 있다. 한쪽 구석에 환기용으로 나 있는 창문, 화장실은 지하에 있지만 창문이 있다. 창문이 면해 있는 지면은 다른 곳보다 낮아서 창문을 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화장실 안에서 보면 벽 위쪽에 달렸지만, 밖에 서 보면 땅에 거의 붙어 있는 창문일 것이다. 그래서 프랑코가 밖 으로 기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창문은 환기용 펜이 열려 있고, 그 옆에 여닫이로 된 유리문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유리문 은 이미 깨지고 달아나 휑한 구멍만 뚫려 있다.

주변에는 역시 경찰이 쳐 놓았는지 노란색 테이프가 있었으나 더글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뜯어 버렸다. 아마도 여기서 감식반은 프랑코의 지문과 여러 가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더글러스가 주머니에 구겨 넣은 보고서에도 충분히 기록돼있다. 그러니까 프랑코가 여기서 철문을 닫고 뭔가 일을 보다가 창문을 깨부수고 자기편도 모르게 밖으로 나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왜 그랬느냐는 것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것부터가 핑계였을 수도 있다. 화장실에서 뭔가 가령 예를 들면 남몰래 전달돼 온 편지라 든지 메시지 같은 것을 확인한 후 몰래 나갔을 수도 있고, 또는 정 말 무슨 다른 생각이 들어서, 또는 잊고 있던 뭔가가 떠올라서 그랬을수도…….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더글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잊 었던 것이 기억난 정도라면 화장실을 부수고 나갈 만한 이유가 없 다. 그냥 문을 열고 나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곳에서 도망치듯 탈출하게 만들었을까? 더글러스 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대강 구겨 넣었던 감식반의 서류를 꺼내서 여기저기 들춰보았다.

다행히 대충 집어넣은 와중에도 프랑코가 사망 당시 지니고 있 던 소지품들에 대한 감식반의 보고서는 섞여 있었다. 그것을 꼼꼼 하게 확인해 보았으나, 쪽지나 어떤 종류의 메시지는 없었다. 

‘혹시 읽고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었으나 현재까지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가 없다. 그럴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가 왜 이 마일 가까이나 떨어 진 다른 구역의 공터로 나갔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적어도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프랑코는 부하들의 눈을 피해 나간 것이리라.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이미 더글러스 자신 외의 모든 경찰이 논리적으로 추리 했으나 하나도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프랑코 사건은 어제 일어 났지만 앞서 일어난 네 번의 사건이 이것과 흡사했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모두가 생각하는 논리적인 이유 외에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말이다. 더글러스는 자신 의 능력 때문에, 세상은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방법이 안 되면 특수한 방법을 쓰는 거야. 제발 이번 에는 좀 나와 다오.’

아무튼 뭔가 일이 벌어졌다면 분명 이 화장실에서다. 프랑코에 게 어떤 메시지가 전달됐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능력 이 잘 발동된다면 그 메시지를 볼 수 있을지도, 혹은 대략의 전말 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더글러스는 기도 라도 하는 기분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조심스레 오른손을 뻗어 아 마 프랑코가 만졌을 것이 분명한 창틀을 굳게 꽉 쥐었다. 프랑코 의 지문이 남아 있었을 테니, 이렇게 만지는 것은 현장을 훼손하 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차피 감식반이 훑고 지나간 다음이 니 별문제 될 것은 없다. 아니, 설령 문제가 된다 해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은 발동하지 않았다.

‘아냐. 기다려 보자’

기다리면서 더글러스는 지루해진 나머지 화장실 내부를 훑어보 다가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화장실 내부는 갱들이 대강 손을 보았지만, 화장실 문짝까지 고치기는 귀찮았는지 화장실 문 임에도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그 자물쇠는 일반적으로 쉽게 여닫 는 작은 것이 아니라 쇠로 된 굵은 막대를 빗장으로 거는 둔중한 방식이었다. 안에서 문을 잠그려 한다면 꽤나 성가시고 여닫을 때 힘들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안 된다. 힘들다고 해 도 엄청나게 힘든 것도 아니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좀 내면서 쇠 막대를 넣어 찔렀다 빼내면 그뿐이니까.

