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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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취엑! 우리가 반나절 동안 넘을 산을, 취칙! 몇 걸음 만에 넘을 수도 있다!”
떠오르는 햇살을 피해 바위 아래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레이저는 루손의 표정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나마나 허옇게 질려 있으리라는 것 은 틀림이 없다. 레이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너 풀밭 아래로 달아나는 개미들을 잡을 수 있냐? 걱정 마. 그 거인 녀석도 마찬가지야.”
“우리를 못 찾는다고? 츄으……”
“물론이지!”
“취키긱! 그럼 왜 그렇게 불안스럽게, 첵! 주위를 둘러보는 거냐?”
레이저는 그제서야 왜 자신이 루손의 표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는지 알아차렸다. 루손이 바위 그늘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계속해서 주위의 산봉우리들 뒤에서 거인의 머리가 솟아오르지 않는가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 가지고서는 내 말에 신뢰감을 더하기는 어렵 겠군. 레이저는 머쓱하게 웃으며 땅바닥에 앉았다. 그는 루손이 숨은 바위의 옆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쳇.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겁나는군.”
바위 아래에서 루손의 불만스러운 외침 소리가 터져나왔다.
“취! 그러니까 빨리 날아가자! 츄아! 너 어제 날았잖아!”
레이저는 불평스러운 얼굴로 루손에게 두 손을 내보였다. 그 손바닥은 진흙과 이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다가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루손은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저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라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친구야. 난 어젯밤 새도록 산을 탔단 말이야. 도저히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기주를 못했기 때문에…, 관두지. 간단하게 말하겠어. 난, 쉬기 전엔, 마법 못 써. 알겠냐?”
“취, 왜!”
“원래 그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레이저는 문득 섬뜩함을 느끼며 루손을 바라보았다. 바위 그늘 아래에서 루손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은 밤 동안 식었던 붉은 산맥의 사물에 온기를 던졌지만, 레이저는 시리도록 번뜩이는 루손의 글레이브를 보느라 온기를 느 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레이저는 그와 오크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점, 나크둠이 이미 죽었음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두 다리를 끌어당겼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는 무서울 것이 전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은 오크에게 있어 무력한 마법사는 짐만 될 뿐이며, 게다가 증오스 러운 ‘인간’인 것이다. 레이저는 다급하게 들리지 않도록 말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상당히 다급했다.
“잠시만 쉬면 돼. 그럼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레이저는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루손이 그를 해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고함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레이저는 이제 다리를 거의 끌어당긴 채 여차하면 옆으로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루손은 레이저의 그런 모습을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어! 그렇게 웅크리고서야 어떻게 쉬겠나? 멍청하긴. 취이익. 겁먹지 마! 내가 망을 볼 테니. 제기랄! 취키킥!”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손은 글레이브를 당겨쥐더니 아무런 주저 없이 바위그늘 아래에서 나왔다. 레이저가 입을 쩍 벌린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루손은 쏟아지는 햇살에 넌덜머리를 내며 가까운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루손은 그 나무 아래에 생긴 작은 그늘 속에 앉더니 글레이브를 무릎에 얹고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루손에게 있어 햇살에 노출되는 것은 단순 히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조금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루손은 아무런 불평의 말 없이, 그저 눈 주위를 조금 일그러뜨린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저는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손을 들어올려 이마를 닦았다. 이마와 함께 머릿속의 생각까지도 닦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닦던 레이저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완전히 믿을 수 있을까?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레이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떠돌았다. 별로 세련되지도 않고 기발한 것도 아니지만 지 금의 그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었다. ‘오크도 잠든 마법사라면 맨손으로 죽일 수 있다.’
레이저는 화급히 루손과의 추억들을 재점검해 보았지만,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루손을 화나게 만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 올랐다. 어차피 그는 오크가 아니었고 그래서 오크들의 비위를 완전히 맞췄다고는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루손은 그를 안심시켜서 잠들게 한 후에, 즉각적이고도 날렵하게 그의 목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잠시 후, 레이저는 자신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건 더하고 뺄 것 없이 완전한 피해망상이다. 그덴 산의 거인 때문에 신경이 너무 곤두선 까닭이다. 그래서 친구를 의심하는 것이지. 레이저는 자신 의 감정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렇게까지 친구를 의심하느라 잠이 오지 않는다면, 레이저여, 머리나 굴려보자고. 네 녀석의 더러운 인간성이 고쳐지기 를 바라는 것보다는 생각이나 하며 잠을 쫓는 것이 낫겠군. 이건 타협이야. 루손을 믿어서 잠들 수도, 믿지 못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도 없다면.
‘도움이 될 일을 생각하자.’
그래서 레이저는 생각했다.
‘그덴 산의 거인이 이 시대에 튀어나와 고함을 지르고 바위를 던지는 이유는?’
정답: 입이 있고 팔이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경우 웃을 친구가 혹시 있을지 몰라도 나 자신은 포함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는 것일까. 그덴 산의 거인이 죽었음은 의심할 바가 없는 역사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것, 죽은 자가 제멋대로 되살아난 것에 해당한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은……………
“콜리……”
레이저의 입이 무의식중에 열리며 그의 머릿속의 질문에 대답했다.
레이저는 자신의 말에 놀라서는 눈을 번쩍 떴다. 긴장한 청각과 시각은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지만 들려오는 것은 산허리를 휘감아도는 아련한 바람소리와 풀잎의 사르락거림, 그리고 오전의 햇살에 반짝이는 바위들뿐이었다. 붉은 산맥에 만연한 붉은 바위와 푸석푸석한 황토 빛 흙들 로 주위는 건조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조금 돌렸고, 잔뜩 긴장해서는 그들이 넘어온 산봉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루손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따 스한 봄날의 오전, 패배자의 모습으로 산등성이에 던져진 인간과 오크.
