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1화
“당신이 확실하군.”
데스필드는 침울하게 말했다. 핸솔 추기경은 데스필드가 이곳에 있지 않은 누군가를 지칭할 때마다 혼란스러웠지만 파킨슨 신부는 별 당혹한 기색 없이 질문했다.
“벌쳐가 확실하다고?”
“아.”
“그 벌쳐라는 작자, 마법사냐?”
“엥? 무슨 소릴. 패스파인더라고 했잖소.”
파킨슨 신부는 어깨를 으쓱이며 땅바닥에 놓여 있는 것. 그들의 마부를 기겁하게 했고, 마차를 급정거시켰으며, 덕분에 파킨슨 신부의 뒤통수와 핸솔 추기경의 턱에 혹을 만들어놓은 – 을 바라보았다. 그로선 그것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지만 핸솔 추기경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날개개구리는 사지를 흉하게 뻗은 모습으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늪지의 고요한 암살자는 밤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나 길다란 혀를 휘둘러 불 운한 피해자를 감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피해자의 목록 중에서 사람이 빠진 적은 없다. 핸솔 추기경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이 흉측한 생물에 대 해 대충 설명했고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저 웃기는 상처는 뭡니까?”
“나도 같은 걸 데스필드 군에게 질문하고 싶소. 이봐요, 데스필드군. 마법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 벌쳐라는 자는 어떻게 날개개구리에게 저런 상 처를 선물한 거죠?”
“글쎄. 아, 잠깐. 스완 대거?”
“스완 대거?”
“데자크 가의 가보 말이오. 스완송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아, 상처가 당장 얼어붙고 만다는 그 칼?”
핸솔 추기경은 그제서야 오래된 전승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데자크 가에는 오래전부터 희귀한 단검이 전해져 온다. 스완송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따르며 어떤 이들은 엘핀 마이스터가 만들었다고도 하지만 명문(文)이 없기 때문에 누구의 솜씨인지, 심지어 원래 누구의 검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스완 대거에 대해 알려진 사실 중 확실한 것은 그 신 비한 성능뿐이다. 스완 대거에 베인 상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얼어붙는다. 단지 얼어붙는 것뿐이면 좋지만, 대부분의 생물의 몸엔 물이 많고 물은 얼어붙으면 부피가 팽창하는 물질이다. 핸솔 추기경은 파킨슨 신부가 ‘웃기는 상처’라고 표현한 부위를 바라보곤 다시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한가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렇소. 스완 대거. 팔라레온이 망하면서 그게 밖으로 유출된 모양이지. 그리고 벌쳐 당신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군. 당신, 재주도 좋아. 그걸 어떻 게 손에 넣었지?”
데스필드는 심히 부럽다는 듯한 얼굴로 날개개구리의 배 인 듯한 부위를 쓸어만졌다. 다른 개구리와 마찬가지로 말랑말랑해야 할 그 부분은 이 새벽 속에서 아직도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데스필드는 하늘을 흘끔 돌아보았다.
“해가 높이 뜨면 이것도 녹겠군. 그때까지 기다려볼까요?”
“왜?”
“구워 먹으면 고소하거든.”
“………데스필드, 우린 미리온 산맥에 있는 것이 아냐. 저걸 먹을 필요가 있겠냐?”
파킨슨 신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욕지기가 치민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거대한 개구리는 힘을 잃은 날개를 펼친 채 대로를 가로막 듯이 쓰러져 있었고 길다란 혀는 입밖으로 튀어나와 보기 싫게 늘어져 있었다. 요리되기 전부터 식욕을 돋게 하는 사체가 있을 리 없지만 눈앞의 날 개개구리는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있으니까요. 말했잖소. 별미라고.”
“난 관심없다. 예하께선?”
“나도 그런 시련에는 관심이 없소. 신부님.”
두 성직자의 반대에 데스필드도 별로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일행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흔들 리는 마차 안에서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게 벌쳐라는 자의 짓이라고 확신하는 거냐?”
“본인이라면 사용했을 수법으로 날개개구리를 장사 치러줬더라고.”
“응?”
