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1화
다림은 일종의 자유 무역항이다.
영토는 작을지 모르나 바다에서의 발언권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레갈루스의 뱃사람들에 의해 개발된 이 항구는 원래 이보레 열도를 오가는 선 박들의 피난항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대륙 최고의 곡창지대인 팔라레온에 인접하면서도 팔라레온에 속하지 않는다는 그 입지적 특성 때문에 다림 은 곧 비관세 무역항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림이 그런 식으로 발달하게 된 데에는 레갈루스인들의 영토에 대한 무관심도 크게 작용했다. 레갈루 스인들은 팔라레온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맞서 이 조그마한 식민지를 지키는 대신 그것을 자유 무역항으로 개방하여 생기는 이점을 취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네발동물이 견인할 수 있는 화물량과 바람이 견인할 수 있는 화물량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멀리 그리치나 자마쉬, 그리고 카밀카르의 상인 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까운 라트랑이나 레모에서도 다림에 그들의 배를 부린다. 그러곤 그들의 선창에 팔라레온의 밀을 가득 실은 다음 한 가지 소망을 거듭거듭 기원하며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이 ‘키 드레이번을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비는 것에 비해 볼 때 그들은 ‘순풍을 기원합니다’라는 퍽이나 전통적인 기원을 올린다. 키 드레이번은 밀 운반선을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이들은 키 드레이번에게 밀장사를 할 만한 상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낭만적인 이들은 키가 사람들의 빵을 뺏는 일은 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사를 냉정하게 볼 줄 아는 식견 있는 자들은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밀 운반선을 건드릴 경우 받게 될 무시무시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겠죠.”
율리아나 공주는 그렇게 쉬운 질문은 처음 받는다는 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폴라 대사는 싱긋 웃었다.
“그렇겠지요. 공주님. 노스윈드는 냉정하고 잔혹할지는 몰라도 영리한 자입니다. 그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각국 정부들도 자국민이 굶주리게 되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 것쯤은 짐작할 수 있는 사내지요. 어쩐지 매력적이군요. 어떤가요, 공주님. 직접 만나보신 소감은?”
공주는 다시 쉬운 질문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침착하게 미친놈이에요.”
폴라 대사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라힘턴 전하를 가장 많이 닮은 건 셋째 공주님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과연 그러하군요.”
“으음? 무슨 말씀이죠?”
폴라 대사는 대답 없이 싱긋 웃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카밀카르 상관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사(ambassador)라고 불리긴 하고, 그것이 그녀의 정식 직함이긴 했지만, 그 직함이 폴라의 일을 정확히 나타낸다고는 볼 수 없다. 이곳 다림엔 다 림 주재 카밀카르 대사인 그녀가 고국 카밀카르를 대신하여 논의를 나누거나 대사(大事)를 의논하거나 하다못해 차라도 한 잔 나눌 만한 정부가 존재 하지 않았다. 물론 레갈루스가 파견한 총독이 있긴 했다. 하지만 폴라 대사가 다림 총독 글라두스와 회견을 가질 경우 그것은 ‘카밀카르 대 레갈루 스’의 일이라기보다는 ‘설탕 한 컵 대과자 쟁반과 같은 일일 경우가 더 많았다.
“아, 폴라 대사, 설탕 한 컵만 꿔주겠소? 과자를 만들려 했는데 설탕이 없더라고. 만들어지면 좀 가져다드릴 테니 맛이나 보구려.”
“아, 고마워요. 총독님. 컵 이리 주세요.”
다림은 말 그대로의 자유 무역항이고 그 자유로운 분위기는 이곳을 이용하는 모든 뱃사람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많은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이 아름다운 항구가 어떤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원칙적으로 이 항구의 소유자인 레갈루스 자신이 이 땅에 대해 ‘손놓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레갈루스는 다림 총독마저도 본국인이 아닌 다림 시민들 중에서 선출했고, 그 래서 현 총독인 글라두스는 레갈루스 본국을 딱 세 번 밟아보았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곤 한다. 그런 바에야 다른 나라의 대표자들 역시 이 땅에서 어떤 국가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내는 일을 삼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레갈루스의 교묘한 정치 수완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항만세가 없는 항구에 대한 뱃사람들의 깊은 애정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다림에 발을 내린 각국의 대사들은 먼저 다림식의 뱃사람이 되는 일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폴라 대사 역시 은퇴한 뱃사람처럼 행세하길 좋아했다. 실제로 많은 뱃사람들이 이곳에서 은퇴를 결심하므로 한번도 배를 타본 적이 없는 그 녀가 보고 배울 만한 모델은 많았으리라. ‘이 아름다운 항구에 살고 있는 은퇴한 카밀카르 뱃사람으로서 현역인 후배들을 보살핀다’는 식의 태도는 어쨌든 카밀카르 뱃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따라서 카밀카르 뱃사람들이 생각하는 폴라 대사는 ‘다림의 큰누님’인 셈이다.
