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3 : 인간 장준후의 불완전한 계획 [징벌자와 구원자 탄생 2시간 후] : 2화 – 택할 수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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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3 : 인간 장준후의 불완전한 계획 [징벌자와 구원자 탄생 2시간 후] : 2화 – 택할 수 없는 선택


택할 수 없는 선택

“내 말 들어 무조건.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는 거야.”

이러한 까닭에 준후의 입에서 이같은 말이 나온 것이다. 준후 가 던진 말은 너무도 냉혹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여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준후는 자신을 돕던 사람이건 아니건 똑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냉정히 선포 하듯 요구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느 편임을 막론하고 등 골이 서늘해졌다.

“모두 죽는다니? 그게 무슨…….”

누군가가 중얼대자 준후는 지체 없이 말했다.

“내가 죽일 거니까. 모두를 지구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각자의 귀를 의심했다. 정신 나간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준후고,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준후의 전신에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뭘 원하는 게냐?”

현현일로가 당황한 듯 묻자 준후는 곧바로 대답했다.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강렬했다.

“신부님, 현암 형, 승희 누나를. 살려 내.”

이치에 닿지 않지만, 슬픔에 겨운 준후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준후의 목소리와 모습이었다.

준후의 목소리 성량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목소리 자체가 어딘 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었고, 엄청난 적의를 담고 있었다. 게다 가 준후의 영능력이 상당히 담겨 있는 듯 크지 않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소리일 뿐인데도 사방에 가득 차 넘칠 것만 같았다. 이 자 리의 대부분이 영능력자인 만큼 그들은 크게 충격을 받으며 놀라 워했다.

조금 전까지 많은 사람이 퇴마사들을 ‘말세에 임할 자’로 의심 했었다.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큰 싸움이 있었다. 결국 오해는 풀 렸고, 세상은 구원됐다. 징벌자와 구원자를 함께 잉태했던 바이올 렛이 순리대로 무사히 출산하면서 세상은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그 직후 퇴마사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준후가 이렇게 돌 변한 것이다. 다시 한번 사람들은 ‘말세에 임할 자’를 생각해 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구원된 직후에 곧바로 종말을 겪을 것 같아 몸을 떨었다. 특히 지금 준후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 위기는 압도적이었다.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해밀턴 – 아하스 페 르츠를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힘이나 영능력이 아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압도감이 사방을 내리찍어 눌렀다.

또한 갑자기 준후의 모습까지 변하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머 리칼과 옷자락이 영력의 돌풍에 휘말려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거 기에 더해 준후의 머리칼이 희고 눈부신 빛깔로 변했다. 그냥 백 발이 아니라 오색의 영롱한 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색이었다. 눈에 서는 불을 뿜어내듯 선연한 섬광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준후는 덧붙여 말했다.

“살려 내. 이건 명령이야.”

설마 준후가 저럴 줄은 몰랐다는 의혹이 가득한 눈빛을 한 무 련 비구니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준후 시주, 안타깝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준후는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수많은 사람이 있어. 각기 비밀스러운 힘을 지닌 자들이지. 그런데도 사람 몇을 살려 내지 못한다고?”

그때 군중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면 네가 살려라!”

준후는 계속 말했다.

“나도 못 해. 그런데 너희도 못 해? 정말? 그러면 너희가 가진 힘. 내가 얻은 힘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다 쓸모없는 게 아닌가?” 

준후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왜 내가 그냥 둬야 하지? 배신하고, 남을 희생물로 집어 던지기나 하는 것들을?”

손을 다 들어 올린 준후가 일그러진 미소를 한 번 머금으며 말했다.

“이렇게 될 거야. 모두.”

그 순간 군중이 모여 있는 곳 옆에 있던 큰 나무 한 그루가 우지 직거리며 단숨에 뽑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아무 전조도 힘도 느 껴지지 않았기에 모두 놀랐다. 그중에는 염동력, 혹은 허공섭물 空에 가까운 기술일 뿐이라고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가 갑자기 쪼그 라들더니 삽시간에 바짝 말라 버린 것이다. 동시에 말라붙은 나무 전체에 금이 가며 굳어 갔다. 물기는 전혀 없지만 무서울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된다고나 할까? 감각이 예민한 자들은 나 무가 엄청난 저온 상태가 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곧 나무는 가루가 돼 흩어졌다. 완전히 탈수돼 거의 분자 단위 로 부서져 버린 것이다. 이어 나무가 있던 공간에서 굉장한 폭발 이 일어났다. 몇 사람밖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게 어떤 과정을 거쳐 저렇게 된 것인지 인식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 운 능력이었다.

“말도 안 돼! 저건……………!”

그 몇 안 되는 안목을 가진, 대마법사 하겐이 떨면서 중얼거렸 다. 주변에 있던 몇몇이 눈길을 보내자 하겐은 간신히 중얼거렸다.

단순한 능력이 아니야……………. 원리를 근본적인 법칙을 깨부쉈어!”

준후가 한 일은 단순한 영능력이나 초자연적인 주술이 아니었 다. 겉보기에는 빠르게 몇몇 가지 수법을 반복한 것으로 보일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지식. 특히 과학에 관한 지식도 많았던 하 겐은 알아보았다.

