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3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군요.”
데스필드는 고개를 들었다. 마을 입구에서 데스필드를 기다리고 있는 오스발의 모습이 보였다. 오스발은 커다란 느릅나무의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데스필드는 대충 대답했다.
“당신 짐작대로야.”
“아, 그들에게 키 선장님에 대해 귀띔해 주셨습니까?”
“응? 무슨 말이야?”
“전 데스필드 씨가 그들에게 키 선장님에 대해 귀띔해 주려고 가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윽, 아냐. 노스윈드 당신이 왜 육지에 올라왔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공주님 당신의 정체가 들킬 위험도 있고. 지금은 공주님 당신을 빨리 안전한 곳 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나아. 노스윈드 당신의 체포는 그 뒤의 일이고. 본인이 늦은 건 변비라서 그랬던 것뿐이야.”
오스발은 멋적게 웃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데스필드는 공주와 신부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신부님과 공주님께서 먼저 교회나 촌장의 집을 찾아보기로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교회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없어. 이 마을의 당신들은 영혼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림에 가서 미사에 참석한 다음 당신이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결혼식도 거기 서 하고.”
“고향입니까?”
오스발의 옆에 앉으려던 데스필드는 그 질문에 히죽 웃었다.
“패스파인더의 고향은 패스야. 고향이 땅 위에 고정된 어떤 점을 가리키는 거라면, 패스파인더에겐 고향이 없어. 패스는 움직임이고 이어짐이지.”
“움직임과 이어짐이오?”
“그 날 움직일 수 있었던 게 누구였나?”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스발은 그날, 철탑 앞에서 파킨슨 신부가 감행한 도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겠지. 키 드레이번 당신은 복수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잖아. 흐음, 그러고 보니 대사 당신이 없었다면 키 당신은 본인의 도주를 허용치 않았을걸.”
“저 괴물이 원한다 하더라도, 선장님은 왜 저 괴물의 뜻을 따르는 겁니까?”
“나도 원하니까, 라이온, 그리고 레보스호의 선원들을 간수하도록.”
침착하게 라이온의 말에 대답한 키는 갑자기 시선을 옮겼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공주 일행이 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키의 시선을 느낀 그들 역 시 제자리에 멈춰서 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키의 시선을 피하려 했 지만 그 의미는 뚜렷이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너희들이다. 거기서 기다리도록.
코트자락이 거칠게 나부낀 순간, 키는 복수를 쥔 왼손을 뒤로 눕힌 채 대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 있던 대사의 머리는 벽력처럼 내리꽂혔다. 해적들의 신음과 비명이 요란한 가운데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핸드건을 들어올렸다.
파킨슨 신부의 핸드건은 철탑을 명중시켰다.
오닉스의 배틀 엑스에 맞았을 때도 끔찍한 진동을 일으키던 철탑이었다. 그 알 수 없는 마법을 깨뜨렸던 복수는 다시 키의 손에 돌아와 있었고, 그래 서 철탑은 핸드건의 탄환에 마음껏 반응했다. 철탑의 흰 표면 위에 섬광이 작렬한 순간, 돌격하던 키 드레이번은 그 백열광에 주춤하며 물러났다. 그 리고 곧 철탑은 지진 네댓 개를 합쳐놓은 듯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휴휴휴휴흉!
공기는 철탑의 가차없는 진동에 휘말려 비명을 질렀고 바람은 스스로의 춤에 휘말려 갈가리 찢겨져 흩날렸다. 해적들은 저마다의 비명을 지르며 무 릎을 꿇었다. 귀머거리라도 몸 자체를 엄습하는 이런 진동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진동의 원인인 철탑에 감겨 있던 대사는 말할 나위 가 없다.
철탑은 그 진동으로 자신의 주인을 내팽개쳤다. 거대한 흰 뱀은 철탑에서 떨어져나와 무력한 모습으로 땅을 뒹굴었다. 다시 뒤로 물러난 키 드레이 번은 파킨슨 신부를 향해 끔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귀를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드 역시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어, 혹시 인슬레이 버를 쏘려다 실수하신 거요, 신부님 당신?’
그러나 신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패스파인더의 두뇌가 고속 회전하면서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의 의도를 순식간에 해석했다.
키와 대사의 싸움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문제는 그 싸움에서 배제된 나머지 해적들이다. 그 해적들이 공주 일행의 도주를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 모두를 무력화시키고 달아날 필요가 있다. 핸드건에 의해 야기된 철탑의 무서운 진동은 해적들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것이다. 물론 그 점 에선 공주 일행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해적들보다 나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흐름 그 자체를 생으로 삼는 자가 있었다. 그 어떤 여건 하에서도 자신의 ‘패스’를 설정할 수 있는, 그러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자가 있다. 그러니 ……………
파킨슨 신부의 눈이 외치고 있었다. 이 자식아, 움직여라!