“날개개구리는 휙 날아오면서 혀를 내쏘지요. 아는 게 적은 당신은 그런 경우 혀를 피하거나 막으려고 드는데 그럼 꼼짝없이 개구리 뱃속으로 직행이지. 그냥 잡혀주는 게 낫소. 대신 잡히는 순간 몸을 약간 비틀어주면 돼. 어, 혹시 개구리들이 자기 혀를 주체 못하는 꼴 본 적 있소?”
“아아, 봤다. 너무 심하게 혀를 내쏘아서 입 안으로 당기지 못하는 거?”
데스필드는 마차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덩치 큰 놈도 마찬가지요. 혀를 당기려고 할 때 몸을 좀 비틀어주면 혀를 제대로 못 당겨. 그럼 다른 개구리하고 똑같이 저놈도 혀를 출렁거리는 꼴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앞발로 자기 혀를 끌어모아 입 안으로 쑤셔넣어야 돼요. 그렇게 끌려가다가 적당한 순간에 턱 아래나 배 쪽을 찢어주면 되지. 그럼 이미 무거운 추를 혀끝에 달고 있고 그걸 끌어당기느라 기운 빼고 있던 개구리는 곧장 저세상이지. 바로 그렇게 했더라고.”
“너………… 쉽게 말하는데, 그거 쉬운 일은 아니지?”
“물론, 몸을 비틀어주는 것이 조금만 늦으면 곧장 개구리 입 속에 들어가 있게 되거든. 하지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은 수법이오. 그리고 어 떤 당신이 날개개구리에게 그런 짓을 해줬다는 사실과 요 근처에 벌쳐 당신이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더해 보면 당신이 벌쳐라는 답이 나오죠.”
“벌쳐라. 그건 도대체 누구냐? 한번도 본 적 없다고?”
“한번도.”
“서신 한 장 교환한 적도 없고?”
“물론.”
“그럼 넌 그를 어떻게 아는 거냐?”
“신부님 당신이 한번도 만난 적 없고 서신 한 장 교환해 봤을 리 없는 아자르 황제 당신을 아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들어서.”
“들었다고?”
“아아.”
“그런데・・ 그렇게 닮았다고?”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하던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핸솔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필드를 보았다.
“그렇소. 진짜 똑같더라고.”
“혹시 진짜 쌍둥이 아냐?”
“아니오. 킥킥. 혹시 그럴 수는 있겠군. 몹시 가난했던 본인의 부모 당신들이 쌍둥이를 낳게 되자 둘을 키울 수는 없다고 판단하곤 하나를 버렸을 수 도. 그리고 본인과 벌쳐 당신은 모두 자신이 독자라고 생각하며 자랐고, 그렇지만 쌍둥이의 교감으로 똑같은 직업을 선택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있으시지요들?”
“진짜 그래?”
“아니. 그런 이야기는 없수. 본인은 진짜 독자요.”
“어떻게 확신하지?”
“본인의 고향 신부님 당신에게 물어봤거든. 참고로 말하자면 그 신부님 당신은 본인의 어머니와 잔 적이 있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말해줬던 성격이 고, 그래서 본인은 당신의 말을 신뢰하오.”
신부와 추기경은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창 밖의 풍경을 보던 파킨슨 신부가 조금 거북하게 말을 꺼내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관심이 없는 거냐? 쌍둥이도 아닌데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지 않아?”
“신기하더군요.”
데스필드는 하품하듯이 말했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을 맥빠지게 만들었다. 신부는 다시 전의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한번 만나봐야 되는 거 아냐?”
“왜?”
“왜냐니? 신기하잖아. 호기심 같은 것 안 생기냐?”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고선 그가 그런 호기심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정말 신기한 놈이라 고 생각했다. 데스필드는 팔짱을 끼곤 고개를 갸웃했다.
“만나본다라?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군요. 흐음. 본인이 당신을 만난단 말이지. 데스필드가 벌쳐를 킥킥!”
중얼거리던 데스필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의아해하는 신부와 성직자를 향해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안 되겠는데. 벌쳐(vulture)가 데스필드(deathfield)로 날아와야지, 어떻게 데스필드가 벌쳐를 찾아가겠소. 그러니 그 의견은 통과요.”
