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5화 – 홍수 28 : 녹비
녹비
백호는 맥라렌에게 무수히 닦달을 당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 았다. 맥라렌이 주로 다그친 것은 초능력을 지닌 자가 얼마나 있 는지, 그들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였다. 백호는 입을 다물고 있 었다. 그리고 맥라렌도 조회를 해 본 결과 초능력을 지닌 사람 은 주기 선생까지라고 믿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정부를 위 해 일했던 사람은 주기 선생과 퇴마사들 정도뿐이었으니까. 또 한승희의 능력 이외에는 아무리 괴이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그 다지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백호가 엿듣기에는 한국 정부에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퇴마사 네 명과 지금 새로 일을 벌인 주기 선생 만 제거되면 더 이상의 조치는 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들이 모두 죽는다면 상황이 종료되어서 무엇하겠는가?
주기 선생은 아직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고 맥라렌은 할 수 없이 특수 부대를 요청하여 숫자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백호 는 주기 선생이 걱정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도움도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뒤로 끌려간 백호는 요원들에게 발 견되어 잡혀 온 최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최 교수는 눈물을 흘 리고 있었다.
“아니, 최 교수님!”
“날 버리고 갔어요. 그곳을 이 눈으로 보았어야 하는데………………”
최 교수는 목숨을 걸고 따라온 자신을 퇴마사들이 버려두고 간 것이 몹시 슬픈 모양이었다. 백호는 이런저런 말로 최 교수를 위로하고 타일렀다. 그러면서 백호는 최 교수에게서 마스터의 흉악한 계획과 그것을 막으러 모두가 목숨을 걸고 동굴로 들어 갔다는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백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자들에게 이야기를 해봤자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가지 백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퇴마사들이 이기는 것. 그래서 홍수가 밀어 닥치지 않기를 비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뒤뚱거리는 네 영체 인형의 뒤를 따라 퇴마사 일행은 동굴 깊 숙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동굴은 점점 넓어지다가 한 굽이 좁은 길이 나왔다. 그 안으로 들어서서 좁은 통로를 지나니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집 터도 보였고 그 후에 누군가가 지은 천막들도 있었다. 그리고 광 장의 복판에는 희미한 녹색을 띤 커다란 비석이 서 있었다.
“녹비예요!”
준후가 소리치자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달지 교수가 발견한 유적이 바로 여기였군.”
승희가 덧붙였다.
“마스터의 본거지이기도 하고요.”
퇴마사들이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그들의 앞을 안내하던 네 영체 인형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흰 연기 를 뿜어내면서 타들어 갔다. 아무리 영체 인형이었지만 자신들 과 똑같은 형상이 타는 것을 보니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을 느낄 틈도 없이, 그들이 들어왔던 좁은 길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암이 놀라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길은 바윗덩어리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이젠 독 안에 든 쥐군. 살아서 가기는 틀렸어.’
현암은 조금 울적해졌지만 애써 그런 기분을 떨쳐 내고 퇴마 사들에게로 돌아왔다. 박 신부가 눈짓을 보내자 현암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박 신부는 알았다는 듯한 표시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네 명의 영체 인형은 검게 탄 사람 모 양의 자국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국들은 네 사람에게 섬뜩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게 너희의 모습이 될 거야. 미리 감상하는 기분, 어때?”
마스터의 복화술이 동굴 안을 울렸다. 박 신부가 외쳤다.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모습을 보여라!”
“이리 가까이 와라. 녹비 앞으로……………. 하하하.”
마스터의 말에 따라 네 사람은 이를 악물고 기운을 모으려고 애쓰면서 녹비의 앞으로 갔다. 준후는 고개를 들어 녹비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았다. 아까 연희를 통해 보았던 녹비의 내용과 거 의 비슷했으나 주술적인 말들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았다. 당장 내용을 파악하여 주술을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녹비의 첫 부분 이 『천부경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을 보고 준후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우리 선조는 위대했어. 온 세상을 점령한 것보다 더 위 대했어. 세상을 위해 이렇게 애쓰셨으니까…………. 세상에 그런 분 들은 많고 많으시지만, 우리 선조님도 그만 못하진 않았어.’
녹비의 앞에 무엇인가 둥근 물체가 휙 날아들었다. 수다르사 나였다.
“아!”
승희가 놀라 외치는 사이, 허공에 떠 있던 수다르사나의 밑에 서 서서히 하나의 형체가 생겨났다. 아까 퇴마사들의 경우와 같 이 영체 인형이었는데, 이번에는 마스터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 었다. 마스터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두 아연 긴장했지만 준후는 문득 궁금해졌다.
‘마스터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우리를 여기에 부른 거지?’ 우뚝 서 있는 녹비와 거기 새겨진 주술, 수다르사나…………. 혹시 마스터가 저 녹비에 새겨진 주술을 익힌 것이 아닐까? 태곳적부터 내려오던 강한 힘을………..’
준후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스터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이 녹비……………. 해독하는 데 힘들었지. 비록 다는 아니지만 너희를 없앨 정도의 힘은 익혔어! 하하하! 그리고 수다르사나도 자 유롭게 만질 수 있게 만들었고…….”
준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녹비에 적힌 고대의 힘은 지맥을 바꿔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것을 마스터 가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탈진할 만큼 지쳐 버린 일행들이 버 티어 낼 수 있을까?
“건방 떨지 마라!”
현암이 인상을 쓰면서 월향검을 빼 들려고 했지만 마스터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수다르사나로 현암을 가리켰다.
