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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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2화


키는 선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들어와, 일항사.”

식스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어쨌든 자유호에서 ‘노크’라는 예의를 정확히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그도 알고 키도 아는 사 실이었다. 그래서 식스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의 선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키는 식스를 흘끔 돌아보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식스는 키가 챙기고 있는 가방을 보며 그만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엄격함 따위 개나 줘버리고 바닥에 몸을 던져 뒹굴며 옷깃을 물어뜯지 않은 것은………… 그가 엄격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장님?”

“배낭을 챙기고 있다.”

“이건 배신입니다.”

“그런가?”

“나는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

말끝이 심하게 갈라졌다. 키는 식스를 돌아보았고, 그제서야 일항사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칼을 보게 되었다. 예리한 데샨 카라돔 대거. 조그마한 검 이었지만, 식스는 그것을 랜스나 되는 것처럼 꽉 움켜쥐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손가락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키는 배낭을 놓고는 의자에 똑바로 앉 았다. 그러곤 책상에 팔을 얹어 턱을 괴며 말했다.

“서면 좋겠나? 아니면 앉아 있을까?”

식스는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키는 식스의 오른팔이 위로 휙 올라가는 것을 무감동하게 바라보았다.

팍! 단검이 책상에 꽂히며 둔한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키는 약간 어정쩡한 어투로 질문했다.

“손목 괜찮은가?”

“……아파 죽겠습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키는 고개를 끄덕였고 식스는 손목을 주무르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곤 자신이 꽂아넣었던 대거를 바라보며 한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주는군. 일항사.”

“잊어주십시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용건을 말해 보게.”

식스의 흥분은 싹 가셨다. 그래서 식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아시는 사실을 열거하겠으니 용서하십시오. 선장님께서는 미노 만에서도 함대를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선장님을 따라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림에는 거기까지 따라갔던 그 사람들도 버리고 홀로 잠입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린 다림을 공격하여 선장님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함 대를 탈퇴하시겠다고요?”

“그렇게 말했다.”

“우리를 다 버리고?”

“가진 적 없다.”

・선장님께 우리들은 도대체 뭡니까!”

“너희들에게 나는 도대체 뭔가.”

“당신은ᅳ!”

식스는 입을 다물고 키 드레이번을 바라보았다. 키의 눈을 바라보던 식스는 그 눈동자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키는 가끔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는 눈동자 속의 귀신에 대해 말했다. 식스는 자신이 귀신들이 춤추는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흠칫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식 스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식스는 대답을 떠올렸다.

“거울입니다.”

키는 아무 말 없이 식스의 설명을 기다렸다. 생각을 정리해 가며 말하느라 식스의 말은 조금 느렸다.

“선장님은 거울입니다. 아무도 선장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선장님께 비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리야 선장님은………… 그렇습니다. 선장님께 왕을 비춰보았고 그래서 왕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부정하겠지만.”

“재미있는 말이군. 그래서?”

“선장님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키는 식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식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그 시선을 피했다. 키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지 만 그곳엔 싱잉 플로라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 알버트 선장에게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사가 -.

“대사에게는 인간이 필요하다.”

“예?”

“다림 총독부와 적당히 협의해서 사형수나 노예를 그녀에게 공급하도록. 그렇게 자주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일은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네가 싫다면, 이곳을 뜨고 싶다면 하리야에게 그 일을 넘기도록. 어차피 그녀는 하리야를 도울 테니까.”

식스는 혐오감과 공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공포가 그에게 찾아들었다.

“제게 부탁하신다………… 기어코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선원들에게는 내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준 다음 모두 해산시켜라. 그들이 해적질을 계속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건 그들의 자유겠지 만, 이 배는 사용할 수 없다. 이 배는 이곳에 정박시켜 두도록. 하리야에게도 그렇게 말해 놓았다.”

식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식스는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꽂힌 데샨 카라돔제 대거를 바라보았다. 예리한 날의 만곡한 선은 마치 여인의 다리 같 다. 아름다운 검이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보인다.

식스의 손이 움직인 순간 키의 손도 빠르게 움직였다.

식스는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단검을 쥔 그의 오른손을 키의 커다란 손이 덮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자세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짧은 눈 빛들이 언어를 부끄럽게 만들며 교환되었고, 식스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키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식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라이온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젊었을 땐 그랬을 거라 생각하네.”

