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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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입니다. 헬턴트 공?”
“아, 예.”
켄턴으로 보낸 샌슨의 일과 레브네인 호수로 파견한 일행에 대한 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칼은 간수장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용모 만으로도 죄수들의 탈옥 의지를 상당히 저지시키고 있을 것만 같이 생긴 간수장은 그런 칼을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창살은 튼튼하고 간수들은 민첩합니다. 죄수들에 대해 겁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칼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수의 추측에 대해 별말은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여주었다. 간수장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벽에 붙어 있는 횃불걸이에 건 다음 한 손으로는 검을 뽑아들고 다른 손으로는 따라온 간수들에게 간단한 손짓을 보내었다. 칼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 운데 간수들은 창살 좌우로 달려가서는 손에 든 핼버드로 창살을 겨냥했다. 만일 죄수가 뛰쳐나오면 곧장 공격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칼은 어리 둥절해져 버렸다.
“이런 엄중한 준비가 필요합니까? 문을 여는 것도 아닌데?”
간수장은 결코 자신이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냉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 층은 좀 특별해서요. 규칙입니다.”
“아, 예. 알았습니다.”
간수들이 제자리에 서자 간수장은 손에 든 검으로 창살을 몇 번 두드렸다. 탕탕탕! 지하의 공간인데다가 감옥의 좁은 통로였기에 칼은 귀를 막고 싶 어졌다. 그건 창살 안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 듯, 감방 안쪽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례한 녀석들…………. 개돼지를 부르는 예법으로 사람을 부르는구나.”
칼은 간수장이 이 말에 대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간수장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간수장은 좌우에 도열한 간수들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쏘 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죄수가 저렇게 뻣뻣한 거야? 네놈들이 간수냐, 시종이냐?”
간수들은 이 꾸지람을 아무 변명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억울한 심사가 잘 드러나 있었다. 기어코 간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간수장님. 저 안의 녀석은 인간 같지가 않습니다요. 너무 삭막합니다. 에,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눈만 바라보면 기운이 쫙 빠지고…………”
“뭐야? 너 지금 죄수 이야기 하는 거야, 작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뭐, 눈을 바라보면 기운이 빠져?”
“아, 저,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요. 꼭 무슨 몹쓸 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까닭 없이 떨리고……………”
간수장의 표정은 이제 한심스럽다는 것을 넘어서 분노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칼이 나섰다.
“아, 그럴게요. 그건 살기라는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헬턴트 공?”
칼은 그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그때 감방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뭐지? 헬턴트 공이라고 했나?”
간수들은 잠잠해졌고 칼은 앞으로 한 발 걸어갔다. 간수장이 당황해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절대로 창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칼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우기지는 않았다. 그는 창살에서 충분히 떨어진 채 감방 안의 어둠을 향해 말했다.
“그렇습니다.”
감방 안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간수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핼버드를 꼬나쥐었다. 아마도 칼의 얼굴이 잘 보이는 각도로 몸을 옮긴 듯, 잠시 후 감방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칼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Djipenian harll raro. Ethkyzer eattla un di hlow? Nen djipenian et’ likhiw Ali.”
간수장과 간수들은 얼이 빠져버렸다. 간수들의 손에 들린 핼버드가 아래로 처지는 것을 본 간수장은 황급히 정신을 차려 눈짓을 보내었고 그러자 간 수들 역시 당황하며 다시 핼버드를 단단히 쥐어 올렸다. 감방 안에서 조금 늦다 싶게 대답이 나왔다.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가 보군. 하지만 바이서스 개의 입으로 그 아름다운 말이 들먹여지는 것은 모욕이다. 그러니 발음도 시원찮은 그 말 그만두도록.”
칼은 화도 내지 않고 씩 웃었다.
“역시 발음이 별로지요? 알리 공. 당신의 바이서스 어는 꽤 훌륭하군요.”
전선 시찰 중 바이서스 레인저들의 활약에 의해 납치되었던 전 자이펀 내무대신 알리는 무응답으로 칼의 말에 대답했다. 칼은 싫은 내색도 없이 상 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황이 좀 어떠십니까?”