데스필드는 진동의 골과 능선을 타면서 자신의 패스를 구축했다. 그가 세 명의 패신저를 이끌고 그 진동으로부터 탈출할 때까지 해적들은 그들이 움 직인 거리의 십분의 일도 따라잡지 못했다.
오스발은 그때를 회상하며 데스필드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그 끔찍한 진동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패스파인더의 패스라는 건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육감으로 안다고 해두지. 그런데 저건 뭐지?”
데스필드가 가리킨 방향을 보던 오스발은 마을 안쪽으로부터 달려오는 소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오스발을 향해 달려온 소년은 ‘오스발이시죠?”라고 그를 확인한 다음 자신이 볼드윈 씨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소년 은 신부와 레이디께서 자기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소년의 뒤를 따랐다.
소년의 뒤를 따라 잠시 걸어간 두 사람은 마을 뒤편 조금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을 보게 되었다. 좋은 포도원을 하나 끼고 있는 산장 비슷한 건 물을 가리키며 소년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이에요.”
오스발은 천진하게 웃으며 좋은 집이라고 말했지만, 데스필드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어라, 산장처럼 보이는데 집이라고? 그때 현관으로부터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안녕하시오. 레이디 유리가 말씀하시던 일행이신가 보군. 난 볼드윈이오.”
볼드윈은 아직 그 근육결을 따라 젊음의 기색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중년이었다. 데스필드는 그의 이름과 말투, 그리고 나그네를 자기 집에서 재우 는 배짱을 보고서는 그가 팔라레온쯤에서 도망친, 하지만 테리얼레이드까지 도망칠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은 귀족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채권자를 피해 먼 산장으로 도망친 파산 귀족 정도일까?
데스필드의 추측은 정확했다. 볼드윈을 따라 산장 안으로 들어간 데스필드와 오스발은 포도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티 타임이라고 불러야 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볼드윈은 그들이 한가로운 티 타임의 손님처럼 행동해 주길 원하는 듯했고 그래서 데스필드와 오스발은 머뭇거리며 먼저 와 있던 신부와 공주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정말 티 타임이었다. (데스필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볼드윈은 차를 홀짝거리며 그들에게 팔라레온의 사정을 물어보려 했다. 아마도 그 역시 율리 아나 공주의 행동거지나 그 용모를 보곤 그녀가 귀족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볼드윈은 그들이 테리얼레이드 쪽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듣곤 약간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는 째려보는 것이 분명한 아내의 시선을 무시하며 · 하녀가 없는지 볼드윈 부인이 직접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 었다 – 계속 대륙의 정세라든지 펠라론과 데샨 카라돔의 알력 따위의 대사)를 논하려 들었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 을 열심히 지어보였지만 볼드윈은 모르는 척했다.
결국 율리아나 공주가 그녀의 동행들을 구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이낙스의 참렬한 범죄 행위가 대륙의 모든 도시와 성과 요새와 교회와 모든 위대한 것들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아로새긴, 저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기조차 무서운 사건 이후 법황청의 위세가 하락 일로에 있다는 점에는 저도 많은 점에서 동의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 한 기왕의 현상들이 데샨 카라돔이 펠라론을 상대로 모종의 술책을 획책하고 있다는 볼드윈 씨의 추측에 대한 뒷받침이 되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의 심 속에 저는 그 추측을 연역하기 위한 추리의 재료로서 간과하기 쉽지만 간과한 대가는 커다란 것이 분명한 사실, 데샨 카라돔이 스스로 고귀한 것으로 믿으며 지켜온 그들의 전통을 먼저 관찰하는 것이………… 운운.”
볼드윈은 헛기침을 하고선 게으른 그의 아내를 도와야겠다고 말하며 물러났고, 오스발과 데스필드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진심 어린 경의로써 공주 에게 박수를 보냈다. 공주는 살짝 목례한 다음 다시 찻잔을 들어올리며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당신들이 오기 전에 볼드윈 씨가 말해 줬는데요, 내일이 주말이라더군요. 볼드윈 씨는 미사를 빼먹을 바엔 생니를 뽑겠다는 꽉 막힌 성격. 용서하세요. 신부님.”
바람의 도시의 신부는 그냥 웃었고, 공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머,
“그, 그런 본받을 만한 훌륭한 신도분이신 듯해요. 그래서 그분은 내일 새벽에 이 마을의 신도들과 함께 다림으로 출발할 모양인데, 그 편에 우리들 이 동행하면 될 것 같던데요.”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잘되었군요. 공주님 당신. 그럼 본인은 돌아가도 되겠군요.”
