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4화
소복이 떨어져내린 달빛은 출렁이는 밤바다 위에서 부드러운 윤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바라미는 한손으로 돛줄을 잡은 채 자유호의 돛대 위에 서 있 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당직 선원들에게 기이한 인상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선원들은 마치 참견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은 것처럼 그 모습엔 눈길조 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돛대 위에 서 있는 여 인의 모습은 그들의 잠자리를 악몽으로 장식할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선원들은 바라미의 발 앞쪽, 돛대에 걸터앉아 있는 벨로린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검은 옷차림과 검은 살결 때문에 똑바로 바라본다 해도 보 긴 어려웠을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바라미는 그 바람에 맞춰 가볍게 몸을 한두 번 출렁거렸다. 다시 똑바로 돛대 위에 선 라미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킬리 스타드를 선택했다고?”
“응.”
“그가……”
“응.”
“그래. 다른 쪽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나?”
“바라미.”
“이젠 선택했잖아. 벨로린. 난……”
“짐작을 확인받고 싶다는 것이군.”
라미는 주춤하는 얼굴로 벨로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로린은 평온한 표정으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작대로야.”
“그럼?”
“휘리 노이에스.”
라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조용히 펴졌다.
“나를 위해서?”
“킬리에겐 그의 여자 때문에 미안해서라고 말했지.”
“나를 위해서군. 네가 킬리가 아닌 휘리를 선택했다면 난 도저히 막을 수 없었겠지. 너의 전지성(知性)이 그와 결합한다면…
라미는 그에 따르는 결과를 입밖으로 꺼내놓기 어려웠다. 그것은 가공할 정도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강력한 힘일 것이다. 킬리 선장이 불과 얼
마 전에야 깨달은 벨로린의 강력한 능력, 미증유의 정보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 힘이 휘리 노이에스와 결합된다면,
“반왕이 당장 탄생했겠지. 나를 동정한 건가, 벨로린?”
“그럴 수도.”
“모욕이군……… 동정심을 가진 하이마스터.”
“그런가? 추억을 가진 하이마스터.”
라미는 입을 다물었다. 벨로린은 부두 가까이에서 반짝거리는 물결을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들 서로의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찔러대는 일은 그만두고 싶어졌겠지만, 난 한번 더 그렇게 해야겠어. 바라미. 네가 선택하기는커녕 아직 그들을 찾아내지도 못한 것은 바로 네 약점 때문이다. 네 판단력의 절반쯤은 키 드레이번이 베어낸 모양이고 나머지 절반은 1035년 전 그 남자 와 함께 묻혀 아직도 살아나지 않았어.”
“그만둬.”
벨로린은 고개를 돌려 라미를 바라보았다.
“내가 우리들 중 가장 먼저 그들을 찾아낸 것은 내 전지성 때문이 아니야 알겠지만 내 전지성은 그런 것엔 발휘되지 않아. 난 내 약점에 충실했을 뿐이지. 널 동정했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난 킬리에게 값없는 동정심을 보내었을 뿐이야. 사실을 말해 줬다는 것에 대한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미안함을 가져봤던 것뿐이지. 그리고 그때 알았지.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벨로린은 말 끝에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킬리와 휘리. 운율이 잘 맞는데.”
“너니까……… 노래의 불꽃 벨로린. 너의 전지성은 규칙 자체에 대한 체화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규칙은 네 앞에서 자연히 물화한 모습으로 나타나 겠지.”
“그 철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쌓았구나, 바라미.”
“그래도 아직 찾지는 못했지.”
벨로린은 갑자기 거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약 인간들 중 누군가가 그 미소를 보았다면 스스로 불러일으킨 광기 속에 소멸해 버릴 것 같은 끔찍한 표정이었다.
“나는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너에게 악마의 조언은 줄 수 있겠지.”
“뭐?”
“너 자신을 봐. 넌 타워이자 인슬레이버야. 처녀처럼 막아서지만 요부처럼 유혹하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있는 뱀인 너는 고정이지만 동시 에 움직임이야.”
라미는 다시 벨로린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벨로린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나…… 그럼 내가 찾아야 되는 짝은………?”