“그게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 묻는 질문인가. 역시 미련한 바이서스 땅개….”
“아, 그런가요. 그럼 다른 걸 물어볼까요. 어떤 취향의 밧줄을 좋아하십니까?”
“밧줄?”
“교수대는 참형이나 극약형과 달라서 꽤 오랫동안 그 고객에게 봉사합니다. 특히 당신은 국사범으로 썩은 내를 풍기게 될 때까지 매달려 있게 될걸 요. 그토록 오랫동안 목에 걸고 계실 밧줄이니 아무래도 착용감이 좋은 것이 낫겠지요?”
칼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알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간수장과 간수들은 꽤나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칼이 알리의 콧대를 꺾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알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튼튼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끊어지면 자네나 나나 곤란하니까. 내 알기로 바이서스에서는 교수대 밧줄이 끊어져 죄수가 살아나면 그 형이 취소된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샤스의 은총이라고 하지요.”
“그건 달갑잖군. 썩은 고기를 탐식하는 새매의 신 따위가 내려준 은총은 사양하지.”
칼은 빙긋 웃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이 녀석은 다루기가 어렵군. 아마도 칼이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는 것쯤은 벌써 짐작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나가볼까.
“거래하시겠습니까?”
“거래라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화법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제가 뭔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부탁은 솔직하게 한다라. 좋은 태도로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은……”
그 직후, 칼은 옆에서 듣고 있는 간수장과 간수들을 의식해서 자이펀 어로 바꿔 말했다. 그리고 알리는 쇠사슬을 상징으로 삼는 신의 권능이 말해진 것을 깨달았다. 자유라고? 알리는 고집스럽게 바이서스 어로 말했다.
“그게 가능한가? 네가 무엇이기에?”
“가능합니다.”
“보증은?”
“없습니다.”
칼은 짤막하고 냉혹하게 대답한 다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다시 말했다.
“당신의 경우 특별히 손해 볼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손해가 많을 수도 있지.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대가를 보건대, 내게 원하는 것이 상당할 거라고 짐작되는군.”
“아,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풍문이니까요.”
“풍문이라니?”
“그게 말입니다…………, 당신네 나라는 참 복잡해서요. 일반 포로들을 아무리 족쳐봐야 명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모르더라고요. 특히나 명가의 잘 알 려지지 않은 풍문 같은 것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뭔가를 알고 싶어 할 때는 역시 명가의 일원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구조더군요. 반면, 명가의 일 원은 같은 명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잘 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알리는 칼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네가 명가의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칼은 다시 시간을 좀 두었다. 그리고 알리가 충분히 초조해졌을 거라고 판단되었을 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신차이 발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알리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신차이 발탄. 그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다. 그리고 세월의 힘 앞에 조금씩 둔화되고 있긴 하지만 하탄의 궁전에서 단련된 그의 기억력으로 알리는 신차이의 모습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게 언제더라.
선주 연합 초청 연회였을 것이다. 오가는 귓속말들과 짤막짤막한 웃음, 어디서든 원하면 나타나는, 그리고 어디에든 내려놓기만 하면 조용히 사라지 는 술잔들과 파이프. 노예들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낮춰두는 조명은 연회장 곳곳에 신비로운 암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연회 에는 바이서스나 헤게모니아에서 벌어지는 무도회나 파티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함이나 요란함은 없다. 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펀의 연회 에서는 권위나 도덕 의식으로 자신을 둘러싸서 현격히 떨어지는 정열을 감추려 드는 늙은이도 없고, 부족한 재산과 낮은 지위를 지적받기 싫어 자신 의 남성다움을 비정상적으로 과장하는 풋내 나는 젊은이도 없다. 벽이 없이 기둥만으로 둘러싸인 테라스에 앉아서 멀리서 들려오는 밤바다의 철썩임 을 들으며, 조용히 술을 마시고 조용히 파이프를 피우며 그 틈틈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이펀식 연회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런 조용한 연회에서도 ‘정말 말수가 적은 젊은이군.’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입을 완강히 닫고 있는 젊은이가 있어 알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젊은이는 한구석에 정좌한 채 조용히 파이프만 피우고 있었는데 그 위치라는 것이 기묘했다. 기둥 하나를 희한하게 이용하여 앉은 젊은 이 주위에는 어떤 사람도 편하게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젊은이 주위에 앉으려고 들었다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을 상당히 방해하게 되는 것 이었다. 그래서 알리는 환담을 나누고 있던 교육 대신 가다론에게 간단한 눈짓을 보낸 다음 그 젊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음장 같은 젊은이군요.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만일 가다론이 ‘잘 모르겠는데.’ 등의 말을 했다면 알리는 그 다음날 해가 두 개 떠오른다 해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가다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신차이 선장이오.”
