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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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슨은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프림 블레이드의 조언이 있었다.
‘달아나자고, 샌슨. 함 씨는 예의바르고 품위 있는 신사처럼 보이고, 따라서 너완 전혀 다른 인종일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상세하게 말해 봐.’
‘흥. 너처럼 드러내 놓고 털레털레 따라올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함 씨는 이 회견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틀림없이 주변에 병사들을 좌악 깔아놨 을 거야.’
‘이해했어.’
‘칼은 함 씨의 뒤통수를 갈긴 셈이고, 따라서 함 씨가 그 숨어 있는 병사들에게 저놈들을 잡아라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정도로 침착을 되찾기 전에 우린 조금이라도 더 도망가야 한단 말이야.’
‘이해했다고 했잖아. 빤한 말 하지 마.’
‘와………….! 거기까지 짐작했어?
‘윽.’
샌슨은 이 황야 어딘가의 바위에 프림 블레이드를 꽂아놓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몇 백 년쯤 뒤에 바위에 꽂힌 명검의 전설을 만들어낼지 도 모르는 샌슨의 계획이 실천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샌슨은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둘째, 바위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샌슨은 프림 블 레이드와 보다 건설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칼 말이야. 휴전 협정을 파탄내겠다고 했지?
‘그가 원한다면 뭐든 파탄내지 못할까. 결혼식 정도라면 나도 파탄낼 수 있어.’
‘응? 어떻게?’
‘응응. 샌슨 네가 결혼식장에 가는 거야. 그리고 내 칼자루를 꽉 움켜쥐면 돼. 그럼 내가 어떻게 결혼식을 파탄내는지 알 수 있게 될 거야.’
‘끔찍하군……. 어쨌든 말이야. 칼은 왜 파탄낸다고 했을까?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에 샌슨은 슈팅스타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한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들의 모습이나 칼의 반사광 먼지 구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샌슨은 다시 앞을 보았다. 그때 프림 블레이드가 말했다.
‘너희는 흘러야 하니까.’
‘뭐?”
‘싸움에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속 싸워야 하지. 멈추는 것은 너희답지 않으니까. 너희는 바람, 너희는 강물. 움직이고 번성하고 영원 히 행동해야 하겠지.’
‘무슨 소리야, 그렇다고 전쟁을 옹호할 수는…………….’
‘쉽게 말하지 마.’
‘응?’
‘내 모습을 봐, 샌슨, 제기. 칼날에 녹이 덕지덕지 덮이고 칼자루는 낡아 부서지는, 그 광막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나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그 시 간을 생각하다 보면 소름 끼치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아. 미칠 것 같아. 너는 햇수를 년으로 세겠지? 하지만, 아아! 나는 세기로 세어야 한단 말이야! 그 시간 동안, 그 진저리쳐지도록 긴 시간 동안 나는 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어!’
샌슨은 침묵했다. 조금 후,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프림 블레이드는 말했다.
‘때론 아버지가 나를 마검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해. 그럼, 그럼 난 적당히 악명을 날리다가 용광로나 화산에 던져지겠지? 차라리 그게 낫겠 지. 그 기막힐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이 식물인간 같은 모습의 형벌을 참아내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아.’
‘프림’
‘너희는 움직여야 해.’
프림 블레이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검의 논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 아아, 그래. 난 검이야. 검이 검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뭐 어때? 전쟁의 결과가 무섭다고 해서 아예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어. 끝까지 가야 하는 거야.’
‘난…………, 모르겠어. 휴전을 하면 최소한 지지는 않는 거야. 게다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고.’
