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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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5화


“…어디 있을지는 모르니 벽 아무곳이나 쏘겠다.”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핸드건을 도로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찌푸린 눈으로 테이블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서 의자에 앉으시지요. 그런 자세로 고해를 할 겁니까?”

머쓱한 얼굴로 일어난 휘리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휘리의 눈은 핸드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퉁명스러운 표정으 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무구가 당신의 고해를 방해하는 듯하군. 오발이라도 일어날까 봐 겁난다, 이거요? 걱정 마시오. 이건 장전도 안 된 거니.”

“예?”

파킨슨 신부는 아무 말 없이 핸드건을 뽑아서 자기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아, 안 됩니……!”

휘리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핸드건에서는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리는 반쯤 일어난 채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 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건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 얼간이들은 내가 장전된 핸드건으로 장난을 칠 위인이라고 생각하더군. 그건 그들의 무지와 오해니, 내가 그 무지와 오해를 이용한다 한들 저들 로서는 날 원망할 순 없을 거요. 흠, 그럼 이제 안심하고 고해성사를 하실 수 있겠소?”

빙글빙글 돌던 핸드건은 다시 신부의 허리춤으로 사라졌다. 휘리는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도로 의자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파킨슨 신부는 차분히 기다렸지만 휘리는 모아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테이블 표면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파킨슨 신부 는 테리얼레이드의 신부다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런, 고해성사를 어떻게 하더라? 어쨌든 내가 먼저 말해야겠지.

“고해를 하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나와 같군. 속으로 미소를 지은 신부는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시고 기억나는 대로 천천히 말해 보십시오.”

휘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진지하면서도 빠른 어조로 말했다.

“별을 떨어뜨렸습니다. 백만 개의 꽃을 짓밟았습니다. 가장 높이 날던 새의 날개를 꺾었습니다. 영광의 일출을 모독했습니다. 그리…”

“바쁘셨겠습니다.”

“예?”

“아, 물론 댁이 나를 희롱하는 건 아닐 테니 그건 일종의 은유일 텐데, 난 그게 도대체 무슨 은유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고해를 하며 수사법을 쓸 필요야 없는 거 아닙니까. 주님이 보고 계시니 진실 자체만을 말씀하십시오.”

“사람을 죽였습니다.”

휘리의 말은 천식 환자의 숨소리 같았다. 파킨슨 신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휘리를 바라보았다. 살인이라. 이 얌전하게 생긴 젊은이가 어떤 목숨을 종말처리했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휘리의 설명을 들으며 파킨슨 신부는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결투였습니다. 제가 신청했죠. 하지만 그는 제 부하였으니 그건 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공정한 결투가 아닙니다. 전 부하 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군인에겐 항명이란 없는 것을 이용하여………… 저는 살인자입니다!”

“결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그의 버릇을 고쳐주고자, 혹은 제가 그보다 더 잘난 것을 과시하고자 검을 뽑았을 때 이미 전 살인자였습니다.”

이어서 휘리는 자신과 바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설명을 듣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그것이 살인이 아 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당신의 검 위로 쓰러진 것 아닙니까? 그건 사고인 것 같습니다만.”

“애초에 결투 따위를 신청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부님. 게다가 사고라고 하셨지만 저는 제 알량한 검술만을 믿고 그런 위험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건 살인입니다.”

살인하지 말지니.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이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잘 무시되는 계율에 자신이 충실했던가 하는 잡념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고해를 받고 있음 을 떠올린 신부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습니다.”

노신부는 두 손을 모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신부의 낡은 옷소매에서 비져나온 보풀 위로 창문을 통해 미끄러지는 햇살이 어리고 있었다. 잠시 그 반 짝이는 보풀을 바라보던 신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잘 안다고 믿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죄는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티끌로 여겨질 만큼 무겁습니다.”

휘리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파킨슨 신부는 재빨리 말했다.

“나는 그 ‘살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죄는 그것이 아닙니다.”

휘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예?”

“당신은 스스로를 심판하고 죄의식의 탈출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신부님. 저는……”

“손해는 그 주인에게 배상하는 법, 주님께서 빚으신 생명을 취하였으니 그 생명을 빚으신 주님이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 당신을 벌할 이는 주님입니 다. 그러니 스스로를 심판하지 마십시오. 자학하지 마십시오.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벌을 주지 마십시오. 이만큼 괴로워했으면 되겠지, 이 만큼 선한 일을 하면 되겠지………… 허겁지겁 신부를 찾아 고해를 하면 되겠지.”