‘복잡한 술법이 아니었어! 내 생각이 맞다면, 그저 한 가지만 했을 뿐이야! 바로…..!’

더 참을 수 없었던 하겐은 준후에게 외쳤다.

“넌 지금 물을 지배했나? 아니, 통제한 건가?”

그러자 준후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아보는 자가 있긴 하네.”

“대답해라. 넌 그냥 물을 지배한 게 아니다! 물 자체에게 명령한 건가? 아니, 세상의 근본 법칙을 뒤엎을 수 있게 된 거냐?”

준후는 작지만 거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맞다고 대답한 것보다 더 확실한 반응이었다.

준후가 한 것은 보통의 기술이 아니었다. 그건 물의 구조 자체 에 간섭해 명령한 것이었다.

물은 수소 원자 두 개에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돼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산화라고 하는데 보통 수소는 산화, 즉 연소 과정을 거 치면서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뿜는다. 이것은 자연의 가장 기본 법칙 중 하나였다. 이것을 반대로 돌리려면, 즉 환원하려면 그만한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구조 원리 자체를 통제할 수 있다면 명령만 하면 된다. 나무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물 분자들 이 명을 받아 강제적으로 다시 수소와 산소로 바뀌었으며, 그 과 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주변에서 흡수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무의 주변 온도가 극저온 상태로 떨어진 것이다. 결국 나무는 물을 통 해 함유하고 있던 모든 분자를 잃은 데다 극저온까지 겹쳐 거의 분해돼 버렸다.

그런데 준후가 명령을 중단하자 명에 따라 주변에 모여 있던 수 소와 산소 원자들이 다시 결합해 물이 돼 버렸다. 물 자체로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물성(物性)적인 변화, 그리고 절대 영도에 가까운 극저온과 연소 과정을 연달아 겪게 된 나무는 존재조차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해체됐다.

그건 주술이나 마법을 한참 뛰어넘은 대자연의 물리적 법칙을 직접 조종하는 초월적인 능력이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힘이나 통 제력 따위는 비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창조신 정도나 행할 수 있 을 것 같은,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을 보여 준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

하겐이 절규하듯 묻자 준후는 간단히 대답했다.

“초월했으니까. 아직은 초입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준후는 눈짓으로 저만치에서 사람들에게 안겨 있는 쌍둥이, 즉 징벌자와 구원자인 아기들을 가리켰다.

“저 둘이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을 서로 상쇄했지. 세상을 망가뜨 리려는 끝없이 어두운 의지와 세상을 구하려는 한없이 선한 의지. 거기서 나온 힘이 상쇄됐어. 그런데 그 힘이 그냥 없어지기만 했 을까?”

준후는 말을 잠시 멈추고 한 번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그 아기들은 내 품에 있었어. 그 힘이 내게 왔건….내 분노가 커서였건・・・・・・ 아무튼 나는 저절로 이렇게 됐어.” “그렇다고 세상 전부를 파멸시킬 수 있단 말이냐? 조그마한 공간도 아니고 세상을? 지구 전체를?”

준후는 소름 끼칠 정도로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이 지구, 세상 전체야. 왜냐고? 그 세상을 우리가 구했 으니까. 아마도 단 한 번뿐이겠지만……… 그리고 나도 같이 사라지 겠지만, 적어도 한 번. 아주 작은 한순간만큼은 세상 전체를 내가 통제할 수 있게 된 거야.”

“세상을 구했다고 그런 권한이 생길 리 없다!”

“아냐. 생겨. 보통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거고, 섭리와 신에 관한 생각이 얕으니 청하는 방법도 모르겠지?”

“그럴 리가!”

“못 믿겠으면 너도 직접 세상을 한 번 구해 봐. 그리고 신과 직 접 소통해서 요구해 봐. 여기서 신격인 존재와 직접 대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해? 일방적인 명령이나 정신병으로 치부될 헛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직접 뭔가 물어보고 대화 나눌 수 있는 자 가 있긴 하냐고? 난 어릴 때부터 됐거든? 하물며 지금은 어떨까.” 

준후의 말에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 모여 있는 자 중에 는 단순히 수련한 사람이나 주술사, 초능력자도 있다. 하지만 대 다수가 종교에 의해 힘을 얻은 자들이었다. 그중 몇은 계시를 받 거나 이적을 행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직접 자 신이 믿는 존재를 친견(見)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냥 내려 주는 힘을 받거나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계시. 혹은 잘해야 사도나 천사급을 만난 정도였을 뿐,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는 없었 다. 그러나 준후는 달랐다.

“대답은 아주 간단해. 그래서 물어봤어. 그러니 된다더군. 누구 든 세상을 진짜 구원하면, 세상에 대해 한 가지 정도는 뭐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고 해. 보통은 권하지 않지만, 인과응보의 원 리 때문에 요구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얻어 낸 거야.”

“그래서 얻은 게 고작! 세상을 다 부수는 힘이라고?”

“세상을 부수는 힘은 아니지. 그렇게 복잡하고 큰 것은 이루기 힘들어서 아주 작고 단순한, 물 분자 정도 돼야 통제의 권리를 얻 을 수 있지. 다만……”

준후 다시 웃었다.