“선장이라고요?”
“그렇소. 이골 비겐트 선장의 후임으로 레드 서펀트의 선장이 된 자요. 아마도 비겐트 가문에서 데리고 온 모양인데. 하지만 저렇게 낙타 시장의 소 처럼 앉아 있어서야 그를 데리고 온 이골 선장의 정성이 아무 값을 받지 못하겠군.”
알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나라의 연회에 비한다면 너무 조용해서 무미건조할 지경이긴 하지만 자이펀의 연회도 새로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 들에게 인맥을 넓히고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와서 저렇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 이 출세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우선 그의 후원자에게 모욕이 되는 행동이다. 그런데 왜 이골 선장은 가만히 있는 걸까?
“이골 선장이 좀 타일러야 될 텐데요. 왜 저렇게 내버려두는 건지.”
알리의 이 당연한 의문은 가다론 교육 대신을 웃음짓게 만들었다.
“핫하! 옳은 말이오. 하지만 이골 선장이 저 친구를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
“예?”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도 저 젊은이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했소. 아니, 거꾸로 저 젊은이가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의 버릇을 고쳐줬지.”
알리는 잠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조금 후 알리는 매우 유명한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아니, 그럼 저 젊은이가 이제리스 해협의 서펀트를 죽였다는 그 일등 항해사입니까?”
“일등 항해사였지. 지금은 가진 용기의 절반쯤은 수평선 아래 빠뜨리고 다시는 배에 오를 생각을 못하게 된 이골 선장의 후임 선장이 되었소만.”
알리는 감탄한 눈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런 젊은이라면 구태여 자신을 내세울 필요도 없겠구나. 오히려 조금이라도 서툴게 말을 꺼내었다간 틀림없이 그의 유명한 모험이 대화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될 테고, 자신의 모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하게 되면 틀림없이 자만심에 차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저 젊은이는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군. 알리는 대충 그런 견해를 가다론 교육 대신에게 말했고, 그 대가로 푸짐한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흐음. 사실과는 조금의 연관성도 없는 추리올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젊은이가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까닭은 겸손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 일 거요. 특히 저자 앞에서는.”
가다론은 그렇게 말하며 턱을 살짝 움직였다. 알아보기 힘든 동작이었지만 가다론과 오랜 세월 동안 사귀어온 알리는 그 몸짓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었다. 신차이 선장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즐겁게 술잔을 비우며 담소하고 있는 한 명가의 인물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알 리는 그가 지목되는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로발 라이브스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건 선주 연합의 사람들을 주빈으로 하는 연회이니 그가 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희한하군. 이골 선장도 퍽이나 난감할 게요.”
“그가 저 신차이 군과 좋지 못한 관계라도 됩니까?”
“좋지 못한 관계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군요. 신차이의 아버지거든.”
“예?”
그날 저녁, 알리는 조금씩 취해 가는 가다론을 잘 구슬러가며 신차이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운의 젊은이와 몇 마디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차이는 예의바르게 대화에 임해 왔고, 그와 몇 마디를 나눠본 알리는 그가 보여주는 품격과 그의 비극적인 과 거사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어리둥절했다.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무릇 명가의 수장이자 하탄의 궁전에 출입하는 자는 모든 배우고자 하는 성실한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시간을 할애해야 되는 법, 사회 초년생인 신차이를 상대로 알리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또한 법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알리는 신차이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해석할 만한 단서를 얻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 며칠 후 항해를 떠나버렸고 그 자신은 이렇게 적국에 억류당하게 된 것이다.