‘칼이 말할 때 뭘 들은 거야? 이 상태에서 휴전을 한다면 그건 현실과 타협하는, 또는 현실 속으로 함몰되는 거야. 그럼 이 전쟁은 계속돼. 이건 혈우 병과 마찬가지야. 너희는 영원히 피를 흘리게 될 거란 말이야. 다친 팔은 낫게 하든가 잘라내든가 해야 돼. 계속 흐르는 피만 막고 있어선 언젠가는 인간 자체가 죽을 거란 말이야.’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 정정할래. 죽지는 않겠군. 이 현실이 계속된다면, 인간은 죽지 않겠군. 하지만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은 마찬가지야. 모르겠어. 이 세상은 유 령들의 전장이 되는 걸까? 아이도 낳지 못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니, 그건 유령이야. 유령들이 영원히 싸움을 계속하는 거지.’
‘하지만………….’
‘싸워야 해. 미래가 뭐가 될지 몰라서 주춤거리지 마. 휴전은 얄팍한 타협이야. 그런 건 없어. 아니,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간 스스로가 결정해야 돼. 누군가가 고정시킨 현실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서 걸어가 자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선조들도 자신을 위해 그들의 인생과 싸웠어. 너희들도 너희들의 인생을 위해 싸우기만 하면 돼. 너희들의 자손들은 스스로를 위해 싸우겠지. 왜냐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만 들어져 있으니까. 그 싸움은 노래가 될 수도 있겠고 탑이 될 수도 있겠고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도 있겠지. 아침에 일어났을 땐 졸음과 싸우는 거야. 힘껏 일할 땐 게으름과 싸우는 거야. 논쟁을 벌일 땐 상대방과 설전을 하지. 자이펀이 적이라면 검을 들고 일어나 싸워. 뭐가 옳은지는 여가 선용의 시간을 위해 남겨둬. 방해물은 항상 생기고, 싸움은 영원한 것이야. 내 앞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움직여!’
프림 블레이드의 목소리에 익살맞은 기운이 섞여들어 갔다.
‘봐, 지금도 방해물이 있어. 위대한 전사 샌슨, 싸워야겠군.’
‘뭐?”
그때 현실의 목소리가 샌슨의 귀에 들어왔다.
“퍼시발 군. 말을 잠시 멈춰보게.”
샌슨은 당황하며 슈팅스타를 멈췄지만 결국 칼을 한참 지나치고 말았다. 샌슨은 말을 돌려 다시 걸어왔고, 그 때문에 칼이 뭣 때문에 멈추라고 했는 지 묻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들이 달려온 언덕 쪽에서 뽀얀 먼지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샌슨은 이를 갈았다.
“함 녀석.” 더 이상 존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부대를 매복시켜 뒀던 모양이군요. 비겁한 놈!”
칼은 ‘자네 역시 1대1의 회담에 따라나오지 않았는가’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칼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물을 테니, 자네나 프림 양 누구라도 좀 대답해 주시게. 저 추격대는 함이 직접 지휘하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에서는 확신을 가질 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가능성은 높단 말이지?”
“그렇지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 것 아닙니까. 대여섯 시간 거리나 되는 길을 혼자서 되돌아갈 리는 없을 테고, 저라면 저 부대와 합류하겠습 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샌슨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스크롤이었다. 칼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비겁한 칼 녀석이라고 불러도 할 말 없겠군.”
“예?”
칼은 대답 대신 고삐를 놓고는 두 손으로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이 찢어지자 그 속에서 광선이 튀어올랐다. 위로 솟구쳐 오른 광선은 샌슨으로 하여금 레브네인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광선은 까마득 한 하늘로 솟아올라 구름을 뚫었고, 잠시 후 사라졌다. 샌슨은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손을 툭툭 털고는 말했다.
“자, 잘 부탁하네.”
“방금 그건 일종의 응원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 그럼 저는 추적대와 용감히 맞서 싸우고 칼은 그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군요. 멋진 응원이었습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칼은 달아나셔야………”
“으윽. 아냐. 그건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네, 퍼시발 군. 뒤를 보게.”