“그 범위가 지구 전체 정도라는 거지. 단 한 번뿐이지만, 지구 전체의 인간을 구했으니 그럴 수 있는 거야. 뭐, 바다가 말라붙었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은 좀 복잡하겠지만 지구라는 별 자체가 사라질 정도는 아니니 대수로운 것도 아니지 않아? 뭐, 너 회들도 생각해 봐야 하니 시간은 주겠어. 오늘 내로야. 무슨 방법 이든지 찾아내 그러나 못하면, 그땐 끝이야.”

사람들은 준후의 말이 사실일 경우를 저마다 상상해 보았다. 지 구상의 모든 생물에는 물이 포함돼 있다. 이것만으로도 살아남 을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물 분자가 강제 로 분리되며 흡열(熱) 반응을 일으킨다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 질 게 뻔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극한으로 얼어붙을 것이다. 자연 현상의 기본 법칙이 붕괴되고, 질서가 반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구에는 바다가 존재한다. 바다에 있는 방대한 양의 물이 일시에 수소와 산소로 분리된다면 지구상에 당장 있는 모든 에너지로도 부족할 수 있다. 최소한 지표면 전체는 완전한 죽음과 정지라고도 할 수 있는 절대 영도 상태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그 안 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준후도 죽거나 권능의 효력이 떨어지는 순간, 분리됐던 수소와 산소는 도로 결합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흡수했던 열량이 한꺼번에 방출돼 지구에는 불바다의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그 후에 호우가 올지, 안 올지까지는 예측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 요도 없었다. 단순한 물 분자의 결합에 작용하는 법칙 하나에 개 입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물은 확실하게 사멸할 테니까. 이런 천문학적인 재앙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뭔가는 절대 없었다.

준후는 더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방금 보여 준 기술의 시작은 더 복잡했다.

원래 『해동감결』의 예언에서는 ‘말세에 임할 자가 나온다고 돼 있었다. 나중에 퇴마사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예언 자체를 없애 버렸지만, 그전까지 준후는 스스로를 희생해 ‘말세에 임할 자’를 연기해서 현암의 손에 죽으려 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안 됐다. 정말 그럴듯해야만 했다. 준후는 섣부른 연기 정도로 박 신부나 현암을 속일 자신이 없었다. 더구 나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자신도 없었다. 세상은 너무도 넓었고 인간은 너무도 많았다. 그것을 일시에 뒤엎을 힘이 있었다면 지금껏 고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준후는 비록 실제 행하지는 않을 테지만 어떻게 해야 세 상을 단숨에 멸망시킬 수 있을지 오랫동안 궁리해 왔다. 그러나 기존의 주술이건 뭐건 그럴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힘은 없었다. 반 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정말 끈질기고 영리한 생물인 데 다 사회나 세상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핵전쟁을 일으킨다고 해도 인간을 정말 멸망시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악 마들조차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종교적 초월 세계를 많이 접한 준후는 초월적인 방법, 즉 과학이나 기타 보통의 인간 능력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섭리에 간섭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런 물질의 기본 구성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물론 기본 섭리에 역행되는 것이기에 장시간 이것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 특별한 허락이 있다면 불가 능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석가모니가 하늘 위를 걸어가고 구름 너머로 들어가서 수십 일 머물다가 도로 내려오는 등 대신통(大通)을 보이고, 예수가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보이며 마침내 죽은 이를 살리는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라 생각했다. 물론 양상만으로는 간단하게 속임수, 혹은 과학이나 주술로도 비슷한 흉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천적 섭리를 잠시 통 제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특히 어떤 형체를 지니거나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양상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 원리 가 변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기술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준후는 만약에라도 통제가 가능해진다면 가장 근본 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건 바로 물이었다. 물은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물질이었으니 까. 그러나 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물이 수소와 산 소로 분리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은 없었다. 더구나 강제 로 해체할 때 일어나는 흡열 반응과 원상 복귀될 때의 발열 반응 도 엄청났다. 어차피 물이 분해되는 순간 모든 것은 죽음을 넘어 해체돼 버리겠지만, 물 없이도 유지될 남은 문명의 잔해나 기술도 그런 극단적인 변화는 견딜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준후는 잠시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앞에 모여 있던 군중 사이에서 총성 이 일어났다. 더불어 주술 계열로 보이는 강력한 세 줄기의 공격 이 준후 향해 뻗어 나왔다. 준후의 위험성을 알게 되자 준후가 행동하기 전에 해치워 버리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순간 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이 최소 넷이나 됐다. 총성이 울리자 마자 바로 주술 공격을 가한 것이다.

총격 이후로 가해졌지만 몹시 빠른 공격이었다.

그중 한 줄기는 순수한 주술이 아니라 철 목탁에 밝은 기운을 담은 매서운 공격이었다. 목탁만 보아도 용화교에 속한 자의 공격 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한 줄기는 칠흑같이 어둡고 음산함을 가득 담은 기운이었 다. 아마도 아사신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은 검은 해골 형상을 한 채 날아드는 괴기스 러운 공격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칼키파에 속한 자의 힘이 분명 했다.

