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5장 거짓된사랑의 진실(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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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란의 앞바다에서는 드문 아침 안개가 수면 위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신차이는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졸란 앞바다의 뱃길에서라면 눈 감고도 배를 몰아갈 조타수가 있으니 배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차 이가 화를 내는 까닭은 출항일의 안개는 불길하다는 속신 때문이었다.
신차이 선장은 뱃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흉조와 액에 대한 속신들을 풍부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식을 넓히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그의 부하들은 조금밖에 알고 있지 못했으며, 그것을 완강하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이시도마저도 찌푸린 표정으로 선장을 돌아 보았다. 출항일을 하루 연기하면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모양인지 숨 쉬는 것이 퍽 불편해 보였다.
바다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선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흐느적거렸다. 온갖 종류의 바닷바람에 단련된 선원들조차도 안개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을 봤다고 소곤거리곤 했다.
“젠장. 화이트웨일이 침몰할 때 말이야, 우리 할아버지는 악마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서는 화이트웨일의 메인마스트에 부적을 새기고 가는 것을 보 셨다고.”
“아, 그래. 디키누스도 그랬어. 녀석은 메인마스트 위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웃음소리도 들었다던데.”
“디키누스는 얼간이야. 그러니까 빠져 죽었지.”
“하지만 녀석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앞갑판 선원들 사이의 소곤거림은 이제 위험한 수준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마땅히 그것을 진정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이시도마저도 꿈결처럼 흐르 는 안개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차이는 그런 이시도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이시도 군, 보고하게.”
“예? 아아, 예. 선원들은 모두 승선 완료했습니다. 출항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데, 저………….”
신차이는 아무 말 없이 이시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뱃전에 대었다. 이시도는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고하신 하탄을 대신하여 선언한다. 금일 일출을 기점으로 레드 서펀트의 모든 것은 너 신차이 발탄에게 귀속된다.”
자이펀의 모든 것은 하탄의 소유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으니, 항해중인 배에 관해서만은 모든 것이 그 선장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하탄 자신이라도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선장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물론 순전히 논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신차이는 몸을 일으켰고 잠시 하탄을 대행하던 이시도는 다시 일등 항해사로 돌아갔다. 이제 귀속의 선언도 끝난 이상 이시도는 신차이에 대해 어떤 종류이건 반론을 말해 보거나 항명을 할 입장이 못 되었다.
“출항하지.”
신차이는 그 말만 남기고 선장실로 돌아갔다. 이시도는 다시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고 갑판의 지휘를 맡았다. 이시도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는 선원 들은 공연한 투정이나 반항으로 그를 괴롭히는 대신 비슷한 한숨을 내쉬고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닻을 끌어올려라!”
“닻을 끌어올려라!”
해저에 가라앉았던 닻이 선원들의 힘찬 팔에 끌어올려지며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앵커 격납 완료를 외치는 갑판장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이시도 는 돛을 펼 것을 지시했다. 레드 서펀트의 거체가 대해원을 향해 육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선원들은 졸란을 향해 크게 만세 삼창을 외친 다음 무 심하게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닳고 닳은 뱃사람들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닐림의 프리스트 치터리 무스는 배의 출항과 그에 따라 멀어져가는 항구를 두 눈으로 직접 보 기 위해 갑판에 나와 있었다. 말없는 육전 대원들은 치터리의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치터리는 선원들이 멀어져가는 항구 의 모습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초보 항해자였고, 그래서 멀어져가는 항구의 모습을 보며 왠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안개의 꿈틀거림 때문에 졸란 시의 익숙한 모습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치터리를 더욱 아쉽게 만들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까, 치터리?”
갑자기 들려온 발랄한 목소리에 치터리는 고개를 돌렸다. 캡스턴을 돌리는 선원들을 독려하던 이시도가 말을 던져온 것이다. 치터리는 고개를 끄덕 였다.
“예. 기분이 참 묘하군요.”
“당신 생각을 맞춰볼까요. 이대로 떠나가서 침몰해 버린다면 고향의 그 누구도 당신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 겁니 다. 흔히들 배를 감옥에 비교하곤 하지만 사실 배는 감옥보다 더하지요. 감옥에서는 최소한 죽으면 바깥사람에게 알려지니까. 껄껄껄.”
이시도는 그것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지만 치터리는 웃고 싶은 기분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시도의 추측은 정확했다. 치터리는 이 제 자신이 알고 있고 교류해 왔던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 계인 바다이다. 그곳에는 길도 없고 여관도 없으며 방문할 친구의 집도 없다. 치터리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시도는 그런 치터리의 얼굴을 심술궂게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유언장 작성하셨습니까?”
“유언장이라니요?”