휘리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 고해하러 오셨습니까? 나한테 죄를 말하려고? 이미 말했듯이 당신의 벌을 정할 이는 우리 주님이며, 그분은 이미 당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벌할 자도 아닌 내게 당신의 죄를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해하면 죄가 사라집니까?”

휘리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졌다.

“당신의 죄를 볼까요. 난 당신이 살인자라고 생각되진 않아요.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주님이 그 죄값을 결정하시겠죠. 혹은 당신이 그 바크의 죄값 이었을 수도. 어쨌든 그 사고에 대해 고해하겠다면 난 그 고해를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부르며 자학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까지 제시하는군요. 빨리 신부를 찾아 고해할 것. 그건 우리 주님 몫인 벌을 당신 스스로 정하는 행위이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 만이고 주님을 능멸하는 처사입니다.”

“신부님! 아닙니다. 저는…………”

“왜 이렇게 급하게 오셨죠?”

휘리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마치 어린애처럼 고백하면 용서받겠지 하는 생각, 의외로 어른들도 많이 가지고 있죠. 아닙니다. 고해를 하는 이유는 죄사함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해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스스로의 죄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다가올 주님의 벌을 가장 겸손 한 마음으로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파킨슨 신부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허공에 성호를 그었다. 휘리를 위하여 교회가 아닌 이곳을 정화하는 손짓이었다. 정화를 끝낸 신부는 다시 휘리를 바라보았다.

“주님과 그 불쌍한 이에게 용서와 벌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스스로에게 용서와 벌을 구하진 마십시오. 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곳은 조용하니 마 음껏 기도드리고, 마음이 안정되거든 밖으로 나오십시오. 밖으로 나왔을 땐 내게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떠나십시오.”

휘리는 뭐라고 말할 듯이 신부를 바라보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이미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기 전 신부는 잠시 휘리를 돌아보았다. 

“주님의 은총이 그대에게.”

문이 닫혔다.


길버트 하드루스 대통령은 코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코로 옮겼다. 그 왕복을 보던 바스톨 장군은 헛기침을 한 다 음 계속 말했다.

·물론 각하께선 이 이야기를 비밀로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만.”

“아, 물론이지요. 다른 사람의 가정사를 술자리의 화제 따위로 삼는 건 제 취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휘리가 그의 아들이라는 건 확실한 겁니까?”

“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흐- 음. 좋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라는 것뿐이잖습니까.”

“사자 새끼는 사자가 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가수의 아들이기도 하지요. 어머니를 제외할 필요는 없겠지요?”

“…예. 그렇지요.”

“지금 알려진 그의 모습을 보면 그는 어머니의 피를 이은 듯합니다만. 아들이 꼭 그 아버지를 닮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에,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그런 믿음을 가진다는 건데……

“남성의 독선이라고요?”

하드루스 대통령은 싱긋 웃으며 장군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쨌든 그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는 이 논의의 대상으론 좀 모자라겠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성명판을 비워두고 있습니다.”

하드루스 대통령은 잠시 의아한 얼굴로 바스톨 장군을 바라보았다. 성명판? 하드루스 대통령은 물론 이 이국적인 풍습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잠자 코 바스톨 장군의 설명을 기다렸다.

“혼 족의 가장으로서 그건…… 스스로 불화를 조장하는 짓입니다. 벌써 오래전에 자녀들 중 한 명의 이름을 성명판에 새겼어야죠. 장성한 자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집안 전체의 분위기를 위험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혼 족의 신사라면 당연히 기피할 만한 그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는 상식인입니다.”

“글쎄요. 그가 그러는 이유가 휘리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는 휘리의 이름을 쓰고 싶은 겁니다. 가문의 이름을 이어나갈 이름으로서 ‘휘리 타르타니어스’를 성명판에 새기고 싶은 거죠. 그는 자신의 아들이 휘리 노이에스를 버리고 휘리 타르타니어스로서 그를 찾아올 때까지 성명판을 비워둔 채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무인의 눈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죠?”

