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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74화


1574화. 고작 여우는 아니지. (4)

검 끝이 둔탁하게 무언가를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백천의 전신을 전율로 가득 채웠다.

우드득.

강철처럼 단단하고 아교처럼 질긴 육체를 정련된 한철검이 기어이 뚫었다.

거인의 육체를 갈라 낸 자신의 검을 멍하니 보던 백천이 문득 시선을 위로 들었다.

흑룡왕, 그 지긋지긋한 이가 마지막 순간에 지을 표정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천이 본 건 죽음을 앞두고 체념한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처를 입고 날뛰려 하는, 맹수의 불타는 눈빛이었다.

콰아아앙!

백천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크하……. 하아앗!”

우드득!

흑룡왕 적세광이 언월도를 쥔 손으로 배에 꽂힌 백천의 한철검을 움켜잡았다. 부러뜨릴 심산이었지만 검이 잘 잡히지 않고, 한철검이니 뜻대로 대번에 부러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배 속만 더 헤집었다.

결국 울분을 토해 낸 흑룡왕이 제 살에 박힌 검을 단숨에 뽑았다.

파핫!

검게 뚫린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 쏟아졌다. 뽑아낸 검을 거칠게 내던진 흑룡왕이 증오와 원독을 실어 주위를 에워싼 이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감히 이 애송이들이…….”

칼끝에서 사는 자, 언제고 제 목에 칼이 박힐 날을 각오해야 하는 법.

흑룡왕 적세광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믿는 그런 얼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애송이들에게 둘러싸여 생과 사의 갈림길까지 몰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군들 생각할 수 있었으랴.

“으으…….”

콰득.

흑룡왕은 명치에 난 상처를 움켜잡고 짓뭉개듯 눌렀다.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지혈 방식이다. 지금은 침착하게 점혈하고 상처를 틀어막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흑룡왕의 눈가와 흰자위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내가! 이 적세광이…… 이런 곳에서 죽을 것 같으냐아아아!”

노호성을 터트린 그가 언월도를 단숨에 휘둘렀다. 뿜어져 나온 시커먼 묵기(墨氣)가 나가떨어진 백천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묵기가 백천을 덮치기 직전, 비조처럼 날아든 유이설이 백천의 어깨를 잡고 몸을 굴렸다.

콰아아아아앙!

“이 새끼가!”

“침착해라, 조걸!”

조걸이 이를 악물고 흑룡왕에게 달려들려는데, 땅에 나뒹군 백천이 고개를 들고 급히 외쳤다.

“부상을 입은……. 쿨럭! 쿨럭! 급한 건 놈이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섣불리 달려들어서 기회를 주지 마라!”

백천의 말에, 화산의 검수들과 혜연이 먼저 반응했다.

애써 흥분을 내리누르고 흑룡왕의 사방을 더욱 촘촘히 포위했다. 백천의 말대로 흑룡왕이 절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듯이.

“흐아아아!”

흑룡왕의 언월도가 다시 한번 커다란 묵기를 내뿜었다.

“아미타불!”

혜연이 쏘아 보낸 거대한 권력이 날아드는 묵기를 들이받아 그 방향을 틀어 내었다. 흑룡왕이 전력을 다해 내뿜은 기운임에도 말이다.

콰아아앙!

그가 날린 기운이 땅에 처박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 흑룡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공격이 막혀서가 아니다. 내뿜은 기운의 위력이 형편없이 약해져서도 아니다.

그의 공격을 막아 낸 이들이 여전히 침착하게 그를 포위하며 압박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흥분을 가장하여 빈틈을 만들려 했건만, 조금도 말려들지 않는다. 이놈들은 이제 노련한 사냥꾼처럼 대응해 오기 시작했다.

“이…….”

입술을 짓깨물던 흑룡왕이 외쳤다.

“잘난 정파라는 놈들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뻔한 도발이다. 반응해 줄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격장지계다.

그 말을 들은 조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핫. 듣고 보니 꽤 재미있는 상황이네.”

“뭐, 뭐라? 이놈!”

입은 웃고 있으나 그의 눈은 차분하기만 했다.

“예전이었으면 그 말에 흥분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 게 얼마나 치기 어린 생각인지 수로채 덕분에 뼈저리게 배웠다.”

그렇게 말한 조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동의를 구했다.

“안 그렇습니까, 사형?”

“……나는 아직도 그물만 보면 흠칫흠칫 놀란다. 그때 이후로는 물가에도 안 가.”

윤종의 덤덤한 말에 조걸이 킥킥대며 웃었다. 입은 웃음을 머금되, 역시나 눈은 흑룡왕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다.

장강에서 그들은 사무치게 깨달았다. 전장에서 비겁을 논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일신의 무학을 과신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포위당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도 말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 지금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너로부터 배운 방식이다, 흑룡왕.”