“악마의 조언이야. 조심해, 바라미.”
벨로린의 경고에 대해 라미는 싸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역시 동정심을 가진 건가?”
공성전은 바스톨 장군에게뿐만 아니라 휘리 노이에스에게도 역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볼지악 요새 내에서 농성전을 벌여봤자 휘리 노이에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힘겹게 얻었던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다시 잃을 뿐이다. 따라서 휘리 노이에스가 바로 다음날 7군단과 8군단 전체를 거느린 채 요새 밖으로 나왔을 때 바스톨 장군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이 전투가 그들 둘의 회전으로 끝나게 될 것임을 알고 있 었다.
그래서 바스톨 장군은 볼지악 요새 앞쪽에 최선을 다한 결투장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장군은 휘리 노이에스로 하여금 볼지악 요새 자체를 등지게 하 기 위해 요새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식으로 진을 쳤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휘리는 배후 쪽으로 행동의 폭이 좁아지게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요새 로부터 지원 사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요새로부터의 지원 사격에 의한 실보다는 7군단과 8군단이라는 두 개 군단을 좁은 전장 속에 몰아넣었을 때의 득이 더 크다고 보았고 그의 참모들 역시 그에 동의했다.
휘리 노이에스는 장군의 뜻을 받아들인 듯 볼지악 요새를 등지는 형태로 진을 쳤다. 7군단이 가세했기에 그의 병력은 1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많 은 인원이 요새 앞쪽의 좁은 지역 요새이므로 그 전방이 좁은 것은 당연하다 에 밀집하자 기동성은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휘리는 전통 적인 진형을 깨끗이 포기하고는 기병들을 전방 배치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바스톨 장군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친구, 록소나에서 서 브라도에게 배운 것인가?”
7, 8군단 연합 병력은 그야말로 서 브라도 스타일로 진형을 짜고 있었다. 진형은 크게 두 열로 나뉘어 있었다. 전열엔 7군단과 8군단의 중장기병 1, 600기를 중앙 배치하고 그 좌우로 각자 350기, 그리고 500기의 경장기병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열엔 역시 양군단의 중장보병 3, 600명을 중앙 배치하고 좌측엔 1700명 가량의 노예병, 우측엔 경장보병 3,000명을 배치해 두었다. 한마디로 중앙에 모든 주력을 배치시킨 형태였다. 포병은 데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두 요새 위쪽에서 사트로니아군을 향해 포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장군의 옆에서 역시 다벨군의 포진을 보고 있던 가일즈 부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상하군요. 마치 중앙 돌파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앙 돌파한 중장기병들로 하여금 반전하여 아군의 배후를 치게 함과 동시에 보병들을 전진시켜… 앞뒤로 공격을 가할 생각일 것입니다. 그 방법 이 아니면 2열로 나뉜 부대를 이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텐데요.”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트로니아군의 중앙 쪽을 바라보았다.
중앙은 철통 같은 방어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차 방어진과 더불어 창을 든 경장보병 300명, 그리고 3,700명 정도의 중장보병들에 의한 심층 방어 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왼쪽엔 1,800기 가량의 중장기병, 오른쪽엔 1,400기 가량의 경장기병이 배치되어 있었고 300명의 궁수대는 경장기 병의 뒤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1,600명 가량의 경장보병은 예비대로 중장기병의 뒤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진형 상에서 사트로니아군의 유리한 점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상대방의 중장기병을 막아야 하는 중앙은 창병과 120문 가량의 대포로 구성된 마차 방어진으로 완벽한 방어가 되어 있었고 좌우의 기병들은 상대의 기병들의 숫자를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설령 상대편의 중장기병이 중앙이 아닌 좌측이나 우측으로 공격한다 하더라도 돌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좁은 전장에서 어쩔 수 없이 부대를 2열로 배치해야 되는 다벨군과 넓은 지역을 이용하여 부대 전체를 펼쳐보일 수 있는 사트로니아군의 차이에 기반하는 것이었다. 10,750명 대 9,100명으로 숫자가 더 적은 사트로니아 측이 월등히 유리한 입장을 쥐고 있는 것 은 요새를 바라보는 식의 진형을 선택한 바스톨 장군의 판단이 정확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진형에서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바스톨 장군은 이제 문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과연 휘리 노이에스가 바위에 머리를 들이박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군. 중앙은 아닐 거야.”