“장군님.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경우 신사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론 완전 봉쇄를 해야 합니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긴 했지만 가일즈 부관의 말투엔 ‘지금은 장군님 젊었던 시절 같은 옛날식이 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의 어조가 물씬 배어나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가만히 가일즈 부관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시대의 흐름은 무자비한 것이다. 전쟁은 더 이상 무사의 잔치가 아닌 전쟁 엔지니 어들의 경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바스톨 장군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스톨 장군은 그의 부관이 저 정도의 존경심이라 도 표현해 준 것에 감사하며 말했다.
“완전 봉쇄라고 했나, 가일즈?”
“그렇습니다. 지금 볼지악 요새로 들어가는 일반인 한 명은 내일이면 우릴 공격할 적군 한 명이 되어 있을 겁니다. 적의 세력을 불려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다못해 수레라도 통금시켜야 합니다. 수비군의 병참을 끊는 것은 상식이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수레들이 병참씩이나 되는 줄은 몰랐군. 우그러진 솥이나 가재도구, 식솔들이 일주일이나 먹을까 말까 한 곡식 자루…………… 글 쎄. 그 사람들 자신들이 먹을 것도 모자라 보이는데.”
가일즈는 찔끔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볼지악 요새로 들어가는 수레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 굽히기엔 약간 늦은 것 같았기에 가일즈는 계속 버텨보기로 했다.
“양의 다소가 문제는 아닙니다. 볼지악 요새에 식량 공급이 계속된다는 환상을 줄 수 있잖습니까.”
“양이 문제가 아니라고? 적군 한 명이 늘어나는 것에도 신경 쓰는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게 들리는군.”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바스톨 장군은 가일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곧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바스톨 장군은 약간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가일즈. 나도 자네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깜빡했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 나이가 되면 무엇에든 서두르는 법이 없지. 자네 때는 빨리 일을 끝내면 다음 일을 할 수 있지만 나 같은 노마에겐 그 다음이 란 것이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가 없거든.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진득하게 달라붙게 된다네. 아, 미안. 이런 노인네의 수다도 별로 마음에 안 들지? 하하.”
가일즈 부관은 약간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였다. 바스톨 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문제 하나 내겠네. 이것 또한 노인네의 상투 수단이지. 평생 동안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어느새 자기가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말하게 하는 것을 즐기 게 되거든. 자, 지금 볼지악 요새로 다벨인들이 모여들고 있지?”
“예. 바로 그 이야기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래. 그들이 모여들고 있는 이유가 뭐지?”
“예? 그야 저희들과 싸우기 위해서잖습니까.”
“아니지. 자넨 누구와 싸울 일이 있으면 집 안으로 들어가나? 난 보통 밖에 나가서 붙자고 말했지.”
“무슨 말씀이신지… 성은 집이 아니잖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빙긋 웃으며 걸어갔다. 저 멀리로는 험한 관애를 막고 있는 볼지악 요새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사트로니아군 진영은 볼지악 요새로 통하는 대로 왼편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대로에는 지금도 몇몇 다벨인들이 불안한 눈으로 사트로니아군 진영을 훔쳐보며, 혹은 못 본 척하며 볼지악 요새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트로니아 진영의 경비병들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장군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화살이나 돌멩이 하나도 던지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시 질문하겠네. 가일즈.”
바스톨 장군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저들이 그냥 자기 농장이나 일구고 있지 않고 힘든 농성전을 하려고 몰려드는 이유 가 뭘까? 저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 거지?”
가일즈는 어렴풋이 노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8군단 말씀입니까?”
“8군단이 대표적이겠지만………… 그래. 8군단이겠지. 따라서 우린 볼지악 요새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늘어나든 신경 쓸 필요 없어. 저자들은 우리와 싸우려고 모여드는 게 아니거든. 그저 8군단과 휘리 노이에스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일 뿐이야. 따라서 우린 저자들이 보는 앞에 서 8군단만 깨어주면 돼. 그럼 저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져볼 수 없겠지.”
“아, 예.”
그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바스톨 장군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약간의 조소를 보내었다. 늙긴 늙었나 보군.
“가일즈. 옛날 식이란 건 다 고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옛날에 그렇게 했던 건 그때 당시에도 그게 유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전쟁은 무사들 끼리 하면 돼. 괜히 민간인들 괴롭혀봐야 그들이 자기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해 줄 원한만 만들어줄 뿐이지. 자넨 무사가 뭐라고 생각하”나?”
