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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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2화


하리야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수평선을 바라본 하리야는, 그러나 자신의 짐작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필마온 기사단이나 카밀카 르 함대가 공격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리야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부두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급격한 전투 기동을 하고 있는 질풍 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저러는 거지?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난 건가?”

하리야는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문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몸을 돌리기 직전 하리야는 한층 더 이상한 모습을 목격했다. 폴라리스 청사로 통 하는 대로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하리야는 눈을 흡뜬 채 대로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리야는 그 들이 용기병임을 깨닫고는 크게 놀랐지만 그의 경악은 아직 이른 것이었다.

포석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광장에 도달한 용기병들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핸드건을 뽑아들었다. 하리야는 뭔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바닥으 로 몸을 날렸고 바로 그 순간 용기병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폭음이 하리야를 강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다. 만약 용기병들이 건물을 사격하고 있다면 바닥에 엎드린 하리야에 게는 그 충격이 전달되었어야 한다.

‘이 녀석들이 하늘을 쏘고 있나?”

하리야는 의문을 잠시 접어둔 채 주위를 둘러보며 무장을 찾았다. 바깥에 몇 배나 되는 적이 와 있는 이런 상황에서 폴라리스 수뇌부가 마비된다는 것은 그대로 폴라리스의 멸망을 의미한다.

‘일단 탈출해야 한다.’

그때 바깥쪽에서 가해지던 사격이 멈췄다. 그리고 준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내의 사람들에게 고한다.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고 없이 공격하겠다. 그러나 안에 얌전히 있는 것은 용인되며, 우리는 그대들이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이 요구 조건을 성실히 수행한다면 그대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는 절대 없을 것이며 현 상황 또한 빠르게 종결될 것이다.”

하리야는 그 명령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바깥의 용기병은 ‘건물 내의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했을 뿐 ‘폴라리스의 수뇌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우리’라고만 표현했다. 비밀 군대다운 화법이라고 생각하며 하리야는 탈출할 방도를 모색했다. 그리고 머리 한구석으로 는 계속 생각했다.

‘이곳을 마비시켜 놓고서 저놈들이 부두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바스톨 장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평상시에도 갑옷과 무장을 착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장군은 겉으로나마 완전히 준비된 상태에서 밖으로 달려나갈 수 있었다. 물론 정신적으로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부두 쪽과 정부 청사 쪽에서는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고 그 상황에서 바스톨 장군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말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뒤에서 마왕의 고함이 들려왔다.

“장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개를 돌린 바스톨 장군은 검을 빼어든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는 빌레스 국왕과서 하빈저를 볼 수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말에 오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이 재빠른 포성은 용기병의 것인 듯한데 확실하지는 않군요. 나는 일단은 외성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다벨군이 준동한 다면 그곳에서 상대해야 되니까요. 미안합니다만 서 하빈저에게 명령을 좀 내려도 되겠습니까?”

서 하빈저는 주군을 돌아보았고 마왕은 외치다시피 말했다.

“얼마든지!”

“고맙습니다. 서 하빈저! 당장 서 파르치에게 가서 완전 무장한 상태로 정부 청사 쪽으로 달려가라고 하시오. 제일 목표는 하리야 선장의 구출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소. 그를 구출한 즉시 페가서스호로 옮기라고 명령하시오.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또한 그가 바다 쪽을 맡아 줘야 하니까. 나는 일단 오닉스 선장과 함께 다벨군을 경계하겠소. 사후 승인을 받을 테니 일단은 내가 육상 방어를 책임지겠노라고 하리야 선장에게 “전하시오.”

서 하빈저는 약간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전하를 보호해야 합니다.”

“걱정 마시오. 전하께서는 나와 같이 계실 거요. 바스톨 엔도의 이름이면 마왕의 보호자로 충분하겠소?”

서 하빈저로서는 두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충분합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빠르게 헤어져 달려갔다.


