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3화

랜덤 이미지

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3화


배가 크게 기울어질 때 라스 카밀카르는 덱체어에서 나가떨어졌다. 아픈 무릎을 움켜쥐고 일어나기는 했지만 라스 법무대신은 졸도할 듯한 공포 외 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갑판 위를 질타하는 비명과 연달아 울려퍼지는 포성은 늙은 법무대신의 청각을 무자비하게 유린하여 그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그때 라스 법무대신의 눈에 승강구로부터 달려나오는 호위대장 슈마허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 슈마허!”

손에 든 검집을 절렁거리며 달려온 슈마허를 향해 라스 법무대신은 거의 매달릴 듯한 동작으로 달려갔다. 그때 슈마허가 외쳤다.

“로드 라스! 공주님께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슈마허의 질문을 받은 라스는 바야흐로 자신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공주님? 오오, 이런 벼락 맞을 늙은이 같으니! 율리아나 공주님! 공주님!”

라스는 비명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당황한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리는 선원들과 떨어져내리는 돛, 그 리고 치솟아 오르는 물기둥들과 자욱히 피어오르는 포연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라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기사 슈마허는 그런 법무대신을 내버 려두고 스스로 공주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공주의 호위였다.

“공주님! 공주님!”

그때 누군가가 슈마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같이 찾아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 공주님?”

슈마허는 얼빠진 표정으로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슈마허를 향해 살짝 미소 짓고는 치마를 툭툭 털어내렸다. 마치 포성과 연 기, 그리고 물기둥과 선원들의 광란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연한 모습이었다. 슈마허는 그런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공주님! 어서 안으로 피하십시오. 로드 라스, 로드! 정신 차리십시오!”

그때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기사 슈마허를 놀라게 만들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라스 법무대신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승강계단 쪽으로 달려가 기 시작한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격언에 인용되면 아주 적절할 듯한 장면. 슈마허는 감탄한 표정으로 율리아나 공주에게 끌려가는 라스 법무대 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감탄을 위한 시간이 많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슈마허는 몸을 돌려 전투병들의 지휘를 위해 선수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무기고는 이미 개방되었고 전투병들은 석궁에 활을 걸고 있었다. 이물 쪽에 도열하는 전투병들을 바라보던 엘리엇 선장은 돛대를 올려다보며 외쳤 다.

“감시대, 감시대! 적선과의 거리는?”

“1마일입니다!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엇 선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켰다. 제기랄, 놈들이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군! 고개를 돌려 노의 움직임을 본 엘리엇 선장 은 뒤통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레보스의 노는 마치 해파리의 다리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잡이 노예들도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노 스윈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공포에 빠진 모양이다. 노예장 녀석, 뭐하는 거야? 그때 그의 눈에 선교 쪽을 향해 달려오는 호위대장 슈마허의 모습 이 들어왔다.

엘리엇 선장은 슈마허가 선교에 올라서기도 전에 질문했다.

“서 슈마허! 전투병들은 준비되었습니까?”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추격을 뿌리칠 수 없습니까?”

그 순간 엘리엇 선장은 상대방을 공주의 호위대장을 맡을 정도로 전도양양하고 우수한 자질을 갖춘 총명한 기사로 대우하기보다는 바다 위의 일은 도통 모르는 땅개로 대우하기로 결심했다. 즉, 얼간이 취급한 것이다.

“추격은 시작되지도 않았소!”

“예?”

엘리엇 선장은 슈마허에게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야 해. 바람이! 해적선은 바닥짐도 없고 화물도 없다. 쾌속 추 적을 위해서 해적선에는 며칠 먹을 식량과 생필품 이외엔 아무것도 싣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가벼워진 배를 전속력으로 몰아서 불행한 희생자의 배 에 가져다 붙이고는 지근거리 사격 후 벌떼처럼 덤벼드는 것이 해적의 방식이다.

