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72화
1572화. 고작 여우는 아니지. (2)
“죽어라!”
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광기 어린 수적들의 돌진? 이미 겪을 만큼 겪어 보았다.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절대 강자의, 위장이 뒤틀릴 만큼 강력한 일격? 그거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겪어 보았다.
아무리 흑룡왕이 강하다 해도 항주에서 상대해야 했던 주교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 두 가지가 합쳐진 상황은 처음이다.
“제길!”
백천이 달려드는 수적들을 매섭게 베어 냈다.
그 순간 수적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던 흑룡왕이 비호처럼 날아들어 언월도를 내리쳐 왔다.
백천의 두 눈이 들끓었다.
‘얕보지 마!’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덕에 어렵지 않게 언월도를 막아 내었다. 하지만 아주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쾅!
“컥!”
도가 검과 충돌한 순간, 그 충격이 온몸을 휘저었다. 내부가 말 그대로 진탕되며 비릿한 피가 목구멍으로 역류했다.
만일 백천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이 정도 일격은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으로써는 어려웠다.
“놈!”
그럼에도 백천은 핏덩이를 억지로 되삼키고 섬전처럼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허무하고 애석하게도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흑룡왕은 이미 수적들의 뒤로 다시 몸을 빼낸 뒤였다.
“이 비겁한 새끼!”
조걸은 공격을 지속해 오는 수적들과 그 뒤로 숨어 버린 흑룡왕을 보며 욕지거리를 했다.
“네가 그러고도 흑룡왕이냐!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놈!”
“……그러니까 사파 나부랭이겠지. 바랄 걸 바라라.”
“사파라고 다 저 새끼 같은 겁쟁이는 아니었다고요!”
조걸과 윤종의 필사적인 격장지계(激將之計).
어떻게든 상대를 흥분시키려 했지만, 정작 흑룡왕은 먹이를 살피고 노리는 뱀 같은 얼굴로 그저 조걸을 응시할 뿐이었다.
언제라도 빈틈을 보이면 단번에 쇄도해 독니를 목에 박아 넣을 것처럼.
“……빌어먹을.”
조걸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간다.
상황이 바뀌었다.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수적이라는 사냥개들 뒤에, 노련한 사냥꾼이 버티고 서서 시위를 겨누고 있다.
‘다짜고짜 뛰어들 일이 아니었나?’
머리가 자꾸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평소보다 다소 거친 불호 소리와 함께, 혜연이 황금빛 불광을 내뿜었다.
백보신권. 거리를 격하여 상대를 타격하는 데는 이 이상 가는 게 없다고 여겨지는 소림의 절기!
하지만 흑룡왕은 그 금빛 권력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대신 능수능란하게 몸을 틀며 권을 피해 버렸다.
“달아날 수 없소!”
파아아앗!
그 정도야 이미 예상했다는 듯, 혜연은 곧장 쏘아진 살처럼 흑룡왕에게 질주했다.
순간, 흑룡왕이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던 수적을 덥석 잡아 혜연에게로 집어 던졌다.
“간악한……!”
혜연이 이를 악물고 날아드는 수적을 밀어 내려는 순간이었다.
콰득!
새파랗게 질린 수적의 가슴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흑룡왕의 언월도였다.
수적을 던져 시야를 차단하며 그 몸을 뚫어 혜연에게로 도를 내지른 것이다.
‘뭣……?’
지독한 일격이다. 대체로 침착한 혜연조차도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언월도가 혜연의 가슴에 박혔다.
콰드드득!
“스니이이이이임!”
놀란 조걸이 비명처럼 외쳤다.
뒤로 밀렸던 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명성 또한 허명이 아니라, 그 와중에 양손을 교차하여 가슴으로 파고든 언월도를 조여 내고 있었다.
덕분에 이미 심장을 갈랐어야 할 언월도가 고작 피륙을 뚫는 정도로 멈춰 섰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혜연은 양 손목에 깊은 자상을 얻었다.
“흥!”
휘이이잉!