“말씀드렸듯이 타르타니어스 공은 상식인입니다. 단순히 부정 때문에 가문을 어지럽히는 일을 할 리는 없습니다. 그는 타르타니어스 가문을 위 해서, 그 고명한 무문을 이어나갈 자로서 휘리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트로니아의 노장군에 의해 이 시대 최고의 무인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굉장한 칭송을 받고 있던 사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자신에 겐 화살이나 다름없었던 신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의 말은 휘리에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휘리는 그것이 충격인 이유는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정도로 교활하지는 못 했다. 파킨슨 신부는 말했다. 고해는 죄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그러나 나는 고해를 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엉터리 믿음으로 신부를 찾아 달려왔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이교도의 피의 증거인가?

순간 휘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교도의 피. 아버지의 피.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그 짐승의 피.

휘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왜 이곳까지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깨달았다. 그가 부하들을 인솔해야 할 책임도 다 팽개치고 어제 처음 만났을 뿐인 신부를 이렇게 찾아온 까닭은 살해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렇게 믿었던 것처럼 고해를 하면 죄를 벗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 문도 아니었다. 그가 파킨슨 신부를 찾아온 까닭은….. 그가 교회의 품에 안긴 신앙인임을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휘리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 이런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이 있단 말인가. 사람을 죽였으니 고해를 해야 된다 고 믿는다면, 그건 미사에 참석하고 성전의 구절을 인용할 줄 아니까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나는 역시 가짜 신앙인인가? 이교도의 아들이라는 이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아버지. 제기랄!”

“보통 그 단어들은 붙어다니지 않지요. 그게 붙어다니면 가정 교육을 의심받을걸요.”

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목뼈가 부러질 만한 속도로 고개를 돌린 휘리는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율리아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 간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었고, 어느새 휘리는 벌떡 일어나며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날개는 어디다 두셨습니까?”

“전당포에 맡겼어요. 얼마 안 주던데요.”

휘리의 아첨에 대충 대답한 율리아나는 그대로 걸어왔다. 다가오는 율리아나를 보며 심장 박동수를 무자비하게 높이고 있던 휘리는 그녀가 그의 곁 을 지나쳐 주방으로 걸어간 순간 졸도할 뻔했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그에게 졸도할 틈을 주지 않았다. 주방으로부터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나텔 백부장님이죠? 유리예요.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계시죠?”

“신부님을 뵐 일이 있어서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이 부근에 찾을 수 있는 신부님은 한 분뿐이더군요.”

“음? 어떻게 신부님이라는 거 아셨죠?”

“교회의 보물을 가지신 것을 보고 고위 성직자분이실 것을 짐작했습니다.” 

아차, 그렇다면 저 레이디도 귀족인 걸까? 

“어, 그래서 유리 양이 천사이 실 거라는 것도 짐작했고요.”

휘리의 말이 끝난 순간 주방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휘리는 꼭 물 마시다 사레들린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과연 다시 거실로 돌아온 율리 아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물 마시다 사레 들렸어요. 그러니 예의는 그만 차리세요.”

휘리는 이 천사가 퍽 솔직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귀족이 아닐지도. (주여, 감사합니다!) 휘리가 자신이 절대로 예의를 차리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며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던 율리아나가 말했다.

“신부님을 보지 못하셨나요? 이상하군요. 어디 가시진 않으셨을 텐데.”

“아니오. 방금 만나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댁이십니까?”

“아니오. 도나텔 씨처럼 손님이죠. 곧 떠날 거예요.”

“그럼 댁이 어디시죠?”

‘카밀카르의 폰스파궁 동관’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율리아나는 말을 돌렸다.

“왜요, 편지하시게요?”

“편지보다는 납치를 하고 싶은데요. 장미 꽃다발로 위협해서 백마가 끄는 마차로.”

율리아나는 생긋 웃었고, 마음속으론 이 남자는 역시 바람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휘리 역시도 그런 결론을 내리곤 좌절하고 있었다. 으아 아! 이 무슨 난봉꾼 같은 말이람!

“흐음. 신부님 만나보러 오신 건가요, 제 마부가 되겠다는 말씀을 전하러 오신 건가요?

“무, 물론 신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왜 신부님을 만나셔야 했는데요?”

