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4화 – 그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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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4화 – 그녀의 정체


그녀의 정체

더글러스는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려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몹시 어두워져서 좀 쉬어야만 했다. 차는 주저앉았고 어차피 폐차 에 가까운 것이라 수리를 위해 다른 차를 부르기도 뭐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글러스는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허나 악령의 모습을 떠올리 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정말로 악령이 존재한다고 믿은 적은 없었다. 아니, 물론 자신의 사이코메트리 능력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고 지난번에 캐나다 접경에서 만났던 동양인 일행도 믿지 못할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마주쳤던 거대한 얼음 괴물 웬디고를 보고 놀란 적도 있다. 허나 악령이 정말 돌아다닌다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악령은 반드시 존재하며 아주 드물게는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고도 했지만 그냥 한 귀로 흘렸는데….. 

‘사실은 알았는데 문제가 널렸군. 이걸 어떻게 상부에 보고해?’

악령이 프랑코를 겁주어서 몰아갔다고 보고할 수는 없다. 자신 이 정신 병원에 처넣어지거나 농담이 과하다고 징계를 먹을 게 분 명했다. 더구나 그걸 알아낸 과정도 문제다. 자신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됐다 안 됐다 하는 얼치 기 능력이다. 설령 누군가가 믿어 주려고 해도 입증 과정에서 재 수 없게 발동되지 않으면 역시 끝이다. 그러니 진실을 알았더라도 상의조차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더글러스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에는 작은 일이라도 내가 뭔가 도움이 됐었기는 했지. 아주 엄청나고 음산한 기운을 알아봐 주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 뭔가 큰일에 휘말렸었고 몹시 다쳤다는 후일담을 언뜻 들은 적이 있다. 더글러스는 그들을 깨끗이 잊기로 마음먹었다.


1 퇴마록(세계편)』 3권 「아스타로트의 약속에서 마스터의 은신처를 사이코메트 리 능력으로 찾아내 준 것을 의미한다.


어차피 이 세상과 다른 동화 세계에서 나온 존재들이니 동화 속 괴물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생각하고 잊으려 했다. 그들과 연락 한 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으니 어쩌면 본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 른다. 또 비록 겁은 났지만 악령에 놀라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더 글러스의 성질에도 맞지 않았다.

‘그래. 생긴 건 좀 무섭지만 별거 있겠어? 그 악령이 프랑코를 직접 해친 것도 아니잖아. 다만 놀라게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나 도 놀라지만 않으면 그뿐이란 말씀이야. 뭐, 십자가라도 하나 걸 고 다니면 되겠지. 무엇보다도 공연히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성미에도 맞지 않고…….’

하지만 막막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제 빌을 잡아넣을 만한 결 정적인 증거가 아직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투시임을 밝힐 수 없 다면 논리로 정황 증거라도 제시해야 할 텐데, 그 중간에 악령이 끼어들어 있으니 추리라고 내세울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이것을 계 기로 빌을 잡아넣을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프랑코의 몸에서도, 다른 네 명의 희생자 몸에서도 탄환은 나왔 다. 그러나 모두 다른 총에서 발사된 탄환이었다. 빌 정도 되는 인 물이 한 번 쓴 총을 계속 쓸 리도 없고, 실외 공터 멀찍이서 총만 쏘았으니 다른 증거가 나올 가능성도 없었다. 이럴 경우 정석 수 사로 들어간다면 빌의 주변을 감시해 현장에서 체포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지만 빌의 다음 목표가 누군지 모른다. 대규모 수사를 벌이면 빌이나 예상 목표들도 감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수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상부에 인원 요청을 해야 하는데 악령이나 초능력이 동원됐다고 보고가 불가능하니 그럴 수도 없다.

‘일단 그 여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래도 얼굴 하나 갖고 어떻게…….’

