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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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2화


노스윈드의 해적 함대는 남해의 미풍과 잔잔한 파도를 헤치며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한 끝에 이보레 열도로 접어들었다. 이보레 열도에 산재한 많은 섬들은 기항지로서나 보급지로서 모두 우수하며, 남해를 오가는 배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장소다. 따라서 해적들에게도 훌륭한 사냥터라고 할 수 있 다. 이보레 열도의 작은 섬들의 뒤에 배를 숨겼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지나가는 배를 급습하는 것이 해적들의 상투 수단이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은 식수의 보급과 같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함대의 정박을 허락하지 않은 채 이보레 열도를 지나쳤다. 해적들은 레보스 호라는 혼수품으로 꽉꽉 들어찬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 작은 상선이나 어선 따위를 공격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추측하며 키의 지시에 수긍했 다.

하지만 레보스호의 임시 선장을 맡고 있는 라이온은 점점 심사가 사나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보레 열도를 빠져나오자마자 불어닥친 국지 지역풍 하눈치일은 해적 함대를 북서쪽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이보레 열도의 북서쪽에는 어떤 배도 가지 않는 해역 미노 만이 있다. 1년 중 이 시기에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라이온은 바람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까지도 느꼈다. 그래서 라 이온은 자유호로 전령을 보내었다. 그의 편지에서 장황한 수식어를 빼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자유호에서는 역시 품격 있고 우아한 회신이 돌아왔다.

‘잔말 말고 따라와.’

그래서 라이온은 머리에 핏대를 세운 채 고민에 빠졌다. 오닉스의 흉내를 내어 칼을 뽑아든 채 자유호로 올라갈 것인가? 하지만 그런 짓은 그의 취 향이 아닐뿐더러 오닉스나 되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레보스호를 정선시키고 농성할 것인가? 그러나 라이온은 이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반란과의 구분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끙끙거리고, 낑낑거리고, 심지어 깽깽거리기까지 하던, 그래서 레보스호의 다른 해적들을 당혹하게 만들던 라이온은 간신히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선실에 감금되어 있던 라스 법무대신을 불러들였다.

“보쇼, 법무대신님. 대드래곤은 얼마나 오래 삽니까?”

라스 카밀카르 법무대신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몸단장은 꿈도 꿀 수 없는 감금 생활 때문에 옷매무새는 거칠었고, 얼굴과 머리도 지저분했다. 하지 만 라스는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나는 법무대신이지 박물학자가 아니오, 라이온.”

“그럼 제 추리에 동참해 주시겠습니까? 그, 뭐? 아, 라오코네스. 그 대드래곤은 800년 전에 살았다지요? 그리고 대드래곤이라고 했으니 그때도 이 미 많이 늙었을 겁니다. 그렇죠?”

“그럴 테지.”

“그럼 지금쯤은 미노의 바다 아래에서 뒹구는 백골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모르겠소. 뱃사람은 당신 아니오? 해적도 뱃사람은 뱃사람이지. 그러니 미노를 오가는 배들에게서 소식을 들었을 거 아니오. 드래곤을 보았다거나 하는 이야기.”

라이온은 미심쩍은 얼굴로 라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법무대신 나리. 미노 만에는 배가 가지 않습니다. 거긴 어장도 아니고 정규 항로도 아닙니다. 육지로 치면 황무지 같은 곳이죠.”

“그렇소? 그럼 나로선 이런 질문을 하고 싶소. 왜 미노 만을 들먹이는 거요? 당신네들은 이대로 페리나스 해협으로 가서 필마온 기사단과 몸값 협상을 할 거 아니오.”

라스는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함으로써 라이온의 속을 떠보려 했다. 하지만 라스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라이온도 상당히 정치적인 인간이었던 것 이다. 라이온은 싱긋 웃으며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라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이온은 계속 말했다.

“화물실의 출입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라스.”

“뭐요?”

“거기 『제국백과사전』이 있잖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미노 만에 대한 모든 정보를 좀 조사해 주십시오. 미노 만, 대드래곤, 800년 전 제국과 라오코 네스의 협약.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모조리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저희들보다는 그런 조사에 훨씬 익숙하시겠지요.”

내가 왜 해적에게 협조해야 되느냐고 말할 뻔했지만 라스는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배 안을 돌아다닐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스는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오? 왜 미노 만에 관심을 가지는지.”

“아, 마음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물어도 좋아요. 하지만 대답은 안 할 겁니다.”

라스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물러갔다.

라스가 선장실을 나가자, 라이온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얹은 채 상념에 잠겼다. 라스의 질문은 그럴 듯했다.

“..이대로 페리나스 해협으로 가서 필마온 기사단과 몸값 협상을 할 거 아니오?”

라이온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잖으면 키 드레이번이 오닉스의 비위를 거슬러 가면서까지 율리아나 공주를 보호하는 이유를 또라지게 말할 수 없다.

