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69화
1569화. 산책은 이런 날에 가는 거란다. (4)
“이런…….”
흑룡왕 적세광의 얼굴이 다소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화산.
애초에 흑룡왕이 이 강북에 온 이유다. 바로 저 화산 놈들을 하나하나 찢어 죽이기 위해서.
그런데 막상 그 화산을 눈앞에 두게 된 흑룡왕의 표정은 생각처럼 밝지 못했다. 상황이 그가 원하던 것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렀단 걸 직감한 탓이다.
“왜, 왜 저놈들이 여기에!”
“무, 물러서지 마라! 그래 봐야 몇 놈 안 되지 않느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사냥꾼이 가장 당황하는 때는, 사냥감이 달아났을 때가 아니다. 곧장 달아날 거라고 여겼던 사냥감이 되레 사냥꾼을 물어뜯으려 달려들 때다.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면야 큰 문제 없겠으나, 난데없이 사냥감이 발악한다면 숙련된 사냥꾼의 목숨마저 앗아 가지 않던가?
남궁세가라는 사냥감을 사냥하다가 등 뒤에서 들이닥친 또 다른 사냥감인 화산을 마주한 수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이를 악문 흑룡왕이 남궁도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을 끌었던 거냐?”
“쿨럭!”
검은 피를 한 바가지 토한 남궁도위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흑룡왕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런…… 그런 사람들……이거든.”
으득.
흑룡왕 적세광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장이다. 누군가를 약탈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데는 누구보다 능숙하다.
그렇기에 남궁도위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수로채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다면, 이곳의 수적들은 강북으로 더욱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되면 다른 양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화산 역시 더더욱 전력을 분산해야 한다.
흑룡왕은 느긋하게 몸을 감추고 기다리다가 수로채를 잡으러 온 화산 놈들을 역으로 잡아먹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화산 놈들은 죽어 가는 양민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할 테니까.
불과 하루다. 하루만 더 주어졌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했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남궁세가가 이곳으로 곧장 돌진해 버린 덕분에 수로채 역시 발이 묶인 것이다.
“……잔머리는 제법 굴린 것 같지만, 그래 봤자 하찮은 수작에 불과하다. 고작 저딴 놈들로 장강의 영웅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흑룡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화산 전체가 이곳에 왔다면, 하다못해 당가라도 함께 도착했다면 상황이 많이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들만으로 수로채를 감당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수로채라면 그렇겠지…….”
“……뭐라고?”
남궁도위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전진해 오고 있는 화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알아.”
남궁도위는 제 발을 꿰뚫고 꽂힌 검을 꽉 잡아 휘청이는 몸을 다잡았다. 그가 억지로 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이걸…… 저 사람들한테 배운 거니까.”
“…….”
“나는……. 나는 그저 내 역할을 할 뿐이야.”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뼈를 스치며 뽑혀 나오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죽기 전에는 안 끝나.”
덜덜 떨리는 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는 남궁도위의 모습에 흑룡왕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비켜라! 개자식들아!”
파아아앗!
조걸의 검은 말 그대로 빛살 같았다.
급히 물러나려던 수적이 그 일검에 꿰뚫렸다. 그러나 조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만 했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적의 수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물론 뚫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늦어.”
귓가에 감정 한 올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하면, 소가주는 죽어.”
조걸은 순간 입을 틀어막는 심정으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사고에게 쌍소리를 할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나도 안다고요!”
하지만 여기서 뭘 더 어쩌란 말인가? 등 뒤에 있는 이들을 이끌면서 나아가는 건 이게 최대…….
“조걸! 윤종! 이설!”
그 순간 백천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붙어라!”
“사숙!”
“뭘 하려는 겁니까?”
“백상!”
“예, 사형!”
백천은 조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백상에게 명했다.
“지휘를 맡아라!”
“사, 사형! 저는…….”
“너는 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해!”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리는 강권에 밀려 버린 백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할 말을 끝낸 백천은 곧장 앞을 응시했다. 이대로라면 흑룡왕이 남궁도위를 죽이고 빠져나가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한다.
남은 남궁세가의 무인들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만, 남궁도위를 잃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대한 빠르게 돌파한다!”
“안 됩니다, 사숙! 너무 위험합니다!”
윤종이 말리려 했지만, 백천은 확고했다.
“말싸움할 시간 없다! 비켜라!”
“이…….”
윤종이 어떻게든 말려 보려 하는 순간, 유이설과 조걸 두 사람이 마치 짠 듯이 앞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핫!”
“오오오오!”
두 사람이 뿜은 붉은 매화가 순식간에 눈앞의 적들을 휩쓸었다.
“아아아악!”
찰나겠지만, 순간적으로 공간이 뻥 뚫렸다. 그곳에 내려선 두 사람은 경쟁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내달렸다.
파아아앗!
두 사람의 공격에 휘말리며 채 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들의 몸을, 백천의 검이 사정없이 뚫는다.
적의 몸뚱이가 쓰러지며 열린 작은 틈. 그곳으로 몸을 비집어 넣은 백천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외쳤다.
“오기 싫으면 뒤에서 지휘를 맡아라!”
하지만 백천의 검에 뚫리며 쓰러지던 수적의 풀린 눈에 순간적으로 생기가 돌아왔다. 마지막 광기이자 발악이다. 온 힘을 다 실어 매서운 경기를 품은 아미자가 백천을 향해 쾌속하게 내질러졌다.
이를 알아챈 백천이 흠칫한 바로 그때.
카앙!
“빌어먹을.”
그 아미자를 단번에 걷어 내고 적의 숨통을 끊은 윤종이 백천의 옆에 붙으며 으르렁거렸다.
