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3
3
쳉은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성격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이 배를 크게 신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해의 따뜻한 바다를 오가던 배가 북해의 얼음 바다 속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믿 는 바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배는 이 배뿐입니다.”
이시도 역시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목이 쉬었기 때문이다.
“자, 자유 무역선을 깔보지, 깔보지 마시오. 에취! 이곳에서야 자유 무역선의 전설이, 전설이, 우엣취! 제기랄! 이 빌어먹을 감기라니! 이 날씨에, 이 바다! 으웃체체치아!”
쳉은 온화한 얼굴로 단어보다 기침 소리가 더 많은 이시도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런 대로 들어줄 만하지만 기침 소리 때문에 격조가 많이 떨어 지는 헤게모니아 어로 이루어진 이시도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 배는 그 이름 거룩하사 자유 무역선 레드 서펀트 호이며, 우리 선원들은 불 가사리보다 질기고 상어보다 사나우며 말향고래만큼이나 강인하므로, 북해의 얼음 바다쯤은 유람하는 기분으로 항해할 수 있다.’
쳉은 고개를 조금 틀어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판단으로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은 대합만큼이나 두껍게 옷을 여며 입고 잉어만큼 이나 구슬픈 눈을 한 채 해파리만큼이나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쳉은 구태여 그 사실들을 지적하는 대신 자신의 용무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저희들을 태우고 북해로 가주실 수 있습니까.”
이시도는 애처로울 만큼 기침을 해대고, 자이펀 어로 욕설을 좀 해댄 끝에 다시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하, 하지만 우린, 우리 용무가 있소. 훌쩍. 우리는 이곳 탄느완의 상공 회의소 대표부와, 와, 와찻치아츄! 에, 대표부와 상의하여, 이곳에서 탄느완 주재자이펀 상관商) 설립을, 을, 위한 기초 조사를 할 생각이오. 게다가 어, 어차피 우리는 여객 수송은 하지도 않소. 이잇치!”
이시도는 신차이가 말한 대외적인 목적을 그대로 댔다. 하지만 신차이는 탄느완 주재 상관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런 일거리를 만들어냈을 뿐 거 기에 열심인 것은 아니며, 그런 자신의 속셈을 부하 선원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재 신차이와 레드 서펀트의 고급 선원들이 몇몇 탄느완 상인들과 접촉하고 있긴 했지만 이야기가 사교적인 만남 이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신차이는 탄느완의 한 거간꾼과 점심 식사를 하느라 배를 떠나 있었기에 이시도가 감기에 걸린 몸을 이끌고 나와 쳉을 상대해야 했다.
이쯤에서 이시도가 괴로워하고 있는 혹독한 감기에 대한 동정심을 표해 주면 좋으련만, 쳉은 여전히 차분하고 간결한 어조로 자신의 용건에 대해서 만 말했다.
“상관 설립을 위한 회견이 목적이라면 배는 필요 없잖습니까. 탄느완 상공 회의소와 회의를 담당할 전담 팀들만 육상에 남아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그 동안 배는 할 일이 없을 테고, 저희들을 태워주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만.”
감기 때문에 졸도할 것만 같은 컨디션이었지만, 이시도는 호기심을 느꼈다.
“도대체 부, 북해에는 뭐하러 가시려는 거요? 에취! 얼음과 물밖에 없, 없는데?”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얼음과 물 이외에 하나가 늘어났습니다. 일주일 전쯤, 삼사십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싣고 이곳을 떠난 배가 있습니다.”
“아아, 나도, 츄! 그 이야기 들었수. 배를 통째로 사서, 사서 출발했다며?”
이시도는 상륙하자마자 사이의 수평선에 북방의 검법을 접목시킴으로서 화룡점정하겠다는 거창한 대외적 목적을 내건 채탄느완의 술집을 누볐 으며, 그 결과로 다양한 풍문과 숙취와 멍자국과 이 지독한 감기를 얻었던 참이다. 그래서 이시도는 거금을 쾌척하여 배를 구한 후 화급히 북해로 떠 나간 일행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도의 상상력은 악랄한 감기에도 지지 않고 최고 성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흐음. 음츄! 그 사람들을 추적하, 하겠다는 말이오?”
“예.”
“취! 당신은 뱃사람이 아니니,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에츄! 하지만 배를 추적하는 것이 들판에서 말 타고 추, 추적하는 그런 일과, 훌쩍, 비 슷한 건 줄 아시오? 바다에는 길이 없단 말이오. 추!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라고 해도 바닷물에는 자취가 남지 않소.”