“예. 의사를 타진해 볼까요?”
“그래. 공격 개시.”
8월 25일 제4시. 사트로니아군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마차 위에 놓아둔 대포는 물론 명중률이 엉망이 된다.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포를 발사할 때마다 사격 각도가 비틀려버리는 것이 다. 게다가 너무 큰 대포 또한 사용할 수 없다. 후퇴 반동이 큰 대포를 사용하면 마차 자체가 반동에 의해 심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형 전 체가 흐트러지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고 마차 방어진의 본래 취지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제4시에 시작된 사트로니아의 대포 사격은 소구경 대 포에 의한 마구잡이 사격이었다.
이런 사격은 제압 사격이라기보다는 가일즈 부관의 말대로 ‘의사 타진’에 가까운 것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볼지악 요새 앞쪽의 좁 은 지역에 밀집하듯이 서 있던 다벨 중장기병들은 호된 맛을 봐야 했다. 그대로 서 있다간 선 자리에서 전멸될 판국인지라 휘리 노이에스는 중장기병 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그 돌격 방향을 놓고 사트로니아군, 다벨군, 그리고 볼지악 요새 내의 인원들 전부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과연 휘리 노이에 스는 중장기병을 어느 방향으로 돌격시킬 것인가.
“좌측입니다!”
가일즈는 고함을 내질렀다. 바스톨 장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중앙의 마차 방어진은 중장기병으로 통과하기 어렵다. 따라서 좌측 아니면 우측으로 공격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벨 군의 중장기병 1,600기는 사트로니아의 좌측에 있는 중장기병을 노리고 돌격했다. 바스톨 장군 좌익 쪽을 향해 외쳤다.
“나가서 영격하라!”
사트로니아의 1,800기의 중장기병 역시 빠르게 뛰쳐나갔다. 바스톨 장군은 다벨군의 중장기병들이 넓은 곳으로 나와 활개치게 내버려둘 생각은 조 금도 없었다. 그리고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상대를 박살내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볼지악 요새 위쪽으로부터 포환과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들었 지만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로 전날 죽었던 빌포 중대장의 복수를 위해 이를 갈고 있던 솔티 백부장은 목청껏 외쳤다.
“빌포! 다벨 놈들의 피를 받으소서!”
다벨측 1,600기, 사트로니아측 1,800기로 합계 3,400기의 중장기병들이 전장 왼편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창대가 부러지고 갑옷이 꿰뚫리며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이 맞부딪히기 직전, 다벨군의 경장기병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휘리는 후열의 보병들이 전장에서 고 립되는 지경을 막기 위해서 전열의 기병들을 최대한 빨리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휘리에게 그런 약점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스톨 장군은 바로 그에 맞는 진형을 구축해 두고 있었다.
다벨 경장기병 중 좌익에 있던 500기의 경장기병은 사트로니아의 우익에 있는 1,400기의 경장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바스톨 장군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고 사트로니아 우익의 경장기병들은 역시 앞으로 뛰쳐나가며 다벨 경장기병들을 영격했다. 바스톨 장군은 볼지악 요새 앞쪽에 거대한 역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만들어 다벨군을 반포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좌우에서 돌출한 기병들은 모두 상대방의 기병을 압도하 고 있었고 중앙엔 단단하기 짝이 없는 방어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남은 기병은 하나. 다벨군 우익에 서 있던 서 기리우의 350기 가량 되는 부대뿐이 었다. 바스톨 장군은 상당한 자신감 속에서 그들의 행보를 관찰했다.
서 기리우의 부대는 중앙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씁쓸하게 웃었다. 휘리는 기병들을 다 치워야 했고 이 좁은 전장에서 그들을 보낼 곳이라곤 어차피 중앙밖에 없었다. 기병에겐 돌격 거리가 있어야 하므로 다른 방향은 불가능하다. 바로 바스톨 장군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바스톨 장군은 그 순간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기에 그가 유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휘리를 동정하며 마차 방어진 쪽으로 명령을 내렸다.
