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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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준비는 신기할 정도로 빨랐다. 이시도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신차이는 프리스트 치터리에 대해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다. 닐림의 프리스트 치터 리가 돌아간 바로 다음날 아침, 레드 서펀트 호의 선장과 일등 항해사는 레드 서펀트의 선주인 비겐트 가문의 친필 동의서를 번갈아 읽으며 서로를 향해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친필 동의서를 들고 온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레드 서펀트의 선주이자 그 배의 제2대 선장인 이골 비겐트는 손수 작성해서 들고 온 동의서를 그대로 선장실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거기에 대해서 는 일별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다리를 쭉 뻗은 방만한 자세로 쿠션에 기대앉아서 추억 어린 표정으로 선장실을 둘러 보고 있었다.
이것을 전대 선장이 옛 추억이 서린 배를 방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이펀의 선원 사회에서 선주는 되도록이면 배를 방문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명령 계통상 선장의 위에 위치하는 입장이기에 선주가 배를 방문하는 것은 배의 최고 우두머리인 선장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차이가 알기로 이골 비겐트는 그런 예법을 무시하는 무뢰배는 아니었다.
잠시 후 이골은 레드 서펀트의 제3대 선장과 그의 일등 항해사가 동의서를 다 읽은 것을 발견하고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빠르지?”
“심할 정도군요. 어떤 깃발이 나부낀 겁니까.”
“국립 박물학회야.”
자유 무역선은 무역선이자 동시에 탐험선이며 경우에 따라 별 저항감 없이 해적선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레드 서펀트는 자이펀 국립 박물학회에서 상당한 보조금을 지급받는 대신 항해 중 발견한 모든 정보들을 박물학회에 제공하는 계약을 맺고 있다. 신차이 선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면적으로는?”
“닐림의 날개지. 빌어먹을 군인 녀석들. 박물학회의 친구가 암시를 주더군.”
“닐림의 날개가 어떻게…………? 박물학회는 군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이골은 심통을 부리며 말했다.
“정신 차리게, 신차이 선장! 닐림의 날개 부대원들은 모두 명가들의 자제야. 닐림의 날개 대장은 원한다면 어떤 명가의 수장에게도 ‘그들이 생각하 기에 훌륭한 예법을 가르칠 수 있네. 그리고 그 명가들의 수장 중에는 자이펀 국립 박물학회의 스폰서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이해가 안 되나?” 신차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동의서는 너무하군요.”
흥분한 상태였지만 하늘 같은 선주님의 면전인지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이시도는 신차이의 말에 힘입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선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선주님. 이런 동의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이 배를 거의 군함으로 취급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이골은 뜨악한 시선으로 이시도를 바라보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쓴 것에 대해 가르쳐줄 필요는 없네, 이시도 군.”
가까스로 발휘되었던 용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시도는 선장의 배려에 의해 ‘감히’선장과 선주의 회담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일등 항해사 의 자세로 돌아갔다. 즉 입이 없는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신차이는 차분한 표정으로 동의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리스트 치터리 무스의 신실되고 유익한 의견과 제안을 진지한 호의와 높은 관심으로서 받아들이며……………, 원한다면 그 치터리라는 친구가 선장 노 릇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이건 뭡니까. 항해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과 재난 등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그 수행원들 과 모든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코를 풀거나 기침을 할 때도 그 육전 대원 녀석들에게 정중히 허락을 요청하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썼네.”
신차이는 차분한 표정 그대로 조용히 말했다.
“차라리 제 목을 베어 메인마스트에 매다십시오. 그렇게는 못합니다.”
이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는 선주로서 명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렇기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이 배까지 직 접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 이골은 다리를 끌어당겨서는 곧은 자세를 취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해해 주게. 이제리스 해협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번만 더 이 배를 살려주게.”
신차이의 턱수염이 조금 경련했다. 신차이는 음울한 눈으로 이골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친절하게도 제안을 거절할 경우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도 암시해 줬네. 레드 서펀트는 군함으로 징발될 걸세.”