선창이 미어터질 정도로 화물을 실은 카밀카르의 선단이 해적을 뿌리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순풍이 불어주는 것이다. 해적들은 돛을 다루는 솜씨가 떨어지기 때문에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질 때는 대개 노만 사용한다. 노만 사용하는 방식은 돛을 병용하는 것보다 월등 히 기동성이 높기에 전투에 적합한 추진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순풍이 불어준다면! 육지에서 멀미를 느낀다는 카밀카르의 뱃사람들은 어떤 바람 이라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엘리엇 선장은 모든 갈망을 담아 풍향과 풍속을 가늠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엘리엇 선장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역풍이 불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경험으로 엘리엇 선장은 이 바람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는 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 은…… 엘리엇 선장의 눈이 사나워졌다.

레보스호 갑판 아래의 노예장은 기어코 채찍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노예장은 겨우 찾아낸 채찍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리고는 대신 그 옆에 있던 북 채를 집어들었다. 지금은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노예들 역시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저 노스윈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 금 채찍을 휘두르면 노예들을 패닉 상태에 빠트릴 뿐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예장은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북채를 잔뜩 부여 잡고는 있는 힘껏 고함 질렀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힘내라! 노스윈드는 밥 먹이기 귀찮아서 노예 장사는 하지 않는다. 알겠냐! 우리 배가 나포되면 너희들도 모두 바다에 처넣어 질 거란 말이다! 10데리우스도 나가지 않을 썩어문드러질 몸이지만, 네놈들에게는 귀한 몸이겠지? 이 개같은 놈들, 힘내라!”

노예장은 다리 사이에 북을 끼우고는 그것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포성 때문에 북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폭언 속에 담긴 노예장의 마음을 잘 짐작할 수 있었던 노예들은 노예장의 손만 보면서도 노의 움직임을 정렬시킬 수 있었다. 카밀카르 갤리어스의 노는 모두 160개. 40개의 노가 2단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카밀카르 갤리어스는 다른 나라의 갤리어스보다 월등히 긴 노를 사용하며 그래서 노 하나에 노잡이 둘을 배치한다. 320명의 노잡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만으로도 갑판 아래에는 안 개가 서릴 지경이었다. 가지런히 정렬된 160개의 노는 해수면을 완강하게 할퀴기 시작했고, 선체 옆으로 포말이 튀어오르며 레보스호는 무서운 속도 로 물마루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오오, 이놈. 드디어 해내었구나!”

엘리엇 선장은 노의 움직임을 보며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정렬된 노들은 마치 하나의 노처럼 움직이며 레보스호를 앞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레보스호는 다른 두 배의 앞쪽으로 죽죽 나아갔다. 엘리엇 선장은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꽉 누르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기수! 기수! 다른 배에 신호를 보내라. 모두 산개한다!”

마치 단검을 품에 안고 달리는 암살자 같았다. 기수는 두 개의 깃발을 품에 안고는 혼란스러운 갑판 위를 사슴처럼 달려서는 고물 위에 우뚝 섰다. 깃발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두 척의 배의 진로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세 척의 배는 이제 약 30도의 각을 이룬 채 세 방향으로 흩어 져 나아갔다.

엘리엇 선장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제발 부탁이다. 가장 느린 배 하나를 따라가라. 이 배에는 카밀카르의 공주가 타고 계시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이 슈마허 호위대장의 눈과 맞부딪쳤다.

기사 슈마허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엘리엇 선장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마허는 말하고 싶었다. 다른 배를 미끼로 탈출하겠다는 겁니 까? 그러나 슈마허는 엘리엇 선장의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슈마허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서는 선교를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슈마허의 등을 바라보며 엘리엇 선장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저 기사놈은 겉으로 보기만큼 얼간이는 아닌 모양이군. 엘리엇 선장은 앞 으로 10년쯤 후 기사단장이 되어 있는 슈마허를 보더라도 크게 놀라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10년 후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