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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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인트, 제발 일어나요! 당신이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예?”
아프나이델은 후치의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제레인트를 흔들었다. 제레인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주위를 둘러보고는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다. 밤인지라 주위는 어두운 가운데 몇 개의 횃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곳이 어딘지 짐작할 만한 단서를 전혀 발견하지 못 한 제레인트는 동료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음냐. 여기가 어디죠?”
“켄턴입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도착했습니다.”
“켄턴에도 침대는・・・・・・ 있겠죠? 음냐.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제레인트, 제발! 사람들에게 알려야 된단 말입니다!”
아프나이델은 고함을 지르며 제레인트의 몸을 힘껏 흔들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힘없이 말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꽈당! 아프나이델은 당황 하며 제레인트를 부축했다.
“아, 이런 미안합니다. 제레인트. 몹시 피곤할 거라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제레인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의 사과를 받고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보다 많은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표정과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뒤섞은 채 제레인트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들은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비 대원인 듯했다. 제레인트는 눈앞에 보이는 건물이 아마도 켄턴의 시청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밤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시청의 불은 죄다 꺼져 있었고 경비 대원들이 들고 있는 횃불을 제외한 다른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으하암. 깊은 밤인가 보군요. 하지만 당분간은 당신들은 달콤한 꿈을 꾸긴 글렀습니다.”
제레인트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나 말에서 나동그라졌다가 일어선 프리스트의 경고는 경비 대원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 프리스트요?”
“테페리의 지팡이인 제레인트 침버입니다.”
“그래요? 흐음. 먼저 경고해 두겠는데, 요즘 사우스그레이드에서 프리스트들은 경계 대상이올시다. 몸수색을 좀 해야겠으니 협조해 주시지요.”
사우스그레이드를 돌면서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인지라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이 지경이군. 좋아요. 이게 내 디바인 마크요.”
제레인트는 품속을 뒤져 디바인 마크를 꺼냈다. 경비 대원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제레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디바인 마크를 앞으로 내밀 었다.
“여기서는 어떤 방법으로 테스트합니까?”
경비 대원들 틈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건장한 체구에 굵은 팔뚝을 지니고 있는 중년 남자로서, 역시 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포차드를 들고 있 는 다른 경비 대원들과는 달리 롱 소드를 차고 있어서 경비대의 우두머리인가 싶었다. 남자는 제레인트의 디바인 마크를 받아들더니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남자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혹시 하이 프리스트이십니까?”
“아니오. 그것은 저희 원장님께서 선물하신 것입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칼날 위에 실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름의 영광에 의지하여.”
제레인트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말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레티의 프리스트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도시에는 레티의 수도원이 있지요.”
레티의 프리스트는 경비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분은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확실하오. 그것도 꽤 고위 프리스트이신 듯하군요.”
제레인트는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가 뭐라고 말할 틈은 없었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곧장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 했다.
“그럼 저 마법사분의 말이 진실입니까?”
“예? 죄송합니다만 저는 조금 전까지 졸고 있느라…………”
“콜로넬 계곡의 데스나이트들이 부활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레티의 프리스트는 거의 고함지르듯이 말했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태평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입니다.”
경비 대원들의 틈에서 곧장 숨죽인 비명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맙소사, 유피넬이여!”
“300년 전에 모두 죽었잖아! 응? 솔로처가 그랬잖아! 그런데 어떻게?”
경비 대원들의 불안을 담아 횃불이 마구 흔들렸다.
일행들의 조금 뒤에서 센추리온의 고삐를 쥔 채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스 오빠.”
“왜?”
“저 사람들, 나이드의 말에는 콧방귀를 뀌었잖아요. 그런데 제리의 말은 단번에 믿는 거야?”
“프리스트니까.”
“그게 왜?”
엑셀핸드는 허리에 걸린 배틀 액스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흐음. 내가 본 바로는, 인간에게는 각자에게 요구되는 행동특성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직업을 가진 자는 당연히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거 말이야. 전 사는 용감해야 되고, 장사꾼은 약삭빨라야 하고, 마법사는 현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거야 당연한 말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인간들은 평판이라든가 인망보다는 그 행동 특성을 더 신뢰하는 것 같아. 권위라고 하지. 어쨌든 제레인트는 프리스트니까 당연히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거지.”
아일페사스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엑셀핸드의 말을 듣다가, 그냥 포기해 버렸다.
“어려워요.”
“나도 짐작일 뿐이야. 어쨌든 저러고 있도록 놔둘 수는 없군. 나도 저 친구들의 행동 특성을 자극해 볼까.”
“응?”
아일페사스의 반문을 무시하며 엑셀핸드는 앞으로 나섰다. 당황하고 있던 경비 대원들도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를 옆으로 밀어내며 횃불 빛 속으로 등장하는 드워프의 당당한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엑셀핸드는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엑셀핸드다. 이 친구들과 동행이지. 자네들이 정말 경비 대원이라면 즉시 시장을 두드려 깨우고 대원들을 소집하는 것이 어떨까?”
“아, 그래. 레일! 가서 대장을 깨워. 데른과 달은 시장님 댁으로 가!”
경비대원들은 엑셀핸드의 의도대로 허둥지둥 여기저기로 달려갔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곧 시장님과 경비 대장님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아, 콜로넬 계곡에서 이곳 까지 곧장 달려오신 겁니까? 저, 음. 퍽 피로하시겠지만, 괜찮다면 ·
“사태가 사태니까요. 괜찮습니다.”
