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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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1화


두두두두.

덧대어진 잿빛 구름들 아래 평야 위로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 한 마리, 그 뒤에 두 마리, 그리고 네 마리, 이후로는 셀 수가 없다. 기러기의 편대처럼 거대한 삼각뿔이 되어 달리고 있는 기병들과 그들이 뿜어대는 가공할 속력만이 남아 있을 뿐. 말발굽이 일으키는 돌풍 속으로 찢겨진 풀잎 이 휘날렸다. 마치 먼지와 풀잎으로 만들어진 파도를 가르며 달려가는 듯하다. 높고 구슬프게 울리는 돌격 나팔 소리. 찢어질 듯 펄럭이는 푸른 군기. 그들의 앞으로 멀리, 평야 반대편.

달려오는 기병들을 바라보고 있는 군사들이 서 있었다. 거짓된 침착함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병사들의 틈에서 궁병들이 걸어나왔다. 이 한 순간을 위하여 무수한 단련의 세월을 버텨낸 손길들이 시위에 걸렸다. 애써 고른 첫 번째 화살의 오늬가 시위에 단단히 물렸다. 궁병들의 어깨가 올라가고, 구름 낀 하늘을 겨냥하는 궁병들의 눈동자마다 두 번째 화살을 쏠 기회를 의심하는 빛이 스쳐지나간다.

“발사!”

일제히 풀려난 시위들이 아우성을 지른다. 화살이 하늘을 뒤덮은 순간 지평선으로부터 검은 장막이 하늘로 펼쳐지는 듯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포 물선을 그렸던 화살의 장막이 이제 기병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기병들의 파도 사이로 피의 역류가 거칠게 분출된다. 화살에 맞은 말이 기수를 팽개치며 애처로운 비명을 지른다. 나가떨어진 기수는 눈을 감을 겨 를조차 얻지 못한다. 인마를 짓밟도록 훈련된 사나운 군마의 말발굽이 그의 몸 위를 휩쓴 순간 기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어떤 말은 죽은 기수를 실은 채 달려가고 있었다. 팔에 꽂힌 화살을 뽑으려고 허둥거리다 고삐를 놓치고 낙마하는 신병, 몸에 꽂힌 화살을 내버려두고 대신 무기를 움켜쥐며 포효 를 지르는 고참병도 보인다.

그러나 상당수의 화살들은 부러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기병들의 몸을 두른 갑주를 뚫지 못한 화살들이다. 육박해 들어오는 기병들의 기세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화살 공격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을 깨달은 지휘관은 궁병들을 뒤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들과 자리를 바꿔 방패를 세워든 보병 들이 비장한 얼굴로 걸어나왔다. 가지런히 뻗어나온 창 끝에서 둔중한 빛이 번득였다. 평원의 진동과 그들 자신의 공포로 미세하게 떨리는 창 끝은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머리 위로 첫 번째 말 그림자가 떨어졌다.


“그놈이었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미심쩍은 얼굴로 하드루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흥분 때문에 어깨로 숨을 쉬고 있던 하드루스 대통령은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그놈입니다. 그놈이 철탑의 인슬레이버를 친 것이었습니다!”

“뭐라고요, 각하?”

“장군의 말이 맞았단 말입니다! 다섯 번째의 검, 그건 휘리 노이에스였습니다! 제기랄, 그리고 이제 검집에서 나온 그 검은 팔라레온으로 겨냥되었 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십시오!”

바스톨 장군은 잠시 책상 위에 놓여진 보고서를 집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하드루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팔라레온? 팔라레온이라고요?”

노장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드루스 대통령은 보고서를 나꿔채듯이 들어올리곤 직접 그것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4월 37일. 7,000으로 추산되는 소속 불명의 병력이 팔라레온의 스베이 요새를 공격. 스베이 요새 사령관(카드룩스 피나드)을 비롯한 1,500명 가량의 요새 주둔군 대부분이 사망한 일방적인 전투 후 스베이 요새 함락. 4월 39일. 소속 불명의 병력은 남하하여 스베이를 포위. 스베이 시장이 요구한 강 화 교섭에 응한 소속 불명의 병력은 자신들이 휘리 노이에스 장군에 의해 지휘되는 다벨 육군 제8군단임을 밝힘. 휘리 노이에스는 스베이의 무조건 적인 항복을 요구했고 스베이가 이를 거부하자 스베이 요새의 포로들을 스베이 성문 밖에서 공개 처형함. 이런 개자식! 스베이 내에는 7,000 에 달하는 다벨군에 맞설 만한 병력이 없음을 놓고 볼 때 이것은 빠른 항복을 요구하는 제스처로 판단됨. ‘당장 성문을 개방하지 않으면 힘으로 밀어 붙인 후 스베이 시민 전부를 도륙하겠다’는 의미로 판단한 스베이 시청은 공개 처형 1시간 후 무조건 항복함.”

대통령은 보고서를 집어던지고 다른 것을 들어올렸다.

“이건 5월 1일, 그러니까 나흘 전 스베이에 입성한 휘리 노이에스가 발표한 포고문입니다. 아직 다른 나라들에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겠지요.” 하드루스 대통령은 우울한 기쁨을 느꼈다. 사트로니아는 대사 소멸 후 모든 정보 수집력을 다벨과 다케온, 록소나, 팔라레온에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가장 먼저 이 포고문을 입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다벨 역시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제8군단의 이 기습 공격은 은근히 대륙 최고라고 자부해 왔던 사트로니아의 정보 수집력을 비웃는 처사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아무 내용도 없습니다.”

“예?”

대통령은 환멸스럽다는 듯이 포고문을 노려보았다.

“접속사와 문장 부호들 사이로 몇 개의 단어 비슷한 것들이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기엔 아무 내용이 없단 말입니다. 정보부가 이 미 법적 검토를 해봤습니다. 스베이를 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요구 조건이나 강화 제안 같은 것도 없습니다. 스베이만을 원하는 것인지 팔라레온 전체를 원하는 것인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 여기 정보부의 한 재기 넘치는 정보부원이 절망스럽게 끄적거려둔 낙서가 있군요. ‘요약하자면, 다벨 = 좋은 나라. 팔라레온 = 나쁜 나라.’ 예. 제가 보기에도 이게 이 포고문이라는 것의 핵심입니다. 팔라레온의 로드 데자크 도 이 포고문을 보곤 아마 어이가 없어서 화도 못 내고 있을 것 같군요.”

노장군 바스톨은 아직도 냉정을 되찾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팔라레온……… 쪽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그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건 겨우 나흘 전의 일입니다.”

“나흘 전? 그럼 어떻게 벌써?”

“패스파인더를 쓴 모양입니다. 벌쳐라던가? 뭐 그런 이상한 이름의 패스파인더에게 이 보고서를 부탁하고 막대한 대금을 지불했습니다. 하지만 이 번에는 정보부가 그런 끔찍한 비용을 쓴 것에 대해 칭찬이라도 해줘야 될 듯하군요. 뭐라 해도 레프토리아 회전 이후 처음 일어난 대규모 전쟁…………!”