레이저는 다시 바위에 기대앉으며 생각했다.
이게 그것과 관련된 것일까? 신스라이프의 문제. 턴빌의 불가사의. 고양이와 꿈의 콜리. 되살아나기를 원하는 신스라이프. 아홉 개의 제물을 바쳐 부활하려 드는 정신나간 부자 노인. 그 재산 나나 주지. 젠장. 그 어마어마하다는 재산이 내게 굴러떨어진다면, 곧장 근사한 말 한 마리 사서는 디도 스로 달려가는 거야. 헤게모니아의 모든 도박꾼들, 아니 바이서스와 일스의 도박꾼들까지 초청해서 사상 최대의 판을……………
레이저는 간신히 자신을 수습했다. 정신 차리자. 음. 지금까지 몇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고 했더라? 일곱인가, 여덟인가?
그 옛날 66년 전,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음침한 목소리로 신스라이프가 부활하도록 마법을 걸었다. ‘암흑 속에서 더 반짝이는 눈이 그 대의 꿈을 보니…………, 어쩌고저쩌고.’그런데 그만 부작용이 일어나서 신스라이프 대신에 그덴 산의 거인이 부활한다. 이게 말이 되나? 레이저는 고개 를 가로저었다. 부작용이라는 것은 어떤 마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부작용은 일어날 수가 없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분명히 신 스라이프를 대상으로 마법을 걸었을 것이므로, 부작용 역시 신스라이프에게 일어나거나 그 마법을 건 콜리의 프리스트 자신들에게 일어나야 된다. 부활이 잘못되어 신스라이프 선생이 언데드가 된다거나 하는 부작용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엉뚱한 녀석이 부활한다라…………,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스펠이 처음부터 잘못 시전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라? 실수였나 봐. 다른 녀석이 살아났네?’ 레이저는 하마 터면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킬킬킬!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그렇게도 멍청했을까? 흠.
“콜리와 신스라이프에 대해 조사할 것.”
레이저는 또다시 무의식중에 말하고는 크게 한탄했다. 이래서는 안 돼.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어서야 어떻게 갬블러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 가! 레이저는 자신을 준엄하게 꾸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되나?’
턴빌로 간다는 것은 입에서 뽀골뽀골 거품 방울을 피워올리며 그를 뒤쫓고 있을 도박사 패거리들의 손아귀 안으로 걸어들어 간다는 의미다. 레이저 가 사고를 저지른 고스빌과 턴빌은 걸어서는 좀 멀고 말을 달리면 가깝고 칼 들고 뛰면 지척인 거리다. 즉, 누군가를 찔러주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 이 가로지르기에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복수를 위해서……………
‘젠장, 복수!’
레이저는 갑자기 손을 꽉 움켜쥐었고 덕분에 뒤통수의 머리털을 한 움큼 뽑아버릴 뻔했다. 레이저는 기대앉았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걸 잊고 있었군.
찌르르르.
새울음 소리가 텁텁한 산 위의 공기를 가로질러 낮게 울렸다. 레이저는 불쑥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루손의 작은 숨소리뿐 이었다. 레이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복수. 그걸 잊고 있었군. 레이저가 아직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은 그 복수 대상이라는 것이 거의 천재지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크둠의 복수. 나크둠이 화렌차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 까닭은 그덴 산의 거인이 나크둠에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에게 바위를 선물했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녀석의 의향을 물어볼 필요없이 상당히 인상적인 답례품을 보내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레이저의 결론이었다.
레이저는 루손을 불러들여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취, 취! 뭐야? 턴빌로 가겠다고?”
루손은 이맛살을 매우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여기서 산맥을 내려간 다음 턴빌로 가겠어. 그곳에 가봐야만 알 수 있는 수수께끼가 생겼거든.”
“무슨, 취이이이익! 무슨 수수께끼 말인가?”
“흐음. 너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될 거야. 간단하게 말한다면, 저 그덴 산의 거인이 되살아난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서 거기 가는 거야.”
루손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루손은 레이저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간이었다면 그것을 ‘어두운 복수심에 뒤덮인 이마’, 혹은 ‘침침한 불꽃이 일렁이는 눈빛’ 등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테지만 루손이 느끼기엔 그냥 보기 싫은 표정 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 취칙!”
“난 복수를 해야 돼, 루손.”
“취! 보, 복수?”
“나크둠이 과연 이런 복수에 찬성할지 나는 확신할 수 없어. 어쨌든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위대했던 오크의 복수를 인간이 맡게 된다는 것은 우스 운 면도 있군. 하아…………, 그래, 어쩌면 나는 대륙 역사상 가장 웃기는 복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크의 복수자 레이저. 이건 파하스가 되살아나더라 도 제대로 된 곡을 붙이긴 어렵겠군.”
레이저는 빙글빙글 웃었지만 루손이 보기엔 여전히 꼴불견인 표정이었다. 레이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겠어.”
루손은 이제 글레이브를 쥔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취이카악! 그덴 산의 거인을 주, 주, 췻!”
“내가 루트에리노 대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흐음. 내가 그 역할을 맡는다면 루손 네가 양치기 차넬의 역할을 맡겠는가? 키는 좀 모자라지만………
“난 못해! 츄아!”
“시키지도 않아.”
“췻! 그럼?”
“나는 그덴 산의 거인이 다시 일어난 까닭이 턴빌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곳으로 가서 조사해 보겠다는 거지.”
“츄익?”
“그덴 산의 거인을 물리칠 방법을 알아내게 될지도 모르지. 아니, 알아내겠어.”
