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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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는 아무 무기도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대신 재빨리 혁대를 뽑아들었다. 혁대를 왼손에 감아쥔 파는 다시 배를 지붕의 기와에 찰싹 붙인 채 꿈틀거리듯이 기어갔다. 하지만 지붕 끄트머리에 이르자 낡은 너와들이 불길한 소리를 냈기 때문에 파는 잠시 멈춰 서야 했다. 그 순간 구름에 가렸 던 달이 다시 하늘을 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으로 떠오른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혁대의 버클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던 파는 피식 웃어버렸다. 교교한 달빛이 소리 없이 물결치는 지붕 위에서 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모한 건가? 아니면 고도로 지능적인 건가?
파는 쳉과 파하스보다도, 운차이와 그란보다도, 심지어 네리아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후라마의 펍에 도달했다. 쳉과 파하스가 숨차도록 달려 온 것에 반해 파는 건물들의 지붕과 옥상을 밟으며 하늘로 날아왔기 때문에 길을 무시하고 곧장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후라 마의 펍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건물의 지붕에 도달했을 때, 파는 당황하며 건물 위로 불쑥 솟아오른 굴뚝 뒤에 몸을 숨겨야 했다.
파는 조심스럽게 얼굴의 반만 내밀고 앞을 살폈다. 은은한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파는 후라마의 펍 지붕에 웬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나이트호크인가? 사내들은 모두 세 명이었고 모두들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위에서 뭔가 작업을 하더니 곧 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 했다. 그제서야 파는 그들이 지붕에 밧줄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파는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굴뚝을 돌아서 달빛에 진 굴뚝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동안 사내들 역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후라마의 펍 벽을 따라 내려갔다. 그때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작은 구름이 달을 가렸다.
주위는 암흑으로 빠져들어 갔다.
거대한 세 마리 거미처럼 여관 벽을 타고 내려온 사내들은 목표한 창문에 이르자 묘한 재주를 선보였다. 먼저, 가운데서 내려오던 사내가 갑자기 몸 을 뒤집었다. 사내는 발로 밧줄을 감고 한 손으로 창턱을 짚으며 창문 위에 완전히 거꾸로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그러고는 창문 위로 조심스럽게 머 리를 내밀어 안쪽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두 사내들은 창문의 좌우로 내려와 벽을 밟고 대기했다. 놀라울 정도의 조직적인 행동에 파는 숨 소리마저 낮추었다.
창문으로부터 나오는 빛 이외에 다른 빛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파는 사내들의 동작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파는 창문 위쪽에 거꾸로 매달 렸던 사내가 다른 두 사내들에게 뭔가 손짓을 보내는 것, 그러고 나서 품속에서 꺼낸 뭔가를 입가로 가져가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짓을 받은 창문 왼쪽에 있던 사내도 뭔가를 입가로 가져갔다. 창문 바깥의 침입자가 창문 안쪽의 피해자를 공격하기 위해 입가로 가져가는 것…………, 블로건이다! 파는 ‘훅!’ 하는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실제로 소리가 들려올 까닭은 없었지만. 그리고 고요한 후라마의 펍은 끔찍한 소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컹컹컹!”
파는 침입자들과 거의 비슷한 경악을 느꼈다. 블로건에 맞고 고함을 지른다는 것은 파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아달탄이잖아? 파가 당 황하는 사이에 창문 오른쪽에 있던 사내가 벽을 박차고는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와장창! “안 돼애애애!” 또다시 들려온 비명 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설마 미인가? 그러나 파는 그것이 미의 비명 소리와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바이서스 어였으니까.
창문 밖에 남아 있던 두 사내는 재빨리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남자들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2층 창문으로부터 뛰어 들어갔던 남자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쾅쾅! 도대체 인간이라고 봐야 될지 의심스러운 동작이었는데, 그자는 옆구리에 시트로 둘둘 만 사람을 하나 낀 채 아래로 뛰어내렸으면 서도 별 충격이 없는 것처럼 곧장 일어섰기 때문이다. 발뒤꿈치가 박살나지 않았나? 그런데 저 시트 속에는…………, 이런! 파는 역시 뛰어내릴까 했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4층짜리 건물의 지붕 위였다.
그러나 아달탄은 주저하지 않았다.