“장난감은 함부로 휘두르지 마. 그게 쓸 만하다고는 하지만 수 다르사나와 부딪혀도 버틸 수 있을까?”
현암은 이를 갈며 월향을 떨쳐 내려던 손을 멈추었다. 현암은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월향, 항상 나를 지켜 주었지? 이번에는 내가 지켜 주마.’
현암은 승희의 긴장된 얼굴을 돌아보았다.
‘승희야, 약속은 지키마. 수다르사나는 내가 반드시 되찾아 줄게.’
마스터는 아주 기분 좋은 듯 떠들어 댔다.
“이젠 기운도 없겠지? 나는 아까 다 죽을 줄 알았어. 그러면 어쩌나 너희를 걱정하고 응원했다구. 하하하. 항상 너희는 내 계획을 뭉개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지. 이젠 안 돼. 하하하.”
박신부가 엄숙하게 말했다.
“너는 이길 수 없다.”
“하하핫! 헛소리 그만해라! 너희는 어차피 죽어. 알아? 길은 막혔고, 공기도 없을 거야. 내가 질 이유는 없지. 잊었나? 나는 영혼이야.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빠져나가면 돼. 그럴 필요도 없 지만 너희는 절대 날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마스터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 갔다.
“난 말이지, 너희를 꼭 내 손으로 없애고 싶었어. 당연하지! 나 도 그렇게 당했으니까! 그러나 그냥은 안 돼. 너희를 비참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홍수를 막으러 왔지? 천둥벌거숭이들……………, 너희 눈앞에서 홍수를 보여 주지. 너희를 천천히 박살 내면서 말야.”
“그게 네 말대로 될 것 같으냐? 죽어도 네놈에게 지진 않을 거야!”
승희가 고함을 질렀지만 마스터는 여전히 웃었다.
“지치고 힘 빠진 너희가 궁극의 주술을 익히고 궁극의 무기를 지닌 날 이긴다구? 더구나 질 것 같으면 너희는 여기 묻어 두고 나만 나가면 그만이야! 그리고 난 절대 지지 않는다!”
마스터는 수다르사나를 높이 치켜들고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나와 대적할 수 없다. 나는 이 녹비에서 궁극의 힘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절대적인 무기 수다르사나를 지니 고 있단 말이다! 하하하.”
녹비를 훑어보던 준후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궁극의 힘의 원리? 뭐가 궁극의 힘이란 말이냐? 이 녹비에 적힌 것이 궁극의 힘이란거냐?”
“바보 같은 녀석.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육 년이 나 걸려서 나는 저걸 완전히 해독해 냈단 말이다!”
준후가 피식 웃으면서 마스터를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쳐다보 며 외쳤다.
“이 녹비에 적힌 것이 네가 그토록 찾았다는 궁극의 힘이냐? 이 멍청이! 저건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천부경 의 원문이다!”
“저게 『천부경』・・・・・・”
현암과 박 신부가 놀라며 뭐라 말하려 했으나 준후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마스터에게 쏘아붙였다.
“전부터 에메랄드 태블릿이란 것의 내용이 천부경과 유사점 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단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 고 싶었을 뿐이야. 몇 년이나 걸려서 해독한 모양인데 바보짓밖 에 할 줄 모르는구나.”
마스터는 준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것을 억지로 눌러 참는 듯했다.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는구나! 녹비의 내용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줄 알고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구 나! 들어 볼 테냐? 『천부경은 이렇게 되는 경문이니 잘 들어라! 너도 우리말을 잘하니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 녹비의 앞부분과 비교해 봐라! 일시무시일석삼극 무진본始無始一析三極 無盡 本) ・・・・・・ 천일일지일이인일삼 일적십거무궤화삼…………….”
준후는 큰 목소리로 『천부경』의 여든한 자를 단숨에 외워 소 리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스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곁눈질로 녹비를 보더니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스터의 표정이 일 그러지는 것을 보고 준후는 마지막으로 흥 하고 크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디 그러면 궁극의 힘이란 것을 써 보실까? 육 년이나 했다 면서? 난 두 살 때부터 그걸 수련해 왔으니 한번 해보자. 어서!”
준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긴장된 자세를 풀고 꼿꼿이 서 서 한 손바닥만을 들어 보였다. 그것은 준후가 평소에 하던 수인 을 맺는 자세도 아니었고 방위를 밟는 자세도 아니었다. 『천부 경』의 주술은 일종의 깨달음에 가까웠다. 그것은 경전이 지니는 힘이나 비슷했다. 평범한 불경도 계속 힘을 쏟으면 불력이 높아지고, 성경도 믿음을 가지고 끝없이 탐구하면 기도력이 생기는 이치와 같다. 그런 깨달음의 힘은 마호메트가 ‘산을 옮길 수 있 다’고 한 것처럼 가능성으로만 보면 무한하지만, 실제로는 마호 메트가 산을 향해 걸어갔던 것처럼 실제의 힘을 뽑아내기는 쉽 지 않다. 아니, 애당초 깨달음과 관련이 있기에 그런 경지에 오 르면 스스로 힘을 사용할 근거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남을 해치 는 용도로 사용되는 힘이라면 그 자체의 깨달음과 상충되므로 힘으로서 발휘되지 못하는 신통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아 는 준후는 그 때문에 아무 방어도 취하지 않고도 안심할 수 있었 다. 현암과 박 신부는 준후의 말이 사실인가 싶어 놀랐지만, 그 들은 녹비에 씌어 있는 녹도문을 알아볼 재주가 없었으니 뭐라 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스터는 눈에 띄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듯싶었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갔다. 게다가 몸이 풍선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준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한 손바닥을 마스터에게 내보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아무런 영력이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과 박 신부는 준후의 뒤에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마스터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고 승희도 힘을 보낼 준비를 했다. 마스터 는 동굴 안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로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엄청난 녹색의 기운을 내뿜어서 녹비를 후려쳤다. 거대한 녹비는 아랫부분만 남기고 박살이 나 흩어져 버렸다. 마스터의 상상 을 초월한 힘에 현암과 박 신부마저도 움찔했지만 준후는 여전 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마스터의 비 틀린 생각으로는 하늘과 같은 경지를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 것을 실제로 구현하면 그 자체가 정당성을 잃으므로 힘을 발휘 할 수 없다. 그는 바보짓을 한 것이다. 마스터의 절규가 울려 퍼 졌다.