루손은 잠시 어쩔 줄 몰라하는 듯한 모습으로 레이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레이저의 몸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의 머리에서 부터 허리, 다리, 발끝의 순서로 훑어본 다음 다시 거꾸로 올라와서는 레이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신성을 인정하는 유일한 마법 학파 올로레인의 후계자야. 오랫동안 잊고 살긴 했지만, 올로레인은 무지개의 끝에 있는 것보다는 무지개 자체 에 참배하지. 그리고 나 역시 올로레인이야. 그덴 산의 거인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따님인 시간을 능멸하고 부활했다면, 그 친구는 내게 혹독한 대 우를 받겠다고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야.”
“취우, 취! 너, 멋있게는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군. 췻!”
“하하하……”
레이저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루손은 의아한 표정으로 레이저의 손을 보았다.
“악수하고 헤어지지. 넌 이대로 지바스 혼으로 가서 오크들과 합류할 거지? 난 여기서 산을 내려가서 턴빌로 가겠어.”
루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이저의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레이저는 의아한 표정으로 루손을 바라보았고 루손은 고개를 돌려 침을 탁 뱉었 다.
“퇘! 츄! 흐음. 아무래도 우습군.”
“뭐가?”
“나크둠의 복수를 인간이 맡는 것. 취췻!”
“그렇긴 해.”
“취치치! 가자. 턴빌이라고 했지?”
레이저는 잠시 루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밀어진 손을 그대로 허공에 띄워둔 채 레이저는 루손을 바라보았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거꾸로 쥐더 니 어깨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머리를 써! 취치칙! 네가 마법사잖아. 나는 루손이고, 루손은 겁내지 않아! 너만이 나크둠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취에엑!”
“나와……, 함께 가겠다고?”
“취! 너를 끌고 다니겠다는 말이지.”
레이저는 얼빠진 얼굴로 루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오크가 뭐라고 말한 거지? 오크 주제에 인간 사회에 뛰어들겠다는 말인가? 어느 칼에 맞아죽을 지 모르는 그 험악한 곳에,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복수와 오크의 화렌차여. 당신의 아들들은 정말 불량 청소년이올시다.
“인간이. 그래. 복수를 위해 오크 무리에 뛰어드는 인간은 없겠지. 용병 무리에 뛰어든다거나 산적이나 해적 무리에 뛰어드는 인간은 있을지 몰 라도…………. 그럼 나 너를 존경해야 되나?”
“치?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야. 허헛, 뭐. 말이 안 될 것도 없군. 인간인 내가 오크인 나크둠의 복수를 하겠다는 거나, 오크인 네가 복수를 위해 인간들 틈에 끼 어들겠다는 거나 돌아버린 정도를 따지자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겠군.”
“츄츄츄!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앗!”
“아니, 아니. 좋아. 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취아, 왜 가능하지 못해? 양치기 차넬과, 취칫! 신궁 우타크도 거인에게 찾아갔다. 취치. 나도 인간들에게 찾아간다. 안 될 게 뭐냐?”
“좀 비교가 되는 것을 비교해라. 거인은 인간들을 깔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하지만 인간들은 오크를 깔보지 않아. 네가 턴빌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즉시 턴빌 경비 대원들 중에는 오크 슬레이어가 탄생하게 될 거야.”
“취엑. 속이지! 당연히.”
“속인다고?”
“양치기 차넬과 신궁 우타크가…”
“으윽. 제발 좀 참아줘, 루손!”
“취이! 무슨 말이든 마음대로 해봐라. 난 나크둠의 복수를 한다. 취췻!”
레이저는 더 심한 말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심이 많이 꺾이고 있었다. 그는 루손이 고집을 부리면 얼마나 지독 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맨몸으로 턴빌로 찾아가는 것보다는 글레이브 하나가 따라오는 것도 좋지 않은가. 그 글레이브를 쥔 것이 인간이냐 오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글레이브를 잘 다루느냐 못 다루느냐와 그의 친구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루손은 글레이브를 잘 다루며, 그의 친구인 것이다.
레이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류해 보기로 했다.
“음. 그런데 나크둠이 없는 이상 자네가 남은 오크들을 잘 이끌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크둠의 오른팔이었던 자네가 없어진다면 지바스 혼으로 간 오크들은 누가 다스리지?”
루손은 입을 좀 벌린 채 멍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그 표정을 보면서 레이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마치 인간처럼 말했군. 지바스 혼으로 달려간 녀석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돌볼 수 있겠지. 오크는 지도자가 없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녀석들이고, 반대로 지도자가 있다고 해서 월등히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게 오크다.
“어째, 나는 오늘 오전 내내 너를 황당하게 만들고 있는 거 같군. 미안해.”
“취이익! 사과하는 것은 좋은데, 뭐에 대해 사과하는 거냐?”
“나도 모르겠어. 좋아…………. 그런데, 너 정말 나와 같이 갈 건가?”
“물론! 나크둠의 복수라면!”
레이저는 더 이상 루손을 달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쩐지 더 달래어서 루손의 마음을 돌려놓으면 후회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일 것만 같은 기분 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함께 가자.”
루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저 역시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맹세하지. 나크둠의 복수의 그날까지,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 나크둠을 죽인 것은 그덴 산의 거인이며,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녀석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알아낸 다음, 녀석을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돌려보낸다. 즉 과거로 보내버리는 거야.”
“이봐, 취이칫! 거인을 죽인다로 바꾸지?”
“그게 그 말이야. 녀석은 이미 한 번 죽었던 녀석이란 말이다. 알겠나?”
“츄으…………, 좋아.”