알리는 긴 상념에서 깨어나 칼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안다.”
“잘된 일이군요.”
“그런데 그를 알고 싶어 하는 너의 이유는 모르겠다.”
“지적 호기심에서’라고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네가 알 필요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알리는 칼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차이 발탄. 그 젊은이에 대한 정보가 바이서스 수뇌부의 인물에 게 소중할 까닭이 뭔가. 포섭? 글쎄. 그렇게까지 낙타 시장의 소처럼 굴던 젊은이가 포섭할 만한 위치에 올랐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가 아는 정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차이 선장의 과거사가 도대체 자이펀·바이서스 전쟁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칼은 침묵의 시간을 정확하게 재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군. 좋아.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지. 칼은 손을 들어 감방 안쪽을 향해 흔들어주었다.
“생각해 보고, 결정하십시오. 급하게 판단하면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지요. 당신에게 시간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좋은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알리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가는 칼의 등을 바라보았다.
알리와 회담을 마친 칼이 부리나케 그랜드스톰으로 찾아왔을 때 레브네인 호수로 떠났던 특사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수련사들의 안내를 받아 찾 아간 방에서 조금 전에 떠났던 일행들이 그대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는 칼은 조금 당황해 버렸다.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다니.
“빠르군요.”
아프나이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나의 힘은 강력하지요.”
“예…………, 어떻게 되었습니까. 페어리퀸은 만나뵈었습니까?”
“예. 만나뵙고 우리들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언을 구했지요.”
칼은 반가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어떤 대답을 주셨습니까?”
엑셀핸드가 심통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아주 골치 아픈 대답을 주었네.”
“예? 무슨 말씀인지?”
엑셀핸드는 칼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아일페사스를 돌아보았다.
“너 그거 다 외우지?”
“물론이지. 들어봐, 칼,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일행들은 칼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오면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당연히 우리도 모른다.’라고 대답해 주기 위해 대기하 고 있었다. 하지만 칼은 황당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대신 칼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 다.
“엉뚱한 곳에 다녀오신 거 아닙니까?”
“응? 무슨 말인가?”
“그 이야기는………… 저기 헤게모니아의 어느 도시에 전해 오는 유명한 수수께끼 아닙니까.”
“뭐라고?”
일행들은 당황해 버렸다. 칼이 이 문제에 대해 아는 척한다는 상황은 예기치 못했기 때문이다. 칼은 당황하는 일행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고는 미 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그러니까 분명히 헤게모니아에 전해져 내려오는 수수께끼일 겁니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자에겐 상상할 수 없이 막대한 재산이 주어진다지 요. 하지만 문제를 풀겠다고 자원해 놓고 풀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된다는, 뭐 그런 살벌한 조건이 붙어 있는 문제일 겁니다. 그래서 유명 하지요.”
“목숨을 요구할 만한 재산이라 굉장한가 보군요. 얼마나 많은 재산인데요?”
“침버 씨……,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아, 하하. 예. 그렇기는 하지요.”
“제레인트는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않는가. 웬만하면 말해 주지 그래?”
“아인델프 님…………!”
칼이 제레인트와 엑셀핸드를 매우 험하게 노려보는 동안 아프나이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그런 문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문제는 틀림없군요. 다레니안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다레니안께서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하지만 그 수수께끼가 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 문제에 대해 좀더 아시는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아마 어떤 괴팍한 노인의 유언에 따라 생긴 문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모험가들이나 상회 쪽에 알아보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헤게모니아로 가서 그 문제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는 걸까요?”
“음. 다레니안께서 정말 그 이상의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이상한데. 칼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매우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레니안이 왜 그런 빈약한 조언만 한 것일까. 도와줄 의도가 있다면 더 상세 하게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와줄 의도가 없다면 아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이야기는 뭐지. 문득 칼은 이루 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아무런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칼의 시선을 느끼고는 칼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아무런 의지도,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검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칼은 거의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다레니안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세레니얼 양?”