이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골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시도는 격분하여 말했다. “레드 서펀트를 군함으로 징발하다니, 그것은 자유 무 역선 전체에 대한 도발 아닙니까? 아니, 이것은 선주 연합에 대한 도전입니다. 해군이 감히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시도 군, 무슨 말인지 잘 아네. 하지만 전쟁이 너무나 길었어.”
이시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다. 이런 대답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전쟁이 무슨 상관입니까? 해군이 이 전쟁에서 무슨 일을 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바이서스에 자유 무역선까지 징발해서 격퇴해야 할 해 군이라도 있습니까?”
신차이 역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의 경악은 이시도의 경악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그의 선대 선장이자 선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이골은 이를 갈면서 말해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은 뭐겠는가?”
“반칙이죠.”
“그래. 국방 대신 함은 온후한 표정 속에 야수의 본성을 감춘 작자야. 놀라운 일이지만, 그게 뭐 말이 안 될 것은 없잖은가.”
“그가 자이펀 해군의 오랜 고민거리를 해결한다는 겁니까?”
“재미있는 생각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과연 자이펀 육전대가 장미의 기사들을 절대로 당해 낼 수 없다는 믿음의 근거는 뭐란 말인가.”
이시도는 숨 가쁘게 진행되는 대화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가 그 대화를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시도로서는 받 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일스 공국. 일스 대공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작은 공국은 공국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성격에 의해서 자이펀·바이서스 전쟁에서 방관자의 역할을 취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공국이 있었기에 바이서스는 바다로부터의 침공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이펀에 아무리 막강한 해군력이 있다 한들 있지도 않은 바이서스의 함대를 격침시킬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자이펀에서 해로를 통해 바이서스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일스가 막고 있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은 반칙이다. 자이펀 · 바이서스 전쟁과 상관없는 일스를 침략함으로써 바이서스 우회침입의 교두보로 삼는 것 은 당연히 고려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자이펀의 전략가들이 멍청이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미 밝혀졌듯이 전쟁의 제3자인 일스를 침략하는 것은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반칙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다면 이 점은 그렇게 큰 문제 가 되지 않는다.
둘째, 그러나 일스가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확실히 일스는 작은 공국이며 그 해군력에 있어 자이펀의 상대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경우 헤게모 니아에서 결코 자이펀을 응원하기 위한 목적은 아닌 함대가 출동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일스와 헤게모니아의 유대 관계는 적어도 해군에 있어 서는 각별한 것이다. 이것은 일스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륙 동쪽 해안의 패권을 자이펀에게 양보하고 싶지는 않은 헤게모니아의 심중을 자극해 온 결 과이다. 따라서 일스 침공은 자이펀에게 바이서스, 일스, 헤게모니아의 3국과 동시에 싸워야 되는, 결코 쾌적하지는 않은 결과를 선물할 것이다.
셋째, 백보 양보해서 고기동 전술로 일스의 항구를 장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일스의 땅을 허락 없이 밟은 자와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 이기 위해 싸운다는 일스 기사단의 위명이 앞을 가로막는다. 자이펀 · 일스 간의 항로는 기나길며 일스로 침입한 자이펀 군은 그 기나긴 보급선을 헤게 모니아 함대로부터 방어하며 동시에 장미의 기사, 저스티스 기사단이라 불리는 일스 기사단과 맞붙어 싸워야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이 천공의 3기 사의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일스 국경 안의 전투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저스티스 기사단의 전설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원래는 무적의 기사 단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300년 전 첫 번째 국외 원정인 데스나이트들과의 전투에서 일스 기사단은 하마터면 전멸당할 뻔했고 그 이후로는 ‘자국내 무적’이라는, 격조 가 꽤나 떨어지는 전설이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거뜬히(?) 극복한 자이펀의 전략가라 하더라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골은 국방 대신 함이 굉장히 조악하고 거친 방법으로 그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해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시도는 크게 흥분하여 말했다.
“어쩌면, 예! 선주 연합의 함선을 모두 자이펀 해군에 복속시킨다면 헤게모니아·일스 연합 해군과도 싸워볼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저는 육 전대가 일스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이시도 군. 자네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져온 생각을 말하고 있군. 일스까지 말과 중무장을 배에 싣고 갈 수 없는 바에야 자이펀 군이 장 미의 기사들과 싸울 수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말일세, 자이펀 군은 바이서스와 싸우면서 대기병 전술을 많이 연마할 수 있었을 거 야. 뭐, 아무려면 일스 기사단만큼이야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바이서스 군 역시 기사도의 나라이지 않은가.”