루손은 말을 마친 다음 곧장 글레이브를 당겨 잡았다. 글레이브의 칼날 밑 부분을 잡은 루손은 그것을 마치 대거처럼 사용하여 자신의 오른 손바닥 을 베었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그대로 앞으로 내밀었고, 레이저는 그것을 받아든 다음 주저 없이 자신의 오른 손바닥을 베었다. 쉭. 글레이브는 미끄 러지듯 움직였고 곧 손바닥에서는 새빨간 피가 솟아올랐다. 레이저는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아무 말 없이 글레이브를 땅에 거꾸로 박은 다음 손을 내 밀었다. 루손은 내밀어진 레이저의 손을 힘껏 마주 쥐었다.
그들이 함께 사랑하는 오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인간과 오크는 둘의 피를 섞었다. 인간과 오크가 싸움 이외의 목적으로 서로의 피를 섞게 된 것은 두 종족이 대지를 걷게 된 이후 이것이 처음이었다. 레이저와 루손은 진지한 태도로 맹세의 말을 합창했다.
“내 몸 속엔 네 피의 맹세가 흐른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넌 피의 맹세를 잊을 수 없다.”
오크식의 피의 맹세를 끝낸 인간과 오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루손의 눈은 뜨거운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저의 눈은 좀 엉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레이저는 루손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문제가 좀 있군.”
“뭐? 문제라니? 츄츄츄!”
“네 그 모습 그대로 인간 사회에 들어가면 어느 도시의 경비 대원들이라도 칼을 빼들고 볼 텐데, 그건 좀 달갑잖단 말이다. 네 모습을 좀 바꿔주겠 어. 물론 오랫동안 바꾸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인간들 틈에 들어가도 들키지 않을 정도는 해둬야 하지 않겠어.”
루손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루손이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는 것을 보고서 루손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아차릴 수 있었다. 루손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취, 나, 츄츄츄! 나에게 마법을, 취킥! 마법을 걸 거야?”
“응.”
루손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레이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길게 말하지는 않았다.
“취! 좋아!”
레이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오크를 사귄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야. 엘프나 드워프는 별로 재 미없는 종족이지. 멍청한 인간 녀석들. 이 종족을 보라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오크들 틈에 끼어들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어? 하 지만 눈앞의 루손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레이저는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별 필요 없는 동작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루손은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한 듯이 코를 벌렁거렸다.
“음, 츄! 취. 너 마법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
“하늘을 나는 마법은 못한다고 했던 거야. 어제 기주했던 마법 중에 쓸 만한 것이 있어. 음…………, 괜찮다면 널 암컷으로 만들어주겠어.”
루손은 입을 쩍 벌렸다.
“암, 츄아! 암컷?”
“요즘은 헤게모니아도 바이서스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 사회에서 암컷은 여러 가지로 유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니까. 너희들도 마 찬가지잖은가? 수컷이야 언제 죽을지 몰라도 암컷은 그럴 일이 없잖아. 인간들도 마찬가지지. 네가 뭘 실수한다 하더라도 네 모습이 여자라면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하다못해 이런 경우라도, 그러니까 네가 음식을 사납게 먹더라도 네 모습이 수컷이라면 ‘저게 웬 오크 같은 새끼야?’ 하겠 지만 암컷이라면 점잖게 외면해 주는 예의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
루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인간 녀석. 원래 우리들과 사귈 정도로 황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그러나 레이저는 전혀 이상할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하던 루손은 레이저가 서서히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서는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 취치칙! 지금 하는 거야?”
“응.”
“어, 츄! 아프거나, 음! 취이킥! 피를 낸다거나.
“그런 건 없어.”
“나, 츄,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취췻!”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돼. 지금 그대로.”
“츄르르르…………. 좋아. 하자!”
루손은 이를 악물고는 어깨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짓다가 곧 미소를 지우며 빠르게 캐스트를 시작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레이저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어느 정도의 일인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생물의 정신은 그 겉모습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물고기나 새의 정신세계에서는 3차원적인 위치가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겐 사방을 나타내는 단어(앞, 뒤, 좌, 우)면 충분 하지만, 새나 물고기라면 360×360 전방위를 나타내는 단어(예컨대 좌측 전방 위로 45도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가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모습이 바뀐다는 것은 그 생물의 정신에 엄청난 혼란을 주게 된다. 조악한 예이지만, 아무리 현명한 인간이라도 그에게 꼬리가 생긴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 에 대해 곤혹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실상 인간은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는 법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 다.
드래곤처럼 강력한 지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는 폴리모프했을 때도 큰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매우 힘들어한다. 어떤 마법사도 자신의 모습을 바꿔버릴 수는 있지만 그 모습에 어울리는 익숙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오크는 어떨 것인가.
레이저는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안전장치를 다 구사하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캐스팅 타임은 퍽이나 길어지게 되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루손은 더욱 겁을 집어먹었고 결국 10분쯤 뒤, 루손은 처음의 그 당당하고 곧은 자세를 잃어버린 채 거의 정신 착란을 일으킬 듯한 공포 속에서 간신 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마법은 인간에게도 두려운 것이며 오크에게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캐스트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까지 루 손이 쓰러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자존심이나 정신력보다는 나크둠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폴리모프 아더!”
마법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하면, 마법에 걸린 루손보다 마법을 시전한 레이저가 더 놀라버릴 정도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루손은 자신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별 느낌이 없는 변화에 실망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캐스트가 끝난 순간, 어금니가 멋 진 그의 친구 루손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키가 불쑥 커졌다. 루손은 이제 레이저와 비슷한 정도까지 커졌다. 그리고 루손의 허리는 원래의 그의 목둘레와 비슷할 정도로 가늘어졌다(루손의 목 이 오크치고도 유별나게 굵긴 하다.). 일그러진 고깃덩이 비슷하던 그의 양볼은 붉은 기가 살짝 감도는 팽팽한 여인의 볼로 변했고 팔다리는 원래 굵기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머리에서 자라난 다갈색 머릿결은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의 길이가 되어 가볍게 물결쳤다. 원래 걸치고 있던 갑 옷은 이제 레이저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파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루손이 코를 벌름거린 순간 땅을 뒹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푸핫하하하!”