“이 배가 죽으면 당신은 바로 죽습니다. 남길 말이 있으면 적어두는 것도 좋겠지요.”
“적어둬 봐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한다는 말입니까.”
“선원들이 애호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요. 어떤 친구들은 코코넛에 유언을 새기기도 합니다. 유리병에 넣어두는 방법도 있지요. 그림 오세니아께서 도와주시면 바다에 던진 유언장은 친절한 해류의 도움을 받아 당신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치터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육전 대원 중 한 명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 관습이 있었나요. 하지만 제 유언은 닐림께서 들으실 테니 상관없습니다.”
이시도는 그저 씩 웃었다. ‘두고 봅시다’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리고 사흘 후, 치터리는 유언장의 문구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유언장이라도 새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독하게 무료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배의 흔들림(치터리는 이런 것이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밤새 흔들리는 선상의 수면은 치터리를 항상 멍한 상태에 있게 했다. 깨어나 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의 구별이 점점 불확실해져 가는 데 치터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면 다음 식사까지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치터리는 식사 시간을 일부러 길게 잡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배운 유일한 기술이었다. ‘지루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수줍어하는 선원 하나를 붙잡고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 묶는 법을 배우기 도 했으며, 항법사를 졸라서 육분의 보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배가 침몰했을 때, 주인공은 바다에 떠다니는 판재들을 묶고 항법사에게 배운 육분의 보는 법을 이용하여 거친 표류 생활을 헤쳐 나갔다………..’ 자이펀에는 항해 소설이 많았고 치터리 역시 그런 것을 충분히 읽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겪 는 선상 생활은 항해 소설과 비슷한 면이 하나도 없었다. 밧줄 묶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선원들은 그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육분의 보 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항법사는 벌컥 화를 냈다.
그 다음부터 치터리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실천할 마음이 거의 없어져버렸다. 묵상과 기도에 빠져들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 다. 고요한 바다 위의 공간은 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장소일 거라고 생각했던 치터리는 좌절을 맛보았다. 바다는 사막과도 다르고 산과도 달랐다. 바 다는 바다다. 거기에서는 신의 목소리가 가장 멀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치터리는 멍한 정신 속에서 ‘유언장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그 다음으로는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죽으면? 죽으면 그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빚갚음이나 기여는 끝나는 것이다. 죽은 이상 이 세계와는 아 무 관련이 없는 셈이고, 아무 관련도 없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터리는 유언장을 포기하고 그 대신 신차이 선장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들어오시오.”
신차이 선장은 항해가 시작되고 나서 선장실을 거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치터리가 없는 시간에만 갑판에 나오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치터 리는 선장실 밖에 있는 신차이를 보지 못했다. 선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오래간만입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라고 인사하고픈 충동을 느낄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차이 선장은 사방에 서류와 해도 비슷한 것을 던져두고는 그 가운데 앉아 있었다. 치터리는 잠시 홀린 표정으로 해도를 바라보다가 앉을 만한 자 리를 찾아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뭐라고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치터리를 향해, 신차이 선장은 단조롭게 말했다.
“육전 대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들은 자신의 선실에 있습니다. 더 이상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이 좁은 배 안에서야 어디 있더라도 고함만 지르면 곧장 찾아낼 수 있는데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것은 좀 우습지 않겠습니까.”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해도 한 장을 들어올렸다. 치터리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만 히 앉아 있기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건 뭔가요?”
“해도입니다. 동북 항로 쪽은 별로 가보질 않아서 많이 봐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 음…………, 선장님, 익숙한 항해자로써 신출내기 뱃사람에게 조언 좀 하시지 않겠습니까?”
신차이는 예절바른 태도로 해도를 내려놓고는 옆에 치워두었던 파이프 걸이에서 파이프 하나를 집어들었다.
“태우십니까?”
“아니오.”
“술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가벼운 멀미 기운이 있어서.”
신차이는 파이프를 채워 입에 무는 것으로써 자신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치터리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갖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싯돌을 이용 하여 불을 붙인 신차이는 먼저 담배 연기를 조용히 뿜어낸 다음 말했다.
“어떤 조언이 필요합니까.”
“조언이 아니라, 명령이라도 괜찮겠습니다. 뭔가 할 일을 좀 일러주지 않겠습니까?”
신차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자유의 프리스트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합니까?”
“닐림에 대해 토론하고 싶으신 겁니까? 선장님, 저희들은 쇠사슬과 자유의 닐림이라고 부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규제하 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는 아닙니다. 스스로 할 일을 찾는 것이 자유지요.”