필마온 기사단의 단장 발도 로네스는 얼굴도 못 본 신부 때문에 해적과 협상할 자는 아니다. 이 잔혹한 사내가 해적을 대하는 사교술은 서른여섯 가 지이며, 그것들 전부가 처형 방식이다. 교수형, 참형, 화형, 단두형, 능지처참, 기타 등등. 하지만 필마온 기사단은 남해의 대국 카밀카르의 비위를 거 스르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내키지 않아도 몸값을 지불하고 공주를 되찾아갈 소지가 많다. 그러면 라이온도 행복하고 율리아나 공주도 행복하고 카밀카르의 국왕 라힘턴 3세도 행복할 것이며, 어쨌든 발도 로네스를 제외한 만인들이 행복해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복스러운 결과가 나오려면 선단은 남서쪽, 페리나스 해협을 향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호는 따라가는 라이온이 울화를 터뜨릴 만큼 신나게 북서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라이온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율리아나 공주와 북서쪽을 향하는 선단.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잠시 후, 라이온은 씁쓸한 얼굴로 자신이 추리의 대가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도무지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라이온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선장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라이온이 레보스호의 갑판으로 올라왔을 때 늦은 오후의 태양은 하늘의 구름을 모두 검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눈치일을 받아 팽팽하게 부 푼 돛들도 모두 선홍색으로 물들어 반짝이고 있었다. 계속된 순풍 항해는 노잡이들을 행복하게 했고 노예장들을 욕구 불만에 빠트렸으며 갑판장들을 졸게 만들었다. 따라서 선단 전체는 약간 풀어진 듯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라이온은 그런 선원들에게 유익한 조언이나 따스한 격려 등을 던져주며 이물에 올랐다. (라이온의 등뒤로 걷어채인 엉덩이를 주무르며 눈을 흘기고 있는 선원 들의 모습이 즐비하다는 사실은 특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태양은 그의 왼편에서 이글거렸고 그것은 선단이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라이 온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나른한 항해를 계속하는 선단에서 라이온은 혼자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다.

라이온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온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조금 틀었다. 그의 오른쪽 앞을 달리고 있는 그랜드머더호의 고물 선교 쪽이었다. 그곳의 덱체어에 앉아서 조용히 류트 의 현을 뜯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랜드머더호의 선장 킬리였다. 저 바다 위의 성채인 터릿 갤리어스를 지휘하는 선장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마른 체격에 상대방을 친구로 만들 기에 좋은 처진 눈꼬리를 가지고 있는 사내. 물론 바다 사나이답게 질긴 몸을 가지고 있지만, 거친 해적들 사이에 서 있는 킬리를 보면 라이온은 항상 고래 무리에 잘못 끼인 황새치를 떠올렸다.

그 킬리 선장이 수평선으로부터 가득 번져오는 석양을 마주한 채 류트를 뜯고 있었다.

라이온은 그 연주에 특별히 심오한 의미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해적들이 소일거리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해적은 굽은 쇠못만 을 이용하여 자신이 죽인 적의 해골에 정교한 도안을 새겨넣고, 어떤 해적은 너덜너덜해진 널빤지에 나이프를 던져대고, 어떤 해적은 밧줄 매듭의 오 묘함에 감탄하다가 자기 자신을 묶어버린 다음 동료들에게 풀어달라고 애걸하고, 라이온 자신의 경우는 선단의 진로와 키의 속셈에 대해 골머리를 썩히고, 그리고 킬리는 저렇게 류트를 뜯는 것이다. 육분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킬리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류트 위에서 춤을 출 때 퍽 어울린다. 라이온은 뱃전에 두 팔을 괸 채 희미하게 들려오는 류트 소리를 감상했다.

잠시 후 라이온은 놀랐다. 킬리가 연주하고 있는 음률은 싱잉 플로라의 노래였다. 하지만 라이온이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킬리는 똑같은 음 률을 연주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라이온은 그 음정을 뭐라고 판단내릴 수는 없었지만 싱잉 플로라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그 이상야 릇한 느낌은 전혀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킬리의 연주가 갑자기 멈췄다.

킬리는 무릎 위에 류트를 세워둔 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킬리와 라이온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자, 킬리는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오닉스 나이트 때문에 노스윈드의 해적들은 손짓이나 몸짓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퍽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배 사이의 바다를 넘어 서로 손짓을 주고받았다.

‘감상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라이온 선장.’

‘싱잉 플로라의 노래 아닙니까?”

‘글쎄. 나야 그렇게 주장하고 싶지만.’

‘비슷하긴 합니다만.’

‘아냐, 틀려. 밤마다 들어서 흉내를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라이온은 눈 주위를 조금 찡그렸다. 킬리의 말대로 싱잉 플로라는 밤마다 노래를 불러왔다. 첫날처럼 무시무시한 울음 소리는 아니었다. 라이온은 그 노래를 외로운 사내에게 들려주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보장할 수 있는 노래라고 정의했다. 어쩌면 선단의 해적들이 모두 게으른 고양이 같은 얼 굴을 한 채 나른해하는 것은 이보레 열도에서부터 시작된 순풍 항해 때문이 아니라 밤마다 들려오는 싱잉 플로라의 노래 때문인지도 모른다.

킬리의 손짓이 계속되었다.

‘물수리호 녀석들 말인데, 자기 선장도 그 소리를 듣는다고 주장하더군.’

‘알버트 선장이? 진짜 그럴까요?”

‘그놈들은 알버트 선장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걸.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자존심?’

‘알버트 선장은 내 연주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단 말이야.’

킬리 선장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를 향해 야유의 손짓을 조금 보내던 라이온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밤마다 그 꽃의 노랫소리를 들 으며 잠드는 키 드레이번은 어떤 기분일까? 라이온은 멀리 앞쪽을 바라보았지만 이 거리에선 자유호의 고물에 있는 선장실을 똑바로 보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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