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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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2화


쏴아아아……… 거센 빗발이 내리고 있었다.

라트라인 시내의 길과 골목마다 쌓여 있던 먼지와 오물들은 며칠째 계속되는 비에 깨끗이 씻겨나갔고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새하얀 포석들 위로 빗방울들이 무수한 동그라미를 겹쳐 쌓았다.

세실리아는 어느 건물의 처마 밑에서 눈살을 조금 찌푸린 채 비를 긋고 있었다. 가끔 처마 끝에서 영글진 커다란 물방울이 떨어져 그녀의 어깨를 적 셨고 그때마다 어깨를 조금씩 움츠렸지만 전체적으로 별 움직임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치맛자락 옆에는 커다란 꾸러미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 녀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어가고 있었지만 세실은 홀로 정물인 듯 가만히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빗발이 약간 가늘어졌다.

세실은 옆에 내려놓았던 꾸러미를 들어올리곤 잠깐 동그란 물결로 뒤덮인 길을 바라보았다. 뭔가 용기를 끌어내어야 될 것 같다고도 생각되고, 동시 에 그냥 멈춰 서 있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꾸러미를 끌어안고는 빗줄기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찰박거리는 물소리. 세실은 다시 눈살을 찡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미 많이 젖어 있던 치맛자락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 감겨왔고 내처 달리다간 치마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 지경인지라 그리 빠른 걸음은 못 되었다. 세실은 고개를 푹 숙여 가슴에 안은 꾸러미에 얼굴을 묻듯이 한 채 걸어갔다.

잠시 후 세실은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홀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선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세실은 홀딱 젖은 채 무례하게 바라보 는 선원들 사이로 걸어가야 했다. 예상대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봐, 아가씨. 누구 가슴에 불을 지르려고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거지?”

세실은 그냥 웃어주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계단을 중간쯤 올라갔던 세실은 다시 몸을 돌려 홀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농을 던졌던 사내를 찾았다. 사내는 패거리와 무슨 저질스러운 농담을 나누며 웃고 있어서 그녀를 보진 못했다.

세실은 호흡을 가라앉힌 다음 사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입 속으로 조용히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실은 살짝 웃으며 다시 계단을 올라갔 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세실은 꾸러미를 안은 채 열쇠를 꺼내느라 잠시 낑낑거리다가 가까스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하나와 의자 하나, 수납용 큰 상자 등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꼬아올린 다리 위에 복수를 올려놓은 키는 오른손에 쥔 손수건으로 복수의 검신을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세실이 방을 가로질러 상자 위에 꾸러미를 내려놓을 때까지 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실은 투덜거리며 수건을 집 어들어 머리를 닦았다. 그녀가 머리를 다 닦을 때까지도 키는 여전히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었다.

세실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둔 채 말했다.

“숫돌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워낙 잘난 검이라서 갈 필요가 없나 보지?”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실은 투덜거리며 창가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의자와 마주보는 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자연히 그녀의 얼굴은 키의 시선과 교차하는 각도에 오게 되었다.

세실은 그 자세로 가만히 키를 쳐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키는 복수를 집어던졌다.

앉은 채 던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세로 날아간 복수는 세실의 얼굴 옆을 지나 벽에 꽂혔다. 콱! 새파랗게 질린 세실은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등을 부딪혔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게 된 세실은 고개를 돌려 벽에 꽂혀 있는 복수를 보았고 그것이 거의 검신 중간까지 꽂혀 있는 모습에 생침을 삼켰다. 틀림없이 칼 끝은 여관 밖으로 나가 있으리라. 세실의 머리 위에 얹혀져 있던 수건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세실은 덜덜 떨리는 고개를 다시 돌 려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복수를 던졌던 왼손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뭐냐?”

“미, 미안하지만 그, 그, 그거 내가, 내가 하고 싶은 마, 말인데?”