레티의 프리스트와 경비대원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시청의 회의실로 들어서게 되었다. 심야의 시청 안은 어두웠고 음산한 기분마저 들었지만 아무 도 그런 것을 느낄 새는 없었다. 경비 대원들이 촛불을 켜자 일행은 모두 소파에 앉았다. 피로한 나머지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제레인트나 아프나이델과는 달리, 엑셀핸드와 아일페사스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앉아 별로 졸리지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워프와 드래곤이기도 했지만, 뒤쫓아오는 데스나이트들을 지연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마나를 뒤흔들고 디바인 파워를 소모한 아프나이델이나 제레인트와는 달리 둘은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곧장 옆으로 쓰러지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시장님이 오면………… 깨워요. 난 너무 피곤………합니다.”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 위급한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태평하게 잠든 것이다. 그래서 아프나이델 은 제레인트 대신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이 프리스트께서는 그들에게서 도주하느라 너무 많은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이해합니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는 자신을 소개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켄턴 수도원에서 이 시청으로 파견 나온 사람입니다. 소개할 이름이 없습니다만 불편하시다면 적당한 이름으로 불 러주셔도 좋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은 자아의 확인이자 완성이기에 파괴 신을 섬기는 프리스 트가 이름을 가질 수는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프리스트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없니? 제가 이쁜 이름으로 하나 지어줄까?”
레티의 프리스트는 입을 쩍 벌렸다.
“아, 죄송합니다. 이 소녀는 말이 좀 서투릅니다.”
아프나이델은 황급하게 사과하며 동시에 한쪽 눈을 찡긋했다. 피곤했기 때문에 복잡한 설명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아프나이델의 재치였고, 레 티의 프리스트는 아프나이델의 의도대로 그 눈짓을 해석한 모양이다. 그는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까. 하하. 레이디께서는 어떤 이름을 주시겠습니까?”
“레티의 프리스트라고 했죠? 레틴드롤스라고 부를래.”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의 눈이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드래곤의 언어를 모르는 레티의 프리스트에게는 저 이름이 아무 의미없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레티의 개구쟁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미소 지었다.
“괜찮군요. 그럼 그렇게 부르십시오.”
“저는 아프나이델입니다. 여기 이분은 드워프들의 노커이신 엑셀핸드 아인델프십니다. 그리고 소녀는 아일페사스라고 합니다만 펫시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아일페사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는 아일페사스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엑셀핸드를 바라보며 외쳤다.
“노커시라고요!”
엑셀핸드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레티의 프리스트께서는 일행들과 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마저도 부담스럽게 느껴버린 것이 틀림없 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뭐라고 한참 동안 횡설수설하다가 “시장님이 왜 이렇게 늦는 건지.” 어쩌고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프나이델도 그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방 안에 일행만이 남겨지게 되자 아프나이델은 두 다리를 주욱 펴고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죽은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아……, 간신히 여기까지 왔군. 못 오는 줄 알았습니다.”
엑셀핸드 역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오늘 새벽엔 정말 아슬아슬했지.”
아프나이델은 온 얼굴로 불쾌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전 콜로넬 계곡에서 데스나이트들을 만난 이후로 일행은 하룻밤과 이틀 낮에 걸쳐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했다. 낮에는 바람을 휘몰아치게 만들어 데스나이트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암흑으로 접어드는 밤에는 그저 줄기차게 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들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새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등 뒤로 데스나이트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싸우다 죽을 것인지 도망치다 죽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지경에 빠져버렸다.
“싸우자! 내 인생의 마침표는 카리스 누멘이 정하실 테니 나완 상관없어! 내 길은 내가 정한다!” “그래! 네가 싸워요! 그 동안 저는 도망칠 테니까!” “몹시 고민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겠습니까, 제레인트?” “튀어요!”
떠오르는 태양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데스나이트들과 상당히 불편한 회동을 가지게 될 뻔했다. 제레인트의 선택은 다시 한번 일행을 구원했고 데스나이트들은 태양과 일행들 양자를 동시에 저주하며 포효했지만 다급하게 검은 안개를 불러들였다. 아프나이델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간신히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의 윈드 월을 성공시켰고 일행은 그대로 켄턴까지 줄달음질쳐 왔다.
아일페사스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컴댕이들,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거야?”
아일페사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그녀의 일행이 아니었다.
“당신들을 쫓아온 것은 아닐 겁니다. 만일 그렇다면 화를 내야겠지만.”
아일페사스와 엑셀핸드는 고개를 돌렸고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아일페사스의 말에 대답한 중년 남자는 문가에 선 채 피로한 눈 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몇 명의 사내들이 방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얼굴로, 즉 말라붙은 침으로 입가를 장식하고 눈곱으로는 눈가를 치장한 채 서 있었다. 약간 뒤쪽으로는 레틴드롤스 씨의 모습도 다시 보였다.
남자는 곧장 소파 쪽으로 걸어와서는 먼저 엑셀핸드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아마도 그가 드워프의 노커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던 모양이다.
“켄턴의 시장 주리오 추발렉입니다.”
“엑셀핸드 아인델프일세.”
“반갑습니다. 이 도시에 고귀한 분이 찾아주신 지도 퍽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소식이 찾아든 것도 역시 퍽 오래되었군요.”
엑셀핸드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나머지 일행들을 소개했다. 그제서야 일어난 제레인트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주리오 시장과 인사를 나 눴다. 주리오 시장은 아일페사스의 화법에 감명을 받았지만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에 정신이 좀 이상한 계집애(나무랄 수 없는 판단이었다.)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프나이델은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저희들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장님?”