“고해를 할 일이 있었……”

휘리는 말을 맺지 못한 채 갑자기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율리아나는 다리가 마비된 사람처럼 의자에 주저앉는 휘리를 보며 깜짝 놀랐다.

“백부장님? 괜찮으세요?”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율리아나는 휘리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휘리 자신도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율리아나를 본 순간 머릿속에서 휙 사라졌 던 것들이 더 무거운 무게로 돌아와서 그의 혀를 억눌렀던 것이다. 회오리바람처럼 핑핑 도는 그의 머릿속으로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 다.

아버지, 제기랄!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이며 야만인이다. 제국의 적인 혼 족의 장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겁탈한 강간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 만 휘리는 그렇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휘리는 그의 어머니가 저 이교도 괴물을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향해 휘리는 모든 마음으로 외쳤다.

내 몸에 흐르는 당신의 피를 가져가!

휘리는 자신의 소리 없는 외침에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거였어. 죄마저 잊고 여인에게 치근덕거리게 만드는 이 더 러운 동물의 피를 가져가! 이 야만인, 괴물아!’ 휘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저주와 포악한 외침들 속에 자신을 밀어넣으며 숨가빠 했다.

그때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도나텔 백부장님. 왜 이러세요?”

휘리는 고개를 들었다. 율리아나가 커다란 눈 속에 불안을 가득 담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

“죄인………… 그것도 타고난 죄인입니다. 제 몸엔 죄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는 죽을 때까지 저를 따라다니며 저를………… 죄악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저는 그 피를 증오합니다!”

휘리의 외침을 들으며 율리아나는 당혹과 난처함, 그리고 약간의 공포도 느꼈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2층으로 돌아가버리는 대신 의자를 끌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휘리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런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동정은 사양합니다. 위로도 필요없습니다. 아름다우신 이여, 당신의 입술에 깃들일 아름다운 노래들 속에 저를 위한 자리를 만드실 필요는 없습니 다.”

“음 백부장님은 꼭 가수 같군요.”

“가수입니다.”

“예?”

휘리는 자신이 하는 말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벨군의 기밀을 누설하고 있다는 자각도 그에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고 있던 휘리에겐 그의 모든 것을 말해 버리고 싶은 욕망밖엔 남지 않았다.

“감히 그랬습니다. 저는 가수가 되어 노래로 세상을 대하고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모르는 척하며! 하지 만 그 피는 음험하게 잠들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몸 속에서 깨어난 그 피는 저를 더없이 끔찍한 죄로 몰아갔고, 성사를 모독하게 만들 었고, 다시 저 자신을 능멸했습니다. 저는 저주받은 죄인입니다.”

“백부장님. 백부장님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그 죄의 피라는 건 무슨 뜻이죠? 백부장님이 악마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의미인가요?”

“이교도의 아들입니다. 혼 족이지요. 혼 족의 반란 때 그 가증스러운 자는 저의 어머니를 취하여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국은 혼 족의 손아귀에서 벗 어난 지 오래지만, 저 자신은 지금까지도 혼 족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교인의 아들이기도 하군요?”

“예?”

율리아나 공주는 사트로니아의 대통령이 그의 노장군에게 했던 말을 휘리에게 해주었다.

“어머니를 제외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아버지를 닮으려고 특별히 애쓰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닮아야 된다니오! 저는 그를 닮으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율리아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백부장님 말이 그거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아버지처럼 될 수밖에 없어. 자식은 결국 아버지를 닮게 마련이니까. 그 말씀이죠. 하지만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닮을 수밖에 없나요?”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휘리의 얼굴을 향해 율리아나는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말들을 던졌다.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아버지라도 그 아버지를 닮을 수밖에 없나요? 남자들의 권위에 대한 추종 의식? 위신을 위해선 뭐든 하겠다. 체면을 상할 바엔 목숨을 끊겠다.” 율리아나는 휘리로서는 알 수 없는 비웃음을 잠깐 머금었다. “가문이 결딴나도 귀족이니 고상하게 살겠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라도 나는 그 찬란한 이름 ‘아버지’를 닮고야 말겠다?”

휘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다시 잔잔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아들의 독선이군요. 꽤 유명한 거죠.”

“독선이오?”

