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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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9화


키 드레이번은 선단 전체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동시에 이 불가사의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가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은 모조리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원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흐느적거렸고, 배는 돛을 늘어뜨리고 노마저 정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떠내려가고 있 었다. 키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희고 액체적인 질량감으로 꿈틀거리는 안개를 바라보던 키는 갑자기 목 뒤가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키는 급히 목 뒤를 만져보았지만 건조한 살갗만이 만져졌다. 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검 복수가 파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어떤 종류의 강력한 마법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키는 오른손 에 쥔 복수를 더욱 단단히 쥐며 왼손 식지를 세워 미간을 문질렀다. 어떻게 하면 이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노예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아홉 척의 배와 사천여 명의 인원을 구출해 낼 수 있을까.

그때 오스발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의 갈피를 비집고 들어왔다.

“선장님.”

키는 사나운 표정으로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찔끔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뭔가, 오스발.”

“저, 별것 아닙니다. 떨려 죽겠거든요. 그래서 그러는데, 기도 좀 올려도 되겠습니까? 생각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기도라고? 그렇군!”

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오스발은 그것이 승락의 뜻인 걸로 착각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정수리를 향해 키의 노 성이 내리꽂혔다.

“그 따위 집어치우고 입 다물어! 정신 바짝 차려라. 네가 드디어 6,000만 데리우스짜리 배를 움직이게 되었단 말이다!”

오스발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그가 반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키는 그대로 갑판을 향해 뛰어내려가며 외쳤다.

“타륜 꽉 잡아라. 좋아, 그대로 간다…………… 지금이다! 타륜 좌로 3분의 2회전!”

키는 오스발을 위해 쉽게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자마자 오스발은 조건반사적으로 힘껏 타륜을 꺾었다. 타륜을 꺾자마자 느껴지는 배의 움직임에 오스발은 감탄해 버렸다. 그 작은 동작으로 산더미만한 배가 움직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경험이었고, 타륜이라고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오 스발에겐 더욱 놀라웠다. 그래서 오스발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조금 늦게 경악했다.

선수를 기우뚱하며 거체를 옆으로 튼 자유호는 페가서스호의 우현을 향해 분명한 충돌 궤도를 그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오스발은 기겁하며 타륜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키는 벌써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호통 소리가 벽력처럼 터져나왔다.

“움직이지 마!”

오스발은 벌벌 떨면서 타륜을 움켜쥐었고 키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유호는 페가서스호의 우현을 향해 곧장 나아가고 있었고, 페가서스호의 갑판 위로 선원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커지고 있었다. 자유호와 페가서스호의 선원들 중 아무도 곧 일어날 파국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 발은 그들 모두의 몫만큼 긴장해야 했다.

키는 복수를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서서히 올라가던 검이 갑자기 떨어졌다.

“지금이다! 타륜 우로 한 바퀴!”

오스발은 타륜에 몸 전체로 매달리다시피 하며 우측으로 꺾었다. 배는 커다란 피치와 롤링을 동시에 일으켰다. 하지만 남해를 오가는 배 중 세 손가 락 안에 들어간다는 자유호는 초보 조타수의 과격한 운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중심을 회복했다. 키는 오스발을 향해 고함 지르며 달려갔다. 

“타륜 정위치! 꼼짝도 하지 마라!”

오스발은 타륜을 몇 번 놓쳐가면서도 간신히 정위치로 돌려놓았다. 키 드레이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뱃전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선장님?”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키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망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키는 자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스발은 눈을 껌뻑거리며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물 위를………… 달리고 있어?”

키 드레이번은 자유호의 측면에서 튀어나와 있는 노를 밟으며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노련한 뱃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상대편 배로 뛰어들어야 되는 해적들과 수병들은 대개 이 묘기를 부릴 줄 알지만, 키 드레이번이 펼쳐보이는 솜 씨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손에 빛을 뿜어대는 장검을 든 채 외투 자락이 뒤로 흩날릴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키의 발 아래로 물방울들이 무수히 튀어올랐다. 높은 위치에 있던 오스발이 보기에는 마치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스발은 순수한 감탄으로 탄성을 질렀다.

키 드레이번은 순식간에 페가서스호의 노 위를 지나 페가서스호의 뱃전을 향해 뛰어올랐다. 뱃전을 움켜쥔 키는 발을 굴러 가볍게 갑판에 뛰어올랐 다. 박수라도 쳐주면 좋으련만, 페가서스호의 선원들은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채 멍하니 딴 곳을 바라볼 뿐 그들의 갑판에 뛰어오른 키에 대해서는 아 무런 관심도 보내지 않았다. 키 드레이번 역시 박수를 바라는 곡예사의 취향은 없었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선교에 서 있는 하리야 선장을 향해 달려갔다.