그 다림의 큰누님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 공주님의 말씀을 믿기가 더욱 어렵군요. 그렇게 냉철한 남자가 과연 자기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배를 버리고 그에겐 지옥보다 더 위 험한 곳이 될 이 육지에 올랐단 말인가요?”
“올라왔어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남자는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뭐가 이렇게 따분하냐고 투덜거릴 작자예요.”
“더욱 매력적이군요. 호호호!”
“대사님. 악마도 직접 만나기 전까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법일 테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제게 물어보신다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겠어요.”
율리아나의 진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폴라 대사는 농담으로 대답했다.
“푹 빠지게 될까 봐서요?”
율리아나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폴라 대사 역시 농담은 그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공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이것은 그 자를 체포할 절호의 기회군요. 하지만 100여 명이라… 아시겠지만 전 몇 명의 호위병 이외엔 병력이라 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자를 체포하는 영광은 아무래도 메르데린 공작에게 돌리는 것이 좋겠군요. 그 자가 얼마나 우쭐거릴 것인지 생각 하면 벌써부터 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지만.”
“메르데린 공작이오?”
“다벨에는 롱레인저라는 부대가 있지요, 공주님. 아피르 족이 사는 검은 황야를 순찰하는 부대입니다. 그들이라면 키 드레이번과 그의 졸개들을 쉽 게 체포할 수 있겠지요.”
율리아나는 재빨리 찻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감추며 속으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런 휘리를 만났을 때 키의 체포를 부탁했어야 되는 거였군. 난 역시 바보야. 아냐! 그건 술 때문이야. ……어라? 그, 그럼 ‘난 역시 술주정뱅이’라고 자학해야 되는 거야? 율리아나는 가엾게도 다른 일행들이 그녀 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여 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하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대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폴라 대사는 잠시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다벨에서 사람들이 온 모양이군요.”
율리아나 공주는 잠시 이 어처구니없는 우연에 당황해하며 폴라 대사를 바라보았다. 다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다벨에서 사람이 오다니? 그녀가 심 지어 폴라 대사가 마법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폴라 대사는 율리아나 공주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슨 상상 하세요, 공주님. 아마도 메르데린 컬렉션을 가지고 온 사람들일 겁니다.”
데스필드는 쾌활한 휘파람을 불며 다림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다. 뚜렷한 목적지 같은 것은 없었지만 패스파인더에겐 그것이 대단한 문제가 못 된다. 그냥 자신의 두 다리에 맡기고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내키는 대로 걸으며 다림의 풍광을 감상했다.
그의 옆에선 그에게 끌려나온 오스발이 따라 걷고 있었다. 데스필드의 기대와는 달리 오스발은 평온한 얼굴로 주위를 보았을 뿐 눈이 휘둥그레지거 나 감탄성을 연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말했다.
“신부님께서 교회에서 돌아오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아! 그건 곤란하지. 신부님 당신은 본인에게 지급할 대금 가지러 간 건데, 그 대금이 본인의 손에 들어오면 본인은 모조리 다 써버리고 말걸? 본 인은 떠나기 직전에 대금 받을 거야.”
“언제 떠나실 생각입니까?”
“대금 받는 대로! 그러니까 지금 나온 거잖아?”
오스발은 미소 지으며 속으로는 패스파인더를 그냥 한 자리에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하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 볼 법도 하건만 오스발이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데스필드에 대해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패스파인더는 움직이는 것 그 자 체가 좋고 주위의 모습이 계속 바뀌는 것 자체에 매혹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데스필드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주점의 유혹에선 자유롭지 못한 듯했다. 부두 창고와 어시장을 지나쳐 주점들이 늘어선 언덕에 도달 하자 데스필드는 즐거운 신음을 내곤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술 잘하나?”
오스발은 멋적게 웃었고 곧 데스필드는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노잡이 노예였지. 데스필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먼저 펍 안으로 들어섰고 오스발 은 겸연쩍어하는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라들어갔다.