“…….”

“그러니 포기해라. 넌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

적의와 조롱을 담아 이를 드러낸 조걸과, 차분하게 흑룡왕을 주시하는 윤종, 무감하게 먹잇감을 보는 듯한 유이설, 착잡한 표정을 지은 혜연.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백천의 의지 가득한 얼굴까지.

그 모두를 시야에 담은 흑룡왕 적세광의 표정이 점점 변해 간다.

심지어 이송백과 진금룡까지 힘겹게나마 몸을 일으켜 합류해 오고 있었다.

적세광의 얼굴에 이글거리던 분노가 서서히, 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 아무리 많은 수하가 있다고 해도, 눈앞의 이놈들을 다 죽이고도 남을 수로채의 전력이 여전히 건재하다고 해도, 흑룡왕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다는 걸.

주변을 메우고 있는 잡것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의문이 당연하게도 짙어졌다.

‘왜……?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냐! 왜!’

지금쯤이면 도달했어야 한다. 수하들을 끌고 움직이는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들. 이곳에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수로채의 진짜 간부들이.

그런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못 들었을 리 없을 텐데?

“으…….”

언월도를 쥔 흑룡왕의 손이 잘게 떨렸다.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전신을 뒤덮은 상처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건 역시 저 허여멀건 놈의 검에 명치를 꿰뚫리며 입은 상처다.

금이 간 병에서 물이 새듯이 내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는다. 검이 명치를 뚫으며 단전마저 긁어 놓은 게 틀림없다.

달아날 수 있을까? 이곳에서?

흑룡왕은 자신의 애병을 꽉 움켜잡았다. 대범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 순간, 윤종이 살짝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흑룡왕을 압박했다.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나려던 흑룡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방식……이라.”

그의 두 눈에서 이내 흉흉한 기세가 넘쳐흘렀다.

“내 방식이 뭔지나 아느냐,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콰아아앙!

흑룡왕이 백천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나는 흑룡왕이다! 죽더라도 혼자 죽지 않는다! 이 개 같은 화산 놈들!”

검을 놓친 백천은 제 실력을 낼 수 없다. 흑룡왕이 희생자를 택해야 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선택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이들 역시 이미 흑룡왕의 선택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뻔한 짓을!”

조걸이 기다렸다는 듯 백천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검이 흑룡왕을 향해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크하아아압!”

하지만 흑룡왕은 제 몸을 향해 쏘아지는 검을 보고도 물러서기는커녕 미친 황소처럼 더 빠르게 달려들었다. 마치 죽기를 작정한 사람인 양 조걸을 들이받았다.

조걸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뭣?’

푸우욱!

조걸의 검이 흑룡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콰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당황한 조걸을 흑룡왕이 곧장 창대로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조걸이 피를 내뿜으며 나가떨어졌다.

“커헉!”

흑룡왕이 거칠게 숨을 뱉으며 기침했다. 선지피가 한 사발 넘게 쏟아졌지만,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가 다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백천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멈춰!”

다급하게 움직인 유이설과 윤종이 흑룡왕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두 핏줄기가 허공에 그어진다. 뼈를 끊고 살을 도려내는 매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룡왕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장문대리!”

이송백과 진금룡이 백천과 남궁도위의 앞을 막아선 순간, 흑룡왕의 언월도가 전력을 다해 부웅 휘둘러졌다.

기이이이이잉!

“우으아아아앗!”

힘이 모이며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흑룡왕의 팔이 부풀었다. 그렇게 모인 힘이 언월도 끝에서 일거에 방출되었다.

콰아아아아아!

양발을 거목의 뿌리처럼 땅에 박아 넣은 이송백과 진금룡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날아드는 묵기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쿠우우웅!

급히 짜낸 내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상대의 힘이 너무도 강대했다. 밀려오는 묵기를 채 다 버티지 못한 두 사람이 속절없이 뒤로 또 뒤로 밀려난다.

“아아악!”

그렇게 마지막까지 부득부득 버티던 둘은 한계까지 당겨진 줄이 마침내 끊기듯 묵기에 휩쓸렸다.

콰당탕!

백천과 남궁도위 역시 튕겨 나간 두 사람과 얽히며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백천이 남궁도위를 제 몸에 묶어 두었던 끈이 끊어져 버렸다. 축 늘어진 남궁도위의 몸이 흡사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뒹굴었다.

흑룡왕은 이제 광기와 흉포한 기세를 여과 없이 내보이며 발작하듯 공격해 왔다.

“죽어라아아아아앗!”

“장문대리이이이이이!”

다급해진 혜연이 혼신의 힘을 실어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흑룡왕 적세광, 살기를 포기한 것처럼 미쳐 날뛰던 그가 혜연의 권력이 발출된 순간 시선을 돌려서 그 권력을 똑바로 응시하는 모습을.