쳉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시도의 말을 들은 다음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감당할 문제군요. 그리고 제게는 그 문제들을 처리할 수단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저는 가이너 카쉬냅처럼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요약. 추적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너희는 배만 제공해라. 이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흐음. 아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 어쩌면 사이록의 수평선에 극풍의 매서움을 더할 기회일지도, 잇치! 모르겠군…………”
쳉은 사이록의 수평선이 뭐냐고 묻지 않음으로써 이시도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이시도는 빨리 회복했다.
“좋아, 기한은 어느 정도요?”
쳉은 그 대답을 미로부터 들어두었다.
“현재로선 3주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3주 동안의 냉해 항해라……………”
나는 미쳤어. 이시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이펀의 배들 중 어떤 배도 북해의 얼어붙은 바닷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러니 나는 미친 거지. 그리고 이시도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항상 성실하게 귀를 기울여왔다.
“솔직히 말해서, 에츄! 나는 하고 싶어지는데.”
“………이 배는 원합니다만 당신은 안 타셨으면 하는데요.”
“뭐요!”
“그 감기 때문입니다. 저 바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쳉은 알지 못했지만 이 말이 결정타였다. 이시도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아! 내가 타고 말고는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요. 그리고 이 배에 당신네들을 태울 건지 말지도 역시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고. 당신의 제안은 선장 님에게 전해 주겠소. 예정은 3주, 목표는 북해. 맞지요? 대가는?”
“당신네들의 통상적인 요금 같은 것은 없겠군요. 승객 운송은 안한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합시다. 나는 헤게모니아에서 상당히 유력한 상단에 소속 된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쳉은 속이 조금 켕겼다. 그는 지금 POG상단으로부터 장기 무단결근을 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이 도시에 자이펀의 상관이 건립되도록 돕겠습니다.”
이시도는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신차이 선장의 목적은 뭐라고 하더라도 그의 사촌 동생 운차이의 수색일 것이다. 신차이가 거간꾼들이나 상인 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풍문을 듣기 위한 것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심장마비에 걸리게 할 정도로 재수 없는 인간의 소문을 들 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따라서, 이 배와 선원들의 거취는 운차이의 소재지에 따라 결정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대답해 줄 수가 없군.
“좋아요. 훌쩍. 당신의 제안을 선장님에게 전하지요. 하지만 많이 기대하지는 마슈. 선장님이나 우리들이나 북해를 두려워 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은 항해는 두려워하니까.”
“잘 알겠습니다.”
쳉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작별 인사를 보냈다. 이시도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갑판을 가로질러 주승강구에 뛰어들었고 그 뒷모습을 보던 쳉은 피식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배 좌현의 난간에 다다른 쳉은 멀리 항구 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곧 보트 한 척이 빠른 속력으로 바다 위를 미끄러져 왔다. 보트가 뱃전에 닿자 쳉 은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트에 승선했다. 보트를 젓고 있던 사람들은 별말 없이 그대로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보트 뒤쪽에 앉아 항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던 쳉은 잠시 고개를 돌려 레드 서펀트를 바라보았다. 탄느완의 항구 내항에 정박해 있는 레드 서펀트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사방이 하얀 이 땅에서 레드 서펀트의 붉은 돛은 섬뜩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 날씬하고 스피디해 보이는 선체 역시 독특한 것이었지만 현재 항구에는 북양 항해용의 둔중한 배가 없어서 비교해 볼 수는 없었다.
북양 항해용 배는 부빙 충돌에 대비한 설계로 흘수선이 낮고 배 바닥이 평평하며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그런 낮은 흘수선 덕택에 급 격하게 다가오는 빙산 위로 얹히는 재주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드 서펀트는 날씬하고 가볍게 만들어져 있으며(북양 항해용 배에 비교해 봐 서 그렇다는 말이다.) 흘수선이 꽤 높다. 그래서 레드 서펀트는 탄느완 부두의 낮은 수심 때문에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이렇게 내항의 바다에 정박해 있었다.
쳉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부두를 바라보았다. 탄느완 시내의 낮은 건물들은 땅바닥을 끌어안은 듯한 모습으로 지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 었다. 무시무시한 강풍과 집을 무너뜨릴 정도로 쌓이곤 하는 눈 때문에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었으며 납작하고 단단했다. 흙과 이끼뿐인 을씨 년스러운 언덕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탄느완 시내는, 이 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백기처럼 보였다.
