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3장 : 제왕의 낙조 – 4화
에름 후작가의 비서 업무를 맡고 있는 레빌 아리온은 근면성실한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근면성실하게 보여지는 것의 이점을 알고 있는 사람 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3년간 일출 30분 전에 카밀궁에 입궐하고 일몰 1시간 후에 퇴궐하는 것을 어긴 적이 없었다. 왜 3년이냐 하면, 카밀궁이 생긴 것이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31년간은 원래 공작가의 저택인 레슬궁에서 근무했으며 역시 일출 30분 전에 출근하고 일몰 1시간 후에 퇴궐했다. 결국 공무로 라트라인을 벗어나 있을 때를 제외한다면 서 레빌은 34년간 언제나 같은 시각에 출퇴근한 셈이다.
따라서 일출 때가 지났는데도 서 레빌이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자 그의 하인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식기 관리자는 그릇을 깨먹었 고 마구간지기는 말에게 깨물렸고 하녀는 밀가루통에 쥐를 빠뜨렸고 정원사는 전정가위로 자신의 소매를 잘랐다. (물론 이상의 상황들은 라트라인에서도 불운을 부르는 일로 취급되는 일들이다.) 아리온 가의 사용인들 전부는 서 레빌이 밤새 심근경색을 일으켰거나 세상이 망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판단했 고, 후자의 경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전자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리온 가의 2층, 서 레빌의 침실을 응시했다. 하지 만 그곳엔 아직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가끔 커튼엔 서 레빌의 것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오락가락했기에 그가 심근경색을 일으켰다는 가설은 신빙성을 잃었다. 따라서 그의 사용인들은 오늘 아침을 맞아 세상이 망했다는 가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경우에 그것은 농담거리였다. 하지만 서 레빌은 그의 눈앞에서 산산이 박살나는 세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 그러니까, 어, 음, 이거 보쇼. 아니, 서, 젠장.”
서 레빌의 의자에 앉아 있던 (서 레빌은 그 모습에서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34년간 그 의자에서 레빌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앉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새벽에 그의 집을 찾아온 키 큰 사내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런 양해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그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은 서 레빌을 매우 혼란시켰다) 키 큰 사내 는 상대방이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키 선장.”
“좋소. 키 선장. 그러니까………… 맙소사, 도저히 믿을 수 없군! 내 방에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앉아 있다고?”
키는 빙긋 웃으며 복수의 칼자루를 쓰다듬었다.
“더 크게 말해 보시지.”
서 레빌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것이 마치 갑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옷자락을 단단히 여미고는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갑작스럽 게 지금이 늦은 아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봐요. 이따가 말합시다. 그러니까, 저녁에 말합시다. 예? 난 이만 카밀궁에 나가봐야 된단 말입니다.”
“웃기지 마. 돌아올 땐 병사들과 함께겠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키 선장.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키는 실소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서 레빌을 향해 키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빌려올 작정인가.”
“뭐라고 하셨소?”
“명예 말이다. 어디서 빌려올 작정인가?”
서 레빌의 얼굴이 굳었다. 키는 쏘는 듯한 눈으로 주군을 배신한 기사를 노려보았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거래할 생각은 하지 마.”
·원하는 게 뭐요?”
“오스발과 율리아나 공주.”
“뭐요?”
“더 쉽게 말해 줘야 하나? 너에게 목숨을 주겠다. 대신 넌 나에게 오스발과 율리아나 공주를 내줘야 한다. 내일 저녁까지 그들을 비무장 상태로 대포 를 배치했던 그 언덕으로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레모놈들 전부를 한 묶음으로 묶어서 라트라인에서 가장 행인이 많은 거리에 전시하겠다. 지금쯤 내 사람들이 작성을 끝냈을 녀석들의 진술서도 첨부해서.”
서 레빌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키 드레이번을 바라보았다. 키는 팔걸이를 짚으며 가볍게 일어났다.
“그렇더라도 걱정하진 말도록. 에름 후작은 널 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벌 주지.. 않는다고?”
키는 갑자기 복수를 뽑아들었다. 그는 복수를 천천히 들어올려서 레빌의 목을 겨냥했다. 서 레빌은 제국의 공적 제1호에게 겨냥당한다는 것이 그런 기분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 속에서 키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 전시회의 마지막 전시품은 네 목이 될 테니까.”