사내가 뛰어내린 창문으로부터 아달탄이 날아올랐다. 휘익! 키타나 하운드의 거체가 주저 없이 뛰어내린 곳은 옆구리에 시트 꾸러미를 끼고 있는 남 자의 머리 위였다. 그때 먼저 내려왔던 사내 하나가 바람처럼 달려들며 팔을 내밀었고 아달탄은 할 수 없이 그 사내의 팔을 물어야 했다. “끄으윽! 도 망치십시오!” 사내가 막아준 덕분에 다른 두 남자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펍의 문에서는 빨강머리 여자가 희한하게 생긴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그러나 파는 대로의 싸움을 자세히 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달려가던 두 남자들은 조금 후 골목을 하나 꺾더니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이 뛰어든 곳은 다름 아닌 후라마의 펍 정면의 건물이었다. 문은 반대쪽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건너편에서는 볼 수 없는 위치였지만, 높은 곳 에 있던 파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파는 자신이 본 것을 믿어야 될지 고민하는 애처로운 상황에 빠졌다. 바로 앞집으로 납치한다고?
“하지 마!”
다시 바이서스 어다. 놀란 파가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아달탄에게 공격당하던 사내는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여관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달려 나왔 지만 그들은 도망자를 추적하기보다는 빨강머리 여자와 아달탄에게 각자 달려갔다.
“네리아?”
파는 순간 여기서 몸을 드러내어 저들에게 납치범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려야 되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때 반대쪽 길에서 달려오는 두 명의 남자들이 없었다면 파는 곧장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쳉과 파하스였다. 그들의 모습이 보인 순간 파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쳉과 파하스는 그대로 후라마의 펍으로 달려 들어갔다.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낮췄던 파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파는 잠시 후라마의 펍의 동정을 살피다가 다시 납치범들 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건물 지붕에서 납치범들이 들어간 건물까지의 거리는……………
‘넘을 수 있어.’
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뛰어올랐다. 산봉우리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산과 은닉의 일세인처럼 파는 지붕에서 지붕까지의 10큐빗 가까운 허공 을 날았다.
거대한 박쥐처럼 사뿐히 지붕 위에 내려선 파는 소리 없이 엎드렸다. 천천히 지붕 끄트머리를 향하며 파는 혁대를 뽑아들었고, 그때 구름은 흘러 다 시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구름이 달을 가린 동안, 불과 그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래서 파는 지금 납치자들이 뛰어든 건물의 지붕 위로 위치를 옮긴 다음 손엔 혁대를 쥔 채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모한 건가? 아니면 고도 로 지능적인 건가? 눈앞의 건물로 도망치는 납치범들이 도대체 어떤 종류에 해당하는 것인지 파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가만히 엎드려 고민하는 동안 파는 자신의 고민의 정체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낡은 너와 때문이야. 그렇잖았다면 멈춰 서지도 않았을 텐데. 파는 너와에 대해 소리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미를 구해야 되나? 파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미를 납치한 것이 어떤 녀석인지는 모른다. 그 이유 같은 것은 더욱 모르고. 하지만 미를 납치했다. 그것도 쳉과 만나기 직전에 납치해 주었다. 나쁜 놈들! 너희가 아니었으면 쳉은 미를 만날 수 있었고, 그러면 틀림없이 기뻐했을 거야. 너희가 망쳤어. 쳉을 기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나쁜 것은 너 희들이야.
파는 손에 전설의 무기나 되는 것처럼 혁대를 감아 쥔 채 차가운 지붕 위에 이렇게 널브러져 셀레나의 달빛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이 다음 순간에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이런 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것은 더욱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 모두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왜 쳉을 사랑해. 왜 떠났어. 왜 납치당한 거야. 왜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었어. 왜 내 몸에 이상한 문신을 새 겨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든 거야.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일이 점점 바보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파는 몸을 일으켰다.
파는 지붕에 앉은 채 가슴 앞에 무릎을 모으고 다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지 않은 높이에서 익숙지 않은 야경을 바라보며 파는 조용히 호흡했다.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별빛은 고향과 마찬가지였지만 이 도시의 밤은 지평선 대신 네모난 어둠들이 가득가득 쌓여 밤하늘을 이고 있었다. 파는 무릎에 턱을 얹고 앞을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은 소란을 겪게 된 후라마의 펍에서만 왁자지껄한 소리와 불빛이 새어나왔을 뿐, 도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검은 밤하늘을 이고 서 있는 건 물들의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들뿐이었다. 둔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지평선을 가린 네모난 어둠들. 사이들랜드의 양치기 처녀의 발 아래로 펼쳐진 도시 의 음영은 너무 어둡고 너무 무거웠다. 파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납치당한 혈육이 끌려간 건물의 지붕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바 라보는 별빛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었다.