“어, 뭐야, 흐응, 어어?”
루손은 레이저의 행동을 보고 놀랐고, 그 놀라움을 표현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고 새된 목소리로 변한 것에 놀랐고, 당황하여 앞으로 걸으려다가 익숙지 않은 다리의 길이 때문에 놀랐다. “으아아!” 꽈당탕! 결국 루손은 레이저의 앞에 나동그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팔다리를 보게 되었다. 루손은 공포에 빠져버렸다.
“내, 내 팔이! 흥! 내 다리가? 어어? 흐흥! 내 목소리가?”
루손은 자신의 목을 만지다가 익숙지 않은 느낌에 기겁했다. 루손의 손은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고 머리카락에 손이 닿자 루손은 마치 뱀이라 도 만진 것처럼 질겁하며 손을 떼었다. 바쁘게 내려온 손은 이제 가슴을 더듬었고 루손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루손은 울고 싶어진다는 감정 을 느낀 자신에 대해 더욱 놀랐다. 루손의 손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레이저는 웃는 와중에도 얼굴을 좀 붉혔다. 그러나 루손의 절망 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에 레이저의 그런 모습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손은 입을 쩍 벌린 채 숨 막히는 소리로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그러나 레이저가 먼저 화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아아, 그래. 말했잖아. 암컷이라고. 그건 없어졌어.”
루손은 기겁하며 바지를 벗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의 길이나 모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 동작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레이저가 황급히 말렸다.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마법만 풀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까. 루손, 정신 차리라고!”
그러나 당황한 루손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루손은 코를 벌름거리려다가 더욱 황당한 기분을 느껴버렸다.
“흐응, 흥! 이, 이거, 콧소리가? 흐으응!”
“잠깐, 잠깐만! 이봐, 루손! 정신 차려. 그러다가 콧물 나오겠다. 코의 구조가 바뀌었잖아. 음. 일어설 수 있겠어? 이보라고, 루손, 일어나 보라고. 응?”
루손은 얼빠진 모습으로 레이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이저가 몇 번이나 더 재촉하고 나서야 루손은 간신히 일어날 생각을 했다.
“팔을 내밀어 봐, 잡아줄 테니. 루손! 손을 줘야지?”
“파, 팔길이가?”
루손의 몸이 기억하던 팔다리의 길이가 완전히 변했기 때문에 루손은 레이저의 손에 자신의 팔꿈치를 얹고 말았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루손과 레이 저는 간신히 손을 마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루손의 변화에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몸무게가 변했으며, 게다가 그 무게의 분포마저도 오크 였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원래 허리 쪽에 상당한 무게가 걸려 있던 루손은 가슴과 골반 쪽으로 많은 무게가 옮겨가자 도통 균형을 잡을 수 없 었다. 결국 루손은 그를 부축하고 있던 레이저와 함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이고!” “흐으응!” 성숙한 여인의 몸을 껴안고 나동그라지면서 레이저 는 슬프게 생각했다. 결국, 붉은 산맥에서도 여자를 안을 수는 있었군. 그게 오크라는 것이 문제지만, 아으윽.
“자네와 파가 쫓는 무지개는 무엇이지?”
파하스는 손에 쥐고 있는 하프를 향해 말하듯이 질문했지만 쳉은 그 질문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여관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 세 명이었지만 파는 건너편 침대에 드러누운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으니까. 저렇게 피곤했나? 그래서 쳉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파의 언니입니다.”
쳉과 파의 침대 사이에 앉아 있던 파하스는 여전히 하프의 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는 애인의 언니를 추적하는 거냐, 애인의 동생을 데리고 추적하는 거냐? 아니면 애인을 고르기 위해 둘을 한자리에 모아놓으려고 날뛰는 거냐?” 쳉은 무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죽을 겁니까?”
하프의 현을 조율하던 파하스의 손이 멈췄다. 그는 하프의 현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쳉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파하스의 눈에는 쳉의 얼굴 이 세로로 조각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조각나 있다고 해서 원래 없던 표정이 생겨나진 않았지만.). 파하스는 하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역시 그곳에 놓여 있던 쳉의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며 말했다.
“모르겠다.”
술을 다 따른 파하스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눈을 가려진 채 네가 알지 못하는 곳에 내팽개쳐진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쳉은 베개를 조금 높인 다음 말했다.
“옛이야기에나 나올 상황이군요.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본 다음 제가 아는 사람, 혹은 장소로 돌아오려고 하게 될 겁니다.”
“난 이 시대에 내팽개쳐졌어.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말이군요.”
“안식으로.”
파하스의 목소리에는 짙은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쳉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만 잠들었으면 좋겠는걸. 저 작자는 100년 동안 잤기 때문에 잠이 별로 필요없나? 파하스는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쳉의 침대 위로 올려 편한 자세가 된 다음 배 위에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넌 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 게다가 100년을 뛰어넘은 적도 없고. 이봐, 뭐 하나 물어보지. 자넨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재수 없으면 자고 있던 집에 불이 나서 죽을 수도 있고, 낙마해서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자객의 단검에 꿰여 죽을 수 도 있었지. 내겐 원한 가진 남자들이 많았거든. 그 녀석들도 이젠 다 죽었겠군. 고인들에게 명복 있기를. 진혼곡은 나중에. 어쨌든 난 다른 사람 못잖 게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걸 계속 생각했다간 도무지 살 수가 없으니까. 생각해보라 고, 미인에게 키스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생각해서야…………, 죽은 뒤 썩어서 해골바가지 위에 너덜거리는 그 뭉그러져 가는 입술의 감촉을 상상해서야 어떻게 제대로 키스할 수 있겠어?”