복수는 다시 칼집으로 돌아갔다. 키는 창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순간 서 레빌의 몸이 날래게 움직였다.
서 레빌은 벽에 걸려 있던 커틀러스를 집어들어 곧장 키의 오른쪽 어깨를 내려쳤다. 사력을 다한 일격이었지만, 키는 몸을 왼쪽으로 틀어 커틀러스 를 흘려보내곤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뒤틀었다. 키의 오른쪽 팔꿈치가 서 레빌의 안면을 별로 부드럽지는 못한 방법으로 문지르는 순간 서 레빌은 피 를 쏟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서 레빌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키의 오른발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서 레빌은 일그러진 얼 굴로 키를 올려다보았고 그 가슴을 밟은 채 물끄러미 서 레빌을 내려다보던 키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커틀러스를 주워들었다.
키는 서 레빌의 가슴에 올려놓았던 발을 치우곤 뒤로 물러났다. 서 레빌은 천천히 일어났고 키는 그에게 커틀러스를 던져주었다. 커틀러스를 받아든 서 레빌은 의아한 듯한 눈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키는 빠른 손놀림으로 복수를 뽑아들고는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잔인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키는 복수의 칼몸으로 서 레빌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다시 바닥에 쓰러진 서 레빌은 무참하게 일그러진 볼 을 움켜쥔 채 키를 쏘아보았다.
“이익!”
얕은 숨소리 비슷한 기합을 내지르며 서 레빌이 다시 솟구쳤다. 그러나 커틀러스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키는 복수를 다시 휘둘렀고 서 레빌은 이 번엔 반대쪽 뺨을 움켜쥔 채 나가떨어져야 했다.
서 레빌은 일어나지 않았다. 키는 복수를 칼집에 꽂아넣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 자락이 한번 펄럭이고 나자 키의 모습은 사라졌다. 서 레빌은 바닥에 앉은 채 펄럭거리는 커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날 아침, 너무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는 주인을 이상하게 여겨 찾아왔던 아리온 가의 하인들은 주인의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곤 크게 놀랐다. 그 리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그렇게 되었다는 서 레빌의 설명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여허! 벨로린!”
“왜?”
“이보라고, 벨로린 ‘왜?’라는 것보다는 ‘안녕’이 더 좋아. 그리고 ‘안녕’보다는 ‘좋은 아침!’ 쪽이 더 좋은 것이고.”
물수리호의 제일사장에 걸터앉아 있던 벨로린은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갈매기들이 서로에게 장난치며 날고 있는 다림시의 하늘은 쾌청했고 아직까 지도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것 같은 태양은 아직은 무더위를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벨로린은 킬리 선장의 말대로 좋은 아침이라는 것에는 동의했 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래서 벨로린은 보트 위에 서 있던 킬리 선장을 내려다보았다.
“시력이 안 좋아졌나 봐? 그럼 가르쳐주지. 좋은 아침이야.”
“………………가르쳐달라고 말한 것이 아냐. 벨로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투덜거리던 킬리 선장은 잠시 자신이 서 있던 보트와 물수리호의 제일사장 사이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킬리 선장은 허리를 굽혔다가 위로 뛰어올랐다. 보트가 크게 요동치자 노잡이들은 기겁하며 균형을 잡았다. 제일사장의 밧줄에 매달린 킬리 선장은 두 다리를 끌어올린 다음 한 동작으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킬리 선장은 물수리호의 제일사장 위에, 즉 벨로린 의 옆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를 태우고 왔던 보트는 방향을 바꿔 항구 쪽을 향해 돌아갔다. 킬리 선장은 환한 얼굴로 벨로린을 쳐다보았지만 곧 얼굴 을 딱딱하게 굳혔다. 물수리호의 일항사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하, 일항사, 미안하군. 어, 승선 허가를 부탁하는데.”
물수리호의 일항사는 메인 마스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일항사는 다시 킬리 선장 쪽을 쳐다보았고 킬리 선 장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항사는 곧 저편으로 걸어갔다. 킬리 선장은 과장된 동작으로 이마를 닦았다.
“자식이 아침부터 뭐 그런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냐. 그건 그렇고, 뭐하고 있었니, 벨로린?”
“아무것도.”
