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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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6장 : 새벽의 사수 – 7화



라이온은 꽃꽂이 선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멜바골은 사라졌고 일출이 멀지 않은 시각, 이제 주위는 상당히 밝아져 횃불빛도 사위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밤이 사물들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있는 가운데 낭떠러지 끝에서 라이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티모스 2세와 라이온의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라이온은 발걸음을 뗐다.

라이온이 걸어오는 동안 공터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라이온의 발걸음에는 아직 힘이 없었고 그래서 세실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라이온은 침착하게 걸어온 다음 사람들 앞에 섰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말은 누구를 향한 말도 아니었다. 라이온은 허공을 향해 말하듯이 말했다.

“나는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 그대들의 탄원이 나를 불렀고, 그래서 나는 이제 새벽의 눈을 쏘려 한다.”

“네가? 네가 어쩌겠다고?”

아티모스 2세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조롱하듯 말했지만 라이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티모스 2세는 그 무관심함에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그때 군나르가 지팡이를 놀리며 걸어나왔다.

다급한 걸음걸이로 에름 후작을 향해 걸어온 군나르는 속삭이듯 말했다.

“에름 후작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군나르 파헤드리스이십니까?”

“예. 워낙 다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예의가 말이 아닙니다.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이온 님 옆으로 걸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혀주시겠습 “니까?”

“그러면 끝입니까?”

“그리고 제가 묻는 질문에 찬성한다고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처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랐다고 잡아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라이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왜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그래야 합니까? 고명한 신사가 필요한 것 같던데 단지 그런 것뿐이라면……”

군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질문이십니다.”

그리고 군나르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저 선주들은, 사실 라이온 님보다는 제 얼굴을 봐서 여기까지 나와준 겁니다. 저 자들이 나와준 것만 해도 감사한 처지에 더 이상 요구할 수가 없었 습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저 혼자 책임져야 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평민이지요.”

“예.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후작님처럼 고귀한 분의 지원을 받는다면 라이온 님에게도 더 좋을 겁니다.”

에름 후작은 쓰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봅시다. 어차피 라트랑을 떠난 이후로 동화 속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면 동 화 속의 주인공처럼 행동해야겠지요.”

“다행이군요. 그런 거라면 익숙하실 테니.”

‘인어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에름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군나르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에 름 후작은 그제서야 아티모스 2세가 증오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름 후작은 처신 참 사납구나 생각하 며 세실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은데요?”

그러나 세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바다의 공주에게 영혼을 던졌던 보트 조종사는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 던 키 역시 에름 후작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세실은 황급히 발걸음을 뗐다.

에름 후작은 라이온의 옆에 섰다. 그리고 아티모스 2세를 향해 말했다.

“라트랑 후작 에름 라트랑이오.”

아티모스 2세는 사나운 표정 그대로 에름 후작을 쏘아보았다.

“레갈루스 국왕 아티모스요. 후작, 엉뚱한 바람을 타고 엉뚱한 만에 들어서셨소.”

에름 후작은 아티모스 2세의 말투가 약간 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생각해 본 후작은 곧 아티모스 2세의 말을 이해했다. 노스윈드를 타고 라 이온 만에 들어섰다는 말이었다.

‘키의 말이 맞군. 나는 증오의 대상이 아닌 건가’

아티모스 2세는 에름 후작이 키 드레이번에게 끌려와서 어쩔 수 없이 이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크게 틀린 추측도 아 니었기에 후작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예. 그래도 약간의 명성을 가진 보트 조종사로서 수치스러운 노릇이군요. 덕분에 이렇듯 늦게서야 전하를 뵙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오. 저 늙은이가 당신을 꼭꼭 숨겨두었기 때문이지.”

그때 그 늙은이, 즉 군나르 회장이 앞으로 나섰다.

“로드 에름, 당신은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가 새벽의 눈동자를 쏘는 것에 대해 찬성합니까?”

에름 후작은 새벽이 아파하지 않을까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의식이라면. 어쨌든 국왕이 이런 시간에 이 높은 절벽 위까지 달려와야 한다면 중요한 의식이 아닐 수 없다 – 거기에 대해 농담처럼 대답하는 것은 다시 없는 결례일 것이다. 그래서 후작은 정중하게 말했다.

“찬성합……”

“관두시오, 후작!”

후작의 정중함은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티모스 2세가 노성으로 후작의 말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 교활한 늙은이는 키 드레이번과 손을 잡고 당신을 이용하려 들고 있는 것이란 말이오!”

후작은 국왕을 돌아보았고 국왕은 라이온과 군나르를 번갈아 삿대질하며 외쳤다.