이 세 공격을 가한 자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잘못된 길을 따 라 세상을 진정으로 위기에 빠뜨릴 뻔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들의 죄의식 때문인지, 혹은 입막음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준후가 진정으로 두려워져서 공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후는 공격 자체만으로는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준후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본색을 드러낼 때부터 준비는 돼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 준후는 꽤나 놀랐다. 자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 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이 준후의 앞 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준후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던 만큼 그것 을 예상하고 준후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청홍검을 든 무련이었다. 현암이 아라에게 청홍검 을 건네주었으나, 아라가 아기들의 영혼에게 인질로 잡혀 있을 동 안무련이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검술의 달인답게 날아드는 철 목탁의 공격을 베어 버렸다. 사실 주술력이 나 법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련이지만 현암조차도 인정할 정도 의 무서운 검술 실력과 청홍검에 깃든 수많은 이의 염원으로 어지 간한철은 물론이고 주술까지 튕겨 낼 수 있었다. 세 가닥 공격 중 에서 그녀가 막기 쉬운 공격인 데다 불교 계통인 용화교의 공격을 보자 무련은 더욱 분노한 채 공격을 막아 냈다. 그녀의 눈은 과거 검에 미쳤을 때 이상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줄기, 아사신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현현파의 근호와 오의파의 상관이었다. 무리 중에서는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 었지만 퇴마사들과의 교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실제로 힘은 없지만 두뇌 회전이 빠르고 명민한 승현 화상이 있 었다. 승현은 준후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인연이 깊던 백제암의 사천왕은 외문기공이 전문이고 다수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말이 통하는 근호와 상곤에게 상황을 주시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 었던 것이다. 준후를 덮쳤던 공격은 강하고 잔인한 기운이었지만 미리 힘을 모아 대비했기에 주술을 아예 없애지는 못해도 방향을 틀어 쳐 낼 수는 있었다. 비록 강한 자들은 아니었어도 마음을 모 았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칼키파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수아였다. 정확 히는 수아의 정령들이었다. 수아는 너무 놀라 사태를 제대로 인지 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아이답게 항상 준후의 편이었다. 그런 수 아의 뜻을 안 정령들은 준후에게 날아오는 칼키파의 무서운 공격 에 달라붙어 공격 자체를 무화(化)시켜 순식간에 없어지게 만들 었다. 어쩌면 무련이나 상곤 등이 나서지 않았어도 정령들만으로 도 모든 공격을 막았을지도 몰랐다.

수아는 아무 말 없이 울고 있었고 무련과 근호, 상곤은 공격을 쳐 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용화교는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당신들이 정녕 불법을 따르는 자들입니까?”

무련의 외침과 함께 근호도 소리쳤다.

“책임지기 싫다는 거냐? 책임지게 해 주겠어!”

상곤도 덧붙였다.

“정말 거지 같은 놈들이구나!”

이렇게 다섯 명의 크고 작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준후를 지켰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의 신호가 된 것은 준후를 저격한 총알이었다. 총기 지식이 있는 자들은 그 총소리가 바로 인근에서 들린 것이 아니란 점을 알았다. 총성 자 체도 최소 12.7밀리미터 구경탄을 사용하는 저격총 이상급의 음 향이었으며 그런 총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서 꺼내 조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총알은 소리보다 빨랐다. 그러니 총 성이 들릴 즈음에는 이미 총알이 날아든 상태라는 뜻이었다. 아무 도 총알이 날아오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으니 총알을 막아 낼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는 태연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세 번의 주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에도 총성은 다시 들려왔다. 무련이나 상곤, 근호 등에게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총알을 감지해 막아 낼 능력은 없었다.

그사이 사격은 계속 이어졌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그리고 세 번째 저격부터야 사람들은 준후에게서 조금 떨어진 땅 에서 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럽게 못 쏘네!”

군중 속에서 누군가 투덜거렸다. 준후에게 저격을 가한 것은 모 두가 확인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때 준 후의 앞을 막아서며 유령처럼 순식간에 나타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해밀턴이었다.

그는 이미 왼손으로는 한 남자의 멱살을 거머쥐어 인형처럼 가볍게 들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이미 반쯤 부서져 버린 바렛 (Barrett) 저격총을 들고 있었다. 해밀턴의 능력으로 총은 단숨에 꺾인 상태였으나, 그자가 준후에게 저격했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 해 굳이 들고 온 것이다.

해밀턴은 그자를 뭇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거의 반쯤 박혀 버릴 정도로 거칠게 메어꽂았다. 그것도 모자라 부서진 저격총을 그자에게 거침없이 던져 다시 한번 비명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무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희가 감히 이런 짓을 해? 예전의 나였다면 너 같은 건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해밀턴은 그자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잡아 치켜올리고 얼굴을 들이대며 눈을 부릅떴다.

“아마 손끝부터 꼼꼼하게 밟아서 천천히 죽였겠지. 모두를 위해 희생한 박 신부님을 생각해서 참는 거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반드 시 그렇게 했을 거다. 아니……………”

해밀턴은 그자의 얼굴을 다시 땅에 처박곤 번개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무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모인 쓰레기들 모두를!”