트로포스는 자신이 받아보았던 가장 거친 공격들을 모두 떠올렸다. 그러고는 지금 받고 있는 공격에 비하면 그것들은 모두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했 다.

부두에 선 용기병들은 질풍호를 향해 빗발처럼 핸드건을 쏘아대고 있었고 그래서 질풍호 주위에서는 장대한 물보라가 끝도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다른 배들 모두가 전투 태세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용기병들은 오로지 질풍호만 사격하고 있었다. 핸드건은 어쨌든 포신이 긴 대포보다는 명중률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절대 대포에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재장전이 필요없는 그 공격 속도에 있어서는 대포의 수십 배다. 트로포스는 키 를 움켜쥔 채 최대한 빨리 외해 쪽으로 배를 빼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부두의 용기병들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다른 배가 공격을 시 작하기 전에 끝내겠다는 듯이 폭포수 같은 포환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명중탄은 차라리 당연하다는 듯이 날아들었다.

콰아앙!

트로포스는 타륜을 놓칠 뻔하다가 간신히 거기에 매달려 쓰러지지 않았다. 절망적으로 올려다본 그의 눈에 중간쯤에서 부러지기 시작하는 돛대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명중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와아아!”

부두에 있던 용기병들은 환호를 질렀지만 서 퀵핸드는 비로소 그의 부하들이 어디를 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용기병들은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러나 수부는 아니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가장 그럴 듯한 목표물을 쏘고 있었다. 서 퀵핸드는 노성을 질렀다.

“이런! 키를 쏴! 돛대를 쏴봐야 소용없다. 키를 쏘라고!”

용기병들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포구를 아래로 낮추었다. 트로포스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지만 서 퀵핸드는 뱃사람 집안의 자손이었다. 질풍호의 키 주변으로 피탄점이 집중되는 것을 본 그랜드머더호의 킬리 선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준비되는 대로 발사! 배신자 놈들, 가루로 만들어버려!”

서 퀵핸드는 자신들을 향하는 포문을 보며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투는 필요없었을 것이다. 조용히 질풍호에 승선해서 트로포스 선장만을 체포하는 것, 그리고 그를 이단 심판에 넘기는 조건으로 다시 폴라리스에 협조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 었다. 하지만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들은 남해 최강의 함대와 포격전을 벌여야 하는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후퇴!건물 뒤로 숨어라!”

서 퀵핸드가 절망적인 심정으로 외친 순간, 그랜드머더호의 포수들은 단심에 불을 당겼다.


벽에 기대어앉아 창문 밖을 훔쳐보고 있던 하리야 선장은 지금껏 들려오던 포성을 압도하는 굉음에 헛바람을 삼켰다. 앞바다 쪽을 바라본 하리야는 그랜드머더호에서 피어오르는 포연을 보며 아연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맙소사, 구나!’

현장을 보지 않아도 하리야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랜드머더호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용기병들에게 직사탄을 날렸을 것이다. 부두의 소름 끼치 는 광경을 연상하던 하리야 선장은 청사 바로 앞에 있던 용기병들을 재빨리 훔쳐보았다. 그들 역시도 이 무지막지한 포성에 당황하여 부두 쪽을 돌아 보거나 서로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리거나 했다. 하리야는 조금 전 찾아든 검을 불끈 쥐며 몸을 돌렸다. 탈출하려면 지금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청사 밖의 용기병들 또한 다급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항구 쪽에서 수상한 조짐이 보이고 있는 이상 폴라리스 수뇌진을 체포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분견대 지휘관은 급히 명령을 내렸다.

“서 스컬칩! 서 본헤드! 서 아이언립! 즉각 청사 내로 돌격하여 요인들을 억류하라! 제일 목표는 하리야 헌처크 평의회 의장이다!”

살벌하다기보다는 난처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별명의 용기병들은,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정문을 겨냥했다. 세 명의 용기병들이 방아쇠를 당긴 순 간 굉음과 함께 문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들은 말에 탄 채 청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바깥의 용기병들은 청사 주위에 대한 경계에 들어 갔다.