“그런가요?”
이시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림 오세니아의 아들이긴 하지만 이시도 역시 자이펀 인으로서 자이펀이 전쟁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반갑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신차이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전쟁의 부등호는 여인의 마음보다도 믿을 수 없다던가요.”
“맞아. 이건 탁상공론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지. 어쨌든 말일세, 군부가 움직이는 까닭은 이거야. 정말 자이펀 함대가 동북 항로를 통해 헤게모니 아와 일스의 함대와 싸울 생각이라면, 동북 항로에서 발생하는 괴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말이지.”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육전 대원이 참가하는 이유는 밝혀졌군.
“그리고, 선주 연합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네. 그렇잖아도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해 볼 생각이었지. 그러니 이 조사는 우리들의 요구와도 부합되네. 그렇지만……..”
이골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듣고 명심하게. 나는 선주 연합의 회원으로서 말하겠네. 만일 그것이 승리를 보장한다면, 자이펀 함대에 소속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것이 전후까지 고정된 상황으로 굳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네. 전쟁이 끝나고도 선주 연합이 자이펀 해군의 명령을 따르게 되는 불쾌한 상황은 싫단 말이야. 알겠는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이 동의서는 받아들이게 웃으면서 그들을 승선시키게. 그러나 칼자루는 절대로 내주면 안 돼. 이해하겠어?”
신차이는 다시 방대한 사고와 추리를 거친 다음, 간략하게 대답했다.
“예.”
기사도와 모험심의 나라 바이서스.
바이서스의 모든 체제를 존재하게끔 하는 힘인 기사도를 하나의 형태, 장소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궁성 임펠리아일 것이다. 저 자이펀의 하탄의 궁전 이 집이 아닌 것처럼 바이서스의 국왕의 궁성 역시 집이 아니다. 그것은 국왕의 전투 요새이며 기사도의 성지이다.
그러나 지금 임펠리아의 후원에 있는 세 사람은 기사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기에 기사도의 성지 임펠리아의 장엄한 모습이 꽤나 퇴색해 보였다. 먼저 데밀레노스 바이서스, 애칭은 데미. 현재 미혼인 닐시언 국왕의 여동생이며, 따라서 궁성 임펠리아의 호스티스에 해당하지만,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어하는 공주님. 구부정한 자세로 땅을 바라보고 있던 데미 공주는 머리에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잠시 벗 고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손에 땀이 가득 묻어나자 데미 공주는 잠시 손바닥을 내려보다가 작업복 바지에 쓱 문질러 닦았다.
“아, 이런 조금만 기다리시지.”
데미 공주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퍼걸러 안쪽으로 한손에 손수건을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전 나무처럼 커다란 사내가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채 뭔가를 후다닥 품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손수건을 들고 있던 칼 헬턴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늦었지만 그래도 손수건을 건넬 것인가, 아니면 그냥 도로 집어넣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미 공주는 그가 고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 았다.
“내가 이겼다고 해두죠.”
“예?”
“백기는 집어넣어요. 그런데 우리가 뭣 때문에 싸운 거죠?”
칼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우겨넣고 다시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칼 곁에 앉아 있던 샌슨은 조금 후에야 간신히 미소를 지 었다. 데미 공주는 옆에 놓아둔 양동이에 가위와 손삽 등을 던져 넣고는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퍼걸러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데미 공주는 퍼걸러 의 벤치에 주저앉으며 곧장 질문을 던졌다.
“퍽 덥네요. 그런데 언제부터 구경하고 있었지요?”
“조금 전입니다. 사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여기 앉아 있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가 더 놀랐습니다. 전혀 인기척을 안 내시더군요.”
“아아. 집중하고 있었지요. 저 팬지가 말썽을 부려서요. 그냥 뽑아서 삶아먹을까 봐요.”
샌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팬지도 삶아먹습니까? 풀과 꽃을 좋아하시는 공주님께서는 염소와 마찬가지라서 날것으로 드셔도….., 으아아!”