과거 방황하는 유대인, 아하스 페르츠 시절의 해밀턴은 최고의 공포로 군림했던 존재였다. 그는 무엇으로도 죽지 않고, 모든 법 칙까지도 무력화시키며 이천 년 이상 누구의 공격에도 눈 하나 깜 짝하지 않았던 공포 그 자체였다. 물론 지금은 박 신부의 감화로 아하스 페르츠의 인격은 소멸되고 해밀턴의 인격만 남았지만, 그 래도 그가 지닌 힘과 불사의 조건은 여전했고 그가 분노하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두려운 일이었다. 무표정하고 권태에 찌들어 사람 을 벌레 죽일 듯할 때가 더 두려웠을 수는 있지만 지금 생생하게 직접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앞에 두고 마음이 오그라들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나름대로 이쪽 세계에 발붙인 능력 자들이었기에 위압감은 더욱 강했다.

그런데 해밀턴은 더 이상 잡아 온 자를 건드리거나 뭔가 묻지도 않았다. 그는 준후를 한 번 힐끗 돌아보더니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나에 대해서는 다들 알 거라 믿는다. 그런 내가 단언하건데, 이 제 장준후는 절대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마치 나처럼! 그러니 섣불리 건드리지 말란 말이다!”

그 말에는 다소의 웅성거림이 따라왔다. 해밀턴 하나만도 부담 스럽기 그지없는데 준후까지 그렇게 됐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였 다. 그러자 해밀턴이 곧바로 말했다.

“증거를 보여 주지!”

그러면서 해밀턴은 갑자기 입고 있던 상의 어깨 부분을 단숨에 찢어 어깨부터 팔까지 맨몸을 드러냈다. 이천 년을 살아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흉터 하나, 흠집 하나 없는 말끔한 피부가 보 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람들의 눈길이 꽂힌 것은 해밀턴의 어깨 쯤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손바닥 정도 크기의 검은 원이었다. 

“저건!”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탄식과 경악으로 가득한 외침을 끌어냈다.

“블랙 서클!”

한때 세상을 휩쓸고 수많은 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지옥문까지 열려고 했던 블랙 서클의 난동은 세상의 일반인들에게 거의 비밀 에 부쳐졌지만 세월이 지난 후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알 려져 왔다. 그런데 단순히 명칭일 뿐만 아니라 그 단체의 상징이 라고 할 수 있는 블랙 서클이 아하스 페르츠였던 해밀턴에게 있 다니?

그때 로파무드가 힘겹게 나섰다. 아직도 로파무드는 몸을 잘 움 직일 수 없는 상태라 울고 있는 수아를 달래는 역할밖에 못 했지 만 그래도 이것만은 설명해야 했다.

“이상한 음모론이 나올까 봐 확실히 밝혀 둡니다. 저건 제가 해 밀턴 님께 드린 겁니다. 조금 전에 말이지요.”

곧바로 군중 속에서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물론 구원자와 징벌자 문제 때문에 세상이 위기를 맞았던 참이지만 과 거 블랙 서클이 초래한 위기도 여파는 컸다.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속셈이냐?”

그러자 해밀턴이 크게 대답했다.

“속셈은 없다! 이게 맞는 길이니 이런 것뿐이고!”

“이게 불사성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군중 속 누군가의 외침에 로파무드가 대답했다.

“저는 전생에 블랙 서클을 만든 자인 마스터였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영혼이 정화돼 환생한 것입니다. 물론 과거 같은 미친 짓 은 하지 않을 겁니다만.”

그 말 그대로였다. 마스터가 죽고 난 후, 그의 영혼은 영혼 없는 상태로 숨만 붙어 있던 로파무드의 몸에 안착된 상태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로파무드는 다시 말했다.

“물론 과거의 일입니다만, 마스터는 남이 가진 능력을 흡수하려 는 욕심을 가졌어요. 그래서 악마와 협력해 만들어 낸 게 블랙 서 클입니다. 블랙 서클을 상대의 몸에 심어 영혼은 악마에게 넘기 고, 원주인이 가졌던 능력은 흡수하려는 의도였죠.”

“그럼 네가 그 힘을 써서 해밀턴의 능력을 가졌단 거냐?” 

경악한 누군가가 외치자 다른 자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해밀턴은 죽지 않았잖아!”

그 말에 로파무드는 억지로 힘을 짜내어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 

“이 블랙 서클은 더 이상 악마와는 관련 없습니다! 영혼을 빨아 들이거나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원래의 블랙 서클에서 다른 이에게 능력을 옮길 수 있는 부분만 남겨 새 롭게 만들어 낸 겁니다!”

“그럼 남의 능력을 마음대로 앗아 간다는 건가?”

다시 질문이 나오자 로무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능력을 빼앗는다면 엄청나게 무서운 것이겠지요. 그 러나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건 불가능합니다. 기꺼이 마음으로 승낙해야만 능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신비하지만 결국 은 남을 가르쳐 능력을 전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다만 순 식간에 능력을 옮길 수 있다는 정도일 뿐입니다!”