“예? 그야 무도를 닦는 사람.
“아니. 대속자일세.”
“예?”
“무도라는 것이 뭔가. 사람 죽이는 기술이지. 사람이 배울 필요가 전혀 없는 기술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그걸 익 혀 다른 사람 대신에 죄를 짓는 것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줌으로써 다른 이들은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거지. 따라서 우린 거칠고 사납고 아무런 후회도 남길 필요 없이 죄를 지어야 되지만, 다른 죄인들이 그렇듯 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네. 우리가 져야 하는 책임은 하나뿐이야. 죄 없는 이들에게 위탁받은 우리의 죄, 그것만 충실히 수행하면 되지. 우리에게 죄를 맡긴 사람들은 – 자네 말로는 민간인들이 되나? 내버려두세 나. 그들에게 죄를 저지르면 우린 일반 죄인과 똑같아지는 것이고, 그때부터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되지.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바스톨 장군은 너무 많이 말했다 싶어서 약간 불안해진 얼굴로 가일즈 부관을 돌아보았다. 가일즈는 알쏭달쏭하다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장군은 미 소 지었다.
“관두세. 우리 장병들도 심심할 테니, 가서 독이나 좀 풀어놓고 오게.”
“예?”
“8군단의 예상 행군로 주변을 답사하고 그 주위의 샘에 동물 시체라도 던져두고 오란 말이야. 요즘같이 더운 날씨엔 그것도 좋은 공격이지. 자네에 게 맡길 테니 노련한 백부장들과 협의해서 작전을 짜보게.”
그것은 훨씬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지시였고, 그래서 가일즈는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일즈의 지시 역시 사트로니아군 백부장들에겐 쉽게 이해되었다. 백부장들은 볼지악 요새 부근의 샘을 샅샅이 조사하여 그곳을 메워버리거 나 동물의 사체를 던져두었다. 볼지악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다벨 7군단은 롱레인저들을 풀어 그것을 방해하려 했으나 사트로니아군의 조직적인 오 염 작전에 대항하기엔 롱레인저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롱레인저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5, 6군단이 패한 것 때문에 다벨의 롱레인저도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할 수 없이 7군단은 볼지악 요새로 다가오고 있는 8군단에 첩보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서 소사라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보고했다.
“롱레인저의 보고에 의하면 바스톨 장군은 주위 사흘 거리를 사막 지대로 만들어놨다고 합니다.”
“사막 지대?”
“예.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사흘 동안은 물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계절이라면 장병들의 탈수가 심각할 텐데 요.”
서 소사라의 보고를 들으며 휘리는 피식 웃었다.
“우릴 좀 곯려주겠다는 것이군. 자넨 틀림없이 조연사에게 물어봤을 테지?”
사령관의 인정을 받았지만 서 소사라는 별로 즐겁지 않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예. 당분간 비는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사트로니아군이 모르는 샘 몇 군데는 안전하지만 우리 병력 전체를 먹이기엔 부족한 양입니다.”
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간단히 말했다.
“알았어. 모두들 수통을 꽉꽉 채운 다음 최고 행군으로 무수 지대를 돌파한다.”
“알겠습니다.”
8월 19일. 볼지악 요새로부터 50마일 지점까지 도달한 다벨 8군단은 롱레인저들이 주위를 감시하는 가운데 최고 강행군을 감행하였다. 거의 달리 다시피 하는 속도로 걸어간 8군단은 하루 하고 반나절 만에 50마일의 거리를 주파한 다음 사트로니아 진영으로부터 1마일 지점에 도착하여 진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8월 20일 제22시. 그 소식을 접한 가일즈는 그대로 야전 침대에서 뛰쳐나온 다음 손에 갑옷을 들고서 바스톨 장군의 천막에 뛰어들었다.
“적군은 기진맥진하고 있을 겁니다! 중대장들을 소집할까요?”
“일단 갑옷이나 똑바로 입게. 부관쯤 되는 이가 그렇게 경거망동하면 병사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나.”