“빌어먹을! 모두가 거짓말이었어. 모두가! 이 따위 것을 육 년 에 걸쳐서…………… 이따위 것을!”
마스터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부서져 버린 녹비를 후려갈겨 산산이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무서운 기세로 퇴 마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 죽여 버릴 테다. 녹비의 힘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나에겐 수다르사나가 있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말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마스터는 크게 팔을 휘둘러 수다르사 나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수다르사나에서 밝은 광채가 솟아 나 와 어두운 동굴 속을 훤하게 밝혔다.
박신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냥은 막을 수 없을 거야! 힘을 합하세!”
“진을 펩시다.”
“퇴마진인 셈인가요?”
그러나 세 사람이 미처 진형을 형성하기도 전에 수다르사나가 마스터의 손을 떠났다. 동시에 현암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 다. 박 신부와 준후는 현암이 왜 그러는지 몰라 앗 하고 짧은 혓 소리를 냈지만 현암의 태도는 분명했다.
현암은 제아무리 저것이 흉악한 물건이라도 도혜 스님의 칠십 년 공력을 당해 내진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력이 얼마 나 엄청난지 몰라도 인간의 힘도 그만 못지않다고 믿었다. 무엇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희와의 약속 반드시 자기 손으로 수다 르사나를 되찾아 준다던 그 약속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현암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 돼!”
승희가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서 고함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 었다. 수다르사나는 미친 듯 회전하면서 현암에게로 날아들었고 현암은 크게 기합성을 지르며 공력을 있는 대로 불어넣어 오른 손을 굳게 내밀었다. 엄청난 공력이 몰린 현암의 팔 주위에 아지 랑이 같은 것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모습이 박 신부와 승희의 눈 에까지 들어왔다. 수다르사나는 현암의 오른손으로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박 신부와 준후, 승희, 마스터까지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현암조차도 굳은 채 수다르사나를 쥐고 서 있 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이나 광채도, 폭발도 없 었고 영력도 소용돌이 같은 기운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다르사나는 현암의 손에 무사히 잡혔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 는 사이, 현암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의문에 가득 찬 표 정이 되었다. 현암은 서서히 팔을 접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수다 르사나를 살펴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마스터의 영체 육신 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 저건……. 저 수다르사나가・・・・・・”
“괜찮은가? 현암 군?”
“형!”
마스터의 맥없는 중얼거림에 이어 박 신부와 준후가 동시에 외쳤다. 승희는 아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현암은 무 표정한 얼굴로 조금 장난스럽게 수다르사나를 던졌다가 받았다. 준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준후는 그런 절대적 기물 은 자체의 깨달음과 관련되었을 거라 여겼고, 아무렇게나 터지 는 폭탄과는 다를 것이라 짐작했다. 허나 그건 짐작이었을 뿐이 라. 현암이 정말 그것을 받아낼 때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긴장 했다. 자기가 마스터의 일격을 받을 때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소 중한 현암 형이 그러는 것은 가슴이 졸여졌다. 자신의 생각이 틀 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준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옳은 것 은 어디까지나 옳은 것이다. 그러나 마스터는 기가 막힌 듯 입을 딱 벌린 채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승희야, 받아라.”
현암은 승희가 머뭇거리며 눈을 뜨는 것을 보자 수다르사나를 던져 주었다. 승희는 얼결에 그것을 받고는 으악 소리를 지르며 놓칠 뻔하다가 가까스로 손아귀에 쥐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현암은 대답하지 않고 마스터 쪽으로 눈을 돌리며 여유 있게 씩 웃었다. 마스터는 자지러질 지경이 되어 있다가 그제야 벌떡 일어섰다. 승희는 현암을 보고 뒤에서 외쳤다.
“현암군! 고마워! 그리고 이놈……….”
승희는 마음속의 애염명왕에게 힘을 빌려 달라고 외치면서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이 마스터를 향해 수다르사나를 휘둘렀다. 마스터는 수다르사나를 이용하지 못했지만 자신이라면 될 것 이라고 여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마스터라도 없애 버 리기를 주저할 것이 틀림없었지만, 승희는 이번에야말로 자신 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마스터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릴 작정이 었다. 수다르사나는 승희의 손에서 후끈 달아오르면서 무지갯빛 색깔을 뿜었다.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비켜서!”
현암은 승희의 고함에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현암의 추측으로 수다르사나에는 전설과 같이 표면적 인 물리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승희야, 잠깐! 그건…….”
박신부가 승희를 만류하려 했으나 다리가 불편하여 급히 갈 수가 없었다. 준후가 옷자락을 잡았지만 승희는 본 척도 않고 무 지갯빛 광채를 현란하게 뿌리면서 크게 수다르사나를 던졌다.
“이 자식! 죽어라!”
“으악!”
