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5장 : 불꽃의 밤 – 6화
이루미나는 그 끔찍한 말에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하마터면 언니와 함께 방바닥에 나뒹굴 뻔 했다. 오스발이 재빨리 다가와 이루미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바닥에 주저앉으려 들던 이루미나는 오스발과 율리아나를 놀라게 했다. 이루미나는 무서운 힘으로 오스발의 멱살을 부여잡은 것이다. 물살을 가르는 머메이드의 강인한 힘에 절박함이 더해지자 후작 부인은 건장한 노예인 오스발을 거의 휘두를 정도의 기세를 보였다. 숨이 막혀 켁켁거리는 오스발을 향해 후작 부인은 비명처럼 외쳤다.
“나가!”
“마, 마, 마님. 모, 목을 노………… 컥!”
“나가! 네 미친 주인에게로 돌아가, 당장!”
“언니, 언니! 가만 좀 있어봐, 룸 언니!”
율리아나까지 매달렸지만 이루미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루미나는 아예 자신이 직접 오스발을 끌고 나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이루미나 는 오스발의 멱살을 붙잡은 채 방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버티려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오스발은 그 순간 그야말로 노예였고, 그래서 이루미나는 아 무런 어려움도 없이 방문에 도달했다. 참다 못한 율리아나는 기성을 올렸다.
“정신 좀 차려, 언니! 그렇게 무턱대고 나가면 후작님이 더 위험해!”
후작 부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루미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러나 아직 오스발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은 그대로 둔 채 율리아나를 바라보 았다.
‘그럼 어떡하라고?’
언니의 울부짖는 듯한 시선을 보던 율리아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창문을 열어젖혔다.
“키 드레이버 언!”
키의 고개가 독수리나 매의 그것처럼 홱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받은 순간 율리아나는 자신이 저 남자를 진짜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주님. 천사들의 작업장에서 제조 불량 벼락이 많이 발생한다면 제가 그것들을 투기할 곳을 알려드릴 수 있어요.’ 율리아나는 가까스로 호 흡을 진정시키고서 외쳤다.
“오, 오스발을 내보내면, 어, 어떻게 할 거예요?”
율리아나의 질문을 받은 키는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일, 그러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던 사실을 공표했다.
“내보내! 네가 알 바 아니다!”
키는 이로써 그의 추적행이 전부 율리아나 카밀카르가 아닌 오스발을 향해 집중된 것임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 분명히 했다. 그는 오스발 을 위해 뭍에 올랐고, 오스발을 위해 다림을 정복했고, 오스발을 위해 전란의 대륙 한가운데를 돌파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리고 알면서도 지금껏 같이 걸어왔던 것이지만 라이온과 세실은 순간적으로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율리아나 역시 씁쓸한 기분으로 말 했다.
“흐음. 오스발에 대한 당신 애정엔 내가 끼여들 자리가 없었던 것이군요. 좋아요, 흥분하지 말고 이야기하죠. 오스발을 내보내면, 죽일 건가요?”
“물론.”
오스발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이루미나 후작 부인의 손아귀에 힘이 빠져나갔다.
후작 부인은 멍한 눈을 들어 오스발을 바라보았고 오스발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그 미소는 퍽이나 신비로워 보였다. 후작 부 인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얼굴이 되어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가에서는 입술을 깨문 채 키를 내려다보던 율리아나가 힘겹게 말했다.
그 다음엔 어쩔 거죠? 후작님은?”
“내 일을 마친 다음 나와 동행해야 한다. 라트라인 교외에서 풀어주겠다.”
“그걸 어, 어떻게 믿어요?”
“믿어. 에름 후작 따위 별로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듣고 있던 사람들 전부로 하여금 가치관의 심한 혼란을 일으키게끔 하는 말을 한 다음, 키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바다의 공주에게 돌려주겠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이루미나는 여전히 커다래진 눈으로 오스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미소를 비춰주던 빛도 이젠 많이 약 해졌고 그래서 후작 부인은 짙게 그늘진 오스발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 같은 것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루미나는 목이 마른 듯한 목소리로 힘겹 게 말했다.
“당신?”
“후작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마님.”
옅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오스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루미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탄성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오스발은 후작 부인에게 정중히 목례한 다음 고개를 돌려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창가에 기대어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림자가 되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치맛자락을 비틀어 뜯어낼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인님?”
“가, 갈 거예요?” 질문을 말하자마자 율리아나는 그 질문을 꺼낸 자신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의 증오를 느꼈다. 가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마치 그 자신이 선택했다는 식의 대답을 요구하는 이 가증스러운 책임 전가…………… 하지만 오스발은 그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신 침착하게 말했다.
“예.”