“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늙은이는 내게 반심을 품고는 언감생심 자기 손으로 왕위를 바꾸려는 거요! 허수아비 왕을 세워서 이 위대한 나라를 자 기 손으로 주무르겠다는 거지. 비천한 출신으로 그렇게까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자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된 거요. 이것은 그를 그토록이나 크게 대우했던 아버님을 배신하는 일이오. 인륜을 거스르고 주님의 진노를 부를 이 패역한 짓거리에 부화뇌동하지 마시오, 후작!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하. 고작 뱃사람에 지나지 않는 제가 레갈루스의 왕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새벽의 사수는 자신을 스 스로 증명할 테니까요.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전하. 5년 전 새벽의 눈동자를 노렸던 어떤 활은 끝내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거야 네놈 멋대로 한 소리 아니더냐! 네가 제멋대로 빗나갔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인 것이잖나! 오호라, 5년 전 그때부터 세운 계획이더 냐? 그래서 나를 그토록 모욕했던 것이냐? 이 교활한 늙은 상어 같으니라고!”

“저는 멋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금 후면 전하께서도 제 말에 동의하시게 될 겁니다. 찬성합니까?”

두 사람의 설전을 정신없이 듣고 있던 에름 후작은 군나르의 마지막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티모스 2세는 확실히 알 아차렸고, 그래서 뒤늦게 알아차린 후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외쳤다.

“장난치지 마라, 군나르!”

군나르는 놓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한숨 속에 묻고는 계속 말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곧 첫 번째 일출이 있을 겁니다. 저는 탄원합니다. 새벽의 사수가 그 활을 들어 새벽의 눈동자를 쏘길 탄원할 겁니 다.”

아티모스 2세는 군나르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네 이놈, 격식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리 설쳐보아야 아라스틴이 없는데.

아티모스 2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군나르의 뒤편에 서 있던 선주들 중 하나가 커다란 상자를 꺼내어 군나르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거, 설마?”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너, 그것을 어떻게!”

아티모스 2세는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군나르 회장은 자신이 받쳐든 상자를 내려다보곤 겸손하게 웃었다.

“아, 이거요? 필요해질 것 같아서 들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가지고 나왔느냐는 말이다! 네놈이 스팻을 어떻게………!”

아티모스 2세의 말이 갑자기 멎었다. 아티모스 2세는 가슴을 움켜쥔 채 키 드레이번을 노려보았고, 에름 후작과 세실은 그가 심장 발작을 일으키지 는 않나 걱정했다.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티모스 2세는 신음처럼 말했다.

“네… 이놈. 네가……?”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티모스 2세는 헐떡거리며 키를 노려볼 뿐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때 군나르가 재빨리 말했다.

“로드 에름? 찬성하십니까?”

에름 후작은 난감한 얼굴로 아티모스 2세를 돌아보았지만 국왕은 여전히 키 드레이번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에름 후작은 이 기묘한 사건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판단을 위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얼마 전 서 레빌의 반란을 경험했던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름 후작은 아티모스 2세에게 동정심을 느끼기 어려웠다. 서 레빌의 반란과 레갈루스 선주연합 회장의 반란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역시 조금 전 군나르가 했던 말에서 드 러난다. 만일 실패한다면 저 혼자 책임져야 하니까요.

“찬성합니다.”

에름 후작은 나직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아티모스 2세는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후작을 돌아보았지만 후작은 차 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라이온 화이어하트 딜레도가 새벽의 눈동자를 쏘는 것에 찬성합니다.”

“……후작!”

“전하. 저는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중요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보뿐이라면, 저는 바보가 틀림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 이 어떤 사실의 결정이 아니라 기회의 부여라면, 저는 동생에게 기회를 선물하지 않는 형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그 사유에 대해 설명 해 주실 수 있다면 제 말을 철회하겠습니다.”

“저 자는 내 동생이 아니오!”

“동생이 아니어도 상관없소! 노예라도 상관없소!”

군나르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아티모스 2세는 끔찍한 눈으로 군나르를 노려보았지만 군나르는 그 시선을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듯이 턱을 내밀었 다.

“그렇잖습니까? 제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하께선 로드 에름께 거짓말을 하실 순 없을 겁니다. 아니, 제가 직접 말씀드리지요. 로드 에 름. 스스로 새벽의 사수임을 주장한 자는, 그가 누구든 간에 그의 말에 동의해 주는 분만 있으면 자격이 있는 겁니다.”

후작은 참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아티모스 2세 전하. 그저 기회를 부여하는 것에 그렇게 인색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비를 보여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티모스 2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귀신 같은 얼굴로 군나르와 에름 후작, 그리고 라이온을 번갈아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군나르가 들고 있던 상자를 라이온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오, 새벽의 사수.”

바로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설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이 모든 사태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라이온은 군나 르의 말에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든 라이온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아티모스 2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왜 못 쏘셨소, 형님?”

“……………나를 형이라 부르지 마라. 그리고 나는 쐈다. 이 팔이 그 정도의 활도 못 다룰 것 같으냐?”

에름 후작은 활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라이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못 쐈군.”

“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게 아니오, 전하.”