샌슨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방에서, 그들을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먼지 구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평선 곳곳에서 일어나는 그 먼지 구름을 보며 샌슨은 숨이 턱 막히는 희 열을 느꼈다. 바람을 타고 가늘게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절대의 전투력과 치명적인 돌격력으로 땅 위를 질타하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힘찬 나팔 소리가 울렸다.
나팔 소리는 황무지 위를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황무지 전체가 진저리를 치며 들고 일어나는 듯했다. 샌슨은 그 나팔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 속에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나의 최고의 경의로서, 말발굽 소리는 이제 몸이 흔들릴 지경으로 커졌다. 그리고 시시각각 커지는 먼지 구름들 사이로 갑주의 번득임이 무지개를 그렸다. 샌슨은 소름이 돋을 듯한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검을 높이 들고 목이 터져 라 고함질렀다.
“장미의 기사여, 오라! 죽음과 삶은 내 알 바 아니다. 칠흑의 땅 위에 피의 장미 꽃잎을 날릴 뿐!”
샌슨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렸다. 금속성의 맑고 날카로운 소리들은 천둥처럼 황무지 위를 치달렸다. 그리고 그들 심장 속에서 용솟음치는 피의 소환에 맞춰 지옥의 노래를 부르는 전사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장미의 기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진 일스 기사단의 창검은 사방으로 흰 무지개를 퍼뜨렸다. 불꽃처럼 휘날리는 말들의 갈기 위로 일스 기사단의 강철 투구가 번득였다. 슬릿 위로 새겨진 장미 문양은 마치 흐르는 피처럼 보였다. 일스의 대장장이들의 손길이 얼마나 가해졌을까, 지독하게 연마된 갑주의 강철은 로열 블 루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두에 달리던 기사는 앞으로 내뻗고 있던 거대한 창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창이 아니었다. 기사가 팔을 휘두르자, 거대한 깃발이 펼쳐졌다. 장미와 정의의 오렘의 문장이 거대한 깃발 가득히 화려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기수는 다시 뿔나팔을 들어올렸다. 벽력 같은 나팔 소리가 다시 황무지를 진동시켰다.
빠………… 빠바바바………… 바……………!
빠………… 빠바바바………… 바…………!
저들이 바로 일스 기사단이었다. 그레이, 무스타파, 딤라이트 천공의 기사의 가장 올바른 후계자들, 대륙 최고의 단위 전투력이다. 검과 파괴의 레티 의 아들들이 파괴를 위해 검을 든 프리스트들이라면, 저들은 정의를 위해 신에게 몸을 바친 무사들이다. 샌슨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쳤다.
“칼! 함을 어떤 상태로 가져다 바칠까요?”
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고삐를 당겼다. 일스 기사단의 돌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고 속력으로 옆으로 비켜나야 할 것이다. 죽을 맛이 겠군.
“전쟁의 예법이 요구하는 한 정중하게. 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시체라도 상관없네. 그것이 전쟁의 예법이니.”
“알겠습니다! 자, 누가 일스 기사단을 앞지르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샌슨은 검을 높이 들어올려 휘저었다.
“바이서스, 루트에리노!”
그리고 샌슨은 앞으로 달려갔다. 칼은 싱긋 웃으며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상에서 칼은 일스 기사단의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슬프고, 아름답고, 격정적인 나팔 소리였다.
천막의 입구에 쳐져 있는 천을 들추고 밖을 바라보던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영지 곳곳에 피워둔 화톳불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주위는 고요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 한두 명이 오갈 따름으로, 휴전 협상을 준비하던 사절단과 법학자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채 잠든 지 오래였다.
이 며칠은 그들에게는 행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막중한 임무를 의식하고 매일 저녁 졸리는 것을 참아가며 휴전 협정서의 초안을 잡기 위해 상의 를 거듭해 온 그들이었지만, 조금 전 저녁 식사 시간에 칼이 던진 선언 즉 휴전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그들 모두를 얼빠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황당함과 허탈감에 일찌감치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칼은 천을 도로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천막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랗고 묵직해 보이는 관이 놓여 있었다. 칼은 잠시 관 뚜껑을 노크하고 픈 생각을 떠올렸지만 꾹 참으며 말했다.