키는 허리를 튕겨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실은 걸어오는 키를 보면서도 꼼짝도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세실의 앞에 선 키는 복수의 칼자루를 쥐고 그것을 끌어당겼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세실에겐 여관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진동이 전해져 왔다. 횟가루가 떨어져내리고 회반죽 벽 속에 있는 나무들 이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키는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복수를 쥐고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실은 복수의 검신 끝 부분이 실제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의자에 도로 앉은 키는 다시 손수건을 들어 복수를 닦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세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다시 복수가 날아올 것 같다는 위기 의식이 세실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 돌아왔다고.”

“그 나이가 되도록 무의미한 인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철이 덜 들어서.”

“집어치워.”

“집어치울 건 너야. 날 죽일 생각이었어?”

키는 아무 대답 없이 경멸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세실을 보았다. 그리고 세실은 그것이 훌륭한 대답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시선을 말로 바꿔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벽을 맞추진 않는다.’

세실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퍽이나 점잖은 방식으로 주의를 촉구하는군. 좋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야. 진짜 널 라트랑 후작에게 팔 거야?”

“라이온이 목숨을 걸고 카밀궁으로 잡혀간 것은 농담이나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판다는 말이지. 오스발 한 명에? 그것도 그저 그를 죽이기 위해?”

“확인인가, 질문인가.”

“그래, 좋아. 실력만 놓고 본다면 넌 우수한 장수감이긴 하지. 적어도 바다에선 최고일걸. 널 잡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 좋다구. 순수하게 실제적인 것만 본다면 이건 말이 안 될 것도 없는 상황이야. 하지만………… 사지 않을 거야, 젠장. 아무리 좋은 거래라도, 에름 후작은 바보가 아냐. 제국 의 공적 제1호와 손을 잡는다면 그 역시 제국의 공적이 되는 것이고……”

“이름을 바꾸면 돼.”

세실은 눈을 껌벅거리며 키를 바라보았다. 당황 때문에 질문은 약간 늦게 나왔다.

“뭐라고?”

“네 말대로 후작은 바보가 아니다. 내 이름을 바꾸면 돼.”

“……얼굴은?”

“흉터를 몇 개 만들거나, 아니면 오닉스의 예를 따르면 된다.”

키는 이보다 단순명쾌할 수는 없다는 듯이 척척 대답했다. 세실은 그 광경을 상상했다. 키 드레이번이,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드레이번이 흉터의 잭 이나 마스크 쓴 빌이 되어 라트랑의 해군을 지휘한다고? 세실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게 말이 되냐! 넌 제국의 공적 제1호야!”

“그런데?”

“빌어먹을, 이름을 버린다고?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버린다고?! 그렇겐 못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악명이긴 하지만, 아니, 악명이니까 더욱더 못 버려! 사람이 선한 명성보다 더 버리기 힘든 건 사실 악명이라고. 네가, 네가 정말 그걸 버릴 수 있어? 모든 사람을 벌벌 떨게 만드는 그 짜릿한 이 름을 버릴 수 있냐고!”

키는 쥐고 있던 복수를 한 바퀴 돌렸다.

어느새 상체를 불쑥 내밀고 있던 세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키는 한 바퀴 돌린 복수를 거꾸로 들어 칼집에 꽂아넣고는 그것을 침대에 던졌다. 자신의 옆에 떨어지는 복수를 보던 세실은 키가 지나가듯이 던진 말에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칼을 쥐고 있다간 죽이고 말겠군.”

키는 세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무거운 시선이 세실의 파랗게 질린 얼굴 위에 초점이 맞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키는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그저 허공을 향해 말했다.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라.”

세실은 아무 말 없이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앞의 말에 덧붙이는 말인지 새로 꺼내는 말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고 싶지 않다니? 무슨 말이야?”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세실은 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세실은 키에게는 마음이 없다는 가설과 그 말이 잘못되었 다는 가설 중 하나를 놓고 택일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상념은 상념을 뒤덮기보다는 더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세실 은 그 속에서 길을 잃고 꽤 긴 시간을 침묵했다.