장군의 명령에 따라 대포 옆에 서 있던 포병들은 재빨리 물러났고 창병들은 15피트쯤 되는 그들의 장창을 들어올려 마차 너머로 앞쪽을 겨냥했다. 마차 방어진 앞쪽으로 고슴도치 같은 창의 벽이 생겼다. 서 기리우의 보잘것없는 부대는 마차 방어진으로부터 돌출된 장창에 닿자마자 분쇄될 것이 다. 그리고 그 다음은 후열에 있던 중장보병들이 달려올 것이다. 바스톨 장군은 마차 방어진 뒤쪽에 있던 중장보병대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저건 뭔가!”
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망원경을 들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그렇게 외친 다음 망원경을 들어올렸다. 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서 기리우의 부대는 모두 오른손에 불꽃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 바스톨 장군은 그들이 불 붙은 병을 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망원경을 거의 팽개치듯이 내려놓으며 외쳤다.
“이런! 갇힌다. 본대, 앞으로 ―!”
그러나 그런 명령은 수행 불가능했다. 포병과 창병이 자리 바꿈을 하고 있던 마차 방어진에서는 급격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고 따라서 그보다 더 뒤쪽에 있던 중장보병들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은 이 미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방어진의 왼쪽 부분에 도달한 경장기병들은 그들만이 가능한 기동성으로 게다가 350기라는 적은 숫자 때문에 더 용이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은 마차 방어진 앞쪽을 죽 지나가며 손에 들고 있던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마차들 위로 불 붙은 화염병이 날아들자 곧 맹렬한 화염이 솟구쳤다. 마차 위에는 대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병들이 철수하면서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창병들과의 급격한 자리 바꿈 때문에 미처 회수하지 못한 장약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불길이 쏟아지자 마차 방어진에는 끔찍한 폭 발이 일어나며 삽시간에 화염의 벽으로 바뀌고 말았다.
경장기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창병들은 비명을 올렸다.
폭발을 정면으로 받고 즉사해 버린 창병들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불이 붙은 채로 달리는 창병,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뒹구는 창병들은 마차 방 어진 이편에 지옥 같은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마차 방어진에 그런 재난을 선사한 서 기리우의 부대는 그것을 감상하기는커녕 그대로 계속 오 른편으로 달렸다. 그리고 전장의 오른쪽에는 다벨 경장기병들과 싸우고 있던 사트로니아군의 경장기병들이 있었다. 서 기리우의 부대는 바로 그 사 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의 옆구리를 찔러들어갔다. 500기라는 적은 숫자를 맞이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던 사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은 뜻하지 않은 방향에 서 달려드는 서 기리우의 공격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스톨 장군은 불의 벽이 된 마차 방어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기병 돌격을 막기 위해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던 마차들은 쉽게 분리할 수 없었고 게 다가 불이 붙은 이상 그것을 단시간에 치워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의 벽 때문에 전장 전체의 모습은 다벨군에 절대 적으로 유리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볼지악 요새 앞쪽의 좁은 땅은 불의 벽이 생기자 입구가 둘인 폐쇄 지역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양쪽의 입구 는 바로 사트로니아의 기병들이 막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쁜 점은, 다벨군의 모든 병력은 그 폐쇄 지역 안쪽에 있었지만 사트로니아군의 본대인 중장보병들은 그 폐쇄 지역 바깥에 있다는 점이었다.
좁은 곳을 더 좁게 만들어…………… 이점을 찾는단 말인가!’
바스톨 장군은 이 굉장한 발상에 대해 신음을 흘렸다. 어쨌든 바스톨 장군은 방어의 달인이다. 그리고 그가 아닌 다른 장수였더라도 아군이 더 넓은 지대에 포진할 수 있다면, 그 이점을 살리기 위하여 전장의 확대를 막는 방어진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휘리 노이에스는 전장을 확대하려 애쓰는 대신 상대방이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여 화염병을 준비한 다음 전장을 더 좁혀버렸다. 그리고 ‘기동성이 상실되는 협소한 지대’라는 단점이 ‘더 좁 게’가 더해지자 오히려 장점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바스톨 장군은 맹렬하게 외쳤다.