“아, 그럼 프리스트께서는 자신의 자유에 따라 할 일을 찾아보고 계시는 것이군요. 하지만 이 세계는 좁습니다. 좁은 만큼 할 일도 별로 없지요. 저 아래로 내려가셔서 펌프라도 움직여보시겠습니까? 설령 당신이 좋다고 해도 제가 그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건 노예나 견습 선원의 일이니까요. 선원들도 하지 않는 일을 배의 손님이신 당신에게 시킨다면 선원들이 저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프리스트님을 위해서 설교 시간을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례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당신으로선 감당할 수도 없는 경쟁자가 있으니 설교 같은 것은 잘 안 될 겁니다.”
“경쟁자요?”
“바다가 있습니다.”
“아…………, 예. 눈 닿는 사방에 신이 계시니, 인간 프리스트의 설교가 과연 선원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어 갈지는 저도 의문이군요.”
신차이는 잠시 선장실 천장에 맴도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결승법이나 육분의 판독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하더군요.”
치터리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선장은 확실히 배 안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 무료한 나머지………….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무례한 일이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선원들도 무료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 물론 그들이 힘든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더군요. 대개의 경우 선 원들은, 에,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빈둥거리고 있지요.”
신차이는 웃음기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치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더군요. 그렇다면 제게 뭘 가르치는 것은 그들로서도 무료함을 달래는 기회가 될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가르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지요?”
“그 이유는 당신이 찾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몇 마디 설명해 드릴 수는 있지만 틀림없이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
“다른 불편 사항은 없습니까?”
“아니오. 좋은 배고, 좋은 항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쯤 동북 항로에 접어드는 겁니까?”
“당장 접어들기는 어렵습니다. 대륙의 동안을 따라 흐르는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이라는 해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해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도와주는 흐름이지요. 이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먼저 연안에서 충분히 멀어져야 합니다.”
“아, 그래서 자꾸만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군요. 저는 이 배가 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컴퍼스를 볼 줄 아십니까?”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심심한 나머지 컴퍼스 옆에서 두어 시간 빈둥거린 적이 있습니다. 신기하게 느껴져서요…… 혹시 왜 컴퍼스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향하는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북극성이 컴퍼스를 끌어들인다고도 말합니다만, 그렇다면 배가 북쪽으로 갈수록 컴퍼스는 하늘을 향해 곤두서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선장은 북해에 컴퍼스를 끌어들이는 거대한 자석의 섬이 있다고도 말하더군요. 그 섬 가까이로 다가가면 배의 금속으로 된 부품들이 모조리 빨려들어 가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던가요.”
하얀 파이프 연기가 어두운 선실을 감도는 가운데 신차이 선장은 뱃사람들 사이에 전하는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몇 마디씩 끊어서 말하는 방 식으로 들려주었다. 배는 파도의 율동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고 치터리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 속에서 파도를 가로지르는 돌고래, 떠다니는 섬, 하늘을 날아와 배의 돛에 구멍을 뚫는 물고기, 선체를 단숨에 뚫어버리는 일각고래의 뿔,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벌거벗은 사이렌, 선원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는 고래의 노랫소리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깊은 바닷속, 햇살마저 변질되는 그 암흑 속에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소리 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느낌. 치터리는 바로 자기 발밑으로 그런 것들이 오가고 있음을 깨달았고, 신비의 정수리를 떠다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위대한 항해자 그림 오 세니아의 이마 위로.
“그것이 선원들을 보통 사람과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것들인가요.”
“그것은 어디의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밤의 수면 위로 떠도는 야광충. 폭풍 속에서 돛대 꼭대기를 요괴스러운 푸른색으로 물들이는 불꽃. 바다도 검고 하늘도 검은 밤, 달빛에 하얗게 물든 배의 항적은 길고 슬프다. 우윳빛으로 흐느적거리는 해파리들. 수면 위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태풍의 징조. 바다표범의 하얀 이빨은 매서운 추위 속에 차게 번득인다. 선원들 중 한 명이 죽을 때, 그 어떤 문상객도 없는 선원의 죽음에 복상하고자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알바트로스의 하얀 날 개. 그리고 극지의 바다 위로 펼쳐진 초월적인 빛깔들의 오로라. 이사의 처녀들은 온 세계의 하늘 위로 그녀들의 아름다운 천을 펼치고 싶어 하지만 이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잊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망각의 불꽃을 바라볼 때 자신을 지키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잊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고요.”
“인간들은 지나온 시절에 감정을 남기고, 그 감정을 쇠사슬로 허리에 묶은 다음 힘겹게 걸어갑니다. 아니면…….”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떠나버리지요.”
“당신의 감정은 뭐지요.”
“버린 것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버렸다고요?”
“뱃사람이 지상에서 끌고 다니던 감정의 닻을 배까지 끌고 들어오면 배가 가라앉으니까요.”
이시도는 더 이상 못 참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시도는 한쪽 눈을 조금 찡그린 채 불량한 태도로 말했다.