“예. 그렇습니다.”
파하스는 쳉의 단순한 대답에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도 죽음을 계속 생각하며 살지는 않잖아. 그렇지?”
“예.”
“그런데 나는 이미 죽어봤단 말이야.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음. 자네 총각이야?”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순간 파하스의 눈이 조금 짓궂은 빛을 띠었다.
“여인과의 꿈 같은 밤, 모든 총각들의 환상이지.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그거 시시하지. 살인을 해본 적은 있나?”
쳉은 파하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살인도 마찬가지지. 애써 피하려 들지만, 피치 못할 이유에서든 절실한 이유에서든 누군가를 죽이게 되면 두 번째 살인부터는 그다지 충격이 없게 되지. 이때부터 타인의 생명이라는 것이 부질없게 보이게 되지. 이해가 되나? 그래. 이게 예로서는 더 낫군. 살인을 원하는 녀석은 없지. 하지만 한 번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버리면, 그 다음부턴 살인은 귀찮고 골치 아픈 일일지는 몰라도 슬픈 일은 아니게 돼. 동정심이라는 것이 사라지지. 죽음도 마 찬가지야. 매일같이 잊으려 애써왔고 가까스로 피해 왔던 거, 실제로 닥쳐보면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돼. 이때 ‘팍!’ 하고 각성은 찾아오게 되지.”
파하스는 극적으로 말을 맺으며 쳉의 눈치를 살폈지만 쳉은 긴장하지도 호흡 소리를 낮추지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저 골렘만큼의 감수성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죽음을 애써 잊어가면서까지 지켜온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각성이지. 생존 욕구라는 것은 죽음을 피하려는 욕구야. 하지만 죽음을 겪어버 리면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생존 욕구도 사라지지.”
쳉은 물끄러미 파하스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당신의 마지막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에서였다고 들었습니다.”
파하스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랬어.”
“사이들랜드 대평원을 떠돌며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하프를 타고 노래를 부르다가 걸으며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확하게 언제 죽었는지 는 아무도 모른다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걸었고 노래했고 하프를 탔으니까. 어쩌면 당신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에 도착한 순간 에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재미있는 전설이군.”
“사실입니까?”
파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내일 일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파하스. 나는 파와 함께 하던 일을 계속할 겁니다. 당신은 어쩌시겠습니까?”
파하스는 이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고향엘 와봐도 별 감동은 없어. 기억하는 모습과 너무 달라.”
“그런가요.”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것 같군. 첫사랑이었던 이웃집 누나를 사창가에서 발견하게 된 것과 비슷한 기분일까. 사내들은 무례해졌고, 아가씨들 은 뻔뻔해졌군. 오늘 저녁만 해도 그래. 젠장!”
쳉은 저녁에 다른 여관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을 생각하며 짧게 미소 지었다. 다른 손님들이 있긴 하지만 세 사람 정도는 끼여 잘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쳉은 고개를 끄덕였고 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파하스는 주인장을 삿대질하며 ‘당신 포주야?’ 등의 말을 해서 커다란 싸움판을 벌일 뻔했 다. 파가 다급하게 불러댄 이름(“파하스! 진정해요.”)을 듣고 주인장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자명하다. “미친 놈을 재울 수는 없어. 자살을 하거나 다른 손님들에게……………” “이 자식, 말 다했냐!” 결국 세 사람은 그 여관을 나와서 파하스를 몹시 교육시킨 다음에야 이 여관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파하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일까……”
“프리스트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계속 함께 있어주길 바랍니다.”
파하스는 고개를 휙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왜지?”
“제가 찾고 있는 무녀는 퓨처 워커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문제는 엉뚱한 시간에 떨어진 것에 대한 것 아닙니까?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어쩌면 그녀 는 당신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처음 당신을 발견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잠깐,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 짓 지 마십시오. 당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파하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꺼내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야.”
“그 외에도 뭐, 대시인 파하스라면 유쾌한 길 친구가 될 거 같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들어보았다는 것은 영원한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미 같은 무녀 가 아니라면 이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쳉은 파하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하스의 표정을 보고는 좀 당황했다.
“잠깐, 조금 전에 뭐라고 했나? 미 같은 무녀? 자네가 추적하는 무녀의 이름이 미인가?”
“그렇습니다만.”
파하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파를 바라보았고 쳉은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파하스는 시트를 뒤집어쓴 채 잠든 파의 모습을 바라보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 이봐. 파 양은 바이서스 어를 모르나?”
“알 리가 없지요.”
“그래서였군! 가자.”
파하스는 벌떡 일어나며 침대 옆에 기대 세워 두었던 검을 잡았다. 쳉은 그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파하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젠장, 어른이 가자고 하면 어서 일어날 것이지! 오늘 오후에 들렀던 그 주점 기억하지? 싸움이 일어날 뻔했던 주점 말이야. 그 주점에서 자네를 도 와주기 위해 일어났던 그 검사 기억하나?”
“예. 눈빛이 매섭던 검사 말이군요.”
“그 검사는 자기 동료와 바이서스 어로 이야기를 나눴네. 난 그들이 외국어를 사용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어. 그런데 그들의 대화에서 미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 …………… 이봐, 쳉? 기다려! 같이 가자고!”
파하스는 쳉을 뒤쫓아 달려가다가 쳉이 걷어찬 문이 되튕겨 오는 바람에 얼굴을 강타당할 뻔했다. 저 골렘 같은 녀석이 왜 저렇게 발광을 하는 거 야? 파하스는 검을 찰 사이도 없이 손에 그 커다란 검을 쥐고 좁은 복도를 힘겹게 달려야 했다.
“이봐, 쳉! 서라고!”