오후였지만 펍은 그럭저럭 활기가 있었다. 다시 항해를 떠날 때까지 익숙하지 않은 뭍에서 시간 떼울 장소가 필요했던 선원들이 곳곳에서 잡담을 나 누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선원들을 둘러보던 오스발은 그들 중 일부는 오늘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이나 계속 술을 마셔온 사람들은 자신의 구토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지 않아도 어떻게든 표시가 나는 법이다. 경쾌한 걸음걸이로 홀을 가로지른 데스필드는 다 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머리에 비해 너무 커보이는 선원모를 눌러쓴 소년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럼, 냉수 타서, 두 잔.”
소년은 두말 없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데스필드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푸른 잔에.”
오스발은 그냥 술잔 모양까지 지정하는 술이 다 있나 보다 생각했지만, 소년은 잠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문을 끝낸 데스필드는 창문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저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소년은 세 개의 푸른 잔을 들고 왔다. 오스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고 그건 데스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데스필 드가 어리둥절해하는 이유는 오스발과는 좀 달랐다. 소년은 두 개의 잔을 데스필드와 오스발 앞에 내려놓고는 그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꼬마 당신이야? 희한하네.”
“시끄러워요, 데스필드 씨. 원하는 건 뭐죠?”
“우하! 본인 이름도 알아?”
“그 희한한 말투를 보니 데스필드 씨가 맞긴 맞나 보군요. ‘안’에서 가르쳐줬어요.”
소년은 엄지손가락을 어깨 너머로 넘겨 주방 쪽을 가리켜보였다. 데스필드는 흘끔 주방 쪽을 바라보고선 다시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 좋아. 그럼 꼬마 당신의 이름은?”
“설마 알고 싶은 게 그거예요?”
“물론 그건 아니지. 빡빡하게 굴지 마, 꼬마 당신. 좋아. 휘리가 누구지?”
오스발은 어렴풋이 이 사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데스필드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해 주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오스발은 약간 의 호기심을 가지며 둘의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목소리는 높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충분히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이거 보세요. 데스필드 씨. 꼬마를 내보내서 당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건 당신 착각이에요. 빨리 묻고 싶은 거나 물어봐요. 나 바쁘니 까.”
“아니 아니 진짜 묻는 거야. 휘리가 누구야?”
“정말 이럴 거야!”
소년은 진짜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데스필드 역시 화를 내었다.
“젠장, 이것 봐. 진짜 모른다고! 그리고 모르니까 이렇게 찾아와서 묻는 거잖아.”
“얼씨구? 왜? 가수 이름 대신 차라리 퓨아리스 4세가 누구냐고 묻지 그래?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비아냥이 가득한 소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데스필드는 이 이상한 상황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상쾌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이없음을 느꼈다. 아차! 그래, 가수였어. 어쩐지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어. …………하지만 가수일 리가 없잖아.
“그 가수 말고 다른 휘리 없어?”
그리고 데스필드의 대답을 듣는 순간 소년 역시 이 상황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상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데스필드와는 달리 소년이 동시에 느낀 감정 은 약간의 굴욕과 낭패감이었다.
“어, 다른 휘리가 있었어요? 이상하군. 모르겠는데.”
소년은 계속해서 거 참 이상하다, 그렇게 유명한 이름의 동명이인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후 소년은 패배를 인정 하기 싫다는 듯이 맥빠진 동작으로 일어섰다.
“젠장. 안에 물어보고 오겠어요.”
잠시 후 오스발과 데스필드가 술 한 모금씩 마셨을 때 소년은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썅. 정말 이상한데. 그 가수 말고는 없다는데요?”
“어, 그럼 그 가수 당신인가?”
소년은 잡아먹을 듯한 얼굴이 되어 데스필드를 쏘아보았다. 데스필드는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 잠깐 정말 이상하다고. 가수일 리가 없는 당신이야. 군ㅡ.” 잠깐. 군인이 아니었잖아. 그럼 진짜 그 휘리 당신이 그 가수 당신인가? “확실히 다른 휘리는 없는 거지?”
“없어요.”
“흐음. 좋아. 다벨의 휘리. 유명한 가수.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사람의 재주가 아닌 것 같은 기막힌 노래 때문에 그의 어머니 당신이 악마 당신과 관계 해서 휘리 당신을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니는 당신. 그 외에 다른 거 있나?”