“왜 그러시다니요?”
“도와주실 의도가 있다면 더 상세하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글쎄요. 의도와 능력이 항상 일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럴까요.”
칼은 이루릴의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 이상은 다레니안도 모르기 때문이라. 흐음. 하지만 그 추측대로라면, 이 상황은 수도원 담을 넘듯이 차원의 벽을 뛰어넘는 페어리퀸에게까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말이 된다. 페어리퀸도 그저 추측만이 가능한 어려운 문제를 과연 우리가 풀 수 있을까.
그때 에델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들로 하여금 수도로 돌아오게 하신 테페리의 뜻은 이것입니까?”
제레인트는 당황해서 에델린을 돌아보았다.
“예? 이것이라니요?”
“테페리께서는 제레인트로 하여금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은 이 문제를 칼에게 말씀드려 그것이 이미 존재하 는 문제라는 것을 확인받기 위함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만.”
“아……, 그렇겠군요. 예. 그럴 겁니다.”
“예. 테페리의 인도에 의해 우리들은 이제 그 문제가 헤게모니아의 어떤 곳에 전해 내려오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귀결로 본다면 우리는 그곳으로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만.”
“그렇군요. 음. 다른 의견 가지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다른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도무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다레니안이 말한 문제는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에 다 른 의견 같은 것이 나올 까닭이 없는 것이다. 칼은 조금 고민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 문제가 정확히 헤게모니아의 어디에 전해 내려오는 문제인지를 조사하고 그곳까지의 여행 수단을 준비하겠습니다. 음. 침버 씨와 에델린 양이 계신 데다가 세레니얼 양과 엑셀핸드 님도 계시니 여러분들의 국경 통과에는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일단 준비가 갖 춰질 때까지 쉬고 계시도록 하십시오.”
엑셀핸드는 머리에 난 투구 자국을 좀 긁적이다가 말했다.
“자네는 계속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텐가?”
“예.”
“흐음. 자네가 같이 간다면 좋을 텐데. 우리의 저번 모험 땐 자네의 도움이 꽤 컸지.”
칼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제거한 모험 때 아일페사스를 제외한 나머지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한 동료였다. 엑셀핸드 역시 잠시 그때의 추억에 잠겼다가 말했다.
“왜 같이 가지 않겠다는 거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서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내가 보아온 자네 성격대로라면 따라오 지 말라고 해도 부득부득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군.”
“글쎄요. 드라이어드의 노랫소리나 님프의 지저귐이 더 이상 저를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칼의 대답에 엑셀핸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이루릴이 고요하게 말했다.
“그건 모험심을 잃은 모험가를 나타내는 오랜 고어로군요.”
“예. 확대 해석으로 처자식이 생겨버린 젊은이를 나타내기도 하지요.”
칼의 농담에 모두들 피식피식 웃었지만 엑셀핸드는 웃지 않았다.
“자네 결혼하나?”
“예? 아니, 천만에요.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나도 농담한 거야. 자넨 날 뭘로 보는 건가.”
“아하, 이런. 죄송합니다. 음…………,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저희 종족은 짧은 수명 때문에 모든 것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모험심도 충족시키며 동시에 안락한 가정을 만들기는 어렵듯이.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면서 동시에 가을에 거둬들일 곡식을 재배할 수는 없듯이.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엑셀핸드는 잠깐 고민한 다음 꽤나 재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헤게모니아로 달려가는 대신 여기서 자네가 하려는 것은 뭔가?”
칼은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엑셀핸드가 저렇게까지 재치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칼의 고민은 그의 뱃속을 이들 앞 에 까뒤집어도 되는가 하는 고민이었다. 어쨌든, 아무리 친구라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법이니까.
칼은 거짓말을 해야 될 때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태여 양심의 가책이 적은 방식을 선택하느라 골치 아파하지도 않았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저를 믿어달라는 말 외엔 없습니다.”
이 대답은 대부분의 일행들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칼은 그 후로 오랫동안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