“나, 난 엉터리 주인이에요. 지켜주겠다고, 도와주겠다고 말로만………… 말로만………… 이건, 이건 말도 안 돼요. 한 사람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이 죽는건…”
이루미나가 분노의 외침을 토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칭찬받을 만한 자기ㅎ절제였다. 그녀도 별 번뇌 없는 얼굴로 죽음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오스 발에게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생 정신이나 충성심 같은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아니, 그렇게 생 각하는 것이 가장 납득하기 쉬운 방식이겠지만, 후작 부인은 오스발이 희생 정신이나 율리아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오스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죽지만 그래도 주인님께 도움되어 드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는 따라다니지 않았다. 오스발은 그저 ‘내려가겠습니다’라고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서인지 이루미나 역시 정말 고마워, 너의 희생 잊지 않으마, 너는 라트랑의 은인이자 후작님과 나의 은인이다……… 등의 말을 하진 못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오스발이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의 일이었다.
이루미나는 잠깐 멍한 시선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율리아나에게 걸어간 이루미나는 동생을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율리아나는 마 치 쇳덩어리처럼 뻣뻣했고, 게다가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이루미나는 동생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리.”
“미친 선장과 미친 노예……”
“응?”
율리아나는 다시 말하는 대신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이루미나는 동생을 달래려는 듯이 꼭 끌어안았지만, 그녀 자신도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문을 닫고 나온 오스발은 잠시 제자리에 선 채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그 한숨은 어떤 애틋한 심정의 토로나 세상의 부조리함에 고통받는 자아에 대 한 위안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한숨은 마치 휑한 빈 벽을 채우는 그림이나 쓸쓸한 방을 장식하는 꽃병 같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냥 적절했다. 그리고 오스발은 차분히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층계참을 지나 중앙홀, 그리고 현관에 이를 때까지 오스발의 발걸음은 정확했고 리듬감 있게 계속되고 있었다. 문 앞에서 오스발은 다시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마치 자신이 왜 멈춰 섰는가를 생각해 보는 듯이 문을 바라보며 한 10여 초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스발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는 문을 밀었고 다음 순간 어둠이 깔린 카밀궁의 정원에 나와 있었다.
키 드레이번의 눈이 불을 뿜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에름 후작은 짧은 순간 저 대해적을 상대해야 했던 바다 사나이들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맙소사, 바다의 형제들이여. 당신들의 시련은 너무 가혹했군요.’ 작렬포 때문에 이미 그런 상태에 있긴 했지만, 카밀궁의 경비병들은 이제 정신적으로도 압박감을 느꼈다. 키는 활활 타오 르는 눈빛으로 정문을 응시하며 손으로는 복수를 뽑아들었다.
복수의 화려한 검신이 드러나자 세실은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성전이 마법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복수는 마법장 자체를 무력화시킨 다. 그리고 무수한 창검이 겨냥하고 있는 가운데였기 때문에 마법장이 위축되자 그녀는 벌거벗고 있는 것보다 더 불안했다. 하지만 키의 얼굴을 훔쳐 본 세실은 그거 다시 꽂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은 꺼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실은 이곳에 마법사는 그녀 하나뿐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무력한 상태임을 알 리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키는 정문을 향해 짧게 말했다. “이리 와, 오스발.”
오스발은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그리고 오스발은 멈춰 서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선장님?”
오스발의 질문은 이렇게 어두운데 저를 어떻게 알아보시냐는 것이었다.
“네놈의 그 지긋지긋한 모습은 내 눈에 붙어 있는 귀신들보다 더 잘 보인다.”
“그러신가요?”
“그래. 이리 와!”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느릿한 걸음이었다. 키는 이를 부드득 갈며 그 모습을 응시했다.
“빌어먹을 자식, 빨리 오지 못해!”
오스발은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하지만 아직도 빠르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키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몸짓을 보였 고 그래서 세실은 기겁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젠장, 조금만 기다려! 네 눈엔 오스발과 귀신만 보이고 저 경비병들은 안 보이냐?”
물론 보였기 때문에 키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거의 고통스러운 듯이 일그러지고 있었고 숨소리는 격해지고 있었다. 그때 오스 발이 다시 멈춰 섰다. 키는 미칠 것 같은 분노로 외쳤다.
“개놈의 자식, 왜 멈추는 거냐!”
라이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선장님?”
“빨리 오란 말이다! 뒈지기 싫다는 거냐? 오호라, 그래? 그런 거냐?”
키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주둥아리를 열어 말해! 그런 거냐? 죽기 싫다 는 거냐?!”
라이온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오스발! 말을 해! 왜 멈춰 선 거냐고!”
라이온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닥쳐, 라이온! 끼여들지 마, 응?”
그제서야 라이온을 노려본 키는 잠시 눈을 껌뻑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라이온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는 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데샨카라돔제 신호탄의 불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불이 꺼졌나……?”
“예. 이거, 아마 연료가 다된 모양인데요…………….”