“바로 그거야! 내가 찾아온 이유가.”
벨로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킬리 선장을 바라보았다. 킬리 선장은 자세를 좀 편하게 하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뭐 하고 싶은 것 없니?”
“하고 싶은 것?”
“응. 하리야 선장은 그걸 알고 싶어하고 그래서 내가 찾아오겠다고 했지. 너, 그러니까………… 일단 넌 여자니까 뱃사람이 될 순 없어. 그러니까 배에 있 어봐야 너에게 도움될 것은 없지. 너 뭔가 하고 싶은 일 없니? 넌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까, 하리야 선장은 네가 원한다면 유명한 음악가의 도제로 넣 어주겠다고 하던데.”
벨로린은 검은 옷자락 위에 올려놓은 검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그것을 천천히 이마 위로 가져갔다. 하늘을 바라보던 벨로린은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낮엔 덥겠어.”
“……그건 누가 가르쳐준 거야?”
“두캉가.”
“으이그. 참 좋은 것만 가르쳤군. 말 돌리는 것은 관두고 대화에 참여해. 뭐 배우고 싶은 것 없어?”
“왜 배워야 하지?”
“응? 그거야 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지. 장차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 말이야. 그래서 어린이는 누구나…
킬리 선장의 말이 갑자기 끊어졌다. 벨로린은 검은 얼굴에 대비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날 인간의 어린이처럼 취급하네?”
“흐음, 인정하겠어. 하지만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너 같은 생물도 말이야. 살아가려면 움직여야 하고 잘 움직이려면 배워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난 배울 것이 없어.”
굳어 있던 킬리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하하. 역시 인간의 어린이와 똑같은데. 뭐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될 거야. 공부하고 싶어하는 어린애는 아무데도 없지. 그렇지만…………’
“킬리. 난 배울 것이 없어.”
킬리는 눈을 끔뻑거리며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어떤 의심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의심은 어떤 장면으로 구체화되었다. 그의 반주에 맞춰서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 을 노래를 부르던 벨로린의 모습. 킬리는 반쯤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페인 제국의 현 황제 이름은?”
“나르실 로이 아달탄 아크레아 리 온 놀가드 아자르 나이제스.”
“전투 돌입시 배의 속도를 급히 낮춰야 하지만 돛을 접을 시간이 없다면?”
“닻을 던지지. 해저에 닿지 않아도 물의 저항으로 속도가 떨어져.”
“타르타니어스 장군이 2시간 일찍 도달했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지만, 그건 몽상가들의 시간 때우기용 공상거리일 뿐. 역사에서의 가정은 무의미한 거야.”
“아미, 아밀리아는 행복한가?”
무의식중에 질문을 던졌던 킬리는 곧 후회했다. 그는 벨로린이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까지 말할 수는 없으리라고 자위하며 벨로린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벨로린은 킬리 선장의 떨리는 얼굴을 살짝 외면하며 말했다.
“죽었어.”
“뭐?”
“아밀리아는 죽었다고.”
“거짓말! 그 자식은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어. 죽었을 까닭이……”
“그 레갈루스 뱃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냐. 그녀는 좋은 남자를 만났지.”
“그런데?”
“출산 도중에 죽었어.”
“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그건 네 아이였어. 그녀가 널 기다리지 않고 그렇게 빨리 시집간 이유도 임신 때문이야.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여 린 성격이었어. 뱃속의 아기를 죽일 용기도 없고 그 아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자신도 없거니와 가문을 부끄럽게 할 배짱은 더욱 없었지. 다행 히도 임신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받아들인 남자가 있었어. 좋은 남자란 건 그런 의미였어. 그래서 그와 결혼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네 아이 를 낳다가……”
“그만해!”
킬리는 턱을 가슴에 파묻으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벨로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음에도 불구하고 물수리호의 선 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 후 킬리 선장은 머리를 감싸쥔 채 흐느끼듯 말했다.
“그럼……… 그녀가 죽은 것은……”
“그래. 이미 5년 전이야.”
“그러면 난………… 5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이군. 그녀가 죽은 지 5년이나………… 지난 건데.”
“일부러 소식을 피하려 했으니까.”
“난………… 나는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길 포기한 거였어………… 해적이 된 거였어. 그런데.. 오, 맙소사. 그런데…”
“킬리. 상심한 것은 이해하지만 사실을 왜곡하는군. 네가 해적이 되었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없었던 거야.”