흑룡왕이 언월도를 회수하며 창대를 횡으로 휘두르니 여기에 얻어맞은 혜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가슴이 뚫린 채 절명한 수적의 시체가 그 자리에서 조각 나며 사방으로 뿌려졌다.
“흑룡와아아아아앙!”
크게 분노한 이송백이 외쳤다. 눈에 뻘겋게 핏줄이 돋아났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세상의 누가 자신의 수하를 내던져 미끼로 쓰고, 상대의 피륙에 상처를 내기 위해 베어 버린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아니. 적어도 사람의 탈을 쓴 이라면 절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짓거리다.
이송백의 분노를 가득 실은 검이 하늘에서 땅으로 벼락처럼 내리그어졌다.
그런 이송백을 막아선 건 흑룡왕이 아니었다.
서걱! 콰드득!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흑룡왕을 노리는 이송백의 옆구리로 수적들의 긴 작살이 일제히 날아든 것이다. 번뜩이는 날들은 비정하게 이송백의 피부를 가르고 근육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송백의 검과 흑룡왕의 언월도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결과야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과 함께, 이송백의 몸뚱이는 흡사 돌멩이처럼 땅에 처박혔다. 그 여파에 휩쓸린 수적들 역시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흑룡왕은 다시 주변을 빠르게 살피더니 수적들의 뒤로 몸을 물렸다. 흡사 귀신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를 본 백천은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애초에 흑룡왕 적세광은 그들보다 강했다. 강한 자가 자신이 원할 때만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가.
‘지원은?’
없다. 남궁도위를 제외한 남궁세가는 버티는 게 고작이다.
그리고 심지어 백천을 비롯한 이들이 끌고 온 모두가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하다. 백상이 분전해 주고야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당장은 어렵다.
그 말인즉,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 저 흑룡왕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백천의 얼굴에 처음으로 묘한 감정이 드러났다.
‘……아니,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가 한 선택은 옳다.
하지만…… 정말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나? 이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저 상대를 우습게 본 것은 아닌가?
백천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흑룡왕은 강하다.
무력만을 두고 논하는 게 아니다.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냉정했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오히려 천우맹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강호에서 논하는 ‘강함’이라는 게 일신의 무위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백천은 이 모든 일을 강행했다.
흑룡왕쯤 되는 이라면 그 노련함과 영리함이 감히 이쪽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을 알았으면서도.
“더 오지 않을 셈인가?”
그 증거로 흑룡왕은 조금도 초조한 기색 없이 이쪽을 응시해 오고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자신에게 유리해진다는 걸 완전히 아는 자의 얼굴이다.
여우.
그 한마디가 백천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호랑이의 위세를 등에 업은 여우. 호가호위(狐假虎威).
고작 여우 새끼…….
백천이 제 검을 콱 움켜쥐었다.
그때, 옆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남궁도위를 등에 업은 조걸이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노, 놈도 분명히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럼 지금쯤이면…….”
우드득.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저 안일함에 화가 난 게 아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많은 수적이 몰려오는 상황이다.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될 상황.
그럼에도 백천은 검을 멈추고 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제 속내를, 바로 조걸의 저 말이 일깨워 주고 말았다.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청명이 오기를. 평소처럼 위기를 해결해 주기를.
그래. 호랑이를 기다리는 여우 새끼처럼 말이다.
흑룡왕의 말이 맞다. 호랑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여우 새끼일 뿐이다. 호랑이의 위세가 제 것인 양 착각하는, 멍청하고 오만한 여우.
우드득.
밀려드는 자괴감과 혐오감을 이기지 못한 백천이 검을 콱 움켜쥐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안 온다.”
“사형!”
윤종이었다.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앞으로 나선 그가 흑룡왕에게 검을 겨누었다.
피로 입가가 붉게 물든 유이설 역시 평소보다 더 강하게 말하며 윤종의 옆에 섰다.
“오게 해서도 안 돼.”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흑룡왕에게 쏟아졌다. 외려 그 눈빛에 움찔한 것은 백천과 조걸이었다.
“아미타불…….”