“선장님의 배를 지키겠습니다.”

이번엔 키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식스는 대거를 다시 빼어들며 일어났다.

“돌아오시는 그 날, 저는 선장님께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자유호를 그 어떤 배보다도 잘 간수했기에. 다른 선원들이 모두 떠나도…………”식스의 목소 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주 잠시 동안. “저는 물수리호의 선원들의 예를 본받겠습니다.”

“미련한 짓이다.”

“선장님께서 비춰주신 겁니다. 저는 그런 놈이죠.”

식스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엄격한 사내다운 동작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기 전 식스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 다.

“소란을 떨어 죄송합니다. 그럼.”


하리야 선장은 멍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여다보았다. 두캉가 선장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지만 그는 하리야의 몫까지 자신이 마셔야 된다고 믿는 것처럼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술잔 속으로 쏟아지는 흑갈색 술은 차갑고 투명해 보였다. 하리야는 문득 발이 시렵다는 생각을 했다.

부둣가의 주점은 어둡고 고요했다.

이런 주점을 찾는 억센 선원들은 노스윈드 선단의 두 선장을 보고서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란을 떠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고요함이 지나 쳐 달빛이 창가로 스며드는 소리가 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점인지 교회인지 혼동될 정도는 됐다. 하리야는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두캉가 선장의 볼은 너무 붉어져 꼬집으면 툭 터질 것 같았다.

“국왕이 된 것을 축하한다. 껄! 통치 재미있기를 바란다? 껄껄 -꺽!”

키의 말을 되뇌던 두캉가는 잠시 격한 딸국질을 했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시고서야 딸꾹질을 진정시킨 두캉가는 덕분에 혀가 풀린 목소리로 말하게 되었다.

“그렇다구. 내가 그랬지? 자네 운명이나 내 운명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흐응. 그렇게 되는 거라니까. 내가 그랬지? 껄! 나도 축하하겠네, 하 리야. 우킥!”

“축하받고 싶지 않습니다. 두캉가 선장. 난 국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그 모든 준비는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하리야?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단 말이야.”

“키 선장님을 위한 것이었죠.”

“꺼ᅳ윽. 더 정확하게 말해 봐.”

“예?”

“더 정확하게 말해 보라고. 키를 왕으로 만드는 계획이 키를 위한 것이었나, 자네를 위한 것이었나?”

하리야는 이것이 술주정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닌 듯했다. 그래서 하리야는 자신 속에 침잠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특별히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없다.

“따지자면, 저를 위한 것이었겠죠. 제 만족…………, 그를 왕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키는 그것을 그대로 자네에게 돌려줬지. 누굴 죽이려는 작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돼. 누굴 왕으로 만드려는 작자는 자기가 왕이 될 각오를 해야 되고. 이핫!”

“저는 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는 제국의 공적 제1호지만 저는 아닙니다. 한마디로, 저는 우습게 보일 거란 말입니다. 제국은 신생 왕국을 입김 한 번으로 날려버릴 겁니다.”

“그럼 어때. 우리에겐 배가 있고, 열린 바다도 있지. 골치 아프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배를 타고 떠나버리면 되잖아. 하하하! 뭐가 걱정인가.”

“그런 무책임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리야는 고요하던 주점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진 것을 느끼며 말을 끊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하리야는 문 쪽에서부터 즐거운 소란이 일어나 주점 안 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바라본 두 선장은 동시에 주춤했다.

주당들이 술을 잊었고 선원들이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문가에 선 하얀 여자는, 하얀 옷에 새벽비 같은 실버블론드의 그녀는 이 어둡고 꾀 죄죄한 주점에서 퍽이나 어색한 모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배경이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어린 아기가 그러하고 새의 깃털이 그러하듯, 경솔하게 휘파람을 불었던 사내는 때려 죽일 듯한 시선의 포화 속에 오그라들었다. 그때 하얀 여자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주점의 주인이 당황하여 그녀를 제지했다.

“에, 레이디. 어딜 잘못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하얀 여자는 주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인장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시선을 낮추었다.

“이곳은 숙녀분이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의 뱃놈들과 술주정뱅이들은 만취 상태에서 아가씨의 환상을 보긴 하겠지만.”