“당신 여러 번 똑같은 대답 하게 만드는데, 없어요. 그런데 그 가수가 왜요?”
“흐음.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못 받았는데 본인한테서 뭘 캐려는 거야? 웃기지 마.”
소년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약간 비틀린 웃음이었다.
“거 신기한데 뭔가 있긴 있는 것이군요. 좋아요. 뭐 다른 거 알고 싶은 거 없어요?”
“흐음. 당장은 없군. 혹시 본인이 알고 싶어할 만한 건 없나?”
“쳇. 그럼 거래가 안 되잖아. 당신이 쥐고 있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보라고, 꼬마 당신. 저 안쪽에서의 본인의 평판이 그렇게 나쁘진 않을 텐데?”
소년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스발은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소년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쥐덫 다섯 개가 팔리는 것 같아.”
“쥐덫? 누가?”
“몰라요.”
데스필드의 얼굴에 약간의 진지함이 떠올랐다.
“모른다고?”
“그래요. 재밌잖아?”
“흐음………… 좋아. 휘리라고 불리는 당신이 롱레인저 당신들과 함께 다림 근방을 어정거리고 있더군.” 데스필드는 계속해서 사흘 전 그들이 롱레인저
를 만났던 장소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소년은 자신이 받은 정보의 값어치를 곰곰이 따져보는 얼굴이 되었다.
“그거 본전치기는 안 되는 거 같은데. 롱레인저가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건 이상할 게 없는데. 경매 때문에 따라온 것일걸.”
데스필드는 카밀카르 상관에서 벌어지는 메르데린 컬렉션의 경매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고, 그래서 소년의 추리와 비슷한 추리를 했었다.
“피차일반이오, 젊은 당신. 쥐덫 장사는 본인관 별 관련 없어. 본인은 패스파인더라고.”
“쥐를 찾아가면 되잖아.”
“쥐덫 장수 당신들하고는 상대 안해.”
“좋아요. 좋은 시간 되시길.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
소년은 그때까지 손도 대지 않았던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더니 그것을 단숨에 비우곤 몸을 일으켰다. 데스필드는 다시 창턱에 팔을 괴며 창 밖을 바 라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데스필드는 심히 괴이하다는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뭐 안 물어보나?”
“말씀해 주실 것이 있습니까?”
“설명을 기다릴 뿐 질문은 안한다? 노예 근성이라고 말해 버리고 싶은데 그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기도 어쩐지 이상하고. 참 재 미있는 당신이야.”
오스발은 조용히 웃었다.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여보이곤 두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쭉 뻗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입을 다물고 있기엔 이 정적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이 동네엔 일거리가 없군. 본인이 패스파인더인 것 잘 아니까 뭘 소개해 주려면 패신저 당신을 소개해 줬겠지. 그런데 그런 당신이 없으니까 대신 쥐라도 찾아가 보면 어떠냐고 말하는 거야.”
“쥐가 뭡니까?”
“쩝. 그거야 정확하겐 모르지. 납치일지 린치일지 암살일지. 어쨌든 이 도시의 누군가가 다섯 명의 칼잡이 당신들을 고용해서 이 도시의 누군가 를 곯려줄 작정인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 타깃이 된 당신을 찾아가서 일거리를 찾아보면 어떠냐고 제안하는 거지. 타깃 당신이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 어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그 칼잡이 당신들은 본인한테 화를 내겠지. 그런 당신들을 건드리는 건 귀찮아.”
데스필드는 문득 말을 멈추곤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신으로 4,000여 명의 해적으로부터 공주를 구해 내었던 노예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술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그런 걸 느끼는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자격지심을 느꼈다.
“본인은 이걸 생업으로 한다고. 위험 요인은 피해야잖아.”
“예? 아, 그러시겠지요.”
이런 동의는 받으면 더 비참한 것이라고. 본인이 이 무슨 푼수짓을. 데스필드는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다시 창 밖의 항구를 바라보았다. 멀리 다림 의 건물들 사이로 다림 수도원의 높은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악문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파킨슨 신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딜 보나 그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화려한 신부복과 깨끗한 피부,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은 손가락들엔 커다란 반지가 끼워져 있고 풍채 좋은 몸은 태어날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에 비한다면 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른 몸(단단하기는 하지만)과 거무튀튀한 피부를 한 파킨슨 신부는 혈통 좋은 종마 앞에 서 있 는 비루먹은 나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점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도리언 원장님.”