“그 대답은 여기 히든보리 압실링거 사집관이 해줄 겁니다. 사집관? 설명해 드리게.”
히든보리 사집관은 꼬장꼬장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는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곧장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 도시는 콜로넬 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남으로 이파실, 그리고 북으로 이 켄턴은 콜로넬 계곡을 위아래로 포위하는 형국입 니다. 그래서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가장 가혹하게 받아야 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300년 전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주리오 시장이 히든보리 사집관의 말을 받았다.
“예. 따라서 그들이 부활했다면 어차피 이파실이나 켄턴 양쪽 중 하나를 먼저 공격했을 겁니다. 지금 저는 저희 도시가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데 대해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 대비가 필요하겠습니다. 본 것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무거운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와 그들이 조우한 것은 어제 오전이었네. 그 이후로 계속 우리 뒤꽁무니에 붙은 모습으로 쫓아왔으니 아마 지금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을걸세. 여기 이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가 재주를 부려 진격 속도를 상당히 늦춰놓기는 했지만, 오늘밤의 이 암흑은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좋은 조건이겠지. 나는 그들이 최소한 내일 정오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보네.”
주리오 시장과 그 측근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지만 엑셀핸드는 그에 괘념치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수효는 전설이 이야기하던 것에서 그다지 빠지지 않을 것 같군. 100명 정도.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를 묻겠다면, 모두들 상대를 못 찌르면 자기 가슴이라도 찔러버리고 말 정도라고 말해 주겠어. 자네들의 예를 들기는 좀 어려울 테니 내게 익숙한 예를 들겠네. 나라면 최소한 500개의 드워프제 도끼가 옆에 있지 않고서는 그런 녀석들을 상대할 생각은 하기 어려울 걸세.”
이것은 드워프 식의 꺾이기 싫어하는 배짱일 뿐이다. 실제로 500명의 드워프가 모였다 하더라도 100명의 데스나이트를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이다. 방 안에서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 빛은 밤의 냉기를 몰아내기에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면면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심을 몰아내 기에는 더욱이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주리오 시장은 절망적인 얼굴을 두 손에 묻고는 몸을 숙였다.
“오, 레티여…………. 당신의 파괴가 이 도시를 겨냥했음입니까.”
“천만에요. 레티의 파괴는 저들 데스나이트들을 겨냥할 것입니다. 레티께서 이 도시를 보호하실 겁니다!”
레티의 프리스트가 다부지게 외쳤다. 그는 검을 단단히 쥐면서 계속 외쳤다.
“저는 수도원에 돌아가서 원장님께 이 소식을 전하고 형제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100명의 데스나이트라 해도 레티의 검을 가볍게 여겼다가는 그 들의 파멸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레티의 프리스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장 방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리오 시장은 음울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 마법사님과 프리스트께서 그들의 진격을 저지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주리오 시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헬카네스께서는 열쇠를 문제 옆에 숨기시지요. 저는 자꾸만 여러분들이 데스나이트의 반대쪽에 걸린 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안 되겠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엑셀핸드가 아니었다. 아프나이델과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피로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 어 넘기며 말했다.
“저희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시간도 없습니다. 곧 떠날 생각입니다.”
주리오 시장의 얼굴이 다시 일렁이는 촛불의 붉은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파랗게 바뀌었다.
“아니………….., 바로 떠나신다고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예. 저희들의 용무가 급합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당황했다. 환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려고 드는 아일페사스를 말리며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제레인트? 무슨 말입니까. 이 도시의 위험을 못 본 척하실 겁니까?”
“예.”
뻔뻔하다면 뻔뻔한 제레인트의 대답이었지만, 아프나이델은 곧장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 리로 물었다.
“그분의 뜻입니까?”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더 이상 말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성직자와는 토론을 할 수가 없어. 테페리의 뜻이라고 말하는 마당에야 무슨 논리로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프나이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리오 시장은 이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여러분들께는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달려오셔서 이 도시의 위험을 알려주신 그 은혜를 모른 척해서야 말이 안 되겠지 요. 게다가 저분의 말씀대로 급한 사정이 있으신 데도 이렇게 멈춰 서서 저희들을 경계하게 해주셨으니. 하지만 저희들을 좀더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 니까?”
제레인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시장의 곁에 있던 히든보리 사집관이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에게는 능력이 있소! 우리를 도와주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단 말이오! 100명의 데스나이트들로부터 당신네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오. 그런데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 도시의 시민들의 목숨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죄송합니다만 어쩔 도리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데스나이트와 뭐가 다르단 말이오!”
히든보리의 고함 소리에 아프나이델은 큰 충격을 받았다. 히든보리는 벌떡 일어서서 그들 일행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우리를 도울 수 없다면 모르겠지만,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면서 돕지 않겠다면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오! 세상에 이런 법은……”
“그만하게, 히든보리.”
주리오 시장이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잖아도 부족한 수면 때문에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제레인트의 거부를 듣고 나자 삽시간에 30년은 늙어 보일 지경이었다. 히든보리는 증오로 눈을 불태우며 일행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주리오 시장은 다시 한번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그 눈길을 회피하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내며 말했다.
“시장님, 어떤 말씀을 하실지 알아요. 하지만 제 결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부탁하십시오.”
