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5화

랜덤 이미지

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5화


카밀궁의 외벽에 오렌지빛 황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경비병들의 긴장이 가장 느슨해지는 시각이다. 하지만 카밀궁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툭 치면 쇳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장 해 있었다. 그들은 이 시각에 찾아올 누군가에 대한 언질을 미리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적색으로 물든 대로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열광과 공포가 동시에 스며나오고 있었다.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숨막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온다!’

카밀궁 경비병들의 눈이 일제히 움직였다.

대로 저편으로부터 카밀궁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와 그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남자와 여자. 경비병들의 눈은 모두 선두에서 걸어오고 있는 키 큰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아직 이른 시간에 이미 밤을 걸치고 걸어오는 것 같은 키 큰 남자의 얼굴은 거칠게 나부끼는 긴 머릿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그 남자의 코트 자락 사이로 비죽이 튀어나온 장검 자루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 중 하나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간 경비병은 곧 정원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달했다. 경비병은 빠르게 말했다.

“왔습니다!”

“얼마나?”

“세 명입니다, 후작님.”

·맙소사, 율리아나 공주의 말이 옳았어. 정말 미친 작자로군.”

에름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린 후작은 본관 쪽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고 있는 본관의 유리창들은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그래서 후작은 그 뒤쪽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후작은 2층 가운데쯤의 창문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본관 2층의 방 안에서는 율리아나 공주가 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하 지만 꼿꼿이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리,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왜 후작님은 직접 나가신 거지?”

“그래야 키 드레이번이 의심하지 않을 테잖아.”

“그렇긴 하겠지만, 나 정말 무서워. 이해가 안 돼. 반란군들이 카밀궁으로 쳐들어왔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키 드레이번이라는 자는 정 말 대단하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를 이렇게 겁에 질리게 만들다니.”

율리아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지.” 

그리고 율리아나는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무리 남해의 제왕이라고 해도 겨우 세 명이서 어떻게 하겠어?”

“그래. 아무 일 없겠지? 응? 무슨 일이 생기면 나…………” 

이루미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카밀궁의 정문 경비병들 사이에서는 이루미나와 비슷한 증세가 만연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온몸을 떨면서 코앞까지 걸어와 멈춰 선 검은 옷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약간 짜증스러워하는 눈빛으로 경비병들을 노려보았고 그래서 경비병들과 함께 정문에 서 있 던 경비대장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십니까.”

“키 드레이번이다. 라트랑 후작 에름과 약속이 있는데.”

·진짜 키 드레이번이오?”

경비대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어린애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법에 제국의 공적 제1호가 걸려들 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 이었다. 따라서 지금 카밀궁의 정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의 남자는 퓨아리스 4세이거나 아자르 황제이거나 우리 주님일 수는 있어도 절대로 키 드레 이번일 리는 없다……………

“죽여도 되는 경비병이 있다면 말해 주겠나. 그에게 내 검을 잠시 쥐게 해주겠다.”

경비병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고 그들 중 평소 그들의 경비대장에게 밉보였던 자들의 얼굴은 아예 시커멓게 변했다.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찌르고 죽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돈 꿔준 거 안 갚아도 된다고 말할걸!’ 그들이 지나온 나날의 과오에 대해 다채로운 그러나 별로 고 상하지는 않은 후회를 하는 가운데 경비대장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됐소. 안내하겠으니 따라오시오… 키드레이번.”

경비대장은 키 드레이번을 마치 한 단어인 것처럼 말하며 몸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목 뒤가 선뜩해지는 기분을 느낀 경비대장은 곧 몸을 돌린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수야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경비대장은 약간 큰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키와 라이온, 그리고 세실은 경비병들의 시선 을 한몸에 받으며 카밀궁의 정문을 들어섰다.

네 사람의 모습이 정원 안쪽으로 충분히 멀어진 순간 경비병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재빨리 정문을 닫고 그것을 걸어 잠갔다. 라이온은 등뒤 를 흘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거 보쇼. 왜 문은 잠그는 거요?”

경비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폐문 시각이오. 일몰이잖소? 당신들 때문에 지금까지 문 열어놓고 기다린 거요.”

“아아. 난 또 우리를 가두려는 건 줄 알고.”

라이온은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경비대장은 심장이 바람 쐬러 몸 밖으로 나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키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세실 역시 아무 말 없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계속 걸어갔다.

잠시 후 키는 정원 중앙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키는 걸음을 멈췄지만 경비대장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이제는 거의 달리는 것 같은 걸음이었다.

“후작님. 키 드레이번을 데리고 왔습니다.”

보고를 마친 경비대장은 옆으로 물러났다. 에름 후작은 옆을 흘끔 보았고 그의 옆에 서 있던 서 슈마허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때 라이온 역시 키 드레이번에게 속삭였다. 

“에름 후작입니다.”

에름 후작은 키를 향해 살짝 목례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키 드레이번.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에름 후작. 오스발은 어디 있소?”

이야기를 나누기엔 약간 긴 거리였지만 에름 후작은 더 이상 다가서지 않았고 그것은 키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약 30피트 정도의 거 리를 둔 채 목소리를 약간 높여 말하고 있었다.