흥분해 있던 가일즈는 그제서야 바스톨 장군이 갑옷을 똑바로 받쳐입고 있음을 발견했다. 가일즈는 얼굴이 빨개져서 질문했다.
“아니, 언제 그렇게 갑옷을 입으셨습니까?”
“난 전쟁터에 나오면 갑옷을 입고 자네. 용병 시절부터의 버릇이야. 급할 때 버둥거리는 것보단 좀 불편하고 냄새가 나는 편이 낫거든.”
“아, 그러시군요.”
“그리고 중대장들은 이미 내가 소집했네. 그러니 빨리 갑옷을 입게 당번병! 가일즈의 갑옷 착의를 도와드리도록.”
가일즈는 자신이 바스톨 장군의 코흘리개 아들이라도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극심한 좌절을 느꼈다. ‘상관의 보살핌을 받다니, 이래가지고서야 부 관이라 하겠는가!’ 어쨌든 바스톨 장군의 배려로 사령관의 천막에서 갑옷을 깔끔하게 걸친 가일즈 부관은 그제서야 사령관을 모시고 통제본부 막사 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중대장들이 사령관과 부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은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지시 했다.
“4중대. 지금 출진하여 상대를 관찰하라. 공격은 할 필요 없다. 지금이 가장 위험하다는 건 그쪽도 알고 있을 테니 대비하고 있을 거야.”
바스톨 장 군은 부관을 돌아보진 않았지만 가일즈는 다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싸움을 기대하고 있던 중대장들도 약간 주춤하는 얼굴이 되었다.
“만약 소규모 분견대나 정찰대와 조우하여 포로를 잡아올 수 있다고 판단되면 공격을 시도하도록.”
“질문하겠습니다. 겨우 정찰을 위해 저희들의 병력 전부가 나서란 말씀입니까?”
“아니. 제2시나 제3시가 되면 자네는 병력이 다 필요해질 테니 모두 끌고 나가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때가 되면 알 거야. 출발하라.”
4중대장이 경례한 다음 통제본부를 나섰다. 바스톨 장군은 나머지 중대장들을 죽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가서 아침 먹도록.”
중대장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더블원 센츄리온의 자격으로 통제본부에 와 있던 크로즐릭 백부장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1중대 1소대장 크로즐릭 백부장입니다. 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말씀은 이해됩니다만 그래도 당장 공격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다벨 8군단 은 최고 강행군으로 50마일이나 걸어왔습니다. 지금 몹시 지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건 노이에스 장군도 뻔히 짐작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시도했잖은가.”
“그렇지만……”
“그리고 우린 그들을 더 지치게 해줘야지.”
“예?”
바스톨 장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침 먹고 나서 우린 볼지악 요새를 공격한다. 노이에스 장군이 얼마나 쉴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8월 21일 제1시. 새 날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신호로 사트로니아군의 포문이 볼지악 요새를 향해 불을 뿜었다.
포위가 시작된 지 반달 만에 개시된 사트로니아군의 포격은 무서웠다. 반달 가까이 요새 내의 동태를 관찰해 온 사트로니아 포병들은 요새 내의 주 요 건물에 대해 손금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최초 공격 대상이 되는 성문 대신 무기고와 식량고 쪽을 먼저 포격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마일 저편에서 개시된 사격은 8군단의 휘리 노이에스를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스톨 장군이 원하는 바라는 건 짐작했지만, 휘리 노이 에스는 어쩔 수 없이 진지 설치를 중단하고 군단을 볼지악 요새 전방 반 마일 지점까지 이동시켰다.
8군단이 움직이자마자 볼지악 요새에서는 7군단이 뛰쳐나왔다. 그러자 사트로니아군은 포격 방향을 바꾸었다. 사트로니아의 대포들은 개활지를 건 너 달려오는 7군단을 향해 아낌없이 포문을 개방했고 화망에 갇힌 7군단은 사트로니아군의 최전방 방어선 근처까지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바스 톨 장군은 요새 내에서 달려나오는 7군단을 두드릴 뿐 등뒤로부터 다가오고 있는 8군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휘리 노이에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8군단을 더 접근시켰다. 8군단이 화살 거리까지 접근하자 그제서야 바스톨 장군은 3중대를 후방 배치했 다. 사트로니아군의 중장기병들이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본 휘리는 군단의 전진을 멈추게 했다.