계단에 도달한 하리야 선장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움찔했다. 그와 동시에 비명이 들려왔다. 아마도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가 뜻밖 의 사태에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자들일 것이다. 용기병들이 청사 내로 들어온 것을 깨달은 하리야는 검을 고쳐 쥐며 통로의 창문들을 살폈다. 하지 만 바깥의 용기병들은 청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리야는 뜻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배틀엑스의 넓은 날에 가로막혔고 그 도끼 뒤에는 익숙한 마스크가 그를 노 려보고 있었다.

“오닉스 선장?”

‘누구 목을 날리려는 거야, 하리야 선장’에 해당하는 손짓이 돌아왔다. 하리야는 황급히 검을 치우며 말했다.

“자네 외성 쪽에 있지 않았나? 제길. 놈들에게 선장을 둘이나 내어주게 생겼군.”

마스크 아래의 표정이 어떨지야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마스크는 무덤덤하게 창문 밖을 훔쳐보았다. 청사가 완전히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안 오닉스 는 별 당혹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아래를 흘끔 훔쳐본 오닉스는 하리야에게 손을 흔들었다.

‘들어온 것은 셋이다. 어떻게 되겠군.’

“어떻게?”

언제나 그랬듯이 오닉스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의 왼손이 자신의 마스크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하리야는 입을 쩍 벌렸다.

오닉스는 마스크를 벗었다.

선량해 뵈는 얼굴이 드러났다. 순한 눈매와 선한 얼굴. 누가 봐도 평생 말싸움 한번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만한 얼굴을 보며 하리야는 말 을 잊었다. 게다가 햇살을 받지 않아 새하얀 피부는 절대로 바다 사나이의 피부가 아니었다. 마스크를 벗은 오닉스는 계속해서 갑옷까지 벗은 다음 그것들을 도끼와 함께 모두 통로 옆의 방 안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오닉스는 하리야에게 손짓을 보냈다.

‘검을 줘, 하리야 선장.’

하리야는 오닉스의 손짓을 보면서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오닉스는 하리야의 검을 뺏어들며 다시 손짓을 보냈다. ‘바닥에 앉아.’

“고마운 제안이야. 그렇잖아도 주저앉아 버릴 지경이었거든.”

하리야는 아무렇게나 대답한 다음 통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닉스는 하리야에게서 약간 떨어진 다음 검을 하리야에게 겨눈 채 계단 아래쪽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하리야는 두 번째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기사님! 기사님들! 하, 하리야 선장, 하리야 선장은 여기 이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말에서 내린 용기병 둘이 2층 통로로 올라섰다. 하리야는 그때까지도 오닉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는 충격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오닉스는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기사님! 기사님! 제가, 제가 하리야를 잡았습니다. 제가 잡았어요!”

오닉스는 건장한 체격을 감추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고 하리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는 오닉스를 보 며 용기병 중 하나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예! 예! 저는 닉스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믿으며 법황 성하를 믿습니다. 미사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헌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습니다. 그래 서 주위에서는 모두 선량한 닉스라고 부릅니다. 제가 여기서 청소부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은 절대로 해적놈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만 바라보고 사는 처자식들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지 않으면 당장 그 불쌍한 것들의 입에 거미줄을 치게 될 형편인지라……………”

하리야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용기병들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오닉스의 입을 막고는 하리야에게 말했다.

“서 아이언립이라고 합니다. 하리야 헌처크가 고작 잡부에게 검을 빼앗기다니,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군요.”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던 하리야는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아이언립은 턱끝으로 하리야에게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서 스컬칩. 저 친구의 검을 받아들게 놔두면 자기 발등에 떨어뜨리겠군. 어쨌든 페가서스호의 하리야 헌처크를 단신으로 체포한 영웅이 그런 꼴을 당해서야 되겠나.”