하리야 선장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깍지낀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리야 선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키는 잠시 주춤했 지만 곧 이를 악문 채 그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하리야 선장의 겉옷 속을 더듬던 키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시 밖으로 나온 키의 왼손에는 작고 두툼한 책이 들려져 있었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에 금속으로 테두리를 보강한 견고해 보이는 그 책의 정체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위 치에 있던 오스발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스발은 키의 담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키 드레이번이 꺼내든 것은 제국에서 단 한 장소, 법황청이 소재한 신성 펠라론의 축복받은 출판사만이 펴내어 제국 곳곳에 배포하는 책이었다. 여 러 나라의 왕과 총통과 대통령들이 그 출판권을 탐내어 왔지만 언제나 성직자들의 목숨을 건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마는 책, 해적들이라면 날벼락 을 맞을까 두려워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하리야 선장이라면 목숨 대신이라도 가지고 다닐 책이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어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지만, 키는 가까스로 신성한 신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전(聖)의 책장을 넘겼다. 찾던 부분을 펴든 키는 안개더미를 힐끗 바라본 다음 엄숙하게 성전을 읽기 시작했다.

“잊혀져 기억되고, 사라져 나타나며, 시작되지 않은 끝이고, 끝나지 않을 시작이신 내 주여…………”

“쿠오오오오!”

키 드레이번이 성전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안개 속에서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터져나왔다. 오스발은 무릎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타륜에 매달려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안개의 포효는 사이를 두지 않고 계속 터져나왔다. 까마귀의 외침 같기도 하고 맹수의 울부짖음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어찌 들으면 상처입은 인간의 비명처럼 들려서 더욱 음산했다. 오스발은 턱을 덜그럭거리며 눈을 감았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더욱 무서웠다. 천둥 소리 같 은 포효가 선단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키의 성전 봉독은 흔들림 없이 오히려 더욱 높아졌다.

“어둠으로써 어둠을 가리시고, 빛으로 빛을 드러내시는 내 주여. 무위(無爲)로 창세하신 세상에 무언(無言)으로 지혜를 설파하시는 내 주여. 나의 원수 중의 원수이신 주여 나의 고난에 고난을 선사하시는 주여…………”

번쩍! 오스발은 안개 사이로 언뜻 비친 빛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일개 노예인 자신에게 이런 광경을 볼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 다.

안개더미 곳곳에서 포효와 함께 번개가 치고 있었다. 희게 꿈틀거리던 안개는 천천히 검붉은 색깔로 변해 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순백색의 빛발 이 치달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광포한 바람은 돛을 두드려대었고 바람을 타고 일어난 돛줄에서는 뼛속까지 파고들 듯한 퓽퓽거리는 소리 가 울려퍼졌다.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검붉은 안개 속을 쏜살같이 날아가며 괴성을 질러대었다. 수면으로 시선을 돌린 오스발은 더욱 어이없는 광경 을 보게 되었다. 바닷물은 들끓는 수프처럼 변해 진득하게 부글거렸고 거품이 터지면서 질척한 바닷물이 뱃전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그리고 바다 곳곳에서 천천히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닷물은 철벅거리고 뒤엉키며 나무처럼 솟아올랐다. 금속성 광채를 띤 물기둥들은 안 개의 검붉은 색깔을 반사하며 번들거렸다. 오스발은 그 모습을 보며 구토감을 느꼈다. 하지만 키는 성전에만 눈을 고정시킨 채 글자 하나하나를 파낼 듯이 읽어내렸다.

“내 영혼의 고삐를 쥐신 아버지 주님보다 더한 원수 있을 수 없음이니, 주여, 나는 이제 원수를 잊나이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개는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바닷물은 조용히 찰박거렸다. 선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스발의 경우, 모든 것이 정 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은 어깨로부터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는 조타수 칸나의 손길에서 안도감을 느껴야 될지 공포를 느껴야 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스발은 잘 안 되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칸나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미약한 미소마저 싹 달아났다.

최고로 열받은 아피르 족의 표정을 정확하게 구사하며 칸나는 더듬거리는 제국 표준어로 말했다.

“너, 조타수 아니다. 너, 타륜 잡았다. 나, 너 먹는다!”

“우아아아!”

오스발은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갑판 위로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칸나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그 뒤를 추적했다. 하지만 모조리 아피 르 족의 욕설인지라 선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호에서 일어나는 이 일대 소동을 보던 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하리야 선장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키를 보고 있었다. 키는 정중한 동작으로 그에게 성전을 건네며 말했다.

“자네라면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 고마웠네, 하리야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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