샌슨은 발작적으로 검집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든 샌슨은 데미 공주의 눈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의 흔적을 보고 당황했 다.
“조금 슬프네요.”
데미 공주의 말은 그녀의 감정에 비해 보면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이었다. 샌슨이 허둥지둥 위로의 말을 떠올리려고 애쓸 때 데미 공주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좀 줘봐요.”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미 공주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탁 치며 검집을 풀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로 상당히 아름다운 롱 소드를 올려놓 았다. 데미 공주는 눈을 내리감으며 그 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곧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너와 난 같은 처지구나……………,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지…… 그래도 넌 나보단 나아. 난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했어. 그래…………, 미안. 슬프겠 지. 내 생각만 했네.”
칼은 숙연한 표정으로 검과 데미 공주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샌슨의 검은 원래는 드래곤 슬레이어 길시언 바이서스의 검이었던 프림 블레이드다. 스스로의 의지와 감정을 가지며 소유주와 대화할 수 있는 희대의 명검이지만, 그 감정 때문에 다른 검이라면 가질 수 없는 아픔에 괴로워해야 되는 불행한 검이기도 하다. 비록 끝없는 농담과 꺾이지 않는 예지로써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있지만, 지금 길시언 바이서스의 여동생의 손에 쥐어진 프림 블레이드는…………,
“응? 나는 모르는데, 방앗간 집 따님이라고 했니? 물레방앗간? 그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이잇, 배애신자!”
박력 넘치는 일갈.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확 낚아챘다. 의욕이 너무 충만했을까. 샌슨은 손에 검집을 든 채 멍한 얼굴로 아직도 데미 공주의 손에 쥐어져 있는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데미 공주는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경악으로 굳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표정은 칼의 얼굴에서 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급박한 순간, 샌슨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친구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민첩함을 발휘했다.
샌슨은 손을 들어 데미 공주의 머리를 가리키며 숨 막히는 목소리로 외쳤다.
“공주님 머리 위에!”
당황한 데미 공주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올렸고 그 동작을 기다리던 샌슨은 아무 문제없이 프림 블레이드를 회수할 수 있었다. 희희낙락하며 프림 블레이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 넣던 샌슨은 칼과 데미 공주가 형언키 어려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샌슨은 당당하게 말을 맺었 다.
“밀짚모자가 있군요.”
“놀라우세요, 퍼시발 공.”
데미 공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주의 머리 위로 벌이나 기타 등등의 위험한 곤충이 있지 않나 바라보던 칼은 그제서야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밀짚모자라고? 칼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데미 공주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팬지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 아, 덥다고 조금 전에 말했어요. 팬지는 원래 내한성이 강해서 추위에는 잘 버텨요. 그럼 더위에 약할 거라는 것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그런 데 저는 짐작이 안 돼요. 두 분은 여기까지 무슨 고민하러 오셨는지?”
칼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간신히 데미 공주의 화법을 따라잡았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칼은 주머니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데미 공주는 물끄러미 그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씨앗입니다.”
데미 공주는 환한 표정이 되어 주머니를 풀었다. 주머니 안에서 제법 큰 씨앗 하나를 주워 올린 데미 공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렌지로군요! 어떻게 구하셨어요?”
칼은 턱으로 샌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예. 퍼시발 공의 단골 과일 가게에 오렌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여기까지 무슨 고민하러 오셨는지?”
“뭐, 별다른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여기까지 무슨 고민하러 오셨는지?”
“하하.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렇군요. 여기까지 무슨 고민하러 오셨는지?”
칼은 두 손 들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집요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쉬다 가세요.”
데미 공주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칼과 샌슨은 몹시 가련한 표정과 당황스러운 표정을 적절히 혼합하여 데미 공주를 올려다보았지만 데미 공주는 옆 에 내려둔 양동이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거짓말 하실 거잖아요. 거짓말인 것 잘 알면서 듣는 척하는 건 재미없어요.”
데미 공주는 그대로 궁성 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칼은 웃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표정하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왜 데미 공주만 만 나면 이렇게도 고민할 일이 많은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샌슨은 한숨을 내쉬며 불평스럽게 말했다.