보트는 한결같은 속력으로 부두로 다가갔다.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었던 쳉은 보트 옆으로 갈라지는 하얀 잔물결들과 거울 같은 외해 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상념이 밀고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쳉은 생각했다.
‘미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쳉은 할슈타일 후작을 생각했다. 후작은 세상에 그것보다 더 당연한 말은 없다는 듯이 파를 죽이겠다는 말을 반복해 왔다. 쳉이 판단하기로 후작은 자신의 부활을 야기한 신스라이프·파의 파멸을 통해 부활을 무효화시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미는 후작의 그런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 역시 파의 살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후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무 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마침내, 쳉은 미와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행이 묵고 있던 여관에 도착한 쳉은 홀의 커다란 벽난로 앞에 엉덩이를 나란히 붙이고 최대한 밀착한 모습으로 모여앉은 후작 일행의 뒷모습을 보 곤 싱긋 웃었다. 후작과 궤헤른, 사무엘, 니크, 가이버는 체면 불구하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무더기가 되어 뭉쳐 있었다. 여관 주인은 안쓰러운 듯 그 들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장작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서는 턱을 딱딱 부딪히는 얼굴로 쳉 을 맞이했다.
“어떻게 됐소.”
“선장이 없더군요. 일등 항해사에게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수, 수고하셨소. 추울 텐데 여기 와서 몸 좀 녹이시오.”
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벽난로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다섯 명의 거한들을 수용하기에도 모자라 보였다.
궤헤른 역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쳉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대신 꼼짝도 하지 않는 후작의 등을 잠시 바라보았다. 후작은 난로 속에서 타오 르는 불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쳉은 궤헤른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려 미의 방을 향했다.
방문 열리는 소리에 침대 가에 앉아 있던 아달탄은 귀를 쫑긋 세우며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들어선 사람이 쳉인 것을 알아차리자 아달탄은 다시 앞발 위에 머리를 얹고 졸기 시작했다. 미는 침대 위에 앉아 침대 옆의 창턱에 팔을 고이고 있었다. 덧창을 열어젖혀 창문 밖으로 탄느완의 얼음 바다 가 잘 보였다. 멀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빙하는 희박한 햇살 아래에서도 신비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쳉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미 비바체 그라시엘.”
미는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의아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빼먹었잖아.”
“응?”
“정식으로 부르고 싶었다면 앞에 ‘사랑스러운’을 붙여야지.”
“미안해.”
쳉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다음 방을 가로질러 침대 발치에 앉았다.
미는 무릎을 굽혀 쳉이 앉도록 해주었지만 쳉이 앉자마자 그의 무릎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쳉은 피식 웃으며 미의 조그마한 발을 내려다보았다. “정강이에 살 좀 빼.”
“근육이야. 그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편안하게 다리를 올려놓고는 허리를 뒤틀어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쳉은 입을 다문 채 미의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 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일을 계속했다.
침대 위가 너무 고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달탄이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하지 못한 아달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다시 앞발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미는 창 밖을 보며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뭐기에 그렇게 분위기 잔뜩 잡으며 부른 거지? 거기 시원하다. 좀 긁어볼래.”
“무좀 아니야?”
“손에는 옮지 않을 테니 긁어봐. 이키키키! 거기 말고. 간지럽잖아. 까르르륵!”
“흐음. 파를 따라잡으면 어쩔 생각이지?”
미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미의 옆얼굴을 보던 쳉은 고개를 돌려 아달탄의 갈비뼈 부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미는 조금 후에 말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인 것 같네. 미래에 어쩔 거냐는 식의 질문.”
“퓨처 워커잖아.”
“그래. 맞아. 미는 퓨처 워커. 그러니 그런 질문은 싫은걸.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야 된다는 건 미에겐 참 중노동이거든.”
“걷는 연습을 해봐.”
“해보자…………. 음. 하지만 역시 파에게 달린 문제인걸.”
“파에게?”
“응. 파에게 달린 문제야. 아니, 그건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겠다. 응. 지금부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각자에게 달린 문제가 될 거야.”
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언제의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의 말인 것 같은데.”
미는 창 밖을 향해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걸. 미는 파가 아니고, 파는 미가 아니고, 미는 미대로 파는 파대로. 쳉은……”
미는 말끝을 흐트러뜨렸다. 쳉은 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 할 건 해두자.”