주리오 시장은 몸을 일으켰고 제레인트 역시 일어났다. 주리오는 잠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제레인트는 그 손을 마주 쥐어 두 번 흔들었다. 주리오는 뭔가 말을 할 듯하다가 그대로 걸어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물러난 후에도 제레인트는 방문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그의 등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레인트. 당신의 선택은 인간의 모자란 사고 과정 같은 것을 단숨에 뛰어넘어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 도시가 100명의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막아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제는 부활한 직후라서 전혀 마법을 사용하지 않 았지만, 고전이 전하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은 강력한 전사이자 무자비한 마법사입니다. 그들은 신을 도망치게 만든 자들입니다. 헬카네스께서 그들의 추인 솔로처를 준비하시기 전에는 하늘을 나는 것이든 땅을 걷는 것이든 그들에게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제레인트는 대답했다.
“본질을 봅시다. 아프나이델.”
“예?”
제레인트는 몸을 돌려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그의 얼굴에 어린 극심한 갈등과 고통을 볼 수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숨을 들 이켰다.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가, 얼마나 강대한가, 얼마나 흉포한가! 그건 나도 알아요. 어제 아침 그들을 마주보았을 때, 나 역시 죽고 싶도록 무서웠단 말입니다. 그래요. 그들은 끔찍하고 무서워요. 하지만 본질을 봅시다. 본질, 그들이 부활했다는 것.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그들이 시간의 계곡을 단 숨에 뛰어넘어 현재를 과거와 이어버렸다는 이 사건 자체를 보자는 말입니다.”
“예………….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300년 전의 그들의 도래 역시 설명할 수 없었지요. 그러니 다시 그들이 도래한 까닭은…………”
“좋아요. 헬카네스는 문제 옆에 열쇠를 숨깁니다.”
“예?”
제레인트는 갑자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일페사스를 지나쳐 창문을 향해 걸어가서는 창턱을 움켜쥐며 거칠게 말했다.
“제길! 나는 데스나이트들을 걱정하지 않아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헬카네스는 문제 옆에 열쇠를 숨긴단 말입니다. 300년 전에도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렇겠지요. 데스나이트들이 부활한다면 그들을 다시 잠재울 사 나이도 돌아오겠죠, 뭐.”
“예?”
“그런데 나는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단 말입니다. 바로 그런 걱정이….?
아프나이델은 멍하니 선 채 제레인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각성은 느닷없이 찾아들었고 아프나이델은 굳어버렸다. 아프나이델은 떨리는 얼굴을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고 엑셀핸드 역시 경악에 찬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리 없이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걱정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못 돼.”
창문을 바라보던 제레인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는 달리 몸을 휙 돌려 창문 옆으로 붙어서는 제레인트의 동작은 아주 날렵 했다. 의아해진 아프나이델이 뭐라고 질문하기도 전에 폭음이 켄턴을 급습했다.
콰쾅, 쾅쾅쾅! 우르르릉!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지독한 충격파였다. 지붕 위의 널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천장에서는 흙먼지가 쏟아져내렸다. 쨍그랑, 쨍쨍! 창문이 깨지며 유리 조각이 날았지만 미리 옆으로 비켜선 제레인트는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드워프의 청각을 가지고 있는 엑셀핸드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비명 을 질렀다. 몸이 가벼운 아일페사스는 소파 위로 나뒹굴고 말았고 아프나이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프나이델은 옆으로 나동 그라진 아일페사스를 안아 올렸지만 그의 눈은 제레인트를, 아니, 그의 옆 깨진 창문 너머로 저 먼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지평선의 화광을 똑 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를 끌어안은 채, 아프나이델은 신음을 흘렸다.
지평선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어떤 산불이 피어올라도 밤하늘이 저렇게 불타오를지 의문스럽다.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이 밤하늘을 시 뻘겋게 물들이는 가운데 바람결을 타고 아비규환의 소음이 흘러들었다. 켄턴 시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고 어지러운 발소리와 함께 횃불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소음과 진동음 때문에 아프나이델은 발악하듯 고함질렀다.
“제, 제레인트! 그도, 그도 돌아온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까?”
제레인트의 얼굴은 짙은 공포로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그런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제기랄, 그래요! 과거가 다 현재로 회귀하는군요. 나는 이제 과거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공평하긴 하군요. 데스나이트 들의 귀환은, 솔로처도 귀환한다는 뜻이겠지요. 아주 공평합니다, 그래!”
“나이드! 나이드! 이게 뭐예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품에 안긴 채 비명을 질렀지만 아프나이델은 대답할 정신이 거의 없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제레인트의 눈을 홀린 듯 이 바라보았다. 공포 때문에 광기를 부리는 것일까? 제레인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소 지었고 그 미소에 아프나이델은 섬뜩해졌다.
“다음은 뭘까요? 우리는 어쩌면 수도에서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환영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아프나이델은 그날 밤의 제레인트의 상황에 대해 수십 번도 넘게 생각해 보았다. 신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를 섬기는 프리스트, 게다가 하 플링과 갈림길의 신 테페리를 따르는 프리스트답게 제레인트는 그 어떤 때에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항상 쾌활하고, 항상 행복했다. 그런 비 인간적일 정도의 불굴성과 평온함에 때론 낯선 기분마저 느끼면서도 아프나이델은 솔직히 그 점을 부러워했다. 마법이라는 믿기 어렵고 무시무시한 힘과 매번 싸워야 되는 마법사가 프리스트에게 당연히 가질 감정에 더하여, 아프나이델은 인간적으로 제레인트의 그런 모습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 었다.
결국 결론은 간단했다. 진리 그 자체에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레인트의 경악과 좌절은 더욱 컸던 것이다. 절대적인 개념인 시간이 무너지는 상 황에서, 마법사인 아프나이델은 오히려 그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마법을 구사하는 자였기에 불가사의한 상황도 쉽게 받 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스트인 제레인트는 그렇지 못했다.