파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주블킨 일레드마는 복잡한 심사를 가누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이었기에 오랫동안 취하는 줄을 모르던 주블킨 은 결국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 송장을 치울까 봐 겁을 집어먹은 마스터에 의해 주블킨이 주점 바깥으로 쫓겨난 것은 루미너스가 밤의 여정의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혼미한 정신으로 어느 집 벽에 기대어 배뇨를 마친 주블킨은 바지 앞자락을 그대로 열어둔 채 ‘어, 참 시원한 밤이다.’ 어쩌고 하면서 비틀거리며 집 을 향해 걸었다. 의사의 자존심은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가슴속에 아직도 짓밟힐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 으며 주블킨은 킬킬거렸다. 젠장. 엉터리 약 파는 거하고 다를 바 없어. 하지만 분명히 달랐고, 주블킨도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털썩. 주블킨은 대로 가운데 주저앉아 두 팔로 땅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주블킨은 루미너스의 둥근 얼굴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휘익. 아마도 왼쪽의 3층짜리 건물의 지붕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날아오른 그림자는 그대로 밤하늘을 가로질러 루미너스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그대로 오른쪽의 2층짜리 건물의 지붕 너머로 사라져갔다. 달을 가린 순간 잠시 드러났던 그림자는 아무리 보아도 젊은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주블 킨은 한가롭게 추리했다.
일세인께서 돌아오셨나?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켰다가 타의에 의해 떠나셨던 그녀께서 다시 돌아오신 건가?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의사를 존중할 줄도 모르는 녀석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주블킨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크으윽.
“그럼 당신이 그 바이서스 남자를 죽였습니까? 그렇군요. 손에 끼고 계신 그 장갑이 아무래도 예사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긍정한다.”
“왜 미를 데리고 온 것입니까?”
“거절이 제시됨은 내 어학 실력을 상회하는 난이도 높은 설명이 요구됨으로 해서이다.”
파하스는 포복절도하고 싶었지만 쳉의 얼굴을 봐서 참기로 했다. 반면 운차이는 보지 않는 척하며 침대에 눕혀둔 네리아만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 에 역시 쳉과 그란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쳉은 머리를 좀 거칠게 긁고 나서 바이서스 어로 바꿔 말했다.
“그럼 당신 나라 말 하십시오.”
그란은 멍한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당신, 바이서스 어 할 줄 알았나? 왜 진작 말하지 않아서 괜한 고생을 하게 만든 건가?”
“말 잘 못합니다. 듣기 가능합니다. 그러니 바이서스 어 하십시오. 당신 헤게모니아 어 듣기 하지요? 각자 자기 말 합시다.”
그래서 그란은 한결 자세하고 이해되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란은 자신들이 바이서스의 범죄자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와의 대결에 미 가 휘말려들까 우려되어 미를 보호할 겸 데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범죄자가 미를 납치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에 대해 빠르고 상세하게 설명했 다. 그 동안 파하스는 네리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운차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난 파하스라고 하는데.”
운차이는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운차이요.”
“자넨 아무래도 자네 어깨의 모래를 다 털어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군. 나는 각 지방과 각 나라의 악센트를 다 연구했지. 제법 훌륭하지만 내 귀는 못 속여. 자네 자이펀 모래쥐지?”
운차이는 고개를 휙 쳐들어 파하스를 쏘아보았다. 이 자식 아까 낮에도 기세 오른 강아지처럼 깽깽거리더니 원래 천성이 고약한 녀석인가 보군. 그 리고 성격 고약한 사람을 상대할 때 부드러워지는 경향은 운차이에게는 없었다.
“말 곱게 써라.”
“뭐야? 너야말로 말 곱게 써라. 너희 나라에서는 위아래도 없냐? 난 그러니까…………, 음, 144세다. 알았어?”
“어디 달력으로?”
“난 드래곤력으로, 아니, 요즘은 그거 안 쓴다고 했지. 바이서스력으로 172년생이다.”
운차이는 판단을 수정했다. 미친 녀석이었군. 운차이는 말없이 상대방의 얼굴에서 미친 자의 증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파하스는 그저 눈을 동그랗 게 뜬 채 운차이를 마주보았다.
“내 얼굴에서 주름살 찾는 거냐?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을 거야. 난 100년, 아니, 정확하게 108년을 뛰어넘었거든. 하하. 생물학적으로 난 36세야.” 미친 녀석이라고 다 침을 흘리고 눈빛이 괴상한 것은 아닌가 보군. 운차이는 이런 의문을 하늘로 날려 보낸 다음 파하스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파 하스는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운차이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흐음……, 그 빨강머리 아가씨는 자네 애인인가?”
휘릭!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이를 악문 채 파하스를 노려보았다. 파하스는 운차이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너 이 자식, 누구 장사를 치르려고?”
“나도 충격이야! 정신이 다 번쩍 든다, 인마!”