“수명이 그렇게 긴 게 아니었나 보군……”
에름 후작은 얼굴 위에 소규모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감각 속에 고통스러워했고 당연하게도 그런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그뿐만은 아니었다. 본관 2 층에서 펑펑 울며 정원을 내려다보던 자매들은 이제 공포 때문이 아니라 거의 치명적인 황당함 때문에 서로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리고 서 슈마허는 아예 넋을 잃은 얼굴로 ‘그렇군. 불이 꺼졌단 말이지. 음. 연료가 다되어서 말이지. 수명이 다됐다고? 하아’ 등의 헛소리를 마치 성전을 봉독하듯이 중 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있던 오스발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선장님. 죄송합니다만 가고 싶지가 않아졌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오스발은 문득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세계 전체가 자신을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 안 될까요?”
마치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외치기 시작했다.
“꼼짝 마라, 키 드레이번!” “잡았다! 자, 잠깐!” “나는 마법사다! 모두들 꼼짝 마! 불을 만들겠노라!” “저 마녀를 잡아!” “칵! 마법사다!” “마법사 세실리아 만세! 그런데 뭐 하십니까?” “이봐, 키. 내가 이렇게 외치면 복수를 꽂아야 될 거 아냐?” “너는 이 상황에서 칼을 꽂으라고 말하는 건가.” “칼 꽂지 마!” “죽음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찾아오는…..” “닥쳐, 라이온!”
그리고 세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해 정원수들을 향해 내빼기 시작했다.
격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경비병들은 약간 대응이 늦었고 그래서 키와 라이온이 각자 한 명씩의 경비병들을 베어 넘기고서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나 서야 씩씩하게 외쳤다.
“잡아라!”
그러나 포위망을 빠져나오자마자 키와 라이온은 다시 뒤로 돌았다. 둘 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세실!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리까지 도망쳐라!”
그리고 키와 라이온은 놀라운 기량으로 검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창날을 물리쳤다. 물론 현실적으로 서른 개나 되는 창검을 피할 방법은 없겠지만, 다행히도 처음에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이미 어둠은 정원을 뒤덮고 있었고 라이온이 들고 있던 불막대기도 꺼진 상황에서 조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경비병들은 정원수들의 그늘과 어둠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키와 라이온을 제대로 추적하지 못했다. 상대를 찌르기에 앞서 너 누구냐고 물어봐 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키와 라이온은 30대 2라는 확률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움직이는 것은 전부 찔러대며 도망쳤다.
그때 또 한 명의 경비병을 쓰러뜨리던 키는 경비병들의 뒤쪽으로 서 슈마허가 후작과 오스발을 보호하며 본관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불가능 한 일이었다.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키가 으르렁거리며 본관 쪽을 향해 달려나가려 할 때였다.
“파괴 속에 구현된 생성의 모순, 다시 파괴로 돌린다. 화염!”
세실의 낭랑한 목소리에 이어 카밀궁의 정원 한구석에서 엄청난 화염이 분출되었다.
화염은 조금 전 경비병들이 닫았던 대문에 부딪혔다. 본관을 들어서려던 후작은 화염과 폭음에 고개를 돌렸고 그가 발견한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대문이 우그러지며 부서져나갔고 양쪽의 문설주가 무너져내렸다. 대문 쪽을 향해 달려가던 경비병들도 그 엄청난 광경에 발걸음 을 멈췄고 그 중 특히 자기 보호 본능이 투철한 자들은 아예 땅에 엎드린 모습이었다. 에름 후작은 힘없이 웃으며 오스발에게 질문했다.
“맙소사, 오스발! 왜 말해 주지 않았나?”
“예? 뭘 말씀이십니까?”
“저 마법사가 여자로 부활한 하이낙스라는 사실 말이야.”
물론 오스발 역시 에름 후작과 마찬가지로 세실이 노스윈드 함대에 30노트라는 경이적인 속도를 부여한 전력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그 냥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원수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키 역시 세실리아의 업적에 놀라고 있었다. 다만 그의 경우엔 세실리아 의 어리석음(?)에 놀라고 있었다는 점이 좀 달랐지만.
“이 멍청한 마법사! 누가 문 열라고 했나! 작렬포에 불을 질러, 세실리아! 폭파시키라고!”
키의 악쓰는 소리를 들은 순간 서 슈마허와 에름 후작, 그리고 오스발은 신분의 차이도 뛰어넘어 인간이 공유하는 생명에의 의지로 동시에 본관 안 으로 몸을 날렸다.
“우와아아악!”
그러나 세실은 키의 외침에 대해 호응하지는 않았다.
“잡소리 치우고 뛰어와! 달아나야 해!”
그리고 키 역시 세실의 외침엔 부응하지 않았다. 왠지 손발이 지독하게 안 맞는 일행인 듯하다. 키는 세실의 외침대로 파괴된 대문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본관을 향해 달려갔고 그래서 세실은 험상궂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문 쪽에서 일어난 화재는 정원에 빛을 뿌렸고 그래서 정원 곳곳에서 절망적인 숨바꼭질을 하던 경비병들은 검은 코트 자락을 흩뿌리며 커다란 까 마귀처럼 달려오는 키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미친놈!”