마스터는 비명을 올렸지만 몸이 굳었는지 움직이지 못했고 현 란한 빛을 뿜은 수다르사나는 마스터에게로 날아들어 마스터의 영체 육신의 허리께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그러곤 다시 튀어 올라 챙그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승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퇴마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무서움이나 공포에 의한 비명 이 아니라 장난기 섞인 조롱의 비명 소리였다.
“으아악! 하하핫!”
마스터는 유유히 웃으며 허리를 굽혀 수다르사나를 집어 올렸 다. 그러고는 수다르사나를 훑어보았다.
“고맙다. 가르쳐 줘서. 이제야 이 물건의 사용법을 알겠군. 너 희 같은 바보 천치들은 알지 못하지. 후후훗.”
승희는 온몸이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박 신부와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현암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건 어차피 전설의 물건이었을 뿐이야. 아무 힘도 없어.”
“아니, 있지. 하하하. 알았어, 알았다. 하하하.”
마스터는 웃다가 정색하면서 말했다.
“이건 홍수의 봉인이야. 홍수의 봉인 땅의 힘의 상징 그리고 저 비석에 적힌 것은 그것을 푸는 주문.”
“그게 무슨 소리지?”
“나도 바보였지만 너희도 바보야. 이걸 내게 다시 주다니. 우하하.”
“말해 봐! 비석에 적힌 게 봉인을 푸는 주문이라니?”
“그래,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말해 주지. 이건 땅의 봉인이다. 땅의 봉인으로 어떻게 홍수를 막았는지 난 몰랐다. 그러나 지금 은 알았어. 이건 지맥의 열쇠다. 이제 천천히 죽여주마.”
마스터가 수다르사나를 문지르며 주문을 외우자 주변이 흔들 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마스터가 수를 쓰기 전에 달려들어 일격 에 요절을 내고 수다르사나를 되찾을 생각이었지만 난데없이 땅 이 흔들리자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하는 사이에 기회를 놓쳤다. 주변을 살피던 준후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벽이 뜨거워져요!”
벽만이 아니었다. 동굴의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마저도 뜨거워지면서 급격히 달아올랐다.
“네가 이곳의 지맥을!”
침착하던 박 신부도 소리를 질렀고 마스터는 큰 소리로 깔깔깔 웃어 젖혔다.
“우선 여기에 용암이 뻗치게 해 주지. 너희들, 잘 구워질 거야.”
프로텍터와 헬멧까지 걸친 요원들이 대오를 이루어 주기 선생 에게로 돌진하려던 찰나였다. 그것을 본 백호와 최 교수가 요원 들을 어깨로 밀치고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곧 다른 요원들 에게 제압당했다. 백호는 소리를 질러 조심하라고 했지만 주기 선생은 반응이 없었다. 맥라렌은 그런 백호를 비웃는 눈길로 쳐 다보며 굳이 제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때 땅이 우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입니다!”
동굴 밖을 포위하고 있던 요원들은 지진이 일어나자 몸을 낮 추었고, 돌진할 채비를 하던 요원들도 지진의 기세에 눌려 그 자 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주기 선생은 총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백호가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질 렀다.
“죽지 마! 절대 죽으면 안 돼!”
그러나 지진이 일어나자 최 교수가 탄식을 하면서 백호에게 말했다.
“아아, 마지막입니다. 지진은 지맥의 봉인이 풀리는 것입니다. 지맥의 봉인이 풀리면 지진이 일어나고 극지의 얼음이 녹아 홍수가…………….”
“아니야!”
백호는 단호하게 외쳤다.
“아직 극지의 얼음이 녹은 건 아냐! 그럼 극지에 지진이 나야
지 왜 여기에 지진이 나지?”
백호의 말에 최 교수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백호는 눈물을 흘리면서 씹어뱉듯 말했다.
“그들이 싸우는 거야! 그들이! 그들을 잡아 죽이려는 우리를 위해서!”
현암이 이를 갈면서 달려들었지만 마스터는 영체 육신을 버리 고 수다르사나 속에 붙어 빙글 날아올랐다. 박 신부와 준후가 수 없이 공격을 가해도 마스터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공 격을 피하기만 했다. 현암은 월향검을 날리고 싶었으나 월향검 은 기운이 빠져 날 수 없는 상태였다. 동굴을 가득 채운 찜통 속 같은 열기에 모두 기진맥진했다. 마스터와 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열기와 싸우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그들이 들어온 통 로는 마스터의 영체 육신과 싸우는 중에 무너져 버렸고 그 벽마 저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하하. 이건 땅의 열쇠. 그러니까 지맥의 열쇠야. 땅을 조종 하는 데에 힘이 있는 것이지 직접 던지는 것이 아니다. 저 비석에 써 있던 내용도 그거였어!”
마스터는 수다르사나에 붙어 날며 큰 소리를 지르다가 퇴마사들이 탈진해 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영체 육신을 나타나게 하여 그 속으로 돌아왔다.
“모두 힘을!”
박 신부와 현암, 준후는 최후의 힘을 모았다가 일제히 마스터 를 공격했다. 그러나 마스터는 검은 안개의 술수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영체 육신으로 공격을 맞받아 냈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 세 사람은 모두 뒤로 튕겨 나뒹굴었다. 이렇게 퇴마사들이 맥없이 허물어져 버린 가장 큰 이유는 마스터가 강한 것도 있지 만 승희에게서 신력이 조금도 나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갈된 힘을 보충받을 수 없는데다가 화덕 속 같은 열기 때문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하하하. 이젠 기운이 없군그래. 그렇지?”