네리아가 발딱 일어나며 외쳤기 때문에 파하스도 운차이도 더 이상 싸우지는 못했다. 보다 인간적인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그래 봤자 각자 자기 나라 말로 떠들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 분열적인 광경으로 단정하기 딱 알맞은 모습이었지만) 쳉과 그란도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 는 일어나자마자 운차이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지만 곧 힘없는 표정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 머리 아파. 어떻게 된 거지? 음음. 아까 그러니까…………, 미는? 미 어떻게 되었어?”
“미는 납치되었어. 침입자를 봤나?”
“몰라. 복면을 하고 창문으로 뛰어들었어…………. 그런데 나는 왜 정신을 잃은 거지? 그리고 이분들은 누구야?”
쳉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말했다.
“쳉이라고 합니다. 미의 오랜 친구지요. 우리는 사이들랜드에서부터 미를 뒤쫓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도중에 나와 동행이 된…
그때 파하스가 재빨리 손을 들어 쳉의 말을 제지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파하스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침대에 앉은 네리아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여 보이며 유려한 말투로 말했다.
“고귀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가엾은 혀를 가졌다는 죄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혀를 만족시킬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지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외로운 발자국을 남길 이 불쌍한 광대의 이름은 파하스라 합니다.”
그란과 운차이는 얼이 빠져버렸고 쳉은 일말의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네리아는 재치 있는 대답을 해야 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휩싸여 버렸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잠깐 쏘아보고는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어…………, 당신의 성실한 혀에 축복이 있어 언젠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할 행운이 있을 거예요. 그때 저 네리아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파하스의 눈이 커다랗게 바뀌었다. 부활 이후로 처음으로 여성다운 여성을 만나버렸다는 놀라움이 파하스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파하스는 침대 옆 에 무릎을 꿇으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고귀한 레이디 네리아여! 레이디의 손끝이 머무는 바람에 향기 어리고 레이디의 입술이 닿는 시간에 충만한 아름다움 있으니 이 광대의 무의미한 출생이 비로소 의미를 획득했나이다!”
네리아는 발그레해진 볼 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운차이가 먼저 말했다.
“친절하게 대해 줘. 네리아 장님인가 봐.”
잠시 후 파하스는 베개를 휘두르는 네리아의 우아한 손길을 찬미해야 했다. 쳉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침착함으로 그란을 감동시 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미를 추적하실 생각입니까.”
“사실 고민스럽소. 우리가 추적하는 사람들은 많은 인원을 데리고 있을 거요. 게다가 그는 우리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난 그의 위치를 모르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싶은데.”
쳉은 그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그란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미 양을 내버려둔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건 아니오. 미 양은 반드시 구출할 거요. 우리 일에 휘말려 그렇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현재 우리 인원 은 운차이와 나, 네리아 이렇게 세 명뿐이오.”
“나를 더하면 네 명입니다.”
그때 ‘미인은 원래 무자비한 법’ 어쩌고 하면서 네리아의 구타 능력에 대한 아낌없는 칭송을 보내던 파하스가 끼어들었다.
“다섯이야. 나도 있잖아, 쳉. 레이디에게 검은 손을 내민 녀석은 시공을 뛰어넘어 나의 적이다.”
쳉은 잠시 파하스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에 맑은 표정이 있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우리 숙소에는 동료가 한 명 더 있으며, 그러니 모두 일곱이 되겠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그란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섯 아닌가? 그러나 쳉은 피식 웃으며 일곱 번째 동료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란의 얼굴이 환해 졌다.
궤헤른은 천장의 무늬를 쏘아보고 있었다. 옆에서 오가는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 대해 신경 쓰다 보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떠올리게 될 것이며, 개라는 이름을 방패삼아 사람들 사이를 뻔뻔스럽게 돌아다니는 그 몬스터에게 물어뜯긴 팔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궤헤른 은성한 팔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잡아당겼지만 그의 손목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궤헤른은 고개를 돌렸다. 후작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후작의 눈이 궤헤른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애타는 눈으로 후작을 마주보았 다.
“피를 흘리는 녀석이 뭘 마시겠다는 건가.”
“너무 아픕니다.”
궤헤른의 목소리는 가냘팠다. 그러나 후작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니 기뻐해.”