“후원이라면 주위가 탁 트여 있어서 안전할 거라고 말하셨잖습니까.”
고민에 빠져 있던 칼은 샌슨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예외는 있는 법이잖나, 퍼시발 군.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서류를 다급하게 우겨넣지는 말게나. 중요한 비밀 서류라고 광고하는 꼴 아닌가.”
“예? 아아,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거리는 걸요. 저 아무래도 데미 공주님을 사랑하나 봅니………, 관둬, 관둬!”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향해 호통을 친 다음 품속에서 구겨진 서류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칼은 서류를 주워 주름을 편 다음 그것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샌슨은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들. 바구니 속에 숨겨둔 줄은 몰랐을 겁니다. 인간 이하의 지능에서나 나올 만한 재치……………, 방심하면 안 돼!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런데 그건 어디서 온 겁니까?”
“응? 아아. 자이펀의 졸란에서 온 것일세.”
“졸란이오? 우와! 자크 녀석 대단하군요. 거기까지 손을 뻗쳐둔 겁니까?”
샌슨의 감탄하는 모습은 퍽 기괴하게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악문 채 프림 블레이드의 농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면서 감탄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류를 바라보느라 바빴던 칼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그 친구야 원래 바이서스 임펠의 밤의 왕자…………., 자크 3대의 마지막 자크잖나. 게다가 대미궁에서 긁어나온 돈도 충분하고…………, 어쨌든 그 친구 덕 을 톡톡히 보는군.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되는 거야.”
칼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칼이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할 지경이라는 것을 깨달은 샌슨은 무료한 표정으로 후원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그 광경이 전사의 휴식이라는 제목이 붙을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무차별적인 수다를 일일이 무시하느라 관자놀이에 핏대가 선 얼굴로 후원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한참 후 칼이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자 샌슨은 질문했다.
“뭡니까? 자크의 정보원이 마스터가 아니라 칼에게 곧장 보낸 걸 보니 그 길드도 곧 풍비박산…………, 수련이 부족해. 으흠! 상당한 내용일 것 같은데요.”
칼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소화하고 샌슨에게 들려주기 위해 정리하느라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후 칼은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자네 닐림의 날개라고 들어봤나?”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닐림이라는 새도 있습니까? 아….., 예. 쇠사슬과 자유의 닐림이라고요? 음. 그런 신도 있었…… 예, 그렇군요. 이제 알았습니다.”
칼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다가 곧 프림 블레이드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음을 깨달았다. 칼은 피식 웃고 나서 말했다.
“자넨 앞으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좀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 좋겠군. 그녀가 설명해 줄 테니. 어쨌든 닐림의 날개는 그 닐림의 종단과는 관련이 없지. 자이펀의 특수 부대일세.”
“특수 부대요?”
“뭐, 좀 화려한 부대일세. 닐림은 하탄, 그러니까 자이펀의 지배자를 수호하는 신의 이름일세. 바이서스의 왕가를 보살피는 아샤스와 비슷하다 하겠 지. 이 닐림의 이름을 붙인 것만 보아도 얼마나 대단한 집단일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 닐림의 날개는 명가,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해서 귀족의 자제들로만 구성되는 부대일세.”
샌슨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시하겠군요? 겉이 번드르르하다고 싸움 잘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귀족 부대라면, 그거 아무래도 대국민 전시용인 것 같은데요.”
“맞아요, 프림 양.”
“제가 한 말입니다!”
“응? 아아, 그래. 날카로운 지적일세, 퍼시발 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볼모라고 해야겠지. 명가들의 자손을 하탄 휘하의 직속 부대에 둠으로써 하 탄은 명가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지.”
샌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시시하지는 않아. 오히려 가장 위험한 임무만 맡는 부대인 모양이야. 하탄 직속의 부대, 명가들의 자손만으로 이루어진 부대. 그런 쟁쟁한 위명이 있으니 발도 못 빼는 거지. 우리나라에 파견되는 간첩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 부대 소속인 모양인데. 이 부대의 최근 동향 중 유명한 것은 자 네와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일세.”
“뭔데요?”
“디바인 웨펀.”