악에 받힌 듯 승희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놈!”
마스터는 조금 찔끔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울지는 마라. 난 여자가 우는 게 싫어.”
“무슨 헛소리냐! 울 거다! 네가 싫어하는 거라면 무슨 짓이든 할 테다!”
승희가 악을 쓰자 마스터는 비웃듯 말했다.
“흥. 싫다고 했지 무섭다고는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울어라. 아예 고통으로 눈물을 쥐어짜 주지. 아주 천천히 너희가 구워지 는 걸 지켜봐 주지. 만족하나?”
현암은 당장이라도 현기증이 일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애써 기혈을 진정시키며 말을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너는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을 꾸미는거지?”
“하하하. 시간을 벌려고? 벌어서 무엇하려고? 어차피 너희는 타죽는다. 너희가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당해 낼 수 없어!”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는 목소리였다.
“간단해. 나는 힘의 원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지. 너희 때문이다. 바 로 너희 때문에 나의 수도는 중도에서 깨어졌고 모아 두었던 힘 도 흩어져 버렸다. 내게 무엇이 남았겠는가? 너희를 죽이고 싶다 는 마음뿐이야! 너희를 아스타로트에게 넘겨주면 나는 다시 살아난다!”
악마 아스타로트의 이름이 언급되자 네 사람은 몸을 움찔했다.
“우리를 아스타로트에게 넘긴다고?”
“아스타로트는 너희를 상당히 미워하더군. 특히 저기 검정 옷 입은 노인네는 더.”
“그런다고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가? 가엾은 자. 그렇게 오래 수도를 했다면서 그렇게 뻔한 것을 모르는가? 너 자신이 수없는 사람들을 속이고 해쳤으면서 자기가 속고 있는다는 것은 왜 모 르지?”
“내가 속고 있다고?”
“약속과 믿음을 깨고 아무나 이용해 먹는 너를 보고 우리는 악 마라 부른다. 그러나 너는 악마와 거래를 하지. 악마가 너보다도 더 약속을 잘 지킨다고 믿나?”
“하하하.”
마스터는 허탈하게 웃어 젖혔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상관없어. 나는 이미 죽었다. 무 서울 것이 없어.”
“영혼도 영원한 존재는 아니다. 영원히 소멸되어 무로 돌아가 고 싶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다만 너희의 알량한 모습만 사 라져 준다면 내가 없어져도 좋다.”
승희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너는 우리와 맹세를 하고서도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설 수 있 는가? 너는 지난번에 산정에서 우리와 약속을 했지. 그러나 도구 르가 나타나자 블랙엔젤을 시켜서 우리를 습격했어! 맹세를 어 겼어! 너는 약속을 어기면 몸과 영혼이 다 같이 가루가 된다고 했는데?”
마스터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우하하. 너는 내가 맹세를 지킬 것으로 믿었나? 나는 이제 바 바지의 제자가 아니다. 인간도 아니야! 그래서 너희는 나를 이길 수 없는 거야! 진리는 단순한 데 있는 것이지!”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마스터가 몸을 움츠렸다. 마스터의 뒤에 서 소리도 없이 블랙엔젤의 영상이 나타나면서 마스터의 허리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뻗었기 때문이다.
“그래, 진리는 단순한 데 있지. 나는 악마지만 맹세는 지킨다. 뭐, 안 지키는 악마들도 많지만, 난 그러기 싫거든. 그러니 너도 맹세는 지켜”
블랙엔젤이 직접 만지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손을 쥐어 보이자 순식간에 마스터의 허리가 우두둑 꺾여 반으로 줄어들었다. 무 시무시한 힘이었다. 마스터의 영체 육신은 실재하는 몸은 아니 었지만 오히려 실제 사람의 몸보다 훨씬 강했는데도 블랙엔젤은 고무 인형처럼 다루었다. 그러면서 블랙엔젤은 지루하고 짜증난 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 혼자만 뭘 안다. 뭘 안다 하는데 너무 멍청하고 지 긋지긋해서…………. 잘난 척만 안했어도, 입만 함부로 안 놀렸어도 더 갖고 놀았을 텐데 말이지…………….”
마스터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준후와 박 신부의 귀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아우성치는 영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준후는 얼굴을 승희에게 묻었다. 박 신부는 블랙엔젤이 마스터의 머리를 뭉개어 꾸겨 넣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에서 오라를 빛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지만 검은 막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현암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박 신부를 도와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으나 갈 수가 없었 다. 그사이 두 토막이 나 버린 마스터의 영체 육신이 이번에는 위아래로 짓이겨져 찌부러지고 있었지만 블랙엔젤은 유유히 매 혹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 아스타로트에게 당하고도 그렇게 뭘 몰라? 똑똑한 척 은 다 하면서 학습할 줄 모르니? 세상이 네 것도 아닌데 누구마 음대로 망하게 하니 마니 왜 자꾸 착각하니? 바보.”
실제의 피와 살이 있는 육체는 아니었어도 무시무시한 힘으로 몸이 찌부러지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박 신부와 현암이 다가가지도 못하는 사이 블랙엔젤은 마스터의 영체 육신 을 주먹만하게 뭉쳐 버렸다. 경악할 광경이었다. 블랙엔젤은 그 뭉치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상하게 생긴 검은색의 작은 구 체 하나만이 블랙엔젤의 손에 남았다. 블랙엔젤은 검은 날개 같 은 안개를 슬쩍 퍼덕거리며 요염하게 웃었다.