로파무드는 여기까지 말한 뒤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마스터라는 악인의 환생 이라는 것도 몰랐었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모든 능력을 잃어 새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이 블랙 서클만큼은 영혼에 달라붙은 것처럼 따라왔어요. 가장 흉측한 기술만이 달라 붙어서 제 과거의 악업을 일깨우면서 저를 고통스럽게 해 왔었습 니다. 그러나……………..”

로파무드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약간 웃어 보였다.

“…… 결국은 카르마와 다르마의 순환이었어요. 가장 악한 의 도로 만들어진 기술로 저의 마음을 경계하게 하고 벌을 주면서도 결국은 이렇게 가치 있게 쓰이도록 카르마가 작용했다고 저는 믿 습니다. 결국. 결국 저는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카 르마의 섭리에 감복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쏟아졌다.

“그러면 준후가 불사가 됐다는 건 어떻게 된 거지?”

이번에는 해밀턴이 당당히 나서며 외쳤다.

“그래! 내가 준 거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로파무드에게 나 스스로가 청했고, 이미 조금 전에 준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얻은 능력을 넘겨준 것이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정말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이건 보통 주술이 아니다. 세상의 근본 질서를 왜곡하는 힘이기에 넘겨줘도 감당하지 못 하 거나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성공했어. 봐라. 저격 은 나름 정확했겠지만, 모조리 물리 법칙을 넘어서 엉뚱한 곳에 박혔다. 나를 쏜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무슨 뜻이라는 거요?”

그 말에 해밀턴은 거만하게 웃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자존심이 약간 상하긴 하지만, 준후가 얻은 질서의 통제력이 나보다도 강하다는 뜻이지!”

“그건 말도 안 되오! 당신은 이천 년 이상 살아온 자이고 대주 술사 시몬 마구스의 영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준후는 아직 젊은데…………….”

그때 해밀턴은 웃던 얼굴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더욱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이유를 말해 줄까? 바보 같은 너희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밀턴은 미소를 거두고 강하게 말했다.

“그래. 준후가 백 년에 한 명씩 나올 수준으로 영리한 건 맞지만, 능력은 나보다 떨어진다. 게다가 쌓아 온 힘도 이천 년간 수행 한 나에게는 어림도 없다! 오히려 세상에 나왔던 모든 능력자 중 에서 자질은 시몬 마구스가 가장 강했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인 간’으로서는 말이다.”

해밀턴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잠시 끊고 주변을 둘 러보았다.

“그러나・・・・・・ 나도 시몬 마구스도 세상을 구한 적은 없었다! 아 니, 이전의 내가 세상을 없애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었는지 아는 녀석들은 다 알 거다! 그리고 시몬 마구스도 마찬가지다! 능력은 내가 시몬 마구스가 더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우 주의 원리, 인과에 빚을 지울 정도의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러 나는 그런 적이 있는 거다! 그리고 모르는 자들이 많은 것 같 은데, 퇴마사들은 이미 여러 번 세상을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이고! 인과마저 도 기울어질 정도로 우리는, 세상은 퇴마사들에게 빚을 진 거다! 그러나 남은 건 준후 한 명뿐이고, 그 모든 게 집중돼 이런 결과가 생긴 거다!”

해밀턴은 다시 한번 더 힘주어 말했다.

“여기서 누구보다 오래 살았고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던 내가 단 언한다! 후는 이제 초월의 경지에 들어갔어! 나나 시몬 마구스 보다 능력은 부족해도, 준후는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거다! 그렇기 에 정말 스스로 말한 것처럼 준후는 세상을 순식간에 분해하고, 얼려 버렸다가 불태우는 완전한 멸망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과거의 내가 이런 방법을 생각했더라면…………… 아마 여기 남아 있 는 인간은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겨우 이 정도인지도・・・・・・ 결국은 저 녀석이 나보다 낫군.”

해밀턴이 어딘가 허탈하게, 심지어는 질투하는 것 같은 표정으 로 말을 잇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 말을 믿을 수 있게 됐다. 다른 자도 아니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했던 자, 심지어는 예수님을 직접 본 적까지 있던 자가 이렇게 말하니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용화교의 제자 한 명이 크게 외쳤다.

“그럼 당신은 왜 그런 거요? 저 녀석이 대놓고 세상을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하는데,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거냔 말이오!” 그러자 해밀턴이 무섭게 일갈했다.

“머리만 밀었다고 승려냐?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세상이 이지 경이 된 건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입을 나불거려?”

다른 사람도 아닌 인류 최강자인 해밀턴의 일갈에 그는 너무 놀 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해밀턴은 당장이라도 그 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으나 결국은 몇 번 심호흡까지 하 며 다시 참아 냈다.

“너희들 잘 생각해 봐라. 준후가 무조건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했나? 분명히 조건이 있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 말은 안 듣고 무조건 공격부터 하는 거지? 그게 통할 것 같나?”

해밀턴에게 잡혀 와 땅에 쓰러져 있던 자는 입에서 피를 한 번 뱉으며 이를 악물고 외쳤다.

“당신이 다 망쳤잖소!”