하드루스 대통령은 자신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오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바스톨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국지적인 전투로 끝 날 것인지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애매모호한 포고문을 놓고 볼 때, 그들은 이것이 대통령의 말대로 레프토리 아 회전 이후 처음 발생한 대규모 전쟁의 서막일 가능성이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격 목표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모든 나라가 공 격 목표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스톨 장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오 왕자의 검이 모인 것일까요?”

대통령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해서… ……………. 대사가 소멸했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선 그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무사로 휘리 노이에스라는 가수를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가 다벨군을 이끌고 팔라레온을 공격해 들어갔단 말입니다. 젠장, 가수라니! 로드 데자크가 혼란 스러워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군요.”


물론 팔라레온의 데자크 공작은 총력을 기울여 황당해하고 있었다.

팔라레온은 다벨로부터 공격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벨이 스베이를 요구한 적도 없거니와 그들의 외교 관계에 특별한 흠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국경을 맞댄 나라는 모두 가상 적국 1호인 것이 당연하지만 이곳은 오 왕자의 땅이다. 데자크 공작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랄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벨의 그 사내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왔다. 적어도 그는 대륙을 정복하겠다 는 정신나간 야심 때문에 잠을 설쳐본 기억은 없었다.

그랬기에 데자크 공작은 메르데린 공작을 다섯 번째의 검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고, 그가 그렇게도 목놓아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전에 그 의 공격을 받게 되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데자크 공작의 평소 생각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그 친구, 사람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그 것은 그 외에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베이의 함락은 로드 데자크에겐 전혀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데자크 공작을 더욱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투란궁의 회 의실에 앉아 있던 로드 데자크는 씩씩거리며 조금 전 던졌던 질문을 반복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고?”

“예, 로드 데자크.”

로드 데자크는 차분해지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나더러 가수가 스베이 요새를 함락시켰단 말을 믿으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로드 데자크.”

“음 ᅳ 무어어억!”

로드 데자크는 터프한 사내였다. 데자크 가의 가신들과 팔라레온 기사들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화병 을 들어올렸을 때 재빨리 탁자 위로 엎드리거나 그 아래로 몸을 숨겼다. 가신들과 기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 화병은 벽난로에 부딪히며 물방울과 꽃 잎과 도자기 조각들의 불꽃놀이를 연출했다. 와장창! 퍽이나 서글픈 표정으로 레우스 산 고급 화병의 가격을 떠올리던 투란궁의 집사는 그의 주군이 또다시 레모 산 호박 문진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며 아찔함을 느꼈다. 집사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호박 문진의 값에 유리창 값을 더했고, 잠시 후 그 액 수에다가 약간의 치료비를 보태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유리창 밖을 지나가던 저 빌어먹을 녀석은 누구야?

깨진 유리창 밖에서 애처로운 비명이 울리고 나서야 로드 데자크는 겨우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로드 데자크는 들어올리던 의자를 도로 내려놓고 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팔 장군! 대책은?”

팔라레온의 방위를 담당하는 하팔 장군은 데자크 공작이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를 주의 깊게 살피며 데자크 공작은 의자에 거꾸로 앉은 채 등받 이에 두 팔을 올려놓은 자세였고, 그 자세는 퍽 많은 것을 시사하는 듯했다 천천히 일어났다.

“판도 기지와 반델 기지에 경계령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전군 비상령을 내리고 예비대 소집을 준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제가 직접 수도 방어군을 통솔하여 판도 기지 쪽으로 갈까 합니다. 그곳에서 판도와 반델의 병력을 결집시켜 다벨군에 대응하겠습니다.”

다행히도 로드 데자크는 의자를 집어들어 하팔 장군의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았다.

“장군이 직접?”

“그렇습니다. 정황을 판단하기 어렵거니와 7,000의 병력이라면 얕볼 만한 숫자는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자신, 검을 익힌 무사로서 전쟁터에 노래꾼을 보낸 다벨의 오만불손한 처사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애비 없는 작자에게 전쟁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가르쳐주고 싶 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데자크 공작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 팔라레온 무사의 대답이군! 좋소, 하팔 장군. 스베이에서 엉뚱한 노래를 불러댄 그 멍청이 가수를 본인에게 끌고 오시오. 내가 직접 그 작자가 불러야 될 노래를 결정해 주지!”

고문실에서, 비명으로 점철된, 팔라레온의 기사들은 군주의 뜻을 이해하곤 사납게 웃었다.

대응 방향이 결정된 후 데자크 공작의 전쟁 전문가들은 재빨리 대응 방식을 결정했다. 정예 수도 방어군인 투란 군단의 5,000 병력은 하팔 장군의 지휘 하에 판도 기지로 출동하며 그곳을 거점으로 다벨군의 다음 움직임을 경계한다. 그리고 반델 기지의 부대가 합류되는 대로 공세적 움직임을 취 한다. 즉각 공격에 나서지 않는 것은 봄이라는 시간적인 이유와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입수한 후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벨군, 혹 은 메르데린 공작이 원하는 것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 하겠다. 팔라레온은 그렇게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진 지한 대응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쟁의 겁화는 아직 남해의 바닷물을 흐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림의 바다는 오늘도 사파이어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면 위로 잔물결의 윤 무를 만들며 불어오던 미풍은 부두 창고의 건물을 타고 올랐다.

데스필드는 창고 지붕의 박공에 앉아 있었다. 경사면을 따라 두 다리를 마음껏 뻗은 채 부둣가의 선원들을 내려다보던 데스필드는 고개를 돌려 오스 발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노스윈드 당신은 당장은 교수대에 목이 걸린 난처한 꼴이 되어 있을 필요는 없겠군.”

“어째서 그런가요?”

오스발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데스필드와 같은 방향을 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데스필드와는 달리 즐거운 기분으로 주위의 풍광을 감상하고 있 지는 못했다. 떨어질까 봐 염려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붕 경사면에 앉아 있는 것이 즐겁지는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은 이곳까지 불려 올라온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데스필드에게 설명을 구하는 눈길을 보내었지만 데스필드는 파아란 하늘에 초점을 맞춰보며 셔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 다.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물고는 손을 비틀었다. 치익 -. 오스발은 데스필드의 반쯤 오므린 손바닥 안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지 만, 데스필드는 파이프에 불을 붙인 다음 손을 툭툭 털었다.

“그건 뭡니까?”

데스필드는 미풍 속으로 연기를 날려보내며 말했다.

“담배. 혼 족의 기호품이야. 연기를 마시는 거지.”

“혼족?”

“오늘 부둣가에서 웬 상냥한 선원 당신에게서 선물받았지.”

“밀수품인가 보군요.”

“아아. 여기로 올라오라고 한 이유 중엔 이놈도 있지. 이건 제국에선 금지품이야.”

“키 선장님을 매달 수 없는 이유는 뭔가요?”