“맹세는 지켜졌나? 이제 저놈은 몸과 영혼이 전부 가루가 되 었다. 내 일부로서 말이야. 후후훗. 너희는 잘못 알고 있다. 악마 는 맹세를 잘 지켜. 거짓말은 잘하지만 맹세는 잘 지킨다. 알겠니?”
“너, 너는 어째서………….”
퇴마사 네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블랙엔젤이 마스터를 없애다니!
“저놈은 너희만을 원했지. 후후훗. 그놈이 대홍수를 원한 것은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니면 너희를 여기까지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놈을 도왔고, 후후후. 그런 놈의 종살이를 하려 니 이만저만 곤욕이 아니더군.”
“그럼 너는 왜?”
“후후훗. 나? 나는 고통이 필요하다. 인간들의 고통과 번뇌, 번민.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서만이 나는 상승할 수 있 다. 신의 경지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거야.”
“무슨 소리냐?”
블랙엔젤이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눈길로 퇴마사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창조될 때부터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로 영겁을 떠도는 자들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해 보았나? 그런 우리 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정했을지 짐작할 수 있어?”
박신부는 숨을 죽였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무언가 심각한 선택이 있을 거란 예감을 받았던 일을 박 신부는 기억해 냈다. 어쩌면 마스터와 싸우는 것이 이번에 닥칠 가장 큰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악마와 직접 대화를 하다니!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정했지?”
“나는 신을 저주해. 뭐, 모든 악마가 같지는 않지만 나는 그래. 신은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는 척하면서 우리를 저주한 거야. 그 래서 나는 신에게 복수를 원해. 너희 따위는 쓰레기들이야. 나는 신과 싸울 거고, 신을 이길 거야.”
“미친 소리! 인간을 쓰레기라고? 인간이 쓰레기라고 한다면 너희는 어째서 인간을 필요로 하는 거지? 응? 말해 봐!”
“대신 말해 주지. 인간은 너희만 못할지 모른다. 그리고 재능 을 잘못 쓰고 있는지도 몰라. 조화보다는 파괴를 꾀하고, 미래보 다는 순간에 집착하는 약한 피조물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너 희를 능가하는 가능성을 지닌다! 네 입으로 아까 말했지? 너희 는 창조 때부터 정지된 존재라고! 그래. 너희보다는 인간이 신의 세계에 한 발자국 근접해 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으면 신의 세 계에 접근할 수 있지만 너희는 그러지 못해! 그래서 너희는 그것 을 훔치기 위해, 인간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냐!”
박 신부는 전부터 이러한 논쟁이 있을 것을 알았다는 듯 단호 하게 외쳤다. 현암과 준후, 승희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현암 은 논쟁을 들으면서 박 신부가 생사의 경계를 체험하며 보고 단 정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동안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하고 우울해하며 말수가 적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암으로 서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것들을 박 신부는 이미 생각하고 준 비했던 것이다. 어쩌면 박 신부는 앞으로의 일도 계시를 통해 알 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들에게 왜 그것을 알 리지 않았지?
“하지만 너희는 쓰레기들이야! 서로를 죽이고 그것을 합리화 시키지. 너희는 우리 악마들만도 못해! 너희를 희생시키는 데 우 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아!”
“인간은 약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많이 훨씬 더 많이 서 로를 믿고 사랑하며 아낄 줄도 안다!”
“인간은 결국 파멸할걸?”
“그렇지 않다!”
“우후후. 하하하………….”
블랙엔젤은 크게 웃었다.
“너희가 파멸한다면 그건 누구 의도겠어? 너희가 그토록 받드 는 신 아닐까? 신의 섭리로, 신의 이름으로, 신의 충견인 너희는 멸절될 테지. 후후후. 그런데도 온갖 명분을 드는군. 죽는 게 좋 아? 다 죽는 게 좋고 그렇게도 고맙나? 후후후.”
그 말을 듣자 박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움찔했다. 신이 인간을 멸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 같았다. 인간 의 죄로 인해 신은 인간을 벌한다는 경고. 비유나 금언으로 해석 되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불안감을 블랙엔젤이 정확히 꼬집고 있었다.
“신의 섭리는 그렇지 않다. 나는 믿는다. 교묘한 사탕발림을 하지 마라.”
박신부가 당당하게 말했다. 조금의 번민도 보이지 않고 주저 없이 답하자 블랙엔젤도 놀라는 것 같았다.
“사탕발림? 확실히 우리 중 몇몇은 거짓말을 잘하지. 그러나 자신에게 물어보시지? 종말의 때가 얼마나 남았는지! 너는 알지 않던가?”
“종말은 신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멸의 기회, 수없 이 많았던 자멸의 기회 중 또 한 번이 다가오는 것일 뿐이다. 신 은 누구나 믿는 것만큼 자비로우시지도 않지만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무자비하지도 않으시다. 최소한 누구에게나, 어떤 것에 게나 살 권리는 살아갈 기회는 주신다.”
“어찌 되었든 너희는 망해. 후후훗. 아, 아쉬워라.”
“무슨 소리냐.”
“들어 보겠어? 나는 너희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그리고 너 희를 이용하고 너희에게 고통을 준다고 여겨. 허나 중요한 것이 있지. 다른 악마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결코 너희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아. 알겠어? 후후훗.”
“그래서 어쨌다는거냐?”
“나에게 와. 나에게 협력해 나는 힘을 가진 자들이 좋아. 너희가 필요해. 대신 인간들, 전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할 방법을 찾 아줄게. 어때?”