“잘난 척 떠들 상황입니까?”
“이 새끼…….”
“그렇게 가고 싶으면 제 등에 딱 붙으십쇼. 못 따라오는 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파앗!
대답도 듣지 않았다. 윤종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쾌속하게 나아갔다.
그의 검이 사방팔방을 향해 동시에 뻗어졌다. 이건 적을 사살하는 검이 아니다. 위협하고 밀어 내는 검이다.
백천에게 단 한 놈도 접근시키지 않겠다는 각오가 어린 검.
그 검을 보며, 백천은 슬며시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부탁한다, 상아!”
“예, 사형!”
백천도 윤종의 뒤로 따라붙으며 전진했다.
굳이 말로 다 나누고 맞춘 적은 없지만, 이들의 목표는 너무도 분명했다.
“흑룡왕!”
백천이 우렁우렁 외쳤다.
세가 불리할 때는 적의 수괴를 노린다. 물론 보통은 적도 바보는 아니기에 쉽사리 목을 노릴 만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흑룡왕 적세광은 분명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다.
남궁도위가 목숨을 걸어 만들어 낸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여기서 흑룡왕을 놓친다면 저놈을 죽이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하아아아아압!”
백천의 검이 새빨간 꽃잎을 그려 냈다.
욱신!
동시에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단전에 엄습했다.
과거에는 숨 쉬듯이 쉽게 선명한 매화를 피웠지만, 이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딘 꽃잎을 그려 내는 데에도 이만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고?’
아무 상관 없다.
강했기에 싸워 왔던 것이 아니니까. 이길 수 있어서 몸을 던졌던 게 아니니까.
싸워야 했기에 싸웠고, 몸을 던져야 했기에 던져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소가주!”
앞쪽에서 조걸의 고함이 들려왔다.
곧 남궁도위가 흑룡왕의 언월도에 밀려 피를 뿌리고 나가떨어지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비켜라, 이 개자식들아!”
그 순간 머리 위로 수십 개의 그물이 터져 나왔다.
“막아!”
“죽이려 하지 마라! 발목만 잡고 늘어지면 된다!”
조걸이 악을 쓰며 검을 위로 내질렀다.
“뻔한 수작을……!”
과거, 그토록 그들을 괴롭혔던 그물이 일검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조걸의 검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날카로워졌다. 이제 백천이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유이설의 검 역시 극에 다다른 유려함을 뽐낸다. 검로를 좇기조차 이젠 쉽지 않다.
하지만 그토록 강한 두 사람도 밀려드는 인파와 사방에서 날아드는 갈고리들을 단번에 뚫어 내기란 어려웠다.
‘이러다간 늦어!’
백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무위가 멀쩡했다면. 그의 검이 과거처럼 날카로웠다면.
저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백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방해쯤은 진즉에 돌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수 없다. 그가 선두에 서는 건 되레 진격을 늦출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무력감이 넘실거리며 차올라 발목을 잡는다.
역시 무리였나. 나약한 이가 외치는 협의란 애초부터 만용에 불과한 것인가.
“이 찰거머리 같은!”
그럼에도 백천은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나아갔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때였다.
“여전히 멍청해. 이쯤 되면 병이로군.”
익숙하되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백천이 뒤를 획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치 면경(面鏡)을 들여다보는 듯 얼굴이 닮은 사내가 어느새 바짝 따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
“무모함을 넘어, 미친 짓거리야. 하지만…….”
진금룡이 그를 스쳐 앞으로 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번만은 그 미친 짓에 동참해 주지. 이번만이다.”
“길을 열겠습니다, 장문대리!”
이송백 역시 단단히 각오를 굳힌 얼굴로 백천의 옆으로 스쳐 갔다.
이송백이 선두를 따라잡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검이 태산처럼 내리그어지며 수적들을 양단했다.
“나는 종남의 이송백이다! 죽고 싶은 이는 나서라!”
커다란 외침이 붉은 피와 함께 솟구친다.
백천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뭐, 뭐야, 너희?”
“원숭이처럼 날뛰지 마.”
“뭐, 이 새……. 아니. 뭐라고요?”
“비켜라! 방해된다!”
백천을 밀친 진금룡이 검으로 흰 눈송이를 하염없이 뿜어냈다.
그 광경을 본 조걸 역시 발악처럼 힘껏 검을 휘둘러 새빨간 매화를 그려 내었다.
눈처럼 흰 검기과 매화 잎처럼 붉은 검기가 뒤섞인다.
과거에는 서로를 향해 쏘아지곤 했던, 그 도무지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검기가 지금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윤종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이 백천의 심경을 완벽하게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감흥에 오래 몸을 맡길 여유가 없다. 백천이 외쳤다.
“윤종!”
“예?”
“길을 열어 다오.”
“…….”
“부탁한다!”
윤종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돌아가는 것보단 앞으로 가는 게 빠르겠네요.”
“…….”
“바짝 붙으십시오, 사숙!”
“그래!”
윤종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여전히 뜻은 다르다. 이게 옳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목표가 같다면,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
“이야아아아!”
단숨에 선두까지 치고 나간 윤종이 주춤 물러나는 수적의 옆구리를 단번에 베었다.
“뭐 해! 종남 놈들한테 질 셈이냐!”
“안다고요! 빌어먹을!”
윤종의 외침에 조걸이 입꼬리를 비틀 듯이 올렸다.
‘그래, 이래야지!’
조걸이 들끓는 눈으로 웃으며 검을 내질렀다.
“뒤처지지 마십시오! 단번에 갑니다!”
땅을 박찬 그가 쏜살같이 앞으로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