“대무 한 판 안 하시려우?”
늙은 선원은 안타까운 탄식을 뱉었지만 다른 선원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몰려들었다. 이시도는 다섯 번째의 수족이나 되는 것처럼 들고 다니는 그 목검을 휙휙 휘두른 다음 어깨에 얹었다. 육전 대원은 말없이 주위를 바라보다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듯한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똑바로 서서 이시도를 마주보았다. 이시도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요, 근질근질하잖습니까? 당신 얼굴에도 표정이라는 게 있으면 훨씬 쉽게 깨달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없으니 이제서야 당신이 심심하다는 것 을 깨달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육전 대원이 입을 열자 선원들은 곧 야유조의 휘파람과 박수를 보냈다.
“저 친구도 입을 말하는 데 쓰는군! 나는 지금까지 먹고 마시는 데만 쓰는 줄 알았지.”
선원들은 대략 이에 해당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장벽을 형성했고 포마스트 아래에 늘어선 채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세 명의 육전 대원들은 이제 선원들을 밀치지 않으면 고립된 동료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시도를 마주하고 있던 육전 대원 역시 자신의 그런 위치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이시도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이시도는 삐딱하게 선 채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하, 그렇잖다면 왜 측심기 던지는 것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단 말이오. 이봐, 모하메드! 자네가 측심기 던질 때 이 형제가 뚫어지게 보지 않던가?” 손에 측심기를 들고 있던 모하메드는 기세 좋게 이시도의 말을 받았다.
“아, 나는 저 친구가 날 사랑하는 줄 알았지요, 이시도 씨.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선원들 사이에서 조금 짓눌린 듯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육전 대원은 여전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했다.
“흥미로워 보여서 보았을 뿐이오.”
“흥미로워 보여서! 그러니까 더 신나는 것을 해보자는 말입니다. 설마 검을 쓸 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검이라면 별 불편 없이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익혔소.”
이 정중한 대답은 난폭한 선원들 사이에서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선원들은 저마다 과장된 목소리로 육전 대원의 말을 반복하며 낄낄거렸다.
“에, 검이라면 별 불편 없이 다룰 수 있소.”
“껄껄껄! 멋지군!” “아주 예의바른데, 흐음. 내가 한 10년 전쯤 저런 식으로 말하는 친구를 봤지.” “이야! 자네 정말 견문이 넓군?”
이시도는 이런 불량스러운 응원 속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거 좋은 일이군요. 육전대식 검법 좀 견식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사이록의 수평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의외로 공정한 선원들은 이번에는 주로 이시도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사이의 수평선! 지겹다, 지겨워!” “아직도 포기 안 했나? 흰머리 얹기 전에 는 만들 수 있는 건가?”
“우우우!” 이런 사나운 응원 속에서 이시도는 기세가 등등해졌다. 이시도는 목검을 얹어둔 어깨를 뒤로 돌리며 반대쪽 어깨를 육전 대원 쪽으로 겨냥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여 어깨 선을 따라 육전 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소?”
육전 대원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인내심은 이만하면 칭송받을 만할 것이다. 키 큰 육전 대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게 목검 하나 가져다주겠습니까?”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고 선원들은 즉각 목검을 갖다 대령했다. 육전 대원은 등에 메고 있던 검을 풀어 소중하게 내려놓고는 선원들이 가져다준 목 검을 몇 번 휘둘렀다. 휙휙! 깨끗한 자세에서 좋은 곡선이 나왔고 매끄러운 소리가 해풍을 갈랐다. 선원들은 심술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때 육전 대원은 갑자기 말했다.
“하나만 더 가져다주겠습니까?”
선원들은 서로 의아한 시선을 맞부딪쳤다. 이시도 역시 뚱한 표정으로 육전 대원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 설마 쌍검을 쓰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건 멋으로라도 못 쓸 검법인데. 나를 깔보는 건가? 선원들은 잠시 후 조금 전보다는 훨씬 덜 열성적인 모습으로 목검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육전 대원은 양손에 목검을 쥐고는 잠시 두 개의 무게를 가늠해 보듯이 양손을 좌우로 곧게 들어올렸다. 그렇게 목검 두 개를 수평으로 들어올린 육전 대 원은 눈을 감고 느린 심호흡을 했다.
“흡!”
잇사이로 날카로운 기합 소리를 내며, 육전 대원은 두 개의 목검을 가위질하듯이 교차시켰다. 빠가각! 하나가 부서지며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 다. 목검은 거의 반토막이 나서 뒹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원들에게서는 탄성이나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광경이기 때문이 다. 두 사람이 서로 온 힘을 다해 부딪친다면 부서질 수도 있는 것이 목검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양쪽 팔로 서로 부딪쳐 목검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가 없는 일이었다. 이시도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오금이 저려오는 자신을 창피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시도는 눈으로 말하겠다는 듯이 커다랗게 뜬 눈으로 육전 대원을 바라보았다.