두 사람이 나간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열린 방문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등잔불이 가볍게 일렁거리기를 몇 번. 파의 침대 에서 시트가 조용히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잔인한 결심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파는 조용히 시트를 정돈해 놓고는 등잔불을 훅 불어 끄고 파하스가 뛰쳐나가며 넘어뜨린 의자까지 똑바로 세워놓았다. 그리고 역시 파하스가 열어 젖힌 방문으로 나온 파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놓았다. 옆방 손님들의 안면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동작마저 끝내고 나자 파는 더 이상 시간 을 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어. 젠장. 이제 쳉 네가 나를 막지 못한다면 그건 네 실수야. 아니, 운명이 그런 거야. 그렇게 되는 거라고.’
파는 이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속으로 웅얼거린 다음 조금 전 쳉과 파하스가 달려갔던 복도를 빠르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네 사촌 형, 신차이는 어떤 사람이지?”
“누군가를 독살해야 된다면 방울뱀의 독을 모아 1파인트 잔을 넘치도록 채운 다음, 상대에게 그것을 간절히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만들어준 후, 그것을 마시고 쓰러진 상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하지. 정말 죽었을까.”
이 녀석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에서만 말이 길어지는군. 그란은 미소를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탄사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운차이를 실 망하게 만든 다음 천천히 말했다.
“편집증이 있나?”
“아니. 괜찮은 사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네 고향에서는 그게 괜찮은 사나이의 표본이냐?”
“흐음. 그래. 이 말은 사내의 세 가지 덕목을 약간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이지. 성실함, 이해심, 신중함. 방울뱀의 독을 1파인트나 모았으니 성실한 것이고, 강제로 마시게 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마시고 싶어지게 만들었으니 이해심 있는 것이고, 1파인트나 되는 맹독을 마신 상대가 혹시 살아날 지도 모른다는 점까지 의심하니 신중한 것이지.”
“나라면 그건 바보의 세 가지 덕목이라고 말하고 싶군. 어쨌든 말인데, 그 이야기나 다시 들려주게. 자네 사촌 형이 목검으로 서펀트를 죽였다는 이 야기.”
“왜?”
‘밤은 길고 그래도 인간 같은 네리아는 미를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너를 상대해야 되는데다가 우리가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만일 이 도 시에 후작이 있다면 우리 동정을 파악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습격에 대비해서 불침번을 서야 되는데 불침번을 서며 보내어야 할 밤은………… 역 시기니까.’라고 대답하는 대신, 그란은 이렇게 말했다.
“심심하니까.”
“내 가족사가 네겐 심심풀이 물파이프냐?”
“왜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자네가 그때 말하던 방식으로 말해 볼까. 신차이는 목검으로 서펀트를 죽였다. 그러나 목검으로 서펀트를 죽일 수는 없다. 이래 가지고서는 삼단 논법도 되지 않아.”
“삼단 논법이라고 말한 적 없다.”
“아아.”
“…………..거기에는 생략된 말이 있지.”
“뭐지?”
“인간은.”
인간은? 그란은 이 말이 어느 부분에 들어가야 되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주어가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은 어차피 한 군데뿐이었다. “인간은 목검으로 서펀트를 죽일 수 없다?”
운차이는 그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보내지 않고 파이프만 만지작거렸다. 삼단 논법을 완성한 그란은 그 결론에 당황하며 운차이를 똑바로 바라보 았다.
“네 사촌 형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야? 너처럼?”
“응? 그거 무슨 말이지?”
“농담하냐는 말이다.”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파이프를 깊이 문 운차이는 약간 튀는 발음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낭만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야기야. 우리 사촌 형의 어머니, 즉 나의 고모님은 아름다우신 분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면 신혼여행 의 해변 산책에서 머맨에게 납치당할 만큼.”
“머맨에게? 으음……”
“내 사촌 형은 고모님이 다시 인간 사회로 돌아오고 낳은 아이지.”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군. 하지만 인간과 머맨 사이에 자식이 나올 수 있나?”
“모르지.”
“너는 그렇게 의심한다?”
“말했듯이, 그는 서펀트의 장례식을 주관한 자니까. 그게 의심의 요건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나 이거 참. 머맨의 자식이라고? 그림 오세니아와 시무니안의 자식이란 말이지…………. 허헛, 참.”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던 그란은 운차이의 핏발 선 눈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운차이는 입에 문 파이프를 빼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뭐라고?”
“…………내가 시적인 표현을 쓴 것이 그렇게 경악스럽냐?”
“이런, 제기랄! 누가 그런 시시껄렁한! 그림 오세니아와 시무니안의 자식? 그렇군. 머맨과 인간 사이의 자식이라면, 그거 그렇게 부를 수도 있군. 그 “렇다면…………!”
운차이는 팽창할 대로 팽창한 동공으로 그란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그란은 퍽 불쾌해졌다.
“눈싸움하자는 거냐?”
그러나 운차이는 그란의 불평은 안중에도 없었다. 운차이는 평소에 거의 하지 않는 말, 즉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 희구와 회상……”
다시 한번 불평을 터뜨리려던 그란은 불평의 말이 입천장쯤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운차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정확하게 재현해 내 었다. 희구와 회상이라고? 희구는 바라는 것, 미래로 향하는 소망. 회상은 돌아보는 것, 과거로 향하는 그리움.
그란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답이 네 사촌 형이라는 말이야?”
“컹컹컹!”
그란의 질문에 대해 돌아온 이 이상한 대답은 잠시 두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운차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달탄?” 그때 뭔가가 부서 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또 다른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애애애!”
“네리아잖아? 이런 제기랄!”