별것 아니라 판단하니 더글러스는 다시 지루해졌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육중한 쇠문 너머에서 갱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는 듣지 못했는데, 혼자서 멍하니 있다 보니 저절로 청 각이 예민해진 걸까. 아니, 그들이 일부러 들으라고 그러는 건지 도 모른다.

“저 새끼는 화장실에서 뭐 하는 거지? 손 운동?”

“변비 아냐? 흐흐흐…… 엄청 굵은 똥을 싸고 있을지도.”

똥 같은 놈들이라 하는 소리도 역시 똥 같은 것뿐이다. 거기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들으라고 빈정대는 것 같다. 신경 쓰고 싶지 는 않았으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가급적 일을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놈의 능력은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영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어떨 때 이 능력이 나오는 것이고 어떨 때에 는 안 나오는 것인지. 많이 고민해 보았지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더럽지는 않아도 화장실에, 그것도 갱들이 쓰던 화장실 구 석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나 ‘일’해야 할 자신을 생각하니 한심하 기 그지없었다. 허나 참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특별한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 았다. 간혹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갱들의 지루해 죽겠다는 듯한 조소 내지는 빈정거림 말고는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더글러스는 창틀을 잡고 있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다 보니 저절로 오만 생각 이 들었다. 보는 사람도 없지만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 자신이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망가진 창틀을 쥐고 있자니 손의 근육이 저려 왔다. 더글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손을 떼어서 이번에는 변기에 손을 댔다. 보통 때 같으면 갱들이 쓰는 변기 같은 것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 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멍한 상태라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 론 그렇게까지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안 되는 건가?’

그래도 더글러스는 끈덕지게 지저분한 변기 옆에 쪼그리고 앉 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 끈기와 포기를 모르는 성격만이 더글러 스의 단 한 가지 장점이었다. 그 외에는 모조리 단점이니까. 더글 러스는 손을 떼지는 않았으나 결국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더글러스의 몸에 전기가 오듯 찌르르 이상한 감흥이 흘 러넘쳤다. 자신의 능력인 사이코메트리가 발생했을 때 느껴지곤 하던 전율이다. 특히 이번처럼 멍한 상태에서 능력이 발동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확연하게 실감이 갔다.

그러나 채 기뻐하기도 전에 더글러스는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형상에 스스로 놀라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 었다.

‘뭐야 이건!’

너무 놀라는 바람에 더글러스의 손은 어느새 화장실 변기에서 떨어져 있었다. 다시 손을 대기 싫을 정도로 눈에 떠오른 광경은 끔찍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광경이 아무리 끔찍한 것이라도

‘이건 전에 있었던 일일 뿐이야. 실제가 아냐.’

더글러스는 억지로 자신을 타이르며 덜덜 떨리는 손을 화장실 변기에 갖다 댔다. 이 능력은 일단 발동되면 잠시 동안은 지속된 다.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 또렷이 보기 위해 눈까지 감았다.

떨며 손을 대자마자 아까 본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풀어 헤친 금발 머리를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보통의 금발 머리 가 아니다. 피로 얼룩진 듯 붉은색이 점점이 번져 있으면서도 끔 찍하게 번쩍거리는 웨이브 진 금발이다. 약간은 가벼워 보이는 미모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흉악하다. 비정상적으로 검고 길게 구 부러진 속눈썹이 기이하게 비뚤어져 있고 속눈썹 밑의 눈동자는 희게 뒤집혀 있다. 눈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새빨간 립스 턱으로 칠해진 입술의 양옆에서도 립스틱 색깔과 구별할 수 없는 선혈이 줄줄 흐른다. 오른쪽 입술 위에는 작은 점이 하나 있다. 그 리고 정확하게 양미간 사이에는 피를 내뿜는 총알구멍이 뚫려 있 었다. 피부도 비정상적으로 창백해 얼굴의 선혈들이 불거지듯 뚜 렷했다. 그런 얼굴로 반쯤 옷이 찢어진 채 온통 피에 물든 손을 내 밀며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치려는 듯이 다가드는 모습이었다. 끔 찍했다. 대체 철문으로 봉쇄된 화장실에서 어떻게 이런 여자가 갑 자기 튀어나왔단 말인가?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