하얀 여자는 빙긋 웃었다. 그때 하리야는 두캉가 선장이 팔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 동행이오. 주인장!”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주인장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노스윈드 해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겁했다. 그리고 이 하얀 레이디에게 날씨에 관한 중 요한 정보를 전달해 보려고 필사적인 눈빛을 보내던 뱃사람들과 주정뱅이들 역시 어깨를 움츠리며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하얀 여자는 주인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보내곤 두 선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주점 안의 사내들은 모두 그녀의 뒤쪽으로 하얀 궤적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리야가 망설이고 있을 때 두캉가가 벌떡 일어나 그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대사는 두캉가가 당겨준 의자에 조용히 앉았고 두캉가는 함박웃음을 지 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두캉가에게 감사의 미소를 건넨 대사는 하리야를 돌아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못마땅한 얼굴이군. 하리야 선장.”

“…………식인 괴물이 앞에 있는데, 당연하잖소.”

퉁명스럽다기보다는 으르릉거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잔인무도한 해적이고.”

“먹지는 않아!”

“죽이기는 한다는 말이군.”

“내가 그랬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시체를 모욕한 적은 없소!”

“먹는 것이 모욕이라면, 그럼 넌 하루 세 번 음식을 모욕하는 건가?”

대사는 목소리를 전혀 높이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하리야는 말을 멈추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대사를 노려보았고,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두캉가 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이봐, 하리야! 무례하지 않은가. 이렇게 찾아주신 분에게. 아아, 대사님, 이곳까지 저와 이 친구를 찾아오신 거 맞죠? 이거 반가운 노릇이군요. 어 이! 이봐, 주인장! 잔 하나하고, 에, 대사님? 술 드십니까? 아, 예. 어이, 주인장!”

두캉가는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하리야와 대사가 잠시 말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바라미는 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의 촛불을 바라보았고 하리 야는 촛불에 비친 바라미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두캉가도 영원히 소란을 떨 수는 없었다. 술병의 밀봉을 뜯어낸 두캉가는 바라미의 잔에 술 을 채우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리야의 잔을 채우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리야 역시 두캉가처럼 수평선 너머까지도 내다보는 노련한 선장이 었고, 그래서 그 눈짓을 단번에 이해했다. ‘조용히 하라구, 하리야. 건국이 기정 사실이라면 노스윈드 선단이 식인 괴물을 데리고 있다는 소문 같은 건 도움될 게 하나도 없어. 신비한 미녀가 훨씬 낫지.’ 하리야가 이해했음을 확인한 두캉가는 다시 바라미를 바라보며 큼직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쩐 일로 이 늙은 뱃놈들을 찾아오셨습니까, 대사님?”

“바라미.”

“예?”

“내 이름 중 하나다. 라미라고 부르면 되겠군.”

“아, 그러신가요? 라미, 라미라. 어감이 좋군요.”

“당신은 왜 다림에 온 겁니까, 라미?”

하리야가 적개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채 질문했다. 바라미는 천천히 술을 마신 다음 술잔을 내려놓고서야 그 질문에 대답했다.

“키 드레이번이 불렀지.”

“키 선장님은 당신이 나를 도울 거라고 말하더군요. 약속했다고도 말하던데.”

“그렇게 약속했어.”

“왜, 무엇을,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아니, 거기에 앞서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나는 바라미다.”

“그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난 너에게 설명하고픈 것이 없다. 그러니 나를 무엇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만일 네가 나를 자연이 끔찍한 자기 혐오에 빠졌을 때 자포자기 삼아 만들어낸 피조물이라고 여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나로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하리야는 라미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주님 뜻대로. 실제적인 일만 이야기하자는 겁니까?”

“그쪽에 더 관심이 있군.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니까.”

두캉가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는 하리야를 좋아했지만, 그 역시 실질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때론 걷잡을 수 없이 형이상 학으로 치닫는 하리야의 버릇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대사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하리야를 실제의 세상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두캉가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하리야는 냉철하게 질문했다.

“그럼……… 당신은 왜 우리를 돕는다는 겁니까?”

“목적지가 달라도 여정이 겹친다면, 방랑자들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잖나.”

“목적?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뭡니까?”

“먼저 내가 하고 있었던 일을 설명해야겠군.”