스컬칩은 킬킬거리며 오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닉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내미는 동작은 너무 빨랐고 게다가 칼날 을 앞쪽으로 한 상태였다. 스컬칩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꾸중하려는 순간 그 검은 스컬칩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아이언립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렸지만 오닉스는 이미 스컬칩의 손에서 핸드건을 나꿔챈 다음 아이언립의 옆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 리야는 움찔하는 아이언립의 손에서 핸드건을 뺏어들었다. 순식간에 무장을 해제당한 아이언립은 꼼짝도 못하는 모습으로 서 있어야 했다. 오닉스는 아이언립에게 말했다.

“서 아이언립. 아래쪽에 있는 친구를 부르게. 이름은 안 불러도 좋아. 그냥 ‘이리 좀 와주게’면 충분해.”

그 목소리는 조금 전 하리야를 경악시켰을 때처럼 온화했다.


킬리가 다림 부두에 개방시킨 광포함은 처참함을 넘어선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용기병들은 전우의 시체를 돌아볼 생각도 못한 채 머리를 감싸쥐고 도망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선택한 방향이었겠지만 그들은 모두 다림 교회로 도망치고 있었고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킬리는 짧은 순간 성소를 보호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결국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투철한 신 앙 때문은 아니다. 용기병들의 배신 때문에 교회와 그 신도들까지 적으로 돌려놓는 것은, 더군다나 이미 강력한 응징을 한 직후에 그런 일을 저지르 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킬리는 포문을 거둬들이도록 명령한 다음 질풍호 쪽을 바라보았다.

질풍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부러진 주돛대는 갑판 위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건현에도 몇 개의 구멍이 나 있었고 노도 상당수 부러 진 상태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트로포스 선장! 키가……”

“그래, 박살났다. 젠장.”

그랜드머더호가 발사하기 직전에 용기병들이 쏜 몇 발의 포환이 질풍호의 키를 파손시켜 놓았다. 트로포스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우울한 표정으로 물수리호 쪽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에게 용기병들이 공격한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지만, 트로포스는 그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벨로린은 또다시 다급한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벨로린의 손짓을 보던 트로포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트로포스는 황급히 망원경을 챙겨들며 수평선 쪽을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본 킬리 선 장과 돌탄 선장 역시 망원경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네 선장은 거의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수평선 쪽에서는 필마온 기사단의 전함들이 이물을 나란히 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바라미의 공격으로 몇 척의 배가 침몰했지만 그래도 9척이나 되 는 숫자였다. 트로포스 선장은 쌍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페가서스호와 흑기사호는 선장이 없는 상태였고 질풍호는 항행 불능의 상태였다. 물론 페가서스호와 흑기사호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각자 도일 일항사와 매슈 일항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질풍호까지 빠진다면 폴라리스 함대에 선장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트로포스 선장은 그 하나 남은 선장을 바라보았다.

“두캉가 선장!”

“왜 그러나, 트로포스?”

“축하합니다. 폴라리스 함대 사령관이 되셨습니다.”

두캉가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 역시 당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네 선장의 시선은 전부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두캉가 선장이 그들을 대표하여 외쳤다.

“제기랄, 자유호! 이보라구, 식스 일항사!”

자유호의 선상에서는 식스 일항사가 어두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자유호의 다른 선원들이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캉가 선장은 흥분하여 침을 튀겨가며 외쳤다.

“식스 일항사! 당장 키 드레이번을 불러줘. 빨리 나오라고 해!”

“무슨 용건이십니까.”

“모르나!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하리야도 없고 오닉스도 없어! 킬리와 돌탄은 육지의 다벨군을 막아야 하고 질풍호는 항행 불능이 되었어! 그런데 저기선 필마온 놈들이 오고 있어!”

“보고 있어서 압니다.”

“뭐야? 알고 있으면 가서 전해! 키 선장이 나와야 해!”