“그 알량한 총알이 정말 통했을까? 아니, 설령 통했다고 쳐도, 준후가 아무 준비 없이 저런 소리를 했을 것 같나? 자신이 죽는 순간에 자동적으로 저 능력을 쓰게 해 놨다면?”

“죽으면서 그런 힘을 끌어낼 수는 없잖소!”

“이해조차 못하고 있군! 너 같은 버러지라면 그렇겠지. 너는 여 전히 어설프게 끌어낸 힘과 섭리에 의한 힘을 구별 못 하고 있다. 날 생각해 봐라. 주변의 어떤 공격을 받아도 나는 조금의 힘도 신 경도 쓴 적이 없다. 주변이 알아서 나를 죽지 않게, 아니, 죽을 일 이 생길 수 없게끔 하지! 이런 게 바로 섭리에 의한 힘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준후는 마음만 먹으면 그 생각, 아주 작은 의지의 한 끝자락만으로도 말한 것처럼 지구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런 데 어설픈 짓을 해?”

그러자 무련이 합장하며 울먹였다.

“설령 준후 시주가 그런 결정을 내리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요.”

앞서 나섰던 근호와 상곤도 차례로 입을 열었다.

“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너무도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는 솔직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피해자인 준후를 죽이려는 짓만은 두고 볼 수 없었소이다.”

수아는 계속 울고 있었지만 그녀를 다시 받아 안은 로파무드가 말했다.

“저는 카르마를 믿습니다. 블랙 서클도 신의 안배였다면, 무언가 길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해밀턴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일단 모든 걸 순리대로 풀지 않아서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걸 잊지 마라. 애당초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구원자나 징벌 자는 알아서 상쇄됐을 테고, 이런 희생들도 없었을 테지! 우리는 시험에 든 것이고, 그 시험을 못 이길 뻔한 거다! 마구잡이로 살생 이니 희생이니 맘대로 내모니까 악에 빠진 거라고! 또 그 꼴을 보 고 싶은 건가?”

하겐이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말했다.

“해밀턴 씨의 의견에 찬성하오. 오히려 준후를 보호하는 것이 더 맞았던 거요. 그리고 무작정 준후를 적대시하기보다는, 그와 타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본질적으로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맞을 테니 말이오.”

하겐의 말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당수가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유럽에서 명망 높은 이유가 있었군. 알아주니 고맙군.”

해밀턴이 웃으며 대답하자 칼키파의 수장쯤 돼 보이는, 복면을 쓴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친 악센트가 담긴 영어였다.

“타협이라면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는 것 말인가?”

그러자 해밀턴이 대답했다.

“준후가 바라는 게 그것이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이번에는 용화교의 제자 하나가 합장하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해밀턴이 무섭게 쏘아보는 바람에 기세에 질려 입도 열지 못했다. 사실 이제 준후를 적대시하자는 주장은 눈에 띌 정도로 힘을 잃어 준후를 공격하려 했던 자들은 입조차 열 수 없게 돼 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전환시켜 보려는 듯 현현일 로가 말했다. 사실 그는 좀 편협한 사람이었지만 그동안 쌓은 도 력이 있어서 지금의 사태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쉽지만 그게 안 되네. 비슷한 술법은 어떻게든 있기 는 해. 아주 금기시되긴 해도 시도해 볼 방법이 없는 건 아냐. 그 렇지만 이미 다 늦어 버렸어. 영혼이 아주 떠나 버려도 안 되고, 무엇보다 그릇이 될 육체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다 온전해도 성 공할까 말까인데, 아예 몸이 다 부서져 없어진 사람을 살려 낼 수 는 없어!”

그러자 현현이도 말했다.

“이런 젠장! 형님, 거짓말 좀 하지 마쇼! 애초에 그건 심장에 전 기 충격인가 줘서 살리는 거나 다를 바 없을 때 되는 거고! 혼이 떠나면 그냥 끝이잖소! 억지로 움직인다고 해도 살아 있는 척 흉내만 낼 뿐이잖소! 강시나 좀비나 뭐 그런 건데, 뭐든 간에 준후가 바라는 건 아니잖소!”

현현일로는 현현이로의 말에 불만스럽게 그를 노려보았지만, 현 현이는 지팡이로 땅을 쿵쿵 내리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인간의 능력에는 제한이 있는 법인데, 그게 된 사람은 진짜 신동에 달한 대성인들밖에 없어! 그리고 몸이 아예 박살 난 경우는 그분들도 안 될 건데, 아마?”

그러면서 현현이로는 해밀턴과 준후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저분도! 초월 경지에 들어간 준후도 못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거요!”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준후가 비웃듯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도 그건 못 하니까.”

현현이로는 준후를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 전체를 걸어 원, 세상에 저렇게 제멋대로인 구세주는 처음 봤네그려.”

준후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내가 왜 제 멋대로가 됐을까?”

“뭐?”

준후는 이를 악물고 고함을 쳤다.

“그러니 그분들을 살려 내란 말이야!”