바라미는 사람 잡아먹고 있었지 어쩌고 하는 하리야의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철탑에서 왕자의 땅을 주시하며 오 왕자의 검이 하나로 모이는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두캉가는 하리야의 눈에서 불똥이 튄 것을 본 것 같았다. 때때로 이세계(異世界)로 날아가 버리곤 하는 하리야의 정신이지만, 그 날카로운 정신은 현 실 세계에서도 놀라울 만큼 기능을 잘 발휘한다. (그래서 두캉가가 좋아하는 것이지만.) 하리야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왕자의 땅? 오 왕자의 검? 그건 무슨 말입니까?”

“왕자의 땅은 왕을 잉태할 수 있는 땅을 말한다. 아달탄 대왕이 지적했지. 왕자의 땅은 다케온, 록소나, 팔라레온, 다벨을 아우르는 지역을 의미한 다. 그 땅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오 왕자의 검이 하나로 모이면 왕이 태어나리라.’ 오 왕자의 검은 다케온의 다이아몬드, 록소나의 말, 팔라레온의 밀, 그리고 다벨의 강철과 한 명의 인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만약 하나의 인간이 그 네 가지를 모두 손에 넣으면 왕이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맙소사, 그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 “습니까!”

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뇌 회전이 빠른 친구군.”

두캉가는 그 말이 마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양 벌쭉 웃었다. 하지만 하리야는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움켜잡았다.

“그건 말은 되는 것 같군요. 만일 메르데린 공작이 그 네 땅을 정복한다면. 그의 황제병이 더 깊어질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겠습 니까? 단순히 조건만 갖추어진다고 해서 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라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곧 얼굴을 붉혔고 두캉가는 낄낄거렸다. 라미는 하리야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했다. “사천 명의 해적과 자유항 하나를 가지고 국가를 세워보려 하는 사람에 비해선 낫지 않은가. 그리고 그 네 개의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면 단순히 그 크기만으로도 페인 제국을 위협할 수 있는 거대 국가가 된다. 몽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텐데.”

“…………인정합니다.”

하리야는 잠시 자신이 들었던 말을 소화해 보기 위해 뒤로 조금 물러나 앉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고, 두캉가는 하리야 의 흉내를 내어보려다가 졸기 시작했다. 하리야가 다시 말했을 때 두캉가는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그런데 조금 전에 당신은 그것을 방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런 일을 하는 겁니까?”

“제국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해 보거라. 잘생긴, 그럴 듯한 생명체지. 이 생명체의 구조를 볼 것 같으면, 란셀이라는 이름의 두뇌와 펠라론이라는 이름의 도덕을 가지고 있지. 심장은 존재하지 않지. 전체가 하나의 맥동하는 심장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곳을 제압하면 이 생명체를 단숨 에 죽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심장이라면, 그것은 바로 왕자의 땅이다.”

“그렇다면……?”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나는 종양이 생겨난다는 말로 바꾸겠다.”

“오 왕자의 검이 하나로 모이면 종양이 생겨나리라. 으음, 이건 무슨 저주 같군요. 무슨 뜻입니까?”

“왕자의 땅에서 태어날 수 있는 왕은, 결국 우수한 전쟁 기계다. 금단의 사지로 모든 것을 제압할 수 있는 맹수지. 왕? 글쎄. 가장 강한 자라는 의미 에서라면 그것도 왕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너희들은 가장 강한 자를 왕으로 선택하는가?”

하리야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럴 의도는 없어보였지만 대사의 말은 그 자신을 얽매고 있던 갈등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키 드레 이번을 왕으로 선택했는가.’ 대답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왔다.

“절대로 아닙니다.”

“기대했던 대답이군, 하리야. 그것은 왕이 아니다. 반왕이지.”

라미의 말 끝에서 무거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주점 안에 있는 많은 사내들이 분명히 소음을 내고 있었지만, 하리야는 그 정적의 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을 삼키며, 하리야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래서….. 당신은 왕자의 땅을 지키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맹수가 태어나지 않도록?”

“그렇다.”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이유는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왜 너희들을 돕는지 알고 싶다면 내 목적을 듣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글쎄요. 당신의 목적은 메르데린 공작의 정복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현재로선 그렇겠죠.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그렇다면 저희 들을 돕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사상 최대의 덫사냥을 할 생각이다.”