킬리 선장은 고개를 확 쳐들곤 벨로린을 노려보았다.
“아니야! 난 해적이 아니었어!”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네가 사략선 선장이 되었다는 걸 몰랐어. 넌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나 그녀의 가족이 그 사실을 짐작해 주길 바란 건가? 그래서 너의 군인 의 명예도 지키고 그녀도 잃지 않게 되길 바란 건가? 너무 자기 중심적인……”
“닥쳐 엇!”
킬리는 벨로린의 멱살을 움켜쥐어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녀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킬리에겐 그 사실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킬리는 코앞까지 끌려온 벨로린의 작은 얼굴을 노려보며 헐떡였다. 충혈된 그 눈에선 눈물과 함께 분노와 슬픔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벨로린은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멱살을 쥔 킬리의 커다란 손을 덮었다. 벨로린은 킬리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킬리.”
킬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들은 것은 벨로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5년 만에 듣는 것이지만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벨로린의 몸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벨로린은 단지 그녀의 작은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어두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손 은 마치 못으로 박아놓은 것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킬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벨로린의 검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벨로린의 검은 얼굴 위로 어떤 모습이 드러났다.
거울이 없는 가난한 집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을 때 흔히들 그렇게 한다. 유리창 뒤편에 검은 천을 씌우거나, 혹은 밤에 유리를 들여다보면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유리는 거울 같은 효과를 낸다. 그곳에 떠오른 모습은 꿈에서 보는 것처럼 흐릿하다. 그리고 벨로린의 검은 얼굴은 마치 그런 유리처럼 어떤 모습을 떠올렸다. 킬리 스타드 선장은 헐떡이며 그 환영에 이름을 부여했다.
“아미……”
아밀리아의 커다란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에 놀란 것 같은 커다란 눈은 무표정하게 있어도 슬퍼보인다. 킬리는 물에 빠진 사람마냥 거칠 게 호흡하며 그 모습을 응시했다.
“네가…… 어떻게?”
아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킬리는 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름 끼치도록 명료한 사실이었다. 벨로린의 말대 로, 죽었기 때문이다.
“왜 기다리지 않았어, 왜? 조금만 기다렸다면……………
아미는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키며 그 얼굴을 바라보던 킬리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아냐………… 내가 잘못했어. 말해 줬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 잘못이었어.”
케케묵은 헛소리. 아내에게도 비밀을 지킬 것. 킬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우쭐함에 차 있었지. 연인에게도 누설하지 않고 비밀을 지키는 진짜 군인. 킬리는 조국이 명령한 대로 위엄 있게 비밀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아밀리아는 그의 아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 수 없기에, 가문을 수치스럽게 할 수 없기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의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킬리는 아내도 자식도 모두 바친 ‘진짜 군인이었다. 그 리고 그는 지금 해적이다.
그의 입에서 사람이 내는 것 같지 않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자유호의 일항사 식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수리호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에서 급히 망원경을 주워든 식스는 물수리호 쪽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그러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광경에 더 놀라버렸다. 킬리 스타드 선장이 벨로린의 멱살을 쥔 채 고개 숙여 흐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기 긍정을 하고 있군.”
식스는 망원경을 내리곤 등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의심스럽다는 듯이 질문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라미는 한가롭게까지 느껴지는 손길로 테이블 위에 놓아둔 서류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비명은 모두 똑같아. 나 여기 있음을 바로 자신에게 알리는 자기 긍정이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킬리에겐 저토록 몸서리치게 자신을 긍정할 필요 가 있었던 거겠지.”
“예?”
“아마도 그가 부정했던 자신이 그에게 돌아왔겠지. 그러니 그는 부정했던 자신에 맞서 긍정했던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생겼을 테고, 그러니 소리 높 여 외치는 거지. 내가 선택했던 내가 여기 있다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비명은 무서우니까 지르는 거잖습니까.”
“뭐가 무서운데?”
“예?”
“무서운 게 뭐냐고. 어떤 때 무서운데?”
“목숨이 위험하거나, 뭐 그럴 때…………”
“그래.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거 아닌가. 자신이 부정될 것 같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소리 높여 자신을 긍정하는 것 아닌가.”
식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라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