짧은 순간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휘리는 합동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7군단과 8군단의 포위 공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점이 많았다. 7군단은 사트로니아군의 화망을 돌파하기에도 힘들어보였고 8군단은 최고 강행군의 여파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자칫했다간 다벨 공 국 최후의 두 전력을 이 한판에 바스톨 장군에게 넘겨줄 위험이 너무 컸다. 휘리 노이에스는 결심했고, 그의 손이 올라가자 8군단은 서서히 뒤로 빠 져나갔다. 요새 내에서 그 광경을 본 로드 메르데린도 분루를 삼키며 7군단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사트로니아군의 화망에 걸려서 버둥거리고 있던 7 군단은 재빨리 요새로 물러났고 바스톨 장군은 그 모습을 보며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설치중이던 진지로 돌아온 휘리 노이에스는 쑥밭이 되어 있는 진지의 모습을 보곤 다시 탄식했다. 그들이 출발한 후 도착한 사트로니아군 4 중대 경장기병들이 진지를 아낌없이 짓밟아두었던 것이다. 최고 강행군에 이어 곧바로 전투 돌입했기에 몹시 지쳐 있던 8군단은 퍽이나 한심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다시 진지를 설치해야 했다. 물론 사트로니아군이 지척에 있는 상황에서 그냥 쉴 수야 없었다. 휘리 노이에스는 마음속에 점수판을 만 든 다음 존경심을 가지고 바스톨 장군에게 1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볼지악 요새 내의 메르데린 공작은 바스톨 장군에게 2점, 휘리 노이에스에게 2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벌점을 주고 있었다.
그는 침통한 심정으로 휘리 노이에스의 서신을 다시 떠올렸다. 휘리 노이에스는 사트로니아군을 건드리지 말고 놔두라고 했다. 만약 그의 말을 따라 3, 4, 5, 6군단이 남겨져 있었다면, 하다 못해 그 중 한 개 군단만이라도 남겨져 있었다면 승부는 오늘 아침에 끝났을 것이다. 그도 아침의 전투를 똑 똑히 보았고 순간적으로 찾아왔던 포위 공격의 기회를 못 보지는 않았다. 역시 그 광경을 목격한 메르데린 가의 가신들이 목청껏 휘리 노이에스를 성 토하자 메르데린 공작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말대로 노이에스 장군은 일부러 포위 공격의 기회를 없앤 거야. 혹시나 우리 쪽에서 먼저 시도할까 봐 급히 8군단을 물러나게 한 거지. 그리 고 난 그 판단에 동의하네.”
가신들은 당황하여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자칫했다간 남은 7군단까지도 바스톨 장군에게 헌상하는 꼴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거든. 그랬다간 볼지악 요새는 끝장이고 바스톨 장군은 이 요 새를 이용하여 8군단까지도 일격에 물리쳤을 거야. 나는 이제서야 그의 서신을 정확하게 이해했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오늘 아침의 전투를 예견했 던 것이야. 그래서 포위 공격을 수행할 군단을 남겨두라는 의미에서 그런 서신을 보냈던 거지. 참으로 놀라운 예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나 같은 우자를 만나 그 현명한 계획을 써먹지도 못하고 파기 처분해야 했군.”
그리고 그 시각, 바스톨 장군은 점수판으로 득실을 따지는 절차 따위는 걷어차버린 채 점심 식사를 배부르게 한 다음 8군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 다.
제7시. 아침의 전투가 끝난 지 다섯 시간쯤 지났을 무렵 사트로니아군은 중장기병들을 전위로 내세운 채 8군단의 진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볼지악 요새군은 당연한 판단을 내렸다. 사트로니아의 배후를 노리기 위해 오전에 전투를 치렀던 7군단을 다시 내보낸 것이다.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침착하게 행군을 멈춘 다음 대열의 방향을 180도로 반전시켰다. 7군단은 짧게 교전한 다음 볼지악 요새로 황급히 퇴각했고, 그 소식 을 접한 8군단이 출발했을 때 바스톨 장군은 이미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쯤 8월 21일의 해도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사트로니아군의 젊은 장수들은 저녁 식사 후 그 상황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가일즈 부관의 막사는 사트로니아군의 젊은 장수들의 휴게실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서서 모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하나둘씩 가일즈의 막 사로 몰려왔고 가일즈는 그들에게 차를 내놓으며 조용히 불평을 터뜨렸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2중대장 맥스가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확인해 보겠다는 듯이 질문했다.