경비병들은 사납게 외치며 정원을 가로질러 키의 앞쪽에 나타났다. 거침없이 달리던 키는 앞쪽을 가로막는 스무 명 남짓한 병사들을 보고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들은 창을 나란히 한 채 확실한 대형을 짰고 그래서 키는 뚫을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 키는 자신이 작렬포의 옆에 서 있 음을 깨달았다. 키는 작렬포를 한번 내려다보고,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복수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쪽에 대형을 짠 병사들을 바라보았 다. 키의 얼굴에 냉혹한 미소가 흘렀다.
“비켜!”
그리고 키는 복수를 휘둘렀다. 콱! 복수는 작렬포의 포신 위에 부딪혀 멈췄고 병사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저 정신나간 녀석, 대포를 인질로 삼는 건가?”라는 기발한 발상을 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키가 복수의 칼날을 똑바로 세운 채 포신을 훑듯이 복수 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카 – 드드드득!
회전 숫돌이나 해낼 수 있는 일을 키는 팔힘으로 해내고 있었다. 포신의 표면을 따라 움직이는 복수 위로 불꽃이 세차게 튀어올랐다. 물론 복수의 앞 쪽엔 심지가 있었다. 경비병들은 목놓아 비명을 지르며 자신들이 조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방으로 몸을 날리는 그들의 사이를 뚫으며 작렬포가 화염을 뿜었다.
콰쾅-쾅!
홀 안에서 숨을 돌리고 있던 슈마허와 에름 후작, 그리고 오스발은 정문이 박살나며 불어온 폭압에 휴지 조각처럼 튕겨나갔다. 에름 후작은 등 전체 로 폭발을 받아 홀 기둥에 부딪혔고 오스발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 중턱에 처박혔다. 그런 대로 갑옷을 걸치고 있었기에 그 중 덜 다친 슈마 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문짝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양쪽 기둥은 상당 부분 무너져 있었다. 상인방에서는 파편과 먼지가 쏟아져내리고 있었고 정원 쪽을 향해 있던 창문들에서는 불고문을 당하는 커튼들이 애처롭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슈마허는 작렬포의 가공할 위력에 황당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때 무너진 정 문 쪽에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키는 불티가 흩날리는 정문을 뚫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서 슈마허는 검을 짚으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키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홀 안을 쭉 둘러보았다. 그때 이층 계단 쪽으로 부터 두 여인이 뛰어내려왔다. 율리아나와 이루미나였다.
정신없이 달려내려오던 율리아나는 정문 쪽에 서 있는 키를 본 순간 계단참에 멈춰 서고 말았다. 하지만 이루미나는 한번도 멈춰 서지 않은 채 계단 을 구를 듯이 달려내려왔다. 슈마허는 그 모습을 보며 힘들게 말했다.
“안 됩니다, 공주님. 내려오시지… 꽥!”
슈마허는 품위 저조한 비명을 내지르며 홀바닥에 턱을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슈마허 경이 의지하고 있던 롱 소드를 냉큼 빼앗았던 것이다. 후작 부인은 남편이 나동그라져 있는 기둥까지 내처 달린 다음 그 앞을 막고 서서 롱 소드를 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앗!”
어쨌든 키는 신사라는 평을 듣긴 어려울 것이다. 후작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루미나는 똑바로 서서 롱 소드를 앞 으로 죽 내밀어 정확히 키의 목을 겨냥했다. 사나운 눈빛에, 흔들림 없는 기세였지만, 죽기 딱 좋은 자세였다. 쓰러져 있던 에름 후작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루…………미나, 저리 비켜요! 도…….망쳐요!” –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키는 비웃음조차 짓지 않은 채 걸어왔다.
그리고 키는 후작 부인의 앞쪽을 지나쳤다.
꼭 부부는 일심동체 어쩌고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때 후작 부처가 거의 비슷한 정도의 모멸감을 느낀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에름과 이 루미나가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키는 한번 훔쳐보지도 않은 채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나쳤다. 그리고 키의 거침없는 발걸 음 앞쪽에는 중앙 계단이 있었다.
계단 중간엔 오스발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 위쪽의 층계참에는 율리아나가 서 있었다.
율리아나는 홀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턱을 더 끌어당겨 그녀의 발 아래에 쓰러져 있는 오스발을 보았다. 왠지 모 든 것이 순식간에 단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키의 힘이었다. 키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고 간략화시켰다. 키는 어떤 사태에 존재하는 국면들, 시점들, 가능성들을 제한시키고 하나만을 통해 치닫게 하고 있었다. 키는 이제 오스발을 죽일 것이다. 폭압에 노출된 오스발은 도망칠 수도 없는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고 에름 후작이나 슈마허 등도 그를 도와줄 수 없다. 그리고 조금 전 보여졌듯이 후작 부인은 후작을 지킬 뿐 오스발 을 도와줘야 할 의무나 필요는 그녀에게 없다. 키가 다 ‘삭제’ 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키는 오스발을 죽이고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육지의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심해로부터 불어닥친 폭력이나 불안을 선물받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하나가 남아 있다.