그리고 세실은 키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눈앞에서 그 손이 죽여 넘긴 사람들의 숫자가 얼만지나 알고 그 따위 소릴 하는 거야?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 따위의 말을 하는 건 더욱 아닐 텐 데. 내가 알기로도 넌……”

“여자든 젖먹이든 노인이든 몸값을 내지 못하는 자는 모두 노예로 팔거나 상어에게 던져주거나 배에 태운 채 불을 질렀다. 됐나?”

세실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키는 오른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지만 원래도 짧은 머리가 아니었는 데다가 방랑자의 생활 동안 주체 못할 정도로 길어져 있었기에 그 머릿카락은 다시 흘러내려 그의 얼굴을 가렸다.

축축한 빗소리가 서늘하고 휑뎅그렁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난 죽이고 싶지 않지? 이건 퍽이나 웃기는 대비가 되는데, 저 무가치한 오스발을 죽이기 위해 남해 최강의 선단이든 대해적의 자존심이 든 제국의 공적 제1호의 이름이든 아낌없이 포기하는 너와…………… 나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너는………… 어째 한 사람인 것 같지가 않군.”

“그런가.”

“왜, 나는, 아니지?”

“말하고 싶지 않다.”

“왜, 나는, 아니지?”

“닥쳐.”

“왜, 나는, 아니지?”

“내가 줄 수 없는 죽음을 원하니까, 빌어먹을!”

두 사람이 자아내는 침묵의 천으로 빗소리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난 네게 죽여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어.”

“그럼 네가 나에게 부탁하는 것은 뭐냐?”

“그건……”

세실은 말을 멈춘 채 잠시 멍한 시선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

“그건 나도 말할 수 없어. 그게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뭔지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란 말이야. 그걸 하나뿐 인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최후의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제일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난……”

세실은 말을 멈추고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는 빗소리를 등진 채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듣는 봄밤의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것이라고 하겠어.”

키의 눈꺼풀이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세실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말했다.

“9 다음에 10이, 99 다음에 100이 오게 하는 그 엄청난 힘이라고 하겠어. 더 이상의 ‘왜’가 필요해지지 않는 최초의 ‘그래서’라고 하겠어. 불꽃의 무 게만한 마음의 무게로 가장 무거운 우주를 지탱하게 하는 지지점이라고 하겠어.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장 먼 것을 바로 그 눈동자 앞의 눈꺼풀 속에 감 추어놓은 자라고 하겠어. 하늘과 땅을 최초로 열어버린 그 무신경함이라고 하겠어. 어느 날 느닷없이 기억나는 모든 주소를 향해 너 지금 살아 있냐 고 묻는 편지를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기분이라고 하겠어.”

세실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좋을 때와 장소에서도 나를 끝없이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어.”

“안타까움이 끝나면?”

“뭐?”

“너는 몇 살인가.”

세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의 얼굴은 태반이 넘게 머리카락에 가려 있어 어떤 표정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왜 묻는 거야? 내 나이가 왜 궁금하지?”

“네 나이는 궁금하지 않아. 그러나 네가 정상적인 죽음을 연기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맞나?”

“마법사에겐 이게 정상이야.”

“빌어먹을. 네가 나를 통해 찾고 싶어하는 그것을 찾은 다음엔 어쩔 건가?”

“죽을 거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답해 버린 세실은 멍한 눈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차가운 얼굴 그대로 말없이 세실을 보고 있었다. 세실은 당황하여 손 을 내저었다.

“그, 그게 아냐. 난, 그걸 찾기 위해 삶을 연장시킨 것이지, 죽기 위해 그걸 찾고 있는 건 아냐!”

“내겐 똑같아 보인다. 어쨌든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찾고 나면 죽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건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기랄, 그런 엉터리 논법이 어디 있어……”

말 끝을 흐리던 세실은 패배감 속에 고개를 떨구었다. 키는 세실의 이마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네가 찾는 것의 의미를 뒤집어놓았다.”

“뭐라고?”