육전 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아 있는 목검을 들어올렸다.
“이걸 쓰겠습니다. 좀 단단하군요.”
육전 대원은 부서진 목검을 주워올려 치운 뒤 남아 있는 목검을 앞으로 겨냥했다. 이시도는 진검에 겨눠진 기분을 맛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육 전 대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행운을 기원합니다.”
이시도는 갑자기 세상이 이해와 애정으로 가득 찼으면, 서로가 서로를 오로지 또 다른 자신인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 다. 동시에 대무 따위는 악마나 물어갈 저주받은 관습이라는 생각도.
“많이 맞았나.”
“아니오!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제가 누굽니까. 레드 서펀트의 일등 항해사 이시도 사이록입니다. 자이펀 선단에서 제 이름을 모르는 뱃놈이 있 다면 그거 귀머거리입니다. 그까짓 육전 대원의 검 따위, 솜방망이보다도 못하더군요. 음하하하!”
이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맞았군.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이시도는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매우 적나라한 상처들로 가득한 얼굴은 마음먹은 대로 표정을 구사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마음에 입은 상처는 더 아팠다. 이시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차이 선장에게 바싹 다가섰다. 이시도가 갑자기 움직이자 그를 치료하고 있던 노예는 깜짝 놀랐다. 이시 도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격정적으로 외쳤다.
“으흑, 선장님! 그러니까………….”
“선원들 앞에서 그렇게 운신을 못할 정도로 두드려 맞은 것이 창피하단 말이지?”
“예! 그래서……………”
“얼굴을 똑바로 들고 앞갑판에 나가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지?”
“예. 그렇기에………….”
“잠시 동안 뒷갑판 쪽에만 머물 수 있도록 업무를 조정해 달라는 말이지?”
“네에엥.”
“안 돼.”
“제 아버님께서는 사나이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네 아버님의 고견에 찬성하겠어.”
“그런데 저는 지금 울고 싶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예?”
신차이는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자세 그대로 파이프를 집었다. 그러곤 앞에 앉아 노예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이시도를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창피할 테니까 선장실에 와서 조용히 치료를 받도록 해주었더니 이젠 지엄하신 선장님의 방에서 울음을 터뜨리려고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 매가 부족했냐. 육전 대원의 목검이 확실히 솜방망이였던 모양이구나.’ 등의 말을 하는 대신, 신차이는 쿠션에 몸을 파묻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자초한 일이야. 왜 그 옷 입은 야수 같은 친구들과 칼장난을 할 생각을 했지.”
이시도는 이 표현이 썩 마음에 들었다. 옷 입은 야수라. 맞아, 그 녀석들은 짐승이야.
“자식들 하는 짓이 영 마음에 들지 않잖습니까. 손님이면 손님답게 행동해야 손님 대우를 받는 법이지요. 그런데 이 자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 면서 선원들 하는 일을 매섭게 쏘아보곤 한단 말입니다. 오늘 싸움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자식 중의 하나가, 에,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입니다, 그 녀석이 모하메드가 측심기 다루는 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더군요. 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든가 아니면 정중하게 견학을 요청하든가 해야 할 것 아 닙니까? 그런데 이놈은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무섭게 노려보고 있기만 하더라고요. 배 안에서 그런 눈을 한 녀석들이 그렇게 돌아다녀서야 선원들이 어디 마음 놓고 일을 하겠습니까? 선원들도 불만이 많습니다. 레드 서펀트는 자유 무역선이지 군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깊이 물었다가, 다시 가볍게 물었다. 그의 입가에서 담배 연기가 잠시 물결쳤다. 신차이는 파이프 꼭지를 입에서 떼며 이시도를 바라보았다.
“감시한다고?”
“예? 예. 꼭 이 배가 유형선이나 되고 자기들이 간수나 되는 것처럼 굽니다.”
“뭘 묻거나 하지는 않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시도는 어느새 신차이 선장의 차분한 화법을 흉내내며 말하고 있었다. 이시도는 고개마저 조금 낮추며 은근하게 말했다.
“자식들에게 무슨 꿍꿍이 같은 게 있는 것 아닐까요? 이 배를 뺏는다거나…………….”
“반란? 왜, 무엇 때문에.”