“현재 노스윈드 당신의 목에는 밧줄이 감겨 있고 그건 양쪽으로 당겨져 각자 카밀카르와 다림이 쥐고 있지. 하지만 카밀카르와 다림 모두 상대방 당 신들이 당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당겨버릴 생각은 더더욱 없지.”

“짧게 비유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좀 길어도 좋으니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럴까. 그러지 뭐. 노스윈드 당신이 체포된 곳은 다림 수도원. 하지만 알다시피 그 체포 과정에서 다림 수도원의 누구도 나선 바 없음. 그리고 노 스윈드 당신을 체포한 주체는 카밀카르 대사관. 하지만 폴라 대사 당신은 노스윈드 당신을 다림 총독부에 넘겼지. 대사관엔 감옥이 없다는 건 좋은 핑계거리지. 그래서 현재 노스윈드 당신을 구금하고 있는 것은 다림 총독부. 하지만 총독부는 그저 키 드레이번을 맡았을 뿐이지. 제국의 공적 제1호 씩이나 되는 당신이 붙잡히긴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잡혔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가 없게 된 거야.”

“그건 압니다.”

“여기서 각자의 입장을 살펴볼까. 먼저 폴라 대사 당신은 그 암살건 때문에 노스윈드 당신을 살려둬야 해. 노스윈드의 이름을 판 그 암살자 당신들 의 진짜 정체가 명확해지지 않는 이상, 카밀카르 쪽에서는 섣불리 노스윈드 당신을 처형할 수 없어. 더군다나 그 카밀카르의 법무대신과 레보스호의 선원들의 문제도 있고, 공주님과 함께 붙잡혔다던 당신들 말이야.”

“아, 예.”

다림 총독부에서 관계자들을 소환하여 회의를 열었을 때, 폴라 대사는 멱살잡이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며 긴장을 단단히 한 채 회의에 참가했었다. 이 사태에 관계된 모든 자들이 자신이 키 드레이번을 잡았다고 외쳐댈 거라는 것이 그녀의 예견이었고, 만일 그랬다면 ‘다림의 큰누님’은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키 드레이번은 카밀카르의 것이라고 주장해 댈 충분한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글라두스 총독 주관으로 열린 회의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먼저,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한 핸솔 추기경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두들 어떤 신부가 교회의 보물을 이용하여 키 드레이번을 공격, 무력화시킨 것 을 알고 있었기에 교회의 침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키 드레이번을 쏜 것은 신부일지 몰라도 그를 체포하여 총독부에 넘긴 것은 카밀 카르’라고 주장할 각오였던 폴라 대사 역시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의 체포가 이뤄진 곳은 다림이고, 다림은 엄연한 레갈루스 식민지’라고 주장할 계획이었던 글라두스 총독 또한 머리만 긁어대야 했다. 사태가 그 지경이 되자 교수형 대신 그를 꽁꽁 묶어서 란셀로 보내야 되지 않을까 하 는 의견까지 나왔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말이 안 된다.

“명심해. 제국의 적이 아니고 제국의 공적이야. 공적이라는 건, 제국의 대표자인 황제 폐하 당신뿐만 아니라 제국인 당신에게라면 누구나 키 드레이 번 당신을 쳐죽일 의무가 있다는 의미지. 간단히 말하면 제국과 노스윈드 당신 사이엔 중립이 없다는 거지. 예를 들어 본인의 적은 오스발 당신과 무 관한 당신일 수도 있지. 그 경우 오스발 당신은 중립을 선언한 후 품위 있게 발뺄 수 있어. 하지만 본인의 공적일 경우엔 그게 안 돼. 오스발 당신이 본인과 더불어 그 공적과 싸우지 않는다면, 오스발 당신 역시 본인의 적이야. 그게 공적이라는 놈이지. 이 상황에선 황제 폐하 당신께서 처리하시옵 소서 어쩌고가 안 통해. 빨리 노스윈드 당신을 매달아야 하지.”

“그렇군요.”

“그럼 다시 폴라 대사님 당신의 경우로 돌아가볼까. 이미 말했듯이 이 사태에 관련된 당신들 중 노스윈드 당신을 가장 원하는 당신은 당연히 폴라 대사 당신이야.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폴라 대사 당신은 노스윈드 당신을 가질 수 없어. 카밀카르가 노스윈드 당신을 가지게 되면 카밀카르는 당장 노스윈드 당신을 처형해야 돼. 말했듯이 ‘공적’이니까. 그래서 폴라 대사는 입을 다문 거지.”

“아 이젠 이해가 됩니다.”

“그래. 사태가 진짜 죽여주는군. 하하하! 카밀카르는 레보스호의 인질 당신들 때문에 노스윈드 당신을 매달 수 없어서 재빨리 다림 총독부에 넘겨버 렸지. 글라두스 총독님 당신이 대해적 당신을 매다는 것을 꺼릴 게 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다림 총독부로서는 도로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카밀카르가 받지 않을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런 망신은 없으니까. 껄껄!”

“마지막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돌려주는 대신 그냥 처형할 수도 있잖습니까? 데스필드 씨의 말대로라면 키 선장님은 제국의 공적이니까 다림 총 독부는 마음대로 선장님을 처형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요.”

“키 드레이번 당신의 칼 이름이 뭐지?”

“예? 아…… 그렇군요.”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밧줄 두 개가 당겨지지 못하는 이유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밧줄의 나머지 한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 생각으론 그 밧줄의 끝은 세 개인 것 같습니다만.”

데스필드는 대답 대신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조그만 구름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이제 고개를 돌려 데스필드의 옆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교회의 침묵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난 거죠?”

“백점 주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교회는 왜 자신의 밧줄을 당기는 대신 침묵하는 겁니까?”

“짐작하는 바를 말해 봐.”

“교회가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겁니다. 키 선장님은 사법권이 닿기 힘든 교회 내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키 선 장님을 체포한 것이 카밀카르라지만 실제로 키 선장님을 무력화시킨 것은 파킨슨 신부님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사실을 지적하며 키 선장님의 인도를 요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림으로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겁니다.”

“계속해.”

“카밀카르 역시 교회가 나서서 키 선장님을 맡아준다면 훨씬 즐거워할 겁니다. 교회는 제국을 상대로 키 선장님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선 다림보다 는 훨씬 나을 테니까요. 그럼 카밀카르는 교회에 키 선장님의 보호를 부탁하고는 교회의 보호 하에 있는 키 선장님과 라스 법무대신님이나 레보스호 의 선원들에 대해 협상해 볼 수 있겠지요.”

“계속해.”

“더 없습니다. 저는 교회가 다림과 카밀카르, 심지어 키 선장님까지 괴롭히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 다.”

“이유를 알걸. 당신이 이유를 모른다면 지붕 아래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당신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오스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데스필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파이프에 남은 담배를 마저 태울 때까지는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가롭게 파이프 부리를 깨물고 있었다.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대사님께선 뭔가 짐작하시는 것이 있으신 듯하더군요.”