젊은 여자고 미인이다. 빌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듯 보이는 데다 가족은 당연히 아니다. 십중팔구 내연 관계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 물론 그 여자도 어딘가의 기록으로 는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 미 국의 여자 사진을 다 들여다볼 수도 없다. 아무래도 빌 근처에 있 었던 사람들 중심으로 조사 범위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 빌을 자극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아, 제길…? 섣불리 눈치채면 빌은 얼마든지 달아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이 다. 실체를 증명할 수 없는 악령을 증거로 내밀 수 없는 판이니 지 금 조심해야 될 것은 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다. 가급적 그쪽 주변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그래도 그 끔찍한 몰골의 여 자모습 하나만 가지고는 증거를 만들어 내기에 너무 막막했다. 결국 결심한 더글러스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다시 택시를 잡 아타고 경찰국으로 향했다. 야근을 하던 직원 중 몇 명은 그를 보 고 웃기도 했다. 아마도 자신이 현장에서 벌인 행각이 어느 틈엔 가 돌아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어차피 대인 관계 같은 것은 신경 써 본 적도 없는 더글러스다. 그는 말없이 경찰 컴퓨터를 뒤져서 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해 조사했다. 비교적 빌과 가까이 있지만 충성도는 그리 높지 않을 만한, 그리고 가급적이면 겁이 많고 약간은 만만해 보이는 타입이 좋았다. 터프한 근육질 남자면 다루기도 어려우니까.

그렇게 생각한 더글러스는 대략적인 인상만으로 빌의 부하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한 사람의 파일에서 스크롤을 멈췄 다. 곤살레스라고 불리는 이십 대 중반 멕시코 혈통의 남자였다. 딱 보기에 머리도 나빠 보이고 덩치도 작았으며 멍해 보이고 의지 력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을 낯짝이었다.

‘그래, 요놈에게서 뭔가 좀 얻어내 보자’

생각한 더글러스는 컴퓨터를 끈 다음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 는 다른 동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경찰서 건물을 빠져나갔다.

곤살레스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빌의 구역으로 찾아가 으슥한 술집 몇 곳만 탐문하면 금방 끌려 나올 놈이었다. 빌의 구역이라고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은 마치 보이지 않는 국경선보다 더 확실하고도 엄준하게 이 더러 운 도시의 구획을 구분해 놓고 있었다. 이런 으슥한 지역은 아무 리 경찰 배지를 가졌어도 한밤중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만큼 안전 하지 않다.

다음 날 아침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거의 밤을 새우듯이 기 다렸다가 새벽녘이 되자 더글러스는 몸을 일으켰다. 새벽이긴 하나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놈들이 움직이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결국 먹지도 않을 아침 식사를 만들고 휘저은 다음 쓰 레기통에 던져 버리면서 시간을 때웠다. 위스키 한 잔이 간절했지 만 이제부터는 금주를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직후라 애써 그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정오가 다 돼 갈 무렵까지 억지 로 참고 버티고 나서야 더글러스는 움직였다. 지금쯤이면 놈들도 조금씩 꿈지럭거리며 기어 나올 시간이니까.

예상했던 대로 빌의 구역 으슥한 곳 몇 곳을 뒤지기도 전에 곤 살레스의 행적이 발견됐다. 곤살레스는 피라미 중에서도 최하 가까운 등급으로 추락해 있었다. 예전에는 빌의 오른팔까지는 못 돼도 그의 등 뒤에는 설 정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조직 내에서 이렇게 전락하게 됐는지는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 으며,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놈이 뭔가 말해 주기만을 바랄 뿐 이었다. 하도 피라미인지라 빌의 갱 녀석들도 곤살레스를 보호하 기보다는 웃으면서, 원한다면 한번 맘대로 갖고 놀라는 식으로 그 가 있는 곳을 선선히 말해 주었다. 덕분에 더글러스는 쉽게 곤살 레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도 열지 않은 술집 카운터 구석에서 꾸물거리는 녀석을 잡은 더글러스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놈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아직 정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임에도 약이라도 했는지 음울한 눈을 멍하게 뜨는 녀석은 변변히 반항도 못 했다. 더글러스는 놈 을 다짜고짜 화장실로 끌고 가 바닥에 팽개쳤다. 계속해서 화장실 과 인연을 맺는 것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놈을 닦달하기에는 이곳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다. 곤살레스는 이제야 위기감을 느꼈는지 간신히 중얼거렸다.