반란이라는 말에 이시도를 치료하고 있던 노예의 손이 흔들렸다. 노예는 자신의 서툰 행동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바짝 긴장했지만, 역시 긴장하고 있던 이시도는 눈치채지 못했고 신차이는 나무라지 않았다. 이시도는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혹시 동북 항로에서 실종된 배들은 모두 우리 해군에서 납치한 게 아닐까요? 해군들이 비밀리에 함선을 끌어모아서 는 별동 부대를 만드는 겁니다. 사략 함대일 수도 있고요. 그러면 자이펀 해군이 자이펀 해 내에 있다고 생각하던 일스나 헤게모니아 배들은 기습을 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배도 그런 식으로 납치하려는 거 아닐까요?”
“자네 아버님께서 자네를 부를 때 가장 즐겨 사용하시던 호칭이 뭔가?”
이시도는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은 ‘이 멍청한 녀석아’였다. 신차이는 쿠션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듯이 허리를 주욱 펴고는 한 번 더 이시도 를 괴롭혔다.
“혹, 자네 아버님께서 자네의 상태를 일러주실 때 사용하시던 말씀이 뭔지는 기억하나.”
그 대답은 ‘너는 왜 그 모양이냐?”다. 이시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고 그 얼굴을 보며 신차이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 상상력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하는군, 이시도 군.”
“그게 허황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몹시.”
“왜지요?”
“배만 가지고 별동대를 만들 수 있겠나. 무역선인 그 배들의 무장은 어떻게 장비하고 선원들은 어떻게 수병으로 훈련시킨다는 말인가. 말이 되는 소 리를 하게.”
이시도는 겸허한 마음으로 아버님의 말씀이 전부 옳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신차이는 두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얹었다.
“선원들이 많이 불평하나? 내 생각으로는 자네가 나서서 두드려맞아 줌으로써 그들이 육전 대원들을 조금 받들어 모실 생각을 하게 됐을 것 같은 데.”
“우습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한동안은 조용하겠군. 자네의 상처에도 값어치가 있네, 이시도 군.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자네의 가치를 증명하지는 마. 몸이 못 배 겨나겠군.”
이시도는 이를 북북 갈며 말했다.
“두 번째는 없습니다. 그 동안 게으름을 피웠지만, 이젠 아닙니다.”
신차이는 순간 암담한 추측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이 친구가 설마 또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이번에는 기필코 사이록의 수평선을 완성시키겠습니다! 저 육전대 녀석을 제물로 삼아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을 자축하겠습니다. 이제 세법(洗法) 만 정리하면 끝납니다! 척법(刺法)과 격법(擊法)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12세로 구성했습니다.”
“아아, 그래.”
“안법(法)과 연결세는 실전으로 완성할 겁니다. 그리고 전체의 진행은 수평선의 웅혼함과 광대함을 표현하는 진행으로 구성할 것입니다. 제1세는.
이시도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신차이 선장이 세 대째의 파이프를 완전히 다 태운 다음이었다. 신차이가 파악하기로 이시도는 대개의 경우 화를 잘 내지 않을 뿐더러 어느 쪽이냐 하면 낙천가에 가까운 성격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이록의 수평선에 대해서는 양보할 줄 몰랐다. 그리고 신차이는 그것을 일등 항해사의 성격의 근간을 이루는 한 흥미로운 요소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그랬기에 신차이는 간혹 이런 고문을 당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야, 이시도 군.”
“직접 보시게 되면 더욱 흥미진진하실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제가 그 검법을 완성하면 가장 먼저 선장님께 보여드리고 평가를 받겠습니다.”
“기대하겠네. 그런데 이시도 군, 자네의 설명을 듣다 보니 떠오른 건데(정확하게는 설명을 듣는 척하며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육전 대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치터리 씨도 할 일이 없어서 죽도록 심심한 모양이군. 그들은 자네처럼 정진의 목표를 갖진 못했으니까.”
“예. 항해 초보들이야 다 그렇잖습니까.”
“그들에게 적당히 일을 줘.”
“예?”
“자넨 일등 항해사야. 내가 배를 다룬다면 자넨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을 다뤄야 해. 우리 손님들이 지루함을 참지 못해 일등 항해사를 박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손을 써야 되겠지. 알아듣지 못하겠나?”
“하지만……………, 그럼 그 사람들을 선원 취급하란 말입니까? 선원들도 안 좋아할 테고 그 친구들도 그다지 반길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차이는 잠시 뚫어지게 이시도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상관없어. 뭐라도 시켜.”
이시도가 파악하기로 신차이 선장은 화를 잘 내지 않을 뿐더러 어느 쪽이냐 하면 조용히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끔찍한 방법으로 터뜨리는 성격이다. 게다가 그것이 언제 터질지 이시도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시도는 이것을 선장의 성격의 근간을 이루는 한 무시무시한 요소로 판단하고 있 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선장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오전, 육전 대원들은 일등 항해사의 요구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시도 씨?”