“그랬나.”

“그래서 이런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겁니까?”

“응. 풍경도 좋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데 신호는 뭐야?”

“뭐……… 특별한 신호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고함을 지르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입니까? 저를 인질로 하시려고요?”

“본인에겐 그럴 생각은 별로 없네. 그냥 떨거지 당신들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일세.”

“그럼 이야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폴라 대사 당신께서 어떻게 짐작하는진 모르지만 아마도 대사님 당신의 짐작이 맞을걸세. 파킨슨 신부님 당신의 잠적은 그 자신의 의지고 교회는 신부님 당신의 잠적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

“키 선장님을 쏘았다는 것 말고도 파킨슨 신부님은 교회를 침묵시킬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럼 저도 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들어볼까.”

“제 짐작은 이렇습니다. 그 암살은 교회의 계획일 수 있습니다. 카밀카르 필마온의 연대를 방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 암살을 막기 위해 파킨슨 신 부님이 키 선장님을 끌어들인 것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꺾일 수 없는 믿음을 위해, 그리고 파킨슨 신부님은 최후의 순간에 키 선장님 을 배신한 것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위험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파킨슨 신부님은 교회의 편에도, 카밀카르의 편에도 설 수 없게 되 셔서 잠적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암살을 방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을 바꿔 카밀카르에 서기엔 그분의 완고함이 용납하지 않으실 테니 까.”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겠군.”

“말씀하실 것은 그것뿐입니까? 데스필드 씨는 신부님의 전인이잖습니까?”

“본인이 신부님 당신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나온 건 맞아. 그런데 오스발 당신은 누구의 전인이지?”

“예?”

“오스발 당신은 폴라 대사 당신의 전인인가, 아니면 율리아나 공주님 당신의 전인인가?”

“저는, 율리아나 공주님의 노예입니다. 하지만 율리아나 공주님과 폴라 대사님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되는진 모르겠군요.”

“그럼 지금 분리해. 그리고 본인의 말을 경청해.”

“……듣겠습니다.”

“이 말은 폴라 대사 당신의 귀에는 들어가면 안 돼. 그래서 본인은 당신이 율리아나 공주님 당신의 전인으로 있기를 바라는 거야. 일단 오스발 당신 의 추측은 몇 가지 점에서 틀렸지만 그런 대로 맞아. 교회는 신부님 당신을 처리하기 전엔 입을 열 수 없어. 그리고 신부님 당신은 교회의 손에 처리 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비방하고 나설 생각도 없으셔. 이 상황은 고귀한 이상의 결말은 십중팔구 자승자박이라는 보편론의 좋은 증거가 되겠지. 그래서 신부님 당신은 최고의 패스파인더를 고용하여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어디로든 떠나버릴 생각이시지.”

“데스필드 씨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오스발은 웃고 말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신부님 당신의 전언을 전달하겠네. 빨리 카밀카르 로 돌아가. 이 항구에서 카밀카르의 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위험해. 그리고 카밀카르로 돌아가거든 아무 남자하고나 눈이 맞아버리라고 해.”

“……?”

“필마온과의 혼약이 깨질 수 있는 일은 뭐든 하란 말이야. 필마온으로 시집가 봤자 인질 꼴밖에 안 돼. 그리고 그 경우 무수한 세력들이 다가오지 않 은 위협을 두려워하게 될 테고 그 중엔 카밀카르 필마온 연합이 본격 가동되기 전에 필마온이나 카밀카르를 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신나간 당신 들도 있을 수 있어. 고국 아니면 남편이 위험해지는 거야. 미친 짓이지. 공주님 당신이 엄두가 안 난다고 하면 오스발 당신이라도 도와줘.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공주님 당신의 침실로 쳐들어가든지 해.”

“데스필드 씨, 제발.”

“농담이야. 무슨 뜻인진 알겠지.”

“예.”

“그럼 본인의 용무는 끝났어. 잠깐만.” 

그리고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턴 다음 다시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벌떡 일어난 데스필드는 허리를 몇 번 돌려보고 나서 말했다.

“고함을 지르게.”

“지금이오?”

“응. 본인은 준비 끝났어.”

오스발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고함을 질렀다.

“잡아라!”

다음 순간 지붕의 덧문이 열리며 카밀카르인들이 쏟아져……………라기보단 헉헉거리고 끙끙거리며 한 명씩 힘겹게 올라왔다. 오스발은 씁쓸한 기분을 느 꼈고, 데스필드는 히죽 웃으며 그 꼴을 감상했다. 카밀카르인들 역시 우아하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에 화내며 어떻게든 지붕 위로 올라왔고 저 아래쪽 의 문으로 달려나오는 자들도 몇 명 보였다.

데스필드는 빙긋 웃고는 박공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카밀카르인들은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르며'(설 거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서라!’ 내지는 ‘(멈출 거라 믿어지진 않지만) 멈춰라!’ 등의 고함을 지르며 데스필드의 뒤를 따랐다. 오스발은 데스필드가 어떻게 도망칠 작정인지 의아해했지만 달려가던 데스필 드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지붕 위에 놓아둔 것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곤 밝게 미소 지었다.

길다란 장대를 집어든 데스필드는 봉고도 기술을 이용하여 옆 창고의 지붕 위로 날아갔다. 카밀카르인들이 지붕 아래로 내려갈 생각도 못하고 바라 보는 가운데 데스필드는 순식간에 몇 개의 창고를 건너 갈매기처럼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폴라 대사는 화를 내진 않았다. 다만 빈손으로 돌아온 대사관 경비병들에게 씁쓸한 얼굴로 ‘내려가서 펌프질이나 하라고 명령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배에서 사용되는 의미, 즉 선창에 스며든 물을 퍼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폴라 대사는 자신이 ‘카밀카르 대사관호의 선장이라 고 여기길 좋아했고 그래서 선원 역을 맡아야 했던 카밀카르 대사관 경비병들은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채 지하 분뇨 저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폴라 대사에게 다림 총독인 글라두스의 초청장이 도착한 것은 그녀가 경비병들을 그런 처참한 지경에 빠뜨린 것에 대해 약간 후회하기 시작할 무렵 이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대사관 경비병들은 폴라 대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글라두스 총독의 초청장은 ‘물 좋은 다랑어를 구했으니 오셔서 저녁 식사나 하시길’이라는 내용이었다. 폴라 대사는 잠깐 미간을 찡그린 다음 ‘저는 와인을 들고 가죠’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었다. 황혼이 잔물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의 얼굴엔 더 짙은 음영이 떠오를 무렵, 카밀카르의 대 사는 수수한 치마에 보닛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 오른팔에 바구니를 낀 모습으로 대사관을 나섰다.

카밀카르 대사관에서 총독 관저까지는 대로를 따라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다. 폴라 대사가 짧은 산책 끝에 총독 관저에 도착하자 총독 관저의 하인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대사를 맞이했다. 폴라 대사는 와인이 든 바구니를 하인에게 건넨 다음 귀빈실로 걸어갔다.