“뭐가 말이오, 가일즈?”
“장군께서 바로 오늘 공격을 시작하신 것 말입니다. 맥스 중대장님. 장군께서는 8군단만 깨뜨리면 그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 다벨은 자연스 럽게 무너질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 그 말에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을 보니 이상하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냉정히 보자면, 왜 장군께서는 안팎으로 적이 설 때까지 기다리신 걸까요? 마치 일부러 포위되신 것 같잖습니까.”
3중대장 빌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진작에 볼지악 요새를 함락시킬 것이지 지금 앞뒤로 적을 둔 상황에서 움직인 것은 너무 늦군요. 앞뒤로 적이 있으니 이쪽을 치면 저쪽에서 뛰쳐나오고 저쪽을 치면 이쪽에서 뛰쳐나와서 어느 쪽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소.”
다른 젊은 장수들도 대개 비슷한 반응들을 보였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어쩌면 왕관을 던진 장군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 가, 혹 자신들이 심술궂은 노파처럼 흉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해 볼 정도의 분별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정하게 생각해 보려 노력해도 바스톨 장군이 이렇게 포위가 된 다음에 움직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공격은 적이 모이기 전에 하는 것이 당연하잖은 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젊은 장수들은 깜짝 놀랐다.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들에겐 가장 껄끄러운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일즈 부관이 약간 늦게 대답한 것도 그 때문 일 것이다.
“예. 들어오십시오.”
1중대 1소대 백부장인 크로즐릭 백부장이 미소 띤 얼굴로 막사 안에 들어왔다.
장수들은 순수한 실력의 상징인 더블원 센츄리온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트로니아에는 귀족 제도가 없었지만 더블원 센츄리온이 장 교들에게 던져주는 부담감의 수위는 다른 귀족제 국가보다 낮지는 않다. 군대라는 것 자체가 계급 사회이기 때문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만, 만약 바스톨 장군이 아무런 지시도 없이 갑자기 전사할 경우 그들은 모두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한 다음 크로즐릭 백부장에게 찾아가 조언을 부탁 할 것이다.
그래서 가일즈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크로즐릭 백부장?”
“하하. 지나가는데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더군요. 그래서 차 좀 얻어 마실까 해서 이렇게 장교님들을 찾아왔습니다. 장교님들 말씀 나누시는데 폐 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 차만 좀 마시고 가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 얼마든지. 앉으십시오, 백부장.”
가일즈는 손수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왔다. 겸손한 얼굴로 찻잔이 차는 것을 보고 있던 크로즐릭 백부장이 갑자기 말했다.
“오늘 싸움 참 재미있었지요?”
만일 시선이라는 것이 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크로즐릭 백부장이 입을 연 순간 가일즈의 막사에는 시선의 실로 천이 짜여질 지경이었을 것이 다. 크로즐릭 백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의 입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장수들은 무서운 속도로 시선을 교환하며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고구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가일즈는 아무래도 자신이 호스트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실제로 그의 막사였으니까 – 속으로 성호를 그은 다음 사병들의 왕에 대항하여 검을 뽑았다.
“재미있으시다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백부장.”
“두 번이나 이겼으니 재미있는 전투였잖습니까.”
“이기긴 했으나.” 가일즈는 엄숙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것은 전투에서의 승리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전 전쟁은 모릅니다. 전투만이 제 관심사라서요. 용서해 주시길. 하지만 이기는 전투가 계속 모이면 이기는 전쟁이 되지 않을까요?”
이 능구렁이야. 무슨 함정을 파는 거지? 힌트 같은 것 없어? 가일즈는 자신의 얼굴에 땀이 흐른다면 그게 무슨 창피일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말했 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오늘의 전투는 대단한 승리도 되지 못했습니다. 오전의 전투에서는 8군단의 개입으로 7군단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오후의 전투에서는 거꾸로 7군단의 개입으로 8군단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군요.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부관님?”