“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닥쳐.”

더글러스는 짧게 말하면서 곤살레스의 주둥이 부근을 한 번 발로 걷어찼다. 딱딱한 코가 있는 단단한 구두다. 녀석의 입가가 금방 찢어지며 약간의 피가 흘렀다.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겁…………?”

“이래도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한다.”

“아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 줘야………….”

“때가 되면 한다니까.”

일단 더글러스는 곤살레스를 특별히 외상이 남지 않게. 다만 기 가 죽어서 얼이 빠질 정도로만 적당히 두들겨 주었다. 이렇게 두 들기는 것도 요령이 없으면 쉽지 않다. 섣불리 주먹을 굳게 쥐고 때렸다가는 멍이 들 수도 있고 어디가 부러질 수도 있다. 주먹을 쥐되 손바닥을 살짝 벌려야 퍽퍽 소리가 크게 나며 타격도 덜하 다. 자신이 진짜 심하게 구타당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게 하면 충분했다. 그래야 나중에 고소를 하거나 병원에 증거를 제출하려 해도 얻어맞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 더럽지만 나름대로는 확실한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또 이러다가 운 좋게 예의 ‘능력’이라도 발 동되면 더 좋다. 물론 그런 변변찮은 확률에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한동안 맞던 곤살레스는 밑바닥답게 결국 눈물을 흘리며 더글러스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고 간청했다.

“말, 말할게요! 으흑・・・・・・・ 대체 뭘 알고 싶어요?”

“빌에 대해.”

“그・・・・・・ 하지만…………. 그건・・・・・・ 함부로 말하면・・・・・・ 위험・・・・”

“지금보다 더 위험할까?”

더글러스가 짧게 말하며 주먹을 치켜올리자 곤살레스는 질색을 하며 말했다.

“서, 설마…………… 아무도 듣는 사람 없겠죠?”

“나”

“제, 제발. 제가 빌에 대해 말했다는 건・・・・・・ 비밀로…”

“흠……?”

더글러스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입이 싸도 너무 쌌다. 아무 리 졸개라고 해도 자신의 보스를 이렇게 자진해서 배반하는 경우 는 흔치 않다. 최소한 심한 강압에 못 이겨 그랬다는 핑곗거리라 도 만들어 두려 할 텐데, 곤살레스는 오히려 더글러스에게 털어놓 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속임수인지도 몰라.’

더글러스는 속으로 생각하며 곤살레스의 멱살을 잡아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안단 말이지. 응?”

“제가… ・그걸 어떻게…”

“그런데 왜 그리 술술 불지? 그냥 너를 변기통에 박아 놓고 다른 녀석 찾는 게 낫겠어.”

더글러스가 곤살레스의 뒷덜미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키려 하 자 곤살레스가 옷자락에 매달리며 버둥거렸다.

‘지금· 지금 내 꼴을 보라고요.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다・・・・・・ 그 빌・・・・・・ 내가 그때・・・・・・ 그 자리에만 없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더글러스는 호기심이 일어 말했다. 곤살레스의 눈빛은 겁을 잔 뜩 먹고 두려움에 질려 있었으나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 다. 빌과 곤살레스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면 항상 뒤에 시립시킬 정도의 부하를 특별히 알려진 이유도 없이 폐물 취급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갱이라고 해도 엄연히 나름의 조 직이다. 이유 없는 강등은 보스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형사님이 알려는 게 뭔진 몰라요. 하지만 빌에 관한 거라 면・・・・・・ 제가 하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중요하고 아니고를 네가 어떻게 알아?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더글러스가 말하자 곤살레스는 힘을 다해 고개를 마구 저어 댔 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약한 표정으로 성호까지 그으 며, 한껏 숨을 죽인 채로 조그맣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이린…………… 아이린을 찾으시는 거 아닌가요?”

“아이린이라고? 그게 누구지?”

“빌의…… 옆에…… 있던 여자예요. 내가………… 은근히 좋아했었죠. 그런데・・・・・・ 그녀가..애를 배 와서 빌의 애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어떻게 됐다는 거야?”