샌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말없이 이를 갈기 시작했고 칼 역시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에야 샌슨은 나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잘됐군요. 그동안 누구를 욕해야 되는지도 몰랐는데, 이제부턴 닐림의 날개라는 그 녀석들을 저주하면 되겠군요.”
“저주는 심사만 어지럽힐 뿐이야. 관두게.”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자네가 저주한다고 그들이 살아나느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꼭 해야 되나?”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샌슨은 로넨 휴리첼과 함께 프리스트들과 병사들을 긁어모아 디바인 웨펀의 집중적 인 공격을 받고 있던 사우스그레이드를 일주했다. 그 악몽 같던 3주 동안, 샌슨이 본 것은 지옥이었다. 샌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제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칼은 우울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올라온 칼의 손이 샌슨의 어깨를 두드리자 샌슨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닐림의 날개가 왜 거론되는 겁니까?”
칼은 샌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샌슨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음. 이자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군.”
“이상한 움직임? 그러니까 물구나무를 서서 코로 맥주를 마시는…, 정신 집중!”
샌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칼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꽤나 이상한 움직임이로군. 어쨌든 이자들의 동향을 계속 예의 주시할 것인가를 물어오고 있네. 자네는 조만간 자크의 가게에 가서 계속 진 행하라는 말을 전하도록 하게…………. 듣고 있나?”
계속해서 “정신 집중, 정신 집중.”이라고 웅얼거리고 있던 샌슨을 위해, 칼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해야 했다. 샌슨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다 음 말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움직임이라는 것은 뭡니까?”
“음. 자유 무역선 한 척을 동북 항로로 파견할 계획인가 본데.”
“동북 항로라면……, 아! 지고………….., 그분 말씀이군요.”
지골레이드의 이름을 거론할 뻔했지만 샌슨은 가까스로 자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의 노력은 아니다. 프림 블레이드가 그의 머릿속으로만 들리 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돼!’라고 고함질렀기 때문이다. 칼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지골레이드께서 하고 있는 일을 조사할 모양이야.”
샌슨은 너무나 가련한 표정으로 칼을 멀거니 바라보았고 프림 블레이드는 얼굴이 없다는 이유로 무표정하게,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주인과 마찬 가지의 표정을 지은 채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그 둘을 향해 푸짐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알려져도 상관없어. 사실은 알릴 생각이네.”
“예? 아니……, 바이서스가 지골레이드로 하여금 자이펀의 민간 함선을 공격하도록 사주했다는 사실을 알리신다고요?”
“그래요, 프림 양.”
“……예. 이번엔 그녀의 말 맞습니다.”
“하하, 그래. 어쨌든 알릴 거야. 물론 공식적으로는 아니지. 프림 양의 말대로 우리가 민간 함선을 공격한다는 것을 어떻게 공표하겠는가. 하지만 비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알려줄 생각이네. 어차피 이것은 협박이었지. 내가 자이펀의 민간 함선을 침몰시키면서 쾌감을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게 나. 지골레이드께서도 협박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격침에만 찬성하신 것이라네.”
“음. 그렇군요.”
“그러니, 이제 자이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궁금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사태가 잘 풀려가고 있다는 의미야. 이번에 오는 친구들에 게는 전갈을 남겨야겠군. 지골레이드와의 연결선을 움직여보게나, 퍼시발 군.”
“지골레이드에게 어떻게 전할까요?”
“아, 이번에 조사차 오는 친구들이 있다고만 말씀드리면 되네. 지골레이드께서는 현명한 드래곤일세.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실 거야. 자크의 가게에서 뭔가 정보가 더 들어오면 그대로 지골레이드께 전하도록 하게. 최소한 그분께서 상대해야 될 배가 어떤 배인지는 파악하실 수 있어 야 되니까.”
“알겠습니다. 칼, 사랑해요……”
따스한 봄의 햇살 아래였건만 잠시 동안 임펠리아의 후원에는 데미 공주님의 아름다운 꽃들이 모조리 얼어죽을 정도의 냉기류가 흘렀다. 간신히 심 장 마비를 일으키지 않은 칼은 샌슨의 허옇게 질린 얼굴을 향해 힘겹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프림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