“돌아간다고요?”
“일이 끝났잖소. 패스파인더는 이 계절에 부지런해야 돼. 봄은 이동의 철이란 말이야. 자, 신부님 당신. 대금 주셔야지.”
대금이라는 말에 율리아나와 오스발의 시선이 파킨슨 신부에게 돌아갔다. 신부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이 얼간아. 새 교회 짓느라고 정신없던 나에게 무슨 돈이 있겠느냐. 그러니까 ᅳ.”
“시, 신부님 당신이 신도 본인에게서 돈을 떼, 떼먹으려고!”
“닥쳐라! 다림 수도원에 도달하면 그곳의 신부님께 받아서 줄 것이다. 그리고 네놈이 무슨 신도냐!”
“뭐야? 그럼 본인도 다림까지 가야 된다는 말씀?”
“그렇다. 뭐가 불평이냐? 패스파인더는 이 계절에 부지런해야 된다며? 다림같이 큰 도시에 가면 너도 패신저를 구하기 쉬울 거 아니냐. 그럼 테리얼 레이드로 돌아가면서도 돈벌 테고. 다 너 좋으라고 계획한 거다. 흠, 흐음. 마지막에 한 말은 믿기 어렵지?”
“확실히 그렇소.”
데스필드의 심술궂은 대답에 신부는 헛기침만 해대었다. 뭐라고 더 말하려던 데스필드는 율리아나 공주의 환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저도 사례를 하고 싶어요, 데스필드, 카밀카르 상관에 도달하게 되면 당신에게 뭔가 도움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데스필드는 싱긋 웃고는, 율리아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사례? 글쎄. 본인은 고귀한 피의 선물(Royal blood’s gift)은 달갑잖은데. 교회로부터 받는 것으로 만족하겠어.”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의 날갯짓 속에 해가 저물었다.
볼드윈 부인이 방혈하는 심정으로 제공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내일 새벽의 출발에 대비해 모두들 일찌감치 잠들기로 했다. 잠들기 전 볼드 윈이 다시 한번 율리아나 공주에게 도전했으나, 율리아나는 이 야심한 시각은 두 성인 남녀가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치 않은 시간이라고 말함 으로써 그를 물리쳤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침실로 찾아가는 대신 식당으로 찾아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저녁 식사의 뒷처리를 하고 있던 볼드윈 부인은 얼어붙은 얼굴을 한 채 율리아나를 맞이했다. 율리아나는 별말 없이 가지고 갔던 주머니를 볼드윈 부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레이디 유리?”
“나그네가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지요.”
볼드윈 부인은 주머니를 열었다. 그 내용물은 율리아나에게 남아 있던 현금 전부였다. 카밀카르 사자들의 시체로부터 수거한 돈 중 여행에 쓰고 남 은 돈이었지만 돈쓸 일이 별로 없었기에 꽤 많은 액수가 남아 있었다. 볼드윈 부인이 당혹한 얼굴을 들어올렸을 때 율리아나는 재빨리 말했다.
“물론 부인의 훌륭한 집을 여숙 취급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겠어요. 그건 제 여행 자금이지만 제 여행은 이제 거의 끝났거든요. 내일 바깥분과 함께 다림에 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고 싶군요.”
가만히 돈주머니를 내려다보던 볼드윈 부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고귀한 분이시군요. 이토록 금전에 초연하실 수 있는 것을 보니. 하지만 고귀한 분들은 이런 배려가 드문 법인데, 이상하군요.”
율리아나는 대답 대신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던 볼드윈 부인은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부인은 아직도 돈주머니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바깥양반이 알게 되면 화낼 거예요. 그이는 아직도 자신이 옛날의 자신인 줄 알고 있거든요.”
볼드윈의 정체에 대해 데스필드와 거의 비슷한 추리를 했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여자인 이유가 뭐죠? 남자들이 자기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착각하게 내버려두고, 정작 요긴한 사실들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 으면 되는 거잖아요. 비밀로 하죠.”
볼드윈 부인은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웃은 다음 돈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고마워요, 레이디 유리.”
볼드윈 부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굳은 얼굴로 율리아나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안해하던 부인은 머뭇거리며 차라도 들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율리아나는 즐겁게 찬성했다. 낮 동안 쌓였던 봄의 향기들이 밤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시간, 산장의 초가 지붕 지푸라기 사이로 달빛이 은은히 스 며드는 가운데 율리아나는 차분한 얼굴로 볼드윈 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차로 시작된 그녀들의 대화는 결국 몰래 꺼내온 술로 이어졌고, 이 놀랄 만한 범죄를 공모하며 두 여인은 소리 죽여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