“시오네. 나와도 좋아요.”
관 뚜껑이 천천히 움직였다. 텅. 가벼운 소리를 내며 관 뚜껑이 옆으로 떨어지자 시오네는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종군 프리스트들 과 허옇게 질린 얼굴의 병사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막사 안에는 칼뿐이었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혼자뿐인가?”
칼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는 테이블 대신 사용하고 있던 궤짝 위에 놓인 두 개의 잔 가운데 하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거기 앉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관에서 나오는 것은 곤란합니다. 거기 관 귀퉁이에라도 앉으시지요.”
시오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 주위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뒤틀리며 예리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관 주위의 땅에는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시오네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정령사의 솜씨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 늙은 정령사 구다이의 솜씨인가. 정확하게 무엇인 지 알 수 없었기에 시오네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준비가 철저하군.”
“저는 소심한 편이거든요.”
칼은 빙긋 웃으며 또 하나의 잔을 들어올려서는 관 귀퉁이에 앉은 시오네에게 건넸다. 시오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잔을 바라보았고, 받아든 잔의 내 용물을 확인한 뒤에는 당황해 버렸다.
“와인이…………, 아니군?” “아닙니다.”
시오네는 눈을 홉떠 칼을 바라본 채 천천히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잔의 내용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자 더 이상 칼에게 집중하기 어려웠 다. 시오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오네는 눈을 감은 채 입 안의 내용물을 음미하다가 아쉬운 듯이 삼키고서 말했다.
“살 것 같은 기분이군.”
칼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영원한 시체인 뱀파이어가 살 것 같다고?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시오네는 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궤짝에 걸터앉아 자신의 잔을 마셨다. 칼의 잔에는 와인이 담겨 있었다.
시오네는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고서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슴, 수컷, 311년산.”
칼은 킬킬거렸다. 시오네에게서 유머 감각을 기대하지는 못했다. 시오네는 눈을 떠 웃고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인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인간? 내가 그걸 어떻게 준비하겠습니까. 그건 취사병이 저녁 식사에 쓰려고 잡은 사슴을 요리할 때 간신히 구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요. 맛 을 다 구분합니까?”
“설마. 이 방에 진동하는 사슴고기 냄새로 추측한 거야. 저녁 식사 때 그걸 먹었으니, 네가 사슴에서 이걸 구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
“아아, 그렇군요. 미각이 아니라 후각에 경의를 표시해야 되는 것이군요.”
시오네는 차갑게 웃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래간만에 충족된 욕망 때문에 시오네는 퍽 즐거운 기분이었다.
“뭘 준비했나.”
“예?”
“너는 내게 뭔가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불러낸 거 아닌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준비한 것이겠지. 그 굉장 한 이야기가 뭔지 말해 보시지.”
칼은 히죽 웃었다.
“이해가 빠르니 대화가 편하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함을 붙잡았습니다.”
시오네의 손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잔의 내용물이 모두 쏟아질 뻔했지만 시오네는 가까스로 그것을 붙잡았다. 시오네는 자신의 팔에 흐른 피를 바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칼을 노려보았다.
“함……을?”
“예. 1대1로 회담하자고 하니 나오더군요. 물론 부대를 가득 끌고 나왔습니다만, 퍼시발 군과 일스 기사단이 모두 무찔렀습니다.”
시오네는 이를 악물며 칼을 바라보았다. 이 끔찍한 놈이 할 수 없는 일은 도대체 뭐지. 그 불가사의한 사내가 조금 왜소한 듯한 체격에 평범한 중늙 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오네에게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런 평범함이 시오네를 더욱 압박해 왔다. 시오네는 그 압박감을 뿌 리치듯 허리를 펴며 사납게 말했다.