그리고 준후는 조금 멍한 표정이 돼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그분들이 다시 오셔서 한마디만 하면,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그분들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난 이전처럼 모 든 힘을 세상을 구하는 데 쓸 거야. 희생하라면 희생도 하겠어! 그 러나 그분들은 이제 안 계신다고! 누가 나를 말릴 건데? 내 마음을 누가 움직일 수 있는데? 미워 죽겠어! 왜 그분들이 죽고 너희만 살 아 있는 건데? 이게 세상의 섭리야? 이따위가 인과의 법칙이냐고? 죽어야 하는 건 너희들인데! 난 이런 그릇된 인과, 받아들일 수 없 어! 내게 주어진 권리로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러니.. 준후는 다시 언성을 높여 절규하듯 고함을 쳤다.

“그분들을 살려 내라고!”

그러자 칼키파 수장이 묵직하게 말했다.

“불가능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쩌려는 거냐?”

“그것 말고 원하는 건 없어.”

“그들과 같이 불사의 존재라도 되려는 거냐?”

“그런 것은 필요 없어. 내가 바라는 건 아주 간단해. 그분들이 인간답게, 편하게 여생을 보내는 것. 단 하나뿐이라고!”

“그런・・・・・・ “

“고작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어? 그래, 그거야. 다른 건 꿈꿔 본 적도 없어. 오로지 남만 위해서 모든 걸 다 바쳤다고. 그 흔한 게 으름 한 번 변변히 부린 적 없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으며, 평범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조차 단 한 번도 누린 적 없어! 그런데 모든 희생을 그분들이 다 지셨어! 난 그게 싫어! 그게 자연스럽고, 세상의 이치라면 이런 세상은 존재할 가치가 없어! 두말하지 않겠어. 그분들 살려 내. 살아서 세상에서 못 다 한 시간을 행복하게 누리는 걸 보는 게 내 소원이야. 그걸 위 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아! 그것 하나 못하고 희생만 강요하는 세상이라면 사라져야만 해!”

준후는 다시 크게 부르짖었다.

“그러니 살려 내라고! 어떻게든 살려 내란 말이야!”

준후의 외침은 사방을 마치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현현이 로조차도 움찔할 정도였다. 현현일로는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우화등선이 나온 거구만. 정말 득도하면 세상이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지니 이제야 이해가 되네.”

현현일로의 중얼거림은 작았지만 이것도 준후에 대한 생각을 되살피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사실 도교나 선도, 불교에서도 이런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우화등선, 등선, 해탈이라는 이 름으로, 관념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한 인간이 득도해 변 화하는 걸 실제 눈앞에서 보고 나니 이런 초월 존재가 얼마나 무 서운지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 전체를 쥐고 흔들 뿐만 아 니라 삽시간에 멸망시킬 수도 있게 되다 보니, 세상을 저절로 멀 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준후처럼 소박한 바람이나 분노도 자칫 큰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준후는 오로지 부활이라 는 한 가지 목표만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해결책은 없 었다. 그러나 완전히 육신이 가루가 된 퇴마사들을 되살리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잘해 봐야 현현이로의 말처럼 일종의 강시나 좀비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을 뿐, 절대 준후가 요구하는 평범한 생활 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 방법은 없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가 당장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기적은 지금 바랄 수 없었다. 많은 능력자가 모여 있었지만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은 지금껏 아무 말도 않고 있는 준호와 아라에게 눈을 돌렸 다. 굳이 따지자면 준후를 제외하고 이번 말세의 위기를 막은 공 은 이들에게 있었다. 희생까지 치러 가며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아기들의 영혼을 달랬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라는 계속 울고 있었고 준호는 창백하지만 침울한 표정으로 명상 자세만 취한 채 동상처 럼 앉아 있었다. 준호는 이제 앞을 볼 수 없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알 수 없었지만, 아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곧 빽 소리를 질렀다.

“뭘 봐! 그런다고 너희 편 들어주지 않아! 난 절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준후 오빠 편이야!”

준호도 아라의 말에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무거운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부와 함께할 겁니다.”

이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준후의 뜻을 따를 것이 확실해 보였 다. 준후를 설득해 달라고 청해 보려던 자들은 굳은 그들의 의지표현 앞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준후도 몸을 떠는 와중에 간신히 참고 시간을 주려는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의 소심한 목소리가 사람 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며 침묵을 깼다.

“저・・・・・・ 실례합니다만…………….”

침묵이 이어지던 중이라 뭇사람들의 눈길은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야말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일반인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바로 승현과 시타 교수, 그리고 황달지 교수였다. 승현은 능력은 없더라도 백제암의 사천왕을 이끄는 리더였으 며, 합리적인 발언도 자주하고 분위기도 이끌던 인물이었지만 시 타 교수와 황달지 교수는 그야말로 일반인 그 자체였다. 이 자리 에 있는 것도 인질로 끌려온 것이지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들도 아 니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시타 교수는 헛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희는 여러분 같은 능력은 지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만… 그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당신들이 뭘 할 수 있겠소?”

몇몇 사람은 대놓고 핀잔까지 주었지만, 시타 교수는 다시 한번 심호흡까지 하고서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될지 안 될지는 장담 못 합니다만, 한 가지 시도해 볼 만한 방 법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대번에 시타 교수를 향했다. 많은 사람 이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타 교수 는 조금 당황한 듯 다시 헛기침을 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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