귀빈실에 들어간 폴라 대사는 약간 놀랐다. 황혼 속에서 오렌짓빛으로 물든 귀빈실에는 글라두스 총독 이외에 두 명의 낯선 남자가 더 있었다. 한 남 자는 창가에 서서 바깥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탁자 위의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불을 붙이던 남자는 폴라 대사를 흘끔 바라보 았지만 곧 그녀를 외면했고, 창가에 서 있는 남자는 아예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폴라 대사가 잠시 문가에 서서 귀빈실 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벽난 로 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글라두스 총독이 반가운 얼굴을 하며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폴라 대사.”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독님.”

그리고 폴라 대사는 조금 더 놀랐다. 글라두스는 마치 두 명의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글라두스 총독은 두 남자를 소개하는 대신 손수 폴라 대사를 소파로 이끌었다. 저녁 식사보단 더 중요한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혼자서 찾아온 폴라 대사였지만 이 상황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다. 폴라 대사는 소파에 앉은 다음 잠시 글라두스 총독을 바라보았다. 글라두스 총독은 폴라 대사의 시선을 느끼곤 활짝 웃었다. 그러나 곧 다림 총독은 몸을 돌려 벽난로 옆에 세워둔 부지깽이를 들어올렸다. 웃기는 노릇이었다. 봄이라 벽난로 안엔 불이 없었으니까. 다림 총독은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머쓱한 표정으로 부지깽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림 총독은 두 손을 깍지 끼곤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총독의 입이 열렸다.

“다랑어요.”

“예?”

“아, 정말 괜찮은 다랑어를 구했소. 오늘 아침 시장에 나갔다가 손수 샀지. 대사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초청했소이다. 에ᅳ 그렇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림 총독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폴라 대사가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 테이블 가에 있던 남자가 슬쩍 다가왔다. 남자의 동작은 부드러웠다. 미풍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스르륵 움직인 남자는 총독의 의자 뒤에 서서는 천천히 등받이를 짚었다. 그 순간 폴라 대사 는 글라두스 총독을 깨끗이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오늘밤 그녀와 대화할 사람은 저 낯선 남자들인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폴라 대사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다림의 큰누님?”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요. 댁은?”

“하리야 헌처크입니다.”

폴라 대사의 머릿속에 있는 인명록이 파라락 움직였다. 하지만 폴라 대사는 각국 귀족이나 중요 인사들의 이름들 속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진 못했 다. 외교관으로서 좀 창피스러운 노릇이라 생각하며 빙긋 웃으려던 폴라 대사는, 그러나 그 웃음을 중간쯤에서 멈추곤 기겁했다.

“하리야 선장? 페가서스호의?”

“그렇습니다.”

폴라 대사는 가까스로 벌떡 일어나려는 동작을 멈출 수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붙이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또 한 놈은? 오, 제기랄. 폴라 대사의 짐 작대로 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어느새 문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폴라 대사는 그제서야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라이온?”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슈! 폴라 대사님. 오래간만이군요.”

“그렇군. 오래간만이야. 아직 안 죽었다니 놀라운데.”

폴라 대사와 라이온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란 건 글라두스 총독뿐만이 아니었다. 하리야 선장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라이온을 쳐다보았다.

“라이온? 자네 어떻게 폴라 대사님을 아나?”

“아, 대사님은 제 첫사랑이셨거든요.”

폴라 대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퍽 조숙했군. 내가 자넬 처음 봤을 때 자넨 일곱 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겨우 그것 때문에 절 받아들이지 않으셨던 것이군요!”

“관두지. 라이온. 항상 그렇지만 자네와 이야기하면 머리가 아파.” 폴라 대사는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저 젊은이의 감시자 자격으로 따라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는군요?”

자유호의 갑판장과 카밀카르의 대사의 허물없는 대화를 이채롭다는 듯이 바라보던 하리야 선장은 싱긋 웃으며 라이온을 좌절시켰다.

“정확합니다. 대사님.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어서 따라왔지요.”

“그럼, 당신들이 뭣 때문에 이 회견 자리를 만들어내었는지 들어볼까요.”

다림 총독을 인질로 삼으면서까지 말이야. 폴라 대사는 글라두스 총독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총독은 자신이 무시된 것이 확실해지자 그제서야 편안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글라두스는 다림의 총독이기 때문에 인질로서도 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울부짖지도 않았고 자신이 언제 풀려날 수 있는 지 계속 물어대지도 않았다. 대신 이 자리의 조용한 호스트 역할을 연기하는 듯했다. 그것은 다림의 총독이 늘상 하는 일이다. 분명히 주인이며, 손님 들의 동정을 바라보고 있지만, 절대로 헛기침은 하지 않는 것.

하리야 선장 역시 그 처신을 존중했다. 즉 글라두스 총독을 계속 무시한 채로 말했다.

“짐작하시겠지만, 나와 라이온은 우리들의 동료인 키 드레이번 선장의 일로 찾아왔습니다.”

“흐음. 듣던 대로 두목이라고 부르지는 않는군요. 그 자라면 조만간 목이 매달릴 텐데요.”

하리야 선장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폴라 대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님. 나는 풋내기로 취급되어도 상관없지만 대사님께서도 그러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폴라 대사는 해적에게 이렇게 세련된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키 드레이번이라는 친구, 이런 작자들을 부하로 데리고 있단 말이지? 그 것도 다스리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다스림받게 만들며?

“무슨 뜻인지 말씀해 보시죠.”

“나와 다른 동료들은 대사님께서 왜 키 선장을 총독님께 맡기신 것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대사님께서 우리들과 같은 생각으로 그 렇게 행동하셨다고 추측했습니다. 키 선장을 일단 살리기 위해서죠.”

“하하. 그런가요? 내가 왜 키 선장을 살려야 된다는 거죠?”

“우리들을 방문중인 카밀카르의 손님들 때문이죠.”

·로드 라스는 잘 계시나요?”

“예, 잘 계십니다. 이미 율리아나 공주님께 들으셨을 거라 생각되지만 서 슈마허의 경우엔 우리들과 동행하여 다림 가까운 곳까지 와 있습니다.” 이로써 하리야 선장은 슈마허의 안부를 들려줌과 동시에 노스윈드 해적들이 다림을 포위중이라는 암시를 전달하는 데도 성공했다. 글라두스 총독의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내게 키 드레이번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다면.” 

폴라 대사는 짐짓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속으론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왜 치외법권 지대인 대사관에 그를 감금하지 않고 총독부에 인도했다는 거죠?”

“그 경우 다림으로부터 키 선장님을 지킬 수는 있어도 제국으로부터 키 선장님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요. 카밀카르가 제국의 공적을 오랫동안 감금 해 둘 수는 없고, 따라서 즉각 그를 처형하셔야 할 겁니다.”

“그런가요?”