“여덟 별이 다시 일어나! 그덴 산의 거인을 사냥할 겁니다! 록크로스 해변에서는! 전설의 오크들이 달릴 것이고! 가이너 카쉬냅은 다시 한번! 루스 휴레인 전투에서의 그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겠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아프나이델? 예? 멋지지 않냐고요?”
아프나이델은 광기에 찬 외침을 내뱉고 있는 제레인트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다른 불굴성을 가진 동료가 있었다. 퍽. 소리는 짧고 잔인했다. 엑셀핸드는 앞으로 기울어지는 제레인트를 어깨에 떠메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메어봐야 다리가 질질 끌릴 테니까. 대 신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일페사스를 잡아당기며 아프나이델에게 외쳤다.
“들쳐 업어!”
아프나이델은 후다닥 제레인트를 들어올렸다. 엑셀핸드는 한 손에 아일페사스의 손목을 쥔 채 곧장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문 밖은 여전히 캄캄 한 시청 건물이었지만, 캄캄한 지하 공간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엑셀핸드는 거침없이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어둠 속을 꿰뚫는 엑셀핸드의 눈 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매장하겠다고? 취이익!”
새벽녘의 하늘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레이저는 루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매장하겠다. 그렇게 하고 싶어.”
오크의 경우, 이렇게 진지하게 똑바로 쳐다보는 행동이 사람에게서 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크는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 다고 생각되거나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될 경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상대에게 가혹한 공격을 선사한다. 하지만 루손은 곧장 글레이브를 휘 두르는 대신 불평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취이익! 늙은 오크들이, 안 좋아할 텐데. 나크둠은, 취이익! 위대한 전사였다. 취칙! 모두들 그의 고기를, 취, 먹고 싶어 할 거야.”
레이저는 투철한 계몽 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크들에게 위대한 전사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의 용기와 힘이 그대 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해 봐야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지만. 그래서 레이저는 피로 한 음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고기 전부를 사지. 원로들에게 값을 결정하라고 해.”
“취칙. 원로?”
“늙은 오크들 말이야.”
“취이익. 알았다. 그대로 말하겠다. 취, 취이익.”
루손은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동굴 밖에 남겨진 레이저는 다시 멍한 얼굴이 되어 동굴 아래의 숲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말했지?’
레이저는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았다. 오크들이 항상 죽은 오크를 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장 존경하는 오크들에게만 이런 성대한 장례식(?)을 베 풀어준다. 레이저가 아는 바대로라면 이런 굉장한 대접을 받은 오크는 가까운 50년 내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만큼 나크둠을 사랑하는 것이 고, 레이저 역시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레이저는 감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나크둠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의 시신을 제공할 수 있다면 오히 려 기뻐했을 것임도 잘 짐작한다.
그런데 왜 이런 감상주의자 같은 말을 하고 만 것일까.
레이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픔 때문이겠지. 하지만 지금 레이저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는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 나크둠이 이런 식으로 죽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저와 오크들의 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유별난 성격에도 기인하지만, 그것보다는 나크둠의 지혜로움 덕분이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나크둠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올로레인 학파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젊은 마법사, 아니 어린 수련생이었던 레이저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았고 그의 의식에 간교함 이 없다고 판단되자 거침없이 그를 인간처럼 생긴 오크로 취급했다. 그것은 정녕 오크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포용력이었지만 그 어떤 오크도 나크 둠의 판단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크들이 나크둠의 지혜를 믿었다기보다는 나크둠의 손도끼를 무서워한 결과겠지만, 어쨌든 오크들은 한 번 결정된 것에 대해 회의에 잠기거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고차원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고, 때문에 주저 없이 레이저를 받아들였 다. 그것은 양자 모두에게 좋은 결정이었다.
그런 오크였던 나크둠이 죽었다. 레이저가 자신과 오크들을 잇고 있던 거대한 연결점을 상실한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까닭은 그 죽음의 이유 때문이다. 그덴 산의 거인이라고? 너무 기가 막히고 허탈해서 레이저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건 하늘에서 떨어진 카리스 누멘 의 쇠모루에 맞아 죽는다는 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잖아.
꽈아앙!
상상력은 마법사에게 있어 열심히 단련되어야 되는 능력이다. 그래서 시의 적절하게 울려퍼진 그 굉음은 레이저의 풍부한 상상력을 고무시켰다. 레 이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했다. ‘카리스 누멘이여, 모루를 흘리셨습니까?”
“취아칵! 레이저!”
등 뒤에서 루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을 때 레이저는 솟구치듯 일어났다. 꽝, 꽝, 꽝! 밤의 산속을 울려퍼지는 무시무시한 메아리 때문에 소리의 진 원지는 찾을 수 없었다. 레이저는 뒤로 물러나다가 달려오는 루손과 부딪혔다. 루손은 레이저의 다리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취, 취이잇! 그놈이다! 거인이다!”
“뭐라고……?”
루손으로서는 속 터질 만큼 느슨한 대답이었다. 레이저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앞쪽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바위 하나가 구른 거 아냐?”
“취켁! 이 멍청이! 취익취익! 거인이 바위를 던진 것이다!”
그때였다. 레이저는 밤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셀레나의 아랫부분이 성큼 베어져나가듯 어두워졌다. 마치 뭔가가 셀레나를 가려버린 것처럼. 레이저는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거의 한가 롭다고 생각될 정도로 태평스러운 생각을 했다. 월식인가? 하지만 그것은 월식이라기에는 너무 급박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 셀레나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꽈아아앙!