“먼저 당신의 신사다운 행동을 칭송하게 해주시오. 키 드레이번. 나 같으면 무서워서라도 절대 이렇게 찾아오진 못했을 텐데. 솔직히 용기인지 만용 인지 구분할 수가 없군요.”

키 드레이번은 메마른 시선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오스발을 보여주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소.”

“어째서.”

“아자르 황제 폐하의 충실한 종복인 나 라트랑 후작 에름은 제국의 공적 제1호인 당신을 체포할 것이기 때문이오.”


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방 구석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이 그곳에 서 있었다. 석양 무렵이라 방 안은 어두웠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스발은 차분한 태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명령을 기다리는 노예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율리아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미소를 보았는지 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언니의 허리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이루미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에름 후작이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정원수 곳곳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달려나왔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서 있던 서 슈마허와 경비병들도 재빨리 후작의 앞쪽을 가렸다. 슈마허는 검을 뽑아들었지만 다른 병사들은 무기 대신 성전을 꺼내어들었다.

키는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30여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많은 수였다. 군데군데 석궁을 든 병사들도 보였다. 그들은 키 일행의 주위를 삼엄하게 둘 러싸고 있었고 개보다 더 작은 것이 아닌 바에는 절대로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키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에름 후작은 경비병들의 어깨 뒤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정말 정신이 이상한 자였군. 제국의 공적 제1호를 이렇게 체포했다고 말하면 황제 폐하께서도 믿지 않으실 것 같소. 보통은 속여넘긴 데 대 한 미안함을 느껴야겠지만 솔직히 지금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미안하지도 않아요.”

키는 핏 웃었다.

“당신은 바보군. 에름 후작. 이런 시대에 나 같은 자의 가치를 몰라보는 자는 바보랄 수밖에.”

에름 후작 역시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의심이 있었소. 하지만 이젠 없어졌지.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당신 같은 정신나간 자를 다루고 싶어하는 군주는 아무도 없을 거요.”

“그렇다면 내 제안은 거부당한 것인가?”

“……말해 뭣하겠는가.”

“알았다. 당신을 섬기지 않겠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저런 미친놈 어쩌고 하는 잡담들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키는 그런 수런거림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세실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름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마법사임은 공주에게 들어 알고 있소. 키 드레이번.”

에름 후작의 옆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무기 대신 뽑아든 성전에서 미리 표시해 둔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직한 목소리로 봉독을 시작했 다.

“잊혀져 기억되고, 사라져 나타나며, 시작되지 않은 끝이고, 끝나지 않을 시작이신 내 주여…………”

하지만 키는 성전을 읽는 경비병들에게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실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겨우…… 안 놓쳤다. 제길, 두 번은 못하겠군. 지금?”

“지금.”

다음 순간 세실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곤 박명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 악! 마치 그녀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그 순간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키의 앞쪽에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다.

장전된 작렬포가 1마일의 거리를 순간 이동하여 키의 앞쪽에 나타났다.

본관 2층에서 바라보고 있던 율리아나는 하마터면 언니의 허리를 꺾어놓을 뻔했다. 

“자, 작렬포다!” 

그녀의 눈에는 라이온이 품속에서 꺼내어드는 막대기의 모습도 익숙했다. 라이온은 그 막대기를 움켜쥐고는 그 아래쪽의 끈을 확 잡아당겼고 그러자 막대기 끝으로부터 2피트 길이의 불꽃이 솟아 올랐다. 급속히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는 카밀궁의 정원에서 라이온은 마치 불의 검을 든 것처럼 보였다.

라이온은 그 불꽃을 그대로 포신을 향해 휘둘렀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불꽃은 멈췄고 라이온은 매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움직이지 마! 이것은 단심이다. 바로 발사된다!”

에름 후작은 질린 얼굴로 신음처럼 말했다.

“그건……”

라이온은 사납게 웃었다.

“소개드리겠습니다. 레모에서 날아온 이 미인의 이름은 작렬포! 너무 화끈하다는 게 죄가 된다면 참 죄 많은 여인이지요. 수줍어하시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이 아가씨의 인사를 받으시죠. 그 뒤에 숨어 계신다고 해서 이 미녀의 뜨거운 사랑을 피하실 수는 없습니다!”

서 슈마허는 이제는 익숙해졌으나 아직도 고통스러운 속 뒤집히는 감각에 신음했다. “주여, 왜 저를 내시면서 저 미친놈도 세상에 내신 겁니 까…..!” 

서 슈마허가 라이온의 두뇌 구조의 결함에 대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에름 후작은 좀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어떻게? 성전을 봉독하고 있었는데?”

세실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 구절은 물론 마법으로부터 신도들을 보호하지요, 후작님.”

후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세실의 말을 이해했다.

“우리가 아니라………… 그 대포에 마법을 쓴 것이니까?”

“정답입니다! 젠장. 내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이 대포의 위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곤욕을 치러야 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걸. 어쨌든 성공했지요.”

그때 두 명의 동료들이 야기하고 있던 유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서 있던 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에름 후작이나 경비병들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바 알!”

벽력 같은 고함. 에름 후작과 다른 사람들은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퍽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키는 본관을 향해 맹수의 포효처럼 외쳤다

 “나와라! 나오지 않는다면 발사하겠다! 그러면 후작 부인은 남편을 입관시키기에 앞서 복잡한 조각 맞추기를 해야 할 것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