“예. 그래서 대사님께서는 글라두스 총독님을 괴로움에 빠뜨리기로 결심하신 겁니다. 총독님 또한 대사님처럼 키 선장을 처형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기에 그분께 짐을 떠넘기신 거죠.”

글라두스 총독은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폴라 대사는 아직 게임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여자들이 흔히 남자에게 그러듯이? 흐흐흐. 좋아요. 내 경우엔 인질이 있어서 키 드레이번을 죽일 수 없다고 치죠. 그럼 다림은 왜 키 드레이번을 처형할 수 없다는 거죠?”

“곤란함과 위험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껄껄. 곤란함부터 말해 보시죠.”

“다림은 뱀과 오소리의 동면굴입니다. 뱀과 오소리가 같은 굴 안에서 겨울을 잘 보내려면 서로 물어뜯지 말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림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키 드레이번 처형’은 그곳을 이용하는 밀수선이나 암거래상, 해적선 등을 당황하게 만들 겁니다. 음성 무역이 경색되며 다림의 부(富)는 파도 거품처럼 사라지겠죠. 심할 경우, 무법자들은 다림을 존중해 줄 이유가 없다고 생 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다림은 매력적인 곳입니다. 보화는 넘치지만 지키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 그럼 위험은?”

“키 드레이번이 잡혔기 때문입니다.”

“으흠?”

“부연할까요. 키 드레이번이 잡힌 것이지 노스윈드 함대가 잡힌 것은 아닙니다. 키 드레이번이 처형될 경우, 노스윈드 함대는 그의 몸이 식기 전에 다림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힐 겁니다.”

글라두스 총독은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리야 선장의 어조는 침착했고, 폴라 대사는 상대방이 진짜 그럴 작정임을 실감나게 알 수 있었다. “심장에 동상 걸릴 지경이군요. 하리야 선장. 하지만 묻겠는데, 고작 여덟 척의 배와 몇천 명의 해적으로 다림을 파괴하겠다는 건가요? 다림을 파괴 할 경우 이곳에 대사관이나 실무 관계를 두고 있는 수많은 나라 전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텐데?”

“지금은 적이 아닙니까?”

하리야 선장은 짧게 대답했다. 폴라 대사는 한숨을 쉬곤 라이온을 돌아보았다.

“이 분은 진짜 그럴 작정인 것 같군. 농담하는 눈이 아냐. 자네가 물들인 거지?”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마이 달링?”

“이 노인네 심장마비 걸리겠다, 적당히 해라. 좋아요, 하리야 선장. 당신이 좇는 별은 뭐죠?”

“키 드레이번의 석방을 원합니다.”

“흐음…… 이거 한번 지적해 볼까요. 조금 전 끔찍한 말을 하긴 했지만 당신들은 현재 배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하리야 선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폴라 대사는 자신에게 넘어온 주도권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이 항로를 오가는 카밀카르의 배들이 노스윈드 선단을 발견했다면 그건 당장 내 귀에 들어왔을 테지요. 댁이 말했듯이, 다림의 큰누님인 내 귀에. 따라서 당신들의 배는 상당히 먼 곳에 있어요. 배 없는 해적의 협박은 무서울 것이 별로 없을 듯한데? 당신들이 배로 돌아가기 전에 잡아버리면 그만 이잖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을 초청한 것입니다. 대사님. 키 선장의 석방은 총독님께 부탁드리면 되는 거죠. 나는 당신에게 다른 것, 하지만 관련된 것을 원합니다.”

“쳇. 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어, 젠장. 라스 법무대신과 레보스호의 선원들?”

“그렇습니다.”

폴라 대사는 팔짱을 단단히 끼며 하리야 선장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그런 멍청한 거래에 응해서 당신들을 놔줘야 된다는 거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동포를 잃는 것이 슬픈 일이긴 하지만, 키 드레이번을 다시 놓아줄 경우 그 자가 우리에게 입힐 피해는 주님께 맹세코 훨씬 더 클 거예요. 맙소사, 노스윈드를 다시 열린 바다로 내보내 준다고? 내 동포들은 내가 그런 거래에 응한 것을 알게 되면 동포를 구했다고 좋아하기에 앞서 키 드레이번을 풀어준 것에 대해 더 화를 낼 것이 확실해요. 아시겠어요? 우리 카밀카르인들이 동포의 목숨에 무관심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그 선원들의 가족 이나 미망인들에겐 국왕 전하께서 모두 보상할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테지요. 하지만 바다에 나온 카밀카르 인들은 이미 카밀카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요. 그들도 조국을 위해 죽게 된다는 사실에 만족해할 거예요! 자, 이제 내가 그들과 그들의 가족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이유를 말해 보시지?”

하리야 선장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과 공주님은 바랄 텐데요.”

“젠장! 당신들 몇 명이나 되는데요?”

“아시잖습니까. 공주님이 말하셨을 테니. 카밀카르 대사관의 방해쯤은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인원은 됩니다.”

폴라 대사는 혀를 찼다. 도대체 시간을 아끼자느니 어쩌니 했던 본국의 얼간이는 누구였을까. 공주를 빨리 카밀카르로 보냈어야 했는데. 잠깐, 지금 이라도 아무 배에나 태워보낸다면………… 그러나 하리야 선장은 폴라 대사의 속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말했다.

“공주님을 이곳에서 탈출시키실 생각이라면 포기하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바다 위에서 자유호나 질풍호를 따돌릴 수 있는 배는 없습니다. 다림의 큰누님이시라면 그 정도는 아시겠지요. 시간이 약간 걸릴진 몰라도 공주님을 태운 배가 카밀카르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충분히 침몰시킬 수 있습니 다.”

“자랑스럽겠군요.”

폴라 대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선 생각에 잠겼다.

다림은 키 드레이번을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처형할 수도 없다. 따라서 글라두스 총독은 선선히 키 드레이번을 해적들에게 내줄 것이다. 하리야 선장이 폴라 대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침묵이었다. 하리야 선장은 현재 노스윈드 선단의 선장들이 다림 근교에, 즉 육지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누설하 여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는 말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레보스호의 포로들 전원을 살해함과 동시에 다림 에 난입하여 율리아나 공주까지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덧붙여서. 폴라 대사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좋아요. 난 당신네들이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럼, 글라두스 총독님?”

글라두스 총독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요?”

“키 선장이 수감된 장소를 가르쳐주십시오. 저희들이 언제쯤 습격하면 좋을지도.”

“습격? 아, 그렇지. 습격하셔야지. 음음. 우리가 내어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암.”

하리야 선장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라두스 총독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조용한 호스트 체질이었다.


“저것 좀 봐. 저게 키 드레이번이야.”

“쉿! 조용히 해. 듣겠어.”

“들으면 어쩔 거야.”