살아 있다는 것?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라. 그거 말은 되는군. 궤헤른은 손에 힘을 뺐고 후작은 그의 손목을 들어 가슴 위에 놓아주 었다. 그러나 궤헤른은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팔에 끼었던 팔목 보호대 덕분에 팔이 잘려나가는 것은 간신히 모면했지만 그 단검 같은 이빨이 헤집 어놓은 팔의 근육은 원래의 결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궤헤른의 팔을 보살피고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은 아직까지도 팔을 자를 것인지 치료를 감행해야 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치료를 감행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여기 있는 친구들 중에 절단 수술을 해낼 만 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많았지만 절단해 놓고도 살아 있게끔 할 실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궤헤른은 머릿속으로 아달탄을 ‘미친개새끼’라고 불러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팔이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네 목을 잘라 벽에 걸겠 다.’이건 좀 나았다. 궤헤른은 박제 제작에 대해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을 모조리 동원하여 아달탄을 저주했다. 그 핏발 선 눈알을 파내고 구 슬을 끼워주는 거야. 그리고 그 코는………….
“후작님…..! 으윽. 후작님!”
궤헤른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의 손목을 나꿔채며 으르렁거렸다.
“닥쳐! 참지 못하겠나.”
“아니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급한…………, 커흑! 용건입니다. 후작님!”
궤헤른은 할슈타일 후작에게 붙잡혀 있던 팔을 확 빼내었다. 후작은 눈을 매섭게 떴고 궤헤른을 치료하고 있던 사내들도 궤헤른의 행동에 놀랐다. 후작은 궤헤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뭔가. 급한 용건은.”
몸을 격하게 움직였기에 상처 입은 팔에 충격이 전달된 궤헤른은 기절할 정도의 통증을 느끼며 허옇게 질려버렸다.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귀를 바싹 가져가야 했다.
“이 자리를………….., 당장 피해야 됩니다. 후작님…
“뭐.”
“노, 놈들이………… 쪼, 쫓아올 겁니다.”
“왜지. 녀석들이 이틀 동안이나 의심하지 않았던 눈앞의 건물을 갑자기 의심하게 될 거라고 믿나. 자네가 너무 아파서 불안해졌다는 것은 알겠지 만……”
“아니오! 그, 그렇잖습니다. 녀석들은 아닙,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개 말입니다. 후작님.”
“개.”
“예. 개는 냄새를 잘………… 맡습니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개가 깨어나면…
밖으로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가려둔 등잔불 때문에 방 안은 캄캄했다. 그 어둠 속에서 후작의 눈이 번쩍였다. 후작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 있는 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저 무녀의… 냄새를 추적할 겁니다…………… 이 정도 거리는 개에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선명…..”
“알았으니 그만하게.”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정지시키고는 사내들에게 눈짓을 보내어 계속 치료하게 했다. 그리고 미를 바라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만일 다른 곳으로 이동 한다 하더라도 그 개가 남겨진 희미한 냄새를 맡아서 뒤따라온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공격을? 그건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검은 이 제 네 자루뿐이기 때문이다. 후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지금 궤헤른을 치료하고 있는 네 명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후작의 마지막 부하들이었 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후작은 아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방 안에 남겨진 네 명의 머저리들이 하나 남아 있던 그런대로 쓸 만한 부하를 치료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까지 냉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후작은 달아나버린 그의 사병들을 저주했다. 개만도 못한 녀석들. 할슈타일 가가 부여한 은혜가 얼마이거 늘, 겨우 1년도 참지 못해 모조리 달아나버리다니.
바이서스를 탈출하던 당시만 해도 그에게는 할슈타일 가의 피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사병이 300명가량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재기의 길은 어렵기 는 하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사병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충성심은 많이 희박해 져 있었다. 이대로 산적이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건방진 의견을 낸 부하의 목을 베어버린 밤 후작은 거의 암살당할 뻔했다. 내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검광이 번득이고, 어제의 동료들의 피로 피를 씻는 좌절스런 상황 탓에 더욱 길었던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왔을 때 후작의 곁에 남아 있는 부하는 100명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체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후작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달아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 이 남아 있는 충성심의 마지막 발휘였는지도 모르지만, 후작은 그에 대해 고마워할 여유는 없었다. 미친 듯한 후작을 말리기 위해 궤헤른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후작의 그런 행동은 남아 있는 사병들의 가슴속에도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혹은 비밀스러운 귓속말을 통해 달아 난 패거리들과 남아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후작은 눈을 뜨는 아침마다 부하들의 빈자리를 세는 것을 그만두 어야 했다. 그를 뒤쫓고 있는 그란 일행에게 이미 많은 수의 부하들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후작과 궤헤른이 들인 노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너희들은 내 거야. 후작은 이를 갈았다. 달아나버린 늑대 300마리 대신, 너희 세 마리 타이거들을 가지겠어. 그때까지 네놈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겠어. 후작은 다시 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 개의 문제는 처리해야겠군.
“돌맨.”
궤헤른을 보살피고 있는 사내들 중 가장 젊은,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할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한 눈빛을 담고 돌맨은 양부를 바라보았다.
“예?”
“저 무녀의 옷을 벗겨라.”