“할 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곤 침대 위에 두 손을 짚고는 쳉에게 기어와서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았다. 쳉은 가만히 앉은 채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쳉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미의 두 팔이 쳉의 목을 감았다. 그의 목 뒤에서 만난 그녀의 두 손은 서로 조용히 얽혀들었다. 쳉은 눈을 가늘게 떴고, 미는 아예 감아버렸다. 미는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미의 입술은 쳉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서두르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는 한결같은 속도로. 쳉은 낭패스러움과 기대감, 조바심과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으며, 자신의 감정들에 놀라워했다. 그 사이에 미의 입술은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편안함으로 쳉의 입술과 맞닿았다.
신스라이프는 배 난간을 부여잡은 채 바다 위로 떠가는 빙산을 바라보았다.
바다도 빙산도 모두 젖빛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다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다가와 배에 구멍을 내버리거나 배를 통째로 수장시킬 수 있 는 빙산이 출몰하지 않을까, 갑판원들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선교 높은 곳에 자리한 선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볼 뿐 옆에 서 있 는 조타수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선장은 조타수를 믿고 있었고, 조타수는 선장이 자신을 믿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신뢰감을 표현하는지 알 바가 아닌 상태였다.
그의 속에서 파는 날뛴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이제 파는 거의 자의식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초조했다.
‘이 차가운 바다가 너를 일깨우는 건가? 아니면 시축인가? 시축일 가능성이 높군.’
‘시간축…………. 부른다………….’
띄엄띄엄이긴 하지만 파는 이제 대답까지도 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웃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너무 늦었어.’
‘나…………, 퓨처……..?
‘넌 미래가 아니야. 넌 현재이고, 그것에 만족했어. 지금에 와서 부정할 생각인가? 넌 내 손을 잡음으로써 현재와 손잡았다. 그것이 네 의지가 아니 라고 말할 건가? 웃기는 소리. 나는 네 의지를 구속한 적이 없다. 그건 네 본심이었어.’
‘나……, 퓨처 워커…………
‘퓨처 워커? 흐응.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 다가오는 시간축이 너에게 무엇을 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왜 반항하는 가. 넌 내 속에서 영원한 현재를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이 네가 원한 것 아닌가?”
‘나…………, 파 라르고 그라시엘…………. 퓨처 워커……………’
“제기랄, 집어치워!”
신스라이프는 고함을 내질렀다.
메인마스트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발레드와 주블킨은 당황하며 신스라이프의 등을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뱃전을 단단히 움켜쥔 채 상체를 앞으로 크게 내밀고 있었다.
발레드는 그가 투신하려 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다음 순간 신스라이프는 상체를 확 쳐들었다. 고개를 뒤로 꺾어져라 치켜든 신스라이프는 하 늘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래! 넌 파 라르고 그라시엘이고, 사이들랜드의 양치기이고, 23년 동안 몇 개쯤의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여자 다. 그래서? 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 외엔 전부 내가 준 것이다. 내 것을 돌려받겠다는 것이다!’
신스라이프의 손가락들은 어느새 하얗게 변한 채 뱃전의 단단한 나무를 파고들고 있었다. 나무가 부스러지는 소리에 주블킨과 발레드는 크게 놀랐 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며 다가왔지만 신스라이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스라이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신경을 그 내부로 집중하여 파의 대답 을 기다렸다. 파는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시간은…… 누가 멈추는가……………..”
‘누가 너로 하여금 시간을 멈출 수 있게 해줬느냐! 누가 너에게 그런 힘을 줬느냐, 추억이 더 이상 멀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누가 줬느냐!’
‘거절…………한다. 도로 가져가……………’
‘의미를 생각하고 말해!’
신스라이프의 거센 분노는 파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가 막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홱 뒤 로 돌았다.
실수였다. 그의 시야에 주블킨과 발레드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들어온 순간, 그 얼굴들은 서로 뒤섞여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균 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발레드가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그 손이 흉기처럼 보였다. 신스라이프는 비틀거리며 계속 뒤로 물러났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으로 주블킨과 발레드의 얼굴이 서로 반대쪽에서 스며들어 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얼굴들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갑판에 쓰러졌다. 갑판에 구겨지듯 쓰러진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보았다. 회색으로 일렁거리는 하늘. 유백 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기절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신스라이프는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저 질문은 반복될 것이다. 귀찮군. 신스라이프는 조금 전까지 그가 희롱하던 무의식의 세계에 작별을 보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실의 거무튀튀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몸이 가볍게 출렁거렸고 신스라이프는 구토감을 느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목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침대 옆의 벽이었다. 이런. 감각이 엉망진창이군. 신스라이프는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 르네이의 얼굴이 보였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도르네이…………”
“예.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입니다.”