“빌이 묻어 버렸대요. 아무 증거도 남지 않게………….”

“아…….”

더글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뻔하고도 참혹한 이야기다. 물론 이 것도 나름대로 빌을 엮어 넣기 위해서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 었다.

“어디다?”

“그ᆞᆞᆞᆞᆞᆞ 그건 몰라요. 다만…………… 이마를 총으로 쏴서……………. 발견될 수 없는 곳에 치웠다고만…………….”

“하지만 안됐군. 지금 내가 찾는 건 그게 아니야. 요즘 빌의 경쟁자들이 차례로 죽어 나가는 거 알고 있지?”

“그・・・・・・ 그건・・・・・・ 저도 압니다만……”

“혹 빌 주변의 다른 여자들 몰라?”

“다른 여자는 몰라요. 제가 아는 거라곤 아이린뿐이에요.”

허나 생각하던 더글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린은 내가 찾는 여자가 아냐.”

“예? 분명 빌 주변의 여자를 찾으시는 것 아닌가요?”

“네가 어떻게 알지?”

“방금 다른 여자에 대해 물으셨잖아요! 여자는 항상 넘쳐 난다니까요. 빌은 보스니까요. 빌은 여자를 티슈처럼 여겨서 여러 번 만나지 않아요. 빌의 마누라가 성질이 보통 아니거든요. 숫자는 많아도 뭔가 걸릴 여자는 아이린뿐이었을 거예요.”

나름대로 열변을 토하던 곤살레스는 다시 확인했다.

“아까 말한 사실을 제가 안다는 걸 빌이 눈치챘고…………. 그것만으로도 전 이 꼴이………… 그것만 봐도 아이린은 중요할 거예요!” “아냐.”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죠? 그녀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하고 말 것도 없어! 그녀는 아냐!”

더글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자신은 악령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곤살레스를 닦달하는 것이다. 빌의 살인을 돕는 금발 머리의 악령 여자는 어떻게든 그의 부근에 있었을 테니까. 허나 방금 말 한 아이린은 절대 아니었다. 빌이 아이린을 쏴 죽였다면 아이린 이 왜 빌의 앞잡이가 돼 유령이 된 후에도 살인을 도우며 다닌단 말인가. 일단 어떻게든 빌을 엮어 넣을 단서는 될지 모르지만, 수 사하는 데만도 긴 시간이 걸릴 일이다. 더글러스가 생각에 잠기자 곤살레스는 울면서 말했다.

“아이린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꼭 밝혀 줘요. 비록 형사님이 찾 는 게 아니더라도…..”

“진심인가?”

“지금 막 진심이 됐어요. 아이린을 위해서 뭔가 했어야 하는 데……………. 빌의 부하 따위는 처음부터 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병신같이 살아왔는지 조금 깨달은 것 같아요………….”

더글러스는 조금 숙연한 기분으로 곤살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만은 진심 같았다. 어떻게든 빌의 살인을 막고 그를 잡아넣으 면 이 가련한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

“빌에 대해 더 얘기할 거 있어? 특별하지 않아도 되니까. 되는대로”

“형사님……?”

곤살레스는 멍한 눈으로 더글러스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빌을 상대할 각오가 됐나요? 그는 막강해요.”

“내 일이니까.”

그러자 곤살레스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실실 웃었다. 화장실 바 닥에 몸을 쪼그린 채 한참을 배를 잡고 소리 나지 않게 웃다가 이 윽고 또 울었다. 미친 사람 같아 보였지만 더글러스는 묵묵히 기 다렸다. 그러자 곤살레스는 눈물과 침을 손등으로 대강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난 난 이제 지쳤어요. 밑바닥에 몰릴 데까지 몰렸죠. 이젠 아무 것도 상관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빌의 히트맨이 와서 날 묻어 버 리겠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는 대로 다 말씀드릴게요.”

“고맙군.”

“헤・・・・・・ 그런 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네요. 난 참 병신같이 산게 틀림없⋯⋯⋯’

“넌 아직 젊어 늙은이 흉내는 그만하고 말이나 해.”