“예?”
돌맨은 당황한 표정으로 거부의 몸짓을 취했지만 그것은 후작을 더욱 짜증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후작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돌맨을 바라보며 말했다.
“멍청한 녀석! 냄새를 지워야 된다. 어서 옷 하나를 벗겨!”
“아, 아……, 예, 후작님.”
대답을 하고서도 돌맨은 상당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미에게 다가섰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곧장 납치된 미였기 때문에 걸치고 있는 옷이 그렇게 많지 는 않았고 그래서 돌맨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미를 주욱 훑어보았다. 후작은 그런 돌맨을 보면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증오를 느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장시간이 지나서야 돌맨은 서툰 손길로 미의 셔츠를 벗겨내고는 황급히 시트를 덮어주는 동작을 마칠 수 있었다. 손에 미의 셔츠를 든 채 돌맨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고 있어. 궤헤른은 어떤가.”
붕대를 촘촘히 감았을 뿐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했지만, 궤헤른은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니까요.”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들었다.
“장소를 옮긴다. 가이버, 나가서 말을 준비해라. 사무엘, 궤헤른의 짐을 들도록. 니크, 무녀를 업어라. 단 네가 덮던 시트로 그녀를 감싸고 나서.”
후작의 빠른 명령에 따라 세 명의 사내는 각자의 일을 향해 흩어졌다. 배낭을 멘 다음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는 후작의 등을 향해 돌맨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후작님?”
후작은 잠시 멈추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등을 돌린 그대로 말했다.
“너는 여기서 한 두어 시간 기다린 다음 그대로 사라져라.”
“예?”
“냄새를 뿌리며 사라지란 말이다. 단,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근처에는 오지 마라. 약속일인 모레 아침에 턴빌 시청에서 만난다.”
돌맨은 기막힌 표정이 되었다.
“자, 잠깐만요! 아버……………, 후작님. 저 혼자서 저 세 명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단순히 도망만 치는 것인데 뭐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냐.”
돌맨은 입을 쩍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후작의 등을 쏘아보고 있던 그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절 죽이려는 거죠!”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던 세 사내들의 손이 동시에 정지했다. 후작은 천천히 몸을 돌려 돌맨을 바라보았고 돌맨은 그 얼굴에 질려버렸다. 하지만 그의 입은 무의식중에 헐떡이며 그의 심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후, 훈트처럼 저를 미끼로 쓰려는 거지요! 나, 나도 봤어요. 저 무녀가 타고 있던 말은 훈트의 말이었어요! 훈트는 죽었지요? 그래요! 그 녀석들이 훈트를 죽인 거 후작님도 아시잖아요! 모른다고 하실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저도 떠나보내시려는 거예요? 죽이겠다는 거………….., 쿡!”
돌맨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후작이 어느새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천장이 낮아지며 돌맨은 자신이 허공에서 허우 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대 후려치려다가 맡겨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기에 후작은 단순히 돌맨의 멱살을 붙잡아 올리기만 했고 돌 맨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쳤다.
“컥, 크걱!”
“닥치고 잘 들어라. 네 녀석이 훈트처럼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이라고는 나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녀석들에게 투항해도 좋다. 구출해 주 겠다. 하지만 내가 시킨 일은 해야 한다. 네 녀석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알겠나.”
돌맨은 ‘구출해 주겠다’는 후작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교살색에 걸린 것 같은 목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 후자……………, 수, 숨이 막…………”
“알겠나.”
후작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고 힘껏 잡아당겨진 셔츠 깃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했다. 그때 궤헤른이 힘겨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후작님. 공자님은 대답할 상태가 아니십니다. 내려주십시오.”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따랐다. 다만 그의 방식대로 돌맨을 내려놓았다. 집어던져진 옷가지마냥 공중을 날아 방구석에 처박힌 돌맨은 숨 막히는 고통 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후작은 그런 돌맨을 매섭게 노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공자님, 후작님이라고. 그만 웃기게, 궤헤른.”
후작은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다른 사내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지만 궤헤른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 사태를 수습해 보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팔을 부여잡은 채 돌맨에게 다가갔다. 돌맨은 후작에 의해 집어던져진 모습 그대로 흐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이나 되는 소년이라면 이미 소년으로 부르기도 어렵지만 돌맨은 자기 나이에서 10년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펑펑 울고 있었고, 궤헤른 은 그 모습을 보며 측은함과 동시에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궤헤른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공자님, 후작님께서는 공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신 겁니다. 이해하시고 일어나십시오.” 목이 막히도록 울고 있던 돌맨은 궤헤른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요란하게 트림을 해야 했다.
“꺽, 뭐, 뭐라고요?”