“예? 덫사냥이오?”

“그렇다.”

라미는 술잔을 들어 마지막 술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던 하리야는 테이블 위의 촛불이 이상하게 작아져 있다고 생각했다. 라미는 술잔을 입술에서 뗀 다음 빈 술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들, 혹은 다림을 왕자의 땅에서 태어난 반왕의 발목을 물어뜯을 강철덫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혹은 제국의 종양을 베어낼 불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내 고려는 이러하다. 반왕이 떨쳐일어나 제국을 향해 그 흉포한 이빨을 들이댈 때, 이곳 남쪽,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곳에서 너희들 은 분연히 일어나 반왕의 발뒤꿈치를 물어뜯을 것이다.”

“……뱀처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하리야의 얼굴을 향해 대사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뱀처럼.”

“거기서 우린 무슨 이득을 얻는 겁니까?”

“알고 있을 텐데.”

물론 하리야는 알 수 있었다. 하리야는 합리성으로 본능적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대사의 제안에 합리적인 이점이 있음을 파악 하는 데도 별 무리가 없었다. 그의 체계적 사고 속에서 대사의 말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발목을 물어뜯는다=로드 메르데린의 정복 전쟁의 빈틈을 노려 팔라레온, 혹은 다벨 영토의 일부까지 파고들어 신생 왕국의 입지를 단숨에 강화시 킨다. 메르데린의 정복 전쟁이 어느 정도 진전된 시점에서 대륙 남부는 권력 공백이 될 테니 방해는 희박하다. 그리하여 이미 붕괴, 혹은 치명적 피해 를 입은 4국이 자신을 수습하기 전에 굳건한 세력을 확립한다.’

모험의 필요성이 곳곳에서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계획이었다. 하리야는 두캉가 선장을 얼핏 바라보았다. 그 늙은 선장은 계획의 완 성을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은 남은 생을 다 던지면…………. 하리야는 술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 조금 콜록거리며 말했다.

“으흠. 죽을 때까지 심심할 일은 없겠군. 그것만으로도 찬성하고 싶어집니다만.”

그때 하리야는 대사가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리야는 묻는 눈빛을 보내었고 그러자 대사는 차분하게 말함으로써 다 시 한번 하리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키 드레이번이 너를 선택한 이유를 알겠군.”

“……키 선장님은 당신에게 동의했습니까? 그, 반왕 사냥에?”

“반왕 사냥? 덫사냥보다 재미있는 말이군. 나도 그 말을 사용해야겠군. 키 드레이번은 동의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너와 나의 의도를 전부 알고 있 던 키 드레이번이 너와 날 짝지어준 거지.”

“당신과 나를?”

“그렇다.”

“자신은 빠지는 겁니까?”

“그렇다.”

“왜 빠지는 거죠?”

“왜 참가해야 되지?”

“그는 우리의….!”

하리야는 잠시 말을 멈췄다. 붙일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장? 하지만 자신도 선장이다. 우두머리? 키는 그런 호칭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 다. 두목? 웃기지도 않는다. 지도자? 어쨌든 따르는 이를 팽개치는 것을 버릇처럼 여기는 자를 지도자라고 부를 순 없다. 바라미가 ‘나는 바라미다’는 말로만 자신에 대한 설명을 끝낸 것처럼, 하리야는 키 드레이번을 ‘우리의 키 드레이번이다’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하리야를 바라보 며 바라미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또르르륵. 술병 주둥이에서 흑갈색 구슬들이 굴러 떨어졌다.

“키 드레이번의 결정이 너나 다른 해적들에게 어떤 상처를 준 것 같다만, 나는 잘 모르겠다. 너희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가 너희들 을 이곳까지 이끌어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은가? 그 중에서도 하리야 너는 더욱 할말이 없을 텐데.”

“예?”

“그는 네가 차린 식탁을 네가 차렸다는 이유로 너에게 돌려주었다. 왜 식탁을 받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 건가?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존재가 너의 왕위 등극에 걸림돌이 될 것을 잘 알기에 이렇게 떠나지 않는가.”

하리야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라미를 쳐다보았다. 라미의 말은 정확했다. 키 드레이번이 이곳에 계속 있다면 다른 해적들은 절대로 하리야 선장을 왕으로 받들지 않을 것이다.