“위신, 체면, 가문, 아버지. 나보다 훌륭한 무엇. 남자들이 말할 땐 항상 그런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위가 원하니까’라고 말하지 요. 국민의 이름으로, 일반적인 경향은, 이런 경우라면 대개, 시대가 원하는, 다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보통은……… 다 마찬가지예요. 왜 ‘내가 그러 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못할까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나요?”

율리아나는 갑자기 오므린 두 손을 앞뒤로 붙여 망원경을 만들어보였다. 손망원경을 오른쪽 눈에 가져다댄 율리아나는 그것을 휘리의 가슴에 겨냥 했다.

“얍! 뭘 원하는지 볼까요?”

율리아나는 휘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가리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휘리는 공주의 장난에 호응한 것은 아니 었다. 휘리가 정말 가슴속이 보여질까 봐 놀랐다는 사실은 모른 채 율리아나는 계속 말했다.

“나에겐 한 노예 친구가 있어요.”

“노예・・ •요?”

“예. 배에 묶인 노잡이였죠. 가장 권위가 있을 수 없는 인물. 그렇다면 그는 권위에 가장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렇잖 았어요.”

“그렇잖았다고요?”

“그는 물론 자신이 노예임을 무시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노예로 그냥 살 뿐 그것에 대해 화내지도 않더군요. 그냥 패배주의자나 타협주의자의 말처 럼 들리겠죠? 하지만 그가 말할 땐 느낌이 달랐어요. 난 그 느낌이 뭔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백부장님을 보니 그의 말이 왜 다르게 느껴졌는 지 알겠군요.”

휘리는 다시 공주의 말을 반복했다. 

“알겠다고요?” 

아마 그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 노예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고픈 것을 방해받고 있지는 않다고 여기는 듯했어요. 그는 권위가 원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죠. 자기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만 생각하더군요.”

원한다면 여가 시간에 공주도 탈출시키더군요. 그러곤 자유호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이젠 난 알아요. 오스발은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고 마침 기회도 되니까 나를 탈출시킨 거예요. 납치당한 공주를 구한다는 근사한 명예에도, 정의의 실천이라는 그 근사한 권위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러곤 여가 활동이 끝났으니 일터로 돌아가겠다는 거죠.

율리아나 공주는 자기 생각에 생긋 웃었다. 물론 그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공주가 휘리에게 보내곤 하는 그 죄없는 웃음들은 휘리에겐 강철의 레이디로 쏘아진 직격탄을 맞는 것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었다.

“당신도 그러시면 좋겠군요. 이교도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이 선을 추구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백부장님은 물론 아버지의 아들이 에요. 그 사실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리고 동시에 그냥 아들일 뿐이에요. 그 사실에 대해 화내지 마세요.”

“레이디 유리.”

“교회가 이교도인 당신 아버지를 비난하고, 제국이 혼족인 당신 아버지를 비난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가 아버지를 힐난한다 해도………… 당 신마저도 아버지를 힐난하고 그 아버지의 종속물인 자신을 힐난하지는 마세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 면 당신은 권위의 종속물도 아니고 아버지의 종속물도 아니니까. 당신이 추구하고픈 선을 추구하세요. 휘리 노이에스.”

율리아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음 순간 앞으로 뻗어나온 율리아나의 손을 보며 휘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 손을 감싸쥐었 다.

그리고 휘리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 손등에 키스했다.

악수할까 생각했던 율리아나는 이 기습에 살풋 웃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례를 사과하라고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에 율리아 나는 그저 손을 살짝 끌어당긴 다음 뒤로 돌아 걸어갔다. 망연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던 휘리의 머릿속에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휘리는 경악하며 일어났다.

“어떻게?”

율리아나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다벨의 가수 휘리 노이에스는 천사의 아들일 거라고. 왜 그런 소문이 생겼냐 하면 그나 그의 어머니 모두 휘리 노이에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난 이제 그가 사람의 아들임을 알았어요. 당신이 왜 군대에 몸을 담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다벨의 열성적인 청년들은 애인에게 바칠 노래가 곤궁해졌겠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전당포에서 바가지 쓰는 칠칠맞지 못한 천사.”

그 말을 남기고 율리아나는 계단 위로 사라졌다. 휘리의 눈엔 하늘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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