그란과 운차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자를 박차고 계단으로 뛰어올라 갔다. 여관 정문과 홀은 빈틈없이 감시되고 있었는데 어느새 2층에? 몸 이 빠른 운차이가 앞장서고 그란은 그 뒤를 따르며 두 사람은 좁은 계단을 두세 개씩 건너뛰며 올라갔다. 그래서 2층에서 갑자기 나타난 네리아 때문 에 운차이가 멈춰 섰을 때 그란은 운차이의 허리에 부딪히며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아아악!”
운차이와 그란은 뒤엉켜 계단을 굴러내려 갔다. 텅, 텅, 텅! 그러나 바닥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두 사람의 몸 위로 날아오른 네리아였다. 계단의 용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무모한 행동을 취한 네리아는 1층에 도달하자마자 무릎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며 그대로 한 바퀴 굴렀다. 그리고 네리아가 다시 일어났을 무렵에야 두 사나이는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1층에 도달했다. 뒤를 돌아본 네리아는 바닥에 쫘악 널브러진 두 사람의 불쌍한 모습에 대해 사무치는 동정심을 표현하는 대신 이렇게 외쳤다.
“미가 납치됐어!”
“으윽! 뭐라고?”
그때 바깥에서 다시 아달탄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크와아아!”
“으아, 사람 살려!”
연이어 터져나온 비명 소리에 네리아는 환한 표정으로 펍의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온 네리아가 본 것은 개와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춤이었다. 아무래도 리드는 사람 쪽이 맡은 듯, 시커먼 복면을 둘러쓴 사내는 팔에 아달탄을 매단 채 상당한 난이도가 있을 법한 스핀을 해대고 있었고 그래서 아달탄은 공중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끄아아아!”
사내는 2층 창문에서 곧장 뛰어내려 팔에 매달린 키타나 하운드를 떼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달탄은 머리끝까지 화 가 난 키타나 하운드가 어떤 모습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양자 모두 감탄할 만한 동작이었다. 저 거체를 매단 채 돌고 있는 사내나 저렇게 휘둘려 지면서도 팔을 놓치지 않는 아달탄이나. 그때 사내의 다른 쪽 팔이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그 손에는 롱 소드가 예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 마!”
네리아가 곧장 트라이던트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사내의 귀에는 그녀의 협박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내의 당면 과제는 이 글자 그대로의 ‘미친 개’를 떼어놓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트라이던트에 꿰이든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바로 그때 우연히 일어난 두 개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아달탄은 롱 소드의 칼날에, 사내는 네리아의 트라이던트에 각각 피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아달탄은 갑자기 사내의 팔을 놓아버렸고 사내는 하마터면 자신의 팔을 잘라버릴 뻔했다. 공중에서 휘둘러지고 있던 아달탄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 다. “깨갱!” 그리고 사내를 향해 달려들던 네리아는 갑자기 발을 헛짚으며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려 나오던 운차이와 그란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잠시 평정을 잃었다. 내던져진 아달탄은 땅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끙끙거렸고 네리아는 코를 골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 쩝쩝.”
“네리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운차이와 그란이 살펴보았을 때 사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운차이는 바닥에 엎어진 네리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장 아달탄을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안 만져.’ 그란은 이렇게 해석하고는 자신이 네리아를 맡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크르르릉! 푸아……, 음냐.”
땅에 쓰 러진 불편한 자세 그대로 코를 골아대는 네리아를 보며 그란은 혀를 찼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찾고 있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던 그란은 잠시 후 네 리아의 오른쪽 귀 아래에 꽂혀 있는 작은 바늘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아달탄을 살피고 있던 운차이는 그란이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독침?”
그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시 보류하며 운차이는 아달탄의 다리에서 뽑아낸 바늘을 혀로 가져갔다. 아주 빠르게 바늘을 핥은 운차이는 침을 퇘 뱉고서는 대답했다.
“수면제야. 이 둘을 재우고 미를 납치하려 했나 본데.”
“그럼 약기운이 지금에서야 돌았단 말이야?”
“약이 엉터리야. 추적할까?”
그란은 고민했지만 대답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납치는 살해하지 않겠다는 보증이다. 네리아와 아달탄부터 처리하지. 드디어 후작이 꼬리를 드러내었군.”
운차이는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달탄을 안아올렸다. 그란은 이미 네리아를 안아올리고 있었다.
“푸화아…………. 냠냠.”
그때 드디어 후라마의 펍의 안녕 질서와 그 투숙객들의 평안한 밤을 담보해야 할 주인 후라마가 거친 밤바람에 잠옷자락을 휘날리며 손에는 장작을 든 채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뭐야!”
펍의 주인으로 4대째, 후라마는 능숙하게도 상황의 종료를 느꼈던 모양이다.
네리아를 안아든 그란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후라마를 지나쳐 홀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운차이는 아달탄을 안은 채 반대편으로 지나쳤다. 외로운 대로에 외로운 존재로 남겨진 후라마는 당황한 태도로 몸을 돌렸다. 자신이 가진 무한한 정의를 아직 반도 펼쳐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듯 한 발걸음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온 후라마는 운차이를 향해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
“당신에게 퍽 자주 요청하는 기분이 드는데, 뜨거운 물과 수건 등을 가져다주시오.”
“예? 저,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당신 여관에서 우리 동료 중 한 명은 납치되었고 한 명은 독침을 맞았고 한 마리는, 역시 독침을 맞았소. 이제 설명이 되었소?”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운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아달탄? 그럼 미가 납치된 겁니까?”
운차이는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활짝 열린 여관 문을 통해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고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운차이는 그들이 낮에 보았던 남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구의 젊은이 쪽이 운차이에게 다가 서며 아달탄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말했다.
“쳉이라고 합니다. 아달탄은 어떻게 된 거죠? 그리고 미가 납치당했다고 하셨습니까?”
운차이는 잠시 쳉의 어깨 너머 열린 여관 문을 통해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거 왠지 설명하고 설명 받을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밤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