“맙소사,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키 선장님이 엉뚱한 추격 따위를 위해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렇게 말했고요!”

라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하리야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배려는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가 왕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리야의 말이 갑자기 끊어졌다. 두캉가는 하리야를 돌아보고는 조금 놀랐다. 하리야는 마치 목에 뭐가 걸린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하리야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두캉가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 했을 때였다.

“왕이 될 수 없어……?”

“하리야, 뭐라고?”

“그럴 수가 없어. 키 선장님은 왕이 될 수가 없어. 이런, 맙소사! 그걸 몰랐다니!”

라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캉가는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캉가를 향해 하리야는 힘들게 말했다.

“키 선장님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제기랄! 이제야 깨달았군. 현시점에서 그가 왕이 된다면, 그의 나라 역시 제국의 공적 제1호입니 다!”

두캉가는 자신의 이마를 호되게 때렸다. 빨간 손자국이 날 정도인지라 꽤나 아팠을 테지만, 두캉가는 내색하지 않은 채 외쳤다.

“맞아, 그렇군! 시작은 자네부터여야 되는 것이었군?”

하리야는 다시 당황했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두캉가?”

“이런 자네가 조금 전에 다 설명해 줬잖아? 자네 말대로라면 키 선장은 왕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시작해야 돼. 그럼 누구일까? 당연 히 자네지. 시작은, 그래. 시작은 자네에서부터야! 자네가 아니면 안 돼. 명목상으로든 실리상으로든 키의 나라는 자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해.” 

하리야는 경탄한 표정으로 노선장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파도는 바위에 세월을 새기는 것이다.

“맞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는군요. 그의 등극은 제국의 비위를 건드릴 테니 그는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시작해야 됩니 다. 그리고 제가 시작하기 위해선 그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는 떠나는 겁니다!”

정리를 끝낸 하리야는 자신이 정리한 내용에 경탄하고 키에 대해 경탄했다. 오스발과 율리아나를 추적하기 위해 함대를 탈퇴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하리야는 키가 미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배후에 이런 고려가 있었다고 생각하자, 하리야는 끓어오르는 감동을 금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두캉가 역시 저 멀리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스윈드 함대의 불빛 ―사실, 그건 레우스의 상선이었다ᅳ을 바라보며 감동스러워했 다. 라미는 순박하게 즐거워하는 두 선장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때 하리야가 열정적인 어조로 외쳤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맹세할 차례군요!”

하리야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쓴웃음을 지은 채 두 선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미가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삐기기긱 !의자가 미끄 러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자 두캉가는 당황한 눈으로 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캉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리야 선장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리야 역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라미. 무기가 아닙니다. 나는 맹세하기 위해 이걸 꺼낸 겁니다.”

라미는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을 조금 숙여 하리야의 눈을 피했다. “미안. 과민했나 보군.”

흥분해 있던 하리야는 라미의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꺼낸 성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두캉가는 하 리야가 가장 엄중한 맹세를 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지만, 뭘 맹세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리야, 무슨 맹세를 하겠다는 건가?”

“제 뜻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맹세입니다.”

“제발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그건 모든 맹세가 마찬가지잖아. 그 뜻이 뭔데?”

“제 뜻은 키 드레이번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리야는 갑자기 자신이 올바른 호칭을 찾아내었음을 깨닫고는 다시 기뻐했다. ‘우리의 왕’이다. 그가 키에게 바라는 것은 이유 같은 것이 필요없는 절대적인 이름으로서의 왕이었다. 두캉가 역시 그 단어에 잠시 감동했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그런데?”

“그래서 전 당신의 말대로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는 아닙니다. 저는 왕이 되어 키 선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왕국을 만들어놓고, 그가 돌아 오면 돌려줄 겁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왕이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가 혹여나 왕좌의 매력에 굴복하여 원래의 뜻을 망각하고 그 자리에 눌 러앉을까 두렵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킬까 봐 무섭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가 왕이 되는 이유를 끝까지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 다.”

말을 마친 하리야는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두캉가는 그만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 되어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랬기에 두 선장은 모두 라미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세심히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녀의 흰 얼굴이 창백해진 것은 알아 차리기 힘들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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