이번에는 퍽 가까운 곳이었다. 레이저는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 앞쪽으로 대략 100큐빗쯤 되는 곳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땅이 울리는 진동 때문에 휘청거리지 않았다면 방향도 제법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이저는 휘청거리다가 루손의 억센 어깨를 붙잡으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루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위..가 날아오는 거야?”
“츄아, 취! 그렇다!”
그리고 세 번째로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에는 레이저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로 날아든 바위는 레이저와 루손의 머리 위 를 지나 동굴 위 절벽을 가격했던 것이다.
콰과과광!
앞서 들렸던 두 번의 충격음을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충격음은 고막을 찢어버릴 지경이었다. 레이저와 루손은 모두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을 꿇었 다. 절벽을 가격한 바윗덩이는 그대로 튕겨나왔고, 시야를 가득 메우며 떨어지는 바윗덩이를 보며 레이저는 기가 막힌 심정이 되었다.
레이저와 루손의 앞쪽으로 떨어진 바위는 그대로 숲을 뭉개며 굴러가서는 서너 개의 나무를 꺾어놓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머리 위쪽에서는 절벽 에서 튀어나온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레이저는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바위의 파편과 흙먼지의 소나기에 집중 폭격을 당하면서도, 레 이저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세 번째는 조금 지나치긴 했지만, 이 동굴을 겨냥하는 것이닷!
“루소온! 루손!”
옆을 돌아본 레이저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루손을 보게 되었다. 레이저는 두말없이 루손을 걷어찼다.
“취킥! 이놈이!”
루손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레이저의 외침에 멈칫하고 말았다.
“멍청아! 모두 동굴 밖으로 나오라고 전해! 생매장되겠다. 어서!”
“취이익! 아, 안 돼!”
루손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달려가려다가 그대로 멈추며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취착! 저 안에 들어갔다가, 췻, 취이잇! 나오기 전에 무너지면!”
“이 겁쟁이 같으니! 들어가기 싫으면 안에다 대고 고함이라도 질러! 많이는 못 막는다. 그러니 어서 가!”
“마, 취, 막겠다고?”
루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레이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밤하늘로 바위가 떠 올랐다. 레이저는 눈을 감았고 그의 팔은 반사적으로 급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레이저는 허리를 숙였고, 복잡한 움직임을 보이던 팔은 그 대로 땅을 스쳤다. 다음 순간 레이저는 눈을 홉뜨고 허공을 향해 흙먼지를 뿌리며 부르짖었다.
“디스인티그레이트!”
펑! 코르크 마개를 잡아 뽑을 때 나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시킨 것 같은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존재하던 물질이 느닷없이 사라지며 생긴 진 공속으로 거칠게 공기가 밀려들며 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레이저는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루손은 주저앉고 말았다.
레이저가 외치고,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고, 날아오던 바위가 사라졌다. 넋이 나가버릴 듯한 충격 속에서 루손이 파악한 상황은 대충 이 정도였고, 그 상황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이끌어내는 것은 루손에게는 퍽이나 벅찬 일일 것이다.
“이 빌어먹을 오크야! 당장 일어나 달려가지 않으면 목을 뽑아놓겠어!”
레이저의 표독스러운 외침에 루손은 벌떡 일어나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루손은 바위를 집어던지는 거인이 무서운 건지 그 바위를 소멸시켜 버 리는 레이저가 더 무서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손에게는 앉아서 고민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더 다급한 일이 있었다.
“취이이이익! 모두들 나와아앗! 동굴이 무너진다. 취이이악!”
루손은 동굴로 뛰어들며 외쳤다. 레이저는 그제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모조리 막아낼 수는 없어. 가장 위험 한 것만 막는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거인이잖아?’
레이저는 어깨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지나치게 긴장된 근육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저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하늘을 감시하면서도 숨 가쁘게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레이저가 납득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결론은 그덴 산의 거인이 아닌 다른 어떤 거인이(어디서 갑자기 거인이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밤 산책을 나섰다가(거인에게 밤 산책 따위의 품위 있는 취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돌팔매에 대한 평소의 애호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 다. 레이저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결론에 동의했다. 날아오는 바위도 마치 그의 의견에 동의하듯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후였다. 레이저가 빼먹지 않고 매일 기주(記)를 한 것은 그 마법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마법을 사용하는 기술을 잊지 않기 위해 서였다. 레이저는 아무 스펠이나 닥치는 대로 외우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날아오는 바위를 발견한 순간 퍽 이상한 주문을 캐스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스톤 투 플래시!”
바위보다는 고깃덩어리가 낫겠지. 공중에서 갑자기 고깃덩어리로 바뀐 바위는 운동 에너지는 그대로 간직한 채, 그러나 보다 높은 탄력성으로 절벽 에 부딪쳤다. 터덩! 상당히 경쾌한 충격음을 내며 고깃덩어리는 저 멀리 튕겨나갔다. 숲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고깃덩이를 보며 레이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오크들이 저걸 보면 환장하겠군. 그런데 다음번에는 어떻게 막는다? 레이저는 자신이 기주하고 있는 마법들을 돌이켜보며 날아오는 바위 를 막는 데 쓸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레이저는 절망적으로 소망했다.
‘제발 저 녀석 주위에 바위가 더 없기를!’
그러나 야속하게도 바위는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레이저가 보기엔 지금까지 날아왔던 것 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바위였다.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날 아오고 있기도 했다. 결국 레이저는 모진 결심을 해야 했다. 그는 매일 절대 빼먹지 않고 기주했던 스펠을 캐스트했다.