“말씀드렸잖습니까. 배 밑에 쥐가 있습니다. 그 녀석들을 붙잡지 않으면 배에 큰 병이 돌지 모릅니다. 쥐를 상대하기 위해 선원들을 지휘하는 일을 맡아주십시오. 아무래도 이 배 안에 군사 전문가는 당신들뿐이니까요.”
이시도는 이것이 아주 유쾌한 방식의 복수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육전 대원들은 복수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 선내 설치류 퇴치 작전의 책임 자 및 지휘자가 되라고?
“농담하십니까?”
“농담이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병에 걸리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건 배에서 필수 불가결한 중요 업무입니다. 자이펀 선 주 연합이 발간한 항해 지침서의 위생 및 보건 지침에도 나와 있는 중요 사항이지요!”
이시도가 상당히 강경한 자세로 말하자 육전 대원들은 조금 주춤했다.
“그래도 쥐라니….., 우습게 느껴집니다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점은 알아요. 하지만 그건 땅개식의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배 안에서 환자가 생겼다고 해서 의원을 찾아갈 겁 니까, 어쩔 겁니까? 전염병이라도 한 번 돌아버리면 배는 끝장입니다. 이 안에서는 격리 조치 같은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배에서는 배의 법을 따라야 되는 겁니다. 우습다고 죽음을 자초할 겁니까?”
이시도는 그야말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없는 멍청이이자 얼간이라고 매도하는 식의 화법은 결국 육전 대원들을 굴복시켰다. 육전 대원들은 한없이 바보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이시도의 말에 수긍했다. 미적거리던 육전 대원들은 비참한 얼굴로 질문했 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쥐를 상대로 연설을 할 겁니까, 아니면 쥐에게 위생 상식을 가르칠 겁니까? 육전대에서는 그런 방법도 가르치나 봅니다만 제가 아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쥐를 붙잡아서, 바다에 던져버리는 거지요.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육전 대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시도는 몇 명의 선원들을 배정해 준 다음 휘파람을 불며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10분 후, 이시도는 치터리를 만나고 있었다.
“육전 대원들이 좀 이상합니다, 프리스트님.”
“예? 무슨 말씀입니까?”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그들이 아무래도 환상을 경험하는 모양입니다. 혹시 육전 대원들이 마약 한다는 말씀 들어보셨습니까?”
“무, 무슨 말을!”
치터리는 말도 안 된다는 투로 강력하게 항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시도는 재빨리 말했다.
“예. 이해합니다. 프리스트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뱃사람이고, 그래서 해군에도 친구들이 많습니다. 육전 대원들은 상륙 작전시의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오 헬카네스여, 그들의 죄를 기억하소서, 마약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마약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우리 배에 오르자 아무래도 금단 증상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오, 증거가 있소?”
“예. 그 불쌍한 친구들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있지도 않은, 오 맙소사, ‘여자’를 찾겠다고 설치고 있습니다. 환청이 틀림 없습니다!”
이시도는 ‘여자’라는 말에 상당히 억눌린 강세를 두며 말했다. 당연히 치터리는 경악하고 말았다.
“여, 여, 여자요?”
이시도는 ‘이토록 통탄할 일이 어디 있는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프리스트님. 그게 말이나 됩니까? 여자라니요. 어떻게 배 안에 여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 일스나 헤게모니아의 배도 여객선이 아 닌 바에야 여자는 태우지 않습니다. 여자가 탄 배는 가라앉는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자이펀의 배에 여자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이 친구들 이 분명히 여자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선원들 몇 명을 딸려보내서 직접 찾아보라고 했더니 정말 찾아나서더 군요. 지금 그들은 이 배 어느 곳에 있을 여자를 찾아서 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굳건한 육전 대원들인데……………”
“그리고 굳건한 육체에 비해 볼 때 연약한 정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약에 손을 댄 불쌍한 형제들이지요. 그러니 말입니다, 프리스트님, 프리스트 님들께서 그들을 좀 관찰해 주십시오. 아, 물론 절대로 그들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될 겁니다. 자칫 난폭해질 수도 있는 것이 마약의 금단 증상이니까요. 그저 은근히, 멀리서 그들을 좀 봐주십시오. 저도 나름대로 관찰할 겁니다만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치터리는 통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치터리를 보면서 이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나의 상상력은 도대체 어떤 조상님 의 선물일까. 어쨌든 선장의 명령을 완전히 자기식으로 처리해 버린 이시도는 기분이 좋았다. 선장실로 걸어가면서 만나는 선원들에게마다 몇 년 만 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사실 좁은 배 안인지라 지겹게 마주치는 얼굴들인데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시도의 모습에 선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일등 항해사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런데 오늘 저녁 메뉴는 뭐래?
“잘 처리했습니다!”