없다. 그 눈 어디에도 광기는 없었다. 흥분한 기색 역시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얼음장처럼 차게 가라앉은 눈빛뿐이었다.

“다, 당했……!”

쿠우우우우우웅!

혜연이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권력에 얻어맞은 흑룡왕이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땅에 나뒹굴고 있는 백천과 그 무리 위를 훌쩍 넘어서.

“안 돼에에에에에에!”

윤종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막지 않는다.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흑룡왕은 제 목숨이 반쯤 끊긴 상황에서도 끝끝내 제가 살아날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아니나 다를까, 십 장이 넘게 튕겨 나간 흑룡왕은 땅에 처박히기 무섭게 하나 남은 손으로 대지를 후려치듯 밀어 냈다.

칠공으로 피를 꾸역꾸역 흘리면서도 반쯤 기듯이, 반쯤 구르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살아남는다!’

팔다리가 끊겨도 좋다.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 지독한 강호에서 그가 배운 단 한 가지. 그건 살아남는 이에게는 언제든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는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죽음이건, 얼마나 큰 영광이건 간에 말이다.

어떤 기회든, 결국 살아 있는 자만이 손에 넣을 수 있다.

‘살아…….’

그의 다리가 휘청휘청 땅을 디뎠다. 많이 지친 데다 큰 부상까지 입어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는 몸뚱이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 일으켜 세웠다.

거대한 육체를 기어이 반듯하게 세우고 나니, 눈앞에 세상이 넓게 열렸다. 이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는 수하들이 보인다.

숨통이 트였다. 피비린내 대신 삶의 냄새가 풍겨 왔다.

이제 이대로 달려 나가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 등 뒤에 꽂힐 검격 따위야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다.

“으으……. 으아아아아악!”

억눌려 있던 감정을 일거에 토해 내며, 흑룡왕이 힘껏 땅을 박차려는 순간이었다.

움찔!

그의 몸이 대뜸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련했고, 이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심지어 백천을 비롯한 화산 일행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흑룡왕의 등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흑룡왕을 향해 달려가던 수적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환희로 가득했던 흑룡왕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가시는 모습을. 그리하여 당황과 좌절, 절망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너, 너…….”

흑룡왕은 앞에 펼쳐진 대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그가 보는 것은 대지가 아닌, 그 대지를 채우고 있는 수적들도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였다.

직감할 수밖에 없다.

이 너머에 있는 것은 삶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피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죽음이다.

“으……. 어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채주들이 오지 않는지. 어째서 그가 이런 지경까지 내몰렸는지.

저 환해 보이는 세상의 끝에 누가 서 있는지.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흑룡왕이 벼락처럼 뒤로 돌았다. 공포에 질린 눈이 갈 곳을 모르고 이곳저곳을 오가다 쓰러져 있는 이들에게로 시선이 닿았다.

콰아앙!

땅을 박찼다. 이곳에서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저기에 있다.

“이, 이리……!”

그의 하나 남은 손이 언월도까지 팽개치며 내뻗어졌다. 반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백천, 그의 목을 향해. 그곳에 자신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이리 와! 이리!”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흑룡왕으로서의 위세, 지켜야 할 품위까지.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삶을 갈구하는 비참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모습은 처절하고, 동시에 생생했다.

“아아아아아아!”

짙은 갈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규하며 흑룡왕이 몸을 날렸다.

손가락 마디 끝까지 펼쳐진 손이 마침내 백천의 목에 가 닿았다.

‘됐…….’

푸우우우욱!

그 순간, 머릿속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

손이 멈추었다. 백천의 목을 단 한 치 앞둔 허공에서.

흑룡왕은 망연하게 백천을, 제 손을,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한 방울 피를 머금은 서늘한 장검이 보였다.

그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낯익은 검이었다.

주륵.

흘러내린 핏물이 검신을 적시고 이내 검을 쥔 검붉은 손마저 선명한 붉은 색으로 물들여 갔다.

흑룡왕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곳은 그 검을 잡은 이의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너…….”

짓뭉개진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흑룡왕은 알 수 있었다. 저 뒤틀림은 분명 ‘미소’라 불러야 할 것이다.

“내…… 손에…… 죽는다 했…었지.”

뒤틀린 입가가 벌어지며 피에 젖은 이가 드러났다.

섬뜩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환한 웃음이었다.

“남궁…….”

“혈채는…… 받아 냈다. 적…세광…….”

말없이 남궁도위를 바라보던 흑룡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인다.

아무리 장강을 제 세상으로 만든다 해도 결코 피해 낼 수 없는 창천(蒼天)이.

“제…….”

흑룡왕의 거대한 몸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진다.

“……기랄…….”

쿠웅!

세상을 호령하던 일세의 거인답지 않은, 실로 하찮은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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