율리아나는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 오스발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는 홀 가운데서 멈춰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작렬하는 눈동자를 피하기 위해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꼬아내렸다. 하지만 옆으 로 조금 들어올려진 그녀의 팔이나 꼿꼿한 자세 등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뭐냐.”
“하나가 남아 있어요, 키 드레이번.”
키는 공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공주도 어떻게 설명할 말이 없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당황하면 입이 급해지는 공주 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비켜라.”
그때 공주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키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율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율리아나는 여전히 멋쩍은 듯하기도 하고 즐거운 듯하기도 한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얹었고 그 모습을 본 슈마허는 숨막히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라이온!”
정원 쪽에서 세실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키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시 계단을 올려다보았을 때 율리아나는 이미 오스발의 겨드랑 이를 거머안은 채 그를 질질 끌듯이 하며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키는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 계단을 올라갔다.
“라이온! 괜찮아? 가까이 오지 마! 튀겨버릴 거야! 가까이 오지 말라고!”
키는 다시 멈춰 섰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호흡 소리를 내면서도 계속해서 오스발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키는 귀신 같은 얼굴로 율 리아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키는 몸을 돌려 날듯이 뛰어내렸다. 홀을 순식간에 가로지른 키는 후작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오지 마!”
후작 부인은 검을 내밀었지만 키는 그것을 왼손 손등으로 쳐내며 오른손에 쥔 복수는 한 바퀴 돌렸다. 다음 순간 후작 부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복수의 칼자루로 후작 부인의 복부를 찌른 키는 다시 복수를 한 바퀴 돌리며 왼손으로 후작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그리고 후작을 가슴 앞에 틀어쥔 채 그의 목에 복수를 겨눴다. 질풍 같은 속도로 그 모든 동작을 해낸 키는 곧 에름 후작을 인질로 삼은 채 정원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슈마허는 후작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바깥에서 키의 고함이 들려왔다.
“모두 물러나! 세실! 라이온은?”
“서, 석궁에 맞았어. 빨리 치료해야 해!”
“……제길. 모두들 비켜! 거기 그 놈! 그리고 옆의 놈! 그 남자를 부축해라. 허튼 수작하면 에름 후작은 죽는다! 세실리아! 밖에 있던 말들을 끌고 와!”
잠시 후 바깥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슈마허는 후작 부인을 부축했지만 호된 충격을 받은 후작 부인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 다. 그때 불타는 정문으로 경비대장이 뛰어들었다. 경비대장은 슈마허의 품에 안겨 있는 이루미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올렸다.
“마님!”
“괜찮소. 혼절하신 것뿐이니까. 그런데 후작님은?”
“예? 호, 혼절하셨다고요? 아,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여보시오, 경비대장….. 후작님은!”
“예? 아, 예. 그 해적놈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경비대원들로 하여금 추적하게 했습니다만.”
ㅡ알았소. 일단 후작 부인을 안으로 모십시다. 그리고 나도 추적을……”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서 슈마허의 눈이 중앙 계단의 층계참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 다. 오스발을 끌어안고 있는 율리아나 공주가 넋빠진 얼굴을 한 채 서 슈마허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엔 남국의 따스함이 스며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창턱에 팔을 괸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겹쳐 놓인 어둠들 사이사이로 부는 바람엔 바다 내음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배들의 갑판 위에서 빛나는 랜턴들이 수면에 길게 선을 긋고 있었다. 먼 거리이긴 했지만 장군은 늦게까지 작업중인 그 배들이 모두 사트로니아 군함들임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승객의 숫자는 꽤나 줄어 있었지만 머나먼 귀국길을 앞두고 준비할 것은 많았다.
내일이면 그들의 귀국이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바스톨 장군은 오늘밤 안에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물론 하드루스 대통령은 그에게 폴라리스 와 함께 싸울 것을 권했다. 이것은 어떻게든 좋은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말이다. 현재 사트로니아에겐 다벨을 견제할 병력이 없는 이상 그 일을 맡겠 다고 나선 폴라리스에 바스톨 장군을 파견하는 것은 적절한 조처다. 록소나에 서 브라도를 빌려주었던 페인 제국과 똑같다.
그리고 바로 그 유사성이 노장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서 브라도처럼 될까 겁난다는 거슈?”
“솔직히 그렇습니다. 두캉가 선장. 우습지요?”