“너는 찾고 있다고 말했지. 그럼 넌 네가 찾고 있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로군. 정말 분리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넌 분리된 그것과의 합일을 통해 완전성으로 회귀하겠다는 것이겠군? 그렇다면 그것은 삶의 논리고 존재의 의미다. 하지만 넌 네 속에서 그것을 뒤집어 죽음의 논리로, 부재의 의미로 바꿔놓았다.”

고개를 떨구고 있었기 때문에 세실의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은 키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는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라. 집을 떠나는 행위는 이미 절반쯤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지.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내게서 찾아내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않겠다. 너는 삶의 근원적 의미를 원하지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그것을 원한다. 그리고 난 누군가의 죽음의 원 인이 되어주는 일엔 익숙하지만 이유가 되어주는 일은 취급하지 않아. 더군다나 그렇게 자가당착적인 의미 같은 것은 줄 방법도 없다.”

세실은 소매 안에서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키 드레이번은 자가당착이라는 말만큼 그녀를 슬프게, 혹은 공포에 젖게 만드는 말도 드물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거세어진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후드드득! 그 순간 세실의 뇌리에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오스발을 죽인 다음엔 어쩔 거지?”

말을 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던 세실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키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단지 오스발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뿐인데도. 세실은 그 이유 없는 분노에 잠깐 놀랐고, 다음 순간 크게 안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느낀 승리감은 그대로 역투사되어 이번엔 키로 하여금 패배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세실이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장난기마저 서려 있었다.

“너도 마찬가지군?”

“제길, 같지 않아.”

“똑같아. 떼쓰지 마. 거의 성공할 뻔했다는 건 인정하지. 하하하!”

키는 벌떡 일어났고 덕분에 의자가 와라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세실은 이번엔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제서야 그녀는 그 녀가 보낸 세월에서 체득한 희극적 관조 의식을 되찾았고 그래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이 정확했어. 너도 찾고 있어.”

“난 찾고 있지 않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

“천만에. 왜 그런지 모르겠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미심쩍지만, 관 속에 몸을 누이기 위한 기나긴 도정으로서 의 생이라는 것을 인정해 버리지 못하는 나처럼, 너에게도 그냥 놔두고 그 존재를 인정해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어. 오스발이 바로 그지. 그리고 그가 네 안타까움이지.”

“안타까움 따위…………”

“시끄러워. 할머니 앞에서 재롱부리면 귀염밖에 받을 게 없어. 거의 넘어갈 뻔했군.”

세실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키는 그 시선을 피했다. 그 작은 동작이 세실에게는 근 20년 이내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승리감을 선사했다. 남해가 생겨난 이래 최고의 바람을 불러내었을 때도 그녀가 이런 기분을 느끼진 못했다.

“항상 남자 보는 눈이 엉망인 나였지만, 이번엔 정확했어. 워낙 이상한 선택이어서 나조차 긴가민가했지만 이젠 확실해. 넌 찾아낼 거야.”

“제멋대로… 떠들긴.”

그리고 세실은 실제로 키가 뭐라고 말하건 말건 제멋대로 떠들었다.

“그리고 넌 옆에서 따라다니던 이 늙은 여자로 하여금 어깨 너머로 그것을 슬쩍 훔쳐볼 수 있을 정도의 기회는 주겠지. 넌 도망칠 수 없어.”

키는 이를 드러낸 표정으로 더 물러났고, 그러다가 아예 몸을 돌렸다. 세실은 쾌활하게 말했다.

“어디 가니?”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세실은 여유 있게 추리해 내었다.

“겉옷 없이 나가는 거니 아래에서 술이나 한잔 할 생각인 모양이군. 참, 내려가거든 좀 이상한 모습 보게 될 텐데 너무 놀라진 마.”

문을 반쯤 열고 있던 키는 그 자리에서 멈춘 채 말했다.

“이상한 모습?”

“테이블 아래에서 왈왈거리며 다리로 자기 귀 뒤를 긁기 위해 애쓰고 있는 녀석이 있을 거야.”

키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세실을 바라보다가 그냥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러곤 홀에서 세실이 말한 대로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곤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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