“그래요. 빌은 이제 약 사업은 접고 합법적인 사업으로 돌아설 생각을 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옛 관계가 있었던 자들은 묻어서 입을 막고, 새로 진출할 사업의 경쟁자들도 노리는 것 같아요.”

“프랑코로 벌써 다섯 명 째야.”

“소문은 저도 들었죠”

“빌이 무슨 방법을 쓰는지 아는 것 없어?”

곤살레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아무도 몰라요. 빌에게는 암살자가 손가락 숫자보다도 많 아요. 그렇지만 빌은 부하 갱들 전체에게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 고 명령한 지 오래됐어요. 움직인 녀석도 없고요.”

“하지만 분명 빌일 거야.”

“모두들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아무도 확신하지 못해요. 부하 인 저나, 다른 측근들도 빌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어떻 게 했는지는 몰라요. 그러니………….”

곤살레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히려 빌이 안 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몰라요.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외부에 전화도 한 번 한 적 없고, 부하들 중 아무도 움직인 적이 없다고요. 그런 빌이 어떻게 다섯이나 죽였겠어요?”

이젠 더글러스가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그렇기에 경찰도 빌은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하가 이럴 정도면 사실은 더 심각하다. 그렇다고 자기가 투시를 써서 악령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뭔가 외부의 힘을 동원했다거나………….”

“애당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 형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다른 자들도 그랬고, 프랑코는 부하들과 파티하다 화장실 창문 밖으 로 혼자 나가 죽으러 갔다면서요? 애당초 그 시간에 거길 혼자 가 면 누구든 양아치 강도 새끼한테 총 맞아 뒈질 수 있어요. 누가 그 렇게 하라고 시킬 수 있죠?”

‘제기랄! 악령이 그렇게 몰고 간 거라고! 그래서 빌이 프랑코를 기다리다가 쏴 죽인거고!’

더글러스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억눌 러 참았다. 일반적으로라면 절대 빌에게 혐의를 둘 수 없을 것이 다. 곤살레스도 분명 빌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어 했지만, 그 조차 이렇게 말했다.

제길. 빌은 그냥 운이 좋을 뿐이라고요. 그냥 경쟁자들이 미쳐 서 죽어 자빠지는 거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빌이 무서운 나머 지 전부 돌아버려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뒈지러 가는…..”

“너보고 판단내리지 말라고 그랬어.”

“나도 목숨 걸고 말하는 거예요. 빌을 잡으려면………… 아이린의 복수를 하려면…………… 지금 죽은 놈들 가지고는 아무런 증거가 안 될 거라고요! 아이린을 캐 보는 게 훨씬 나아요!”

더글러스는 울적해졌다. 운 좋게 협조해 주던 녀석까지 이런 생 각이라니. 결국 곤살레스에게 얻어 낼 것은 없었다. 악령의 정체도 아이린만은 아닐 것 같았고 다른 여자 이름도 얻어 내지 못했다.

‘그냥 이놈이 알려 준 대로 아이린 살해 건으로 빌을 엮을까? 일단 처넣기만 하면 더 총질은 못할 테니……………’

그러다가 더글러스는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혹시 아이린이 금발이었나?”

“예………… 예, 맞아요. 금발에, 미인이었죠……”

“혹시 오른쪽 입술 위에 작은 점이 있어?” 

“어? 예! 아시는군요!”

더글러스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퍼 즐.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곤살레스가 악령을 알고 거짓말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놀란 더글러스는 자신이 보았 던 아이린의 모습에서 있는 대로 특징을 잡아 계속해서 말했는데, 곤살레스는 아이린이 틀림없다고 했다. 짙은 속눈썹을 붙이고, 아 주 진한 붉은 립스틱을 즐겨 바른 것까지 악령의 모습과 똑같았 다. 다만 악령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어서 눈빛은 볼 수 없었는데, 곤살레스는 그것까지 말해 주었다.

“틀림없이 아이린을 보신 것 같은데……. 눈 빛깔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시네요? 아이린의 눈은 조금 푸른빛이 도는 녹색이었어요. 참 아름다운 눈빛이었는데요.”

“이런 제길・・・・・・ 말도 안 돼…………….”