식스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주승강구로 사라진 다음 두캉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유호의 선상을 노려보았고 그의 시선을 받게 된 자 유호의 선원들은 거북하다는 듯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 동안 페가서스호의 도일 일항사와 흑기사호의 매슈 일항사는 각자 전투 준비에 들어갔 다.

조금 후 식스는 들어갔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어두워진 얼굴로 주승강구를 올라왔다. 두캉가 선장은 그 얼굴을 보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 만 두 눈에는 여전히 희망을 담은 채 식스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식스의 뒤쪽으로는 아무도 따라나오지 않았다.

갑판에 올라온 식스는 두캉가 선장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캉가 선장이 노성을 지르려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었다. 두캉가는 비틀거리며 뱃전을 움켜쥐었다.

‘이게 내가 받을 벌인가?”

‘이게 내가 키 드레이번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인가? 모든 이들의 앞쪽에 서서 죽는 것?”

두캉가의 눈앞이 뿌옇게 바뀌었다. 불투명한 시야에 더하여 천둥소리 같은 이명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두캉가는 혼절할 것 같은 기분 속 에 표류했다. 사정없이 잡아당겨진 순간들이 그를 에워쌌고 그 속에서 두캉가는 외롭게 방랑했다.

그리고 백년이 지났을 때, 두캉가는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을 들었다.

“……가 선장! 두캉가 선장!”

두캉가는 고개를 들었다.

편안했다. 몸은 놀랍도록 가벼웠고 신경은 한 줄 한 줄이 모두 달아오른 철사처럼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두캉가는 경쾌하게 몸을 돌려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다시 고함을 지르려던 트로포스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고 두캉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포스. 다녀오겠네.”

트로포스와 킬리, 그리고 돌탄 선장은 놀란 눈으로 두캉가 선장을 바라보았다. 320파운드나 나가는 둔한 몸과 근시 때문에 찡그려진 눈매 등은 그 대로였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두캉가를 보는 듯했다. 두캉가 선장은, 마치 조금 전에 진수식을 마친 전함 같았다.

물수리호의 선상에 있던 바라미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두캉가 선장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벨로린은 그런 라미의 모습에 눈살을 찡그 렸다.

두캉가 선장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도일 일항사, 매슈 일항사! 모든 포격 제어는 자함에서 맡는다. 잘 알았나!”

“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두 명의 일항사들 역시 당혹한 표정이었고 특히나 매슈 일항사는 흑기사호를 탄 이후 처음으로 오닉스 선장이 아닌 다른 선장에게 경칭을 사용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세 선장들은 이 작은 기적에 놀라워했지만 두캉가는 당연하다는 듯 씩 웃으며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좋아. 한바탕 놀아보자. 함대, 진격!”

바다사자호와 페가서스호, 그리고 흑기사호는 삼각형을 이룬 모습으로 진격해 갔다. 그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돌탄 선장은 몸을 부르르 떤 다음 트로포스 선장을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타펠쿤이 아직 움칙인 컷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틀토 합류하는 편이 낫치 않을까?”

트로포스 선장은 고민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두캉가 선장의 저런 모습 처음 봤군. 그리고 대사가 있으니까………… 그런데 대사는 어디 있는 거지?”

트로포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수리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트로포스는 세 척의 전함을 뒤쫓듯 헤엄치고 있는 흰 뱀 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수리호의 선상에서는 벨로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가 일으키는 물보라를 보며 벨로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 다.

‘바보 같으니, 저기엔 성물들이 있다. 네가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벨로린은 라미의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벨로린은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미의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 이었다.


폴라리스 정부 청사의 정문이 갑자기 열렸다.

용기병들은 당황하여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튕겨지듯 열린 정문에서는 말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말은 그대로 용기병들의 원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 었고 그 마상에 있는 기수를 본 용기병들은 흠칫했다. 검은 갑주 위로는 검은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 위로 치켜든 두 손에는 거대한 배틀 엑스가 들려져 있었다. 용기병들은 핸드건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오닉스 나이트! 멈춰라!”