“일부러 그런 안배를 하신 거란 말입니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투항하라고요. 저들의 검을 피해 달아나는 것보다는 저들에게 투항하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설마 포로를 죽이겠습니까. 게다가 이쪽에는 저 무녀가 있기 때문에 저들은 공자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돌맨의 대답은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사 작용 같은 것이었다. 궤헤른의 말을 이해하기엔 그의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돌맨은 어렴풋하 게나마 이해했고 따라서 울음도 조금씩 멎어갔다. 궤헤른은 힘들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왕 투항할 바에는 후작님의 일을 돕고 나서 투항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탁이니 후작님의 뜻을 잘 이해하시고 받드셔서 저들을 멀리 이끌 어가 주십시오. 공자님께서 그 일을 해내셔야지만 후작님께서도 자유롭게 공자님을 구출할 방도를 세울 수 있게 되십니다.”
“그, 그래요. 알겠어요, 궤헤른.”
돌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궤헤른은 까무러칠 것 같은 상처의 고통 속에서도 돌맨에게 몇 가지 행동 요령을 알려준 다음 밖으로 나왔다.
문 밖으로 걸어나온 궤헤른은 문 옆에 기대서 있는 후작을 보았다.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복도의 맞은편 벽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 은 먼저 문을 닫고 나서 낮게 말했다.
“후작님?”
후작은 여전히 맞은편 벽이 참 볼 만하게 생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게 애 보는 능력도 있는 줄은 몰랐군.”
궤헤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이서스에 있을 때 배우게 된 것입니다. 후작님께서는 모아들이신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지요.”
후작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던 후작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네가 한 말, 너는 믿나?”
“반만 믿습니다. 공자님은 안전하겠지요. 후작님의 핏줄까지도 증오하는 그란이지만 공자님이 양자인 것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구출하겠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궤헤른은 별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징징거리는 기술 외에 아무 능력도 가지지 못한 어린애는 후작의 표현대 로라면 ‘어떤 원동력도 되지 못하는 버러지다. 그리고 이제 돌맨은 후작에 의해 의미를 가지게 된 양성 원동력이다. 돌맨 할슈타일은 후작의 도주를 돕는 것, 그리고 그란과 운차이 일행으로 하여금 미와 맞바꿀 수 있는 인질이 생겼다는 오해를 주는 것으로서 그 효용을 끝내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믿지 않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군.”
“저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이유가 하나 더 느셨군요.”
후작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궤헤른은 고소를 머금은 채 그 등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공자에게 시키셨습니다. 아십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하려 드는 후작님의 결심이 제게 의해 이용당 한다는 것을. 제가 쓸모가 있는 동안은, 후작님은 저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란과 운차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십니다.”
“무슨 말을 하고픈 거지.”
“그냥 아쉬워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300명의 인원이 있었을 때 저들에게 휴식을 선물했더라면 오늘 같이 골치 아픈 밤은 맞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 을까 하는.”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간 후작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후작의 목소리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날 비난하는 건가.”
“글쎄요………….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풀고 그 재산을 가지게 되면, 그래서 다시 부하들을 모으고 재기의 기틀을 다지게 되면, 제일 먼저 할 일 하나를 제안드리고 싶은 겁니다.”
“뭐지.”
궤헤른은 어제 낮, 후작이 ‘나는 녀석들이 좋아.’라고 말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 모진 고통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 밖에 냈다.
“녀석들을 죽이는 겁니다.”
파는 고민했다. 반갑게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놀란 표정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불안에 떨다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맞이할 것인가? 고민을 끝 내지 못한 파는 결국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쳉은 문을 열자마자 곧장 파를 지나쳐 자신의 짐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에 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다. “어, 쳉……?” 쳉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온 파하스는 파의 모습을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파 양. 놀랐겠군요.”
“예. 자다가 일어나보니 두 분이 보이질 않아서…………. 어디 갔다 오셨어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느 걸 먼저 듣겠냐고 물어볼 수는 없겠군요. 좋은 소식부터 말해야 이야기가 되니까.”
“예? 어, 무슨 이야기인데요?”
“파 양의 언니 미 양을 찾았습니다.”
파는 기뻐해야 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파하스뿐만 아니라 짐을 챙기고 있던 쳉까지도 놀랄 정도로 기뻐해 버렸다. 그녀는 파하스의 어깨를 쥐고 팔 짝팔짝 뛰면서 당신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나의 천사요, 행복의 메신저라는 식의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어대었던 것이다. 그래서 파하스는 나쁜 소식 을 말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죄의식에 가까운 면구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에, 그 언니분이 괴한들에 의해 납치당했습니다.”
“예에? 아니, 뭐라고요!”