“있습니다. 파킨슨 신부님.”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림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도리언 신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파킨슨 신부님. 순종의 미덕을 생각하십시오. 그 외진 곳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손길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점 은 이해합니다만, 상부의 명령에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잊으셔선 안 됩니다.”
파킨슨 신부는 하마터면 울컥할 뻔했다. 순종의 미덕이라고! 살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 미덕이란 말이냐! 파킨슨 신부는 가까스로 자신을 억눌렀다. 그러나 그의 성격상 한마디 튕겨주지 않고선 참을 수 없었다.
“외진 곳이라 하셨지만, 그곳에도 신은 계십니다.”
“예? 아, 예. 물론이죠. 이 보잘것없는 선창가에도 신이 계심과 마찬가지로. 하하하!”
얼간이 자식. 입 닥쳐. 네놈 눈엔 남해 최고의 항구 중 하나가 보잘것없는 선창가로 보이냐? 파킨슨 신부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감을 얼굴에서 완전 히 지울 자신이 없었기에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안타깝게도 도리언 수도원장은 파킨슨 신부의 그런 모습을 긍정의 의미로 판단하고 말았다.
“이해합니다. 차마 신부님의 손으로 그러실 수는 없겠지요. 이곳까지 와주신 그 노고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당신이요?”
도리언 원장은 웃으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요번 주말, 율리아나 공주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림 수도원의 예배당에 올 것이다. 그 때 살인자들을 미리 잠복시켰다가 공주를 찌르고 도망치게 하면 된다. 그 일을 맡을 자들은 이미 다섯 명 구해 뒀다. 미사에는 비무장으로 참석하는 것이 상식인 만큼, 무기를 든 암살자들은 비무장인 호위병들에게서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폴라 대사나 카밀카르 상관의 사람들의 경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다림의 정치적 성격이 무색에 가깝다는 것은 이번 경우 오히려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카밀카르는 이 땅에 있는 많은 대사 관과 상관, 그리고 다른 많은 세력들 중 누가 암살을 시행했는지 짐작할 수 없어 당황해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미사에 참석하고픈 생각이 없다면 그 때는 파킨슨 신부가 나서면 된다. 이곳까지 무사히 오게 된 데 대해 주님께 감사드려야 된다고 당신이 말씀하시면 그녀는 당연히 따르지 않겠는가.
파킨슨 신부는 위 내용물 대신 말을 토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주도 면밀한 계획을 보니, (살인 계획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셨나 보군요.”
“아, 그거야 별것 아닙니다. 신부님.”
이 자식, 틀림없이 귀족가의 둘째아들인 모양이군. 암살이야 귀족가의 필수 교양이니 살인 계획 세우는 것쯤 간단하다 이건가? 일단 시간을 끌어보 자고 생각한 파킨슨 신부는 마른 입술을 핥은 다음 가까스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한 가지만 확인해 두고 싶습니다. 그 교회의 명령서라는 것,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전 아직까지도 교회가 우리에게 살해를 명령했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잠재적 위험이라 하더라도……………”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도 그 서한을 받아들곤 무수히 고민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파킨슨 신부는 허를 찔린 기분을 느꼈다. 미리 준비해 뒀군. 수도원장은 품속에서 꺼낸 양피지 를 파킨슨 신부에게 건네었다.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쳤다.
먼저 아래쪽을 살펴 법황청의 법인을 확인한 다음 파킨슨 신부는 우울한 표정으로 서한을 처음부터 읽어내렸다. 서한은 물론 암호로 구성되어 있었 다. 하지만 그것은 성전을 모조리 외고 그외에도 수많은 교리서와 주석서 등을 모두 외울 수 있는 신부라면 해독할 수 있는 암호들이었다. 예를 들어 ‘펠라론이 신실한 형제 그대를 볼 때 일곱 양에서도 으뜸인 양을 생각하고…………’와 같은 문장을 보자. 언뜻 상대방을 칭찬하는 평범한 문장처럼 보이 는 이 문장은, 그러나 사실은 ‘그대를 볼 때’라는 말로 시작되는 성 파킨슨의 주석서 7장 1절을 떠올려보라는 의미가 된다. 파킨슨 주석서 7장 1절은 ‘성전에 나오는 이웃을 죽이는 자라는 말은……’으로 시작하므로 이것은 ‘살해’ 혹은 ‘암살’이라는 단어가 된다. 이렇게 주관성이 강한 암호는 그 주 관성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으로선 해석하기 어렵다. 물론 성전과 교리서와 주석서들을 모조리 준비해 놓고 끈질긴 집념으로 해독한다면 시간만 좀 들 뿐 끝내 해석해 낼 수 있겠지만 교회의 서한에 함부로 손대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파킨슨 신부는 아무런 책의 도움 없이 곧장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서한은 먼저 율리아나 공주를 얻게 된 필마온 기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거대해질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우 이미 주인을 물 정도의 맹견으로 자란 필마온이 아예 광견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을 설득력 있 게 말하고 있었다. 도리언 신부는 짐작도 못했겠지만 서한을 읽던 파킨슨 신부는 이 서한의 글씨가 어쩐지 핸솔 추기경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증거 2호다. 젠장.’ 그리고 서한은 ‘절대로 교회에 의심이 돌아오지 않는 형태로 공주를 암살’할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끝까지 다 읽은 파킨슨 신부는 다시 처음부터 읽었고, 그리고도 서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도리언 원장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이젠 이해하시겠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우울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도로 접은 다음 수도원장에게 건네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되는군요.”