“플라이!”
갬블러의 생활은 위험하고, 도망칠 수 있는 스펠은 소중한 것이다. 레이저의 외침소리가 맑은 산 속의 공기를 꿰뚫는 순간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 쳤다. 주위의 산봉우리들이 아래로 쑤욱 내려가며, 레이저는 그대로 날아오는 바위를 향해 비행했다.
“이건 선량한 도박사에게는 너무 거창한 결심이야! 씨팔, 하드 베팅은 초보들이나 하는 거라고!”
그가 쏟아내고 있는 욕지거리들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포효 때문에 그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바위의 속도와 그 자신의 속도가 더 해져 바위는 재미있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레이저는 몸을 뒤틀며 외쳤다.
“파이어볼!”
화르르르! 피를 짜내는 심정으로 뿜어낸 불덩어리는 밤하늘을 붉은 광선으로 가로질렀다. 레이저의 자존심은 크게 고무되었을 것이다. 가공할 정확 성으로 조준된 파이어볼은 정확하게 바위의 측면을 강타했다. 바위는 격한 스핀을 일으키며 그 운동 궤적을 뒤틀었고 잠시 후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에 명중했다. 쾅쾅쾅!
레이저는 그 거창한 위업의 현장을 떠나야 된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주저하지는 않았다. 레이저는 그대로 숲의 머리를 스치며 밤하늘을 가로질 러 바위가 날아오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오래간만에 사용하는 강력한 스펠들 때문에 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지만, 그러나 레이저는 목표하고 있던 것을 놓치지는 않았다.
사실 놓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왼쪽 발로 산등성이를 딛고 오른쪽 발로는 산봉우리를 밟은 채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상체를 드러낸 100큐빗 크기의 거인은 무심하게 지나치기에 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 어깨로 밤하늘을 상당 부분 가리고 그 이마 위로 구름이 흩어지고 있다면 더욱더. 레이저는 숨을 들이켰다.
“맙소사, 헬카네스여………”
거친 산바람에 온 몸 가득 돋아 있는 털을 휘날리며 거인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장엄한 산봉우리가 그 발 아래 얕은 모래성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산 위로 솟아난 또 하나의 산을 바라보며 레이저는 탄식했다. 신궁 우타크와 양치기 차넬은 미친 녀석들임에 틀림없어. 저런 것을 속여 넘길 생각을 했단 말인가? 레이저는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거인을 그덴 산의 거인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거인은 눈이 좋던가? 그러나 레이저는 거인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리기 어려웠다. 이글거리는 왼쪽 눈은 확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리고 암흑을 바라보고 있는 오른쪽 눈은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인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차라리 암소가 춤을 춘다면 훨씬 더 안정감 있게 보일 것이다. 전나무만큼이나 굵고 긴 팔이 양쪽으로 들어올려지며, 거 인은 외쳤다.
“아…… 아…… 아아아!”
레이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트러지며 플라이 스펠이 깨질 뻔했지만, 추락하기 직전 레이저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고 나무에 꿰 인 꼬치 신세가 되는 것을 면했다. 거인은 고함을 지르더니 그대로 산봉우리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위로 솟아오르던 레이저는 느닷없이 일어난 회오 리에 휘말려들어 다시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쿠구궁!
밟고 있던 산봉우리를 가볍게 뛰어넘은 거인은 온 산을 울리며 착지했다. 맹세해도 좋아. 그덴 산은 조금 전의 충격 때문에 몇 큐빗은 더 높아졌을 거야. 공중에서 바람을 이기려 애쓰며 레이저는 그덴 산의 정확한 높이가 얼마인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망상에 빠져 있는 레이저와는 달리 거인은 보다 실용적인 행동을 선택했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팔을 뻗어 거목을 부여잡은 거인은 허리를 주욱 폈다. 우지지지직. 꽈광! 30큐빗은 수월찮게 넘 을 거목이 뿌리째 뽑혀 거인의 양손에 쥐어졌다.
거인은 한 손으로 그 거목을 쥐고선 다른 손으로 대충 가지를 ‘털어내었다’. 거인의 동작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대수롭잖은 것이었지만 그 손이 스치자 팔뚝만한 가지들이 무참하게 떨어져나갔다. 급조한 메이스(?)를 한 손으로 쳐들며 거인은 다른 손을 들어 레이저를 향해 뻗었다. 다른 사람 못 잖게 손가락질을 당해 온 레이저였지만, 자신의 몸통만 한 손가락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천둥이 울렸다. 아니, 거인이 입을 열었다.
“루트에리노는 어디 있는가!”
레이저는 도망치고 싶었다. 오크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거인의 시야 전면으로 날아오기는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도를 넘어선 공포 때문에 레이저는 거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인은 레이저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들리지 않으니 더 크게 말하라! 너희 인간 놈들의 목소리는 내게 너무 작다!”
레이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인과의 거리를 충분히 유지한 채 거인을 관찰했다.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확실히 검은 구멍밖에 없었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다가 레이저는 자신이 조금 전에 가장 확실한 증거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루트에리노가 어디 있냐고?
레이저는 밤중에 산봉우리를 뛰어넘어 30큐빗짜리 소나무를 뽑아든 채 루트에리노 대왕을 찾는 거인이 누군지 짐작하지 못할 만큼 세상 물정에 어 두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시대에 그덴 산의 거인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순순히 믿을 만큼 어수룩한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레이저는 외치고 말았다.
“여기엔 없다…………, 없습니다!”