“형사님? 왜…….”

“아니….. 젠장! 젠장! 이게 뭐야! 도저히 모르겠어!”

더글러스는 도대체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의혹에 빠져들었다.

그와 같은 시간 빌의 구역으로 알려진 너절한 변두리의 한복판.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번쩍이는 건물. 십이 층 건물의 맨 위층 펜트하우스 안에서는 문제의 빌이라는 남자가 막 귀에서 이어폰 을 뽑아낸 뒤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의 주변에는 대여섯의 신뢰하 는 부하들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거 봐. 이거 봐. 하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곤살레스 그놈 은 분명 누군가에게 뭔가 나불대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봐. 내 판단이 맞았잖아. 보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혼자 미친 것처럼 실실대며 웃지도 않고 주변에 서 있는 부하들 에게 한참 늘어놓은 빌은 다시 킥킥대며 이어폰을 책상 위에 던지 듯 올려놓았다.

“하. 그러니까 합법적인 사업을 해야 된다는 거야. 얼마나 좋아? 퍼부은 돈으로 개발한 이 소형 도청기! 세상에 이런 게 얼마나 유 행할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 그렇지? 특히 이런 쪽의 사업하는 놈 들은 돈을 아끼지 않을걸? 위험 부담도 적고 경찰들 꼬리 잡힐 일 도 없고! 한데, 그러자니 아…………….”

빌은 무슨 격한 운동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막 잠자리에서 일어 난 것처럼 말하는 중간에 팔을 한 번 쫙 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다음 부하들에게 조금 풀린 얼굴로 말했다.

“과거와 이별해야 하는데 옛 행적이 발목을 잡으면 어떻게 할 까? 응? 어떻게 해? 이 곤살레스 놈 말이야. 입이 살아 있으니 기 회만 되면 뭐든 나불거리고 다니잖아. 단절, 기억을 단절해야 하는 건데.”

그러자 부하 중 하나가 말했다.

“곤살레스를 처치해 버릴까요?”

“오오, 그럴 필요 없어. 이미 형사 나리에게 과거의 기억 중 하 나를 불었더구먼. 항상 그게 찜찜했어. 혹시나 했지만 옛정을 생 각해서 봐주려 했는데 역시나 제 입으로 무덤을 파는군.”

“그러니까 처리를…….”

부하가 뭐라고 하자 빌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이제는 거의 내 즐거움이 됐거든, 너희들 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언제나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게 잘 돼 갈 테니까.”

“자연히 처리될 거란 말씀인가요?”

빌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럼. 자연히 처리된다고. 온 세상이 내 편이란 말이야! 너희들 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말이야. 흐흐흐”

빌이 웃으면서 그만 물러가라는 듯 손을 내젓자 무표정인 부하 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기계처럼 걸어 나갔다. 속으로는 빌이 점 점 미쳐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절대로 아무 표정 도 드러내면 안 됐다. 뚱뚱한 몸집에 머리가 홀랑 벗겨지고 배가 불쑥 나와 위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빌이었지만 그는 부하들에 게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는 누구든 저 절로 죽어 나가니까. 마치 빌의 다른 경쟁자들처럼………

모두가 자리에서 나가자 빌은 다시 킥킥 웃으면서 책상에 교묘 하게 숨겨져 있던 스위치 박스를 열고 거기서 드러난 스위치를 장 난이라도 하듯 톡 건드렸다. 그러자 방 여기저기서 모터 소리가 들 리더니 검은 커튼이 내려와 사방을 덮어 펜트하우스의 창문들을 가리고 방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리고 깜깜해진 방 한가운데에 선 빌은 품에서 조용히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싼 것을 꺼냈다. 손수건에 싸인 물건은 조금 부서진 여자의 브로치였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몇 번 손가락으로 만지자 빌의 앞에 희뿌연 영상이 나 타나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갔다. 피에 젖은 금발 머리에 눈이 뒤 집히고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피를 줄줄 흘리는 여자의 형 상,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지만 빌은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듯, 악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오 나의 사랑하는 아이린, 오늘도 할 일이 생겼어. 우리 같이 일 나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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