양피지를 받아들던 도리언 원장은 파킨슨 신부의 말에 깃들인심상치 않은 어조를 눈치 챘다. 파킨슨 신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꼭 그런 방법이 사용되어야 되는지는 아직 이해되지 않소.”
“신부님?”
“내가 법황청에 직접 서한을 보내어야겠소.”
수도원장은 ‘말도 안 되오! 법황청까지 서한을 보내고 답신을 받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공주는 그 전에 다림을 떠날지도 몰라요’라 고 외치지는 않았다. 다만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겠소?”
“보다 책임 있는 분께 이 행위의 정당성을 직접 들어야겠소. 그리고 따로 보고할 일도 있고.”
파킨슨 신부의 말은 물론 ‘너 따위는 화려한 옷을 걸쳤을 뿐 책임 있는 자가 아니야’라는 뜻의 야유였고, 도리언 원장은 그 야유를 잘 이해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도리언 원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언 원장을 화나게 해서 싸움이라도 일으키면 시간을 끄는 것이 더 쉬워질 거라 생각했던 파킨슨 신부는 의아한 표정으로 수도원장을 바라보았다.
“신부님께서 그러시다면야 뜻대로 하셔야죠. 따라오십시오.”
“예?”
도리언 원장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킨슨 신부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수도원장은 몸소 파킨슨 신부를 안내 하며 수도원 경내를 가로질렀고 수도원의 구조란 대개 비슷한 법인지라 파킨슨 신부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대 로 그들이 도달한 곳은 수도원의 귀빈실이었다.
귀빈실에 도착할 때까지 도리언 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계산된 침묵이었다. 원장이 귀빈실의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파킨슨 신부는 수도원장이 왜 침묵을 지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파킨슨 신부는 공손한 태도로, 하지만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 만남을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할진저,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핸솔 추기경님.”
“주님을 찬양할진저. 예상하고 있었소, 파킨슨 신부. 당신이라면 그 서한만으론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건강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오.” 핸솔 추기경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곤 성큼 다가왔다. 파킨슨 신부는 추기경의 손등에 입맞추려 했지만 추기경은 친밀한 동작으로 신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파킨슨 신부는 당황했고 수도원장의 눈은 이채로움으로 빛났다. 추기경의 포옹에서 풀려나자 파킨슨 신부는 고집스럽게 목례한 다음 말 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설마 자신이 작성한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오신 건 아니실 텐데요?”
“그렇게 표시가 났소? 날카로운 눈이군. 물론 그건 아니오. 내 목적은 메르데린 컬렉션이지.”
학자로 알려진 추기경은 빙긋 웃으며 신부를 의자로 인도했다. 파킨슨 신부는 푹신해 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카밀카르 상관에서 행하여진다는 그 경매 말씀입니까?”
“그렇소. 내 연수입을 모조리 던질 결심을 하고 왔소. 몇 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리고 진짜 목적은 ‘다림 수도원 암살 사건의 배후 지휘시고요. 파킨슨 신부는 입 안에서 굴리던 말을 도로 삼켰다. 비아냥거림이 통하지 않는 사 람에게 던지는 비아냥거림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핸솔 추기경은 비아냥거림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도원장께서도 앉으시오.”