하지만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간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불안한 듯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간수들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를 중심으로 사방의 벽에 창살 감방이 배치되어 있었다. 죄수에게 사생활이란 없는 것이다. 다른 감방들은 모두 비 어 있었고,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은 출입문 반대편의 가장 큰 감방에 앉아 있었다. 간수들은 그를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팔다리에 강 철 수갑과 강철 족쇄를 채워놓았다. 키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목을 무릎에 얹은 채 돌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간수는 그 모 습을 보곤 조금 안심한 투로 의자에 앉은 동료 간수에게 말했다.

“저것 봐. 꼼짝도 못한다고. 넌 도대체 뭘 겁내는 거야?”

“무서워한다고? 흐응. 그래. 무서워해. 이 몸은 너와는 달리 상상력이라는 것이 있거든.”

“무슨 말이야?”

“멍청한 자식.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키 드레이번이 곧 노스윈드 선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 아. 우리가 잡아두고 있는 건 노스윈드 선단의 한 선장일 뿐이라고. 노스윈드 선단엔 키 드레이번만큼은 못 되더라도 무시무시한 놈들이 시시해. 사트로니아의 오닉스 나이트나 질풍의 트로포스 몰라? 자마쉬의 돌탄은 어때. 그놈은 해골을 바닥짐으로 쓴다지?”

“아…… 젠장!”

상상력 풍부한 간수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제길. 왜 빨리 처형해 버리지 않는 거지? 난 저놈이 여기 있는 것이 싫어. 언제 다른 해적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단 말이야.”

“어, 그런데 자마쉬의 돌탄은 진짜 해골을 바닥짐으로 쓴대?”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놈은 완전히 미친놈이라니까. 언젠가 레갈루스의 선장 한 명이 그랜드파더호에 잡혔어. 레갈루스의 선장들이 어떤 작자들인 지 알지? 그렇지. 그 선장도 대가 센 사내였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돌탄을 모욕했거든. 돌탄의 발치에 대고 침을 뱉었단 말이야. 해적들이 그 자를 쳐 죽이려고 든 건 짐작하겠지? 그런데 돌탄은 그를 살려두라고 명령했어. 대신 배 밑바닥에 가두라는 거였지. 배 밑바닥으로 끌려간 선장이 본 건 바닥 가득히 쌓여 있는 해골이었어. 그 선장은 그때부터 해골과 함께 생활해야 되었지. 기분 죽여줬을 거야. 파도가 치면 해골들이 춤을 추고 눈만 붙이면 귀신들이 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한 달 뒤에 그 선장은 몸값을 지불하고 돌아왔는데,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지. 자기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쳐 있었단 말이야.”

돌탄 선장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해골을 어떻게 바닥짐으로 쓴다는 것인지 이해하질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의 사내들이 라면 누구라도 이 이야기엔 헛웃음을 지을 것이다. 해골은 부피에 비해 무겁다고 보긴 어려운 물건이다. (일단 속이 비어 있다.) 하지만 간수들은 모두 바 다의 사내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돌탄 선장의 죄많은 영혼과 그 악덕에 대해 진심으로 개탄스러워했다. 그리고 나서 간수들은 노스윈드 선단 의 다른 선장들이 섭섭해할까 봐 두렵다는 듯이 그 선장들의 전설적인 악업을 차례로 도마에 올려놓고 썰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 즐거워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시들해졌다. 키 드레이번은 무섭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간수들은 그 침묵이 바닥 없는 늪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빨아들이 고 있음을 깨달았다. 책상에 앉아 있던 간수는 몇 번인가 이야기를 다시 이어보려다가 실패한 다음 키를 훔쳐보았다. 그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떠 올렸다는 듯이 의자에 앉아 있는 동료를 쳐다보았다.

“이봐, 그런데 그 칼은 아직도 교회 바닥에 있다고?”

“그거? 진짜 처치 곤란이야. 저 친구가 아니면……!”

고개를 돌리던 간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키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매섭게 번득이는 눈은 불길 같았다. 

“이 제기랄 자식! 어딜 그 따위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간수는 책상 옆에 놓아둔 물통을 들어올렸다. 간수는 한달음에 창살 앞으로 달려가서는 창살 안쪽을 향해 물통을 휘둘렀고 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촤아아악! 키의 상체가 순식간에 물에 젖었다. 간수는 빈 물통을 팽개치고는 으스대듯 창살 안쪽을 노려보았다.

철그럭. 키의 손이 움직이며 강철 쇠사슬들이 둔한 신음을 흘렸다. 키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의 물을 훔쳐내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 리고 키의 눈꺼풀이 다시 열렸다.

그 눈길은 더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간수는 잔뜩 분노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열쇠 꾸러미를 움켜쥐기는 했지만 그것을 풀어내지는 않았다. 간수 는 갑자기 자신이 저 문을 열고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노스윈드가 저 안에 있다. 간수는 불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강철 수갑과 강 철 족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의 동료가 그를 제지했다.

“이봐, 멈춰! 무슨 짓이야.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내가 왜 못 들어간단 말이야!”

“가, 간수장님 허락 없이 감방문을 열면 안 된다고!”

“제기랄!”

간수는 과장된 동작으로 열쇠 꾸러미를 놓고는 다시 물통을 집어들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명의 간수들은 간수장의 허락이 있었다면 저 안 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따위에 대해서는 서로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통을 내려놓은 간수는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간수들은 기겁하며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신부였다. 어리둥절해 하던 간수들은 신부의 등뒤로 간수장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간수장은 신부를 안내하며 들어와서는 키 드레이번의 감 방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원장님.”

간수들은 원장님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신부는 후드를 뒤로 넘겼고 그러자 다림 수도원의 도리언 수도원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간수들은 급히 인사 를 올렸지만 도리언 원장은 간수장을 쳐다보았다.

“자리를 비켜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간수장은 두 간수들에게 손짓했다. 간수들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고 그 중 상상력이 풍부한 간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간수장님……?”

“어서 나와! 고해성사란 말이다.”

“고해성사요?”

“저 해적놈이라도 죽기 전에 고해는 해야 할 것 아니냐.”

키 드레이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글라두스 총독은 울상이 된 얼굴로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오늘 낮부터 무슨 이따위 손님들만 찾아오냐는 것이 총독의 심정이었지만 그 걸 입 밖에 내어놓을 수는 없었다. 조금 전 글라두스 총독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핸솔 추기경이 좀 일찍 내방하여 그 해적들과 맞닥뜨 리기라도 했다면 어쩔 것인가. 총독은 그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 글라두스 총독은 그런 행운도 까맣게 잊은 채 두 손을 떨며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예. 추기경 예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만……”

“글라두스 총독. 난 교회를 대신하여 당신에게 권고하러 온 거요. 총독은 레갈루스의 신료이자 제국의 신민이오. 그런 당신이 왜 제국의 공적 제1호 의 처형을 지금껏 늦추고 있는지 나로선 이해가 되질 않소. 지금이 며칠째요, 도대체!”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워낙에 게으르고 우둔한 자인지라 일처리가 말끔하지 못하여 추기경 예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백번이고 천번이고 사죄드립니다.”