“축하하겠어. 함은 바이서스에 붙잡힌 두 번째 국방 대신이 되는 건가. 하지만 모국을 배신한 두 번째 국방 대신이 되기는 어려울걸. 그놈은 겉보기 와는 꽤나 다른 녀석이거든.”
“예. 고문은 엄두도 못 내겠더군요. 자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될 지경이니, 도대체 고문 같은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더군요.”
시오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자살했나?”
“아니오. 이미 혀를 한번 깨물었습니다만 종군 프리스트들이 급히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손발 다 묶이고 입에는 재갈까지 채워진 상태지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을 겁니다.”
“볼 수 있다고?”
“퍼시발 군이 데리러 갔습니다.”
시오네는 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잔을 땅에 집어던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은 떼구르르 굴러갈 뿐이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뭔지 알아보려면 직접 발을 들이밀어 보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군요. 구다이 씨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시오네는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사납게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왜 데려오겠다는 거지? 나를 희롱하려는 거냐? 배신자들을 서로 만나게 하곤 그 모습을 즐기려는 거야!”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당신이나 함이나 서로 볼 낯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서로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도리가 없 군요.”
시오네는 사납게 쉭쉭거렸다.
“도리라니?”
“말씀드렸다시피 함 씨를 고문할 수는 없습니다. 손발이나, 하다못해 입만 자유로워도 당장 자살하려고 들 테니까요. 그래서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 다.”
시오네는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칼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고 그 모습은 시오네를 더욱 의아하게 했다. 칼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뱀파이어입니다. 이성에 대한 지배력이 있잖습니까?”
깜빡거리던 시오네의 눈이 순간적으로 고정되었다. 시오네는 입을 쩍 벌린 채 칼을 쳐다보았다.
“뭐? 너, 그럼 지금……?”
“예. 함 씨를 트랜스에 빠뜨려주십시오.”
시오네는 벌떡 일어났다. 칼은 흠칫하며 궤짝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으나 곧 멈췄다. 시오네는 관 속에 똑바로 선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올 수 없다. 시오네는 핏발 선 눈으로 칼을 쏘아보았다.
“뭣 때문이지?”
“자이펀 사절단의 구성과 방어 태세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사절단의 인사들을 모두 잡고 싶거든요.”
“뭣 때문에?”
“이기려고 그러는 거죠. 사절단에 뽑힐 정도의 인사들은 전쟁수행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뭐야?”
“예?”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왜냐! 너희들의 폭발성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 죽어야 할 생명, 그래서 어느 순간 정반대로 바뀌어버리는 모습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뭐냐. 그렇게 순수하게,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가식도 내던진 상태로 바뀌어버 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냐? 네가 휴전 협상을 미끼로 평화 사절단을 잡으려 드는 놈이었나? 네가 1대1 회담을 미끼로 적 장수를 낚으려 드는 놈이었 나? 네가 뱀파이어를 이용하여 인간을 희롱하려는 놈이었나? 넌 아니었어!”
칼은 시무룩한 얼굴로 시오네를 바라보다가 다시 궤짝에 걸터앉았다.
“나도 압니다.”
시오네는 어깨로 숨을 쉬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뭐?”
“내게 도대체 뭘 바란 것입니까.”
시오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칼은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꼬고 싶진 않지만, 당신은 함을 배신하고, 함은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이 땅 위를 오가는 당신들은 서로를 마음껏 이용해 버리려 들었습니다. 그 렇게 하지 못하는 자가 바보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당신들이 지키지 못하는 순수성의 우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고. 이 시점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눈이었다.