하지만 오닉스 나이트는 머리 위의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저없이 달려들었다. 오닉스의 정면에 서 있던 용기병들은 지휘관을 바라보았고 지휘 관은 내뱉듯이 외쳤다.

“제기랄, 비켜! 말을 쏘겠다!”

용기병들은 황급히 비켜났다. 그들이 비켜준 길을 통해 오닉스가 통과하기 직전 지휘관은 방아쇠를 당겼다. 포성과 함께 말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 고 마상에 있던 오닉스 나이트는 그대로 허공을 날아 건물 벽에 부딪혔다.

지휘관은 핸드건을 앞으로 내민 채 오닉스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오닉스는 벽 아래쪽에 처박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던 지휘관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오닉스의 두 손은 도끼에 묶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해서 말에서 내린 지휘관은 곧장 오닉스를 향해 걸어갔다. 지휘관은 마스크를 붙잡아 위로 확 쳐들었고 곧 비명을 질렀다. 마스크 아래에는 입 에 재갈이 물려져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속았다, 서 본헤드야!”

용기병들의 지휘관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무렵 하리야 선장과 오닉스 선장은 건물들의 지붕 위를 달리고 있었다. 용기병들은 정문에서 뛰어나온 서 본헤드에게 시선이 뺏겼기 때문에 청사 3층에서 몸을 날린 두 선장을 보지 못했고 두 선장은 그 틈을 타 건물들의 지붕을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분주히 도망치던 중이었지만, 하리야 선장은 앞쪽에서 달려가는 오닉스 선장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당황을 느꼈다. 앞쪽에서 교묘한 몸놀림으로 박 공 위를 달려가고 있는 사내는 그가 늘상 알고 지내던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처음 보는 인물이기도 했다. 눈에 들어오는 모습과 머릿속 사실의 불일치는 하리야에게 매우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 앞쪽에서 달려가던 오닉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오, 오닉스…… 선장?”

하리야는 오닉스의 이름을 더듬는 자신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오닉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닉스는 손을 아래로 내려 골목길을 가 리켜보였다. 오닉스가 가리키는 곳을 본 하리야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서 파르치! 서 하빈저!”

골목길에서 청사에 대한 공격을 놓고 의논하던 서 파르치와 서 하빈저는 갑자기 지붕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조금 후 지붕 위에 서 하리야 선장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서 하빈저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탈출하셨군요!”

“그래요. 운좋게도. 여러분들은?”

“아, 선장님을 구하기 위해 용기병들을 공격할 방도를 생각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들이 배신한 것이 확실한 겁니까?”

“그렇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 파르치는 으르릉거리며 골목 저편을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공격해야겠군요.”

“아니오. 내버려두시오. 저자들은 우리를 억류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실제 목표는 배들이었던 것 같소. 하지만 부두 쪽으로 간 패거리는 그랜드머더 호의 밥이 되었을 거요. 그러니 저 친구들은 내버려두시오. 목표를 상실한 것을 알면 알아서 흩어질 테니까. 문제는 다벨군의 움직임인데, 어떻게 됐 지요? 혹 알고 있습니까?”

“바스톨 장군께서 외성 쪽으로 가셨습니다. 오닉스 선장과 함께 육상 방어를 책임질 테니 하리야 선장께서는 페가서스호로 가셔서 스스로를 보호하 고 동시에 해상 방어를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젠장. 바깥쪽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안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나는 페가서스호로 가지요. 그 럼 자네는 외성으로…………?”

하리야는 다시 떨떠름한 얼굴로 오닉스를 돌아보았고 오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야는 서 파르치를 향해 말했다.

“그럼 경들은 외성으로 가서 바스톨 장군을 돕기 바랍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십니까?”

서 하빈저는 오닉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리야는 과연 자신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까 의심하며 말했다.

“오닉스 나이트 선장이오.”

하리야의 우려대로, 서 하빈저와 서 파르치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얼굴로 오닉스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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