파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가 슬픔을 못 이겨 기절할 거라고 제멋대로 판단한 파하스는 재빨리 파를 부축하려는 자세를 취했고, 그래서 상당한 낭 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파는 기절하기는커녕 파하스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파하스! 괴한이라니! 허튼 소리 하지 말아요! 언니는 그냥 양치기라고요. 복면 괴한 같은 것이 따라다닐 사람이 아니 에요!”
“아, 아, 저도 이해 못할 일이기는 한데, 에, 좀 놔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때 자신의 배낭뿐만 아니라 파의 배낭까지 어깨에 둘러멘 쳉이 걸어왔다. 쳉은 간략하게 말했다.
“가면서 설명하지.”
“어딜 가는데? 응?”
“미의 동행이었던 사람들에게.”
“아, 그래? 어서 가!”
세 사람은 말을 이끌고 운차이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후라마의 펍으로 갔다. 길을 걸어가면서 쳉은 그 동안의 상황에 대해 그답게 설명했다.
“미는 스카니아를 벗어나자마자 이상한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이상한 일행의 적에게 납치당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파하스가 설명을 맡게 되었다.
“예. 파양.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파양의 언니분 미 양은 고향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모종의 임무를 띠고 헤게모니아에 들어온 바이서스의 비밀 요 원들과 동행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황야의 우정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동행이었을 것입니다만, 역시 고슴도치와 놀면 바늘에 찔리는 법 이지요. 바이서스의 비밀 요원들의 목적은 그들 나라에서 도망친 반역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역자의 무리가 거꾸로 일행을 급 습, 미 양을 납치한 것입니다.”
“예? 반역자요? 비밀 요원이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인생이 이야기보다도 더 신기할 때가 있다는 말에 대한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비밀 요원들을 보시면 놀랄 겁니다. 낮에 들렀던 펍 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려 했던 전사를 기억합니까?”
“예. 그럼 그 사람이…………, 아, 그럼 설마!”
“예. 통탄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바로 그때 미 양은 그 펍의 2층에 계셨습니다. 아아, 이건 정말이지 이야기보다 더 신기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 는 지독한 악운이군요.”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파하스는 다시 한번 파를 부축하려는 자세를 취했고 이번엔 성공했다. 파는 파하스의 몸짓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파는 두 손으 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고 파하스는 그럴 수 없이 정성스러운 태도로 파를 부축했다. 쳉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지는 않았 다. 쳉은 이 도시를, 어느 내장 속에 미를 감추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 괴물 같은 도시의 밤을 바라보았다. 곧 후라마의 펍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왔나.’
커튼 틈을 통해 후라마의 펍에 도착한 쳉과 파, 그리고 파하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돌맨은 이를 악물었다. 방 안의 불은 모두 꺼두었고 배낭과 무장도 모두 갖춘 상태였다. 손에는 여전히 미의 셔츠를 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도망가야겠군. 냄새를 풍기며 달아나는 자신의 입장이 사냥개들에게 쫓기는 여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돌맨은 서글퍼졌다.
문득 돌맨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방문 쪽을 한번 바라본 돌맨은 셔츠를 들어올려 거기에 얼굴 을 묻었다. 어두운 밤의 어두운 방 안에서, 양부에게 버림받은 소년은 그렇게 셔츠에 코를 파묻은 채 오랫동안 서 있었다. 커튼 틈으로 스며들어 온 달빛이 소년의 볼에 세로로 흰 선을 긋고 있었다.
잠시 후 셔츠에서 얼굴을 뗀 돌맨은 이를 악물고 공포를 몰아내면서 방을 나섰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고 발디딤은 갈팡질팡이었지만 돌맨은 가 까스로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오늘 밤, 납치에 들어가기 앞서 가이버와 사무엘은 여관 안을 깨끗이 ‘청소’했고 돌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홀 안은 사물의 윤곽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홀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던 여관 주인장은 계단으로 내려온 돌맨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지만 돌맨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채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간 틀림없이 주저앉고 말았을 테니 까. 하지만 홀 바닥에 있을 또 하나의 장애물을 피하기에는 안이 너무 어두웠다. 분명 이 근처 어디에 있을 텐데. 돌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을 조심 스럽게 뻗었다. 돌맨의 예상은 정확했고 딱딱하면서도 뭉클한 기묘한 감각이 발끝에 닿는 순간 돌맨은 고환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틀어 막았다. 고함을 질러서는 안 돼! 돌맨은 머릿속으로 크기를 가늠한 다음 눈을 감은 채 하녀의 시체를 훌쩍 뛰어넘었다. 쿵. 작은 소리였지만 돌맨은 자신의 발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