“원 별말씀을. 뱃놈들은 그런 거 더 많이 따집니다. 그리고 이 나이쯤 되면 육감이라는 거, 무시 못하지요.”
바다사자호의 노선장 두캉가 ‘빅’ 노보는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바스톨 장군은 함께 잔을 들어올린 다음 가볍게 부딪혔다. 노장군과 노선장은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두캉가 선장은 술병을 들어 다시 두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장군.”
“친구들이 세상 버리는 모습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되는 나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 브라도는 좀더 각별하군요.”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묘한 미소 를 지었다. “우습군요. 그가 살아 있을 때라면 난 이런 말 못했을 겁니다.”
“라이벌이라는 것이 그렇죠. 서로를 무시하려고 애쓰지만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고,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지만 절대로 자기가 먼저 인정해 주 긴 싫고. 껄껄.”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선장.”
“그래, 아무래도 내키지 않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것은 두캉가 선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어떤 기분이십니까, 두캉가 선장? 그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예? 아아, 죽을 노릇이오. 좋은 젊은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짓 꿈도 못 꿨을 겁니다. 늙은 해적 두캉가가 건국 영웅이라. 남해의 뱃놈들 중 귀 가 제대로 뚫린 놈이라면 모두 데굴데굴 구를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를 비하하실 필요 없겠지요.”
“허헛.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320파운드의 몸무게에 반장님인 늙다리 해적이 살아남기는 어렵죠.”
“눈이 그렇게 안 좋으십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뱃놈에겐 눈이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나는 뱃놈 기준으론 반장님이오.”
“그렇겠군요.”
“어쨌든 오래전에 남해의 어느 바다 밑에서 백골이 되어 뒹굴고 있어야 당연한 내가 아직껏 살아 있는 건 노스윈드에 빌붙었기 때문이지요. 껄껄껄. 내가 내려야 했던 결정 중에 가장 잘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키 선장의 결정이 그의 최악의 결정일 수도 있다 는 점은 모른 척하는 거지요. 어쨌든 덕택에 이 잘난 선장들에게 얹혀서 건국이니 뭐니 하는 일까지 하고 있지요. 늙은이는 결국 젊은이들에게 닻을 주고 돛을 사는 거 아니겠소이까.”
“닻을 주고 돛을 산다? 뱃사람들의 말입니까?”
“그렇지요. 뭐, 깊은 데서 퍼올린 경험을 건네주고 앞으로 나아갈 추력을 얻는다, 정도의 말입니다.”
“멋진 말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겐 젊은 길버트 하드루스 대통령이 있지요. 하지만………… 글쎄요. 그는 공화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입니다. 좋은 젊은이이긴 하지만, 나 같은 구식 장수에게 공화제라는 건 왠지 매력적이지가 못하군요. 그 젊은이를 섬기는 건지 그 체 제를 섬기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아서. 아, 듣기로 해적들은 공화주의자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두캉가 선장은 코밑을 쓱 문지른 다음 실쭉 웃었다.
“공화주의자? 흐음. 뭐 따지고 보면 공화주의자이긴 하지요. 바다 위에서 선장은 언제든 ‘불신임’될 수 있지요. 꽁꽁 묶여 상어밥으로 던져진다는 말 이오. 그리고 ‘캐스팅 보트’를 쥔 조타수라는 놈도 있고. 선장은 앞갑판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저녁으로 스튜를 먹을 것인지 푸딩을 먹을 것인지에 대하여 격론이 벌어지고 있으면 조타수에게 맡겨버리면 되지요. 그러면 조타수는 주먹을 동원하든 발길질을 동원하든 해서 그놈들에게 ‘흑빵과 묽은 수프’라는 메뉴를 관철시키지요. 그러고 보니 야당의 총수인 갑판장이라는 놈도 있군. 이놈이야말로 진짜 타고난 야당 총수감이요. 말 몇 마디나 손짓 한 번으로 여당인 고급 선원들을 길길이 날뛰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점에서, 자유호의 갑판장이었던 라이온 군은 하 늘이 낸 갑판장 재목이라고밖에 볼 수 없소이다……”
바스톨 장군은 껄껄 웃으며 두캉가 선장이 해학적으로 들려주는 갑판 위의 역학 관계를 열심히 청취했다. 두캉가 선장은 한참 동안 실없는 농담으로 노장군을 웃긴 다음 크게 트림을 하며 술병을 들어올렸다.
“끄으윽. 이거 술도 다 떨어졌군. 그만 작파해야겠소이다.”
“그러시지요.”
두캉가 선장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입맛을 몇 번 다셨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대답하기 싫으신 듯하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해서 그러니 무례를 용서하시구려. 그래, 아무래도 생각이 동하지 않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왠지 나 대신 그가 죽은 거라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군요. 그리고 이 다음은 그렇게 대신 죽어줄 사람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래 도 볼지악 전투에서 내가 건진 전리품은 두더지굴에 머리를 박는 재주뿐인 듯합니다.”