신스라이프는 뭐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냐고 물으려다가 주춤했다. 기절? 아아, 기절했던가.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낯선 감각들이 온몸으로부터 몰려왔다.
이건 뭐지? 신스라이프는 시트 아래로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도르네이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러니까…………, 기절하신 동안 옷수습을 해야 할 일이 좀 있었습니다.”
“똥오줌을 내놓았나.”
“……예.”
신스라이프는 쓰게 웃었다.
“누구야? 재미 본 녀석이.”
도르네이 역시 피식 웃었다.
“저였습니다. 물론 옷을 벗기고 닦기도 했습니다만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들네미 조그마했을 때 기저귀 수발하던 추억이 잠시 되살아나 는 정도였지요.”
“알았어. 옷은 준비되지 않았나.”
“빨래는 해놓았습니다만 여기선 빨래 말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도르네이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선실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화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신스라이프의 바지와 속옷 등이 널려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간단한 동작을, 신스라이프는 조각조각내어 시도해야 했다. 팔이 후들거렸고 허리에서는 둔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도르네이는 신스라이프가 침대 옆으로 다리를 내놓자 점잖게 고개를 돌렸다.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다리엔 아직 힘이 안 들어가는군. 옷을 건네주겠나? 입고 있으면 마르겠지.”
“그러고 싶으시다면. 거의 다 마른 것 같습니다.”
도르네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신스라이프에게 옷가지를 건네고는 다시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옷을 입던 신스라이프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왜 너 혼자뿐이지?”
“지금은 밤입니다. 다들 자고 있을 겁니다.”
“그럼 네가 혼자서 날 간호했다는 말인데, 다른 녀석들이 허락했나? 넌 날 죽이고 싶어 할 걸로 짐작하는데.”
“그래도 전 콜리의 지팡이입니다.”
다부지게 말하던 도르네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모르겠군요. 죽은 프리스트라고 해야 할지. 콜리께로 가지 않고 다시 이 지상으로 돌아왔으니 그분의 지팡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 습니다.”
“콜리에게 기도하게, 신앙을 달라고. 자네들 신의 몽상가들에게는 퍽 어울리는 일이겠지.”
“몽상가?”
“자네들은 꿈의 신을 믿지 않나.”
“아, 예……”
도르네이는 대답하긴 했지만 신스라이프의 설명이 어딘지 미흡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더 이상 말하고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옷을 다 입은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도 가서 눈 좀 붙이게. 난 이제 괜찮으니. 한숨 더 자겠어.”
“그러시겠습니까?”
도르네이는 일어나 테이블 옆에 놓아둔 등불을 들어올린 다음 선실 문을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올리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멈춰 서서는 뒤로 돌았다.
신스라이프의 두 눈이 조용히 도르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르네이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피로하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저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지.”
선실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조롭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도르네이는 왠지 서글픈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스라이프께서는 아마도 이런 현실에서 깨어나길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죽은 자들이 제멋대로 살아나는 현실 말입 니다. 그렇다면 이미 부활을 성취하신 당신이 이렇게 이상한 항해를 하시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짐작을 말해 보거라.”
“이 상황을 타개하시려는 거지요?”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르네이를 쳐다보았다. 도르네이는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에 사용된 의식들과 마법들은 이상한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저 같 은 자가 그것이죠. 그럼 당신은 당신이 살아갈 새로운 나날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이상한 현상들을 타개하려 하실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 니다.”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이 상황이 타개되면, 저는 다시 죽는 겁니까?”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추운 배 위에서 두텁게 옷을 입고 있건만 도르네이의 모습은 쓸쓸하고 황량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등불은 작고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서글픈 눈빛은 잔설을 헤치고 오가는 배고픈 길짐승의 그것과 비슷했다.
신스라이프는 말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모른다.”
“모르신다는 것은……”
“네게 달린 문제다.”
“예?”
신스라이프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미안하지만 불 좀 끄고 나가주게.”
“신스라이프……………”
“그건 자네가 결정할 문제야. 더 이상은 말해 봤자 소용없을 걸세. 좋은 밤 되게.”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시트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도르네이는 당혹감과 이유 없는 슬픔으로 시트 아래의 신스라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이라고 했나? 신스라이프, 당신이 그런 말을…………?’
도르네이는 테이블로 다가가 등잔의 불을 껐다. 선실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도르네이는 등불을 들고 선실을 나왔다. 선실의 문을 닫기 전, 도르네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신스라이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르네이는 조용히 선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