이시도는 복잡한 설명을 하는 번거로움을 피해 한 마디로 보고를 마쳤다. 설명을 하다 보면 선장을 노하게 만들지도 몰랐기에 간단하게 보고한 것이 기도 하지만, 신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이리 와서 이걸 보게.”
이시도는 선장에게 다가갔다. 선장은 궤짝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는 이시도를 향하여 펼쳐놓았다. 이시도는 그것을 읽어내려 가다가 선장을 바라보았다.
“실종된 배의 기록입니까?”
“선주님께서 선주 연합의 간사를 들들 볶아서 간신히 출항 전에 만들어주신 것이야.”
“예…………, 음, 소문으로 대충 듣던 것과 비슷하군요.”
“어떻지?”
“예? 무슨 말씀인지요.”
신차이는 그 스스로도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자네는 스스로 말했듯이 유명한 뱃사람이지.” 이시도는 잠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화물선의 선장 자리 같은 것은 꿰 찰 수 있겠지. 그런 곳으로 가고 싶은가? 출항 전에 페럴 상회의 노브리타 호 선장 자리가 공석이라는 말을 들었어. 돌아가면 추천장이라도 써줄까.” “세상에, 선장님!”
신차이는 이시도가 예견했던 대로의 반응을 보이자 싱긋 웃었다.
“그래. 자이펀의 선단에서 화물선은 어선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지. 무역선이나 자유 무역선, 탐험선 같은 것이 훨씬 자극적이고 출세도 빠르지. 자네 역시 화물선은 무역선이나 모험선에서 쫓겨난 퇴물들이 가는 자리로 생각하고 있겠지?”
“방금 수습 선원이 된 꼬마도 아는 이야기를……………, 왜?”
“하지만 그것은 화물선에 대한 모욕이야. 실제로 무역선이나 모험선이 더 굉장한 이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무역선이나 모 험선들이 허탕치고 난 다음에야 한두 번씩 일어나는 일이지. 반면 화물선은 작은 이익이나마 꾸준하게 거둬들이고 있네. 자이펀의 경제를 실제적으 로 책임지는 것은 바로 그 배들일세.”
“지금 저를 화물선으로 쫓아내려고 회유하시는 겁니까?”
신차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시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시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은 없네. 나는 화물선이 받고 있는 부당한 대우를 자네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었을 따름이야.”
“예………….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 목록을 잘 봐.”
이시도는 한결 진지한 태도로 목록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시도는 찡그린 표정으로 말했다.
“실종된 것은 모두 화물선이군요………….”
“그래. 자네의 그 별동대 가설이 다시 무너지는군. 무장도 변변찮고 화물을 최대한으로 적재하기 위해 선원들도 많이 태우지 않는 화물선들이야. 자 네도 자이펀 선단에 만연한 화물선 경시 풍조에서 빠져나온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이시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고 신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나 보군.”
“…………예. 저, 헤헤. 모르겠군요. 음, 납치하기 쉬운 배만 사라지는 현상인가요?”
“자이펀의 경제가 위협받고 있는 현상이야.”
“경제요?”
“그래. 모험선이나 무역선 따위, 가라앉아 봐야 이야깃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빵과 소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 아니, 그 런 침몰 사건은 식탁을 화제로 풍성하게 해줄지도 모르겠군. 악취미한 농담은 접고, 그러나 화물선은 다르지.”
신차이는 여기까지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시도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신차이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었다. 잠시 후 이시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신차이는 조용히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그 화물선들이 어떤 항로에서 주로 실종되었는지 보게.”
“예? 그건 나와 있지 않은데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이시도는 신차이 선장의 격노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뿔싸,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이 지금 터졌구나!
“네 이놈! 네놈은 일등 항해사야! 출발 장소와 도착 장소, 그리고 날짜를 보면 어떤 바람을 타야 되고 어떤 해류를 이용해야 되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디서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나불대는 것이야!”
“죄, 죄송합니다. 예, 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뱉어! 이 배들의 항로가 공통적으로 지나치는 곳이 어딘지!”
이시도는 진땀을 흘리며 머릿속으로 배들의 항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다 마음 편한 상태에서라면 훨씬 빠르게 나왔을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혼란 된 머릿속에서는 배들의 항적도 마구 뒤섞여 버렸다. 이시도는 엉켜버린 실뭉치를 푸는 처녀의 절망감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펠만…… 연안입니까?”
대답을 꺼낸 이시도는 날벼락에 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신차이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시도 군, 거기가 우리의 제일 목표가 될 것이야. 항법사와 의논해서 그곳을 목표로 항로를 계산하도록.”
신차이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 같은 분노는 없었다. 어느새 어떤 헛소리나 멍청한 질문에도 온화하게 대답해 주는 이시도의 좋은 선장님으로 돌아 와 있는 것이다. 이시도는 정신적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육체적으로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