“백부장 같은 노련한 군인께서 설마 모르셔서 제게 질문하시는 겁니까? 보십시오. 그 동안의 기다림은 결국 스스로를 포위 속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8군단은 이미 도달했고 이제 우린 어느 쪽도 공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도 공격할 수 없다고요?”
“그렇지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쪽을 치면 저쪽에서 방해합니다. 그리고 저쪽을 치면 이쪽에서 방해하고요. 포위되었기 때문이잖습니까. 전 장군님이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서 성취한 것이 고작 포위 속에 빠진 형국이라니오!”
가일즈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장수들은 지당한 말이라는 듯이 가일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크로즐릭 백부장 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그 말은 제게 거꾸로 이해되는군요.”
“예?”
“그럼 바스톨 장군께선 언제든 싸움터로 불러낼 상대를 지적할 수 있게 되셨군요. 8군단과 싸우고 싶으면 볼지악 요새를 공격하면 되고 7군단과 싸 우고 싶으면 8군단을 공격하면 되니까요. 원하는 때에 원하는 상대를 싸움터로 불러낼 수 있다는 건 군인에게 퍽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가일즈 부관과 젊은 장수들은 기막힌 얼굴로 크로즐릭 백부장을 바라보았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지 몰라도 오늘 낮엔 이미 그렇게 되더군요. 초청장을 발부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신나게 뛰어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7군단 은 열심히 뛰어나오더군요. 만약 8군단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러니까 8군단이 도달하기 전인 어제까지만 해도 7군단을 그렇게 뛰어나오게 할 방법은 없었겠지요. 그래서 전 제 소대원들에게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고 말해 줬습니다. 소대원들도 퍽 좋아하더군요.”
젊은 장교들은 말문이 막힌 채 크로즐릭 백부장을 바라보았다. 백부장은 찻잔을 비운 다음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시고 갑니다. 부관님. 좋은 밤 되십시오. 다른 분들도.”
“아…… 예.”
가일즈는 퍽 이상한 인사를 보내었지만 크로즐릭 백부장은 별 말 하지 않고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그가 나가고 나서 장교들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똑같은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볼지악 요새 공방전의 판세는 어느샌가 바스톨 장군의 의도대로 짜여져 있었다. 다벨 7군단과 8군단은 바스톨 장군이 부를 때마다 달려와야 했고 그 중 먼저 소진되는 것은 아마도 7군단 쪽이 될 것이다. 그리고 7군단이 소진되는 순간, 볼지악 요새는 함락되고 장군은 볼지악 요새를 타고 앉아 8 군단도 처리할 것이다. 가일즈는 그 생각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 여러분. 차 대신 술이라도 해볼까요? 갑자기 건배가 하고 싶군요.”
물론 그건 농담이었다. 사령관의 부관이 장교들을 취하게 만들어놨다면 사형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막사 안의 장교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장 대한 조망에 모두 취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2일. 태양이 채 이슬을 떨쳐내지도 못한 시간에 1마일 저편의 8군단을 향해 출발했던 바스톨 장군은 등뒤로부터 나오는 7군 단의 함성을 들은 순간 대형 반전을 명령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사트로니아군 전체가 어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반전한 다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이 7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스톨 장군은 가일즈 부관을 바라보았고 가일즈 부관은 쑥스럽다는 듯이 크로즐릭 백부장이 있는 1중 대 1소대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때쯤 바스톨 장군의 전략을 눈치 챈 휘리 노이에스도 웃어버렸다.
“하하. 이거 참. 이 노무사가 정말 복잡한 꼭두각시 조종술을 보여주는군. 이쪽 실을 잡아당겨 저쪽을 불러내고 저쪽 실을 잡아당겨 이쪽을 두드린 단 말이지. 정말 배우고 싶은 기술인데. 이게 그 머리에 왕관을 올려놓을 수 있었던 자의 힘인가.”
서 소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스승에게서 맞아가며 받는 훈련은 최고의 훈련이겠지만, 빨리 끝을 봐주지 않으면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정벌했던 것마저 무위로 돌아가게 됩 니다.”
“그러지. 노인네하고 수싸움 벌여봐야 다치는 건 우리야. 우직하게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