“경장보병, 진군! 그리고 궁수대도 진군하라!”
우겨넣는다, 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바스톨 장군은 폐쇄 지역 안쪽으로 중장보병을 투입시키기 위해 양쪽 입구에 압력을 가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좌익 후방에 있던 경장보병들이 앞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쪽에서는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이 싸우고 있는지라 경장보병들은 더 이상 전진 할 수 없었다. 바스톨 장군은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중장기병!중장기병! 대오를 흩어라. 솔티 백부장! 사이를 비우라고!”
중장기병들이 약간 듬성듬성하게 서준다면 그 사이로 경장보병들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에 눈이 뒤집혀 있던 솔티 백부장은 사령 관의 명령을 듣지 못했다.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그의 명령대로 대오를 흩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 뒤쪽에 있던 다벨 보병들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노예병, 중장보병, 경장보병들 전부가 전장 왼편을 향해, 즉 바로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휘리는 전장 왼편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다.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지휘관을 잃고 백부장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기 때문에 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전장의 오른편에서는 다벨 경장기병들이 사트로니아 경장기병을 반포위한 채로 잘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휘리는 모든 보병들을 전장 왼편으로 전진시켰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그 움직임을 보자마자 다벨 중장기병을 이끌고 있던 서 켈커는 빙긋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오른쪽으로 돌아라!”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과 싸우고 있던 다벨 중장기병들은 계속 싸우면서 오른쪽으로, 즉 전장 왼편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이 비워준 자리로 3개 보병대가 모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폐쇄 지역의 왼쪽 입구로 들어간 사트로니아 중장기병은 무려 4개 부대의 포위를 당한 셈이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진전되자 복수심에 미쳐 날뛰고 있던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대의 솔티 백부장도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뒤로 물러나려 해도 아군 의 경장보병들이 뒤를 막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이를 갈며 경장보병대에게 왼쪽 후방으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중장보병대를 빨리 폐쇄 지역 안 쪽으로 집어넣는 것도 중요했지만 중장기병들을 폐쇄 지역 안쪽에서 고사시킬 수는 없었다. 사트로니아 경장보병들이 왼편으로 물러나자 중장기병 들은 그들이 비워준 자리를 통해 뒤로 물러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4개 부대의 맹공을 받고 있는데다 그중엔 전투 발발 후 10분 동안은 이길 부대가 없다는 서 소팔라의 노예병이 끼 여 있었던 것이다.
“우ㅡ우우우우ㅡ !”
서 소팔라는 괴성을 지르며 흉갑까지 벗어던진 채 날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미쳐 날뛰고 있는 그의 노예병들에게 강렬한 인상은 주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병들은 투망을 던지고 사이드(scythe)와 밀리터리 포크를 휘두르며 악귀처럼 사트로니아 중장기병에게 달려들었다. 솔티 백부장 은 중장기병들을 폐쇄 지역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가 가까스로 폐쇄 지역의 왼쪽 입구를 벗어났을 때였다.
“갈 때 가더라도 내 망토는 돌려주고 가시지!”
솔티 백부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그들을 공격하고 있던 4개 부대 중 경장보병을 주시했다. 그들 가운데서 오만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기사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너희들의 천박한 대장이 내 망토를 가져갔단 말이야. 그건 비싼 거라고.”
솔티 백부장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소사라! 소사라 림파이어!”
“서 소사라다.”