“아니오. 급한 용무가 있습니다. 추기경님. 그리고 파킨슨 신부께선 은밀히 말씀드려야 할 일도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수도원장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핸솔 추기경은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따로 보고할 일? 그게 뭐요?”
파킨슨 신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전에 먼저 들을 말씀이 있습니다, 추기경님……….그녀의 일에 대해서인데요.”
핸솔 추기경의 이마에 수심이 한 가닥 떠올랐다. 추기경은 조그만 테이블에 놓인 디캔터를 들어올리더니 “한잔 하시겠소?” 하고 묻고는 손수 파킨슨 신부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법의도 걸치지 않고 단출한 차림으로 술을 따르는 핸솔 추기경의 모습은 성직자라기보단 외교관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 그가 하는 일도 그랬다. 마치 이 귀빈실이 수도원의 방이라기보다는 귀족가의 응접실처럼 보이듯이. 그래서인지 펠라론에서는 핸솔 추기경을 ‘작은 법황’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핸솔 추기경이 법황을 닮은 것은 아니다. 로데인 백작이 아리스 4세가 된 후 검을 놓은 것에 비해 볼 때 핸솔 추기경은 아직까지도 학자다. 모습이 바뀐 것은 오히려 법황 쪽이다.
술 한 모금을 마신 핸솔 추기경은 잠시 후 남은 술마저도 비우고 나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을 거요. 따라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오. 하지만 그건 형제에 대한 터무니없는 무례겠지. 좋아요. 뭘 알고 싶소?”
“누가 그 결정을 내렸습니까?”
“물론 법황이오.”
추기경의 대답은 너무나 쉽게 나왔다. 핸솔 추기경은 당혹해하는 파킨슨 신부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형제여 난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고 에둘러 말하지도 않겠소. 당신은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소.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지. 펠라론은 항상 당신의 노 고에 감사해 왔고 이번 노고에 대해선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요. 우리가 진실 외에 뭘로 당신께 보답하겠소.”
“부활의 법황이 그 신도를 주살한단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소.”
“제발 뭔가 납득될 말씀을 해주십시오!”
핸솔 추기경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건 당신이 이미 읽었던 그 서한에 다 적혀 있소, 파킨슨 신부. 그리고 당신은 그 이유를 이미 납득하고 있고, 당신이 원하는 건 약간의 동정이나 위로의 말인 듯하군요.”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저 그녀를 감금하면 안 된단 말입니까? 예, 그녀를 납치하여 적당한 곳에..”
“그 경우 필마온은 성사의 완성을 요구하며 자신의 신부를 탐색할 수 있소. 그들이 페리나스 해협 밖으로 나올 구실을 주는 것이오. 그녀의 죽음은 명명백백해야 하오.”
“……전 그녀가 단지 교회의 손에 죽기 위해 이곳까지 그 험로를 달려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똑같다. 그 최종 목적이 동일하므로.” 엘핀어로 말하는 핸솔 추기경을 보며 파킨슨 신부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추기경은 곧 제 국어로 말했다. “죽음은 누가 만든 것이오?”
“예? 물론 주님이십니다.”
“그렇소. 신학교를 방금 졸업한 풋내기라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럼 조금 전 형제의 말을 내가 조금 바꿔보겠소. 우리는 단지 주님의 손에 죽기 위해 그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거요. 틀립니까?”
파킨슨 신부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법황은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의 진리가 아니라 교권의 수호를 위해 신도를 죽인다면 이미 신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이단심판관을 지내기도 했던 자에게 하는 말로는 엄청나게 용기 있는 말이라 하겠다. 핸솔 추기경은 그 용기에 대한 순수한 존경으로 미소 지었다. “슬프군요. 우리가 애져버드를 잃지만 않았던들 형제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을 것을. 하지만 우린 그 용맹한 푸른 까마귀들을 잃 었고, 이제 세상엔 규환지옥에서 내지르는 단말마만이 가득하오. 형제여.”
핸솔 추기경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순수한 본심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녀를 순교자로 생각할 수 없을까요?”
“터무니없는 말씀입니다! 순교는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순교는 강요되는 것이오. 세상이 성전 말씀대로만 굴러간다면 순교가 왜 필요하겠소? 하지만 이 성스러운 곳에 앉아 있어도 코끝까지 다가오 는 이 악의 냄새는 우리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오. 성 페이루스를 매달았던 혼 족은 그에게 순교를 강요한 것이오. 데샨 카라돔의 그 무지한 촌로들은 성 바이올에게 순교를 강요한 것이오.”