“그럼 참 미안하게 되었는데..”
“예?”
두캉가 선장은 실쭉 웃었고 그 웃음에는 왠지 장난기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하리야 선장의 정보통에 의하면.”
벨로린이 말해 준 것이다. 그리고 7인 평의회는 아직은 그녀에 대한 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팔라레온 수복을 위해 남진한 다벨 8군단이 오늘 오후 담시나까지 이르렀소. 서 소사라 아시지요? 그가 지휘하고 있지요.”
바스톨 장군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압니다. 그런데, 그의 형인 서 소팔라가 아니고요?”
“그는 7군단을 이끌고 록소나로 갔습니다. 다케온에 주둔중이던 8군단 분견대와 합류하여 록소나를 두드릴 생각인가 보오. 그리고 8군단 역시 팔라 레온의 정벌이 끝나면 록소나로 갈 것이고. 어쨌든 우리에게 관련된 이야기부터 하십시다. 그 정보통은 이렇게 말해 줬소. 서 소사라의 8군단이 투란 을 지나 담시나까지 내려온 것은 팔라레온을 탈환함과 동시에 여흥거리 삼아 폴라리스도 정벌해 버리기 위해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투를 일으키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는 빨리 형을 도와주러 록소나로 가고 싶어하오. 그래서 그는 싸우는 대신 우리가 납득하기 쉬운 조건 을 내세울 듯하답니다.”
“납득하기 쉬운 조건?”
“다벨에 대한 충성과 조공을 약속하라고 강요할 거요. 그리고 그 약속의 대가로 바스톨 엔도 장군과 사트로니아군의 잔존병, 그리고 그들의 선박과 물자 전부 내놓으라고. 아직 그 친구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이 확실한 정보통이라서 충분히 믿을 수 있소. 그래서 하리야 선장은 대답 할 말도 다 생각해 뒀지요.”
“뭐라고 말입니까?”
“우리는 사트로니아의 동맹이고 따라서 그들을 보호하리라. 그리고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당신네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바스톨 장군은 볼 지악 전투의 복수를 하기 위해 눈을 뒤집고 설치고 있으며, 우린 당신네들의 뜻보다는 그의 뒤집힌 눈을 존중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두캉가 선장!”
“하하!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그게 싫으시면, 아마도 서 소사라의 서신은 내일 오후에나 도착할 테니까 내일 아침에 당장 출발하십시오.”
바스톨 장군은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라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하리야 선장은 대신 이런 답신을 보낼 테니까요. 그대가 지적하는 사람들을 내어주고 싶지만 이미 수평선이 그들을 삼 킨 지 오래다. 그리고 충성과 조공의 문제는, 우리로선 중요한 일이니 한번 진지하게 의논해 보자.”
“의논이오?”
“그리고 하리야는 아흔아홉 눈이 모두 감길 때까지 진지하게 의논해 볼 결심이오.”
“확실히 노인의 머리를 얹고 있군. 그렇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고 해서 뭐 얻을 것이 있습니까?”
“가깝게는 수비 태세 확립, 멀게는 당신네 대통령이 페인 제국을 움직여주길 바라는 거지요.”
두캉가는 벨로린의 말을 떠올렸다. 벨로린은 아자르 황제가 서 브라도의 죽음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 력으로 다벨을 어떻게 할 결심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황제답게 외교적인 압박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22만의 제국군을 몰아 다벨을 점령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 병력은 북방에서 제국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혼 족이나 서쪽 야만인들을 수비하는 병력이다. 또한 아 자르 황제는 제국이 그 제후국을 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남길 것인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라미는 휘리 노이에스가 다섯 번째의 검이 확실시되는 이상 아자르 황제가 외교적인 압박만 가지고 그를 무릎꿇릴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 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장들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휘리 노이에스는 현재 다벨에 있어서 구국의 영웅이자 실질적인 제일 권력자였다. 따라서 다벨 내부에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데, 현재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혹은 그런 미 약한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가진 곳은 하나뿐이다.
“우리를 잡아다 바치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소?”
“라미가 있소이다. 아시겠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폴라리스를 다벨 견제용으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우리도 싫습니다.”
“왜지요?”
두캉가는 잠시 비어버린 술병을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리는 이 나라를 키 드레이번에게 줄 겁니다. 휘리 노이에스가 아니라.”
“………… 당신들에게 노스윈드는 도대체 어떤 존재요?”
두캉가 선장은 실쭉 웃을 뿐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두캉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할 말은 끝이오. 내일 오후까지 우리들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하리야는 당신이 저 배를 타고 사트로니아로 돌아간 것으로 알 거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대로의 회답을 보낼 테지요. 부담감은 가지지 말아요, 장군.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두캉가는 가볍게 목례한 다음 방을 나갔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바스톨 장군은 테이블 위를 바라보다가 술병이 다 비었다는 데서 아쉬움을 느 껴야 했다.