현암과 승희, 준후는 지금 들리는 대화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 었다. 종말의 때가 왔다니! 악마가 인간을 구원하다니! 그러나 박신부는 담담했다. 박 신부가 침묵하고 있자 블랙엔젤은 다시 제안을 했다.
“마스터 같은 바보 놈은 필요 없어! 그놈은 내 뜻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지. 너희가 훨씬 나아. 나를 위해서나, 너희와 인 간을 위해서나! 어때?”
박신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블랙엔젤이 다그쳤다.
“너희는 인간을 위해서 싸웠잖아? 너희가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무엇이지? 생명! 인간들의 생명과 영혼이잖아? 너희는 그 래서 믿음도 버리고……………..”
“버린 것은 아니다.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들어 보라니까. 믿음도 버리고 스스로의 생활도, 생명도 염 두에 두지 않는 너희들! 너희는 인간들을 위하지.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 인간들을 구해 줄게! 멸망도 막아 주지! 그 길을 알려 줄 테니 나에게 와라! 나에게! 나에게!”
“유혹하지 마라!”
“고민되지? 후훗. 고민하고 있네. 그래. 선입관을 버려. 나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겠지만 대신 그들이 영원히 존속하게 해 줄거야. 나에게 와. 나에게……………”
그러나 박 신부는 담담하지만 딱 잘라 말했다.
“사라져라.”
블랙엔젤은 갑자기 화를 냈다.
“도대체 왜?”
“인간이 가축이 되는 것이 싫어서? 생명과 영혼의 광채를 잃고 존재하는 게 싫으셔서? 웃기고 있군.”
“나는 섭리를 믿는다. 그리고 조화롭게 될 것을 믿는다.”
“바보! 너희 정말 망해 ! 모두 죽어 없어진다구! 하지만 난 그걸 바라지 않아! 아직도 믿지 못하겠어?”
“그건 사실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악마여, 너는 항상 ‘너’라고만 했지. 너희 전체를 말하지 않았 어. 너는 말에 함정을 팠지만, 서툰 짓이야. 네가 아무리 바라도 다른 악마가 미친 짓을 하면 너도 별수 없어. 너는 다만 우리를 갖고 놀고, 우리를 주구로 삼아 사람들을 괴롭히며 즐기고 싶을 뿐이야. 너 따위는 세상을 망하게 할 능력도 없어.”
“닥쳐! 이…………… 더러운 신부! 허나 언젠가 너희가 멸망하는 건 정말이라구! 이봐, 신은 생명이 창조될 때부터 멸망도 함께 정해 놓는 법이야. 그리고 너희의 멸망은 내일이 될지도 몰라!”
“인간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멸망한다면 그건 신의 탓이 아 니라 스스로의 책임이다.”
“어째서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하지 않지? 인간을 구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인간을 구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 아닌 경우 뿐이다. 나머지는 우리의 손 밖에 있다. 우리는 우리만이 세상 을 구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인간으로 존재하고 살아남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그다음 누군가 또 누군 가・・・・・・ 영원히 사는 존재인 너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박신부는 팔을 뻗어 준후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우리를 불완전한 존재라 하지만 너희는 완전한가? 완전하다면 어째서 불완전한 우리에게 기대는가? 나 는 인간을 믿는다. 신을 믿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보다는 내 느 낌을 믿는다. 인간이 불완전하여 멸망한다면 그러한 예지도 생 각도 불완전하다는 것이니까. 나는 나의 예지가, 그리고 모두의 그러한 예지가 틀릴 것이라는 것도 믿는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 을 것이다.”
그 순간 현암은 느낄 수 있었다. 박 신부가 자신에게 내린 계 시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왜 그러한 사실들을 자신들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현암은 박 신부를 믿기로 했다. 승희와 준후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는 너를 어찌할 수 없다. 끝없이 몰아내고 또 몰아낼 뿐,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끝없이 너 희를 몰아낼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세상에서 살아라. 너무 오래 지체한 것 같다. 가라, 너희의 세상으로.”
“고집쟁이! 우리보다 더욱 악마 같은 자는 바로 너야! 두고 봐…………. 두고 봐…………. 너의 고집이 수십억 동족을 죽게 만들 거 야! 너는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도 못해! 그 때에 가서 고통에 차 울부짖으며 나를 불러도 늦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우리를 불완전하다고 했나? 불완전해도 나는 우리의 생각에 만족한다. 그래서 완전할 수 있다. 너희보다도 더욱더.”
“그릇된 결정을 내리고 자만해서 떠들지 마! 자기도취도 정도 가 있어!”
박 신부는 현암과 준후, 승희를 바라보았다. 현암이 박 신부의 손을 꼭 쥐었다. 준후와 승희도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박 신부 는 힘을 얻은 듯,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
블랙엔젤은 순간 박 신부에게 사나운 형세를 취하면서 달려 들려고 했다. 박 신부는 오라를 거둔 상태였고 현암과 준후 역시 반격할 기운이나 생각이 없었다. 박 신부는 천천히 어깨를 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블랙엔젤은 멈칫하며 요염하게 웃었다.
“결국은 너희가 나를 찾을 날이 있을 거야. 내가 두고 보라고 했지? 이봐, 멍청한 신부.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가라!”
“나는 적어도 인간의 멸망은 막아 주고 싶었다구. 더 갖고 놀 고 싶어서 말이야. 방금 네가 그 기회를 차버렸어. 기대해도 좋 아. 너희들, 멸망시켜 주겠어.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나? 정 말 그럴까? 이 코딱지만한 세상을 내가 어떻게 못할 것 같아?”
“사라져라!”