혜연 역시 고개를 주억이며 걸어왔다.
“청명 시주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역시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이들은 아닙니다.”
윤종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응시했다. 이렇다 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빛이었다.
백천은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윤종의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게 정말 네가 원한 상황이냐고. 능력도 잃은 주제에 무작정 뛰어들어서 다른 문도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결국은 그 목숨들까지 의미 없이 던지게끔 하는 게 진정 옳은 일이냐고.
물론 이게 그의 내면에서 죄책감이 보내는 목소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종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한마디였다.
“사숙.”
“……윤종아, 나는.”
“명령을.”
백천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조금 멍해졌다.
윤종의 눈에 어린 건 질책이 아니었다. 그건…… 굳건한 믿음이었다.
“……중구난방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상대가 여럿이서 싸우려 든다면, 우리 역시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
“화, 확실히!”
유이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걸 역시 격하게 동조했다.
“장문대리의 지시라면 신뢰할 수 있습니다.”
흑룡왕의 도에 튕겨 나갔던 이송백 역시 입술 새로 흐른 피를 닦으며 백천의 옆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을 새긴 진금룡 역시 반대편으로 와 섰다.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백천은 그 모든 움직임과, 저마다의 얼굴에 어린 신뢰를 멍하니 보았다. 두 눈이 짧게 떨렸다.
고작 여우 새끼.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잘난체하던 멍청이.
하지만 이들은 그런 그를 믿고 있다. 그들을 이 위기로 몰아넣은 원흉을 의심 없이 믿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는 어찌해야 하는가.
‘……애초부터 정해져 있잖아.’
그가 해야 할 것. 그가 하려 했던 것.
백천이 단번에 손을 뻗었다. 조걸의 몸을 무겁고 더디게 만드는 남궁도위에게로.
“사숙?”
“이리로.”
백천이 남궁도위를 넘겨받아 업었다. 품 안의 붕대까지 꺼내 아예 제 몸에 칭칭 감아 고정했다.
“조걸! 윤종! 항상 하던 대로다. 길을 열어라!”
“예.”
“맡겨 주십시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애초에 조걸과 윤종은 둘이서 하나다.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싸울 때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스님! 이 소협!”
“말씀하십시오, 시주.”
“예, 장문대리!”
“놈은 일격에 모든 힘을 싣습니다. 앞의 두 사람이 길을 열어 내면 그 공격을 한 번만 완벽히 막아 주십시오!”
“예!”
“반드시 해내지요.”
백천의 시선이 유이설의 등에 꽂혔다.
“사매. 놈의 뒤를 노려! 언제든!”
“알겠어요.”
유이설이 담담히 답했다.
“나는?”
백천이 슬쩍 진금룡을 돌아보았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본 순간 백천의 입에서 퉁명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엄호나 해라, 멍청이.”
“……여기서 살아 나가면 다음은 너다. 기억해 둬라, 진동룡.”
분노 어린 진금룡의 목소리에 백천이 피식 웃었다.
그가 검을 단단히 움켜쥐며, 여전히 신중히 움직이는 흑룡왕을 주시했다.
기회가 여러 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이번 한 번뿐일 것이다. 아마 이번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남은 건 정말 한심한 여우로 죽는 것뿐.
아니……. 여우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그가 배운 건 범이 되는 방법이 아니었다. 여우가 아닌 살쾡이라도 싸울 수 있는 법이다. 범이 될 수 없다면 범을 물어 죽이는 여우가 되면 그만이다.
뚫어지게 응시하자 보인다.
언월도의 끝이 흑룡왕의 호흡에 따라 조금씩 일렁인다.
위로. 아래로. 또 위로. 그리고…….
“지금!”
백천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걸이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모두가 이끌리듯 그 뒤로 따라붙었다.
자욱한 피비린내, 얼굴을 달구는 열기, 심장을 짓이기는 듯한 압박감, 그리고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살기까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조걸의 검이 뻗어졌다.
제 검을 잃은 백천이 얻게 된, 조걸이란 이름의 진정한 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