“그들은 이교도이거나 악마의 대리인들입니다. 그리고 성 페이루스나 성 바이올은 바로 그런 악의 세력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자신의 신 앙을 지키셨기에 순교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렇소.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횡행한 악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우리 중 가장 고귀한 부분을 내놓는 것이오.”
“추기경님!”
“파킨슨 신부님.”
핸솔 추기경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킨슨 신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추기경의 말을 기다렸다.
“내 말이 궤변처럼 들릴 거라는 점은 짐작하오. 하지만 다시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시오. 주님께서 주신 고귀한 목숨을 팽개친 그들을 우리가 왜 존 경하는지.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목숨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는 그들의 가치관에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이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이 동의할 거요. 당신은 왜 바람의 도시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방치해 두셨소? 나는 당신에겐 목숨보다 신앙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그러한 태도를 존경하오만.”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제 이야기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소, 파킨슨 신부. 그녀는 순수한 어린 양이오. 그녀의 두 언니들처럼. 우리는 주님 영광 속에 그녀의 결혼을 축복해 주 고 행복을 빌어주었을 수도 있소. 그 남편될 이가 검독수리의 성채의 주인만 아니었다면…….차라리, 키 드레이번이었다면.”
핸솔 추기경이 덧붙인 이름에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예?”
“검독수리의 성채의 주인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제국의 공적 1호와 결혼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말하는 거요. 그녀는 받았들이지 않겠지만, 난 진 실로 그렇게 믿고 있소. 키 드레이번은 제국의 적이지 교회의 적은 아니오. 그렇지만 발도 로네스는 교회의 적이고 제국의 적이 될 것이며 세계의 적 이 될 것이오. 다른 어떤 남자라도 좋았을 거요. 키 드레이번 같은 최악의 남자라 해도. 하지만 발도 로네스는 안 되오.”
“추기경님……”
“그녀와 발도 로네스가 결합한다면 그녀는 발도 로네스와 함께 지옥으로 걸어가게 것이오. 그녀는 인질이 되어 자신의 조국 카밀카르를 업화로 끌 어들일 것이며, 그리고 지아비의 흉악한 야망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제국과 교회의 적이 될 것이오. 그녀의 이름은 그 지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모든 제국인들에게 원수로 기억될 테지. 그녀가 파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은 이제 바꿀 수 없소. 성스러운 교회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그녀에게 준 것 없었 던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일 것이오. 난 전염병에 걸린 양을 도살하여 다른 양떼를 구원하는 양치기의 심정으로 그것을 지지하겠소.”
핸솔 추기경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일 그녀 대신 내가 죽어도 된다면 난 기꺼이 죽을 것이오.”
핸솔 추기경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단정짓듯 말했다. 그리고 그가 이미 말했던 대로 그것은 진실이었다. 핸솔 추기경은 스스로의 목숨을 내걸 자신도 없으면서 타인의 목숨을 탐하는 비루한 작자는 아니었다. 목숨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처럼 똑같이 소중히 여긴 다는 말이다. 존경받을 만한 품성이지만, 이런 경우가 골치 아프다. 이 고귀하고 강직한 이는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던질 만한 일이라 판단되면 무리 없이 타인의 목숨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입을 다물었다.
긴 오후 속으로 짧은 영원들이 떠다녔다.
“나는…… 확신이 없습니다. 신앙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배교하시겠다는 말씀이오?”
“다른 때였다면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다고 쉽게 대답했을 겁니다.”
이어질 말이 이어지지 않았고, 핸솔 추기경 역시 그것을 잇지는 않았다.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시오, 파킨슨 신부.”
파킨슨 신부는 흐느끼는 듯한, 하지만 메마른 시선으로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핸솔 추기경은 다시 디캔터를 들어올렸다. 술잔으로 쏟아지는 붉 은 액체를 보며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눈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돌아가시오. 당신은 이곳에 남아 있으면 안 되오. 그냥 돌아가시오. ·그리고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겠소. 희망하는 곳을 적어 내게 보내시 오. 다른 곳에 가는 대신 테리얼레이드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소. 그리고, 보고하실 것은 뭐요?”
파킨슨 신부는 핸솔 추기경에게 감사했다. 그는 신부로 하여금 율리아나 공주를 팔아넘겼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보고할 것을 떠올리게끔 해주었 다.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 육지에 올랐습니다.”
핸솔 추기경의 술잔으로부터 술이 조금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