“호호호. 좋다. 이거나 받아. 그럼 사라져 주지. 기대해, 신부. 네가 방금 세상을 멸망으로 내몰았어. 잘난 척하는 얼굴이 나중 에 어떻게 될지 보자구. 그럼 안녕.”
블랙엔젤은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구체를 박 신부의 발 앞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허탈한 웃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현암과 준후, 승희는 비로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준후가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블랙서클이군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했던……………. 마스터가 모두 가지고 있던 모양이군요.”
박신부는 침울하게 말이 없었다. 현암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방금 저 괴물이 말한 걸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건 아닐 테죠?”
“글쎄. 현암 군…….”
“입만 살아가지고 떠드는데 무슨. 그냥 신부님한테 당하니까 칭얼거린 거예요.”
“정말・・・・・・ 그럴까.”
“아, 신부님답지 않게 무슨. 아, 그렇지. 이거 말입니다. 이걸 부수면 안의 영혼들도 해방되는 게 아닐까요?”
현암이 비틀거리며 다가가서 구체를 청홍검을 내리쳐 보았지 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탄’ 자결을 써서 블랙서클을 파 괴한 적이 있는 현암이었지만 지금은 기진맥진한 상태라 그 이 상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
“저게 열리면 연희 누나도…………….”
준후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며 힘겨운 손놀림으로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박신부가 그런 준후와 현암을 말렸다.
“우리 손으로는 부술 수 없을 걸세. 다 순리대로 없어지겠지. 악마가 그들을 놓아준 것이니까. 그냥 놓아두세.”
마스터가 죽어서 지진을 멈출 수는 있었지만 안의 열기는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입구는 완전히 무너졌고 땅은 여기저기가 갈라져 까마득한 바닥 밑으로 은은한 붉은빛의 용암이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흘릴 땀도 없었고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승희가 말라붙은 입술로 킥킥 웃으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다르사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듯,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 것을 현암이 부축해 주었다.
“우리가 이겼지? 그치, 현암군?”
“그, 그래.”
“그럼 마무리해야지. 이걸 버려야 돼. 이건 땅의 물건이니 땅 에 돌려줘야 한다고 했지. 여기 버리면 아무도 못 찾아 여기 버 리는 게 맞아.”
승희는 비척거리면서 수다르사나를 힘겹게 집어 들고 땅의 갈 라진 틈 가장자리에 섰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로파무드는 살 수 있겠지?”
“그래.”
“그러니 이젠 내 영혼을 줘야겠지? 후후후. 내 영혼의 힘으로 이걸 묻고 싶어.”
현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승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로파무드는 영혼이 없는 육신만의 껍 데기에 불과하다. 그 몸을 채우려면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승희는 믿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이제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영혼의 힘으로 수다르사나를 묻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가만, 희야!”
“승희야!”
“그럴 것 없어요. 어차피 갈 건데 뭐. 기왕이면 내 손으로 선사하고 싶어.”
승희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휩 싸여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눈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박신부가 성큼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승희야, 누구나 마지막은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는 포기해선 안 돼.”
박 신부는 손을 내밀었다. 승희는 주저했다. 박 신부가 슬며시 웃었다.
“우린 항상 같이 있지 않았니? 영혼의 힘이 필요하다면 같이 하자꾸나. 나도 빼지 말아주렴.”
박 신부의 말에 승희의 무릎이 휘청했다. 승희만이 아니라 현 암도 묵묵히 열기를 버티고 있었고 준후도 색색 가쁜 숨을 내쉬 었다.
“하긴 이제는 끝까지 온 것 같구나. 하지만 말이다. 아직 우리에겐 몇 초라도 남아 있지 않니? 허허허. 그동안만이라도 같이 있지 않겠니?”
현암이 무뚝뚝한 얼굴을 풀고 오랜만에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준후가 답했다.
“현암 형 그렇게 웃으니 바보 같아. 하하하.”
준후도 밝게 웃었다. 그러자 승희도 훌쩍거리면서 힘겹게 소 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모두의 손을 잡았 다. 박 신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구나. 지금까지 다들 애썼다. 너무나 고생했어. 이젠 같이 쉴까? 허허허.”
그 말과 동시에 준후가 와락 박 신부의 품에 안겼다. 주변의 돌 부스러기들이 용암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허물어지고 있었 다. 마스터의 부하였던 좀비의 시체들은 연기를 내며 오그라들 었고 퇴마사들의 옷자락에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준후가 박 신부에게 안기자 승희는 다짜고짜 현암에게 안겼고 현암은 힘겹 게 왼팔을 들어 월향을 바라보면서 승희를 가볍게 감싸 주었다. 승희도 손을 뻗어 현암의 왼손목에 있던 월향을 손으로 감싸 잡 았다. 월향검도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냈다. 박 신부가 현암을 널찍한 어깨로 감싸자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승희는 자신 도 모르게 들고 있던 수다르사나를 툭 떨어뜨리면서 의식을 잃었다.
수다르사나는 바닥에 뗑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자 아까 블랙엔젤이 버리고 갔던 검은 구체가 환하게 변했다. 퇴마 사들은 의식을 잃어 가는 중이라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었지만 검 은 구체는 소용돌이치면서 커져 갔고 예전에 블랙서클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한 블랙서클 모양이 되었다. 그러다가 블랙서클은 몸서리를 치듯 수다르사나와 충돌했고 그 안에서 세 갈래의 빛 나는 기류가 순간적으로 수다르사나에 맺혔다. 수다르사나가 둥 실 떠올라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 잠겨 버렸고 그와 동시에 용암 이 위로 무섭게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