라이온은 상자를 열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세실은 문득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치는 것을 느꼈다. 돌아본 세실은 키 드레이번의 옆얼굴을 보게 되 었다. 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왼손은 허리에 찬 복수의 칼자루를 쓰다듬고 있었다.

‘싸울 준비를 해둬라.’

‘멍청이. 그 칼 뽑으면 난 시체, 아아, 미리 떨어지라는 말인가?’

세실은 자연스럽게 뒤로 좀 물러났다. 다행히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티모스 2세는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라이온이 상자를 여는 것을 그저 사납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라이온은 상자 안에서 말발굽 모양의 나무토막을 꺼내었다.

그것은 활시위를 벗겨둔 콤포짓 보우였다. 은 비슷한 금속으로 아로새김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꽤나 장력이 강할 것 같은 활이었다. 라이온 은 그것을 목뒤에 걸고는 활 옆에 있던 화살 몇 대를 집어든 다음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 쭈그려앉아 있던 그 절벽 끄트 머리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름 후작은 자신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군나르 회장은 물론이거니와 아티모스 2세마저도 이젠 후작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 황급하게 달려갔다.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던 후작과 세실은 조금 후에야 사람들이 절벽 위에 만들어진 연단 쪽으로 달려가 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늘은 이제 파르스름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에름 후작과 세실을 향해 키가 몸을 돌렸다. 키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으며 낮게 말했다.

“이제 위험은 없다. 마음놓고 구경하도록.”

“위험이 없다고 하셨소?”

키는 아티모스 2세를 턱으로 가리켜보였다. 아티모스 2세는 연단 그것이 관람대임은 이제 분명해지고 있었다 끝에서 난간에 손을 짚은 채 오 른쪽의 라이온을 보고 있었다. 자칫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세였지만 아티모스 2세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티모스 2세도 결국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호기심?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거란 말이오?”

“알고 있을 텐데. 라이온은 지금부터 새벽의 눈동자를 쏠 것이다.”

에름 후작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포기하고 있던 세실은 다른 것에 대해 즐거워했다.

“너 오늘 진짜 고분고분하군. 아주 좋았어. 뭐, 두고보면 다 알게 되겠지. 그런데 우린 늦어서 좋은 자리는 못 잡을 것 같군.”

키는 절벽 위를 죽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쪽으로 간다.”

그리고 키는 앞장서서 라이온의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세실과 에름 후작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그들은 라이온을 가운데 두고 관람대의 반대쪽 절벽 끝에 섰다. 키는 아예 절벽 밖으로 두 다리를 내민 채 땅바닥에 앉았고 그러자 세실 역 시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에름 후작은 그들의 뒤편에 서서 라이온의 뒤편으로 보이는 관람대를 바라보았다.

아티모스 2세는 난간을 부여잡은 채 라이온과 먼바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하늘은 충분히 밝아졌지만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아 그 얼굴 을 정확히 보기는 힘들었다. 에름 후작은 초점을 약간 끌어당겨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라이온을 보고 있던 세실 역시 의문성을 내었다.

“어라?”

라이온은 화살들을 땅에 꽂아둔 채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붕대에 감겨 있지만 훌륭한 상체가 드러났고 그에게서 셔츠를 받아든 바람은 그 셔츠 를 하늘 높이 날려올렸다가 절벽 저편에 던졌다. 라이온은 그렇게 반쯤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서는 목에 걸고 있던 활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에름 후작은 잠깐 걱정에 빠졌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라이온이 과연 저 활시위를 걸 수 있을까?

그러나 라이온은 발에 아라스틴을 대고는 그것을 손쉽게 구부렸다. 활시위를 건 라이온은 그것을 몇 번 튕겨본 다음 땅에 꽂아둔 화살을 뽑아들었다. 활시위에 화살을 건 라이온은 그것을 허벅지쯤에 늘어뜨린 채 조용히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에름 후작 역시 다시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 다.

‘해를 향해 쏠 건가? 그렇다면 해가 떠오를 때겠군.’

수평선 위의 하늘은 이미 사과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해가 뜰 때는 멀지 않은 듯했다. 절벽 위는 이제 바람 소리와 절벽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파 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평선 위의 하늘의 한 부분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심홍색 원반의 윗부분이 수평선 위로 도드라졌다. 에름 후작과 세실은 재빨리 라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관람대에 서 있던 사람들도 라이온을 쳐 다보았다. 라이온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그것을 고정시키고는 시위를 끌어당겼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그의 상체가 황금빛으로 꿈틀거렸다. 계속 당겨지던 시위가 갑자기 라이온의 손을 벗어났다.

시위를 귀 옆에 고정시키는 과정이 없었다. 라이온은 그대로 쏘아버렸고 화살은 하늘의 한 점을 향해 매섭게 사라졌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도 없었다.

거의 절대적인 고요함이었다. 후작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이 부지불식간에 수평선 쪽으로 옮겨져 갔다. 시위를 떠났던 화살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태양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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