“당신의 사과는 필요없소. 도리언 수도원장은 관례대로 그와 하룻밤을 보낼 거요. 주님이 그에게 임하시길. 그러니 내일 아침 그를 당장 처형하시 오. 그리하여 제국의 기강의 엄정함을 만방에 떨치는 것이오.”

“내일 아침이라니, 저, 아무리 그렇더라도 재판도 없이 어떻게……”

쾅! 핸솔 추기경은 책상을 내리쳐 총독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기겁한 글라두스 총독의 머릿속으로 간신히 자신의 실수가 떠올랐다. 키 드레이번에겐 재판이 필요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재판을 거쳤으니까. 키 드 레이번은 무수한 나라에서 열린 무수한 궐석 재판에서 이미 다양다종한 판결을 받았던 참이었다. 그 판결들을 다 실시하려면 사람을 수백년 동안 살 릴 재주와 죽었던 자를 몇 번이고 되살리는 마법이 필요해질 판이다. 각국의 재판부로부터 받은 형량이 총 990년, 무기징역이 두 건, 사형이 네 건. 키 드레이번의 몸에 걸려 있는 처벌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제국의 공적 제1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노마(馬)가 지극히 우둔하여 터무니없는 실언을 하였습니다.”

“그에겐 재판이 필요없소. 당장 교수대 설치를 명하고 포고문을 작성하시오. 내일 아침까지 교수대 설치가 끝나야 하니 시간이 없소! 당장 실행하시 오!”

글라두스 총독은 기절하고 싶어졌다. 그의 머릿속으로 하리야 선장의 경고가 뚜렷이 떠올랐다.

‘키 드레이번이 처형되면 다림은 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상반된 두 개의 사상이 하나의 머릿속에 있기는 항상 어렵고, 그래서 글라두스 총독은 눈앞에 직면 한 현실, 즉 키 드레이번을 처형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었다.


도리언 원장은 헛기침을 한 다음 간수들의 의자를 들어올렸다. 키 드레이번의 감방 앞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은 원장은 다시 마른 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다림 수도원의 원장 도리언이오.”

“내 입을 막을 셈인가.”

도리언 원장은 이렇게 빠른 대화를 예상하진 못했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시오?”

“내 입을 막아도 파킨슨의 입은 남아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막을 셈이지?”

도리언 원장은 뭐라고 말할 듯이 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도리언 원장은 입을 다문 채 후드를 내려쓰고는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소매 속에서 성전을 꺼낸 도리언 원장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책끈을 당겼다.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친 도리언 원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오 랜 세월 성전을 봉독해 왔던 도리언 원장의 목소리는 꽤 듣기 좋았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종 부성사에 사용되는 구절이 아니었다.

“뭘 읽고 있는 건가. 날더러 침묵을 서원하라는 건가?”

・내 입술이 흠정진리를 좇지 못하고 내 혀가 주님 영광을 노래하지 못한다면, 그 입술과 그 혀가 맺는 것들이 아무리 아름다울지언정 까막까치 의 새된 울부짖음에 다를 바 없으리니……”

“닥쳐!”

도리언 원장의 손이 움찔했다. 도리언 원장은 고개를 들기 전에 심호흡을 짧게 해야 했다. 키 드레이번은 두 눈을 불태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도리언 원장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키 드레이번. 나의 형제여. 당신의 불안을 이해하오. 하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라오.”

“무슨 말이지?”

도리언 신부는 더 쉽게 말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키 선장. 누구나 죽는 법이오.”

“그렇더군. 그런데?”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도리언 신부는 이 짧은 대답에 담긴 무서운 의미를 깨닫곤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당신 말대로, 죽여보니까 누구나 죽더 군.’ 그리고 그가 키에 대해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키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독한 독신이로군. 하긴, 그렇잖았다면 단신으로 다림에 뛰어드는 만용을 부리진 못했겠지.”

“까막까치의 비명을 질러대는 건 그쪽인 것 같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키 드레이번. 당신은 내일 아침에 처형될 것이오.”

“그래서?”

도리언 원장은 기가 막혔지만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마지막 밤을 지켜주기 위해 찾아온 거요. 내일 아침 당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감방을 나설 수 있도록.”

“사형수에게 그렇게 해준다는 말은 들었지. 진짜 그렇군.”

도리언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키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덧붙여 무슨 짓을 하든 살아날 수는 없으니 교수대에 올라가서 헛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죽는 편이 낫잖느냐는 말도 하겠지. 그래서 침묵의 미덕을 주절거리는 구절을 인용했을 테고.”

이놈, 영리하군. “어쩌시겠소?”

“그렇게 하겠다면 조용히 꺼져줄 텐가? 침묵 대 침묵이야. 공평하다고 보는데. 침묵 대 침묵이니까, 다른 놈도 들어오면 안 돼.”

도리언 원장은 키가 내세운 조건에 당황했다. 그의 말대로 그건 공평한 요구였고 소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도리언 원장은 믿기가 어려웠다.

“교회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죽는 대신 원하는 것이 죽기 전 몇 시간의 고독이란 말이오?”

“그렇다.”

키는 체념하는 것도, 비아냥거리는 것도 아닌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심지어 도리언 원장은 자신이 뭔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좋소. 그럼 한 가지 더, 당신의 검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 주시오.”

“그건 어디 있나?”

“예배당 바닥에 그대로 있소. 어느 수사의 목에 꽂힌 채로.” 키는 피식 웃었다. “그래요. 어떤 수사가 그 검을 집어들었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손 써볼 새도 없이 자신의 목을 찔렀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짐작할 텐데?”

“전혀 짐작하지 못하오만.”

“그 검을 가질 생각을 하니 짐작하지 못하지. 돼지 같은 놈. 제국 기사단에 연락해.”

“아-!서 브라도………….”

도리언 원장은 짧은 신음을 내며 얼굴을 붉혔다. 키의 지적은 정확했다. 도리언 원장은 어떻게 하면 그 명검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 지 그 검의 원주인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복수의 저번 주인이었던 브라도 경이 그 검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하다. 교회는 원래부터 그것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무사가 아니었던 도리언 신부는 또다른 사실을 놓치고는 여전히 멍청한 질문을 했다.

“그럼 물러나겠소. 약속을 지킬 거지요?”

도리언 원장이 검을 약간이라도 쥐어봤다면 이렇게 무례한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검을 가져갈 사람을 지적한다는 것은 무사로서 남길 미련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 당연한데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도리언 원장을 쏘아보던 키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그 사실을 설명해 주 었다. 다시 한번 수모를 겪은 도리언 원장은 더 이상 말할 여력도 잃은 채 황망히 감방을 빠져나왔다.

감방 문이 닫히자 키는 잠시 텅 빈 감방을 둘러보았다.

지금껏 계속 떠들며 그를 훔쳐보던 얼간이 간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키는 더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키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무릎 위에 두 팔을 얹고는 감방 바닥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높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오는 별빛이 고독한 사내의 등에도 떨어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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