다음 순간 솔티 백부장은 지금까지 중장기병들을 끌어내려 애썼던 것도 잊어먹은 채 다벨 경장보병대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일즈 부관 은 그가 모시고 있던 상관의 근엄한 입에서도 쌍욕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왼쪽 입구는 돌격을 감행한 솔티 백부장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막혀버렸다. 그 좁은 입구를 경계로 바깥쪽에서는 사트로니아 경장보병과 중장기 병이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 입구 안쪽에서는 다벨군의 중장기병, 노예병, 중장보병, 경장보병들의 네 개 부대가 밀고나왔다. 도저히 뚫릴 리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솔티 백부장의 불타는 복수심은 그로 하여금 그 입구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혀나 입술뿐만 아니라 이 또한 훌륭한 발성 도구임을 증명해 보이며 오른쪽 입구 쪽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사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이 두 개로 나뉜 다벨 경장기병들에 의해 여전히 반포위 상태로 싸우고 있었다. 두 개 부대를 합쳐봐야 850기였기에 1,400기인 사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의 60%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 기리우의 베테랑 경장기병들은 측면 기습의 효과를 아직까지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고 그래서 숫자가 더 많은 사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이 오히려 밀리는 기색 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바스톨 장군이 아무리 이를 갈아보았자 우측 입구 또한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았다. 불의 벽 바깥에 있던 사트 로니아 중장보병은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이탈되어 버린 것이다.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가일즈 부관이 턱을 떨며 말했다.
“강제 돌파를 명할까요?”
바스톨 장군은 아직까지도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는 불의 벽을 바라보았다. 기병도 아닌 중장보병들에게 저기를 강제 돌파하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된 다. 그런 명령을 내린다면 병사들은 명령을 거역할지도 모른다.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그들이 아직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을 때를 이용하여 안전한 퇴각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물러난다.”
“장군님!”
“팔라레온까지 물러나 로드 데자크와 폴라리스에게 도움을 청하자.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팔라레온 해방군이었으니 그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 다.”
거짓말이다. 그와 하드루스 대통령, 그리고 폴라리스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다섯 번째의 검을 꺾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거꾸 로 그 검에 찔렸다. 노장군은 분루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후퇴 명령을 내려라.”
가일즈는 다시 한번 바스톨 장군을 바라보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이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타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본대 중장보병은 전장 바깥으로 이미 이탈되어 있다. 그들은 안전하게 후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일즈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가 흐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본대 — 후 — 흐흑!”
가일즈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국을 떠난 이후로 한번도 진 적이 없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그들은 휘리 노이에스에 게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그 순간 가일즈의 머릿속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인 젊은이의 이름이 똑똑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부관이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본 바스톨 장군은 손수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그는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 신이 찾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장군님!”
바스톨 장군은 깜짝 놀라서 가일즈를 바라보았다.
가일즈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순간 노장군은 이 젊은 장수가 너무 큰 충격에 미쳐버렸음을 깨달았다. 전쟁터라는 극단적인 공간 에서는 그런 사람이 많이 나타나며 전쟁터를 전전하며 반평생을 보낸 노장군은 그런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조심스럽게 부관을 바라보 았다.
“가일즈 부관?”
“장군님, 장군님! 후퇴하셔서는 안 됩니다!”
“어, 가일즈.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잘 아네. 그래. 후퇴하지 않겠어. 그럼 되지? 자, 진정하게.”
“예! ……예? 아, 아니, 장군님, 전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절 진정시킬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진정하셔야 되는 건 장군님 쪽입니다!”
“가일즈 부관. 걱정 말게. 난 진정하고 있네.”
“저쪽을 보시면 그러지 못하실 겁니다!”
가일즈 부관은 팔을 어깨에서 뽑아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전장의 오른쪽 후방을 가리켜보였다. 바스톨 장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부관이 미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친 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장군은 거칠게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얕은 둔덕의 정상 위로 나란히 선 그들의 모습은 장엄했 다. 곧게 선 깃발은 언덕 위를 치닫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햇빛에 반짝이는 갑주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나란히 선 말들의 씩씩한 모습은 엄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에 올라탄 기사들은 창을 곧바로 내지른 채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빠 – 바바바바 –
맑은 나팔 소리가 울렸다.
다음 순간 둔덕 위로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기사들의 돌격이 시작된 것이다. 둔덕을 타고 기사들은 파도처럼, 산사태처럼 짓쳐 내려왔다. 그 리고 바스톨 장군은 그 은빛 격류의 첨단부에서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노기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목이 터져라 함성 을 질렀다.
“서 브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