“나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인류사에 오욕으로 기록될 전쟁 행위를 끝내야 합니다. 오물을 치우는 데 비단 걸레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정정당당한 싸움? 싸움 어디에 고결함이 있단 말입니까? 서로를 죽여대기 위해 창칼을 든 것에서부터 전쟁은 인간의 오욕입니다. 거기에 금붙이를 달든 보석으로 치장하든 오욕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만의 군세를 몰아 정정당당하고 화려하게 싸워야만 아름다운 것입니 까? 수십만의 시체가 쌓여 썩어가고 있는 전장에서 그렇게 말씀해 보시죠. 나는 관심 없습니다. 몇 명의 인물만 붙잡아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면 나는 그쪽을 선택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야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들은 떠들 뿐입니다. 나 를 책임지는 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행동들의 대가가 나를 겨냥할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질 것입니다.”
“나도 그 말에 찬성이오.”
시오네와 칼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막사의 입구에는 밧줄에 꽁꽁 묶인 함과 샌슨이 서 있었다. 찢어지고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옷을 걸치고 있어 초췌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함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칼의 말에 대답한 것은 함이었다.
칼은 당황했다.
“아니, 재갈은?”
샌슨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보기 안 좋아서…………. 그래도 자이펀의 국방 대신이시잖습니까. 하탄의 이름에 걸고 자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습니다.”
“나 이거야 원. 순수성의 우상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군.”
“예?”
샌슨은 눈을 끔뻑거렸지만 칼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함을 바라보았다. 함은 시오네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관 주위의 도안을 보 더니 피식 웃었다.
“안 좋아 보이는군.”
“……그쪽도 마찬가지야. 그 얼굴의 멍자국과 말라붙은 피는 아무리 좋게 말해 주고 싶어도 지저분하다는 말이 최상일 것 같은데.”
“아아, 그래. 그래도 네 쪽이 나보다는 낫군. 술도 마셨나 보……, 응?”
함은 시오네가 집어던진 잔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오네는 고개를 돌려 함을 외면했고 함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칼은 천막 안에 딱 한 개 있던 의자를 끌고 와 함에게 내밀고 자신은 다시 궤짝에 앉았다. 함은 묵묵히 의자에 앉았고 샌슨은 그 뒤에 섰다. 함은 칼 에게 말했다.
“나를 왜 데리고 온 겁니까.”
“글쎄올시다. 괜히 흥분해 가지고, 시오네 양과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군요. 곤란한데요. 시오네? 어떻습니까, 내 제안은?”
시오네는 그대로 관에 드러누웠다. 관 뚜껑이 날아오르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칼은 쓰게 웃었다.
“멋진 대화 거부군요.”
함은 그런 칼의 모습을 보다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의 말, 나는 찬성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책임진다는 말과 내가 생각하는 책임이 서로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사소한 차이, 혹은 심연이 몇 개쯤 빠질 만한 차이라고 해두죠.”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칼을 보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관점의 문제. 할말이 없군요.”
칼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 보자, 곤란하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시오네 양을 설득해서 당신을 트랜스에 빠뜨려볼까 했습니다. 아아, 눈을 그렇게 뜨시면 저는 무섭습니 다. 소심한 편이라서요.”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시오네 양이 비협조적이니 어차피 힘들군요.”
“당신이 승자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나 자신을 부정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 말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승리를 스스로 모욕하지 마시오!”
칼은 물끄러미 함을 바라보았다.
“명예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만큼, 모욕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리고,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함은 말을 멈추고는 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아까 오후, 그 언덕 위에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시간은 정말 멈춰가고 있습니다. 내일을 알기 위해선 어제만 보면 충분할 날들이 다 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그 뭔지 알 수 없어서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가 의미를 잃어갈 거란 말입니다.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그럼 당신은 무엇과 싸우는 거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함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진부한 대답은 기대하지 못했다. 칼 역시 싱긋 웃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지금 내 싸움은 그 말 이외에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군요. 나는 현실은 안정적이라는 모든 믿음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현 실을 고정시키려는 모든 의지와 싸우고 있지요. 정의, 신뢰, 우정, 사랑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내 싸움은 그런 것입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