일단은 살고 봐야 되니까. 고민은 천천히 해도 돼. 레이저는 스스로의 결정을 기특하게 여기며 거인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기, 즉 네 녀석이 발 디디 고 있는 이 현재에는 루트에리노 대왕이 없단 말이야. 어쩔 거야?
“거짓말하지 마!”
이런, 썩을! 레이저는 황급히 위로 날아올랐고 휘둘러진 소나무가 숲을 뭉개버리는 모습을 기막힌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거인은 그대로 몸을 솟구 쳐 올렸다. 인간이 파리를 잡기 위해 취하곤 하는 동작을 수백 배로 부풀려놓은 동작을 취하며 거인은 소나무를 휘둘렀다.
바우우우웅!
날아오르던 레이저는 발 밑에서 일어난 바람에 비틀거렸다. 질끈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무수한 색깔이 반짝거린다. 레이저는 이를 사리물었다.
“으으으읍!”
레이저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거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지금이다. 급속한 운동 때문에 몸의 혈액이 한쪽으로 휩쓸리며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레이저는 그대로 거인의 정수리를 날아 넘어 그 뒤통수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는 데 성공했다. 거인의 머리 뒤 허공에 거꾸로 선 채, 레 이저는 발악하듯 캐스트했다. 그의 손이 눈부시게 휘둘러졌다.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물론 불을 날리거나 벼락을 퍼부을 수도 있지만, 저런 엄청난 거인에게 불을 날리거나 벼락을 쏘아내 봤자 약올리는 짓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올로레인 학파의 마지막 전승자의 이름을 걸고 레이저는 그런 풋내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과연 그가 선택한 스펠은 불이나 벼락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덴 산의 거인은 생전 처음 당해 보는 끔찍스러운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서몬 스워어어엄!”
“찍, 찌지직!”
볼품없이 떨어지면서도 레이저는 거인의 목덜미에 30여 마리의 쥐를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거인은 펄쩍 뛰어올랐다.
“으아아아! 이런, 고약한, 우킬킬! 으, 우아! 크핫하하하!”
거인은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지만 이미 쥐들은 목덜미를 타고 거인의 등으로 기어내려 갔다. 쥐의 이빨에 어떻게 될 피부는 아니다. 하지만 셔츠 속 을 기어다니는 30여 마리의 쥐는 거인의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그를 간질였다. 꽝, 꽝, 꽝! 거인이 발을 구르자 그덴 산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이 일어 났다.
레이저는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착지했다. 어깨부터 땅에 부딪히며 형편없이 나동그라진 것도 착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러나 아픔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레이저는 필사적으로 굴러 일어났다. 격렬한 춤이라도 추고 있는 듯한 거인의 발뒤꿈치가 언제 그를 짓밟아놓을지 몰랐던 것이다. 꽝, 꽝 꽝! 레이저는 후다닥 일어나서 거인의 발 주위에서 벗어났다.
“망할 자식아,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덩치 크면 다야?”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했지만, 레이저는 이 말 한 마디를 던져주지 않고서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인은 쇠망치 같은 주먹을 휘둘러 자신의 등을 꽝꽝 두드려대고 있느라 레이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레이저는 포기하고서 몸을 돌렸다.
절뚝거리며 숲을 향해 달려가며 레이저는 생각했다. 행복한 밤이란 말이야. 이 밤이 현재의 밤인지 300년 전의 밤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 하면 우라질!
눈앞을 막아선 거대한 나무를 피해 옆으로 돌아드는 순간, 정신없이 달리던 레이저는 하마터면 역시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던 루손의 글레이브에 몸 을 던질 뻔했다. 나무 뒤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글레이브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레이저는 그와 오크 간의 교우 관계가 왜 이리 넘치는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외쳤다.
“뭐야!”
거의 레이저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루손 역시 대뜸 맞고함을 질러왔다.
“취이이악!”
훤칠한 마법사와 딴딴한 오크는 각자의 외침의 여운 속에서 잠시 멀거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인의 미칠 듯한 웃음소리 는 “우켈켈켈!” 둘을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내렸다. 레이저와 루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레이저가 루손보다 는 훨씬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절뚝거리느라 둘의 속도는 비슷했다. 함께 숲을 가로질러 달려가며 레이저는 외쳤다.
“멍청한 놈! 네가 온다고 해서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 거 같아?”
“취, 취칵! 젠장. 네놈 시체는 먹어줄 수 있었다. 왜!”
이 감동적인 우정에 레이저는 눈물이 핑 돌 뻔했다.
“다, 다른 오크들은 어떻게 되었냐?”
“다들 달아났어!, 취칙! 노빌 쪽 능선을 타고, 취이이익! 지바스 혼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 어? 자, 잠깐 나크둠은?”
“취이킥! 시체를 챙겨 달아나란 말이냐?”
“이런! 나크둠! 아, 안 돼. 그를 내버려두고…………”
그때였다. 레이저와 루손의 등 뒤에서 드래곤이 날개 치는 듯한 펄럭거림이 들려왔다. 둘은 뒤를 돌아보았고, 나무들 사이로 그덴 산의 거인의 모습 을 보게 되었다. 거인은 손에 셔츠를 들고 허공을 향해 털고 있었다. 퍼어어얼럭! 퍼어어얼럭! 너무나 무섭다는 점에서 오크와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 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레이저는 미칠 듯이 웃었고 루손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미친 듯이 웃는 마법사와 하늘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는 오크는 그렇게 붉은 산맥을 가로질러 지바스 혼을 향해 질주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