그 무렵, 담시나에 설영되어 있던 8군단의 진지에서는 사령관 대행인 서 소사라가 한가한 태도로 백부장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남해 최고의 해적들이 만든 나라라고 신경 쓸 것은 없어. 실상은 바스톨 장군이 만든 교두보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만 키 드레이번의 이름은 만만찮군요.”
서 소사라는 사람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이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에서 전율을 느끼는 데서 도 분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다른 의문을 느꼈다.
“휘리 노이에스라는 이름보다 더 무서운가?”
백부장들 중 문학적 재능이 있어 뵈는 백부장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비감의 문제입니다. 바다 저편이라는 것은, 어쨌든 뭔가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게 마련이잖습니까. 친구를 태운 배가 떠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키 드레이번이 그 배를 침몰시켰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마냥 무서울 뿐입니다.”
서 소사라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묘사군. 좋다고. 어차피 싸울 것은 아니니 상관없겠지. 그 해적놈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 목적이니까. 하지만 우리 쪽이 먼저 겁을 먹고 있는 대서야 어디 말이 되는가.”
관록이 녹록치 않을 백부장들도 젊은 상관의 이 지적엔 면구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 소사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서 기리우의 경우엔 콧김을 씩씩 뿜어대고 있었다. 원래 서 기리우는 서 소팔라와 함께 록소나로 가고 싶어했지만 그가 죽은 서 브라도 대신 록소나 기병들에게 복수할 생각임을 잘 아는 휘리는 서 기리우의 탄원을 일축한 다음 서 켈커를 서 소팔라와 함께 보내었다. 그래서 서 기리우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 서 기리우가 테이블을 땅 내려쳤다. 놀라서 바라보는 서 소사라와 백부장들을 향해 서 기리우는 거칠게 말했다.
“한판 싸움을 걸어 그 보잘것없는 놈들이 교수대에 매달리려고 작정하고 육지에 올라온 해적 이상이 못 됨을 보여줍시다, 사령관! 맡겨만 주신다면 폴라리스인지 뭔지 하는 나라의 건국년도를 곧 멸망년도로 바꿔놓겠습니다!”
서 소사라는 쾌활하게 말했다.
“놀라운 기백이야. 서 기리우. 하지만 일부러 진흙밭에서 뒹굴 필요야 없지 않겠나. 해적이라니, 싸울 가치도 없어. 아, 그리고 난 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 대행이지. 8군단의 사령관은 휘리 노이에스 자작님이지.”
서 소사라는 그렇게 서 기리우를 진정시킨 다음 백부장들을 향해 말했다.
“싸움이 목적이 아닌 만큼 전술 따위야 없는 것이고, 그러니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병사들에게 계속 자신감을 불어넣어 줘 야 해. 그러니 자네들부터 기 좀 펴라고. 우리가 어떤 부대인가. 하팔 장군도, 마왕 빌레스도, 바스톨 장군도, 그리고 서 브라도마저도 그 앞에선 지리 멸렬해야 했던 다벨 8군단이다. 자, 나가서 병사들 가슴에 바람 좀 불어넣으라고.”
서 소사라는 그렇게 작전회의를 마쳤다. 서 기리우와 다른 백부장들은 사령관 대행에게 인사를 한 다음 물러났다. 막사 바깥까지 그들을 배웅한 서 소사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칭 타칭 남해의 제왕이었던 노스윈드 해적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그 순간 림파이어 가문의 젊은 기사 서 소사라의 머릿속에는 폴라리스나 노스윈드 해적들에 대한 고려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명분이나 의리 따위는 모를 해적이니 순순히 바스톨 장군을 바치고 조공을 약 속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 그의 별로 나무라기도 힘든 판단이었다. 키 드레이번의 이름은 말 그대로 신비감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실력에 부딪히면 산산이 박살날 신기루라는 흔들림 없는 자신감 또한 소사라에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한가로운 심정으로 밤바람을 쐬며, 록소나로 향하 고 있을 그의 형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가 고려할 만한 거창한 해적 무리에 대한 일보다는 훨씬 것들은 충분했다. 교황이 서 품할 바이올 기사단에 대한 일이라든지 페인 제국의 반응, 레모와 라트랑의 긴장 상태……………
바람이 불었다.
서 소사라의 머릿결을 흐트러뜨린 바람은 병사들이 진영 곳곳에 피워둔 화톳불에서 불티를 퍼올려 검은 밤하늘에 흩뿌렸다. 바람을 가늠한 소사라 경은 그것이 북풍임을 깨달았다.
‘노스윈드?’
소사라는 피식 웃었다. 북풍에 의해 일어나는 불꽃들을 바라보던 소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불꽃으로 다가오는 밤을 어찌할 수는 없다.’
서 소사라는 북풍을 비웃으며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뒤에서는 불꽃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